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더브레 저택의 유령
루스 웨어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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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찐한 맛과 약간(?)의 자책감!


미스테리 장르물을 하도 많이 읽다 보니 웬만해선 작품의 1/7 정도만 읽어도 범인이 대충 누구겠다, 진상이 사실은 이런 쪽이었겠다 하는 게 짐작이 되는 편입니다(그랬었습니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었는데(그렇다고 착각했었는데) 주인공 여성(전 처음에 확신이 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가서 "젊고 예쁜 여성"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의 다소 두서없는, 상당히 주관적인 1인칭 회고 형식 때문에 아주 마음을 정하고 말았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약간은 뭔가 망설여졌던 게, "고작 그 정도라면 왜 이렇게 평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이유가 있더군요. 다 읽고 보니).

독자로서 처음에 저는 로완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아직 젊고 철이 없었을 때는 누구나 다, 어떤 횡재 같은 걸 꿈꿉니다. 뭐 그렇다고는 하나 조금만 더 신중하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그런 기막힌 운수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쯤 쉽게 깨달을 수도 있을 텐데, 스스로만 예외로 설정하는 그 자기중심성도 한심하고 솔직히 말해 경멸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도 어렸을 때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나, 나이를 들 만큼 들었으면 주위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현실적인 감각을 갖춰야 하는 법이죠.

비정상적으로 보수가 후한, 뭔가 수상쩍기도 한 외딴 어느 부잣집에 아이를 돌보러 가는 줄거리의 미스테리물 중 가장 오랜 편에 속하는 건 도일 경의 <너도밤나무 집의 모험>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이올렛 선생은 대단히 침착하고 용기 있는 여성으로 설정되며, 도일 경이 이 캐릭터에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인 건 행여 독자들(20세기 초 대단히 보수적이거나 꽉 막힌 사고를 가졌을)이 "경솔한 처신을 한 여성" 정도로 오해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그 쌀쌀맞은 셜록 홈즈 입에서 바이올릿 선생에 대한 칭찬이 아낌없이 나오니 말입니다. 베이비시터는 아니고 호스피스 직원이긴 하지만 역시 까다로운 일자리로 평판이 자자한 데다 집에 유령까지 출몰한다는 소문이 난 집에 "용감하게" 자원하는 캐릭터로는 영화 <스켈리톤 키>의 캐롤라인 엘리스(케이트 헛슨 扮)가 있었죠.

베이비시터이니 고용주는 두 사람이죠. 빌 앤 샌드라 엘린코트 부부. 요구사항이 많기는 하지만 애들 엄마인 샌드라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처음에 그 피용인인 잭을 보고 애들 아빠인 줄 잘못 알아 크게 놀랐던 로완은, 시간이 좀 지난 뒤 드디어 빌을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잭을 보고 놀라는 장면도 약간 이상했는데, 나중에 빌 엘린코트 씨에 대해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으며 간단한 안부조차 묻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며 비난하는 걸 보고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여튼 자신을 고용할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한테 (굽신거리라는 게 아니라) 작은 정도의 리스펙도 베풀 여유가 없나? 오히려 본인이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에 가득한 게 아닌가?

조금 뒤에, 빌 엘린코트 씨가 로완에게 앤 해서웨이를 닮았다느니 뭐니 하며 지분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 이런 일이 있긴 했구나, 소설이 회고 편지 형식이니 나중에 생긴 나쁜 감정이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앞 체험에 투영될 수 있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럼 뭐 독자인 제가 오해한 거죠. 잘못을 깨달았으면 즉각 시정을 해야 하는데 그냥 귀찮아서 놔뒀습니다.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진상을 안 뒤 큰 충격을 받았는데, 비록 가공의 캐릭터이긴 하나 로완에게 크게 미안해지더군요. 선입견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ㅠ 참고로 이 성희롱 미수 장면은 사건이 그토록 꼬이고 꼬이게 된 먼 이유 하나를 이루지만 뭐 그렇게 큰 역할은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중 적어도 두 명)도 말을 안 듣고 밤에는 이상한 유령 같은 게 출몰하는 듯 신경이 쓰인다거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든가 합니다만 로완은 꾹 참고 대우가 좋은 이 일을 계속 맡습니다. 이런 대저택에서 신참자인 주인공을 괴롭히는 또다른 가사사용인 캐릭터가 꼭 등장하는 게 일종의 클리셰인데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이 좋은 예죠. 이 작품에는 진 아주머니가 등장하는데 비중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만 작품 마지막에 이런 부분까지 다 일일이 마무리되는 게 또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 로완과는 달리 루스 웨어 작가님이 아주 똑똑하고 지성적인 분이어서인 것 같습니다. 허술하게 뭘 남겨두지를 않고 말입니다.

요즘 정인이 사건 때문에 아이들 괴롭히는 어른에 대해 특별한 분노가 치솟는 사회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인간 자격도 없는 양모에 대해서조차 분노를 퍼부을 자격마저 없는 사람도 사실 또 있기 마련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예전에 "층간소음 피해자일 때는 위층 사는 사람이 정말 미웠어요. 그런데 제가 엄마가 되고 보니, 애들은 원래 뛰는 거더라고요?" 라고 말하는 사람을 봤습니다. 피해자일 때는 별나게 과장하며 징징거리다가, 막상 가해의 위치에 서고 보면 상대가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태도가 돌변하는 인격미숙자가, 무슨 소중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뻔뻔스럽게 억지를 쓰는 저런 태도, 극히 일부이긴 하나 이래서 "맘충" 소리가 나오나 싶었습니다.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위대하고 훌륭한 분들이지만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거지근성을 발휘하며 뭘 얻어먹을 때는 온갖 가식을 떨지만, 상황 끝나고 나면 입 싹 씻고 중산층 행세를 합니다. 중산층이란 단어 뜻이 뭔지나 알까요?

