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껏 못 배웁니다, 일센스 - 이메일 작성법부터 엑셀 기본기까지, 친절한 선배 ‘공여사들’의 직팁 모음집
공여사들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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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공대생은 매우 드물어서 해당 학과에서 아주 귀하신 몸이 되곤 합니다.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공대 나온 여성 인력은 전혀 전공과는 다른 분야로 진출해서도, 여성 특유의 감성과 공대에서 훈련 받은 논리적이고 엄격한 공학적 사고 방식을 모두 발휘하여 조직 적응을 잘해 나가는 예를 개인적으로 봤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공대 출신 남성은 역시 전혀 다른, 어떤 센스와 감성을 중시하는 회사에 취업하여 내내 특유의 무능과 부적응으로 고생하다 기어이 책상을 뺏기기도 하던데 물론 개인의 특수한 예일 뿐이지 바로 일반화할 건 아니겠습니다.

이 책은 "노련한 공여사분들"이, 신입 여사원들에게, "사수의 도움 없이" 이런저런 사소한, 그러나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처리 요령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아 놓은 내용입니다. 일 잘하는, 숙달된 회사원들에게는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질 수도 있지만, 당연한 말을 해도 그 중에 은근 공대 출신 특유의 "로지컬"이 묻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내용은 단편적인 결론은 이미 알지만 아 그런 맥락이 주변에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새삼 오기도 했습니다.

메일을 보낼 때에는 직접 용무가 있는 사람은 (수)이며, 알아두어야 할 사람에게는 (참)에 넣습니다. 상식이지만 예를 들어 책에는 발신자가 메일에 자기네 팀장을 참조에 넣었으면 나 역시 우리 팀장을 넣어야 "안 꿀린다"고 합니다. 물론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고 그러면 좋다는 거지만 저자분들이 "그래야 안 꿀린다"고 한 게 재미있었습니다. 사실 진짜 일센스는 "해야 한다"와 "하면 좋다"를 잘 구분하는 거니까 말입니다. 다른 건 센스라기보다 능력의 문제입니다.

고 밑에 있는 내용이 또 신입들에게는 눈여겨 봐 둬야 할 내용입니다. 상대 팀장이 (수)이면, 우리 팀장은 대개 (참)에 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능하면 저쪽 팀 실무자도 (참)에 넣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나는 알릴 걸 다 알렸다는 책임 소재를 분명히할 수 있습니다.

전달은 회신과 뭐가 다른가? 첫째 지금까지 일이 진행된 상황을 전부 보여 주기 때문에 일일이 설명할 수고가 덜어집니다. 또 내가 잘 모르는 일을 일일이 설명은 해야 하는데 내가 그럴 실력이 안 된다, 이럴 때 그 미숙함을 조금 감출 수가 있습니다(p31에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물론 노련한 상사는 이런 기술들을 다 눈치채지만 여튼 이런 요령은 필요합니다. 제가 주변에서 직접 겪은 일인데 해당 분야를 이미 잘 파악한 부하직원이 일부러 포워드로 보냈습니다. 과장은 지레짐작으로 그 부하를 불러 설명을 요구했는데, 부하직원은 기다렸다는 듯 유창하게 해내었고 한방 먹은 과장은 이후 그를 만만하게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용이든 역이용을 위해서든 이런저런 잔스킬은 알아둬야 합니다.

단톡방에서 카톡을 할 때에도 때로는 띄어쓰기가 엄청 중요한데 회사에서 공적으로 회람되는 문서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들여쓰기, 표식을 적절히 잘 활용하여 서로 다른 수준을 분명히 시각화해야 합니다. 사실 이런 건 남성보다 섬세한 여성들이 훨씬 잘하는 영역입니다. 또 내용이 많으면 주제별로 분명히 항목을 따로 묶어야지 1, 2, 3, 4, 5, 6, ... 식으로 무작정 나열하지 말라고 합니다. 상위 제목에는 볼드체 활용이 또 기본이죠. 니가 알아서 읽어라 내용이 중요하지 식의 (문서 편집) 태도는 회사 생활 안 하겠다는 선포나 마찬가지입니다.

