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미래가 온다 -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대비하는 6가지 생각의 프레임
다니엘 핑크 지음, 김명철 옮김, 정지훈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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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정신은 좌뇌와 우뇌 두 부분이 동시에 작용하여 조화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게 오래 전에 밝혀져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이 책에서 다니엘 핑크는 우뇌 중심의 사고, 발상, 정신 작용에 의한 타인과의 공감을 적극 주창합니다. 과거에는 메마르고 계산적인 정신 작용이 중요했다면, 현대는 보다 감성적이고 역동적이며 많은 동조자들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이성과 계산보다는 풍성한 감성과 예술적 창의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p22에서 저자는 자신이 참여한 테스트의 문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표정들이 서로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가? 또, 총을 겨누는 악당 사진에 반응하는 뇌는 어느 쪽인가? "위험"의 정도, 정체를 파악할 때에는 상황을 정확히 계산하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두번째 문제의 답은 좌뇌일 수밖에 없죠. 그런데 누구와 누구의 감정이 서로 통하는가 같은, 표정을 보고 당사자의 감정을 파악하는 문제는 우뇌가 관여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 또 가까운 미래에 더 절실히 요구되는 능력은 당연히 우뇌의 산물이라는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 표정의 문제는 "학습적인 경험과는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p29)"는 것입니다. 감정은 글쎄요. 연습이나 숙련의 영역과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기도 한 듯합니다.

어떤 사람더러 조직에서 "감정적인 성향"이라고 평가를 한다면, 이는 결코 긍정적인 고과는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저 사람 조심해야 할 사람"이란 암시일 수도 있습니다. 책에서는 "우뇌는 파괴자다"라든가, "이성적인 작용의 담지자인 좌뇌에 비해 열등하다" 같은 과거의 평가가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시대에 따라 평가와 우선순위가 바뀔 만한 이슈이며, 저자 다니엘 핑크는 이 책에서 여러 근거를 들며 "우리의 시대는 우뇌의 시대"임을 주장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사 표현, 기호의 의미를 해석할 때 고립적으로 새길 수는 없습니다. 적건 많건 간에 기호와 단어, 문장, 심지어 책 한 권도 어떤 맥락에 따른 해석을 해야 합니다. 이 맥락 위주의 사고를 담당하는 게 저자에 따르면 우뇌입니다. 그러니 세부적이고 개별적 분석을 행하는 좌뇌에 비해, 우뇌는 열등한 게 아니라 더 고차적인 의미를 캐내는 것입니다. 운문, 시가는 산문에 비해 더 복합적인 내용을 다층적으로 전달하는데, 예전부터 시인이 소설가에 비해 더 높은 대우를 받았던 사실도 우뇌의 비열등성을 증명합니다.

척박한 문명, 공동체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지 않고 사람들도 외양 꾸밈에 더 무관심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는 이런 사회에 대해 상대적으로 경멸감(옳고 그름의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을 갖고 대합니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의 문화가 대체로 독일권보다 높은 평가를 받은 게 사실 다 이런 배경을 지닙니다. 물론 독일도 괴테 같은 위대한 문호, 베토벤 같은 악성을 배출했지만 사람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문화에 더 큰 동경을 갖고 그들의 패션, 명품에 열광합니다.

"현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특징은 초월성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열망이다." 이는 p56에서 앤드류 델팡코 교수의 말로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물론 초월성은 미학보다는 종교성과 더 자주 연결되나, 설령 종교라고 해도 좌뇌보다는 우뇌와 더 깊이 연관되었다고 볼 수 있죠. 책에서 저자는 "이미 전기가 보편적 서비스로서 공급되는 마당에 사람들은 여전히 양초를 수요한다"는 말로 우뇌의 영원한 갈증을 표현합니다.

그러면 우뇌는 예술가 집단에서만 주로 소용되는 걸까요? 저자는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는 않다고 말합니다(p85). 솜씨가 서투른 프로그래머는 매뉴얼을 보고 더듬더둠 작업을 행하며 그 결과물에는 어떤 자연스러움이 없는 짜깁기의 서투름이 배어납니다. 이게 어설픈 좌뇌 위주의 성과물입니다. 반면 우뇌를 잘 활용하는 프로그래머는 남들이 잘 생각지 못하는 기발한 구조의 작품을 쉽게 빚어냅니다. 부분보다는 전체를 통찰하는 능력인데, 마치 스티브 잡스가 연결의 천재로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테크놀로지를 모으고 모아 아이폰을 만들어 낸 것이나 비슷합니다. 잡스 자신은 사실 엔지니어라고 보기 힘든 경력이었지만 말입니다.

"조직 내 스토리 텔링"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스티브 데닝은 변호사였다가 나중에 세계은행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p137)이라는데 그는 스스로 말하길 좌뇌형 인간이었고 대부분 조직에서 (단견으로) 선호되는 유형이었지만 한 번의 좌천을 겪고 나서 "스토리"에 대한 일종의 각성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가 깨우친 바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것이어서 그 자신도 여러 조직에서 승승장구했거니와 지금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스토리"를 뭔가 내세워야 성공하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이 역시 좌뇌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고 방식이고 그 결과물이 작용하는 영역입니다.

