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축의 전환 - 새로운 부와 힘을 탄생시킬 8가지 거대한 물결
마우로 기옌 지음, 우진하 옮김 / 리더스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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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본디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2030년이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맞는 전환점이리라 예측합니다. 이 한국어판에는 특별히 한국어 서문이 있는데, 여기서 저자는 "... 한국은 모든 면에서 중간 규모의 나라이며, 자체적인 인구 수나 경제규모에 의존해서는 미래의 번영을 장담할 수 없으며, 주변국들과 협력해야 한다. .. 지정학적 한계 속에서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권역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 책에서 분석할 경향들 속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볼 것이다....(p5)"라고 말합니다.

약점은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도 지적했듯 한국은 어떤 면에서 그저그런 나라의 한계를 못 벗어날 수 있지만, 언제나 변화에 빨리 적응하고 종래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격과 특징이란 게, 앞으로 급격하게 변화를 맞이할 세상에서는 메리트로 작용하여 번영의 큰 실마리를 먼저 나꿔챌 수 있다는 뜻입니다. ㅎㅎ 이렇게까지 말하는 저자의 책이니만큼 우리 한국 독자들이 더욱 눈에 불을 켜고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일자리 소멸 현상이, 중간 정도의 기술을 지닌 사람들이 몰려 있는 제조업 분야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야말로 쉽고 좀 더 경제적으로 기계화 혹은 자동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p52)" 그래서 트럼프 같은 이가 미국 블루칼라 백인층을 특히 타겟으로 삼아 효과적인 선거운동을 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인기가 높다는 게 (역설적으로) 투표 결과 확인되어, 4년 뒤 가장 유력한 후보로 벌써부터 부상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도 여튼 잘 지적하고 있듯 이런 이들의 일자리를 뺏는 건 이주 노동자들이 아니라 "기계"인데도 이들은 분노를 엉뚱하게 표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새로 일어나야 할 듯하네요.

일단 저자는 이주 노동자는 선진국 입장에서 환영해야 한다는 편입니다. 왜? 인구 노령화 추세가 선진국일수록 두드러지니 말입니다. 일자리의 공백(?)은 이들이 채우는데 "대체 이주"로 명명된다고 합니다. "대체(replacement)"는 사실 영어와 우리나라말에서 쓰이는 용법이 사뭇 다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문제도 2030년을 기준으로 삼아, "절반 이상의 인력"이 "여러 일자리(꼭 앞에서 말한, 기계화되기 쉬운 일자리만은 아니라고 하네요)"를 채울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필립스는 1939년에 벌써 전기면도기를 내놓았고(지금도 유명하죠), 983년의 CD 플레이어(한국에서는 1990년부터 널리 팔렸습니다), 1998년의 DVD 플레이어 등도 모두 이 다국적 기업의 작품이라고 책(p83)에서는 말합니다. 이런 기업도 희한하게 저 놀라운 혁신 상품을 내내 출시하던 그 무렵부터 거대한 적자의 덩어리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2011년 프란스 반 하우턴이 새로 CEO에 부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문제의 해결 그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다름아닌 인구통계학적 흐름을 애써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선택이었다고 하네요.

뭐 삼성그룹도 이를 알아채고 삼성바이오로직스 같은 회사를 새로 만들어 헬스케어 분야에 적극 뛰어들었으며 셀트리론의 서정진 회장 같은 이도 이 트렌드를 일찍부터 내다본 것입니다. 노령자가 많으면 당연 노령자의 가장 큰 관심사가 뭔지를 알아채어야죠. 몸을 들썩이며 워크맨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세대가 많으면 소니 같은 기업이 흥합니다만 지금은 1020이 선진국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튼 저자는 이를 두고 "노년의 재발견"이라 합니다.

"Z세대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첫번째 세대다."(p105) 저자는 이들이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태도와 법률이 그야말로 번개처럼 바뀌는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Z세대가 아닌 우리들도 이런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바뀌는 과정을 다 봅니다만 우리는 우리가 어렸을 때 형성했던 관점들을 대체로는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고정관념이 생기기도 전에 대세와 주류가 바뀌는 걸 보며, 인터넷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와 교류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세대가 공히 어떤 가치를 셰어하는지도 의심스러운 판입니다.

그런데 이제 갓 산업화의 과실을 맛보기 시작한 중국은 어떠한가? 우리 생각에는 아직도 이 나라가 청장년층이 열정적으로 사회를 이끄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쪽이지만, 전문가들은 전혀 다른 현상을 관찰한다고 합니다. "선진국들이 노령화로 걸어들어가고 있다면, 중국은 달려들어가고 있다(p107)." 60세 이상의 인구가 2억이 넘으며, 5천만명 넘는 노인들이 자녀들과 떨어져 산다고 합니다. 이런 풍경은 한국에서도 이미 1980년도부터 목격되었으나, 중국은 그 추세가 훨씬 빠른 편이라는 거죠. 한편 중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미국의 또래보다 저축액이 3배 정도 많다고 합니다. 중국이 가난하다고 무시 받는 건 그 앞 세대의 문제에 그칠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미국 등 선진국의 청년들은, 나라는 부강하나 자신들은 가난함을 느끼는 첫번째 세대가 될 수 있다고 독자인 저는 암시를 받았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일각에서 열렬히 찬성하는 기본소득제는 과연 대세가 될까요? 미국에서 좌파성향으로 여겨지는 루스벨트 연구소도 "세금으로 지원하는 기본소득제로는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p147). 사실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찬성하는 이들도 어떤 장밋빛 환상을 무턱대고 내놓지는 않습니다. 대체로는 정직하게 "성장이라는 목표를 포기해야 한다"고 하며, 이런 전제 하에서라면 기본소득이 큰 모순은 아니죠. 실제로 알래스카에서 시범 시행을 한 결과는, 의미없이 금방 써버린다거나, 오히려 빈부 격차가 더 커졌다든가 하는 현상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유는 여유 있는 계층일수록 이를 성공적으로 재투자했기 때문이라는군요.