내용면에서 MECE가 중요합니다. 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참 어렵죠. 아니 일을 할 때 exhaustive해지면 그 다음엔 exclusive가 잘 안 됩니다. 반대로 너무 exclusive에 치중하면(중언부언 하지 않기) 그 다음에는 exhaustive가 또 안 되고 빼먹는 게 반드시 나옵니다. 상사들에게 지적 잘 받는 건 전자, 즉, 중언부언 안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능력 있고 노련한 상사는 전자는 물론 후자를 또 반드시 지적합니다. 이거는 형식적인 스킬에 긏그치는 게 아니라 사실 기획자의 진짜 실력을 이걸로 판가름하는 겁니다. 이게 잘되는 사람은 이미 업무 통달자이며 바로 이사로 별 달아야 합니다.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인, 아니 현 시장이 선거 몇 달 전에 v의 약자가 (청와대에 있는) VIP를 가리키는 것 아니냐는 억측을 해서 큰 화제가 되었던 적 있습니다. 아니 얼마나 서류작업을 안 해 봤으면 version의 v도 모르냐는 거죠. 그전 세대보다 훨씬 잔기술이 잘 몸에 밴 채 직장에 들어오는 똘똘한 20대들에게 (이제는 육십대인 오 후보의) 저런 모습이 과연 어떻게 비춰질까 생각했는데 다른 더 심각한 이슈들에 묻힌 데다 오히려 초기 노이즈 마케팅이 잘되어 시선을 끈 셈이 되어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튼 파일 네이밍 규칙은 p57에 잘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제가 이걸 잘해서 칭찬 받았던 기억(여자는 아닙니다만)이 있어서 더 집중해서 읽곤 했네요.

그 뒤에 나오는 "센스 터지는 나만의 폴더 구조"도 꼭 읽어 보십시오. 신입들에게 특히 유익합니다. 책에서 이런저런 팁을 알려 주면 거기서 만족하지 말고 2단계, 2.5단계로 응용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의력 응용력이 있어야 조직에서 살아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함수의 개념도 모르면서 무슨 자신이 프로그래머나 되는 양 행세하던데 요즘 같은 세상에 진짜 실력자 아니면 어디 가서 큰 망신이나 당할 만큼, 어느 조직이라도 눈썰미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괜히 허풍 허세 떨다 매장이나 당하지 말고 그럴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합니다. IF 함수는 엑셀 쓰는 사람이라면 숨 쉬듯 써야 한다고 책에서 말하는데(p110), 참 예전에 엑셀 개발 안 되었을 때는 일을 어떻게 했을까 싶을 만큼, 아니.. 계산 잘하고 도표 잘 만드는 사람은 그 능력으로 예쁨 받았겠습니다만, "엑셀력"은 사실 함수 외우는 능력이 아니라 로 데이터와 문제 상황에 맞춰 새 함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존 레퍼런스북에 나오는 함수 기능도 빠삭하게 잘 알아둬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이 로데이터로 "또 어떤 다른 결론을 더"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인사이트입니다. 물론 초보 시절엔 각종 함수를 적시적소에 잘 적용시킬 줄 알아야 하겠죠. p155 이하에는 피벗 테이블 활용하는 방법이 여럿 나오는데 독자가 이미 알아도 유익한 설명이 있고, 특히 이제 신입인 분들은 전체를 반드시 숙지해 놓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미 준비가 잘 된 분들은 능숙히 하겠지만 말입니다.

역시 다들 아는 내용이 많겠지만 구글에서 검색을 정확히 할 때에는 큰따옴표를 쓰는 등 검색연산자를 정확히 알면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연산자도 중요하지만 검색 잘 하는 건 좀 다른 요령이 필요하고, 업무의 맥락이 또한 중요하며, 평소에 상식이 좀 많아야 모르는 정보도 잘 찾을 수 있습니다. 20년 전에 "앞으로는 기억력이 별 필요 없고 모르는 건 인터넷에 찾으면 바로 나온다"고들 했는데 실제로 업무에서 검색 잘 안 해 본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시간 없어 죽겠는데 기초적인 것도 검색을 해 봐야 아는 사람은 벌써 시간을 그만큼 까먹고 들어가는 거고, 무엇보다, 아는 게 없는 사람은 자신이 새로 뭘 찾아야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정말로 회사 신입, 특히 사수한테 뭘 일일이 물어 보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여성 신입 사원들에게 유익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웬만큼 잘 알아도, 빠진 부분 소홀한 대목 잊은 지식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므로, 베테랑들도 곁에 두고 수시로 참고하면 좋을 듯합니다. 편집이 예쁘고 말투가 경쾌해서 잘 읽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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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균형 있게 살기로 결심했다 -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균형의 힘
이현주 지음 / 메이트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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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잘 안 풀린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잘되었을 때의 리듬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걸 기억하기가 또 쉽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는 말합니다. "삶이 꼬였다면 균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책 표지에는 자전거를 타는 어떤 남자의 그림이 나오는데, 한번 배우면 안 잊어버린다는 게 자전거타기이지만 이 쉬운 것도 (어떤 이유에서건) 몸의 균형을 잃으면 그때부터 막막해집니다. 자전거타기의 균형을 바로 찾듯, 삶의 균형도 다시 척 감 잡아지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90년대생과 소통의 어려움" 아빠가 자신을 부하 직원 대하듯 하는 게 불만인 자녀가 있다고 합니다. 90년대생이면 이제 사회에서 일정 몫은 담당하는 세대이며, 승진이 좀 빠르면 벌써 부하를 둔 축도 있을 만큼이죠. 여튼 자녀는 자녀이며 부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들 자녀를 둔 세대는, 아마 그 부모에게서는 매우 강한 투로 훈육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물론 그 무렵이면 오히려 과잉보호가 사회 이슈가 되었을 만큼, 대다수는 대체로 온화하게 대우를 받았을 겁니다만 말이죠). 여튼 본인이 엄한 훈육을 받았다고 해서 자신의 아이한테도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 말도 안 되죠. 그보다는, 우리 사회가 이제 상식으로 다들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건, (때로는) 새로운 행동방식이 필요하다는 쪽입니다. "가족은 본디 '지지적'이고 친밀감을 요구하는 관계이다(p31)." 이전에는 이렇게 하는 게 문제가 없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 변화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즉 "내가 먼저 변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수용하고,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내가 먼저 이니셔티브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 p54에는 아주 모범적이고 탐구적인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하던 직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장 입장에서 일을 이렇게 진지하게, 더군다나 지적으로 수행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겁니다(적어도 저라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그 직원이 이제 새로 이동해 온 부서에서는 통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가장 당혹스러운 건 물론 그 직원 본인이고 말입니다.

