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볼 건 다 해봤고, 이제 나로 삽니다 - 15인의 여성 작가들이 말하는 특별한 마흔의 이야기
리 우드러프 외 지음, 린지 미드 엮음, 김현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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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는 이 책이 국내 작가분이 쓰신 글 모음인 줄 알았습니다. 한국에도 이제 그런 분들, 혹은 저런 자신 넘치는 말을 책 제목으로 달 자격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실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메건 다움 등 여러 외국 분들이 쓰신 글들의 엮음이라 약간은 실망감도 들었었습니다. 물론 그런 실망감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이 시대를 같이사는(아마도 훨씬 치열하게 사는) 다른 분들의 좋은 가르침을 "외국의 배경과 함께" 경청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싹 바뀌게 마련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깔때기를 타고 내려가듯 점점 그 폭이 좁아진다(p109)." 외국에도 깔때기가 있긴 하겠구나 같은 생각도 들었고, 무엇을 하든 그 개인의 선택으로 내버려 둘 뿐 뒤에서 흠잡기 같은 건 안 하겠거니 싶은 외국이라 여겼는데, 사람 사는 모습이 (슬프게도) 다들 비슷하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39세에 여배우가 되었다! 장하고 축하 받을 일이지만, 혹시 남자였다면 39세에 배우가 된 게 좀 더 당연시되지 않았을까요? 과년한 딸이 있으면 빨리 시집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사실 한국에서만 유효한 건 아니라서 나이 든 여성에게 얼마나 더 가파르게 어드밴티지가 줄어드는지의 사정은 외국이라고 다를 게 없다는 점 다시 실감했습니다. 더 팍팍한 환경에서 매일매일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응원을 (미약하나마) 보내게 됩니다.

"나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퇴행을 해서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상황을 해결해 주었으면 했다(p207)." 누구나 한 번은 겪어 봤을 느낌이고 처해 봤을 환경입니다.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나옵니다. "나는 원래 엄청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무엇인가에 압도당하면 정신을 잃는 특징이 있다." 그렇죠. 필자 줄리 클램 씨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책임감 감수성의 정도는 다를망정.

"복부에 총을 맞으면 언제나 죽어요. 배를 절단할 수는 없잖아요(p95)." 우리는 이 이유가 잘못 지적되었음을 잘 압니다. 아이는 제레미아의 슬픈 편지를 읽고 나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죠. 아 그나마, 상처 입은 부위는 (엄청 아프겠지만) 거기만 도려냄으로써 전체의 괴상을 면할 수는 있는가 보다. 역시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한 철없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그나마 어린 감성과 지성이 내릴 수 있는 최상의 결론입니다. 어른들 역시 그런 상황이 닥치면 고작 저 정도의 위안 외에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없을 터입니다. 육신의 치명상이 아닌 감정의 그것을 마주한다 해도 말입니다. 이게 진짜 문제입니다.

확실히 소셜 미디어는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습니다. 임신 중독증 진단을 받은 데다, "여태 겪은 중 가장 폭군 같은 상사를 만나 고생하는(p210)" 남편을 보고 한계 상황에 다다른 줄리는 악플로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풀 생각을 하는데 게다가 보험금 지급 거부 결정까지 받아드네요. 우리들 대부분에게도 생이란 이처럼 난관과 짜증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원래 이런 것이었고 이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언제라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단을 가져야 해(p260)." 페미니즘의 시대라고 합니다만 어떤 혜택이 거저 찾아온 게 아닙니다. 여성들에게는 누리게 될 이런저런 자유와 권리보다 의무의 부담이 훨씬 늘어났고, 좀 더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할 저 위의 적층은 여전히 높은 장벽을 허물 생각을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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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신
이동원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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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정상적인 교회가 있기나 해?(p15)"

참 공교롭게도, 이 소설을 읽은 동안 유명 방송인에 관련된 뉴스가 나와 인터넷을 시끄럽게 했습니다. 그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사고가 났었는데 또 비슷한 일이 터진 거죠. 대체로 방송인들은 반듯한 외모에 차분하고 지적인 말투를 지녔기에 물정 모르는 사람에게건 그렇지 않건 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보통입니다. 여성들의 경우  괜히 재벌가의 일등 신붓감으로 꼽히는 게 아니죠. 상당수는 성공한 삶을 꾸려나가기도 하고 말입니다.

