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ft Me 시프트 미 - 포스트 코로나 시대, HIP하고 DEEP하게 나만의 일을 찾는 법
이예은 지음 / 42미디어콘텐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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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 세대는 주변의 대세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것에 나 자신을 최대한 끼워맞추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에 반란을 일으키고 싶거든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나의 호흡법에 집중해라. 그것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p29)

어떤 사람은 고생 끝에 많은 돈을 벌고서도 구태여 고층 건물 위에 올라가 그 막대한 대가를 허공에 뿌려 버립니다. 돈은 많이 벌었으나,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희생한 대가(양심, 자존심, 소중한 꿈, 사랑하는 사람 등)가 너무도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을 성취한다 해도 자신의 고유한 호흡, 자부심, 이상 같은 걸 잃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극한의 허무감을 느끼는 존재인데,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나의 호흡을 지킬 것을 권하는 거죠. 나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말로 읽힙니다.

회사는 내게 4대보험, 일정량의 급여, 사회적 신분 등을 제공하는 고마운 곳입니다. 과거에는 회사가 인재를 갈구했으나, 지금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회사 밖에서 성장하기 힘듭니다. 즉 예전과 달리 회사는 일종의 학교와도 같으며, 어느 명문대라 해도 결국은 회사 입사를 위한 프렙 스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의 회사들은 그 정도로 큰 위상을 가졌습니다. 이러니 대한민국의 모든 청춘들은 대학 입시라는 험한 관문을 뚫고도 다시 취업 준비에 4년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직장이란 그만큼이나 소중한 목표요 가치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좀 다르게 말합니다. 즉, 직장과 직업은 다르다는 뜻이죠. 직장이란 한 곳을 계속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러기도 힘듭니다. 능력 있는 인재는 여러 회사에서 콜을 받으며 그러기에 이력서에 여러 직장이 적절한 간격을 두고 표시된 사람은 대개 능력자로도 인정 받습니다. 역시 과거와는 달리 말입니다. 물론 스포츠에서도 원 클럽 맨이 인정 받듯, 한 직장에서만 잔뼈를 키운 분도 그 나름 대단한 것 맞습니다.

직장이 주는 안도감과 소속감, 긍지 같은 건 대단합니다. 내가 삼성에 다닌다, 포스코 혹은 현대자동차 사람이다 이러면 동료들 사이에서 뭔가 다른 신분을 가진 듯 뿌듯합니다. 이런 긍지는 또 누구나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직장보다 중요한 건 직업이다.(p72)" "지겹게 반복되는 취업과 퇴사에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p73)"

사실 좀비처럼 직장에서 눈치나 보고 아무런 열의나 적극성 없이 그저 중간만 가자는 식으로 부화뇌동하다가, 결국은 부적응자나 마찬가지로 축출된 후 뒤에서 회사 욕이나 하는 신세로 떨어지느니, 뭐 짤리면 짤리는 거다 하는 각오로 당차고 소신 있게 일하는 사람이 요즘은 훨씬 환영 받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라야, 매순간 부과되는 격무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도 가꿔 나가고 뭘 배워도 맥락 있게 배우면서 다른 인재로 거듭나는 겁니다. 이런 이치는 밀레니얼이 아니라, 어느 지역 모든 세대에 두루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수한 대표라는 분은 "퇴사학교"를 이끌면서(p94),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퇴사자, 혹은 퇴사를 준비하는 이들을 교육하는 분입니다. 본인부터가 퇴사한 후 백수 신세로 많은 치열한 고민 끝에 해답을 찾은 분이라서 이런 야심찬 기획을 펼칠 수 있었다는군요. 30대 중반이면 물론 젊은 나이이지만 사람에 따라 그리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자처럼 밀레니얼은 아니지만, 이런 참신하고 냉철한 마인드를 지녔기에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이들을 리드할 수 있었겠죠. 어찌보면 서른도 많다면 많은 나이인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심각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게 멋진 성취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밀레니얼 세대인 저자의 소중한 깨달음만 실린 게 아니라, 사회 각처에서 자신만의 포부와 비전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멋진 인생들이 많이 소개됩니다. 이런 분들에게 독자들은 한번 찾아가 볼 수도 있겠고, 또 구태여 그러지 않더라도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인생을 엿보는 일 역시 많은 공부가 되는 간접 체험입니다.

임영복 선생은 나이 스물 여섯에 뜻을 세운 분인데, 이 책 저자가 대안학교를 다닐 때 자신을 이끈 스승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인 듯합니다. 이분이 "라이프워크 수업"을 펼치는 사하라 인생 학교는 제주도에 소재했는데, 제자와 오랜만에 조우해서도 "육지 사정은 어떻니?"라고 묻는 모습부터가 흥미롭습니다.