병원, 의학하고 스토리는 전혀 무관하게 여기기 쉽지만 사실 가정의가 점점 강조되는 추세라든가 의료체제의 개편 역시 개인과 밀착한 치료를 중요시하는 방향입니다. 개인의 병력을 고려치 않고 무작정 겉보기에 따라 대증요법만 계속한다면 그 환자의 병이 나을 리가 없습니다. 원인을 치료하고 나아가 환자의 마음을 낫우려면 "스토리"의 접근을 등한히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스트리는 곧 우리 자신이다(p148)." 별 것 아닌 듯해도 몇 개의 스토리로 깔끔히 정리되지 못하는 삶은 그게 제대로 산 삶이라 보기 힘듭니다.

"남이 생각하지 못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능력(p164)" 역시 우뇌의 주요 기능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능력(p171)"이며 "생활윤리이기도 한 공감능력(p182)"이기도 합니다. 흔히 가식으로 웃을 때 팬암의 미소라는 표현을 쓰는데, 오래 전 신경학자 뒤셴 드불로뉴는 반대로 진심으로 웃을 때 어떤 근육이 쓰이는지를 발견(p183)한 사람입니다. p184에는 바로 저자 자신의 두 사진을 두고 어떤 것이 진심으로 웃는 사진인지를 맞혀 보라는 문제가 있는데, 답은 누구나 쉽게 고를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유머를 사용할 수 있는 재능은 높은 감성지수를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p215)." 사실 웃음이야말로 고맥락 반응이어서 남을 웃기는 시도이건 남의 유머에 반응하는 것이든 어느 정도의 지능을 필요로 합니다. 지능이 떨어지고 심성이 비틀린 자는 건강하지 못한 상황에서만 웃으며, 문학 작품 등에 나오는 고맥락 유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유머인지 자체를 파악 못합니다. 이런 유머를 도리어 유치하다고 그 나름 단죄까지 하는데 지능만 떨어질 뿐이 아니라 성품이 근본에서부터 잘못된 인간일 가능성이 크죠.

"정신적인 가치가 우리의 삶을 향상시킨다." 당연한 언명이긴 하지만 많은 이들은 특히 현대에 들어 일차원적인 물질주의에만 탐닉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실용적이고 현실 감각이 뛰어나다고 큰 착각에 빠져 합리화하죠. 우연하고 우아한 가치를 추구하고 그로부터 만족을 얻으려면 우뇌 위주의 사고가 체질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요구되는 건 자아성찰과 올바른 미의식의 함양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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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건너는 집 특서 청소년문학 17
김하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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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큰 기대를 갖지 않고 읽었는데 ㅎㅎ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시간을 건너는 집"은 작품 속에서 "타임하우스"라고도 불립니다. 하얀 운동화(이것도 어디서 왔는지 모를)를 신은 네 아이들에게 어느날 집 하나가 등굣길에 보이고, 어떤 할머니와 이상한 아저씨 하나가 아이들을 안내합니다. 현대 한국에서 이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 백이면 아흔이 사이비 종교 같은 걸 떠올릴 건데 아이들도 대뜸 경계하며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어?" 같은 반응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뭐였냐 하면, 이 집에 들어온 특별한 기회, 정말 특별하긴 하죠, 이 기회를 받은 아이들은 현재, 과거, 미래로 각각 향하는 문 세 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현재를 잠시 건너뛸 수도 있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으러 갈 수도 있고, 이도저도 싫으면 현재로 그냥 나가면 됩니다. 이런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이 ㅎㅎ 복권 같은 걸 떠올리겠으나 그런 건 규칙 위반이라서 안 됩니다. 터무니없는 요행수, 아이들이니까 노력 없이 갑자기 명문대 입학 이런 것도 안 되며, 가까운 이의 "죽음"도 되돌릴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에이 뭐야 하며 아이들이 실망하는 게 당연하며, ㅎㅎ 사실 아이들이 실망하는 건 또 그러려니 하는데 성인 독자들도 그럼 뭐가 대단한 기회냐며 유치하게 더 실망하는 게 아마 보통일 겁니다. 와 이거는 작가 상상력의 부족 아닌가, 이런 반응도 제 주위에서 봤습니다. 근데 전혀 아니고, 끝까지 다 읽고 진짜 충격 받았으니까 도중에 중단하지 마시고 일단 폈으면 완독들 하시길 바랍니다.