이때 저자의 조언은 이렇습니다. "(과거의) 내 방식을 믿지 말고, 그런 방식으로 일했던 나의 '역량'을 믿어라" 이게 참 맞는 말인 게, 내가 능력 있어서 분명 그렇게 잘했었는데, 그 방법은 내가 운이 좋아서 찾은 게 아닌데도, 에휴 뭐 내가 그렇게 유능했었어 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방식을 찾을 수 있는) 내 역량을 믿지 않고 과거에 잘됐던 경험만 믿는다는 거죠. 이처럼 이 책은 "안돼서 그저 헤매기만 하는 사람뿐 아니라, 잘나갔었는데 현재 좀 힘든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번아웃은 누구한테나 문제입니다. 이게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단계를 거치면서 나타난다고 합니다(p59). 그 이유는 "초기에 가졌던 열정이 시간을 거치면서 차차 사라지고 약화되는 것(p60)"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예전에 어느 소년이, 공장에 다니기 싫어 불을 질렀다는 뉴스가 1980년대 후반 신문지상을 장식한 적이 있었는데 독자들이 욕을 하긴커녕 다수가 동정하는 반응을 보여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하죠. 이 책에도 "회사 다니기 싫어 내가 타는 버스가 고장이 나 병원에서 쉬었으면 좋겠다"는 회사원이 나옵니다. 또 어떤 여사원은 참신한 기획을 잘 내어 이번에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도 그 부담 때문에 정신에 과부하가 걸려 고생한다고 합니다. 능력이 없어도 물론 문제이지만 능력이 탁월해도 또 그것대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처방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휴식해야 한다"는 거네요.

우리는 보통 감정과 이성이 충돌할 때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책에서는 때로 감정의 손을 들어 줄 필요도 있다고 말합니다(p87). 물론 업무 추진이나 대인 관계에서 감정대로만 하다가는 얼마 안 가 사회에서 도태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아내가 간만에 뭘 좀 사 왔는데 남편 생각에는 더 싸게, 최저가 검색을 통해 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싶어 반대의견을 말하려 들 것입니다. 이게 이성적으로 맞습니다. "맞는 말을 했는데 왜 아내는 받아들이지 않는가?" 이 남편은 소소한 타당함과 큰 스케일의 어리석음 중 전자를 선택한 겁니다. 아내의 기분을 좀 살려 줄 필요도 때로는 있는 거죠.

여기서 저는, 그 아내 역시, 슬기로운 남편의 얼굴에 살짝 스쳐가는 당혹스러움의 그림자를 빨리 캐치하고, "아차, 저 인간이 내가 최저가 검색 안 한 걸로 짜증이 났지만 티를 안 내고 넘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을 센스 있게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남편의 생각을 이처럼 들여다보고 기분도 달래 줄 줄 안다면 아마 그 아내는 앞으로 훨씬 편하게, 아내가 자신보다 몇 수 위임을 이제 깨달은 남편을, 마치 아들처럼 심리적으로 컨트롤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절제하는 게 마냥 좋은가? 물론 일일이 다 표현하다가 더 큰 싸움이 날 수도 있지만 "그 다툼이 관계의 자극이 되어 활기를 가져오기도 한다(p112)"고 합니다. 물론 "절제와 신중함은 미덕(p113)"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속으로 삭이기만 하다가는 관계가 아주 상하기도 하는 게 또한 현실이죠. 또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중하게 추진하고 기획하는 건 좋은데 너무 재고 재다가 일이 진도가 안 나가고 결국 업무 능력 퇴보로까지 이어집니다. "갈등이 항상 나쁜 게 아니니 때로는 명확히 표현을 하라(p115)."