저는 로완이 애들을 향해 어떤 미운 감정을 보일 때, 속으로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결과는 이미 아는 거지만, 독자로서 "이래서 니가 감옥에 갇혔구나."하는 편견을 안 갖도록 기분을 조절하느라 말입니다. p278에서 "잠든 메디는 그저 유약한 어린아이일 뿐이었어요..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구요." 같은 말을 읽고선, 맞아, 니가 어른이라면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지 라며 응원 아닌 응원을 보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부터 로완에 대해 주인공으로서 최소한의 정신적 예우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포일러라서 말은 못하지만 이 대목 근처에 있는 묘사가 사태의 진상에 대한 중대한 암시가 됩니다. 결말을 다 읽고 여기 다시 돌아와서 읽어 보면 작가가 얼마나 교활하게(?) 서술 트릭을 썼는지 실감할 수 있죠.

p339에 보면 매디가 말을 정확히 몰라서 애티크(다락방)과 앤티크(골동품)을 헷갈리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목도 한번 의미를 곱씹어 보십시오. 엘리는 처음부터로완을 좋아하고 어떤 동정 같은 걸 표현했는데 나중에 다시 읽어 보면 의미심장하죠. 리안논은 작품 중반부터 나오는데 처음에 로완을 보고 당황하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이것도 후반에 가서 뜻이 해명이 됩니다. 예민한 독자라면 이상하게 느낄 법한 대목들은 여튼 작품이 끝나기 전에 마무리가 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작가분이 아주 꼼꼼하게 일일이 다 손을 쓰고 끝을 내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로완은 그리 똑똑한 편이 못 됩니다만 편지를 마치며 "아직 해명이 안 된 부분"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사실 현실의 로완 같은 이라면 구태여 이런 걸 의식도 못 하지 싶기 때문에, 아무리 변호사를 수신인으로 삼은 편지 속이라지만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물론 괜히 이런 소리를 할 이유는 없고, 진짜 반전을 예비하기 위한작가의 너스레였다는 게....). 해명을 채 기대하지 않은 대목에 대해서도 자세히 털어놓는데 출생의 비밀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정도의 한 방은 후반부에 마련되어야 어느 정도 플롯의 무게가 갖춰진다고 작가가 전략을 짜서였을까요?

이 작품에는 우리 시대를 반영한 갖가지 첨단 문명(과 그 부작용)이 등장합니다. SNS가 보편화된 세상에 신분 사칭이 쉽지 않다거나... 샌드라 아줌마가 평판 조회를 해 봤다고 했을 때 저는 특유의 촉으로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ㅎㅎ 말 많은 로완이 유독 그 대목에서는 자기 감정을 드러내거나 어떤 회고를 안 했기 때문이죠. 스마트는 개뿔!이라며 앱과 연동된 IoT 시스템에 불평을 늘어놓을 때 저는 아주 드물게도 로완에 공감했습니다.

결말이 참 충격적입니다. 정성껏 쓴 편지를 왜 로완은 끝내.... 그리고 교정직원이 발견했다는 또다른 편지는 무엇일까? 다시 강조하지만 팩트를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선입견 같은 건 좀 갖지 맙시다. 저는 다 읽고 나서 "레이첼"에게 너무 미안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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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뇌 - 모방 욕망에 숨겨진 관계 심리학
장 미셸 우구를리앙 지음, 임명주 옮김 / 나무의마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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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래 인간은 자유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며, 이성과 논리에 의해 자신의 내면과 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자신의 존엄 근거를 찾았습니다. 우수한 정신의 징표는 창의력이며, 남의 것을 따라하는 습관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정신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여겨져 배척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창의적인 활동이나 그 결과물 역시 알고 보면 보잘것없는 흉내내기의 파생물이라면? 한편으로 실망스럽고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설령 좀 실망이 되더라도, 이것이 엄연히 우리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면 객관적인 현실, 팩트를 받아들이고 새로이 어떤 의의를 모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인지의 뇌와 감정의 뇌가 있고, 각각 논리와 이성, 감성과 상상의 영역을 담당한다는 건 이제 일반인들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세번째 뇌 기능"을 추가하여, 어떤 학습이나 반응에도 일단은 "모방"의 기능이 먼저 작동함을 밝혀낸 건 이 책 저자 우그를리앙, 또 다른 두 연구자들인 르네 지라르, 기 르포르 등 천재 신경학자들의 뛰어난 업적이며 이 성과는 큰 시야에서는 비교적 최근이라 할 1980년대 초 이후 그 큰 줄기가 이뤄졌습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훨씬 선배라 부를 만한 라캉의 저서를 인용하여, 이미 1932년에 "... 감정, 판단력,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정신장애는 모두 정신의 총합에 일어나는 특수한 장애다"(p41에서 재인용)라고 표명한 그의 문장에 주목합니다. 물론 라캉은 아주 예전 분이므로, 1980년대 이후에야 이론적, 과학적으로 규명된 "세번째 뇌" 이론을 반 세기나 앞서 개척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자 우그를리앙이 라캉의 그 문장을 그리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저 문장 중 "행동"이 아마도 자신과 동료들이 밝혀낸 "세번째 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변연계"의 존재는 밝혀진 지가 꽤 오래되었고, 당시만 해도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입장도 꽤 목소리가 컸습니다. 그러나 뇌의 이 부위야말로 감정과 충동 등을 관장하며, 인간의 많은 행동을 결정하는 충동 같은 것의 원천이 됩니다. 지능과 이성의 원천인 대뇌 신피질의 성능이 압도적으로 발달하여 이런 충동을 일일이 관장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감정이 퇴화한 채 오로지 기계적인 계산만으로 정신이 작동한다면 (예상과는 달리) 그런 사람은 좋은 성과를 내지도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서 동기를 따로 얻어야만 엄청난 활력을 따로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시인이 베아트리체 같은 운명의 미인(p55)을 만나야 신선한 영감을 비로소 얻고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과 같죠.