이 아이들은 왜 타임하우스로 초대되었을까요?알고보니 하나같이 어떤 문제에 맞닥뜨린, 갑갑한 인생을 사는 애들이었습니다. 어떤 애는 학교에서 지독한 왕따를 당하는데 그 주범은 더 어렸을 때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두 명이었습니다. 책에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두 명은 아마 나쁜 친구를 접하고(여기까지는 설명이 나옵니다), 뭔가 신세계를 만나고 스스로 종전의 자신과 다른 존재로 훌쩍 컸다고 여겼을 겁니다. 사실은 갈데까지 간 타락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종전의 자신에 머물러 있는 듯한 자영이가 엄청 한심하고 찌질하게 보였겠죠. 대부분 불량청소년이 왕따를 괴롭히는 건 이런 심리적 단계이며, 꼴에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단죄를 하고 시작합니다. 자영이가 당하는 왕따는 정말 지독하며, 여기서 격분하여 작품 읽기를 도중에 그만두는 독자도 있을 텐데 그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수는 불량청소년과 어울리는 수준의 사회성도 없고 그냥 혼자 지내는 싸이코패스입니다. 진짜 싸이코패스인지 아니면 어디서 보고 그렇게 정체성을 규정하여 흉내만 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중에 자영이한테 "널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뭔지는 스포일러)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어!"라고 하는 대사에서는 와 얘 진짜 노답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불량 청소년들을 만나 (엄마가 힘들게 번) 돈을 뺏기는 장면에서는 또 생각이 달라집니다. 강민이가 나중에 "와 너한테 돈을 뺏다니 대체 얼마나 무서운 애들이었음?"이라고 물었을 때 독자인 저도 실소가 나왔습니다. 수가 많아도 흉기 하나로 바로 제압이 가능한 이수이니 말입니다. 작품 중에서도 설명이 되지만 이수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려는(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의도였던 거죠. 그러면 싸이코패스는 아닙니다. 다른 정신병일 수는 있지만.

이수는 이런 애고, 또 자영이는 왕따고, 다른 여자애 선미는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인데 약간 치매기가 있는 할머니가 또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 셋 중에 누가 가장 지독한 곤경에 빠져 있을까요? 엄마가 또 노답이기까지 한 이수 아니겠나 싶고, 선미는 그래도 집안이 살만은 하지 않냐, 자영이는 (소설에도 나오는 것처럼) 학폭은 구제 수단이 있고 본인만 독하게 마음 먹으면 뭐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여기 나오는 애들처럼 어린 나이에는 모든 게 똑같이 지옥 같은 순간입니다. 누가 낫고 못하다고 등급을 매길 게 아니죠. 뭐 그래도 진짜 큰 사고를 치고 어디 가기 직전인 이수가 제일 딱하긴 합니다.

그런데 아마 많은 독자들이 그리 느끼겠지만, 강민이는 생긴 것도 번듯하지, 부모님 직업도 빵빵하지, 본인 공부 잘하지 여기 다른 세명의 노답 케이스와 비교될 인생이 아닐 듯한데 왜 (초대되어) 온 걸까요? 이게 포인트입니다. 이걸 이상하게 생각한 독자라면 거기까지 책 제대로 읽은 거죠. 책의 진짜 반전이라 할 만한 놀라운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큰 사고를 친 애까지 끼었으니, 할머니와 멸치 아저씨(ㅋ)는 와 이번 케이스는 진짜 장난 아니다 싶었으나, 오히려 요번 애들이 진짜 착했다고 작품 결말에서 리뷰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정체(내력)도 알려 주는데, 뭔가 마음이 찡해지는 느낌이었어요. H G 웰즈의 <더 월>이란 고전 단편이 있는데 그것도 어린이가 벽에 난 신비스러운 문(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작품과 함께 한동안 제 마음에 오래 남을 듯한, 마냥 해피 엔딩도 아니면서 여운이 긴 그런 멋진, 재미있는 소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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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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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블랙 아이드 수잔"은 꽃 이름이기도 하고, 이 소설 속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의 여성 피해자들을 가리키는 (안타까운) 별명이기도 합니다. 원제는 "수잔"뒤에 복수 접미사 -s가 붙어 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끔찍한 사건의 여성 피해자들이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자가 범인이라고 여겨, 그자를 진범으로 지목한 검찰 측에 유리한 증언을 했건만, 이후에 벌어지는 여러 수상한 사건이나 직감 등은 혹시 그자가 진짜 살인마가 아닐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경우 평범한 이들이라면 오랜 동안 양심의 가책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 내가 입은 피해가 얼마인데, 내가 혼자서 그를 찍은 것도 아니고 공권력에서 그를 범인으로 밝혀냈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이러면서 나의 상처를 달래는 데 필요한 모든 분노 발산을 그에게 집중할 것 같습니다. "범인이 아니면 어쩌지?" 그건 지금 너무도 힘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나도 힘들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도 미개하고 무책임하며 사악한 생각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무기력한 여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했다는 누명을 썼다면, 대체 그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내가 힘들다고 아무나 골라잡아 화풀이를 해도 되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기막힌 문제는, 그 사람이 진범이 아니라면 정말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악마는 여전히 밖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리라는 점입니다. 소설 속에도 내내 암시되듯, 진범은 다시 무고한 희생자를 찾거나, 심지어 꼴에 보복이랍시고 피해자를 향해 다시 걸어올 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진상을 규명하여 그 일을 저지른 진짜 범인을 밝히는 일은, 어떤 거창한 윤리적 결단까지도 못 되며, 당장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억울한 사람을 감옥 안에 잡아 넣고 혼자 마음 편하려 드는 자체가, 살인마보다 별반 나을 것도 없는 악독한 심성의 발로입니다. 살인 혹은 어떤 범죄의 진상을 밝히는 건, 변덕스러운 대중이 그때그때 모여 합의 비슷한 과정으로 결정될 성질이 전혀 아닙니다.

