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일상의 미래 - 공간·이동·먹거리·건강 미래 메가 트렌드 4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지음 / 청림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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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이 널리 보급되어 집단 면역이 이뤄진다고 해도 우리가 과연 코로나 19 팬데믹 이전의 삶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기보다, 그러잖아도 그리 갔어야 했을 방향으로 더 빨리 이행해 간다고 보는 게 맞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변화는 어차피 불가피했고, 코로나의 만연이 이를 앞당겼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책에서는 1) 공간 2) 이동 3) 먹거리 4) 건강 등 네 개 분야를 중심으로 우리의 미래가 코로나 이후 어떻게 바뀔지는 집중 분석합니다.

1) "공간"이라는 키워드가 무척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공간은 "사람의 육체가 머물며 활동하는 장소"이며, 육체는 "인간 활동의 근원이고 문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심오한 정의처럼 들리며, 미주를 보면 양혜림 박사의 한 논문에서 재인용했다고 합니다(p26, p330). 이 공간이 코로나 후 어떻게 바뀌는가. 공간의 특성을 더 살펴 봐야 하는데 ①대면과 접촉이 동반 ②감각, 체험을 위해 해당 공간으로 반드시 이동 ③다수가 공간에 모여야 목표 달성 ④저마다 다른 밀집도를 가짐. 이상의 네 가지 특성이 책에 제시됩니다(pp.26~27).

이것이 디지털 혁명 이후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물리공간과 가상공간이 동기화하는 날도 오리라는 게 책의 전망입니다. 사실 IT 기술이 발전하기 전 공간은 그저 물리공간으로서만 의미를 지녔습니다만 이제는 공간이라 물으면 "물리와 가상 중 어느것을 뜻하는지" 재차 질문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동기화가 철저히 구현되면, 가상을 더 이상 가상으로 부를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건 축구나 야구 등 스포츠에서 현재 시행되는 VAR이나 비디오 판정에서도 일부가 실현되는 중입니다. 판정 센터에서는 멀리 떨어진 구장에서 전송된 화면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며, 어떤 판정이 옳은지 결정한 후 다시 현지로 내려보냅니다. 또 시청자들 역시, 다각도에서 촬영된 여러 화면을 하나로 합성하여 마치 본인이 직접 보고 싶은 각도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는 체험이 가능한데 경기가 펼쳐지는 구장에 찾아가지 않았는데도 이게 가능합니다. 경기장에 몸소 찾아간다 한들 이런 체험이 쉽지 않겠죠.

기독교(신-구교)는 매주 의무적으로 예배, 미사에 참여를 해야 하는데 코로나의 확산으로 이런 집합행사가 어려워졌고 이 과정에서 온라인 모임이 더 널리 퍼졌습니다. 책에서는 홈트의 확산도 지적하는데 홈트가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없었던 건 물론 아니지만 트레이너의 직접 코칭을 받는 게 힘들어지고부터 이를 극복할 다양한 솔루션이 발달하게 되었죠. 등교하여 수업을 받을 수 없게 된 초중고생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게, 코로나 이후 "공간이 변용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p33에는 "오프라인 매장의 온라인화"도 예로 듭니다. 자라, 풀앤베어 등은 오프라인 소매점을 대폭 줄이고 절감된 예산을 온라인 투자에 전용한다고 합니다. 롯데마트는 우리가 사는 동네 곳곳에서 매장을 폐쇄하는 걸 많이들 봤을 겁니다. 이걸 전부 온라인으로 돌린다고 생각하면 기업들이 느끼는 위기의식과 발상의 전환이 얼마나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키오스크, 서빙 로봇, 앱 결제 등으로 "대면 방식"을 없애나가는 추세입니다. 이 모든 것도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만 코로나 때문에 추세가 가속화하는 것입니다.

직장도 변화하는 추세에 맞춰 공간 설계가 크게 달라진다고 합니다. "재택 근무가 늘어나니 개별 작업공간을 줄이고 대신 협업 공간을 늘리는 게 대세이며, 기존 회의 공간은 화상회의실로 바뀐다(p38)"고도 합니다.

책에서는 "셰이핑 투모로"라는 사이트의 분석틀을 이용하여 앞으로 공간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지를 예측합니다. 재미있는 건 모든 자료를 "도약시기(tipping point) x 강도(intensity)"로 환원하여 그 장래를 분석한다는 겁니다. 시기도 빠르고 강도도 강한 건 도시, 3D프린팅, 로봇 등이며, 시기는 빠르지만 강도가 약한 건 디자인, 트랜스휴머니즘, 비접촉 등이고, IoT와 블록체인, VR은 느리지만 강도는 강한 분야들입니다. 강도도 낮고 시기도 느린 예는 책에 나와 있지 않은데 만약 그런 분야가 있다면 분석 필요성도 후순위로 밀릴 터이니, 우리 독자들은 앞의 세 범주를 먼저 살피면 될 것입니다.

여튼 대면, 밀집의 필요성이 낮아지면 "도시의 저밀화(p76)"가 진행되며, 원격근무 원격강의가 확산하면 특정 지구가 업무 밀집, 우수한 학군 등의 이유로 특별히 선호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러면 "도심의 부동산은 일종의 '좌초 자산(stranded asset)이 되며(p77)" 관련 상권도 몰락하리라는 전망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홍대 상권 상당수가 현재 극심한 침체를 겪는데 지금이야 이걸 집합금지 조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코로나19가 진정이 된 후라고 해도 과연 예전만한 활황이 다시 돌아올지는 미지수입니다. 반대로 비(非)도시, 저밀도시로의 이주 수요는 늘어난다고 합니다(p78). 집도 종전과 달리 모듈화 공법이 확산하는데 쉽게 말해 "조립식 주택"이며 얼마 전에도 "편의점에서 파는 집(전원주택)"이 큰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

편의점 같은 것은 필연적으로 대면식, 오프라인 방식을 안고 가야 하지 싶지만 이 역시 온라인화가 가능하며 편의점 업계에서 배민 등의 동향애 민감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설명이 됩니다. 만약 배달 플랫폼을 배민이 선점하면, 거대 소매 체인은 막대한 투자가 무색하게 사실상 배민 등 배송 플랫폼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죠. 카카오톡이 처음 선보였을 때 SK텔레콤 등 거대 통신사가 나중에 가면 이들 채팅앱에 하드웨어만 제공하는 을(乙)의 위치로 전락하리라는 예측이 나왔을 때 아무도 안 믿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이는 거의 현실이 되어 갑니다. 카카오와 SK텔레콤의 시총을 비교해 보십시오. 독일 자본이 먼 한국까지 와서 일개 스타트업이었던 배민에 주목하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죠.

특이한 게 원래는 자가용 등의 수요가 줄고 공유경제가 활성화될 걸로 예상했으나 코로나 때문에 이 분야만큼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다중이 "공유"하는 수단이나 장소를 기피하는 건 팬데믹 상황에서 당연하며 그런 까닭에 "쏘카" 등의 서비스가 현재 고전한다는 거죠.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서비스가 출현한다면 공유경제는 다시 발전..."이라고 책에서는 말하지만(p86) 집단 면역이 거의 달성되면 "새로운 서비스"는 금세 시들지 않겠습니까? 또, 코로나 시대에 알맞은 공유경제 서비스 패턴이 과연 뭐가 가능할지도 의문입니다. 애초에 둘은 상성이 맞지 않은데요. 에너지 수요에 대해서도 과연 석유 소비가 감소할지(상권 붕괴), 증가할지(자가용 증가) 좀처럼 확언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막연한 분석은 독자로서 좀 불만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개인의 독점적 점유 공간"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애 대한 대응 방향은 1) 대중교통 수요 및 노선의 재검토 2) 소규모 이동수단 개발, 이동 중 공간활용성 향상 3) 도로용량 증설 및 환경오염 대처(자가용 증가 때문) 4) 기존 공유경제 대체 모델 개발 5) 도시 내 공동공간의 개인화 촉진 등이 나오는데(pp.99~100), 2)는 아마도 자율주행이 완성도 있는 단계에 접어들어야 가능하겠으며 4)는 논자에 따라 공유경제 모델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이 책에서는 그러지 말자는 쪽). "개인 독점 공간"을 매우 효율적, 입체적, 유기적으로 설계해야 "도시 저밀화 추세"와 부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동도 코로나 시대에 맞게 완전히 개인화한 "퍼스널 모빌리티"가 각광 받고 있으며 대표적인 게 전동 킥보드 같은 것입니다. 또 이에는 자율주행 기술이 필수로 탑재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비어클 제조사와 거대 통신사가 긴밀히 협업한다고 하네요.