"천재는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인가?" p99에는 피아니스트 김요한 군이 나오는데, 천재답게 그는 학교 정규 교육이 아니라 홈스쿨링을 택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처럼 홈스쿨링을 하는 이들이 많으며, 남들과 다른 재능을 가진 어린 학생들이 예민한 시기에 상처 안 받고 자신의 재능을 올바로 키우는 데 하나의 방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천재는 물론 타고납니다만, 주변의 질시와 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 자주 마주치게 되는 좌절(어떤 천재라도 모든 문제를 힘 안 들이고 해결하는 건 아니며, 아인슈타인이라 해도 죽을 듯 치열한 모색의 과정을 거쳐 광전자 원리 등을 발견한 것입니다) 등을 기어이 극복 못 하고 평범 이하의 인생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후천적인 다듬기 과정은 그래서 재능 못지 않게 중요하며, 심지어 재능도 뭣도 없고 그저 미칠 듯한 집념만 가진 이에게 추월당하기도 합니다. 성취와 성공의 틀은 사회가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요즘은 선택 장애, 결정 장애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어찌보면 행복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풍요로워졌고 그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후회가 없을지를 고민한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대해 조금 다른 결의 평가를 합니다. 내 스스로가 매번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갖고 살아왔다면 결정장애가 찾아오기 힘들다는 뜻에서 저자는 결정장애를 이제 그만 떨쳐버리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음식점에서 메뉴를 고를 때부터 친구들과 놀러갈 행선지를 고를 때까지 시원시원합니다. 결정이 시원시원하다는 건 남들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한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갈등할 때 당사자보다 그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고 답을 대신 구해주기까지 합니다. 매 순간 자신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하고 밀도 있는 방식으로 고민한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성취입니다.

앞에서 직장보다는 직업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p147에는 이른바 "덕업일치"에 대해 저자가 느낀 바가 서술됩니다. 여기서 "덕"은 물론 오타쿠에서 온 말이므로, 저 "사자성어"는 몰입하는 취미와 생업이 일치하는, 참으로 행복할 경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 서술이 참 일품인데, 앞서 저자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었죠. 그런데 참된 덕업일치 역시 자신이 "최애하는" 바를 직업으로 승화한 경지이니, 저자가 이 책에서 지금까지 강조하던 지향점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책의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할 수 있겠네요.

능수능란, 자유자재. 어떤 사람이 설령 직장에서 "그 사람 성실하긴 해" 같은 평을 들어도, 일솜씨에 개성이나 탁월함이 없고 그저 남들 하는 만큼만 무난하다는 정도라면, 요즘 같은 시대에 환영받기가 어려울 겁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에 맞게 능력과 적성을 계발한 이라면, 설령 천재 비슷한 존재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필드에서 그야말로 자유자재, 능수능란의 경지로 일을 해 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혹 급여가 적어도, 매 순간이 참된 자아실현의 희열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한 게 뭔지를 알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반면 시기와 질투, 열등감에 시달리고 늦은 나이까지 자아상이 확립되지 못한 채 미숙한 단계에 머문 사람은 그 곁에만 가도 실의와 불길함, 좌절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이죠.

"질문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다.(p208)" 진지충은 결코 욕이 아닙니다. 매 순간 진지하게 살지 않으면 결국 정신이 딴 데 출장간 좀비가 되기 마련이죠. 진지하다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주어진 과제를 푸느라 몰두한다는 걸 뜻합니다. 이렇게 생을 충실히 산 사람이라야, 미리 숙제를 마치고 자신만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초등학생처럼 삶의 여유를 더 알차게 향유합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파악하고, 그런 나 자신을 참되게 사랑해 본 사람이라야 공동체 안에서 제 자리도 찾고, 타인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로 거듭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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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 - 의미로 읽는 인류사와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
이도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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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은 앞으로 모든 것을 바꿔 놓으리라고들 합니다. 사회의 일부 구조나 기능이 개선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 신념, 사회에서 필요한 교육과 기술, 인지 능력, 사람과 사람이 교류, 소통하는 방식 등을 포함한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난 1차, 2차, 3차의 혁명 때와는 달리, 이번의 변혁은 뭔가 기존의 생존 방식을 위협할 것 같다는 불안에 다소나마 시달립니다. 여태의 변혁이 우리의 생활에 물질적 편의를 가져오기만 한 결과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불안해한다고 불확실한 미래가 개척되지는 않습니다. 미래의 어떤 요소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면, 이를 적극적으로 대처, 연구하여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나아가,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사회 구조 안에서 우리가 보다 진취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게, 우리 스스로를 개조하고 거듭날 필요도 있습니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준비를 갖추려면,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어떤 그랜드 비전을 배우고 우리의 내면, 마인드셋에 이를 장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께서는 재미있는 비유를 듭니다. 어떤 여학생이 그동안 유지하던 긴 생머리를 자르고 느닷 파마로 변모했다면, 이는 "너를 친구에서 연인으로 전환하여 사귀고 싶다."는 기호적 언표라고 합니다(p31). 그러나 저 같으면 여성의 생머리가 훨씬 좋을 것 같은데... 여튼 저자는 다시, 진평왕 대에 활약한 승려 융천사의 예를 들며 그가 창작한 <혜성가>가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고 합니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그 샘솟는 에너지를 건설적 국가관으로 승화하여 참신한 상징을 앞세운 행동에 나서지 않는 나라는 이미 부패하여 죽은 나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변혁의 시대에는 젊은이들부터가 과감한 행동의 혁신에 나서야 합니다.

"과학기술지능과 결합하지 못할 때 은유와 환유는 주술적 사고를 낳는 동인으로 작용했다(p60)." 사실 주술과 미신도, 인간의 간절한 바람을 멀리 하늘에 전하려는 몸부림의 소산이었으며, 설령 천리(天理)라는 게 없다손 쳐도 이런 간구가 다시 인간세상에 전해져 정의와 도덕이 관철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은유와 환유는 부족한 대로 인류의 지혜와 소망을 후대에 전하는 도구가 되었죠.

