-
-
10% 적은 민주주의
가렛 존스 지음, 임상훈 옮김, 김정호 추천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책의 추천사(김정호 교수)에도 나오듯,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의문을 제기하는 건, 지난시절 왕의 존재이유, 존엄, 정당성에 도전하는 만큼이나 "불경"스럽게(p6) 다들 받아들입니다. 과거에는 "민주역적"이란 말도 종종 쓰곤 했는데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게 체제, 사회의 절대 전제가 되어야 하며, 민주주의 외에 다른 어떤 시스템도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합의(민주주의의 구체적 작동 방식에 대해서는 설령 이견이 있을망정)가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천사를 쓴 김정호 교수는 "민주주의 과잉시대(p8)"를 사는 우려를 표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표현도 오해받기 딱 좋습니다. 민주주의에 일시적 오용, 오도가 있을망정 과잉이 있을 수가 있냐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원리가 무절제하게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역시 추천사에서는 한국은행총재와 금통위 위원을 두고, 민주적으로 선출할 때 운용이 곤란해지는 예로 듭니다. 문명 사회에서는 전문가의 영역이 존중되어야 하며, 외견상 바로 판단하기 어려운 응급환자를 치료할 때 문외한들이 민주주의랍시고 모여 "다수결"로 수술 방향, 방법을 결정해서는 큰일나는 이치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사법절차에 민주주의를 무제한 도입하면 이는 인민재판(p7)으로 타락할 뿐이라고도 합니다. 플라톤은 이를 일러 중우정치의 폐단이라고 일찍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려 깊지 못하고 목소리만 큰 사람, 논리고 이성적 판단이고가 없고 비뚤어진 자기 감정만 따라 징징거리며 폭주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비슷한 패를 모아 저급한 선동을 통해 자기 의사를 관철하는 사회는 이미 치유될 가망이 없는 중병에 걸린 공동체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확실히 요즘은 (그 표현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과잉의 시대"가 맞습니다.
1980년대에 레이건 행정부를 지배하다시피했던 경제정책기조를 뒷받침하는 원리 하나가 래퍼 곡선입니다. 매우 직관적인 모습을 띠고, 아주 상식적이고 솔깃한 결론을 간단명료하게 주장하던 터라 인기도 얻고 반발도 그에 못지 않게 크게 샀었습니다. 세율을 필요 이상으로 올리면 세율이 낮았을 때보다 오히려 세수가 감소한다는 결론인데, 사실 이런 말은 맞다고도 틀렸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이 틀림없이 들어맞는 경우도 많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저 경제학적 결론에 찬성하건 그렇지 않건 무관하게, 일정 선을 넘으면 오히려 안 한 만도 못한 역효과가 난다고 하는 그 구조상 레토릭은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습니다.
p48에서 이 책 저자 가렛 존스 교수는 로버트 배로 교수(이분은 하바드에 계신데, 노벨상을 받은 로버트 루카스 교수 등 시카고 보이즈와 결론을 함께하죠)의 1996년 연구를 인용하며, "민주주의의 지복점은 상당히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라는 그의 놀라운 결론을 소개합니다. "민주주의의 수준이 낮을 때는 조금만 민주주의가 발전해도 경제수준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면 경제성장률은 훨씬 낮아졌다." 여기서 지복점(至福點)은 bliss point가 그 원어이며 한국의 거의 모든 경제학 교과서에서 저렇게 "지복점"으로 번역들을 합니다. 혹은 요즘 저널리즘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골디락스"라고 해도 어느 정도 통합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최적의 균형을 찾자면 그만큼 중용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만 같은 민주주의에,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이 있다는 결론은 충격적입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연구 방향을 조금만 달리하고 표집을 조절해도, "지나친 민주주의는 경제 성장을 늦추거나 퇴보시킨다"는 결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책에서도 그 점은 인정(p50:2)합니다. 래퍼 곡선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엄격한 경제실증도구라기보다 하나의 정치적, 문학적 비유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이 개념은 저 뒤 p208에서 비판적으로 리뷰됩니다.
저자는 다시 존스와 올켄의 연구를 인용(p55)합니다. 후주(p344)에 보면 이는 그들의 2005년 발표논문이 그 출처입니다. 흥미롭게도 독재자가 죽으면 그 나라의 경제성장은 크게 요동치지만, 민주주의 리더가 죽은 후라면 별반 변동성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결론, 혹은 전제를 다시 강조합니다. "민주주의의 10% 하향은 이미 고도의 민주주의를 누리는 국가에만 제언될 뿐이며, 독재의 폐단에 신음 중인 경우엔 해당 사항 없다"는 취지입니다.