물류에서도 큰 혁신이 이뤄지는데 대표적으로 IBM과 머스크(테슬라를 만든 일론 머스크와는 아무 관계 없고, 해운으로 유명한 Maersk社를 가리킵니다)가 합작한 Tradelens®를 책에서는 소개합니다. 물류 공급망 관리에도 블록체인 기술이 활용된다고 하니 그저 놀랄 뿐입니다. 3D프린팅과 물류가 무슨 관계일까 싶어도 3D프린팅을 즉석에서 (무엇인가를) 주형해 내는 기술로 생각한다면 쓸데없는 재고를 크게 감소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충분히 떠오릅니다.

"이동"의 미래에 대해서는 pp.150~151에 압축적으로 표현된 일러스트와 인포그래픽이 나옵니다.

코로나 19 덕분에(?) 비대면 음식 소비 문화와 관련 로봇 기반 푸드테크 산업(p187:7)에 큰 혁신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안전한 먹거리의 안정적인 공급(p187:20)"이야말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먹거리 산업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압축적으로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또 "팜 투 테이블(p185)"이란 말이 드러내듯, 비단 소비자가 음식을 최종 소비하는 단계뿐 아니라 농업 종사자가 농산물을 최초 생산하는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는 건데 이는 앞서 책 2부 물류, 이동 파트(의 주제)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되었더랬습니다. 최근 중국의 "알몸김치" 사건 때문에 충격 받은 이들은 특히 이런 트렌드에 귀가 솔깃할 만합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소규모 자영놈의 난립 때문에 생산 단가가 무척 높고 관련 법규 역시 "경자유전의 원칙" 위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미국, 중국 같은 대단위 농경, 토지집약적 1차 산업과 경젱이 되질 않습니다. 농업용 드론, 무인채소 농장, 심지어 도시 농업 등이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기술로 촉망받습니다.

레스토랑도 빕스(혹은 피자헛), 배민, LG전자 등이 협업하여 더 저렴하면서도 소비자의 개별 기호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 중입니다. "신뢰"와 "선별(개별화)"가 핵심 키워드입니다. 또한 이력관리를 하는 데 블록체인 기술도 필수입니다.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당연 건강에 대한 관심도 폭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비대면, 원격 진료가 핵심이겠는데 이에 대해 한국 의료계는 대단히 경계하는 입장이므로 향후 진척이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환자도 전 주기적 관점에서 케어되어야 하며, 방역은 일상이 되어야 하고, 가정의를 비롯 1차 의료기관이 지금보다 더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pp.282~287에 이 모든 토픽을 이야기(가상의 사연) 하나에 녹아낸 쉬운 설명이 있습니다.

비대면과 개인화를 핵심 키워드로 삼는 이런 포스트 코로나의 거대한 퐁속도에서 역시 "효율성"이 가장 큰 미덕으로 꼽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신뢰"와 "공감", "연대"의 가치도 중시되어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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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머니전략 - 친환경 테마주부터 ETF까지, 한 권으로 끝내는 그린 투자 가이드
황유식.유권일.김성우 지음 / 미래의창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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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머리말에서는 세계적인 석유 기업 BP의 정기 보고서(Apr 2020)에서 "글로벌 석유 수요는 2019년이 정점이었으며 이후 계속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 내용을 인용(p7)합니다. 40년 전에는 인류가 쓸 수 있는 석유 매장량이 곧 한계에 달한다고 예측했으나 이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석유 시추 기술이 그간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환경에 대한 위기감을 갖고, 특히 최근 지속적으로 석유 소비를 감소함에 따라 자연 고갈보다 훨씬 이전 시점에 수요 커브를 반대방향으로 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2020년 4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WTI가 마이너스 가격을 잠시 기록하는 등 충격적인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한때 금처럼 귀히 여겨지고, 유전의 발견이 팔자를 고치는 횡재로 간주되던 시절도 있었던 걸 떠올리면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세상이 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석유 회사들이 다우존수 지수 산출 pool에서 퇴출(p107)되고 사업 방향을 전면 수정하는 등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일상처럼 일어납니다.

한국에서도 작년 문재인 대통령과 홍 부총리가 그린 뉴딜 안을 발표하는 등 에너지 소비와 생산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노력이 가시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책 p33에는 EU 27개국 정상들이 2050 탄소중립을 발표했고, 집행위원회에서 "그린딜"을 천명하는 등 산업혁명 이후 수백 년 간 이어오던, 또 좀처럼 방향이 선회될 것 같지 않던 약탈적이고 소모적인 에너지 소비 행태가 근본적으로 바뀔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고 나옵니다.

캘리포니아는 전면에 태평양을 두고 배후에는 광범위한 산지를 두었기에 특유의 쾌적한 기후가 유지됩니다. 이러던 캘리포니아가 최근에는 끝도 없이 빈발하는 산불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데, 호주도 그러하며 2016년, '18년에는 한국에서도 이유 모를 산불이 강원도 일대에서 꼬리를 무는 등 이상 현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이 모두가 지구 온난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책에서는 p50에서 트럼프 전 행정부의 무관심함, 인식 부족 등을 비판합니다. 비판 받아야 할 건 트럼프뿐이 아니라, 탄소 소요 에너지의 과다 사용과 환경 오염에 무지하고 무신경한 우리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자, 이런 이상 기후 현상과 대기 오염, 환경 파괴,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운동이, 이 책 제목이기도 한 "머니 전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관계가 있어도 아주 크게 있습니다. 우선 작년 문정부에서 발표한 "그린뉴딜"만 해도 발표 즉시 해당 종목들 가격이 크게 들썩였습니다. 그러니 그린 트렌드에 무관심하고 "아 돈벌이하고 환경보호는 원래 반대로 가는 거야" 같은, 예전식 생각을 해서는 이제는 안 되는 겁니다. 또 MSG, 아니아니 ESG라는 말 자체가 작년 이맘때 제이피모건社에서 낸 리포트에 있는 말이고요. 이 키워드가 일파만파가 되어 작년 하반기에는 한국의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ESG 경영을 대대적으로 선언(p253)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기업 오너의 대외 발표는 여러 다른 계산이 복합적으로 배경에 깔려 있는 게 보통이지만 SK 같은 대기업이 공개적으로 ESG라는 추상적, (어쩌면 아직은) 비주류적 가치(그렇지 않습니다만)를 전면에 천명하고 나선 건 전에 없던 대사건임이 분명합니다.

SBTi라고 들어 보셨나요? 과학기반목표 이니셔티브의 약자입니다. 기업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업에 있어 구체적인 목표를 수립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해도, 과연 이것이 환경 보전에 얼마나 기여가 되는지, 과학적 근거는 갖추었는지에 대해 확신이 안 설 수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특히 여러 투자은행, 시중은행 들이 참여한다는 게 돋보입니다. 한국에서는 대구은행, SK텔레콤, SK증권, 신한금융지주회사 등이 참여한다고 합니다. 뒤의 두 기업이 우리 나라에서는 투자은행에 가깝습니다.

ESG라는 말을 처음 만든 곳도 그렇고 투자은행, 증권회사에서 이처럼 "그린"의 가치에 적극적인 건, 일반 투자자, 특히 소액 개미들이 부쩍 늘어난 요즘 그들이 환경 가치의 중요성을 적극 인식하고 일상에서 직장에서 행동에 옮기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부정적 이슈라도 등장하면 커뮤 게시판 등을 통해 네티즌들이 불매운동 정보를 급속히 공유하는 풍조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기업이 반환경 혹은 반사회적이라고 찍히면 주식시장에서도 상당 기간 고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에는 p76 이하에 특히 "금융기관들의 책무"에 대해 자세히 나옵니다.