어느 나라나 중산층의 성장을 중시하는 이유는, 이 지표야말로 빈곤층의 감소를 직접 증명하며, 사회의 건전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중간층(중산층은 중간층과 다릅니다만 일단)이 수적으로건 질적으로건 상층부와 하층부를 압도해야 사회가 안정된다고 그 예전부터 지적(p119)했었다는군요. 그렇다고 중산층이 마냥 선량(p125)하냐면 그건 아니겠죠. 미국과 유럽의 중산층은 계급으로서 언제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그 쇠퇴의 기미는 어느때보다도 뚜렷합니다. 반면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의 중산층은 나날이 성장합니다. 이 역시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2030년이 중대한 기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표면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게 수자원이지만 인간이 식수 등으로 이용하기에 물은 턱없이 부족합니다(p211). 특히 남아시아에서는 깨끗한 물이 날로 부족해지며, 가장 가난한 나라일수록 깨끗한 물을 길어 오는 노동이 주로 여성에게 부과되며 이는 우리나라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크게 사정이 다르지 않았겠죠. 상하수도 시설이 온전히 갖춰진 나라에서 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특히 물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작업을 벌이는 강도와, 수질 오염이 서로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농업 역시 여러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는 분야이지만 비판자들은 새로운 기법이 과거와는 달리 환경파괴적 경향을 띤다고 지적합니다. 농업 역시 사실 마냥 환경친화적이진 않아서, 사하라 사막이 점점 커지는 이유도 무분별한 관개 작업 때문이었으니 애초에 인구가 지나치게 느는 자체가 환경에는 재앙이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선진국에서는 "수직 농업"이 각광받는다고 책에 나옵니다(p215).

애플의 스마트워치는 여러 신기한(더 이상 뭐 신기할 것도 없는) 기능으로 소비자들의 주목 대상이 됩니다. 책에서는 유명한 코믹스 캐릭터인 딕 트레이시가 이미 1946년에 이런 신기방기한 손목시계를 차고 나왔음을 상기합니다. 1970년대 세계를 놀라게 했던 기술 중 하나는 일본이 선뵌 것으로, 수정 진동자를 이용하여 더욱 정교함을 높였다고 합니다(p237). 휴대전화가 널리 사용되면서 사실 시계가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고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이 추세가 굳었으나 애플 등이 스마트워치를 출시함으로써 폰의 기능도 보조하고 패션 아이템 기능도 제고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p256에서는 사물인터넷 기술이 언급됩니다. 사실 이 기술도 이미 2015년 즈음에 책이나 미디어에서 널리 회자되었는데 아직도 생각보다는 진척이 느리며 자율주행보다도 더 늦게 대중화할 듯합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포인트는 "일자리가 사라지는 동시에 새롭게 만들어진다"입니다. 단순 반복 노동은 없어지는 반면 인간의 창의력이 상대적으로 더 요구되는 분야는 늘어나리라는 함의가 읽힙니다.

공유경제 개념은 이미 미국인들이나 우리 동아시아인들의 삶 속에 깊이 침투했고 우버나 (한국의) 쏘카 같은 서비스가 널리 보급되었지만 여전히 현행법과의 충돌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책에서는 공유경제 개념의 함정을 살짝 주목하여 이른바 "공유지의 역설" 등이 설명됩니다만 결국 이런 컨셉이 더 널리 받아들여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대한 유익을 믿게 된다(p308)"고 합니다.

최근 비트코인 가격이 다시 급등합니다만 아무래도 화폐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만한 게 블록체인 기술의 발달입니다. 암호 관리는 비단 가상화폐 관련뿐이 아니고, 널리 지적 재산권을 보호할 때에도 필요합니다. 지적재산권이 해적질의 대상이 된다면 결국 아무도 머리를 써서 무형의 자산을 만들려 들지 않을 것이며 현재 뮤지션들이 그럭저럭 마음 놓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것도 각종 플랫폼이 아슬아슬하게 장벽을 쳐 주는 덕분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은 블록체인이나 양자암호 시스템이 두루 이런 지적재산권 관리 체계로 편입이 되어야 합니다.

책은 유진 오닐의 말로 마무리됩니다. "행복을 추구하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행복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추구되어야겠으며, 이 자격은 지구상의 다른 이웃과 공존과 공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자가 축의 전환으로 규정하는 2030년에는 더 많은 공감과 유대, 형제애가 지구를 채우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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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딜로와 산토끼 2 - 세 친구 이야기 아르마딜로와 산토끼 2
제레미 스트롱 지음, 레베카 베글리 그림, 신지호 옮김 / 위니더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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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친구 사이라고 해도 오해나 서운함은 언제나 쌓일 수 있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터 놓고 나누는 대화일 듯합니다.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서 또 서로 마음 상하는 말이 오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관계의 큰 그림, 본질을 바로 보고 공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베스트셀러 작가 제레미 스트롱의 이 동화를 읽고 나서 드는 것 같았습니다.

"재규어라고!" 생쥐는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p24)

아르마딜로는 자기 집에 동물들을 불러 파티를 하는데 그 중에는 재규어도 있습니다. 고양잇과 동물 중에는 북미 대륙에 사는 중 최상위 포식자라서 우리한테라면 호랑이 같은 느낌이겠습니다. 재규어도 배가 고프면 생쥐(만약 근처에 있다면)를 얼마든지 잡아먹을 테니 생쥐가 놀란 건 당연합니다. 책 저 뒤 p134에는 재규어가 안 잡아먹겠다고 농담을 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p101에서는 바닷가재가 지네를 보고 놀라 심장이 마구 뛰기도 하네요. 사실 지도 징그러우면서 말입니다.

산토끼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쥐처럼 초라한 모습을 하고(책 p12에서는 젖은 행주 같았다고 표현합니다) 얼마 전(정확하게는 일년 5개월 23일 반나절[p15]이며, 그들은 "오래 전"이라고 말은 합니다) 아르마딜로의 집에 찾아와 신세를 지는 중입니다. 그런데 아르마딜로는 이 토끼를 무척 좋아하며, 토끼와의 만남을 기념하여 파티를 여는 겁니다.