이 소설 중에 자주 언급되는 OJ 심슨 사건은, 전직 미식축구 슈퍼스타이자 영화배우, 코미디언이었던 심슨이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도주하다가 체포되어 끝내 유죄 판결을 받았던, 25년 전 미국을 뒤흔들었던 소동이었습니다. 사건의 전말도 드라마틱하기 짝이 없지만,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재판 과정도 엄청 센세이셔널했습니다. 이 소설 p174에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 조니(자니) 코크란은 당시 그의 변호사였으며, 현란한 말재주(때로는 거짓말)로 배심원단을 들었다 놨다 한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였습니다. 결코 존경스러운 사람은 못 되지만, 일을 맡기려면 저런 사람한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아마 누구나 했을 겁니다. 반면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당하고 일시적으로 눈까지 멀게 된 테사는,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려고 아빠가 붙여 준 의사를 때로 비웃고 속이기도 합니다. "와, 이런 사람한테 아빠가 돈을 내야 하나?" 어설픈 위안의 시도에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찹니다.

소설의 큰 줄기는, 이제 아이(이름이 찰리지만 딸입니다) 엄마가 된 그녀가, 과학의 발전으로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가 가능해진 지금 진범의 존재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충격으로 눈이 멀었다가 회복해 가던 사건 직후를 왔다갔다 하면서 말입니다. 25년 전 수잔 서랜든 주연, 존 그리셤 원작의 영화 <의뢰인>에 보면 어느 경박한, 돈에 눈이 먼 기자 때문에 피해자의 신원 일부가 밝혀져 마피아 암살자가 병원까지 꼬마를 죽이려 찾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이 엄마가 된 그녀도 무심히, 아니 섬세한 의지의 발로로, 옛 피해 현장을 찾아갔다가 집주인에게 사진을 찍혀 이제 미국, 아니 온 세계의 SNS망을 탈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래 전이라면 20여년이라는 세월의 전후가 사람 사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다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었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그리고 우리가 사는 바로 지금) 그새 발전한 과학기술의 성과로 사람들이 잘못 알아왔던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악마와 같은 가해자야 말할 것도 없지만, 피해자를 비롯 우리 모두도 나 자신의 방어를 위해, 혹은 상대의 악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거짓말을 피치 못하게,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해 댑니다. 1인칭 시점인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대목은 오히려 이런 대목들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참으로 다양한 동기에서 사소한 거짓말을 하고, 그 과정과 동기를 우리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그녀가 주인공이고 피해자라서라기보다, 사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매번 정직하지 못하기에 그녀에게 은밀히 공감합니다. 소설 속에서 내내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단어가 "공범"인데, 이 과정에서 우리 독자들도 복잡다단한 그녀의 심리 동선을 따라가며 뭔가 모르게 "공범"이 되는 느낌입니다. 요즘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를 제재로 삼은 이런저런 대중소설이 꽤 많지만, 이 작품은 좀 결이 다르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기에 읽으며 새로운 감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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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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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이래 사람은 개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되고, 어떤 환경이라든가 그 부모의 신분이라든가 하는 개인 외적 문제에 대해서는 함부로 책임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는 게 컨센서스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나도 우리들은 여전히 누군가에 대해 고루한 편견을 가지는 게 보통이죠. 일단은 이게 잘못입니다. 그런데 당하는 쪽 입장에서도 뭔가 방어논리를 만들려고 터무니없는 날조된 사항을 지어내어 오히려 (가해자의 비열한 시도를 흉내내어) 역공을 펴기도 하는데, 일단 가해자가 잘못이기에 자성은 해야하지만 피해자 측의 저런 터무니없는 시도도 꼴사납거나 한심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여튼 이런 공방이 아주 꼬인 양상으로 펼쳐지기도 하기에, 무엇의 선악과 당부를 가르는 게 상당히 어려운 세상이 된 건 틀림없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도 가리기가 어렵거니와, 그 이전에 아예 "누가 누군이지도" 그리 쉽게 판명이 나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제는 말이죠.
 