요즘은 빅데이터 시대이므로 기업마다 광범위하게 고용량 데이터센터를 갖춰 운용합니다. 서버와 스토리지 수요가 이만큼 늘어나기 때문에 반도체 경기에 슈퍼사이클이 온다는 말도 허황된 게 아니었습니다(요 며칠 삼전이 공매도 때문에 고생 중입니다만). 애플은 데이터센터마저도 100% 재생에너지로 가동하고 있으며(p82) 재생에너지의 사용에 그치지 않고 이의 생산 등에 기여할 것을 오래전부터 약속하고 실행에 옮기는 중입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스벅, 그리고 (애플의 협력사 중 하나인) SK하이닉스도 이런 움직임에 적극 동참한다고 책에서는 말합니다. 이 사항들이 예쁜 컬러 일러스트, 인포그래픽으로 설명되어서 우리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다른 PT 자료 등에 원용하기 좋게 편집되어 있습니다.

책의 3부가 시작되는 p109 이하에서 ESG의 뜻이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어쩌면 책의 진짜 중요 파트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독자가, 이 책을 골랐을 때는 "머니 전략"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ESG는 과거의 사회책임투자 개념과 유사하나, 네거티브 스크리닝(감시, 배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점수제로 기업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게 다르다고 말합니다. 요즘 증권 투자자들이 관련 뉴스에서 매일 듣다시피하는 MSCI 중 ESG 리더스 지수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합니다.

노르웨이 국부 펀드 같은 경우는 ESG 지수가 낮은 기업이나 섹터는 아예 포트폴리오에서 빼놓는다고 하네요. 주식뿐 아니라 채권도 이미 ESG에 따라 다양한 판별 기준이 마련되어 있고 가뜩이나 평판과 (심지어) 루머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증권 가격인데 이런 레퍼런스 지표까지 마련되어 있으면 영향을 안 받을 리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국부펀드 유사 성격으로는 연기금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런 큰뭉치 돈은 수익률만 따라 움직이는 게 결코 아니며 동시대의 가치와 아젠다에 밀접히 그 움직임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펀드매니저, 운용역들이 매번 개인적인 판단, 순발력으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증권회사의 상당액 자금은 이미 프로그램 매수 매도에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지수 편출입은 매우 큰 이벤트이며 편출입은 앞에서도 말했듯 ESG 점수에 영향을 받고 편출입에 따라 매도와 매수는 자동으로 이뤄집니다. 전문가에 따라서는 대형지수 편출입을 그리 신경쓰지 말라고도 하나(선반영) 막상 당해보고 나서야 그 중요성을 개인 투자자가 실감하는 겁니다.

지금은 확실히 전기차 전성시대가 열렸습니다. 작년 6월 전에 테슬라 주식을 산 서학개미들은 큰 돈을 벌었고 2,30대 젊은 직장인들이 대거 미주 투자에 뛰어든 것도 이 무렵입니다. 돈의 움직임은 실무보다 몇 걸음 앞서가기에 설령 아직 청색 번호판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이제 몇 년 안에 전기차 웨이브가 거리를 메울 것이 거의 확실시됩니다.

며칠 전 SKiet가 신규상장되었는데 첫날 따상이 아닌 따하를 기록하는 통에 많은 이들이 실망하기도 했죠. 이 이슈는 결국 이 회사의 특장인 분리막 생산이 과연 언제까지 유효하게 수익원으로 기능하냐에 달렸는데, 책 p169에서도 "아직은 먼 당신"쯤으로 표현하고 있듯 전고체 배터리가 현 시점에서는 상용화까지 갈 길이 멀긴 합니다. 하지만 주식이란 언제나 전망치의 반영이기에, 한국의 증시 참여자들이 냉정한 판단을 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락업 물량, 기한 등 다른 다양한 변수가 있었겠습니다만. 책에서는 퀀텀스케이프(美), 솔리드파워(2021. 5 현재 기준 비상장) 등의 종목을 소개합니다.

부생수소 역시 작년 하반기부터 일반 투자자들도 다 알 만큼 주목 받습니다. 아직까지는 완전한 친환경 생산에 기술적 장벽이 높기에 현시점에서 꿩 대신 닭으로 고려해 볼만하죠. 책에서는 관련 종목으로 덕양, 린데 등을 듭니다. 제이엔케이히터, 현대로템(꼭 대북 테마이기만 한 게 아니죠) 등도 주목할 만하다고 권합니다. 수소 연료 전지 부품 관련하여 상아프론테크, 효성첨단소재 등도 여러 전문가들이 추천하곤 하는 단골 종목입니다. 두산퓨얼셀도 작년 하반기 내내 화제였습니다.

작년 11월 바이든이 당선되면서 풍력 관련도 크게 들썩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강엠엔티, 씨에스윈드, 세아제강, 유니슨, 씨에스베어링, 동국S&C 등이 관심 종목이었는데 이 책 p218 이하에도 자세히 소개됩니다. 중국 기업으로는 금풍과기 같은 게 생소하지만 이 책에서 거론하네요.

말도많고 탈도 많지만 태양광 역시 그린에너지의 핵심 섹터입니다. 특히 책에서는 중국이 그리드 패리티를 앞당겼다며 앞으로는 상황이 다를 것을 예상하는데 지켜볼 일입니다. 종목으로는 한화솔루션(코스피), 징코슬라, 통위, 다초(이상 해외 주식) 등을 추천하네요.

"한국은 세계적인 LNG선 제조 강국이다." 이 챕터에서는 딱히 종목 추천은 안 나옵니다만 불과 몇 주 전 조선 종목들이 일제히 호재에 힘입어 큰 폭으로 상승한 걸 다들 기억할 겁니다. IMO 2020이 이런 추세를 유발한 것도 이미 투자자들은 다 익숙한 소식이겠고요.

"국내 대기업은 이미 ESG라는 한배를 탔다." 책에서는 SK, 포스코, 한화, 효성, 두산, 그리고 LG 등을 이 트렌드에 합류한 기업으로 꼽습니다. ESG 중에서도 특히 E, 환경을 중시한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인데 어디 지켜볼 일입니다. 책에서는 특히 "한국은 거의 모든 산업에서 경쟁력 있는 밸류체인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p257)"라고 말합니다.

ETF는 책 앞부분인 pp.118~126에도 나왔지만 p265 이하 챕터 5에 아주 자세히 설명됩니다. ETF가 바로 친환경 코드, ESG와 직접 연결되는 건 물론 아니고 몇 년 전부터 일반 투자자들도 관심 갖기 시작한 포맷입니다만, 머리 좋은 설계자들이 요즘 대중의 친환경 수요를 바로 흡수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친환경 ETF를 새로 만들어 두었다는 뜻입니다. 개별 종목에 대해 잘 모르겠는데 여튼 그린 트렌드에 동참하는 투자를 원한다면 ETF가 답이라고 책은 말합니다. p271에는 미국의 유망 ETF(물론 여기 나온 종목들은 모두 친환경 관련입니다)가 자세히 나옵니다. 미래에셋이 인수한 글로벌 X 관련으로는 LIT가 있는데 p278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네요. p298에서는 한국 투자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친환경 ETF로서 KBSTAR ESG사회책임투자를 소개합니다.

대략 십 년 전 마케팅 구루 필립 코틀러가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두고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역점을 두어 강조한 적 있습니다. 이제 ESG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증권 투자에 있어 변수가 아닌 상수적 고려사항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대세를 좌우할 만큼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의 큰 흐름이 저탄소 친환경으로 가는 것만큼은 분명히 확인되는, 어떤 투자 패러다임상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음은 확실하지 않나 싶습니다. 미래의창 책 답게 산뜻하고 가독성 높은 편집이 돋보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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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의 유산
장웨이 지음, 조성환 옮김 / 파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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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장웨이(張煒. 장위)는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될 만큼 이름난 중국 작가이며, 10년 전에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책이 한국말로도 번역이 되어 나왔습니다(아쉽게도 지금은 절판이네요). 1956년생이신데 우리나라에서라면 이 정도 연배분들이 한자, 한문을 꽤 잘하시는 분들이 있겠죠. 물론 한국과 근대 중국의 사정이 크게 다르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습니다만. 煒(위)라는 글자도 꽤 어려워서 윈도에서 기본 제공이 안 되며, 뜻은 "붉다, 빛나다" 정도이고 輝(휘)와 뜻이 통합니다.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산문집이지만 고대 중국사를 소재로 삼았으며 본디 이 작가분이 역사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분입니다. 1955년생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 책에 나온 대로 1956년생이 맞습니다.