제1의 뇌가 대뇌피질, 제2의 뇌가 변연계라면, 이 책 저자와 선구자적인 동료 연구자들이 규명해 낸 세번째 뇌는 어디에 (물리적으로) 위치해 있을까요? "세번째 뇌"라는 말은 다분히 비유적, 혹은 인문적입니다만 신경학적으로는 거울 뉴런을 가리킵니다. 이 뉴런은 뇌의 곳곳에 분포할 뿐 어떤 분리된 영역을 차지하지는 않지 않느냐? 맞습니다. 거울 뉴런은 제1, 제2 뇌에 고루 퍼져 있습니다. 그래도 저자는 이 뉴런에 대고 "세번째 뇌"의 지위를 부여하기에 충부하다고 말합니다. 거울 뉴런이 수행하는 "모방"이야말로, 세밀한 계산은 물론 타인의 감정을 흉내내어 자신만의 자아를 형성하는 가장 기초되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아를 형성하며, 저 자아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에 어떤 물리적인 위협이 가해지지도 않지만, 자신의 자존이 침해되었다고 여길 때 불 같이 화를 내며 때로 목숨까지 걸고 싸웁니다. 이 자아는 생래적으로 우리 정신에 떡하니 장착된 게 아니라, 자라면서 꾸준히 형성됩니다. 때로 이 자아는 강렬한 체험을 통해 크게 바뀌기도 합니다. 지인 중 누군가가 어떤 심각한 경험을 한 뒤 "사람이 바뀌었다"고 느껴지는 때가 여러 번 있었을 겁니다. 대부분은 정신적인 체험이지만(친지의 사별, 실연, 사업 실패로 인한 낙담, 해고 등의 좌절), 이 책에 나오는 대로 뇌의 특정 부분에 물리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자아의 성격 자체가 바뀌어버린 극적인 예(p35)도 있습니다. 이런 예가 드문 건, 보통 뇌에 그 정도 상처가 나면 생명 자체가 위태롭거나 아예 온전한 정신 유지가 어려워지며, 용케도 자아의 개성 관장 부위만 surgical하게 다친다는 자체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겠죠.

다른 것도 아니고 정체성의 형성, 가치관의 채택, 이런 것이 고작 타인에의 모방을 통해 이뤄진다고 하면, 정신에의 자부심이 강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뭔가 김 새는 결과임이 틀림 없습니다. 만약에 계산 능력, 정보의 취합 정리 능력, 기억력, 연결 연상 능력 등이 탁월한 사람(학창 시절 공부깨나 한 소위 수재급)이라면, 이 역시 결국은 크고작은 롤모델을 보고 따라하며 형성된 지적 능력이라는 결론 앞에 적잖게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아주 효율적이면서도 본능적이고,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작동하는 이 거울 뉴런이야말로 두 뇌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부위라고 주장합니다. 첫째 둘째 뇌가 아무리 발달해도 세번째가 원활히 작동 못 하면 결국 퍼포먼스가 잘 안 난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아니, 애초에 세번째 뇌가 나면서부터, 혹은 성장과정에서 부진했다면 첫째 둘째 뇌도 올바르게 발달 못했을 겁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죠. "뭘 보고 배웠겠냐?"

모방은 학습과 감정 발동의 보조가 아니라 중추에 가깝습니다. 뇌가 이런 식으로 진화하여 얻는 유리한 점이 뭐겠습니까? 자아의 형성이건, 연산 기제의 발동이건, 혹은 감정의 발현이든 간에, 이 모방 뉴런의 활발한 작동 덕에 이것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끊임 없이 변화한다는 겁니다. 자연계는 끊임 없이 변화하고, 생존이 걸린 과제를 계속 던져 줍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캐치하고, 되도록이면 빨리 적응하여 우리의 물리적 생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분석과 연구 도출 과정은 힘들고 오래 걸리며 보통의 지능을 갖고 태어난 이들은 아예 일정 벽을 넘기도 어렵습니다(아인슈타인 정도나 되는 천재라야 넥스트 레벨 도약이 가능하죠). 생존을 위한 방법의 가장 빠른 모색은, 잘 되는 걸 보고, 혹은 보고 배울 만한 걸 포착하고 따라하는 길을 통해 가능합니다. 창조보다 훨씬 쉽고 경제적이기까지 한 게 "따라하기"입니다. 우리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어떻게 일일이 뭘 만들어내고 깨달아가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거울 뉴런이 아니었으면 인간(뿐 아니라 상당수 생명체)은 일찌감치 멸종했을 겁니다.

"동물은 길들여지면 인간화된다(p156)." 우리는 반려묘, 반려견 등을 길들이며 그들이 감정도 때로 표시하고 주인(우리)에게 공감하거나 혹은 공감하려 애 쓰는 걸 보고 무척 신기해합니다. 기실 이는 "인간화"가 아니라, 뇌를 가진 이상 동물들도 그 안에 분포한 뉴런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인간을 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따라하는 겁니다.

루소는 분명 천재였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아주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분명 그의 두뇌가 작동하는 방식은 평범한 사람들의 성과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때문에 (설령 타고난 일정 수위의 사회성을 충분히 갖추었어도) 자신의 수월성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회성을 떨어뜨립니다. 저자가 지적하듯, 욕망과 욕구의 의도적 혼동은 그의 지론인 "자연상태"를 철저히 관철시키지 위한 목적이었을 겁니다. 반면 모방이라는 본질적 특성을 흔쾌히 인정하는 저자와 같은 입장이라면 인간만큼 철저히 사회적인 동물도 없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게 세번째 뇌, 즉 거울 뉴런이라는 본체적 부위인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가 비판하는) 루소와 같은 입장은, "자연상태"를 망치는 퇴행적이고 불순한 작용으로 모방을 파악하는 거죠.