저는 처음에 책을 펼쳤을 때 나오는 기도라는 이름의 변호사가, 이 시작의 액자에만 잠시 나오고 이후에는 다른 주인공들이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고, 이 제법 긴 소설의 주인공 겸 화자는 내내 "기도"입니다. 이름도 좀 이상하지만(책 p77에 "기도"의 한자 표기가 城戶(성호)라고 나옵니다), 이 주인공은 자이니치, 즉 재일한국인입니다. 묘하게도 일본 메인스트림 작품에 재일동포 줄신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었는데 작가 히라노 선생이 창작 당시부터 이 멋진 작품이 한국어(제법 큰 시장이자 우호적인 독자들이 포진한 나라)로 번역 출간될 걸 의식은 하지 않았겠나 짐작합니다. 재일동포에 우호적인 시선과 주제라고 해서 한국 독자 입장에서 무조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건 아니고, 사실 뭐가 되었든 거론 자체가 좀 불편한 게 솔직한 느낌입니다. 그런 거론은 보편적 휴머니즘과 연관이 되어야만 하며, 언제나 그래 왔듯 히라노 선생은 이번에도 성공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독자의 느낌을 떠나서도 말입니다.

문구점 주인네 딸 리에는 누구한테나 사랑 받는 참한 처자입니다. 저 아이는 계속 그 인생이 행복하겠거니 하는 짐작과 축원이 누구로부터도 나올 만한...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운명의 장난은 상당히 부당한 방향으로 그녀의 생을 끌고 갑니다. 마치 불멸의 신들이 테스(더버빌가의 그녀)를 갖고 놀다 한 생을 끝내었듯...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처음에 이 여인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줄 알았습니다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여인은 한 번은 성격이 잘 안 맞았던 건축가와 결혼했다가 둘째 아이를 잃고 이혼했으며, 다른 한 번은 "(나중에 드러나길)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했다가 사별했습니다. 이 남자, 즉 "한 남자(소설의 원제이기도 한 아루오토코)"의 두번째 결혼은, 신분 사칭이었음이 드러나서 결혼 자체가 무효가 됩니다. 호적에 그 사실조차도 남지 않게 된 결합. 이 결합의 상대방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 기도 씨는 동분서주하며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충격적인 여러 사연들이 소설의 줄기를 이룹니다.

책 뒤의 역자 후기에도 나오지만 작가 히라노 선생은 다소 문어체적인 스타일입니다. p12에는 "이제는 사어(死語)가 되다시피한 표현이지만 그는 "인물(人物)"이었던 것이다."란 문장이 나오는데 우리 현대 한국어에서는 이런 문맥에서의 "인물(人物)"이 사어일까요? 이런 뜻을 강조하고 싶으면 아마 "훌륭한" 등의 수식어를 붙이는 게 보통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어가 맞겠네요. p19에는 "부절(符節)이 안 맞네"란 표현이 나오는데 한국어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용비어천가 1장에서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이 동부하시니"라고 할 때, "동부(同符)"가 바로 "부절이 맞다"는 의미가 됩니다. p68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p380의 후주에 보면 여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대략 유흥업소 여성 종업원(완전 매춘부까지는 아니고)을 가리키는 이 단어도 이제는 한국에서 듣기 힘든 듯합니다. 예전 소설책 중에서나 볼 수 있던...

변호사인 기도 씨는 참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전 처음에 ㅎㅎ 이 기도 씨가 혹시 우리가 찾는 그 사람 본인이며,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처럼, 혹은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전혀 아닐 것 같은 그 사람이 바로 범인이라는 충격적 결말이 아닐까 했었는데... 그건 아니었구요. 자신에게 딱히 이익이 될 것도 없는 사건을 자진해서 맡아 기어이 진상을 밝히고 마는 멋진 아저씨입니다. 할 일이 없어 파리만 날리는 변호사인가 하면 그건 또 전혀 아니고 본문 중에 오십 건 넘는 사건 처리하느라 몹시 바쁜 몸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도 씨는 재일교포 3세입니다. 아내인 가오리 씨는 꽤 미인이며 집안도 훌륭한데다 흠 잡을 데 없는 일본인(아, 물론 평균적인, 우리 입장에서는 유감스러운, 일본인의 시선에서 그렇다는 거고요) 혈통입니다. 이런 부인이 간혹 등장하여 남편에게 불평이라도 토로하는 대목에서 우리 한국인 독자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일본인 남편한테였다면 저렇게 했겠는가. 물론 이 역시 독자의 역편견이며 괜한 피해의식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여튼 저는 그런 느낌이 가끔 들었었네요. p123에서 부인이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의심하는 걸 보고 혹시 이건 소설의 반전을 위한 복선이 아닐까 생각했었으나 뭐 그건 아니더군요.