대인관계 감수성이 뛰어나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또 환영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흔히 "눈치가 빠르다"고 합니다. 많은 조직에서 업무 능력보다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더 잘나갈 것이고 또 이런 이들이 곁에 있으며 주위가 참 편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 역시 경우에 따라 다르며, "심리적 공간이 서로에게 필요한 부서(p138)"에서는 이게 오지랖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합니다. 하긴 해당 감수성이 아주 뛰어난 사람은 이런 것도 금세 파악하여 또 바로 적응을 합니다. 문제는, 사실 업무 능력은 좀 아쉬운데 이런 것만 잘하는 사람은, 여튼 존재감은 그냥 유지하려고 결국 종전에 하던 식으로 나댄다는 겁니다. 일도 잘하고 관계 센스도 뛰어난 사람이면 뭐 자유자재이지만 말입니다.

여튼 가장 중요한 건 나입니다. 내가 아 도저히 이거 못 견디겠다 싶어서 내면의 내가 내 자신에게 알람을 치면, 내가 바로 알아채야 합니다. 책에서는 "애자일(agile)함"의 미덕을 지적하는데(p172) 원래는 기업의 조직 유연성, 대 환경 기민성을 강조하던 맥락에서 주로 사용되던 말이죠. 그러나 개인에게도 그 생존을 위해 당연히 필요한 덕목입니다. 부정적 감정도 엄연히 "나"의 일부이니 이를 억지로 외면하면 안 됩니다. 나를 지키면서, 내 안의 이런저런 아이들 사이에 균형을 찾아가는 것, 이런 나, 저런 나 모두 나의 본 모습을 깨닫고 두루 달래는 게 나 자신을 지키고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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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1
제인 오스틴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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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보람은, 아무리 시대가 많이 지난 후에 읽어도 그 위대한 통찰이라든가 심오한 철학, 여전히 유효한 지혜, 아름다운 표현, 그 표현에 걸맞게 담긴 불멸의 진리, 신랄하면서도 이지적인 유머 등이 현대의 독자한테 고스란히 와 닿은 데에 있습니다. 고전은 그래서 고전이라고 불리는 거죠.

<오만과 편견>은 내용을 직접 읽지 않고 제목만 들었을 때는 무슨 내용이나 분위기일지 우리 현대의 독자들이 감 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영화판을 이 원작 소설보다 먼저 읽었다면, 물론 스토리 자체가 워낙 재미있다 보니 충분히 즐길 수 있었겠지만, 소설 원작을 먼저 읽은 독자보다는 감흥의 큰 부분을 빼앗긴(빼앗길?) 셈이라서 좀 안된 셈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솜씨가 서툰 감독이라도 일단 가독성 있는 영상으로 옮길 수는 있겠지만, 소설 안에 깨알같이 녹아 있는 유머와 위트, 반어, 지적인 멋 등을 남김 없이 담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그저 통속적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에게는 그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히며, 반면 그 이상을 추구하는 독자에게는 작가의 놀라운 설계와 솜씨가 또 눈에 보이기에 아주 다층적인 구조를 지녔다고 하겠습니다. 번역가 박용수님의 쉽고 자연스러운 번역도 좋았고 말입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소설은 베넷 부부의 일상적인 대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무 정보나 단서 없이, 혹은 "편견" 없이 이 부분을 읽은 독자라면, 왜 이 남편분(뒤에도 나오지만 분명 신사이신데)은 아내에게 이처럼 퉁명스럽게 대할까 라며 아쉬운 느낌이 들 겁니다. 또 아내 베넷 여사가 딸 리지(엘리자베스)에게 경솔하고 헐한 평가를 하는 대목도 의아스럽겠지만, 어머니만큼 딸을 누가 더 잘 알까 싶어 일단은 그냥 넘어갈 겁니다(혹은 그저, 가족 간의 허물없는 대화로도 읽힙니다). 그러나 소설을 끝까지 읽다 보면, 초기의 "편견"이 이처럼이나 뜻밖의 양상으로 깨질 수도 있구나 싶을 겁니다.

p23에는 베넷 여사의 수다가 나오는데, 다른 집 딸내미들에게는 꼬박꼬박 "양"이란 접미사를 붙이면서 유독 샬럿에게는 자기 딸처럼 무람없이 호칭합니다. 이는 그만큼 샬럿을 딸처럼 친하게 여겨서인데 이것은 소설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확인 가능합니다. 어찌 보면 샬럿은 소설 속에서 참 한심하게 보이는 면도 있는데, p168에서 드러나듯 아무 매력도 없고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이는(실제로도 그런) 콜린스에게 사실상 "취집"을 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p226에는 "(샬럿이) 캐서린 여사를 맞으며 두려움 때문에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라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독자는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해 주는 설명 같지만, 사실 이는 엘리자베스가 철저히 자신의 주관을 투영하여 행하는 진술이기 때문이죠. p106에는 콜린스가 로싱스 저택의 위용을 찬양하는 장면에서, 콜린스의 그런 말을 듣고 베넷 가문의 모든 식구들(엘리자베스만 제외)은 "로싱스 저택의 하인방에 비교되는 것조차 영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문장이 또한 너무도 우습습니다. 이 역시 엘리자베스의 신랄한 풍자입니다.