도연명은 동진 대에서 유송(劉宋) 초기에 활약한 사람입니다. 동진은 東晉이며, 삼국연의에 나오는 사마의가 사실상 역성혁명으로 세우다시피한 그 나라가 팔왕의 난과 영가의 변으로 망한 후, 그 고손자인 사마예가 강남 건강(삼국시대 오주 손권의 도읍이기도 했던)으로 천도하여 중건한 왕조이고 더 후대의 왕조인 陳(진패선이 세운)이 아닙니다. 그가 남긴 <귀거래사>는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의 한학자, 유림에게 필수 교양 문학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오늘날 한국인들도 최소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서 그 발췌 부분이나마 해석을 해 가며 공부하는 텍스트입니다. 도연명은 알고보면 한국인에게도 아주 친숙한(그래야 할) 작가인 셈입니다.

역자 조성환 선생의 글을 보면 "이 책은 (중략) 도연명에게 (여태)덧씌워진 미사여구를 과감히 벗겨버린다... 밀랍인형 속에 갇힌 도연명을 밖으로 탈출시켜 민낯의 도연명을 목도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어떤 미사여구를 덧씌우거나 "밀랍인형" 안에 가둔 이들은 후대 중국과 한국의 문인, 혹은 유학자들이었을 겁니다. 공맹이 제시한 이상적 인간형에 (억지로라도) 맞춰 걸작 문학을 이해하게끔 유도하는 게 글 가르치는 스승의 본분이라 여겼겠으니 예로부터 내려온 다소 정형화한 해석론이 확실히 그런 성향(밀랍인형, 미사여구...)이 있을 겁니다. 여튼 그건 그것대로 선현들의 지혜가 담긴 프레임이며, 이 책은 프레임과 도학적 기준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도연명을 보는 한 가지의 현대적 시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전통적인 해석론에 밝은 독자들이, 오히려 이 책을 더 신선하고 더 파격적으로 받아들이며 저자(논자) 장웨이에 크게 공감할 수도 있겠네요.

전체 7강, 키워드 127항목(이 책 p11)로 도연명 파고들기를 시도하는 이 책은 분량도 꽤 많습니다. 예로부터 문인은 본격 도학자와는 달라서 자유분방한 문학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그런 천재형 문인이다 보니 마치 현대의 문학가들에 대해 해석하듯, 한 가지 각도가 아닌, 정말 127개나 되는 다양한 키워드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이 아닌 다각도의 통찰을 시도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특히 이 책은 서두에 나오는 역자의 해제가 유익하며, 한국의 문인 혹은 독자들과 고대 중국의 도연명이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교감했는지에 대해서도 소상한 해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해방 후에 한국에서 이뤄진 현대적 도연명 연구에 대해서도 간략한 소개가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해당 저자들을 키워드로 삼아 책들을 더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제가 지금 그렇게 합니다). 역자의 간략한 해제 앞에는 저자의 머리말, 한국어판에 특별히 붙은 서문이 있는데 머리말을 보면 이 책은 강연록을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도연명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사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도 가장 잔혹한 시대 중 하나였다(p55)." 도연명 문학 자체도 그렇습니다만 진에서 송제양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는 청담 사상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한참 전에 진(서진)을 사실상 세우다시피한 사마중달도 본디 청류파 유학자의 가문이었습니다. 특히 도연명보다 백 수십 년 전에 활동한 죽림칠현(책 저 뒤 p511) 등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죠. 사실 저자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 시기를 "잔혹한 시기"라 칭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쳇말로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진," 종래의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대의명분이 쉽게도 훼손되며 권세를 탐하는 이들이 온갖 술수를 부려 가며 부귀를 탐하던 시절이라, 이에 대한 반동으로 청류파가 주목 받기도 한 시대라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저자는 "도연명의 시기 서구는 막 중세 암흑기에 들어설 무렵이다"고 합니다. 사실 암흑기라고 하면 이때보다는 좀 더 지난 시기를 가리키고, 이 무렵이면 서로마가 망하기 직전이니 중세를 막 예비하던 시기이긴 하겠습니다. 게르만 야만족들이 지중해 세계로 몰려와 사정 없는 파괴와 약탈을 일삼던 걸 생각하면 "잔혹한 시기"인 건 또 맞습니다. 물론 당시의 동과 서는 아주 약한 정도의 교류만 있었으니 이런 문명 쇠퇴의 불길한 폭력적 조짐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은 결과는 아니겠습니다만. 여튼 저자는 이 시기(위진)의 중국을 기혈(嗜血), 즉 "피에 굶주림"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p56). 嗜는 "즐길 기" 자 이며, 이 글자는 윈도에서 기본 제공되는 글자입니다. "기호식품"이라고 할 때의 그 글자이니...

저자는 비단 위진(魏-晉) 시대뿐 아니라,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지식인이 갖는 불안한 위상에 대해 논합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독립된 공간"에 놓여 있어야 지식인다운 사유와 행동이 가능한데, 그 "독립된 공간"은 "정글"이며 이곳은 세상의 부와 권력을 놓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정글을 항상 염두에 두고, 동경하기도 하며, 두려워하다가, 개조를 시도한다." 참 멋진 요약입니다. 춘추전국 시대의 순수 도가적 사상 조류는 아예 세상과 절연되어 있지만, 이미 유가가 천하의 지배 사조로 정착한 후에는 어떤 지식인이라도 정글 같은 세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심지어 지식인들 상당수는 그런 썩어빠진 정글을 "동경"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글에 몸 담그는 순간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 못 하니, 상대적, 추상적 의미로서의 "개인 공간"이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저자가 127개 키워드 중 하나로 특별히 "개인 공간"을 꼽은 것은 그런 의의가 있습니다.

"정글"이란 말은 이 책에서 p84 등 여러 군데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쓰입니다. 저자는 이 파트에서 특히 조조에게 죽은 공융 같은 지식인의 삶을 도연명과 대비시키는데, 그 비유가 매우 재미있습니다. (정글의) 짐승을 대할 때 그 부드러운 가죽, 평온한 코 고는 소리, 늘씬한 체형에 감탄하여 그 잔인한 본성을 모르고 겁도 없이 접근하여 만지다가 목숨을 잃는 게 공융 같은 지식인의 실수(p58.이 워딩은 독자인 제가 다소 변형했습니다)라는 겁니다. 도연명은 그렇지 않아서 자신의 시대에 군벌 혹은 권력자였던 환현, 유유 등과 거리를 두었답니다. 유유는 도연명의 생애 후반 즈음에 동진을 공식적으로 폐하고 자신의 제국 송(宋)을 세운 인물이며, 환현은 그럴 야망을 품었으나 그릇이 작아 결과적으로 부하 유유에게 길만 열어 주고 떠난, 말하자면 한국사의 궁예 같은 포지션입니다(물론 유송도 길게 가지는 못했지만). 환현과 유유에 대해서는 간략한 설명이 책 저 뒤 p246에 나옵니다.

지식인이 독립된 공간을 가지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어야 합니다. 도연명 같이 단기간의 출사만 마치고 이내 귀농, 귀향하여 음풍농월만 일삼다가는 가산이 넉넉해도 다 까먹기 일쑤이겠습니다만, 그나마 도연명은 그런 형편도 못 되었다는 걸 우리는 어려서 학교에서 배워 잘 알고 있습니다. p61에는 특히 루쉰 선생(물론 존경 받아 마땅한 분이나 저자 장웨이는 특히 이분에 대해 "선생"이라는 경칭을 붙입니다. 이는 현장의 "강의록"으로서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의 "유머스러운" 평가를 인용합니다.