사람의 뇌는 분명 매우 복잡한 진화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뇌, 아니 우리의 정신은 분명 갈등을 겪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종족 번식의 욕구를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본능이나,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무분별한 발동에 나선다면 이 개체는 일탈자의 낙인이 찍혀 사회로부터 축출됩니다. 이런 다층적인 욕구와 이성의 갈등이 분명 존재하기에, 미숙한 사람은 여러 분리된 "목소리"를 두고 그 중 일부는 자신이 아닌 어떤 초월적 존재의 명령처럼 착각합니다. 이런 걸 놓고 저자는 조현병 환자의 특징(p165)으로 규정합니다.전혀 깜냥이 아닌 사람이 어디서 갑자기 배운(모방한) 특정 신조를 장엄한 어조로 되뇌며 마치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양 우쭐대는 게 바로 이런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욕구와 이성의 갈등을 원만히 조절하고 내면에서 적절히 삭이는 게 인격자의 특징이며, 이런 조절이 언제라도 또 어떤 경우에나 가능하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입니다.

반대로 성도착자의 많은 경우는 불건전한 권력욕 따위가 성의 기제에 개입한 경우입니다. 권력욕은 대체로 타인을 철저히 객체화하여 자신의 의지만을 타인에게 관철시키는 쪽으로 발현됩니다. 거짓말을 일삼고, 타인에 거짓으로 공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공감해 준 대가를 받아내려 듭니다. 선동가와 위선자, 혹은 이른바 "관종"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게, 공감이 배제된 채 시도하는 타인에의 지배(p179)입니다.

크게 깨달은 성자(saint)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욕망, 때로 주인인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는 욕망의 "타자성을 인식(p261)"하되 이를 자유자재로 행하는 것입니다. 앞부분에 나온 조루, 불감증(p200)등의 함정에 빠지면 이는 이것대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순전히 의식적인 기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조 아무개 등 성범죄자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죠). 때로는 욕망을 폭발적으로 드러내고(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방법으로), 때로는 철저히 조절함으로써 조화와 공리(功利)를 달성합니다. 왜 욕망은 타자성을 가질 뿐입니까? 결국 이 욕망이라는 것도 거울 뉴런의 작동에 의해 알게모르게 나의 내면에 스며든, "타자의 그 무멋"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이 "진짜 나"를 배신하면, 이번에는 예수나 부처나 공자 등의 성인이 모범을 보였던 방식을 잽싸게 모방하여 우리는 욕망을 길들이면 그만일 뿐, 얘한테 굴복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뇌신경학 이론에 대한 해설서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문 담론의 인용과 전개가 풍부하며, 군데군데 실용적 교훈마저 나오는데 최고 권위의 신경학자가 드는 근거며 설득이라서 더 머리에 잘 남습니다. 기왕 뭘 모방하려면 이런 책을 읽고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가 펼치는 사고 체계와 결론을 모방하는 게^^, 근사한 지식도 쌓고 내 마음의 진정한 평온도 달성하는 지름길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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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2 - 4차 산업혁명과 간헐적 팬데믹 시대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2
이도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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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호의 비극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 많습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행사는 국적을 초월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 보게 마련인데, 세계인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비극적인 폭발이 일어나서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고의 원인은 천재 물리학자 파인만이 이후에 밝혀 내었고 이전에도 여러 기술자들이 지적한 바 있으나 무시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사고를 두고 정상사고의 전형으로 규정합니다. 이 개념은 찰스 페로가 처음 고안(p51)했으며, 아무리 완벽하게 통제되는 시스템이라 해도 반드시 이런 종류의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쥬라기 공원>에서 쉽게 풀어 준 적 있습니다.

고도의 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도 결국 치명적인 위험과 사고를 완벽히 피할 방법은 없다는 뜻이죠. 저자는 이어 디지털 세계에서의 아노미 상태, 빈부의 격차에 따른 디지털 디바이드 현상을 지적합니다. 기술 만능주의가 그 모든 모순과 불편, 부조리를 해결할 것만 같았지만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새로운 재앙을 불러들이고 말았죠. 역시 이 대목에서도 저자는 "진실한 소통, 경계를 과감히 허무는 포용, 시민들 사이의 연대" 등을 해결 방안으로 제시합니다.

언어에는 실체가 없습니다(p102). "나무" 같은 어휘는 이른바 ㄱ 곡용어로 분류되는데, 15세기 우리 조상들은 나무 뒤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오면 ㄱ을 덧붙여 발음하고 뒤의 모음은 축약했습니다. 현대의 우리들은 아무도 그렇게 발음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나무의 본질이 바뀐 건 아무것도 없으며 한국어의 기본 합의, 전제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언어의 자의성이라 하죠. 여기서 저자는 빈프리트 뇌트를 인용하며 "재현은 세계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기호들 사이의 차이를 재현할 뿐이다."고 정리합니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는 결코 평가절하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하나마 언어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고 전달하며 해석합니다. 언어는 대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도 하는데(혹은, 우리가 그렇게 믿는데), 1권에서도 우리 독자들이 읽은 것처럼 저자는 비유와 상징, 환기의 기능을 무척 중요시합니다. 언어는 인간이 현실의 부조리와 무의미에 맞서 감연히 창조한 무기이며 인간 존엄을 구성하는 토대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만든 "화쟁기호학(p104)" 체계에 의해 이 점이 보다 말끔히 해명된다고 말합니다.

4차산업혁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공유경제입니다. 일각의 비판처럼, 공유경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간명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의문을 풉니다.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적극적 자유를 중시하는 대신, 사적인 개인의 소극적 자유를 억압한다."(p192) 저자는 이어 "의료 정보와 DNA 같은 유전적 정보까지 공유되는 마당에 사적인 영역이란 (더이상)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지 못한 개인은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주체성을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말이 뒤에 이어집니다.

저자가 이런 공유경제의 본질을 분석하며 주로 원용하는 이론 체계는 제러미 리프킨의 것입니다. 저자는 또한 한국에서 우버가 큰 장애에 부딪힌 이유를 짧은 말 몇 마디로 요약도 합니다. 특히 p193의 이 문장에 주목해 보십시오. "플랫폼 기업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플랫폼을 매개로 자투리의 가치를 모아 지대(rent)로 전환하고, 여기에 노동을 결합하여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점에서는 반(反) 공유적이다."