p96을 보면 캐서린 드 버그 노부인 역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경외할망정 결코 호감을 가질 타입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는 젊고 매력적인 부자 다씨(사실상 남주)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과 닮은 데가 있는데, 그러나 소설 후반에 드러나듯 평판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 각각의 실체는 서로 크게 차이가 납니다. 여튼 이렇게 평이 안 좋은 드 버그 노부인에 대해 유독 콜린스만은 열렬한 어조로 찬양을 늘어놓는데 이 사람은 억압적 부친에게서 훈육된 탓인지 어떤 자연스러운 감정의 생성과 표현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p100에 보면 콜린스에 "자만, 비굴함, 자부심, 겸손 등이 혼합된 인격"이라는 엘리자베스의 평이 나옵니다. 물론 가상의 인물입니다만 이처럼 재미있으면서도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는 인간형 분석이야말로 이 고전의 최고 매력입니다. 엘리자베스는 p64 등에서 자칭타칭 "인간 분석 전문가"로 나타나는데(특히 다씨가 이런 의외의 점을 발견하고 놀라곤 하죠) 이 소설의 최고 매력 포인트입니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신도 천재도 아니고 그저 평균적인 또래 아가씨들보다 훨씬 더 센스 있고 영리한 정도라서 실수라든가 착각, 혹은 "편견"의 함정에 자주 빠지지만 그 역시 우리 구경하는 독자들에게는 큰 재미를 줍니다.

콜린스는 참 어느 대목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p94에서는 본의 아니게 베넷 씨와 그 집안분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장황하게(15분 동안) 변명을 하며 이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시니컬한 시선이 잘 드러납니다. 반면 p404에서는 리디아의 가출에 대해 참으로 냉혹한 충고(냉혹함이 뭔지도 이해 못 할 사람이긴 하지만)를 하고, p496에서는 드 버그 노부인의 "노예" 답게 그 사주를 받아 되지도않은 논리로 반 협박성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물론 이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그 의미를 이해할 주제도 못 됩니다만).

이런 어리석은 콜린스이고, 게다가 (실정법의 맹점 때문에) 자신이 죽고 나면 모든 재산을 이 작자(조카)한테 물려주어야 할 베넷 씨이지만, 이상하게도 서신 등을 교환하며 소통하는 건 또 은근 즐기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3부에 본격적으로 나오지만 자신의 막내딸(리디아)이 저지른 그 멍청하고 무모한 선택에 대해 콜린스가 그 나름 충고랍시고 하는 말 따위에, 이상하게도 이성적인 타당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콜린스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이게 무슨 존경을 받을 만한 통찰 같은 건 전혀 아니지만, 여튼 결과가 그렇게 나오기도 하니 신기하기는 합니다.

베넷 씨가 콜린스를 좋아하냐 하면 그건 또 전혀 아닙니다. 장래가 이미 보장되었고 베넷 가문의 재산까지 차지할 수도 있는 콜린스를 사윗감으로 맞이하는 일에 대해 베넷 부인은 적극 찬성하며 둘째딸 엘리자베스더러 "안 받아들일 거면 연을 끊는다"고까지 했지만, 그 남편인 베넷 씨는 오히려 딸이 저런 작자를 남편으로 고르면 딸과 연을 끊는다고까지 합니다. 물론 베넷 씨는 짖궂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농담을 자주 하므로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콜린스에 대한 평가는 p168에서 "천성적으로 우둔함을 타고났다"든가, p188에서 "거만하고 속 좁고 우둔"하다는 말 등이 나옵니다.

이런 베넷 씨이지만 엘리자베스 눈에는 부친이 또 그리 완벽해 보이기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조금만 "처신"을 잘했다면 딸들이 그리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는 않았으리라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고, 사태의 진상을 모르다가 딸이 지혜롭게 알아낸 바를 나중에서야 듣고 마음을 놓기도 하는 등, 신사(드 버그 노부인의 평가대로)이기는 하지만 뭔가 순진하고 맹한 구석도 없지 않습니다. p515에서는 딸의 선택을 두고 전혀 짐작을 못했는지 "너 그 사람을 미뭐하지 않았었니?"라며 놀라워합니다.