웜뱃은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는 낯선 동물일 텐데 호주에 살며 이름 중 "웜"은 warm도 worm도 아니고 그냥 wom입니다. 영어 어근에는 이런 형태가 없겠고, 호주 선주민들의 단어라고 하네요. 이 이야기에서 웜뱃은 손재주가 아주 뛰어납니다. 친구(손님)들 중에는 대벌레도 있는데 물론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여튼 이들과 친구입니다. 저 생쥐는 "나이가 많은 것 같(p21)"은데도 여튼 또 친구입니다. 그러니 크기도 나이도 먹이사슬상의 서열도 아무 상관 없이 이들은 모두 친한 친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벌레는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작가분도 이를 의식하고 매번 대벌레 앞에다 "눈에 보이지 않는"이란 수식어를 일부러 붙입니다! 독자들 재미있으라고 말입니다.

책 마지막에도 다시 나오지만 사실 이중에서 좀 특히 신비한 동물은 산토끼입니다. 얘는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에게서 악기 튜바를 물려받았는데 하도 족보가 길어서 마치 기독교 신약의 한 구절을 읽는 듯합니다. 이 튜바에서는 연주할 때마다 네온사인 같은 게 막 튀어나옵니다. 아르마딜로도 결말에서 이게 신기했는지 그 내역을 물어보는데 산토끼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토끼의 대답은 아마 이 책을 어린이와 함께 읽을 부모님들이 더 마음 찡해할 것 같아요.

아르마딜로와 그의 친구들은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소리(p30)"가 숲에서 들려오는 걸 듣고 그리 향합니다. 그런데 저 국혐하는 표현은 아르마딜로의 "견해"이며 산토끼, 재규어, 거북이 등은 "박자가 있는 음악"임을 깨닫고 좋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헤비메탈(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듯이 말입니다. 사실 유독 아르마딜로만 그 음악을 싫어한 건, 나중에 드러나듯(p74) 그 연주자의 다재다능함을 앞으로 자신이 시기하게 될 것을 알려주는 묘한 전조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미 복선이 깔린다는 뜻입니다.

연주자는 곰이었는데 우리도 악기 연주 잘하는 친구가 인기 좋듯 곰은 이들 사이에서 단박에 스타로 떠오릅니다. 산토끼가 곰한테 특히 관심을 보이는 걸 보고 아르마딜로는 자신도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 생각(p55)"을 갖게 합니다. 곰이 음악에 재주가 있으니 자신은 미술로 승부를 보겠다? 여튼 아르마딜로가 꽂힌 대상은 치즈입니다. 위에서 본 치즈, 아래에서 본 치즈... 치즈... 이 치즈(?)는 하늘에 뜬 모양으로 뒤에 다시(p138) 나옵니다.

바다에 간 그들은 수영을 합니다. 수영 솜씨가 가장 좋은 애는 의외로 아르마딜로였는데, 다들 이렇게 우아하게 힘 안 들이고 잘할 줄 몰랐다면서 칭찬이 자자(p78)합니다. 아르마딜로는 아빠가 수영 선수였다고 하는데 역시 재주는 부모님한테 물려받아야 하는가 봅니다. 바닷가재는 원래 여기가 홈그라운드고, 거북이는 얘가 바다거북이 아니라서 의외로 수영을 못하네요. 대벌레는 수영복이 없다면서 부끄러워하며 수영을 사양하는데 얘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잊었습니다.

우아한 기린은 어느날 다리를 다쳐 절게 됩니다. 재능이 많은 곰은 그의 무릎을 고쳐 주는데(p118), 곰은 이처럼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입니다. 곰은 저 앞 p38에서도 거북이를 도와 줍니다. 아르마딜로는 그래서 더 마음이 불편하고 샘이 났던 거죠. 그런데 이런 곰도,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애가 아닐까?"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며 솔직히 고백(p83)합니다. 그래서 곰은 드럼을 열심히 쳤던 거라고 합니다. 그런 괴로운 생각을 떨칠 수 있으니까요.

"산토끼야, 너는 가끔 이상한 말을 하더라? 물론 여기는 저기가 아니야. 여기가 만약 저기였다면, 저기는 여기가 아니지 않겠어. 안 그래?"(p94) 우리 독자는 여기서 마치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웜뱃은 산토끼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멋진 해석을 합니다. 무엇인지는 직접들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둑이라든가 스도쿠 같은 걸 우리는 스포츠라고 잘 생각하지 않는데 이미 아시안게임에서는 e-sports가 정식 종목입니다. 기린이 요가를 하다 다친 걸 보고(p127) 더욱 아르마딜로는 두뇌스포츠(ㅋ)에 빠져듭니다.

드디어 바닷가재는 기린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하여 사랑에 빠지고(pp. 144, 146) 거북이는 이를 눈치채어 매번 놀려댑니다(p132). 애들은 꼭 이런 걸 놀리는 버릇이 있는데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만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적이 있어 후회가 되는군요.

"음 바닷가재야 여기 흥미로운 게 있어. 네가 괴물을 만났을 때 네가 "앙녕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괴물이 절대 아닌 경우가 많아."(p103) 맞는 말입니다. 이 대목은 마치 생떽스의 <어린 왕자> 한 구절처럼 그윽한 의미를 담았네요. 그 괴물은 참고로 지네였습니다.

아르마딜로는 치즈가 너무 좋았는지 풍선에 매달려 달을 향해 가다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합니다. 다행히 키 큰 친구 기린이 있어 그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숲도 기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 "아르마딜로, 그건 네 기분이야. 넌 네 기분을 숲을 통해 보는 거라고."(pp.87~88)
"내가 튜바를 연주할 때 내 기분에 따라서 튜바가 그 감정과 꿈을 깨워서 밖으로 내놓는 거야."(p156)
언제나 산토끼는 아르마딜로보다 어른스럽습니다. 이래서 아르마딜로가 산토끼를 귀여워하는 것 같습니다. 안 그럴 것 같은 애가 그러니 말이죠.