민주주의와 평화는 그 향유의 정도가 비례할까요? 아니면 평화와 자유의 상관관계는 어떻습니까? 민주국가는 대체로 다른 민주국가와 다양한 공식, 비공식의 채널(p38)을 유지하고 있기에, 내심으로는 불필요한 전쟁, 전쟁터에 자신의 자녀들을 보내고 싶지 않은 유권자들이 어떻게든 평화적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고 또 이는 대체로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독재국가와의 충돌에 있어서는 전쟁에 돌입하기 쉬운데, 이 부분은 연구 출처가 책에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의 사례 하나를 지나치게 일반화한 듯합니다. 이념의 방향성만 반대일 뿐 똑같은 독재국가, 전체주의였던 소련과는 결국 미국이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또 1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제정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독일 제국 등은 많은 전쟁 위기를 노련한 외교술로 넘긴 적이 많았는데 황제가 다스렸던 이들 국가를 민주주의로 보기는 힘들죠. 다만 독재자가 체제 통솔을 위해 인위적으로 전쟁을 유발, 도발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겠습니다.
책에는 짐 뷰캐넌과 고든 털럭의 연구도 소개됩니다. 이 두 분은 우리 한국에도 예전부터 잘 알려진 공공선택이론의 개척자(p59)로 불리는 학자들입니다. 특히, 고든 털록은 책 저 뒤 p201 같은 데서 다시 등장하는데 저자와 개인적으로 각별한 연이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여튼 이 책에서 인용되는 범위 안에서 그들 연구 분야의 핵심은, 정치인이 남발하는 선심성 공약과 소모적인 쇼맨십이 과연 민주주의의 건강성과 사회 체제의 생산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사실 저런 건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서 양념처럼 꼭 끼곤 하며, 아무리 위선적이고 속이 들여다 보인다고 해도 무작정 금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임기가 한정된 국회의원은 비록 대리가 아닌 대표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무기속위임자이긴 하나, 임기말에는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의제의 존재 의의는 포퓰리즘, 대중영합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대의명분에 따른 의사결정을 하라는 것인데,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이런 풍조는 점점 사라져가며 저급한 대중 선동가가 오히려 더 득세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수준 이하의 인물들이 인기에만 집착하여, 기억력 나쁜 대중을 향해 말도 안되는 공약을 남발하니 의회에서 합리적인 결론도출보다 진영 간 극한 대립만 되풀이됩니다(21세기 들어 미국도 마찬가지로, 완전 갈데까지 간 모습을 보이죠). 우매한 대중의 싸움을 말려할 지도자들이, 자질과 자격이 부족하다 보니 지네들끼리 더 볼썽사납게 싸워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을 대표로 국회에 보낸 선거구민들의 수준도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검은 이익을 위해서는 기막힌 협력을 유지하는데, p248에 나오는 로그롤링 같은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본문 중 "미리엄"은 "메리엄"이 맞겠습니다.
그러면 대표자들의 임기를 늘리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저자는 이런 의문에 대해 책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답을 내어놓는 편인데 주된 논거는 달 보와 로시의 연구입니다. 특히 후자는 아르헨티나의 정치학자인데 20세기 후반 워낙 많은 고초를 겪은 나라이기도 한지라 그 결론이 더욱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아르헨티나야말로 수준 낮고 부패한 저질 군부 독재자들(비델라, 갈티에리 장군이라든가)에 의해 모진 시기를 통과해 왔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정파 간의 극한 대립, 민주화 리더들의 한심한 무능 등으로 인해 여전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수준이 아직 낮은 나라에도, 민주주의 절차의 일부 과잉이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돈을 찍어내는 능력(p82)." 물론 돈을 제멋대로 찍어내는 걸 가리키지 않으며, 오히려 미국처럼 기축통화를 운용하는 나라에서는 어느 시점에 얼마만큼이나 돈을 찍어내야 할지 그 판단의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연준 의장의 재량은 미국 대통령의 권위를 간혹 능가하기도 하며, 실제로 제롬 파월은 트럼프에 의해 임명되었지만 그의 강요를 자주 무시해 왔으며 미묘한 시기에 거시경제를 핸들링하는 그의 수완은 민주, 공화 불문하고 찬탄의 대상이 됩니다. 쑹홍빙의 <화폐전쟁>에서는 연준이 민간인들로 구성된 점,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는 점 등을 비난하지만, 이 책에서 잘 증명되듯 현재 미국 시스템 중에 그나마 잘 운영되는 곳은 연준뿐입니다. 저 뒤 p214에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유명한 말, "국가의 채권자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다."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국가 재정 정책, 화폐금융정책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로 하여금 직접 관장하게 하지 않는가? 대중은 전문가의 능력을 바르게 평가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3장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추천사를 쓴 김 교수가 중앙은행을 특히 언급한 것도 아마 비슷한 심리적 배경 아니었을까 제 맘대로 추측해 봅니다. 중앙은행이 정치에 휘둘리고 대중의 변덕스러운 여론에 그대로 노출되면 나라는 마치 말기 원나라처럼 대혼란에 빠지는 겁니다.