저자, 나아가 리프킨이 구상한 "공유경제"와, 현재 야심찬 벤처사업가들이 밀어붙이는 공유경제는, 이런 관점에서라면 넘지 못 할 큰 강이 그 사이에 놓인 셈입니다. 사업가들이 꿈꾸는 바는 바로 p193의 저 문장, 즉 "플랫폼을 매개로 자투리의 가치를 모아 지대로 전환"하는 데 있을 텐데, 저자의 입장은 이야말로 "공유경제"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하니 말입니다. 또한 저자는 "노동을 결합하여"라는 구절을 의미심장하게 배치하셨는데, 바로 뒤에 나오는 "잉여가치"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의하면 오로지 "노동"에 의해서만 얻어지니 말입니다. 물론 현재의 플랫폼이 "노동"의 결합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게 분명하므로 이 구절은 현상에 대한 플레인한 설명으로도 타당한 말입니다. 만약 배달의 민족이니 구글 플레이니 앱스토어니 하는 여러 플랫폼더러, 저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공유경제의 참된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면 아마 이들은 사업을 포기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자가 기존 자본주의의 낡은 틀을 타파하자고 주장할 때 가장 주된 초점은 "지식과 기술"인 듯합니다. 그 예로 저자는 자신이 대학생 때 하곤 했던 아르바이트 중 가장 수입이 좋았던 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였다고 회고합니다. 지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될 때 가장 큰 효용을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대에는 이러한 지식을 "물화(reification)"했다고 말합니다(p179).

로봇과 인간, 나아가 생체 일반의 결합을 통해 저자는 "바이옷"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p237). 이는 "전혀 새로운, 살아 있는 기계(조슈아 봉가드 연구원의 표현)"이며, 아마도 우리 인간이 보다 친숙히 느끼고 소통하며 기계가 수행하거나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서 우리에게 큰 몫을 해 줄 듯합니다. 책에는 그런 말이 없으나 독자인 제가 상상하기로는 이를테면 장기의 배양, 대체, 제공 같은 게 가능하겠습니다. 장기나 외부 신체 일부에 문제가 생긴 사람에게 어떤 윤리적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충분한 만족을 베풀 수 있겠죠.

우리는 19세기 이래 인류가 이뤄낸 놀라운 과학기술상의 업적과 성취에 대해 스스로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할 바는 "자연의 치유력과 자생력"입니다. 우리 인간은 엄연히 자연의 법칙에 종속되고 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할 뿐인 필멸의 존재입니다. 이러한 자연, 우리를 낳아 준 어머니와도 같은 자연도 인간이 작정하고 더렵히며 망치려 들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환경을 오염시켜도 결국 그로 인해 직접 피해를 받는 건 우리 인간들이며, 이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멸종한 후에야 자연은 다시 자생력을 발휘하여 본연의 모습을 찾을 것입니다. 수십 억 년에 달하는 그 기나긴 자연의 호흡은 우리 하루살이 같은 인간들의 상상력이 감히 미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망치는 자연을 두고 저자는 "빈틈이 사라진(p268)" 상황으로 비판합니다. 여기서 "빈틈"이란 노자가 말한 "무위의 경지"입니다. 자연은 반드시 이 무위가 끼어들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고유의 섭리와 순환이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그 근본 속성이 약탈적인,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속성을 지닌 자본주의 체제는, 현대에 들어 국가와 자본 사이의 동맹을 더욱 강화(p280)합니다. "대중문화는 계급 간의 화해를 지향하고 노동자 곋급을 중산층으로 동일화하는 데 기여하면서 반역을 사전에 봉쇄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른바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국가 존립 기본 원리로 삼는 중국 같은 나라에서 온갖 야비한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며 하층민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며, 저급한 서구 대중문화에 대한 최악의 모방을 통해 왜곡된 애국심을 세뇌하는 행태 역시, 이러한 비판의 칼끝 가장 날선 곳 앞에 놓여야 마땅하겠습니다.

p344에서는 조르주 아감벤의 담론이 원용됩니다. sacre는 양면성을 지닌 단어인데, "신성한"과 "저주받은"이란 두 뜻을 다 가지죠(영어의 cleave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이런 걸 auto-antonym 혹은 contronym이라고 하죠). 그래서 과거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베푼(나중에는 세속 군주들도) sanction이란 조치는 특별 허가와 금지 둘 다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후자의 뜻만 남다시피했지만 말이죠.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구태여 저자가 원용하는 건, 현대 국가의 놀랄 만한, 효율적인 감시 시스템이 "저주받은 자"를 만들어 그 체제에 순치하게 만들며 끝내 참된 자유를 송두리째 박탈할 무시무시한 힘을 지녀가는 추세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드는 중국 공산당의 행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통찰은, 역설적이지만 인간이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임을 직시하는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월명사의 <제망매가>(p469)를 다시 인용합니다. 유한한 지혜 때문에 그저 지전을 서편으로 날리는 행위로 그 허망함을 초극하려 들었던 신라의 월명사와는 달리, 우리는 나노공학과 사이버네틱스, 가상현실 기술의 도움으로 거의 무엇이든 꿈꾸고 시도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죠. 그러나 공감과 소통와 연대의 노력이 결여된 채 배타적이고 약탈적인 자본의 꼭두각시 노릇에 스스로 만족한다면 이 모든 기회와 편의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이 책에서 "자유"는 그래서 새로이 해석되고 음미되며 실천에 옮겨질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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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자라는 심리육아 - 엄마의 엄마가 알려주는 실제 육아 지침서
은옥주 지음, 김도현 그림 / 미래와사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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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키우면서 사랑이라는 걸 배웠고, 미술 치료를 해오면서 나를 사랑하는 법과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책날개에 나오는 저자의 말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직접 부모가 되어 봐야, 우리를 길러 주신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며 진짜 어른으로 거듭납니다. 반면 그런 체험을 못 해 본 사람은, 평생 이거해줘 저거해줘 타율적인 근성, 불평불만에다, 나는 왜 이거밖에 갖고 태어나지못했냐는 식의, 남탓과 피해의식에서 헤어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취지로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똑바로 비춰 본 어른이라야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고 생산적인 반성도 시도하는 거죠.