"난 널 멀리서 볼 때 참 크다고 느껴. 그런데 네가 가까이 다가오면, 난 갑자기 깨달아. 네가 참 작다는 걸." (p128)

이 말은 산토끼가 역시 아르마딜로에게 한 말이고, 우습다는 듯 아르마딜로는 막 키득거립니다. 전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원근법은 법칙이 아니고 하나의 가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분에 따라 모든 걸 바꿀 수 있으니 우리는 과연 다 특별한 존재입니다.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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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법을 잊어버린 나에게 - 나를 보는 연습으로 번아웃을 극복한 간호사 이야기
장재희 지음 / 나무와열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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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에게 감정이 없다면, 치열한 생존 경쟁에 얼마든지 몸을 맡기고 사나운 적들과 부대끼며 승부를 치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감정을 온전히 지닌 채로, 싸움에는 싸움대로 또 참여를 헤야 하니 그게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기에, 싸움에 설령 이겨도 그 과정에서 다친 감정을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안 그러면 결국 피로스의 승리에 그칠 뿐이죠.

때로 인간은 사나운 소통에 엮이지 않아도, 외로움이나 상실감, 혹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또 감정에 상처를 입습니다. 가만있기만 해도 절로 생채기가 나기도 하는 게 감정입니다. 감정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감정의 결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남에게 통하는 방법이 내게도 듣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생을 가장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돌보는 데 능한 유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수백억의 돈이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막대한 양의 지폐 다발을 고층 빌딩 위에서 뿌리고 사회에서 잠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은 손에 들어왔으나 마음을 너무 다쳐 돈만 봐도 원수 같은 느낌이 들어서가 아니었을지.

저자는 암 진단을 받으신 부친께서 돌아가시는 과정을 지켜 봐야 했었습니다. "나에게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자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p14)" 그 다음에 저자가 보인 반응은 분노입니다. "나는 슬픈데 왜 저 사람들은 기쁜 걸까?"(p16) 마치 20세기에 활동한 저명한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정립한 교과서적 단계를 보는 듯합니다. 아마 저자께서도 이후 간호학을 전공하며 저 유명한 설명 체계를 공부할 때 더 각별한 기분이 드셨을 겁니다. 당시 아직 어린 나이였을 텐데도 저자는 "지금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아빠의 배우자였던 나의 엄마이겠다."란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특한 반응이며, 사람은 이렇게 가혹한 계기를 통해 한 걸음 더 성숙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 중에 환자가 있으면 그 가정이 환자 위주로 돌아간다(p45)." 저자는 간호사가 되신 후 수많은 환자를 봅니다. 쉴새없이 구토하는 환자, 제 힘으로 바로 앉아 있지도 못하는 환자... 저는 예전 KBS 어느 다큐에서 등에 큰 상처를 입은 환자를 의대 교수님들이 치료하는 과정을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지, 여기를 이렇게 치료하면 당장 아파서 누울 수가 없다니까." 의사든 간호사든 진정한 의료인은 그저 손상된 유기물을 원상 복구에 가깝게 고치는 기술자 그 이상의 존재라야 합니다. 환자 입장에 일단 서 보지 않고서 어떻게 최상의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겠습니까? 결국 멀쩡하게 등의 상처를 낫우어도, 그 과정에서 환자가 편히 누울 수도 없다면 그건 치료가 아니라 그저 공산품의 공정처리입니다. 아니 그 과정의 고통 때문에 결국 환자한테 다른 탈이 날지도 모릅니다.

어떤 특별한 상처를 누구에게 강하게 입는 것 같은 계기 없이도, 그간 억누르고 숨죽여 참아 왔던 감정들이 갑자기 폭발할 때, 그럴 때 사람은 완전한 혼란에 빠집니다. "내가 왜 이러지?" "오래된 생각과 묵었던 감정이 뒤엉켜 용수철처럼 내 몸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p66) 대체로 이런 일을 겪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할 겁니다. 아 이건 별 일 아니다, 괜찮을 거다. 그러면서 일상으로 다시 복귀하려고 애씁니다. 저자는 이 일을 겪기 전,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기도 하면서 주변과 소통하고 기분도 맞추려고 해 왔다며 솔직하게 털어 놓습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사실 순간순간 감정은 과부하가 걸린 채 노동을 하는 겁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나를 태우는 줄 모른 채 내 몸은 점점 활활 타들어 갔다."(p70) 감정적 상처가 안으로 곪아 결국 육신에까지 탈이 나는 과정은 정말 섬뜩합니다.

"병원에서 에너지를 쓰고 나면 내 몸에는 어떤 운동을 할 만한 조금의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p76)." 내가 번아웃이라니! 사실 번아웃 증후군은 서양이나 동양 가리지 않고 비슷한 문명 체계에서 복잡한 업무와 소통에 시달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올 수 있는 병인 듯합니다. 제가 제 주변에서 개인적으로 접하기로는 남성보다 여성분들이 좀 더 많은 것도 같지만 정확한 사실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저자분은 친구가 보내 준 루이스 헤이스의 <치유>를 읽습니다. 또 A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p46에 나오는 "교수님"과는 다른 분일까요?)

"부정 모드를 자동으로 긍정 모드가 켜지도록 반복 연습하기 위해 아네스 안의 <프린세스 마법의 주문>을 다시 꺼내들었다(p139)." "간절히 원하는 꿈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p140)" 사실 저자분은 또래 여성들이 무척 되고 싶어하기도 하는 간호사가 되었고, 또 그토록 꿈 꾸던 미국 간호사가 결국 된 분이니 행운아입니다. 스스로도 말씀하시듯 자신의 몸도 못 가누는 환자들만 당장 봐도,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인지 수시로 확인이 가능하죠. 그러나 이런 분도 소통와 일이 주는 별다른 스트레스를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어야 하며, 그래서 "나에게 사랑을 주는 연습(p141)"을 의식적으로 해 내지 않으면 위험한 지경까지도 가는 병을 스스로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땀이 잘 나지 않는 내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p151)" 이는 보이차를 전문가 분에게 직접 내려 받고 처음 겪어 보는, 마치 기분 좋게 사우나를 마치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저자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참 자연스럽게 붙이는 듯합니다. 내가 살갑게 대하고 어떤 안도감을 받고 싶어도,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기 때문에 나의 호의가 언제나 보상을 받는 건 아니며, 보상은커녕 어처구니없는 악의로 갚아지기도 합니다. 여튼 이 모든 건 에덴동산이 아닌 현실의 세계를 사는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하는 세금과도 같고,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겠죠.