반면, 행여 이런 실수라도 하면 온갖 비난과 조롱이 다 퍼부어집니다. 그 중에는 당사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도 있겠으나, 그 수위를 한참 벗어난 야만적인 마녀사냥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건 대부분, 어리석은 대중들이 평소에 그들에 대해 품고 있던 열등감에 기인합니다. 열등감의 도를 넘어선 표출은, 사실 그 발화자의 생과 자존감이 적정 수준 이하였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나친 건 모자람만 같지 못하다"는 옛 말도 있죠.

그건 그렇고,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종교란 건 있기 마련이고, 이 종교는 우리들 비루한 존재의 필멸의 삶을 근원에서부터 위로해 줍니다. 그러라고 고안된 게 종교입니다. 아무리 축복 받은 삶도 원 없이 모든 걸 누릴 수는 없고, 아니 원 없이 모든 걸 누린 삶이라면 그런 이유 때문에 80, 90에서 중단되는 게 더 아깝습니다 결핍으로 이어진 삶이라면 뭣도 뭣도 끝내 못 해 보고 죽어서 더 안타깝습니다. 이러니 내세에서의 무엇을 갈구하는 종교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신이 애초에 없었다면 뭐 만들어라도 내어야 합니다. 그러니 누구는 자신의 신을 위해 살고, 또 다른 누구도 그의 신을 위해 사는 겁니다. 사실은 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뤄지지 못한 애틋한 욕구)"이죠. 에휴.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상황은 그저 픽션의 산물이겠습니다만 어째 배경과 전개, 심지어 이름마저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누구누구와 무엇무엇"을 연상시킵니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라는 말도 있지만, 어쩌면 지면이 아닌 현실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상상이 더 지독하고 더 창의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소설로 읽어도 재미있고, 혹시 뭔가 밝혀지지 않았거나 차마 밝힐 수 없었던 실제 사정의 소설화라고 가정해도 흥미진진합니다만, 다 읽은 후에는 카타르시스라기보다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대체 우리가 모르고 지나친 "엄연한 현실"은 얼마나 더 무서운 진실을 감추고 있었던 건지...하는 그런 두려움 때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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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 배워야 합니다 - 평범한 일상을 바꾸는 마법의 세로토닌 테라피!
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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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로 자기계발서를 저술한 분으로 보통 평가 받는 이시형 의학 박사님의 새 책이네요. 박사님은 항상 "세로토닌"의 중요성을 설파해 오신 일종의 전도사이시지만, 이 새 책에서는 한층 강화된 이론적 배경과 (일종의) 임상례들이 더 곁들여져 독자들을 재미있게 이끕니다. 선생의 책은 언제나 어려운 이야기를 최대한 쉽고 실생활에서 물씬 공감되는 표현으로 우리 독자들을 끌어들인다는 게 최대의 강점 같습니다.