저자 은옥주 선생님은 이제 칠순이 되신, 자녀뿐 아니라 이제 외손주까지 두신 어른입니다. 저는 처음에 책을 펼쳐 들고 대략 삼십대 중반, 마흔 정도의, 한창 속 썩일 나이의 아이를 키울 만한 젊은 맘이신 줄 알았다가, 칠순이라는 연세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참 젊게 사시는 할머니이시며, 평생 수행해 오신 미술치료 과정과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씀의 연속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겠나 짐작도 해 보게 됩니다.

영어 속담에 일(혹은 공부)만 시키고 놀게 하지 않으면 아이를 바보로 만든다는 게 있습니다. p18에서는 발달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여 "놀이의 기능"을 강조합니다. 창의적으로 신 나게 놀며 자신의 머리로 문제 해결의 쾌락을 맛 본 아이는 놀이뿐 아니라 공부마저도 자기 주도적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막상 내 아이들을 키울 때는 이렇게 놀아 주지 못했다.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이셨다." 그런데 그 연세 또래의 어르신들 중 아이에게 현대식으로 자유분방하게 놀아 준 분들이 과연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아무튼, "그냥 놀아 준다고 생각하고" 같은 시쳇말이 있듯, 누군가와 "놀아 주는 것"은 의외로 큰 봉사를 행하는 셈입니다. 그 대상이 자신의 아이라면 이는 부모로서 행해야 할 의무인 듯도 합니다.

책을 읽어나갈 때 컬러풀한 삽화가 있으면 훨씬 읽기가 편합니다. 이 책에는 십여 페이지마다 한 폭씩 멋진 그림이 실려 있는데, 미술 치료의 본체는 물론 아픈 사람 당사자가 직접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겠으나, 멋지게 잘 그려진 작품은 그저 보기만 해도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 은옥주 선생님, 또 김도현 선생님은 다른 의미에서도 "치유자"입니다.

손주가 참 똑똑한 아이인 듯합니다. "할머니, 광개토왕이 아주 쎘지? 대한민국이 엄청 커졌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지? 일본이 다 도망갔지?" 아이가 던지는 질문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도 다 저런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었을 텐데, 발달 과정에 있는 아이의 성장이란 정말 경이롭기 짝이 없습니다. 어른들께 저런 질문을 던지던 우리의 단계가 기억이 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찔하기만 합니다.

아이는 할머니의 엉마, 즉 증조모님을 가리키며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저도 이 단계는 기억이 납니다. 땅에 묻혀서 꼼짝도 못하는 게 죽는 걸까? 내가 이미 세상에 없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 없는 세상에서 자기끼리 사는 걸까? 내가 참여하지 못하는 세상이 그 나름대로 돌아간다면 너무 슬프고 억울한 거 아닐까? 온전히 이해 못 했지만 어느새 나이를 먹고 가까운 분들의 죽음을 겪으며 이제는 잘 압니다. 네. 아직 어린 아이한테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야 하는 게 어른으로서도 참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아야 하며, 알기 싫어도 알게 되죠.

"언어의 여러 기능 중에 또다른 중요한 것은 '자기조절기능'이다. 그래서 언어발달이 지연되는 경우, 짜증이나 과격한 행동 빈도가 더 늘어날 수 있다. 아이가 계속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불안을 달래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p53)

이 대목은 물론 오랜 동안 미술치료를 행하며 터득하신 저자의 깨우침이지만, 동시에 어린 손주가 치과 치료를 받으러 갈 때 겪은 괴로움을 달래는 요령(인 케이스 세라피)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다 겪으셨겠습니다만, 어렸을 때 치과 가는 게 얼마나 싫습니까. 그때 불안함을 달래 주려고 발 맞춰 걷기, 재미있는 이야기 해 주기 등 온갖 기술을 다 구사하시던 저희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에휴...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린시절에 간직한 추억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 마음 속에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p59)

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입니다. 과연 그는 천재라서, 평소에 아이들에게 관심도 주지 않았을 법한 독선적인 위인이 정작 교육에 대해 입을 떼니 저리도 정확한 언명을 빚어내네요. 진정한 천재는 특정 분야에 한정된 게 아니라, 어떤 주제를 놓고서도 매번 폐부를 찌르는 정확한 통찰력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저런 사람을 천재라고 하는 거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 성장과정에서 적절한 관계 맺기를 통해 인성을 가꾼 사람만이 온전한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 같은 나라는 홈스쿨링 등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고 표준적인 사회화 과정을 반드시 거칠 것을 의무화합니다. 불량스럽고 천박하게 무리 짓고 돌아다니며 폭력에 쉽게 의존하는 건 사회성의 형성이 아니라 저급한 일탈에 불과하며, 이런 인간들은 사회성이 뛰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결핍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존중감이 부족하기에 폭력에 쉽게 의존하고 화를 잘 냅니다. 사회성이 발달할수록 참된 자존감을 가진다(p84)는 저자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귀엽습니다만 아이들을 모두 똑같이 대한다면 아마 애들이 싫증을 낼 것입니다. 차별 없이 대한다는 게 아니라, 귀여워해도 똑같은 방법으로 귀여워하지 말라는 거죠. 미인의 마음을 사려 해도, 천편일률적인 주접을 떤다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도 못한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에 걸맞기도 하고 마음 속으로 원하던 찬사와 배려를 베풀어야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고 관계도 원만히 형성되는 거죠. 저자께서는 손주에게 "돌돌이"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시는데, 너에게 향하는 나의 애정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음을 분명히 표시하는 멋진 방법입니다(물론 돌돌이에게 어머니라든가 다른 지인, 친족이 베푸는 애정들은 또다른 방식이겠구요). 마치 생떽스의 <어린 왕자>에서 길들이기가 의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뜻은 "돌을 좋아하는 똘똘이 손자"입니다.