"내 안에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남아 있다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p160) 저자께서도 잘 말씀하고 있듯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게 가장 좋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이를 애 써 부인할 게 아니라, 이게 내 맘에 남아 곪아터지지 않게, 밖으로 잘 나가도록 다스려야 합니다. 이게 바로 나를 돌보는 길의 대전제이자 출발점인 듯합니다.

저자는 본래 결혼식도 양가 어른들만 모시고 조촐하게 치르시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전통혼례"로 관심이 갔는데, 독자인 제 생각에도 아주 근사한 아이디어였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아 이렇게 상처 입은 한 영혼이 지극한 행복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바른 길을 찾아가는구나 싶어서 마구 응원하는 마음이 솟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책을 쓰는 것도 내 자신을 올바로 들여다보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너무나 큰 오해를 하는 게, 나를 돌보고 나를 케어하는 게 어떤 자기기만을 통한 indulgence 같은 걸로 특효를 본다는 거죠. 절대 속임수로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내면의) 진짜 나를 돌볼 수 없고, 저자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똑바로 보는 게 우선인 듯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중 저자님보다 혹 더 심각한 경우로 아파하는 분이라면, 그 역시 저자님의 제안대로 "나를 바로보기"부터 치유의 첫걸음을 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책이 참 예쁘게 만들어져서 소장하고 싶은 느낌이 절로 듭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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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적은 민주주의
가렛 존스 지음, 임상훈 옮김, 김정호 추천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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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추천사(김정호 교수)에도 나오듯,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의문을 제기하는 건, 지난시절 왕의 존재이유, 존엄, 정당성에 도전하는 만큼이나 "불경"스럽게(p6) 다들 받아들입니다. 과거에는 "민주역적"이란 말도 종종 쓰곤 했는데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게 체제, 사회의 절대 전제가 되어야 하며, 민주주의 외에 다른 어떤 시스템도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합의(민주주의의 구체적 작동 방식에 대해서는 설령 이견이 있을망정)가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천사를 쓴 김정호 교수는 "민주주의 과잉시대(p8)"를 사는 우려를 표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표현도 오해받기 딱 좋습니다. 민주주의에 일시적 오용, 오도가 있을망정 과잉이 있을 수가 있냐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원리가 무절제하게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역시 추천사에서는 한국은행총재와 금통위 위원을 두고, 민주적으로 선출할 때 운용이 곤란해지는 예로 듭니다. 문명 사회에서는 전문가의 영역이 존중되어야 하며, 외견상 바로 판단하기 어려운 응급환자를 치료할 때 문외한들이 민주주의랍시고 모여 "다수결"로 수술 방향, 방법을 결정해서는 큰일나는 이치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사법절차에 민주주의를 무제한 도입하면 이는 인민재판(p7)으로 타락할 뿐이라고도 합니다. 플라톤은 이를 일러 중우정치의 폐단이라고 일찍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려 깊지 못하고 목소리만 큰 사람, 논리고 이성적 판단이고가 없고 비뚤어진 자기 감정만 따라 징징거리며 폭주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비슷한 패를 모아 저급한 선동을 통해 자기 의사를 관철하는 사회는 이미 치유될 가망이 없는 중병에 걸린 공동체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확실히 요즘은 (그 표현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과잉의 시대"가 맞습니다.

1980년대에 레이건 행정부를 지배하다시피했던 경제정책기조를 뒷받침하는 원리 하나가 래퍼 곡선입니다. 매우 직관적인 모습을 띠고, 아주 상식적이고 솔깃한 결론을 간단명료하게 주장하던 터라 인기도 얻고 반발도 그에 못지 않게 크게 샀었습니다. 세율을 필요 이상으로 올리면 세율이 낮았을 때보다 오히려 세수가 감소한다는 결론인데, 사실 이런 말은 맞다고도 틀렸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이 틀림없이 들어맞는 경우도 많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저 경제학적 결론에 찬성하건 그렇지 않건 무관하게, 일정 선을 넘으면 오히려 안 한 만도 못한 역효과가 난다고 하는 그 구조상 레토릭은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습니다.

p48에서 이 책 저자 가렛 존스 교수는 로버트 배로 교수(이분은 하바드에 계신데, 노벨상을 받은 로버트 루카스 교수 등 시카고 보이즈와 결론을 함께하죠)의 1996년 연구를 인용하며, "민주주의의 지복점은 상당히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라는 그의 놀라운 결론을 소개합니다. "민주주의의 수준이 낮을 때는 조금만 민주주의가 발전해도 경제수준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면 경제성장률은 훨씬 낮아졌다." 여기서 지복점(至福點)은 bliss point가 그 원어이며 한국의 거의 모든 경제학 교과서에서 저렇게 "지복점"으로 번역들을 합니다. 혹은 요즘 저널리즘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골디락스"라고 해도 어느 정도 통합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최적의 균형을 찾자면 그만큼 중용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만 같은 민주주의에,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이 있다는 결론은 충격적입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연구 방향을 조금만 달리하고 표집을 조절해도, "지나친 민주주의는 경제 성장을 늦추거나 퇴보시킨다"는 결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책에서도 그 점은 인정(p50:2)합니다. 래퍼 곡선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엄격한 경제실증도구라기보다 하나의 정치적, 문학적 비유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이 개념은 저 뒤 p208에서 비판적으로 리뷰됩니다.

저자는 다시 존스와 올켄의 연구를 인용(p55)합니다. 후주(p344)에 보면 이는 그들의 2005년 발표논문이 그 출처입니다. 흥미롭게도 독재자가 죽으면 그 나라의 경제성장은 크게 요동치지만, 민주주의 리더가 죽은 후라면 별반 변동성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결론, 혹은 전제를 다시 강조합니다. "민주주의의 10% 하향은 이미 고도의 민주주의를 누리는 국가에만 제언될 뿐이며, 독재의 폐단에 신음 중인 경우엔 해당 사항 없다"는 취지입니다.