2019년에 에이비 보가드 등의 연구자들은, 4000년 전에 유라시아에서 본격적으로 불평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인용합니다(p81). 사실 기후나 지질상의 재앙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못 살게 구는 관계상의 폐단이나 모순, 구조상의 악덕이 훨씬 큰 재앙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운기 등 농기구에 대한 사적 독점의 관념이 약했고, 대여를 청하면 주저없이 빌려 주는 풍조가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농업 혁명은 생산력을 증가시킨 축복이 아니라 불평등 구조를 심화하고 굶주림, 전염병, 전쟁이라는 3대 재앙을 촉발했다고 합니다.(p85)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류의 발자취가 그저 진보와 풍요, 자각을 위한 위대한 전진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는 씁쓸한 한 방증이기 때문이죠.

페스트는 중세 유럽 인구의 1/3을 희생시킨 엄청난 전염병이었는데, 저는 언제나 궁금했던 게 마땅한 소독약, 항생제도 없던 시절 어떻게 그 죽음의 행진이 멈출 수 있었냐는 점이었습니다. 소빙기로 접어들며 기온이 내려가고(페스트는 세균성 전염병이라서 추위에 약하죠), 내성이 생겼으며, 공중 보건 정책의 확대 실시에 기대어 질병의 창궐이 막을 내렸다고 책은 정리합니다(p108). 사회 구조는 이때로부터 급격히 변모하여 부르주아 중심의 공론의 장이 열리고 급기야 시민 혁명의 시대가 열리나, 자유를 찾고 사회를 주도하게 된 부르주아는 노동 대중, 무산자에 대한 억압자로 나섭니다. 이런 식으로 진화한 사회 구조는, 결국 모든 종류의 논의에 대해 오픈된 광장을 마련하고, 지적인 발전과 체계를 구축하여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예비합니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성취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결국 종간 경계를 허물어 반인반수가 나타날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합니다. 반인반수 이야기는 애도가와 란포의 소설이라든가 H G 웰즈의 <닥터 모로의 섬> 등에 나옵니다. 윤리적으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 발상이지만, 핵무기나 생화학 무기 등도 어떤 도덕적 근거를 갖고 출현한 것은 아닙니다. 과학의 도도한 발전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종교는 더 이상 세상에 관해 결코 도전을 허용치 않는 주장들을 선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p144)." "환원주의적 사고가 벽에 부딪혔을 때 전일적 사고를 해 보는 것도 좋지만 정확한 계산을... 하지 않았기에 이는 은유의 유추로 그치고 말았다(같은 페이지)." 이 대목은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겔만 같은 천재 과학자도 때로는 의미가 불명료한 동양 고전의 인용에 기대었는데, 이는 당사자의 지적 능력 과시는 될지언정 참된 과학적 지식의 정연한 체계 구축에는 오히려 혼란만 야기하는 바 있습니다. 과학은 결론이나 방향성 모색 단걔애서도 그 엄정한 방법론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은 대자적 자유를 실현하며 인간을 유적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행위이다(p169)." 그렇습니다. 오로지 모든 가치가 노동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고는 다소 극단적일 수 있으나, 가치의 본질적 부분은 노동으로부터 비롯하는 게 맞으며, 사람은 자신의 육신으로 땀 흘려 빚어낸 결과를 보며 비로소 생의 희열과 존재 이유를 깨닫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백과사전적 지식은 고가의 돈을 주고 구입한 호화장정 세트 안에만 담겨 있고, 이를 물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른바 집단 지성의 힘으로, 몇 십 권 분량의 책을 훨씬 능가하는 지식을 인터넷상에 구축하고 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검증이 끝나지 않은 정보의 남발로 혼란이 초래될 수 있으나, 이전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활력과 정확성으로 인류는 소중한 지식을 공유하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소유 질서가 발전적으로 해체될 것을 전망합니다(p188).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자 미적 존재이고 초월적 존재이다(p230). 저자는 이 대목뿐 아니라 저 앞 융천사의 <혜성가>를 거론할 때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우국충정에서 분연히 일어난 젊은이들의 의기를 예시했습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윤봉길 의사는 홍구 공원에서 시라카와 등 침략의 수장들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져 전세계에 대한 독립과 항일의 명분을 선포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에고에 머물면 티끌 같은 의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더 큰 자아에 눈을 뜨면 수억의 생령과 화합, 합일하여 일개인의 육신을 초극합니다.