기도 씨는 어떤 동기에서 이런 일을 이어나갔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소설을 다 읽은 독자라면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작품 중에서 설명이 좀 과할 만큼 자세하여 약간 피로감이 들 정도였죠. 대화 중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긴 사람이라면 대개 어떤 불순한 동기가 끼어든 게 보통입니다. p53에서 "(동생이) 범죄자들하고 어울리기라도 하면 우리 여관은 끝장"이라 떠드는 교이치의 사설이라든가, 소설 중반부쯤 학생시절 무슨 비디오를 찍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헛소리를 늘어 놓는 그 교도소의 호적 사기꾼도 마찬가지입니다. p65에서는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흔히 볼 수 있는"이란 말이 나오는데, 비단 가정폭력범뿐이 아니라 모든 불량배들, 특히 사이코패스 경향이 짙은 질 나쁜 인간들이 공통으로 보이는 모습이고 태도입니다. 아무도 관심 없는, 게다가 날조까지 된 이야기를 뻔뻔스럽게 참 길게도 늘어놓죠. 이런 건 뭐 "중년 형제간의 복잡한 심리(p52)" 정도로 얼버부릴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이렇게 아주 질이 나쁜 인간은 반드시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 합니다. p280 교이치의 무심한 말, "선생 망상이 아니냐" 어쩌구하는 소리는 참 기가 차지만 어쩌면 이런 투박하고 나쁜 말에 일말의 진실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씁쓸하게도 세상은 그리 고상한 곳이 아니니 말이죠.

특히 교이치 같은 사람은 참 어이가 없죠. 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는가 싶을 만큼. 정작 불량배들과 어울린 건 자신이 아닙니까? 착한 둘째 아들을 끝까지 구박하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다고 한 그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부모들이 왜 이렇게 지네 아이들을 차별했을까에 대한 답은, 소설 결말 근처까지 가서 미스즈의 회고에 잠시 암시됩니다. 외모가 보잘것없고 약간 바보 같았다는 평가가 나오죠. 하필 그런 남자와 사귀기로 한 (미인이었던) 미스즈의 동기에 대해서는 역시 그 대목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p317에는 "어떻게든 나(미스즈)와 한 번은 자야 굴욕감이 해소되었을" 교이치의 심리에 대해 그녀가 아주 노련하게 설명을 합니다. 세상을 이런 동기에 의해 사는 인간도 우습지만 있기 마련입니다. 뒤에는 르네 지라르의 이론까지 동원되는데 약간은 현학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현학적인 대목이라면... p55에서 기도 변호사가 어린 아들과 이런저런 소통을 하는 장면에서도 나옵니다(제 느낌으로). 그는 여기서 울트라맨과 나르키소스의 변신을 연결짓는데 ㅎㅎ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참 뒤 p346에서는 아이에게 "답을 아직 못 해줬다"고 하며, 다시 p349에서 오비디우스의 고전 <변신 이야기>의 일부를 길게 인용합니다.

소설 속에는 여러 바(bar)라든가 음식점 등이 등장하는데 좋은 곳일수록 멋진 음악과 함께하는 게 보통이죠. p87, 또 그 후주가 있는 p381에는 조 코커가 언급되는데 국어원의 표준 표기법에 맞춰 조 코커라고 하면 약간 귀에 설지만, 우리들도 다 아는, 허스키한 창법의 대명사처럼 꼽히는 "조 카커", 바로 그 사람이죠. 이 노래 말고도 영화 <사관과 신사>의 주제곡이었던 "Up where we belong"을 제니퍼 원스와 함께 부른 가수입니다. 남녀 듀엣곡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습니다. ㅎㅎ

p118에는 3D 프린터로 만든 노벨티 때문에 뇌손상을 입은 아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현재는 3D 프린터가 그리 처음 예상처럼 대중화되지는 못했지만, 사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라며 전개될 세상의 모습은 이에 가깝기는 합니다. 세상이 바뀌려면 법이 먼저 정비가 되어야 하죠. 히라노 선생이 법대 출신이라서 작품에는 이런 언급이 자주 나옵니다. 작품 맨 앞에 "어설픈 법학도였기에 (기도처럼) 제대로된 법조인을 만나면 주눅부터 들었다"고 한 건 어느 정도는 히라노 선생의 자기 고백이겠습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서 그나마 이런 반응이고, 양심이 썩은 쓰레기는 오히려 뻔뻔스럽게 사이비 이론부터 들이대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며 저능한 안심을 하고선 말입니다.

p120에 상속격차규정이란 말이 나오는데, 한국에서는 글쎄 모르겠습니다. 상속분에 적서의 차별이 있었는지? 장자와 그 아래 형제들 간에는 차별이 있었지만 말이죠. 몇 년 전에 어느 정치인의 사생아가 유산 청구를 했었는데 엄연히 법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리 탈법 수단을 써서 빠져나가는 걸 보고 참 기가 막히더군요. 한국에서는 (일본과 달리) 일찌감치 이런 위헌 상태가 해소되었으나 법이 바뀌면 뭐하겠습니까. 법을 대놓고 어기는 철면피들이 있는데.

p168에는 호적 데이터베이스화 이슈가 나오는데 이런 건 확실히 우리 한국이 일본을 앞서가는 거죠. 추정 300일 문제 역시 한국에서는 입법적으로 오래 전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유전자 감식 기술이 얼마나 발전되었는데 이건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죠. p172에는 개인번호 도입이 언급되는데 한국은 이미 1960년대부터 제도화되었습니다. 아직도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개인정보 침해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p323에는 "로마제국 영속을 전제로 한..."이라고 하는데 역시 히라노 선생 답습니다. 제국은 망해도 법은 영원히 남았습니다. p356에는 호적을 등기부와 착각하는 사장의 대사가 있는데 이런 걸 픽션으로 꾸며내는 법학도 출신 작가가 참 귀엽죠.