민주주의와 평화는 그 향유의 정도가 비례할까요? 아니면 평화와 자유의 상관관계는 어떻습니까? 민주국가는 대체로 다른 민주국가와 다양한 공식, 비공식의 채널(p38)을 유지하고 있기에, 내심으로는 불필요한 전쟁, 전쟁터에 자신의 자녀들을 보내고 싶지 않은 유권자들이 어떻게든 평화적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고 또 이는 대체로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독재국가와의 충돌에 있어서는 전쟁에 돌입하기 쉬운데, 이 부분은 연구 출처가 책에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의 사례 하나를 지나치게 일반화한 듯합니다. 이념의 방향성만 반대일 뿐 똑같은 독재국가, 전체주의였던 소련과는 결국 미국이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또 1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제정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독일 제국 등은 많은 전쟁 위기를 노련한 외교술로 넘긴 적이 많았는데 황제가 다스렸던 이들 국가를 민주주의로 보기는 힘들죠. 다만 독재자가 체제 통솔을 위해 인위적으로 전쟁을 유발, 도발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겠습니다.

책에는 짐 뷰캐넌과 고든 털럭의 연구도 소개됩니다. 이 두 분은 우리 한국에도 예전부터 잘 알려진 공공선택이론의 개척자(p59)로 불리는 학자들입니다. 특히, 고든 털록은 책 저 뒤 p201 같은 데서 다시 등장하는데 저자와 개인적으로 각별한 연이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여튼 이 책에서 인용되는 범위 안에서 그들 연구 분야의 핵심은, 정치인이 남발하는 선심성 공약과 소모적인 쇼맨십이 과연 민주주의의 건강성과 사회 체제의 생산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사실 저런 건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서 양념처럼 꼭 끼곤 하며, 아무리 위선적이고 속이 들여다 보인다고 해도 무작정 금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임기가 한정된 국회의원은 비록 대리가 아닌 대표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무기속위임자이긴 하나, 임기말에는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의제의 존재 의의는 포퓰리즘, 대중영합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대의명분에 따른 의사결정을 하라는 것인데,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이런 풍조는 점점 사라져가며 저급한 대중 선동가가 오히려 더 득세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수준 이하의 인물들이 인기에만 집착하여, 기억력 나쁜 대중을 향해 말도 안되는 공약을 남발하니 의회에서 합리적인 결론도출보다 진영 간 극한 대립만 되풀이됩니다(21세기 들어 미국도 마찬가지로, 완전 갈데까지 간 모습을 보이죠). 우매한 대중의 싸움을 말려할 지도자들이, 자질과 자격이 부족하다 보니 지네들끼리 더 볼썽사납게 싸워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을 대표로 국회에 보낸 선거구민들의 수준도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검은 이익을 위해서는 기막힌 협력을 유지하는데, p248에 나오는 로그롤링 같은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본문 중 "미리엄"은 "메리엄"이 맞겠습니다.

그러면 대표자들의 임기를 늘리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저자는 이런 의문에 대해 책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답을 내어놓는 편인데 주된 논거는 달 보와 로시의 연구입니다. 특히 후자는 아르헨티나의 정치학자인데 20세기 후반 워낙 많은 고초를 겪은 나라이기도 한지라 그 결론이 더욱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아르헨티나야말로 수준 낮고 부패한 저질 군부 독재자들(비델라, 갈티에리 장군이라든가)에 의해 모진 시기를 통과해 왔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정파 간의 극한 대립, 민주화 리더들의 한심한 무능 등으로 인해 여전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수준이 아직 낮은 나라에도, 민주주의 절차의 일부 과잉이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돈을 찍어내는 능력(p82)." 물론 돈을 제멋대로 찍어내는 걸 가리키지 않으며, 오히려 미국처럼 기축통화를 운용하는 나라에서는 어느 시점에 얼마만큼이나 돈을 찍어내야 할지 그 판단의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연준 의장의 재량은 미국 대통령의 권위를 간혹 능가하기도 하며, 실제로 제롬 파월은 트럼프에 의해 임명되었지만 그의 강요를 자주 무시해 왔으며 미묘한 시기에 거시경제를 핸들링하는 그의 수완은 민주, 공화 불문하고 찬탄의 대상이 됩니다. 쑹홍빙의 <화폐전쟁>에서는 연준이 민간인들로 구성된 점,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는 점 등을 비난하지만, 이 책에서 잘 증명되듯 현재 미국 시스템 중에 그나마 잘 운영되는 곳은 연준뿐입니다. 저 뒤 p214에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유명한 말, "국가의 채권자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다."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국가 재정 정책, 화폐금융정책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로 하여금 직접 관장하게 하지 않는가? 대중은 전문가의 능력을 바르게 평가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3장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추천사를 쓴 김 교수가 중앙은행을 특히 언급한 것도 아마 비슷한 심리적 배경 아니었을까 제 맘대로 추측해 봅니다. 중앙은행이 정치에 휘둘리고 대중의 변덕스러운 여론에 그대로 노출되면 나라는 마치 말기 원나라처럼 대혼란에 빠지는 겁니다.

아무래도 어떤 민주주의 국가건 간에 사법부의 독립은 미묘한 이슈입니다. 예전 어떤 미국인은 한국에서의 재판을 거부하며 "배심원제가 없는 재판이 과연 재판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지만, 미국처럼 노련한 판사가 배심단을 잘 리딩하지 못한다면 저 추천사의 어느 구절대로 인민재판에의 타락을 면할 수 없습니다. 감정에 들뜬 비이성적인 군중이 팩트체크도 거치지 않은 채 "죽여라!" 같은 선동에 몰려 유무죄를 함부로 판단하는 꼴불견을 상상해 보십시오. p196에는 에피스토크라시, 즉 현명한 이들의 정치라는 서양 고전 시대 이래 내려온 유명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미성숙한 이들에게 분에 넘치는 권한을 줘 봐야 남들도 자신도 똑같이 불행한 운명에 빠뜨릴 뿐입니다.