저자는 p272 이하에서 칸트의 존재론 개념을 원용합니다. 인간은 근대를 맞이하며 이성과 자유의지의 중요성에 특히나 개안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해석, 판단, 지향성, 의지, 실천"으로 그 사고 과정을 채우는데(p273), 저자는 그 예로 경찰이 단지 피붓색만 보고 무고한 흑인을 범인으로 몰아 체포하거나 과잉진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정신작용의 기제가 가능하지 않은 인간은 충동과 본능에만 지배되는 비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그저 인간에게 물리적 편리만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억압적이고 종속적인 관계를 탈피하여, 대등하고 창의적인 소통과 연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초월에의 한 걸음을 디디게 돕습니다. 이것이 슘페터가 의도한 혁신의 진정한 구현이며(p351), 초연결성을 통해 숙의 민주주의(p361), 의미의 해석이 가능한 AI의 출현(p365)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이 극복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원대한 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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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초병이 있는 겨울별장
박초이 지음 / 문이당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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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때문에 온 국민, 아니 전세계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고 감금 아닌 감금 생활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심각성을 아직 절감 못하고 규제의 눈길을 피해 이런저런 일탈도 저지르는지도 모르죠. 아니라면 그 많은 확진자(물론 억울하게 감염된 분들도 많지만)들이 어디서 병을 옮았겠습니까. 나 자신을 위해, 또 타인을 위해 좀 불편하더라도 지킬 걸 좀 지키고 살아야 하겠는데, 만약 질병의 확산세가 진정되지 않아서 공권력의 통제가 일상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뭐 이런 문제도 우리 상상 속에서 고민 못 할 바 없습니다.

절제된, 또 믿을 수 있는 공권력이 잘 통제만 한다면 다행인데, 어떤 국지적 상황에서 이를 악용한 개인이 나머지 위에 악의적으로 군림하려 들기라도 한다면? 또 이를 기화로 상호 불신, 증오, 폭력이 봇물 터지듯 나와 소통과 공존의 토대를 무너뜨린다면? 무엇보다 우리의 추악하고 잔인한 내면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외피를 깨고 나와 우리를 불편하게, 무섭게 응시한다면? 사실 마지막 이슈가 우리에게는 가장 공포스런 체험일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유리처럼 생겼다면 유리 같은 삶을 살지 않을 텐데(p63)" 영미 씨는 간호사인데 동료였던 유리를 몹시도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렸을 때 잘생기고 공부 잘하거나 운동 실력이 빼어난 친구를 동경하기도 하고 질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개 성년이 지나면서 정체감과 지향점을 어느 정도 설정하기 때문에 이런 감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영미 씨는 아직 젊지만 솔직히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상당히 미숙해 보입니다. 또, 유리 같은 삶이 대체 뭐 어떻단 이야깁니까? 사람은 모두 조건이 다르고, 남의 조건을 내게 비현실적으로 대입하며 가상의 삶을 상정하는 자체가 성인답지 못합니다.

유리 씨의 근황이 궁금한 그녀는 인터넷에다 검색을 해 보는데... 엉뚱하게도 "예쁜 여자", "여자 나체 사진" 등의 키워드를 시도합니다. 물론 동료와 함께 근무하며 어쩌다 그녀의 (아름다운) 나체를 볼 수도 있고 이후부터는 그녀 하면 대뜸 떠올리게 된 이미지가 그런 쪽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려면 인터넷 검색창에 저런 말을 쳐 본다고 당사자(의 정보)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영미 씨의 검색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으며,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할 만한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게 이 장편 후반부에서 드러납니다. p7의 "파곤에 절은"은 "피곤에 전"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리, 영미, 수연 등은 모두 간호인력인데 강원도 벽촌의 군부대를 업무차 방문하게 됩니다. 이들 말고도 김 기사, 관리팀장 최 등이 같은 팀인데 김 기사는 김 기사라고 쳐도 최 팀장은 언제나 이름이 생략된 채 "최"로만 불리거나 지시됩니다. p19에서 처음으로 소개될 때 "관리팀장 최", p21에서 "팀장 최", p78에서 "최 팀장"으로 불린 게 몇 안 되는 예외입니다.

김 기사가 운행하는 차량을 타고 군사 보호 시설 경내로 진입한 일행은 검문을 받습니다. 한국은 아직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 중이고 또 군사보호구역에서는 엄중한 조치에 따르는 게 맞으나 사실 이는 원칙일 뿐이며 실제로 민간인에 대해 FM대로의 통제가 매번 깐깐하게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p25 이하에서 이뤄지는 검문은 꽤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마치 적진에 잠입하는 미군 위장 부대가 처음 독일군을 만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 독자들은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당연하지만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는 인력들은 대개가 한창 때의 청년들입니다. "군인 아저씨"란 호칭이 자연스럽다면 어린이이거나 군복무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겠죠. 평균적인 남성 입장에서 군인은 비록 중무장 중이어도 얼굴을 보면 "어린애들"로 비칠 뿐입니다. 이런 애들한테 국방 의무를 맡기는 현실에 그저 미안해질 따름이죠. 여튼 정 일병은 한창 피가 끓는 청춘이라서인지, 남다른 미인인 유리를 보고 얼굴이 발그레해집니다. 물론 윗사람이 보면 군기가 빠졌다며 혼깨나 날 일인데, 우리 독자들은 여기서 또 불안해집니다. 뭔가 좋지 못한 일이 터질 것만 같은. p55에서 "찰라"는 "찰나"가 맞을 듯합니다.