사실 헤겔 같은 철학자도 심지어 일생의 시기별로 노작의 경향성이나 문체가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하물며 도연명은 문학가이니 설령 아무리 우리 현대 독자들이 "치사, 청렴, 자연친화" 등의 한정된 키워드로 그를 (좁게) 이해한다 쳐도, 그에 무관하게 생애별로 경향성의 차이를 보이는 건 당연하지만 여태 선입견에 갇혀 그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겠죠. 저자 장웨이는 시기별로 작풍(作風)을 분류하는데 청년/중년/근만년/만년 이 네 단계라고 합니다(p87). 특히 저자는 도연명에게 근만년과 만년이 불과 몇 년 차이지만 작품 분석에 있어 그 준별이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근(近)만년"의 작품에는 "분노, 비분강개"의 기운이 담겨 있으며 한참 선배인 굴원과 비슷한 경향(저자는 "강화"라고 평가합니다)이지만, 만년의 작품에서는 평온한 달관이 엿보인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그렇게 치면, 상대적으로 굴원은 끝내 울화를 달래지 못한 채로 생을 마친 셈입니다. 우리 한국 독자들도 좀 유념해 두어야 할 기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보통 굴원과 도연명의 작품 세계를 거의 같은 컬러로들 여기는데 둘은 시대도 크게 차이 나며 결국 시대의 성숙만큼이나 더 진화한 문인을 도연명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이니 말입니다(어디까지나 제 개인적 생각에 불과합니다).

p110 이하에서 저자는 이제 본격적으로 도연명에 덧씌워진 "미사여구", "밀랍인형 프레임"을 벗기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진나라 왕실의 정통을 유지하고 강권과 협력하지 않는 전형이길 바라면서 시인의 대항성을 기꺼이 강화하길 바랐다... (중략) (그러나) 그의 말과 행실은 곳곳에서 강권과 당시 정치 상황에 대응하지도 않았다. (중략) 도리어 자신의 흥취와 본성에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쉽게 풀어 말하면, 사람들은 도연명이 마치 조조에 대항하다 비참한 죽음을 한 예형처럼 투사형 인물로 보길 원하지만, 생각 외로 실제 민낯(p11. 역자 해제 中)의 그는 유연하고 융통성 있고 문학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더 사랑하던 인물이었다는 뜻입니다.

p111에서 그는 "존엄 표현은 자유로운 것이며, 인류 문명을 촉진하는 방식도 결코 하나일 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비협력의 분노는 자유의지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고, 오히려 주변 군체의 충동에 굴종하고 순응하게 되니 차라리 타협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소위 강골 지식인의 허상(내지는 위선)을 폭로하는 구절이며, 작가의 놀라운 통찰을 보여 줍니다. 주위에 보면 그저 멋있게 보이려고 현실성도 없는 극한 강경 노선을 (실천에 옮길 자신도 없으면서) 목소리만 높이는 인물들도 있습니다. 작가의 말은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며, 이 대목에서 독자는 다소 통쾌해지기까지 합니다(제가 오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자는 p180에서 "도연명 시는 동진 시단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당시에는 가장자리에 처했다"고 합니다. 이 역시, <귀거래사> 등만 읽고 도연명을 위진남북조 시문학의 전형으로 인식하는 한국 독자의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 주는 문장입니다(심지어 도연명이란 문인에 대해 중학교 사회 교과서[동아시아사 파트]에서조차 이리 기술합니다!). 대표성과 전형성은 서로 다른 개념임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죠. "내재적인 화려함, 현란함, (심지어)통속성"까지 그는 지적하는데, 이 모든 개성이 당대 주류 문학 경향과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거죠. 이는 "개인으로서 그의 천재성"이, 후천적으로 습득된 시대적 경향보다 그의 문학 세계 안에서 더 철저히 구현되고 지배적 동력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천재인 개인으로서 그를 바라봐야지, 비타협과 청류의 상징, 반골 소신파 등으로 억지로 프레임을 씌울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재능과 확연히 떼어놓을 수는 없으며, 이것은 함께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총체"라고도 말합니다.

p222에도 루쉰 "선생"이 다시 원용됩니다(p228에도 또 나옴). 여기서 저자는 도연명이 "요 임금이 우리의 조상"이라며 다소 "억지스럽게" 계보를 밝히는데, 이 부분은 많은 학자들이 굴원의 <이소> 중 해당 대목을 따라한 흔적이라고 지적하며 저자도 같은 견해입니다. 사실 이런 일종의 허세는 위진남북조의 도잠뿐 아니라 (책에 나오듯) 다른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현대의 일반 독자들도 마찬가지 심리입니다. 그러나 도잠은 조상의 영광에 비추어 (비루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후손들에 미안히 여긴다고 저자는 꿰뚫어봅니다. 입신영달이 글 배운 사람으로서 몽매간에도 잊을 수 없는 일생 목표인 건 중국사 오천년을 통틀어 변한 바가 없죠. 저자는 훨씬 후대 당 제국의 이백과 두보도 거론하며 이백은 조상으로서 이광 장군을 드는데 이분은 사마천의 <사기>에도 열전 중 독립 항목을 차지하고 있죠. 그에 비하면 두보가 드는 연혁은 다소 추상적이며 도연명의 이런 태도와도 더 닮았습니다. 저자는 도잠의 "근만년"과 "만년"을 엄격히 구별(p87)하지만, 만년의 작품 중에서도 "맹사(猛士)"와 "형가"의 형상이 출현(p232)한다고 말합니다. "맹사"는 그저 사나운 선비라는 뜻이며, 형가는 전국~진초(秦初)의 자객입니다(역시 사마천의 <열전> 중에 나오죠).

"전원"과 "관리사회"는 과연 현대인이 이해(오해)하듯 그리 멀리 떨어진 공간이 당시에는 아니었으며 생각보다 복잡미묘한 공존을 이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는 전원을 사랑했으나, 전원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p245)." 여기서 저자는 도연명의 만년에 대해, 성공적인 귀향 귀농을 이루고 자연스레 시심이 솟아오른 쾌락의 경지인지, 그렇지 않고 빈한에 시달리다 부적응으로 끝낸 인생인지가 미스테리라고 합니다. 이는 문학이 아닌 역사의 영역이므로 이렇게 문학 작품만 응시해서는 명쾌한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연명식 "전원"의 의의에 대해서는 pp.307~318에 더 자세히 논의됩니다.

술은 문사의 흥취, 삶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촉매이자 제재(題材)이자 테마이자 작품 자체입니다. 실제로 도잠은 술을 직접 담궈 빚기도 했습니다. 이백 역시 시선(詩仙)이라 불릴 때 그의 곁에 항상 술이 함께했음을 누구나 증언하고 그 자신도 고백합니다. 저자는 도연명에게 "술은 진정한 이웃이고, 고향 사람이며, 도화원이고, 애인이었다(p297)."고 평가합니다. "노동의 중요성"은 특히 이 책 저자가 수시로 강조하는데 이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을 신성시하는 현대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흔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튼 그 "노동"의 중요성과 의의는 도연명에게 "술의 가치"와 동일시되기까지 한다는 언급도 있습니다. 또 "노동"에의 전폭 긍정 여부가, 도연명의 귀향, 귀농 그 적응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언급도 앞에 있었습니다.

도연명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저자는 도연명의 시대로부터 천 년 뒤에 지구 반대편에 출현한 셰익스피어(역시 시대정신과 천재적 개성의 혼연일체)의 <햄릿> 한 구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들며, 서양인과 중국인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상기시킵니다. <논어>에도 未知生 焉知死라는 구절이 있죠. 도연명 역시 중국인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아예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회피, 도피가 아니며, 오히려 달관, 초연의 경지에 가깝지 않을지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태도(p394)이나, 저자는 "서양에서 죽음에 대해 개인적 견해 하나를 내놓지 못한다면 철학 논변을 취소해야 한다"며 그 날카로운 차이점을 선명하게도 인식합니다.

그는 "문학의 표본이며 생명의 표본(p438)"입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그는 단순한 반항자가 아니었고 사회에서 도덕적 우세를 차지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재주가 세상에서 으뜸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반항하는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도 존재하며 그의 의의는 항구적이고 보편적이다(p441)." 이게 강의록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함축적이고 심지어 시적인 언명, 규정이 책을 가득 채울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당송팔대가의 한 명은 아니지만 당시를 애호하는 독자들이 반드시 곁에 두고 읽는 맹호연을 거론(p471)하며 그는 도연명과 달리 명백한 은사였으며 도연명처럼 생존을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이 외에도 왕유, 임화정 등 거론). 그래서인지 맹호연의 시세계에서 자연과 전원은 도연명처럼 시적 화자와 일체가 아니며 다분히 분리된 완상의 대상이지만, 그래도 맹호연에 대해서는 특히 "시인 자신이 들국화 한 떨기"였으며 도연명과 몹시 닮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마다 모두 자신의 담장을 가지고 있다(p594)는 게 저자의 말인데 이는 앞에서 말한 지식인의 "자기 공간(p58)"과 견주어 그 뜻을 새길 만합니다. 저자는 특히 프랑스의 몽테뉴와 그를 대조하는데 몽테뉴는 특히 부유한 형편에서 여유 있게 철학을 전개할 수 있었죠. 반면 천 삼백 년 전의 도연명은 "물질적 빈곤이 그의 담장"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여기서 주위와 쉽게 융화하지 못하고 사회적 고립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조건이 생성되는데 여기서 저자는 다시 루쉰 "선생"을 원용합니다. 루쉰 선생의 담장은 "가시"였다고 하네요. 이 역시 다른 사람이 쉽게 접근 못하는 여건입니다.