택시운전면허는 어느나라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이 면허는 뉴욕 같은 데에서 특히 "메달리온"으로 표창되는데, 이게 거래의 대상이 되며 값도 등락을 거듭한다는 게 특이하죠. 택시기사의 기득권을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진입장벽을 낮출 것인가는 매우 미묘한 문제이고 해결책 도출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우버 등 공유경제 산업과의 충돌이 새로 일어나기도 하죠. 어느 나라건 "신뢰보호"라는 원칙은 헌법 레벨이며, p203에도 나오듯 "grandfathering(기득권 인정 입법화)"는 오히려 정의에 부합합니다. 이 용어는 할리웃 고전 <대부 2>에도 상원의원 기어리와 주인공 마이클 콜리언(코를레오네)의 대화 중에 언급됩니다. 그렇다고 경제의 활력을 위해서라도 무작정 진입 장벽을 높이는 게 바람직하지는 않은데, 이런 게 민주주의 원칙을 무분별하게 적용하여 여론에 휘둘리게 할 일만도 아닙니다.

"국가와 정부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정부는 경제를 더 잘 운용한다(p221)." 선거로 표현되는 대중의 평가가 이런 장기적이고 고차원적인 이슈에 항상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정부의 경제정책이 유효하게 운용되는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재는 척도는 예를 들면 피치나 S&P처럼 신용등급을 매기는 기관에 맡기는 게 낫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권력은 높은 신용등급에서 나온다(p230)." 정부와 체제가 무너지는 건 악정이나 폭주보다, 경제적 신용을 잃었을 때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쇄국을 해서 실각한 게 아니라, 당백전의 무분별한 유통을 강요하여 경제주체에게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적 인기보다 중요한 게, 경제의 실물과 그 표상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며 국민의 생존과 번영을 지탱하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p150에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직전 행했던 그 유명한 연설이 인용됩니다. 이는 저자가 "감독관 함락 이론"의 의의를 설명하는 맥락 중에 나옵니다. 아마 이 연설(문 인용)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할 텐데, 유명한 고전 <파워 엘리트>(라이트 밀즈 著)에도 "군산복합체"를 설명하며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J K 갤브레이스 교수의 "대항적 권력" 이론도 나오는데, 이분은 유머러스한 고전 <불확실성의 시대>의 저자로 역시 한국 독자들에게 무척 잘 알려진, 그리고 인기 있는 분이죠.

종래의 유럽공동체가 그 이전 경제공동체 단계를 거쳐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기점으로 EU로 더 강한 통합을 이뤘습니다. 과연 명실상부한 단일국가로 기능할 수 있을지를 두고 관심이 모아지는데, 저자는 유럽연합기구를 분석하며 형식적 정통성보다는 "대중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민주주의(p275)"로 성격 규정합니다. 결국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민주주의의 요건, 정의, 자격을 따지는 것보다, 유럽연합이라는 state가 제대로 작동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싱가포르는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핵심 엘리트들은 계급을 골고루 망라하는 자유로운 참여를 제한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선거는 정기적으로 시행"합니다(p311). 이는 학자들에게 "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 혹은 "반(半) 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한다는군요(같은 페이지). 이는 정치적 현실주의로 불릴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를 많은 나라에 대해 제안하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 과연, 정협과 전인대를 형식적 최고의결기구로 운용하는 중국과는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요?

"유권자들의 능력은 동등하지 않다(p178)." 불편하기는 하나 결국 우리 모두가 내심으로는 인정하는 현실입니다. 동등하지 않은 유권자들에게 결국은 동일한 한 표를 인정하니 문제가 벌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처칠은 "민주주의는 현존하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현존하는 그 어떤 제도보다도 바람직하게 작동한다."고 한 적 있습니다. 독과점은 결국 부정부패를 부르고, 아무리 수월성을 뽐내는 엘리트라도 결국은 이 유혹에 넘어가 모두의 불행을 부릅니다. 그러나 어떤 제도에도 운용의 묘라는 게 존재하며, 전문가의 절제된 판단, 재량 영역을 선명히 유보하는 선택이 때로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유권자들도 막연히 절대 주권자임을 자부할 게 아니라, 어떤 권리에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철칙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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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가 전하는 이중언어 교육 이야기 - 싱가포르의 위대한 도전
리콴유 지음, 송바우나 옮김 / 행복에너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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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를 정확하고 우아하게 구사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글로벌 유력 언어를 따로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면 경쟁에서 앞서가는 좋은 무기를 가진 셈입니다. 언어는 어렸을 때 학습해야 한다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며, 타고난 재능과 무관하게 성실한 습관으로 얼마든지 외국어 능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실한 습관, 끈기" 자체가 이미 재능 이상의 영역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말레이 반도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열도에도 화교들이 무척 많이 삽니다.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중국계들이 진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는 본토의 가혹한 행정을 피해 이주했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여튼 이들은 남다르게 강한 자녀 교육열을 지녔으며, 그 결과 토착인들보다 훨씬 근면하고 건전한 생활 패턴을 정착시켜 부유하게 살아 왔습니다. 말레이 반도 끄트머리의 싱가포르 인들도, 또 인도네시아의 화교들도 다수 토착인들로부터 드물지 않게 잔인한 핍박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단수 조치 등 격렬한 대립 끝에 리콴유가 말레이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할 때 그는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죠. 여튼 리콴유 같은 이를 그 대표로 삼을 만한 싱가포르인들의 유별난 교육열과 절제된 태도는 세계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괜히 국립 싱가포르 대학 같은 글로벌 명문교가 거기 있는 게 아니죠. 물론 과거 영국 지배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현재는 정치적으로 지극히 안정되었지만(물론 이에 대해서도 내외의 비판이 만만치 않습니다), 또 영국은 타 제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대체로 세련되고 포용적인(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정치를 폈다지만, 이 책에서 회고되는 리콴유 버전의 현대사는 그런 우리의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중국어로 공부한 사람들은 하층민의 삶을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당국에서는 이들에 대해 잠재적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씌우기까지 했다." 청년 리콴유는 이후 싱가포르의 수상으로서 우리에게 남은 이미지, 즉 바늘 꽂을 틈도 상대에게 허용하지 않는 깍쟁이 엘리트의 모습과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86세대 못지 않게 반외세 반독재를 외치던 열혈파였던 거죠. 하긴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아직도 살아 있는) 역시 의사 답지 않게 근본주의 스탠스로 이슬람을 믿었고 "아시아에는 아시아의 길이 있다"며 서구식 민주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말레이시아뿐 아니라 영국은 홍콩에서도 아주 서투른 대응을 펴서 현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공산화를 자초할 뻔했습니다. 홍콩 영화 주윤발 주연의 <강호정>을 보면 이 상황이 잠시 언급되죠. 영국의 식민 통치가 세련되어진 건 현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겪고 나서입니다. 이 책을 보면 이런 사정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라고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문화가 없는 사람들은, 고기를 써는 기계에 넣으면 일반 소시지 길이로 나올 겁니다." 소름이 끼치지만 언제나 컬러플한 레토릭을 과시했던 리콴유 수상이 과연 말했을 법한 그런 워딩입니다(p60).  싱가포르라고 해서 화교들만 사는 건 당연히 아니며, 말레이시아만큼이나 인종, 민족 구성이 다양(p72 참조)합니다(단 화교가 다수이긴 하죠). "교육은 교육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은 국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p62) 역시 그의 입에서 나왔을 만한 언사죠. 독립 후 싱가포르는 정치 단위로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국민(이래봐야 도시국가 시민 정도지만)에게 영어로 말할 것을 정책으로 정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가 젊어서부터 말레이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줄 알았기에(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이중언어 구사능력을 모든 국민에게 함양하는 게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굳건히하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그전까지 싱가포르는 마치 1950년대까지의 미국처럼 인종과 민족을 분리해서 처우했습니다. 중국어를 말하는 이들은 특정 대학교에만 진학하게 했고, 학교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공공시설이 언어별 민족별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판에 리콴유가 중국인들에게까지 영어를 공용어로 삼게 하니, 싱가포르의 다수 종족이었던 그들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리콴유 자신도 중국계였으면서 동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런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는 자체가 그의 리더로서 자질을 증명합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코르시카 인의 피해의식 가득한 정체성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프랑스의 영웅, 세계적 위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것이 바로 위인의 그릇이죠.