"전 먹으러 갈까요?(p62)" 어느 동네건 녹두전이나 조개구이 등을 약간의 반주와 곁들여 파는 식당은 있기 마련입니다. 동네가 동네다 보니 젊은 군인들이 많고, 젊은 여성들을 보고는 합석을 청하는 제스처도 뭐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카뮈의 <페스트>의 한 장면 같은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상상만 해도, 내가 저 식당에 혹 있었다면 엄청 놀랐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는 사실 저런 증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옆에서 심한 기침 끝에 갑자기 의식을 잃는다면 역시 공포에 질릴 겁니다. 여기서부터는 마치 재난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발열체크와 문진표를 통해 유증상자는 검삭결과가 나올 때까지 격리할 것입니다(p90)." 증상도 없이 군부대 유관 시설에 격리된 여성 간호사들은 TV로 정부 당국자의 기자회견을 보고 있습니다. 저곳은 모두에게 오픈된 열린 세상이지만, 왠지 당국자가 불친절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기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영미 씨 등은 저 TV 너머나 자신들이 (사실상) 갇힌 여기나 별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는 듯합니다. 질병이 점령한 세상은 우리가 여태 누려 오던 자유의 부재, 박탈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강요하며, 동시에 수상쩍고 불길한 권위의 등장에 어느덧 비굴하게 적응하도록 재촉합니다.

젊은이답게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처구니없는 욕정을 못 누르는 박 상병 같은 녀석도 있습니다. 특히 박 상병은 어딘가 많이 모자란 사람 같습니다. 목적을 달성 못 하자 불과 몇 분만에 대상을 바꿔 수연에게 접근하는데, 멍청한 건지 아니면 어느 정도 즐기는 건지 분별 없이 박 상병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듯한 수연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네요.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보면 고립된 상황을 악용하여 현지인들 앞에서 신으로 군림하는 커츠대령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작품에서 대위가 그러합니다. 대위는 그저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는 현장 지휘관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 지금 새로이 들어선 질서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튈지 정확히 계산하는 맹수 같습니다. "우리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라고요!" 아무리 항변해 봐야 소용 없습니다. 대위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누구 하나가 명령 불복종의 대가로 죽어 나가도 어떤 주목도 못 받고 상황 논리에 묻힐 것이라고 합니다.

(이하 약간의 내용 누설에 주의하십시오)
앞에서 말한 팀장 최, 이름이 온전히 안 나올 때부터 뭔가 불길한 느낌을 주더니 기어이 죽습니다. 죽어도 그 경위조차 왜곡, 은폐 당한 채 억울한 죽음을 겪는데 전체주의 체제가 따로 없을 만큼 살벌하게 묻힙니다. 통제된 공간에서 현장 감독자는 반드시 가학적으로 타락할 유혹을 받는데, 대위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기나긴 임관 과정을 견뎠다는 듯 잔혹한 소 독재자로 전면에 등장합니다.

"딩동댕. 이번엔 두 사람이나 정답을 맞혔네. 영미와 수연."(p171)
대위는 새디스트 독재자일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열등감, 원한 등을 훤히 파악합니다. 정상의 도덕률이 지배할 때 차마 내놓지 못하던 못난 복수심을 이 기회에 마음껏 발휘하라고 부추깁니다. 유능한 독재자들이 발휘하는 선동 수완은 대부분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통제당하는 대중을 자신의 공범자로 만듭니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보면 평범한 양심을 가진 소시민이 어떤 과정으로 독재와 억압 기제에 순응하게 되는지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서술됩니다. 코로나 19 덕분에 통제와 갈등 사이의 본질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보게 된 우리들이, 방 안에 앉아 추위를 피하며 몰입할 수 있는 소설 같습니다. 약간 잔인한 묘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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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조종사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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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야코브 야콥센은 이름이 우스운(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성 언어학자입니다. 이름이 우습다는 건... 저 이름은 예컨대 고골의 <외투>에 나오는 불쌍한 하급 공무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이름과 같은 구조이기 때문이죠. 야콥브의 아들 야코브, 아카키의 아들 아카키... 여튼, 소설은 이제 60대에 접어든 그가 자신의 인생 중 중요 국면을 회고하며, 2인칭 청자를 앙네스로 삼아 보내는 편지 형식입니다. "앙네스"라는 이름은 물론 노르웨이식이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다른 나라의 여성 이름인) 아그네스, 아녜스 등과 같은 계열입니다. 도쿄식 발음으로 "도쿠가와"는 "도쿠앙와" 등으로 불리듯, [ng]는 [g]와 의외로 서로 자주 교체, 혹은 유사시되는 자음입니다.

그는 유독 자주 장례식장을 찾아다닙니다. 머리도 좋은 편인 그는 고인과의 각별한 연을 추모객이나 유가족들 앞에서 자세히, 혹은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이렇게까지 고인들과의 연을 섬세하게 회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유가족들에게 각별한 환영을 받을 만도 한데, 독자인 우리가 밖에서 보기로는 분위기가 왠지 좀 이상합니다. 환영을 받는 게 아니라 미심쩍인 시선 정도를 받으며 경원되는 듯도 합니다. 1인칭의 주관적인 담화를 떠나, "혹시 진상은 이러이러한 게 아닐까"하며 우리 나름대로 재구성을 해야 할 듯한 기분도 듭니다.

우리가 당혹스럽게 느끼는 건 야콥센의 장황한 언사뿐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만난 젊은 여성 윌바의 매너도 마찬가지입니다. 윌바는 아주 똑똑하고 주관이 강합니다. 언어학에 대해 자신만의 확고한 관점을 갖고 있어서, 장례식장을 찾은 손님인 야코브에게 면박을 주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원래 그런 아이이니 이해를 하세요." 야코브 씨는 성정이 본래 순한지, 아니면 어떤 다른 사정이 있는지, 현장에서 바로 윌바에게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는 객관과 학문의 세계로 곧바로 침잠하며, 이런  게 모순과 적의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가 대처하는 방식인 듯합니다.