일본에서 요즘 부쩍 혐한 세력이 늘어 뜻있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죠. p140에는 "극우의 배외주의"라는 말이 나오며, p339에서도 다시 "배외주의"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p140과 그에 연관된 후주에서는 1923년 관동 대학살 당시 특정 구절을 발음해 보라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변별하는 수단으로 썼던 사실이 언급되는데, 이런 걸 shibboleth라고 하죠. 기독교 구약에 그 연원이 있을 만큼 아주 오래된, 악명 높은 풍습입니다.

p161에는 헤이트스피치 규제와 표현의 자유 간 충돌이 이야기되는데 아무리 나쁜 행동이라도 헌법상의 원칙 또한 존중되어야 하므로 이런 규제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p224에서 사형은 신체형이 아니라 생명형인데 작가께서 잠시 착각한 듯합니다.

주인공인 기도 변호사는 훌륭한 사람이며, 재일 3세라는 신분상 열등감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망정 그 인품에 대한 평가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p201에는 "취미처럼 X 찾기로 현실도피"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며, p29에는 아내 가오리가 함께 카운슬링을 받으러 가자고도 하나 착한 사람이니까 이런 최소한의 자기 성찰도 시도하는 겁니다. 나쁜 인간이면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합리화죠.

미스즈도 재미있는 캐릭터입니다. p301의 "어떻게든 겁을 주려고 했으나 어설픈 게 그야말로 다이스케 같은 느낌"이라든가, p311의  "뭔가 진짜 눈에 선하네요." 같은 말이, 마치 어머니처럼 다이스케를 훤히 꿰고 하는 소리라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p322에서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한 답은 p328에 나옵니다.

자신이 아닌 남을 흉내내어 사는 게 그토록 큰 유혹, 흥분(p60), 쾌감, 혹은 힐링을 줄까요? "한 남자"의 깊고도 근원적인 고충에 대해서는 작품 중에 충분히 설명이 나오므로 공감할 수 있으나, 일반론으로는 어떻겠는가 하는 겁니다. p360에는 그 "한 남자"가 실제로 다니스케가 유년기에 검도를 배웠다는 걸 알고 그것까지 거짓으로 지어내어 하는 말이 나옵니다. 정말 지독하죠. 안타깝긴 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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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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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인 덕에 세계에 자랑할 국보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보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잘 아는지 스스로 반성하거나 공부할 시간을 잘 갖지 않습니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부흥에 성공했다거나, 세계에 내세울 만한 좋은 기업을 여럿 갖고 풍요롭게 사는 것도 물론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세계 어디에도 없는 놀라운 문화재들을 이처럼 보유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더 자랑스러운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 실린 문화재들은 아예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것들이니 말입니다.

p56에는 "왜 국보 1호가 숭례문인가"라는 토막 상식이 나옵니다. 사실 이는 여러 매체나 시민단체 등에서 예전부터 지적했던 이슈입니다. 과연 남대문이 국보 1호의 자격이 있는지의 문제가, 2008년에 화재로 전소되기 전에도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어차피 일제가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부여했을 뿐이니 아무 의미를 둘 게 없다지만 그래도 국민감정이 꼭 그렇게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는 "남대문이 국보 1호"라는 일반상식이 돌고돌다 그간 너무 많은 가치가 자연스럽게 부여된 탓이 클 뿐입니다. 어차피 전면 해제 후 새 번호를 부여한다 해도, 이번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이후의 문화재 서열(?)을 놓고 또다시 아무 의미 없는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죠. 그 외, 국보지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저 뒤 p310 이하에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은진미륵은 1970년대에 우표 도안으로도 쓰였고 그 친근한 모습 덕분에 인지도가 꽤 높지만 오랜 세월 동안 "보물"의 지위였다가 2년 전에 국보로 격상되었고 책에도 이 사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견훤과 그 패륜의 아들 신검 간 상쟁사가 잠시 언급되는데 황산벌을 이 불상이 멀리서 굽어보는 그 위치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알듯 황산벌은 이 고사의 276년 전(p105)에도 다른 큰 일의 무대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 뒤에는 관촉사 창건 설화가 나옵니다. 이름이 통칭 은진미륵이지만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정식 명칭이라고 저자는 환기합니다. 왜 민중이 오랜 동안 이 상을 미륵으로 불렀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정제미와 이상미와는 달리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았다는 게 책에 나온 구절인데, 최근에는 고려 시대의 조형에 대해 학계에서 전면적으로 독자적인 미의식 추구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쪽입니다.