"그들은 영어가 유일한 공용어로 기능하면 더 많은 다국적기업이 싱가포르를 찾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p80)."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다민족 분리주의가 득세하거나 중화 우월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하면 가뜩이나 작은 싱가포르가 결국은 깨어질 운명이었겠고, 이제는 다국적기업이 그저 싱가포르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싱가포르가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모든 게 공용어 지정 정책 덕분이라 해도 아주 과장은 아닙니다.

싱가포르가 독립 후 수십 년 동안 리콴유 혼자 독재를 펼친 사회로만 알고들 있지만 이 책 p226 이하에 나오듯 탕량홍 같은 포퓰리스트의 도전도 있었습니다. 리콴유는 1997년 총선에 출마한 변호사 탕을 회고하며,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다수 중국계를 선동하던 달변가"로 그를 규정합니다. 이는 마치 현재 터키를 다스리며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꿈꾸는, 즉 국부 케말 파샤가 애써 확립했던 세속주의를 다시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에로도안 같은 유형이라고 생각되네요. "왜 우리가 가마를 날라야 합니까? 우리는 가마 위에 앉아야 합니다." 들으면 솔깃하지만 이 말을 다수 국민이 따랐다면 싱가포르는 지금쯤 사분오열되었을 겁니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는 고촉통(오작동)을 리콴유는 이후 후계자로 삼으며, 그가 잠시 중간관리한 후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아들에게 권력이 넘어갑니다.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실패한 정치인 탕량홍은 우리 식으로 보자면 민주투사, 민족주의자로서 새로운 노선을 제시했을지도 사실은 모르는 일입니다. 또, 권력 세습이란 설령 그 나라에 아무리 불가피한 면이 있고 후계자가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 해도 대체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 모든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여튼 하나로 통합한 그의 업적은 결코 경시될 수 없습니다.

1970년대 후반 리콴유는 다시 한 번 싱가포르인, 그 중에서도 중국계에게 큰 부담이 될 정책을 선포하려 듭니다. 영어는 영어대로 쓰되, 중국어를 말할 때는 표준중국어를 쓰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화교들은 참 묘한 게, 중화권으로서의 긍지(?)를 가지면서도 말은 꼭 방언을 쓰며 무슨무슨 지방 출신임을 또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는 영어 공용화 정책을 능가할 만큼 격렬한 반발을 부릅니다. "방언을  못 쓰게 하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결국 영어만 남고 중국어는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도 주된 반발 원인은, 왜 남방계인 우리들이 북방계인 표준중국어를 써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거시적으로 볼 때 지역감정의 발로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외국어는 어렸을 때 반드시 먼저 배워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책 p284에 보면 리콴유는 "가능하면 유아 때 시작하는게 좋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유아기를 넘기면 외국어 학습이 불가능에 가까워진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본인 역시 표준중국어나 말레이어는 다소 늦은 시기에 시작(p185)했으니 말입니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 상대를 뒷말 없이 제압하려면 해당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단 이 책의 역자는 "머리가 굳기 전에 시작해야 효과가 난다(p291)"면서도, 역시 제도와 인프라의 중요성를 강조하며 늦은 나이에라도 외국어를 배울 것을 간접적으로 거론합니다. 인재의 역량은 결국 언어를 통해서만 발현될 뿐이기 때문이죠. 이런 역자의 주장이 백 번 맞는 말이며, 반면 무슨 뉴런 연결이 어쩌구 하며 부정적인 면만 내세우는 헛소리는, 자원할당이 거짓말 고안에만 쏠린 사이비 거짓말쟁이의 구질구질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노력을 이길 천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책을 보면 슈퍼엘리트 리콴유가 얼마나 노력벌레이기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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