히틀러는 2차 대전 당시 노르웨이를 사정 없이 유린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코카서스 인종의 아득한 한 분파의 순혈을 간직한 북유럽인들에 대해 경외심을 품었다고도 합니다. 책에도 간간이 언급이 있지만 노르웨이인들은 2차 대전 당시에도 영웅적인 게릴라 활동이나 사보타지를 전개했고,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엔 스웨덴, 덴마크 등으로부터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승리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건, 그저 추운 나라, 어업국, 노벨 평화상 시상 주체 정도로 알고 있던 수백만 인구의 국가가 이처럼이나 강한, 그러면서도 이지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었나 하는 점이겠습니다.

우리는 학부 시절 스펙 쌓기나 입사 시험 통과를 위해 영어 어휘책을 열심히 공부합니다. 이런 학습서는 대부분 암기의 편의를 위해 어원을 제시하고 연관된 단어들을 한 데 묶어 설명하는데, 언어학자인 야코브 씨는 소설(아니, 편지) 속에서 아주 뭐 어원 실력을 유감 없이 과시합니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어휘 설명 상당수는 노르웨이어를 출발점으로 삼지만, 그 중 또 상당수는 라틴어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거나, 현대에 와서 세계어가 된 영어 어휘를 차용한 것이라서 영어(역시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어휘와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ㅎㅎ 학창 시절 영어 공부 열심히 했던 우리 한국 독자는 별 위화감 없이 읽을 수가 있죠.

p57에 보면 reg- 관련 어휘가 주르르 나오는데 대부분은 우리들도 익숙한 것들입니다. 본문에는 없습니다만 royal도 마찬가지이며 g와 y가 서로 통한다는 게 여기서도 확인됩니다. 그런데 저는 erection(발기)도 같은 어원인 줄은 이 소설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 단어는 예의 그 윌바가 야코브 선생 앞에서 또 태연하게 거론하는데 너무 솔직한 것도 문제는 문제입니다. 물론 노르웨이어라서 Ereksjon이라고 책에는 나옵니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건 독일어를 포함 명사(고유명사가 아닌데도)를 그리 쓰는 게 저쪽 동네의 전통이죠. 아무튼 윌바나 야코브 씨나 이 분야에서 다들 선수들인지라 급수 겨루기 중 서로 피를 튀깁니다.

p80을 보면 또 g와 y(반자음으로서 w도 비슷)가 서로 통하는 예가 나오는데 독일어의 gelb(노란)와 영어의 yellow가 어원이 같다는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현재 이 각국어로는 발음도 판이하고 철자도 보다시피 저렇게나 다르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죠. 저도 고1 때 제2외국어로 독어를 배웠고 gelb 같은 건 필수 어휘였지만 yellow와 통한다고는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여기서 황금이라는 뜻의 gold 등도 나왔다고 합니다.

p80의 이 "썰"을 누구한테 푸는가 하면, 여성 택시기사 안드리네라는 분을 상대로 삼았습니다. 어.. 이분도 나중에 가면 돌아가시는데, 이분 장례식에도 야코브 씨가 참여하며 여기서 또 (이번에는) 고인의 조카뻘 되는 윌바를 만납니다. 야코브 씨는 (젊었을 때) 여성들한테 인기가 있던 타입일까요? 소설 중반에는 그의 학생 시절이 회고되는데, 인기는 고사하고 "독특한 습관"으로 말미암아 왕따, 심지어는 폭행의 타겟이 되기까지 했다는 게...

현재는 혼자지만 야코브 씨는 한때 아내가 있었고 레이둔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아내는 인문적 소양이 다소 부족한 듯하지만 열정적인 성품이었고 한때 야코브를 뜨겁게 사랑했었으나... 펠레 스크린도라는 어느 사내(?)와 야코브 씨의 친밀한 관계를 못 견뎌서 결국은 헤어졌다고 하네요. 펠레 스크린도는 어렸을 때부터 야코브씨, 아니 야코브 군 옆에 바짝 붙어다녔는데... 아내뿐 아니라 어렸을 때 그 부친마저도 이 펠레를 무지 싫어했다고 합니다.

p75에는 어느날 펠레의 존재를 알게 된 아내 레이둔과의 끔찍한 다툼이 서술되며, 이때의 충돌이 야코브 씨에게는 몹시도 큰 충격이었는지 책에서는 p223, p297 등에서 계속 회고됩니다. p108에서 윌바는 자신의 사촌에게 야코브 씨를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고 평가하며(등 뒤에서 들으라는 듯 크게 떠듭니다), p216에는 "뻔뻔스러움"에 대한 야코브 씨의 몇 마디가 나옵니다. 사실 독자가 어지간히 둔하지 않다면 소설 중반까지만 읽어도 이 펠레 씨의 "정체"가 뭔지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p378에서는 드디어 펠레 씨(?)와 야코브가 대판 싸우는데 놀랍게도 펠레는 야코브더러 참으로 뻔뻔하다며 비난하고, 야코브는 다시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뻔뻔한 건 펠레 자신이 아닌가? 사실 둘 다 맞는 말을 하는 중이며, 자세한 건 스포일러라서 여기 적진 않겠습니다.