"할머니, 신라가 천 년이에요?" "와 엄청 길다!" 사실 세계적으로도 단일 왕조가 천 년을 간 건 유례가 없습니다. 물론 성씨가 말년에 교체되기도 했고 중앙집권이 미흡했으며 귀족 연합체로 퇴락했긴 했지만 말입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아예 왕실의 연속성도 없었고 말기에는 도시국가 수준으로 위축되었으니... 여튼 할머니는 문화재를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하시는 등 역시 절제된 육아 방식을 유지합니다. 예전 분들은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선을 넘지 않고 질서와 공익을 염두에 두시죠. "할머니, 토함산은 토하는 산인가요?" 저는 이 말을 읽고 빵 터졌는데 제가 초등학교 4학년때 경주 소재의 그 유서 깊은 산 이름을 들은 이래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입니다. 이걸 제게 가르쳐 주신 담임 선생님이 들으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ㅎㅎㅎ 역시 아이들은 기발합니다.

인천에서 김포로 가는 구간 중에는 해저터널이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이처럼이나 경이로운 일을 해 냈지만 그런 역사(役事)에 직접 참여한 게 아니라 그저 혜택만 누리는 입장에서는 어린이 아닌 어른이라도 해도 그 엄청난 의의를 알 리 없습니다. 그냥 해저터널이라고 하니까 해저터널인 줄 아는 거죠. 어디 해저뿐이겠습니까? 미친 속도로 달리는 지하철 구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돌돌군은 경이로워하는 눈빛으로 "해저터널이야 이게?"를 연신 묻습니다. 어른이 애써 가르치는 놀라움과 경의가 아니라 자신이 정직하게 느끼는 감탄이라야 올바른 교육입니다.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놀아주고 체험을 공유하는 과정이라야 참된 성장과 성숙이 이뤄집니다. 이 책 내내 펼쳐지는 흐뭇한 공감과 놀이 과정, 멋진 그림과 함께 하기에 더 절실하게 독자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독자도 힐링하고 해피해지는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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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식포럼 인사이트 2021 - 팬데믹 이후 세계 경제의 향방을 예측하다
매일경제 세계지식포럼 사무국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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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셀트리온이 코로나치료제 관련 발표를 했고 나쁘지 않은 성과가 확인되었습니다만 주가는 빠졌습니다. 셀트리온이나 바이오 섹터뿐만 아니라 어떤 종목이든 재료가 노출되면 차익실현 물량이 나오기 때문에 이런 조정은 받기 마련입니다. 아무튼 서정진 회장은 한국에 전혀 없던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고 공매도 세력과 단독으로 싸워 이긴, 존경 받아 마땅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pp.176~185에는 그 서정진 회장의 행사장 현지 발언이 topic 다섯 꼭지로 정리되었습니다. 본래 좀 거구인 분이고 박력 넘치는 캐릭터시지만 사진과 함께 발언 텍스트를 읽으니 현장감이 지면 너머로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바이러스는 싸워서 이기는 대상이 아닙니다. 뇌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들의 위험을 요령껏 피해서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해야 합니다." 서 회장뿐 아니라 모더나의 CEO도 바로 어제 이런 말(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52&aid=0001538286 )을 했습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야전사령관들의 공통된 통찰이겠습니다. 특히 "한국은 제조업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이 눈에 띄는데, 현재 구 대기업 임원들은 젊고 능력 있는 구직자들이 네이버나 카카오(이런 곳들도 이제는 엄연히 대기업이죠) 같은 IT 섹터에서 편한 일만(?) 하는 풍조를 개탄한다고 합니다. 한국은 밖에서 외화를 벌어와야 생존이 가능하기에 제조업 섹터에서 일하는 이들과 자부심과 긍지가 같을 수 없다는 건데... 글쎄요.

이 책 저 앞 p90에는 셀트리온 미주 법인 사장으로 제니 주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제니 주 사장 본인의 성공 스토리도 흥미진진할 듯하지만 이분이 들려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습니다. 글로벌 최상위 부유층만 상대하는 이든 클럽이라는 게 있는데, 톰 로런스라는 이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작 그 자신은 전혀 백만장자 출신이 아니었고,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부자들의 생리를 정확히 캐치하여 떼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도 저렇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이든 클럽 같은 데 가입할 수 있는 원천의 부를 창출하고 싶었지만, 여튼 돈 버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점 다시 확인했습니다. 유익한 책은 그저 교훈만 앙상하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책 구석구석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꼭꼭 채워졌다는 게 또하나의 장점이죠. 제니 주의 결론은, "성공에는 어떤 각본도 없다."입니다.

책 뒤표지 바로 앞에 보면 이 책의 주제가 된 연례행사, 즉 세계지식포럼 인사이트의 히스토리가 나옵니다. 매경에서 주최하는 이 행사는 꽤 유명한데 정확히 2000년에 시작했으니 작년으로 21회째를 맞은 것입니다. 행사 주빈의 면면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작년에 초청된 테리사 메이 전 영국 총리 같은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21년 전이면, 당시 아직 젊었던 장대환 매경 회장이 국무총리 지명자로 국회 동의를 받기 위해 인사청문회에 나오기도 했을 터입니다. 아무튼 대단한 행사이며, 이 책 역시 그 무게에 걸맞게 매우 알찬 내용으로 짜여져 있네요.

작년(2020) 행사의 메인 연사 네 분 중 아마도 가장 비중 큰 인사였을 테리사 메이의 발언 내용은 책 맨앞에 배치, 정리되었습니다. 인터뷰어는 도이체 벨레 선임앵커인 테리 마르틴인데 표준 독일어 공부하고 싶은 분은 도이체벨레 웹사이트에서 송출하는 실시간 온에어를 이용하면 아주 유익합니다. 도-이체벨러라고 diphthong이 도중에 끊어지는 특이한 발음이 인상적이죠. 책의 사진을 봐도 알 수 있듯 현장 인터뷰이며 청중 질문을 한 두 사람은 한덕수 전 국무총리, 태영호 국회의원입니다. 후자는 영국 주재 고위 외교관이었기에 메이 총리와도 구면이죠.

p112에는 딜리버리히어로 창업자인 니클라스 외스트버그의 말이 나옵니다. 이 회사 이름은 한국인들에게도 꽤 익숙한데, 바로 배달의 민족과 요기요를 인수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향점은 "라스트마일 배송"인데, 상품이 배송지를 떠나 고객의 집 바로 앞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뭐 긴 말 필요 없이 바로 택배 서비스의 요체이며, 한국도 1990년대 전반부터 이런 서비스가 크게 발달하여 많은 이들의 편의를 증진했습니다.