일상을 따분해하고, 불만을 떨칠 수 없는 어떤 막연한 불편, 이런 것은 그 사람의 물질적, 사회적 성공이나 척도와 무관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TV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보험왕"으로 널리 알려진 어떤 여인에게 옛 연인이 다가와 "그런데, 너 행복해 보이질 않는다?"고 말을 거는 걸 봤습니다. 물론 그 여성 캐릭터에게는 다른 실질적인 고민이 있었지만, 이런 걸 떠나 아무리 세속적으로 가진 게 많아도 그 내면이 불행하기란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박사님은 우리 독자들에게 "제발 의식적으로라도, 좀 배워서라도 행복해져라!"를 설파하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야간 근무를 하기에 잠이 늘 모자라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늘 비관적으로 보는 자신이 뭔가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그래도 세상을 비판적, 부정적으로 보면서 그 과정 속에 비틀린 쾌감을 느끼는 인간 부류보다는, 그리 행하고 느끼는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자각이라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신을 그저 객관화하여 주시할 수만 있어도, 그런 여유만 가져도 이미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 바로 그 지점에서 마련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유도 없이 자주 화가 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분들(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가 이런 증상을 공유하며,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야말로 이 박사님의 책을 좀 읽어서 도움을 바로 받을 만한 그룹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어떤 자연적인 타고난 조건이나, 종교적, 도덕적 깨달음을 통한 게 아니라,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는다는 게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행복감을 돈으로 환산한다거나, 장부에 적어가며 득실을 기록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그렇게 공리적으로 실천적으로 행복을 얻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 갖는 것입니다. 내가 당장 배가 고픈데, 천연과 인공 물질을 가려 가며 섭취하겠습니까? 게다가 혹 인공 물질이라 한들 그것이 딱히 인체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행복은, 그게 혹 가능하다면 노력을 해서 얻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어떤 매뉴얼이 존재해서 필요할 때마다 인위적으로 섭취하는 게 가능하다면, 불행한 사람에게 응급 처방으로 베풀어 당장 슬퍼서 죽을 것 같은 이들을 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자가 처방까지 가능하다면 그효용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행복해 질 수 없거나 조건이 나쁘다면, 공부를 통해서건 훈련을 해서건 스스로, 자조(自助)하여 행복해져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교훈이고 결론이며 쓰임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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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시간 - 40일을 그와 함께
김헌 지음 / 북루덴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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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처럼 극심한 고통, 열렬한 사랑, 극적인 깨달음으로 그 길지도 않았던 생을 점철한 위인도 드물 듯합니다. 특히 이른바 기독교에서 사순절이라 일컫는 40일간의 행적은 참으로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40일간의 행적은 아니고 그보다 전의 일이지만 예수는 광야에서 실존의 극한 수행을 통해 악마의 유혹을 겪은 적도 있고, 이것이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딱히 쓰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를 믿건 안 믿건 무관하게, 예수, 특히 그 고난의 체험은 인류에게 영원한 영감의 소재가 되는 듯도 합니다.

악마는 예수더러 절 한 번에 지상의 모든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했으나 예수는 그 덧없음을 잘 알았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만약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이, 세상의 모든 권력은 고사하고 작은 이권이나 이익이라도 걸린 어떤 사악한 제안을 받았을 때, 과연 이를 거부할 수 있을까요? 인상이 고약하거나, 혹은 이야기책에서처럼 머리에 뿔이 난 악마가 한눈에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차림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유혹한다면 차라리 고마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운 바가 많기에, 아 이게 악마의 유혹이구나 라며, 모르긴 해도 득보다 실이 많을 이런 제안을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겁니다. 착해서가 아니라 치밀한 계산의 결과인데, 그래서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거죠 ㅎㅎ

그러나 실제는 어떨까요? 악마는 많은 경우, 그처럼 허술하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 많은 경우, 이 제안을 받는 게 나보다 내 주변 사람들을 덜 피곤하게 한다거나,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 이보다 더 나쁜 짓도 서슴없이 할 것이라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차라리 그냥 내가 더 부자가 되고 싶어서, 내가 더 편하려고 한다며 솔직해지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나쁜 짓을 하는 동시에, (필요도 없는) 거짓말까지 덧붙입니다. 이게 바로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도장까지 찍는 짓이라 하겠습니다.