여튼 베넷 씨는 신사이고 지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보기에 자신의 부인, 또 둘째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네 딸들은 하나같이 무식하고 바보 같다(p12)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같은 남자로서 이해가 가는 면이 있습니다. 근데 재미있는 건, 사실상 이 소설의 화자는 엘리자베스나 다름 없는데 여성의 눈으로 이처럼 남자 심리를 잘 알고 남자 입장에서도 바라볼 줄 안다는 점이죠.

p59에서 다씨는 그 특유의 건방진 말투로 "여태 살면서 교양 있는 여성은 여섯 명밖에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듣는 사람들(특히 여성들)이 기분 나쁠망정 그는 이 순간 정직하게, 또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말을 한 겁니다. 즉 그는 허영이 없는 대신 오만함은 갖춘 건데, p32에서 메리가 한 말처럼 적어도 다씨 같은 사람에게 이 정도 프라이드는 악덕이 아닙니다. 이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편견"의 의미는 (물론 작중에서 사연과 인물 형상화를 통해 잘 드러나지만) 명시적으로 대화 중에 뭐라고 정의된 대목은 없는데, "오만"의 의미는 ("허영"과 대비하여) 여러 번 나옵니다. 예를 들면 p84 같은 곳입니다.

1부 중간쯤에 혜성처럼 나타난 캐릭터가 조지 위컴인데 이때만 해도 압도적인 매력을 갖춘 뉴페이스의 등장에 독자들이 큰 기대를 가졌건만 결과는... 엘리자베스는 그의 빼어난 외모에만 반한 건 아니었고 그 자상한 태도나 선량해 보이는 분위기에 끌린 것입니다만 그처럼 한심하고 이기적이며 무대책인 면모가 있었는지는 몰랐겠죠. "인간 분석 전문가"이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한계일 듯도 싶습니다. p288에 "판단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라며 자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조지 위컴은 뭐 악인은 아니지만 3부 이하에서 보여주는 그의 면모는 사실상 인질범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노답 위컴을 용케 찾아내어, 생각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딜을 친" 외숙의 수완이 놀라운 줄 알았으나 정작 실무를 다 해치운 이는 따로 있었으니... p479에는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날 만큼, "최악의 지경에서 갑자기 최상의 국면으로 반전"된 베넷 가의 행로가 아주 보기 좋게 마무리가 되죠. p395에 나오는 말대로 "여자의 평판은, 아름다움만큼이나 깨지기 쉬운 것"인데도요.

이 소설에서 가장 중심적인 사건은 물론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관계 발전입니다. 2부 펨벌리 저택 장면에서 다씨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매너로 엘리자베스와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데 그 이유가 p364에 나옵니다. p425의 엘리자베스가 하는 말에서, 젊은이들은 과연 어떤 상대와 맺어져야 하는가, 물론 집안의 조건이나 외모, 재력 등도 당연히 따져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아주 신중하게 분석하는 대목이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합니다.

남성, 여성의 체격이나 키에 대해서도 소설 속에 자주 묘사가 나옵니다. p93에는 우리 선입견과는 달리 콜린스 씨가 키도 크고 몸집도 좋다는 말이 있죠. 또 p73에는 다씨가 그처럼 키가 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존중감이 반으로 줄어들었으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p58에 다씨의 여동생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p114에 처음 등장하는데 과연 듣던 대로 키가 크다는 게 확인됩니다. 그 이름이 "조지아나"라는 건 p163이 되어서야 나옵니다. 한편 다씨를 사윗감으로 점 찍었던 드 버그 노부인의 딸 이름은 "앤"이라는 게 p245에 나오죠.

여기서 독자들이 아주 밉살스러워할 만한 캐릭터는 당연 빙리의 여동생 캐롤라인일 텐데, 엘리자베스가 불구대천의 원수지만 사실은 엘리자베스는 비교적 여유를 갖고 상대를 다루며(p117) 반대로 수세에서 전전긍긍하는 쪽(p75, p131 등)은 캐롤라인입니다. 너무 밉게만 볼 건 아닌 게 베넷 가문과 이쪽 다씨 집안은 가격(家格), 재산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게 객관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가격 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 모친, 즉 베넷 여사의 출신과 그 식구들이 입에 오르내리는데(특히 3부 후반에 드 버그 노부인의 신랄한 모욕), 모친은 눈치도 없이 자기 생각만 하는 게 독자 입장에서는 참 밉더군요. 과연 그 남편이 "멍청하다"고 타박할 만하지 않습니까.

3부에서 큰 사고를 치고, 제멋대로인데다 예의도 없는(p175) 리디아는 여튼 그 모친이 가장 사랑하는(p67) 딸입니다. 반면 리지, 즉 엘리자베스는 엄마가 가장 싫어하죠(p142). 베넷 부인은 끝까지 사윗감들을 차별하는데 p458에서 엘리자베스는 그에 대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제인은 여기 나오는 여인들 중 그리 폄하되어야 할 인격은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설정되는데 다만 좀 둔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쿨병까지 걸렸기에 엘리자베스한테 여러 번 핀잔도 듣곤 하죠(p26, p469 등).