전통적으로 도연명은 충절, 청렴, 자연친화 등 동아시아인이 공통적으로 아주 귀히 여기는 가치를 체화한 시인으로 숭앙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장웨이 저자가 분석하고 해설한 이 책에서 도연명은 서유럽 그 어느 천재 시인 못지 않게 개인으로서 자신만의 가치와 주제를 자신만의 운율에 담아 노래로 빚은 천재입니다. 이로서 그간 딱딱하게만 여겨진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한 천재가 "담장"을 허물고 현대 독자들과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는 또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졌다고나 할까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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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컨버세이션: 대담한 대담
황창규 지음 / 시공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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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규 전 KT 회장, 전 삼성전자 사장은 메모리에 관한 한 이른바 "황의 법칙"으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누리기도 하는 분입니다. 물론 그는 슈퍼 엔지니어, 성공적인 경영자로 더 널리 알려진 인사이지만, 삼성전자에서 엔지니어, 경영자로서 쌓은 업적이 저 짧은 어구 안에 압축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죠. 물론 그 워딩의 기원은 "18개월마다 2배로 CPU의 성능이 증가한다"는 무어(p93)의 법칙이긴 합니다만.

황 회장은 프롤로그에서 "나는 참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회고합니다. "불과 20대 초반에 평생 해야 할 공부의 주제를 잡았고...(중략)... 좋은 스승을 수도 없이 만났으며, 평생 기술자로 살 줄 알았으나 나의 그릇을 키워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경영에서도 백전 노장이 되었다..." 그는 민간 기업계에서 거칠 수 있는 자리를 거의 다 거쳤고 이후에는 지식경제부에서 국가 CTO의 역할(p176)까지도 맡게 됩니다. 한 개인으로서 이만큼이나 누릴 수 있는 영예와 성취를 다 누린 인생도 극히 드물 것입니다. 그는 매산 황영두 선생의 손자이기도 합니다(p311).

그는 자신을 이끌었던 스승으로 이건희 회장, 클라우스 슈밥(p274), 스티브 잡스(p156) 같은 이들뿐 아니라,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순신 장군 등도 함께 꼽습니다(책 중반쯤에 보면 앤드류 그로브도 나옵니다). 한 기업, 아니 고작 한 부서, 한 팀이라고 해도 자신을 따르는 그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달린 프로젝트를 완성도 높게 마무리짓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십수만의 생계(좀 과장하자면 이제 수천만이라고 해도 될)가 달린 삼성전자 같은 기업을 세계 톱으로 이끌었고, 위에 언급했듯 지경부 전략기획단 단장의 자리에 올라서는 나라의 반 세기 먹거리감을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충무공 같은 분은 반만년 역사에 다시 나오기 어려운 성웅이지만, 기업의 성패에 걸린 수많은 이들의 생계와 국가의 장래가 달린 과제의 방향성을 걱정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방향성의 차이가 없습니다.

작금의 젊은 세대 누구나 자신의 스펙을 걱정하고 젊은 배우자의 인생마저 두 어깨에 짊어지고 책임감을 느끼겠습니다만, 이런 분의 삶의 궤적으로부터 진지한 공부를 하고 롤모델로 삼는다면, 장차 험난한 경쟁을 이겨내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정도에야 아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우리는 아주 예전, 즉 삼성 창업주 이병철씨가 삼성의 미래를 반도체에 "올인"으로 결정하던 당시 그가 그 이른 시점에서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궁금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1994년, 즉 그의 아들인 고 이건희 회장이 다시 한번 기업의 방향성을 어떻게 잡을지를 놓고 고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1994년이면 삼성이 지금 같은 위상이 아직은 아니었으며 해외에 나가도 브랜드를 거의 못 알아보던 시절입니다.

이때 이건희 회장은 명품 TV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듣고, 다음으로 해당 분야 개발 총책임자 황창규 이사(당시)에게 반도체에 대한 설명을 듣는 순서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삼성에서 이사를 달았다면 엄청 대단한 줄 알지만 사실 그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사내에서는 그냥 그렇게들 본다고 합니다(하물며 부장이라면 뭐...). 이사라고 해도 건물 안에서 어쩌다 그룹 회장을 스쳐지나가기라도 하면 온몸에 긴장이 바짝 도는 그 정도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건희 총수를 포함 사장단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반도체에 대한 것이 TV 같은 직접 소비재(아무리 명품이라서 극소수 하이엔드에만 어필하는 제품이라고 해도)에 대한 것처럼 피부에 와 닿을 수는 없습니다. 분위기는 겉돌기 쉽고, 결국 명품 TV에 관심 순위가 슬슬 밀려가는 듯했습니다. 황 이사가 밀리면 그를 믿고 여태 온갖 정열을 쏟아붓던 기술진, 다른 인력들도 모두 삼성 내에서 후순위로 밀리는 겁니다.

"회장님, 미국 인구가 몇인지 아십니까? 2억 7천만인데 그 중에는 사회에 짐만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1개의 반도체(엄지손톱만한 크기. p22)에는 2억 7천만 셀이 들어가는데 그 중 하나만 불량이라도 생기면 이걸 팔지를 못합니다."

1994년이면 상당히 젊은 나이인데도 어떻게 이 당시 벌써 이사였는지 궁금해할 독자도 있겠습니다. 저때로부터 몇 년 전 삼성은 해외에서 천재급 인재를 스카우트 중이었고, MIT를 거쳐 스탠포드대 연구실에 봉직(책임연구원. Reaearch Associate. p248)하던 황창규씨는 당시 교수 제의도 마다하고 "일본을 이겨 보겠다"는 일념으로 삼성에 왔다고 합니다(p20). 당시 이미 저자는 인텔의 컨설팅도 진행한 경력이 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가늠할 수 있었고, 목표가 높으면 높을수록 이런 천재형 인간에게는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겠습니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마세요." (p298. 문재인 대통령)

MIT 박사과정에서 데이비드 네이본 교수가 스승 중 한 분이었는데(p244) 이미 이 당시에 갈륨비소가 재료로 주목되었었네요. 지금은 질화갈륨이 또 시선을 받고 있으며 관련 종목 주가가 들썩거립니다.

당시 삼성이 제의한 자리는 임원이었는데 그래서는 연구 개발 실무에 전념할 수 없다 여겨 그는 자청해서 부장직(소자개발팀장. p195)을 원했다고 합니다. 이사가 된 건 그때로부터 3년 후라고 하네(p21)요. 여튼 부장이건 이사건 삼성이라는 조직 안에서 그닥 큰 존재감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염두에 두고 저 일화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사실 일류, 천재 연구진, 엔지니어라고 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저런 상황에서 격에 튀는 순발력을 발휘, 혹은 애드립을 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2001년, 도시바가 삼전에 조인트벤처를 제안합니다. 앞선 제안을 삼전에서는 거절했는데 다시 도시바가 형식을 조금 바꿔 수정 제안을 한 것입니다. 받아들이면 삼전은 도시바와 안정적으로 시장을 나눠 먹으며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거절하면 삼전은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강자로 도약할 수 있지만 그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황창규 등 삼전이 보유한 천재들의 포텐을 아직 그저 포텐으로만 계산한다면 말입니다.

"PC 시대에는 D램이 그저 CPU의 보조 정도였으나, 모바일 시대에는 저전력 모바일 D램이 핵심 부품이 됩니다. 플래시는 일부 기술만 보완하면 향후 우리가 세계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p28)." 이 비슷한 결론을 크리스텐슨 교수도 도출했으며 p94에 다시 언급이 나옵니다.