p290에 보면 페다고그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우리 한국인들도 학부 시절 동아리 세미나 같은 걸 할 때 페다고지라는 말 많이 들어 봤을 겁니다. 책에도 설명이 있지만 이때의 ped-는 "소년, 아이"라는 어근인데, 저 앞 p169에 보면 ped- 어근에 "발"이란 뜻이 있다고 또 나오죠. 아니 "발"과 "소년"이 동의어인가? 예전에, 제가 좋아하는 고 이윤기 선생은 그의 그리스신화 해설에서 인문적(아니, 프로이트적?ㅋ)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둘의 연관성을 논한 적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는 사실 무근입니다. 적어도 언어학적으로는 말입니다(이게 사실이었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요). 여튼 그래도 저는 이윤기 선생의 우아한 문장이 참 좋았고 그 원대한 사고의 폭을 여전히 존경합니다. p288에도 참 재미있는 설명이 나오는데 본문에는 없지만 독일어 명사 Bewegung도 마찬가지로 저 예에 해당합니다. p278의 러시아어 "고로드, 그라드"가 영어 "가든"과 통한다는 설명은 얼마나 황홀합니까. p349에는 생선 대구에 관한 어휘 설명이 나오는데 마치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한 대목을 읽는 듯합니다.

한 지방, 혹은 한 나라의 언중이 두 개 층의 언어를 사용하는 현상을 두고 diglossia라고 합니다. 이 대표적인 예는 방언과 꾸란 아랍어를 다 구사하는 아랍인들, 또 보크말과 니노르스크 두 가지 언어를 쓰는 노르웨이인들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마치 언어학 개념을 현장 학습이나 시켜 주듯 야코브 씨는 그만의 소속감 혼동, 갈등을 절절히 털어 놓습니다. "나는 어디 속한 사람인가?" 이런 존재적 긴장을 생의 매 순간 느끼는 주인공으로서 그리스인 조르바, 아니 노르웨이인 야코브만큼 적절한 세팅도 아마 없지 싶습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한 리뷰를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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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게임 - 심리 편향에 빠진 메이저리그의 잘못된 선택들
키스 로 지음, 이성훈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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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는 우리가 원칙으로 여기고 대체로 지키곤 하는 많은 이런저런 명제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니 우리들도 별 생각 없이 옳겠거니 하고 따르는데, 과연 그게 언제나 옳은지, 아니면 상당한 경우들에 옳기는 한지, 이건 실제로 따져 봐야 하긴 합니다. 그 중 상당수는 통계적으로 옳고 그름이 증명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이치적으로 따져서 진위가 가려지는데 사실 전자의 경우 생각만큼 그 증명이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아니라고 판명날 경우,대체 왜 그렇게 오랜 동안 그것이 옳다고 믿었는지도 한번 가려봐야 합니다. 이것은 행동경제학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보다 우연이 많이 개입합니다. 예전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하이라이트를 보면 확실히 옛날이라서 내야 수비가 허술하구나(시프트 같은 것도 없고)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만, 이 역시 근거 없는 인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점수가 나는 장면의 하이라이트만 모아 놓았으니 내야수 사이를 총알같이 빠져나가는 케이스가 저리 많지 않았겠습니까. 여튼 "이런이런 경우에는 요러요러한 작전을 써야 한다"는 불문율이 예로부터 진리처럼 통용되는 게 야구인데(그만큼 불확실성이 크니까) 그게 일일이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게 세이버매트리션들에 의해 드러나는 게 요즘입니다. 이 책은 그 중 일부를 다뤘고, 행동경제학의 관점에 따라 "대체 그럼 왜 그런 잘못된 믿음이 통용되었는가?"도 부분적으로 다룹니다.

p88에는 재미있는 설문이 나옵니다. "모세가 방주에 몇 종류의 동물을 태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들은 보통 동물의 종류에 질문의 포인트가 있다고 여겨, 저 주어가 "모세 아닌 노아"임을 잊어버립니다. 즉 질문 자체가 오류인데도 우리는 "부분적 일치" 때문에 전체적 허위를 잊는다는 거죠. 이 책은 2020년에 나왔습니다만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에 벌써 코비드19 백신의 위험성에 대한 루머, 가짜 뉴스가 돌았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홍역 등 다른 백신 이야기인 듯합니다만 여튼 백신이 위험하다는 가짜 뉴스가 만연했나 봅니다. 가짜 뉴스들 역시 부분적으로는 진짜이고, 그 사이에 가짜 결론을 슬쩍 끼워넣기 때문에 전염성이 강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클러치 히터 신화"를 비판하기 위해 주로 끄집어 낸 것입니다. 위기에 특히 강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나아가 누구는 영양가가 있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는 신화는 사실 예전부터 논쟁거리였고, 요즘은 잦아들었지만 한국 인터넷에서도 이른바 "영양사 논쟁"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주로 패트릭 브래넌(p91)의 논거를 댑니다. 클러치 히터라는 건 DNA나 능력 요소로서 항구적인 게 아니라, "인상"에 불과하다는 거죠. ㅎㅎ 한국에서는 누가 이런 평가를 받을까요? 박정권, 김강민, 혹은 예전의 유두열? 아니면 한화의 이성열이라든가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김강민이나 이성열은 꼭 결정적일 때마다 한 방씩 날려주는 것 같던데, 이것도 다 "인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아니면 저 국제대회에 강했던 이승엽이라든가, 한대화는 어떻습니까? 예전에 허구연씨는 "거 이상하네요. 이승엽은 꼭 결정적일 때만 저렇게 상황을 끝내 주는데.." 같은 말을 했습니다만 그 역시 클러치 히터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믿음 하에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전문가들의 영역이며, 저 같은 일반 팬들은 전설과 신화에 더 기대어 열광하고 싶어합니다. 아마도 제가 독자로서 이런 반론을 제기하면, 이런 건 저자가 말하는 이른바 "당신이 준 팩트들을 기존 자신의 생각에 맞춰 새로운 설명을 만들어내는 그"에 해당할 것입니다.