다씨는 아주 매력적이고 수완도 좋지만, 예를 들어 <바람과 함께...>의 캐릭터 레트 버틀러와는 또 결이 다릅니다. 후자는 본래 근본이 없는 출신이고 매너나 행동도 그에 맞게 상스럽습니다만 다씨는 정반대로 새침떼기처럼 세련되고 고상하죠. 드 버그 여사가 그처럼 중시하는 교육도 많이 받을 대로 받았기에 학식도 풍부하고 말입니다. 엘리자베스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행복한 커플이 될 것이라 우리 독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문제가 심각한 건, 자기 주제 파악 못하고 아무데나 함부로 감정 이입하는 바보들이겠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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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개인주의자가 된다 - 각자도생의 시대를 견뎌내기 위한 인간다운 삶의 조건
박상용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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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란 참 어려운 개념입니다. 만약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모두 파편화하여 공동체의 목표에는 전혀 관심도 쏟지 않고 가장 원초적인 개인, 가정의 이익에만 골몰한다면 이는 문명이 아니라 야만 상태에 가까우며, 이런 사회에서는 부정부패가 판을 칠 겁니다. 물론 이런 건 개인주의의 개념에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극복, 지양되어야 할 단계에 속합니다.

반대로 사회의 기율은 잘 지키고 일사분란하게들 움직이지만 개인의 판단 재량이나 자유가 없고 어떤 명령에만 복종하는 식이라면, 이 역시 미개의 소치입니다. 이런 사회는 전체주의라 불려 마땅한데 상황이 이렇다면 일응 능률적인 외양을 갖추어도 결국 참된 진보가 이뤄지기 어려울 겁니다. 현재의 북한이나 러시아, 혹은 아마도 조선 시대 농촌 공동체 역시 이 비슷한 모습이었을지 모릅니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린 시절 일부를 독일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아주 획일적이고 자율성이 부족한 사회 풍조를 겪으며 "후진적"이라는 느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개인의 재량이 상대적으로 덜 용인되고 개성의 발현이 억제되는는 사회는 "선진적"이란 느낌을 잘 주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회사나 각종 조직에서 개별 성원의 목소리가 존중되어야 그게 정상으로 여겨지며, 자격도 없는 자가 뭘 가르치겠답시고 혼자 목소리를 크게 낸다면 이미 삼류 사류 조직으로 평가절하당해 마땅하다고들 여깁니다.

이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개인과 시민의 자율성"은 존중되어 마땅하다고들 여겼습니다. 서양의 문화가 이처럼 자유롭고 창의를 존중하는 아테네 도시 문명을 고전으로 삼고 발전했기에,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시민 문화가 이 정도씩이나 꽃을 피울 수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라고 해도) 시민과 인간이 (누구에게서 어떤 권한을 부여 받지 않고) 그 자체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p66)."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부인권, 불가양의 권리 등은 근대 계몽주의가 싹튼 이후에나 공유하게 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 민주주의, 휴머니즘"은 런던 왕립학회가 확립한 체계에 따르면 "삼위일체"로서 존재한다고 합니다(p64). 삼위일체는 그저 수식어구나 클리셰로 흔히 쓰는 어구가 아니라,. 신학에서 쓰이는 개념 그대로 "셋은 하나요, 하나는 곧 셋이며, 어느 하나 없이는 나머지 둘도 존립할 수 없다."란 뜻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휴머니즘 역시 민주주의 없이는 현대 국가에서 현실화하기 힘들며, 이 모든 것은 개인주의를 출발점, 기초로 삼습니다.

근대적인 개인의 탄생은 아무래도 (시대를 앞서간) 문학 작품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문학은 아득한 고대에도 이미 여러 형태로 존재했으나, 돈키호테, 햄릿, 로빈슨 크루소 처럼 어떤 정형과 천편일률에서 벗어난, 입체적이고 개성 뚜렷한 개인들은 근대 이후의 우수한 문학 고전에서부터 등장하죠. 저자는 밀란 쿤데라 역시 개인을 논했음을 환기하는데, 쿤데라의 경우 오랜 동안 전체주의 사회의 획일적인 억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온 작가라서 그 논의가 더욱 실감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은 그저 예술가이기만 했던 게 아니라 과학자, 기술자, 군사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특히 만능인이고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꼽힙니다만, 저자는 이를 놓고서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개인상"을 처음으로, 또 자신의 일생을 통해 직접적으로 증명해 보인 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의 시조"로 꼽습니다. 이들 개인은 공동체의 후원이나 편입이 아니라도 자립할 수있었고, 군주의 은혜에 의해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군주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게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추적 역할을 보였습니다.