이런 태도, 시각은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쪽과는 거리가 멉니다. 상당 부분 본전을 날릴 각오를 하고 도박하는 체질, 기질, 배짱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성은 선대 창업주 시절부터 최고 인재를 대우하는 풍조가 있었고 2001년 기준 충분한 인적 자원, 또 그들이 쌓아 둔 지적재산이 넉넉했기에 이런 "도박"이 가능했을 터입니다. 분수나 역량을 모르고 무작정 도박하는 기질이라면 당연히 가진 것도 다 날리고 거지꼴이 될 것입니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은 심정으로 올인하는 건 흔히 봅니다만, 저 당시 삼성이면 당연히 잃을 게 훨씬 많은 시절이죠. 참고로 저 당시에 한국 대기업 중 무리하게 덩치를 키우다 망한 곳이 60%가 넘습니다. 동아, 대우, 한보, 해태, 쌍용, 한국일보... 가진 사람에게는 가진 대로, 도박은 진짜 위험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D램이 없어진다는데?"

이건희 회장은 20년 전에 저 말을 했습니다만 아직도 삼전은 D램이 먹여살리며(아직은요) 현재 D램은 수익성이 점점 낮아지는 추세이긴 합니다만 2001년 저 시점에 벌써 포기하고 안정적 수익만 추구했다면 오늘날 삼성은 벌써 쪼그라들었을 것입니다. 플래시는 몇 달 전 SK가 거액을 들여 사업부문을 사 왔고, 삼전은 파운드리 최강자 자리를 대만의 TSMC로부터 뺏어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20년 뒤에 우리는 과연 지금 이 시점을 어떤 처지에서 회고하게 될까요?

저자 황창규씨는 20년 전 저 시점을 "삼성의 운명을 바꾼 순간"으로 이 책에서 자리매김합니다. 아마도 황창규 회장은 일류 엔지니어치고는 정말로 보기 드물게 현상타파 대도약을 선호하는 기질이며 이 점이 이건희 회장과 죽이 참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건 근데 실력이 되어야 가능하지, 준비도 노력도 안 된 일반인이 함부로 따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도시바가 당시 저런 제안을 한 건 벌써 레이스가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로, 기아차는 작년 하반기에 애플로부터 공동으로 애플카를 개발하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바로 거절했습니다. 장래를 보면 자측이 잃을 게 더 많겠다는 계산과 미래차 시장에서의 자신감에 바탕한 결단이겠는데 어디 과연 어떻게 될지, 20년 전의 삼전 같은 길을 걸을지 아니면 어설픈 따라하기, 만용이 될지는 지켜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전자가 되어야 하겠지요. p261에 정의선 부회장(당시)를 만난 이야기도 나옵니다. 참고로 p164에는 이재용 상무(당시 직책)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스티브 잡스를 만났을 무렵 사연이며 이 당시 잡스가 직접 저자에게 "언제까지 '황의 법칙'이 지속됩니까?"라고 물었다고도 합니다.

미래차 사업의 성패 여부에 확실히 기업의 현재 판도가 모두 바뀔 판인데 테슬라는 이제 힘든 고비를 넘기고 애플 같은 기업으로 도약을 하나 싶었는데, CEO의 정신 상태가 저래서는 힘들 듯하네요. 애플은 잡스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다른 여러 유능한 인재들이 있었고 견제와 협력 작용이 다양하게 이뤄졌습니다.

다만 음... 이 책에서는 일론 머스크(p108)를 높이 평가하며, 특히 젊었을 때 물리학을 깊이 연구한 데서 연유하는 그의 저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자가 최전선에서 뛸 무렵만 해도 머스크는 그저 괴짜 정도로 여겨졌으나 저자는 일찍부터 그의 탁월한 비전을 알아봤다고도 합니다.

순전히 주가 상승만 놓고 보면 "슈퍼팬을 만들어 끈질긴 충성도를 유지하며 회사 성장의 원동력을 만드는" 머스크의 락스타 같은 맹매력을 결코 경시할 수 없으나, 이제 그의 힘도 한계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다만 이 책이 작년 이맘때쯤 나왔더라면 한창 테슬라에열광하던 젊은 동학개미들에게 큰 공감을 불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머스크하고 황 회장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있으나 황 회장이 kt 회장도 역임했고 미래차는 5G(혹은 그 후세대 통신망)를 이용한 자율주행이 핵심인 데이터 기반 사업임을 염두에 둔다면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 연결 지점이 마련됩니다. p255에는 프로야구단("위즈")도 이분이 간여한 대목이 나옵니다. 지금 위즈는 리그 선두를 다투는 강팀이 되었는데 현재 모기업에서 관심이 없다거나 심지어 매각 이슈가 나온다는 루머가 있긴 합니다. 간신히 자리를 잡았는데 경기도 젊은 팬들의 성원도 있고 계속 갔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이 독판치는 식이 되어서는 기업이 잘될 수가 없으며, 이 책에서 황창규 회장도 "자신을 도운 여러 인재"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타고난 머리의 힘만으로 뛰어난 엔지니어가 될 수는 있어도, 장기 전략을 정확히 수립하고 미래를 꿰뚫어보며 직원들을 다독이며 함께 나가는 경영자 노릇은 혼자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희 회장은 그에게 상급자, 고용주였을 뿐 아니라 "스승" 노롯도 겸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 대단한 건, 1994년 저 시점에서 이 회장이 설명 받은 반도체는 말할 것도 없고 명품 TV 역시 저때로부터 대략 10년 후 유럽 시장에서 보르도 브랜드가 엄청 대박이 났다는 것입니다. 둘 다 1994년 시점이라면 "에휴 한국에서 무슨 명품이고 정밀부품이고가 가능한가? 주제를 알고 일본에서 주는 하청 일이나 그냥 열심히 하지" 당시에야 뭐 다들 이런 생각 아니었겠습니까.

그가 책에서 이 충무공을 여러 번 언급한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서울대 공대에서 석사까지 하고 유학을 가야했는데 군 복무를 마치기 위해 해사에서 교관으로 임관되었었다고 합니다. 그때 난중일기 원본도 볼 수 있었는데 "각오하고 나아감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는 이 충무공의 정신에 특히 공명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까 과감한 기업 전략의 수립에 도박사 기질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사실 이분한테는 좀 실례가 되는 말이겠죠. 그는 젊어서부터 최전방 야전사령관의 비장한 결기를 습득할 기회가 있었던 셈입니다. "의기(意忌)"란 말이 p71에 나오는데 이건 맥락에 맞지 않은 오타이지 싶습니다. 意氣 혹은 義氣가 맞겠죠.

2001년에는 그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서도 중요한 사건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 톱이었던 노키아가 10위권 밖의 업체였던 삼전에 기한을 제시하며 노어 플래시 제조를 위탁했던 것입니다. 노키아에 납품이 보장되면 삼전의 위상은 크게 올라가겠으나 기한 내 납품이 가능할지가 의문이었으며 이때 저자는 충무공이 느꼈을 법한 긴박감과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이의 성공은 그저 매출액의 대폭 신장에 그친 게 아니라 플래시 시장 전체의 판도를 바꿔 놓았습니다. 즉 노어플래시의 속도, 낸드플래시의 용량(각각의 장점)을 합쳐 "원낸드"라는 새로운 제품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고 노키아에의 납품을 통해 이를 현실화한 것입니다. 특히 그저 기술적 장점의 구현에만 그치지 않고 "인터페이스" 자체를 바꿔서 상대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등 삼전만이 할 수 있는 전사적 역량을 동원한 쾌거였다고 할 만합니다.

파괴적 혁신은 그저 기존에 잘 되던 방식만 폐기하는 게 아니라, 잘되던 거건 아니건 간에 시대 조류를 앞서가기 위해 선제적으로 모든 것을 갈아치우는 걸 뜻합니다. p342에는 "무너질 둑이라면 (진즉) 무너지는 게 맞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인텔은 당시만 해도 세계 정상을 달리던 기업이었으나 (얼마 전 타계한)크리스텐슨 교수는 이때 벌써 해당 기업의 취약점을 내다보고 "파괴적 혁신"을 설파했습니다. 저자도 교수의 저 논문(저가의 전통 기술이 오히려 시장을 주도하고 성장 동력이 된다는 요지)을 읽고 사장단 회의에서 거론했으며, 나중에 황의 법칙으로 일반화한 이론도 실은 크리스텐슨 교수의 학설이 반도체 시장에 응용된 결과입니다.