"믿음은 결단의 노력이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착각하는 게, 무조건 믿는다고들 합니다. 그 말 뒤에는, 아 차마 안 믿기지만 그냥 나중에 천국 가려고 무조건 믿는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건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과 행위로 또하나의 죄를 짓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상 속에서 태연히 죄를 저지르기에 그게 죄인지 뭔지도 모르고 일상적으로 죄를 저지르죠. 이걸 매순간 바로잡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한 대로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고치고 또 뉘우쳐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무조건 믿는다니, 어디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이겠습니까? 믿는 게 아니라 매 순간 불신하는 겁니다. 문제의 그날밤 베드로가 스승을 부인했듯, 또 다시 찾아온 스승의 손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야 믿겠다던 불신의 도마와도 같습니다. 이 사도들도 나중에서야 그리 크게 뉘우쳤으니 우리 인간들의 약함과 어리석음이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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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수문장
권문현 지음 / 싱긋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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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모 대통령은 육사 문지기 출신"이라는 말이, 그를 몹시 싫어했던 대중 사이에서 희화화의 수단으로 유행하곤 했다고 전합니다. 육군사관학교의 방호원이 아니라, 그 학교의 축구부에서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맡은 게 팩트인데도 말입니다. 저 농담 속에는 은근 문지기라는 직종을 비하하는 뉘앙스가 사실은 들어 있으며, 백범께서 청년 시절 상해의 임정을 찾아갔을 때도 "문지기 역할이라도 맡겨 주십사" 요청했던 걸 보면 그 시절에도 해당 직역에 높은 평가가 이뤄지지는 않았던 사정이 약간은 짐작됩니다.

그러나 어디 그렇겠습니까? 서양 관용어구에는 "야만족이 문 앞까지 침략해 들어왔다"는 게 있는데, 문 앞이 아니라 원래 적은 먼 발치에서 미리 격퇴를 해야 나와 내 재산, 나의 소중한 가족들이 안전해집니다. 문 앞까지 적이 밀려왔다면 벌써 위험의 8,9 할은 현실이 된 셈인데, 만약 문에서도 적을 못 쫓아낸다면 이미 운명은 끝난 것입니다. 문지기라는 소중한 직책의 중요성은 사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라 우리가 실감을 그저 못하는 중일 뿐입니다.

저자 권문현 선생은 웨스틴조선호텔에서 36년 근무하고 이미 정년을 마친 분입니다. 그런데도 현업에서 은퇴 않으시고 다시 콘래드로 옮겨 이번에는 지배인으로 근무 중이라고 합니다. 가히 한국 호텔업계의 산 증인이라 할 만하며, 호텔리어의 모범이자 스승이라고 하겠습니다. 호텔의 "문지기"라면 사실 말이 문지기이지, 이모저모로 돌보아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죠. 또, 우리가 저기 강터의 JW 맬메리어트 같은 곳에 가 봐도 알 수 있듯, 호텔의 얼굴과도 같은 직역이 바로 권 선생 같은 분들입니다. 도어맨은 그저 문 열고 닫는 사람이 아니라, 초특급 호텔의 최전선에 서서 "우리 호텔은 이러한 곳입니다"를 간단한 표정, 제스처, 기품, 위엄, 친절함 등으로 표상하는 직책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한 분야에서 40년 가까이 근무하면 저절로 달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네요. "어떤 이들은 이 직업을 감정 노동자라고 하지만 항상 웃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항상 웃을 수 있어서 행복한 분이라면, 그 웃음이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웃음이란 뜻입니다. 자신의 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일의 파급 효과가 또한 어떠하며, 그 일이 어떠어떠한 이들에게 긍정 부정으로 영향을 끼치며, 그 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이런 반응이 가능합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웃음을 짓는다는 건 그저 허공에 대고 웃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직역상 사람들에 대고 그 눈을 보고 웃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즉 그 순간에 (위에서 말한 대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웃음이 되려면, 사람 사람의 특징과 내심과 수양의 정도와 그 사람의 행복한 정도가 가늠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숱한 사람들을 접하고 또 접한 분이라면, 사람을 한번 보기만 해도 그 내공과 선함과 직분과 사회적 위상이 바로 감 잡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달인의 경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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