아무래도 어떤 민주주의 국가건 간에 사법부의 독립은 미묘한 이슈입니다. 예전 어떤 미국인은 한국에서의 재판을 거부하며 "배심원제가 없는 재판이 과연 재판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지만, 미국처럼 노련한 판사가 배심단을 잘 리딩하지 못한다면 저 추천사의 어느 구절대로 인민재판에의 타락을 면할 수 없습니다. 감정에 들뜬 비이성적인 군중이 팩트체크도 거치지 않은 채 "죽여라!" 같은 선동에 몰려 유무죄를 함부로 판단하는 꼴불견을 상상해 보십시오. p196에는 에피스토크라시, 즉 현명한 이들의 정치라는 서양 고전 시대 이래 내려온 유명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미성숙한 이들에게 분에 넘치는 권한을 줘 봐야 남들도 자신도 똑같이 불행한 운명에 빠뜨릴 뿐입니다.
택시운전면허는 어느나라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이 면허는 뉴욕 같은 데에서 특히 "메달리온"으로 표창되는데, 이게 거래의 대상이 되며 값도 등락을 거듭한다는 게 특이하죠. 택시기사의 기득권을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진입장벽을 낮출 것인가는 매우 미묘한 문제이고 해결책 도출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우버 등 공유경제 산업과의 충돌이 새로 일어나기도 하죠. 어느 나라건 "신뢰보호"라는 원칙은 헌법 레벨이며, p203에도 나오듯 "grandfathering(기득권 인정 입법화)"는 오히려 정의에 부합합니다. 이 용어는 할리웃 고전 <대부 2>에도 상원의원 기어리와 주인공 마이클 콜리언(코를레오네)의 대화 중에 언급됩니다. 그렇다고 경제의 활력을 위해서라도 무작정 진입 장벽을 높이는 게 바람직하지는 않은데, 이런 게 민주주의 원칙을 무분별하게 적용하여 여론에 휘둘리게 할 일만도 아닙니다.
"국가와 정부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정부는 경제를 더 잘 운용한다(p221)." 선거로 표현되는 대중의 평가가 이런 장기적이고 고차원적인 이슈에 항상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정부의 경제정책이 유효하게 운용되는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재는 척도는 예를 들면 피치나 S&P처럼 신용등급을 매기는 기관에 맡기는 게 낫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권력은 높은 신용등급에서 나온다(p230)." 정부와 체제가 무너지는 건 악정이나 폭주보다, 경제적 신용을 잃었을 때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쇄국을 해서 실각한 게 아니라, 당백전의 무분별한 유통을 강요하여 경제주체에게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적 인기보다 중요한 게, 경제의 실물과 그 표상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며 국민의 생존과 번영을 지탱하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p150에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직전 행했던 그 유명한 연설이 인용됩니다. 이는 저자가 "감독관 함락 이론"의 의의를 설명하는 맥락 중에 나옵니다. 아마 이 연설(문 인용)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할 텐데, 유명한 고전 <파워 엘리트>(라이트 밀즈 著)에도 "군산복합체"를 설명하며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J K 갤브레이스 교수의 "대항적 권력" 이론도 나오는데, 이분은 유머러스한 고전 <불확실성의 시대>의 저자로 역시 한국 독자들에게 무척 잘 알려진, 그리고 인기 있는 분이죠.
종래의 유럽공동체가 그 이전 경제공동체 단계를 거쳐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기점으로 EU로 더 강한 통합을 이뤘습니다. 과연 명실상부한 단일국가로 기능할 수 있을지를 두고 관심이 모아지는데, 저자는 유럽연합기구를 분석하며 형식적 정통성보다는 "대중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민주주의(p275)"로 성격 규정합니다. 결국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민주주의의 요건, 정의, 자격을 따지는 것보다, 유럽연합이라는 state가 제대로 작동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싱가포르는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핵심 엘리트들은 계급을 골고루 망라하는 자유로운 참여를 제한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선거는 정기적으로 시행"합니다(p311). 이는 학자들에게 "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 혹은 "반(半) 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한다는군요(같은 페이지). 이는 정치적 현실주의로 불릴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를 많은 나라에 대해 제안하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 과연, 정협과 전인대를 형식적 최고의결기구로 운용하는 중국과는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요?
"유권자들의 능력은 동등하지 않다(p178)." 불편하기는 하나 결국 우리 모두가 내심으로는 인정하는 현실입니다. 동등하지 않은 유권자들에게 결국은 동일한 한 표를 인정하니 문제가 벌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처칠은 "민주주의는 현존하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현존하는 그 어떤 제도보다도 바람직하게 작동한다."고 한 적 있습니다. 독과점은 결국 부정부패를 부르고, 아무리 수월성을 뽐내는 엘리트라도 결국은 이 유혹에 넘어가 모두의 불행을 부릅니다. 그러나 어떤 제도에도 운용의 묘라는 게 존재하며, 전문가의 절제된 판단, 재량 영역을 선명히 유보하는 선택이 때로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유권자들도 막연히 절대 주권자임을 자부할 게 아니라, 어떤 권리에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철칙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