팔만대장경의 가치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널리 가르치는 편이지만 종교편향이라는 오해를 부를까 우려가 있어서인지 최근에는 그리 강조를 안 하는 듯합니다. 책에 나오듯 추사 김정희도 "판각이 마치 신선이 쓴 듯한 필체"라며 한참 후대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국난 중에 이런 성과물이 나왔다는 사실도 놀라우며, (그런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으나) 만약 우리가 국보를 단 한 점만 보유할 일이 있다면 단연 첫손에 꼽힐 만합니다. 실록 완역으로 최근 널리 인용되는 고사가 "왜인들이 자주 찾아와 특히 세종에게 대장경을 내어줄 것을 간청 혹은 위협했다"는 일화입니다. 정부에서 대내외적으로 숭유 억불책을 쓰니, 필요도 없는 대장경은 우리에게 준들 어떠겠냐는 참으로 뻔뻔스런 작태였죠. 책에는 이 당시 존불정책을 편 무로마치 막부의 그 나름 급한 사정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임란 당시에는 왜의 모 승려가 "팔만대장경이 훼손되면 일본이 망할 것"이라며 경거망동 자제를 촉구했다고도 합니다. 세종 자신이 불교를 깊이 믿은 이유도 있지만, 여튼 먼 훗날을 내다보고 국보를 미리 지킨 그 혜안에도 감탄하게 됩니다.

p139에는 "영국인은 인도를 잃을망정 셰익스피어를 지키겠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고 한 고유섭의 말이 인용됩니다. 셰익스피어 운운은 저명한 평론가 칼라일의 것인데 현재는 영국이 아대륙을 포기한 지 이미 70년이 넘었고 저 말 자체가 제국주의의 뻔뻔함을 나타낸다고 해서 지명도가 확 낮아졌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마 성장과정에서 자주 접했을 겁니다. 고유섭 선생은 이른바 "무기교의 기교"라는 명언으로 잘 알려진 분이었죠. 석굴암은 고대 건축의 한 경이에 속하는 걸작이지만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 일제가 섣불리 콘크리트, 시멘트 등으로 떡칠을 한 탓에 가치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급한 수단으로 보전하려는 최선의 시도였다는 옹호론도 있지만 현재의 눈으로 보면 그저 가슴이 아플 뿐이죠.

마르코 폴로가 황금의 나라를 찾아 떠난 게 지팡구, 즉 지금의 일본이었다고 하지만 진짜 황금의 나라는 p221에 나오는 대로 201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전시회의 별칭이기도 하듯 신라였겠죠. 국보 83호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작이지만 그 관리번호(아무리 행정기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가 83이란 사실은 잘 모를 듯합니다. 이 83호를 놓고 2013년의 저 전시회에 출품할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의 반대가 있었으나 상급 기관인 문체부가 중재에 나서 겨우 출품이 결정되었다고 합니다(p221). 야스퍼스가 극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에도 잘 나오는 것처럼 그 극찬은 원래 일본 고류지(광륭사)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다루기 힘든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83호가 미적 가치가 더 뛰어나다는 게 저자의 단언이고 또 중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더욱 화제가 되었지만 한글 창제에 대해서는 승려 신미가 기여했다는 설이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실록을 인용하여 세자(나중에 문종이 되는 분), 딸 정의공주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추정합니다. 그 따님의 총명함에 대해서는 민간기록인 <죽산안씨 대동보>(즉 해당 가문의 족보입니다)에서 따로 언급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총명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멍청한 자신의 지능에 대한 열등감과 전문성 부족 때문에 오히려 피해의식에 쩔어 있는 한심한 고자질쟁이도 있는 법이죠.

미술품에 대한 평가는 확실히 시대가 바뀌면서 같이 변천하기도 하나 봅니다. 예전에는 고려대의 작품에 대해 앞 신라대의 그것에 견줄 바가 못된다는 듯 폄하하는 입장이 보통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죠. 책 p313 이하에서, 2013년 미국 메트로폴리탄에서 연 전시회에서 정작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 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는 석굴암과 비슷한 시기인 8세기로 그 제작 시점이 짐작되며, 물론 고려가 아닌 신라 代입니다. 그러나 책에서도 설명하듯 철불 양식은 중국에서도 송대에 접어들어 널리 퍼졌는데 우리는 이미 이 시기에 철불을 능숙히 만들었으며 철불은 이후 고려대의 지배적인 양식으로 자리잡습니다. 이 작품은 미국인들의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우리의 평가는 박한 편이어서 아직도 국보는커녕 보물 등 어떤 형식으로도 문화재 지정이 안 된 상태입니다. 이 작품은 책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라 나옵니다만 부여군 등에서 최근에 연 전시회에서는 "국외 반출로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와야 할 문화재"를 언급하는데, 이분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닌 향토, 본향으로 돌아와야 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재가 영화스럽고 과거가 다소 부끄럽다고 해도, 조상님들의 노력과 은혜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우리가 없는 법입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데 하물며 찬란한 문화유산까지 이렇게나 많이 남겨주셨으니 그 은공이란 이루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보다 밖에서 더 높이 평가하고 감탄하는 우리들의 국보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한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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