트렌드. 우리는 적든 크든 트렌드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편입니다. 트렌드는 젊은 세대들만 민감해하는 게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도 그들 그룹 안에서 세련되고 멋있게 보이려고 온갖 유행을 참고합니다. 이런 트렌드도,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또 그것의 표준인지 정하는 문화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결정되는 바 다분히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일찍이 사회학자 뒤르켐은 "집단성의 또다른 이름"이라 규정한 바 있다고 합니다(p179). 예전에 왜 머리를 빨간색으로 염색하냐고 묻자 "개성 있잖아요?"라고 대답한 어느 X세대 소녀가 있었는데, 머리를 그리 물들이는 것 역시 또래 집단 안의 유행에 불과했던 걸 그리 포장해서 말하는 게 우습기도 했죠. 참된 개성은 트렌드, 혹은 일체의 집단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난 후에 발현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경제의 민주화", "바람직한 민주사회의 기초"로까지 논의릃 확장(p216)시킵니다. 본시 개인주의는 이천 수백년 전의 소크라테스(회의주의를 극복한 진취적 합리적 개인주의의 제창)에서 "익명의 택배기사들(p11)"에 이르기까지 그 맥이 이어진다고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을 일상에서 혹은 구조(독점 자본의 그것 포함)에서 억압하는 모든 사회적 병폐와 모순 역시, 레닌이나 스탈린식의 작위적이고 폭압적인 기제가 아니라, 개인개인의 가식 없고 자연스러운 각성과 의견 표명(의 자유)을 통해 이뤄질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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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하지 않는 기도 - 40일 기도하는 사람에게
정기원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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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면 "너에게 주어진 탈란트를 낭비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그저 겸양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만 하는 것도 때로는 죄이며, 신이 그에게 부여한 재능이 있다면 그것대로 온전히 발휘하고 사용해야 올바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떻게 해야, 그것이 과연 "낭비되지 않는" 기도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여럿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저의 결론은, 일단 "사단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 기도(p11)"입니다. 하긴 기도하는 사람 본인의 신심이 깊다면, 어떻게 사단이 함부롷 끼어들어 나와 주님의 소통을 가로막겠습니까? "기도는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무당에게 비는 것이 아니다(p22)." 그렇습니다. 아마도 가장 한심하고 "낭비되는" 기도는, 제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두고선, 주님께 함부로 이뤄달라고 빌며, 나아가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그러한 기도일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기도는 낭비된 기도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죄악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어차피 안 바뀌니, 바꾸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그 결과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꿀까, 아니면 내가 바뀔까?(p43) 그렇습니다. 어찌 내가 먼저 회개하고 깨끗해지기 전에, 다른 역사가 이뤄지길 기대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주님 앞에서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내 자신입니다.

그렇다고 일체의 신상에 대한 기도가 죄가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오늘의 안전, 가정의 평화, 긴급한 도움, 모두 구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나오는 말씀이죠. "구하라, 그러면...."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말을 덧붙입니다. 그냥 구하지만 말고, 당신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p44)."

훌륭한 성도들은 그저 나에 대한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세상에 평화를 찾게 해 주소서. 미얀마에서 죄 없이 죽는 이들을 도와 주소서. 시리아나 예멘에서 값 없이 죽는 불쌍한 이들을 도우소서." 그런데 이렇게 착한 성도가, 정작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을 위해서는 "그들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냉정한 시선으로 본다면, 이 역시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못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귀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p123). 내 가족을 살뜰히 챙기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이웃을 사랑할 줄 안다고 하겠습니까?

"신앙에는 진전이 있을 뿐 퇴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p166)"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초심을 잃고, 한때 깨끗했던 마음가짐을 더럽히거나 게을리한 채 어제보다 못한 오늘을 보내곤 합니다. 주님께서 안타까이 여기시는 건 무엇보다 이런 행태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못지 않게 오늘을 착하게 지내야 하며, 되도록이면 어제보다 더 깨끗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주님께선 미약하나마 한 발짝이라도 더 걷는 우리를 원하실 터이니 말입니다.

"신앙 생활은 절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p194)."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공동체 안에서 하나되는 성도의 삶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깨끗해지거나, 선한 마음을 회복하고 회개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알찬 기도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성도가 거주하는 나라가 위태로워지기도 하고, 사회에 커다란 불안이 닥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어찌 혼자된 개인이, 유효하고 유익하며 낭비되지 않는 기도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거듭나며, 매 순간 올리는 기도가 알차고 성스러운 것이 되기 위해, 이 책에는 매 챕터 끝마다 노트할 공간을 마련합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거짓 없으며 주님 안에서 그의 자녀가 되는 삶을 살기 위해, 낭비 없는 올곧은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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