니클라스 외스트버그는 "왜 배달의 민족에 관심을 가졌느냐"는 질문에,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회장을 10년째 잘 알고, 앞으로도 같이 일할 분"이란 말로 답을 대신합니다. 사업 자체의 전망보다, CEO의 인성이나 자질 등이 투자시 최우선 고려사항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음식 배달 말고 다른 상품도 함께 배송하는 플랫폼을 만들어 원가를 더 절감하겠다"고 하는데 지켜볼 일입니다. 요마트의 운영전략도 함께 언급하는데, 단 최근 공정위의 반독점 결정 때문에 요기요 사업체는 매각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케빈 스니더는 맥킨지앤드컴퍼니 글로벌 회장으로서 새 시대 CEO의 목표를 네 가지로 요약(p87)합니다. 열 배 넘는 목표 설정, 변화하는 리더像 표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수용, 동료 CEO와의 네트워크 구축이라고 합니다. 이 중 세번째 것, 즉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란,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s' capitalism)와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네 일에나 신경 써(Mind your own business)."로 요약되는 영미식 개인주의로는 이런 전향적인 개념을 수용하기 어렵죠. 주식회사의 요체 기관인 주주총회에는 주식을 소유한 이들만 입장하여 발언하거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저 컨셉 하에서는 직간접의 이해관계를 지닌 지역공동체의 일원 같은 이들이 참여하여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죠. 십 년 전만 해도 유럽 진보 성향 진영에서나 논의되는 게, 이제는 지구촌의 정신으로 번져가는 겁니다.

이와 관련 p157을 보면, 케리 워링 국제기업지배구조네트워크 CEO의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요즘은 우리도 주변에서 흔히 듣는 개념이 ESG인데, 지난 십 년 동안 CSR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면 이제는 보다 확장된 아젠다인 ESG로 메인 이슈가 넘어가는 듯합니다(그 뜻은 책 p158에 잘 나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팬데믹 때문에 주주들은 사회적으로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기업에 더 많은 것을 하라고 촉구한다"는 것입니다. ESG투자란, 그의 말에 의하면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하고 리스크는 더 낮추는 것"이며, 한국의 현 정부가 특히 강조하는 스튜어드십코드 같은 것도 이에 포함됩니다. 다음 페이지에는 한국에서 ESG투자의 주류화 전망이 다뤄지는데, 아마 주식 투자에 관심 많은 분들은 이미 익숙한 내용일 것입니다. 전기차, 2차전지, 태양광, 풍력, 수소 등은 투자자들이 필수로 알아야 할 테마이며 이미 많은 시세를 분출합니다(ESG 중 E에 한정된 트렌드이긴 하나 첫 발걸음치곤 의미심장하죠).

p207 이하에는 세드리크 오라는 분이 "사회적 격차가 디지털 격차로 번지는 결과를 막자"는 주장을 폅니다. 5~6년전에도 큰 화제가 된 분인데 입양아 출신으로 장관직, 대통령 보좌역이라는 고위직에 올라서였죠. 그런데 저는, 도대체 한국에서 고아 수출(...)이 얼마나 많았기에 세월이 흘러흘러 저 지구 반대편 프랑스 같은 데서 장관까지 배출하게 된 건지 좀 기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남한테 받았으면 베풀 줄도 알아야 하는데 최근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을 보면 참 갈 길이 멀었다 싶기만 합니다.

5G도 아직 인프라가 덜 깔렸는데 6G는 터무니없는 말만 같지만 남보다 앞서가려면 목표를 멀리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인인 나카무라 다케히로 NTT도코모 집행임원의 유익한 발언이 실려 있네요. 그의 말에 따르면 "2028년에는 서비스 상용화가 될 것으로 본다(p214)"는데, 음... 미국 현지에서의 5G 주파수 경매도 아직 진행 중이며 버라이즌, AT&T 등이 하도급을 줄 삼성전자, 또 재하도급을 받을 케이엠더블유 등의 업체가 아직 손 놓고 있는 현실에 좀 답답한 마음이 드네요.

p225 이하에는 존 헤네시 알파벳 회장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요즘 공학 분야는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고 실제 업적을 이룬 엔지니어들과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는데, 이분은 학자이기도 하고 엔지니어이기도 하고 CEO이기도 하죠. 이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스타트업 경력을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20여년 전에 그냥 돈 버린다고 생각하고 구글 주식을 산 이들은 지금... 인터뷰어는 차상균 서울대 디지털사이언스대학원장이며, 인터뷰이에게 유익한 답변을 끌어내는 기술이 대단하십니다. 헤네시 회장이 여기서 꺼내는 주 토픽은 AI인데, 왜 저기 복잡계의 여러 난제는 기존 패러다임으로 풀 수 없고 그 대표적인 예로 기상현상을 꼽죠. 북경의 나비가 펄럭이느니 하는 비유 말입니다. 변수가 너무도 많아 일일이 계산, 추적할 수 없을 때 카오스 이론에 기대며, 이것을 AI가 잘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입니다. 차 원장은 여기에 덧붙여, 신약개발 과정을 크게 단축시키고 원가 절감도 도모할 수 있겠다는 헤네시 회장의 답을 끌어냅니다.

가뜩이나 세상의 변화가 빠른데 코로나 같은 뜻밖의 변수까지 생겨 모두가 힘든 요즘입니다. 이럴수록 뛰어난 지성인, 창의적인 리더들의 인사이트를 접하고 우리들의 세부 목표를 더욱 미세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년 만나지만 언제나 새롭고 유익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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