많은 오류들은 그걸 거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도 인기가 좋은 이론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처럼 이를 폐기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류라고 판명이 난 후에도 말입니다. 또 책에서는 "반복을 진실로 착각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이는 히틀러 역시 <나의 투쟁>애서 선전 선동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논한 적 있습니다. 또 현대에 이르러서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캠페인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를 놓고 벌써 승부가 결정난 듯이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 시청각에 누구 이름이 많이 노출되었을 때 그가 벌써 유리하다는 전제를 깔고 하는 말이죠.

진기록과 대기록은 사실 구분되어야 하죠. 누군가가 한 시즌 내내 기록적인 고타율을 기록했다면 이것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컨대 연속경기안타기록, 사이클링 히트, 연타석 만루홈런(데이비드 타티스라든가 한국의 정경배) 등은 물론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기록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선수의 기량을 좌우하는 지표는 아닙니다. 특히 사이클링 히트의 경우 아마도 호타준족 증명일 수는 있지만 한 경기 기록만으로 당사자의 재능, 기량을 판단하기엔 무리입니다. 그나마 이 중에서 연속경기안타기록은 선수의 진가에 어느 정도는 근접하겠죠. 책에서는 조 디마지오의 MVP수상을 두고 문제를 삼는데, 저는 이 예가 "아무것도 아닌 선수가 연속경기 기록 하나로 최우수선수가 된 케이스"로 잘못 이해되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조 디마지오는 위대한 선수이지만, 단지 56경기 연속 안타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는 건 아니다"로 오히려 받아들여야 맞겠습니다. 앞에서 논의된 "부분적 진실로 전체 명제의 진위를 가르는 예"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책에서 논의된 순서는 반대입니다만)

이른바 "대리인 이슈"는 행동경제학이 한 주류 분파로 자리잡기 전(이 아니라 아마 그 작은 맹아가 싹트기 전)에도 이미 경제학의 중심 난제 중 하나였습니다. p216에서는 작년(재작년) 아지 알비스가 맺은 말도 안 되는 계약에 대해서 다루는데, 이걸 두고 저자는 대리인과 본인 사이에 이해가 상충해서 벌어진 일로 분석합니다. 사실 미국에서 이런 벌어지기나 할까 하며 고개가 갸웃해지는 게 정상인데, 한국도 요즘은 에이전트 기법이 대단히 발달하여 소속(구단이 아니라 에이전트사) 선수에게 불리한 계약이 좀처럼 맺어지지 않기때문입니다. 열의나 집념이 아니라 머리를 잘 쓰고 기법이 발달해야 유리한 계약이 체결되는데, 과거에 최동원 선수나 선동열 선수의 부친들께서 아무리 열성이라고 해도 결국 구단의 술수에 말려서 불리한 내용에 싸인한 결과(혹은, 당시의 팬들에게 나쁜 평판이 남았다든가)를 보면 알 수 있죠.

p240에 보면 매몰비용 이슈가 나옵니다. 이 역시 행동경제학 이슈일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경제학 일반에서 다루던 논제입니다. 하지만, 이미 지불되어 더 이상 현재에 영향을 끼칠 이유가 없는팩터가, 여전히 "당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과를 좌우하는 경우이니 행동경제학에서 이를 빼놓고 다룰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걸 놓고 "아 행동경제학에서 다루는 문제지"라고 착각하는 자체가 (행동경제학적인) 인지 편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p276 이하에서는 트레이드라든가 신인 드래프트 픽에 대한 여러 일화가 나오는데, 이 역시 물론 행동경제학 프레임에 넣어 다룰 수도 있고 혹은 게임이론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드래프트 같은 건 게임이론으로 봐야 더 간편한 솔루션이 나오죠. 이 책에서 다루는 많은 문제들은 우리 같은 일반 독자들의 "상식"에 반합니다. 단 책에서는 "이미 증명되었다" 처럼 간단하게 다루고 넘어가기에, 아마 많은 독자들이 더 깊은, 더 철저한 설명을 요구할 만합니다. 그런 독자들은 같은 저자가 쓴, 2020년에 출간된 <스마트 베이스볼>을 꼭 읽어 보십시오. 저도 지금 같이 읽는 중인데 꽤 재미있고 아마도 이 두 권을 같이 읽어야 우리 일반 야구팬들에 뇌리에 꽉 남은 갖가지 오류들이 청산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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