앤디 그로브 인텔 CEO는 시사주간 TIME에서 1990년대 내내 토픽으로 다룰 만큼 거물이었지만 1980년대에도 유명했었고 황창규 저자는 이미 1988년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하네요. 아직은 장래가 촉망되는 연구원 혹은 초보 컨설턴트 신분이었겠지만 말입니다. 마치 이효리가 팬으로서 열광했던 강타를 실물로 처음 보고 설레어하며 팬으로의 충성심을 고백하던 장면을 떠올리게도 됩니다. ㅎㅎ

앤디 그로브도 망명자 핏줄인데 故 스티브 잡스도 그렇고 현재 미국에서 기업 CEO로 종횡무진인 인도계 인사 수십 명도 그렇고 미국은 참 이민자의 나라라는 게 맞는 말 같습니다. 저자 역시 젊어서 미국에 유학했던 "이방인"으로서 사실 정통파 미국 주류 사회라면 쉽사리 용납이 안 되는 면이 있었을 텐데 저런 아웃사이더 출신 CEO 대선배들이 그에게 동질감을 느껴 한 손을 내밀어 준 덕분이 없지 않다고 회고합니다.

칼리 피오리나는 저도 예전에 그녀가 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을 읽고 독후감을 쓴 기억이 나는데 5년 전 미국 대선 공화당 예비 경선에 나왔다가 트럼프(p278)에게 고배를 마셨었죠. 황 저자는 "엔지니어 출신도 아닌 그가 어떻게 특별한 안목을 지닐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가 분석했던 바를 책에서 말합니다. 황 저자는 개인적으로 엄청 바빴을 시점에도 책을 참 많이 읽으신 것 같습니다. 본인 자신이 위인급이니까 다른 책에서도 장점을 쏙쏙 잘 찾아내는 거겠죠. 매경지식포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는데 04년 이 자리에 피오리나 CEO, 폴 케네디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 황 저자, 로버트 먼델, 모리 요시로(그 몇 년 전에 일본 총리를 잠시 지냈었습니다. 얼마 전에 설화를 일으켜 올림픽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죠) 등이 연사로 초청되었다고 합니다.

황 저자는 이 책 여러 곳에서 "노마드 정신, 칭기스칸 기백"을 여러 차례 강조하는데 아마 2000년대 당시에는 이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정동영 장관도 "몽골 기병 정신"을 강조했었죠.

TSMC社도 그렇고 美 엔비디아도 그렇고 이쪽 업계의 뛰어난 인재는 확실히 대만쪽이 많습니다. 2002년 SF 매리엇에서 학회가 열렸을 때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를 만나 "같은 황씨를 만난 반가움"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엔비디아는 지금도 팹리스(fabless)로 유명하지만 당연히 훌륭한 fab을 만나야 흥할 수 있으며 p227에는 히타치의 팹을 견학한 기록이 나옵니다. 세계적으로 PC, 인터넷 붐이 일며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같은 회사도 이 무렵부터 일반인들도 그 이름을 알 만한 회사가 되죠.

신소재 그래핀은 황 저자와 거리가 먼 전공 분야인데도 CEO의 안목으로 일찍부터 알아본 듯합니다. p235에 처음 언급이 나오고 몇 페이지 뒤에는 최재영, 김필립 박사 이름도 나옵니다. p262에는 지경부 단장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데 삼성에서 일개 팀장으로 일할 때보다 단장으로서 정부 예산 따기가 더 힘들어 보입니다.

아직도 코로나 때문에 전 지구인이 고생입니다. p405에는 GEPP라는 말이 나오는데, 글로벌 감염병 확산 방지 플랫폼의 약자입니다. 빌 게이츠 등 여러 유명 인사들도 이 프로젝트에 관여하며, 21세기에 들어 사스, 메르스 등으로 고생한 인류 초미의 관심사가 감염병이니만큼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최우선순위의 토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빌 게이츠는 p276에도 약간 살이 찌고 늙은 모습으로 나옵니다.

책에서는 "자발적 광기"라는 말이 p251 등 여러 군데에 나오며 이 문구가 젊은 시절의 자신을 특징짓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p371에서 이용규 KT 상무 같은 이는 표준규격에 대한 합의가 지지부진해지자 "안 되면 여기서 내가 뛰어내리겠다"는 결연한 태도도 보입니다. 진심과 절실함은 언제나 길을 열어 주게 마련이며(p341) 아직 많은 시간이 남은 젊은 세대는 실패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과 미래를 향해 "대담한 대담"을 시도할 것을 충고합니다. 황 회장과 이 책을 통해 간접 대담을 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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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알고, 바로 쓰는 빵빵한 수수께끼 우리 아이 빵빵 시리즈 4
박빛나 지음, 현상길 감수 / 풀잎 / 202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명절 같은 날 고속도로는 어쩔 수 없이 타야 하는데 진입하고 나서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리는 때가 많습니다. 어른들은 뭐 명절이라서 이렇다 하고 이유를 납득하며 인내심을 발휘하지만 애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길에 갇혀 이게 무슨 고생인가 하고 난감해할 수도 있죠.

많지는 않겠으나 ㅎㅎ 정말로 이 책에서처럼 마녀나 초자연적 존재의 저주에 걸려, 마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오이디푸스 같은 신세가 된 건 아닌가. 수수께끼를 못 풀면 영원히 이 교통 지옥에서 못 벗어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만화 형식으로 된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 고립되거나 해서 시간을 보내야 할 때 아이들이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어른인 저도 재미있게 읽었으며, 그림체가 꽉 찬 듯 아기자기해서 보기에 더 흐뭇하고 유쾌합니다.

수수께끼는 아재개그나 넌센스 퀴즈 같은 것도 있지만,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담아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도 있으며 오히려 "수수께끼"라고 하면 이쪽이 더 본연의 뜻입니다. 예를 들면 p55의 26번 "따끔이 속에 빤질이, 빤질이 속에 털털이, 털털이 속에 냠냠이가 있는 것은?" 같은 게 그렇습니다. 이 역시 처음 고안되었을 때는 그 시대의 개그의 일종이었겠습니다만.

이 책 표지를 보면 시인인 현상길 선생이 감수한 걸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의 자매편인 "맞춤법, 관용어, 속담" 등은 몰라도 수수께끼에 왜 감수자가 필요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마 저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냥 짐작해 봅니다.

pp.6~7에는 등장인물 소개가 나오는데 엄마 아빠까지는 몰라도 아이들 둘 마리와 그리 등 네 명이 번갈아 나오면 누가 누군지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요 페이지는 수시로 좀 참고를 해야 하겠습니다. p7의 오른쪽 아래에 보면 누군지 모르는 캐릭터도 하나 나오는데 머리 모양으로 보아 4장 p188에 처음 나오는 노랑색 요정인 것 같습니다. 걔면 걔라고 소개를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음 일종의 스포일러라서인데 이 독후감에도 그걸 밝히면 안 될 듯합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태워 주면 될까요 안 될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p15에서 "세상에 불만이 많은 마녀(p6)"가 처음 등장하는데 마리-그리네 가족이 그녀를 태워 주지 않고 지나가자 앙심을 품습니다. 물론 이 한 건만으로 그렇게 한 건 아니고 평소에 쌓인 게 많았는데 운 없이 마리네 가족이 걸려든 겁니다. 마리와 그리는 마녀가 "왜 이 더운 날 망토를 걸쳐 입었는지 수상하다"고 여기며, 아빠는 "어차피 여기서 차를 세울 수도 없"기 때문에 그냥 지나친 겁니다.

마녀가 대체 왜 세상에 불만이 많아졌는지는 책 뒤 p253에서 모두 밝혀집니다. 알고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래도 마녀처럼 엉뚱한 사람한테 분풀이를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마녀는 그리 나쁜 존재는 아니며(그 근거는 여기서 밝힐 수 없습니다), 왜 마리네 네 식구가 고생했는지 진짜 이유는 마녀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는 걸 어른 독자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휴게소마다 문지기가 버티고 있는데 수수께끼를 못 풀면 통과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애들이 휴게소마다 버티고 있다는 게 모두 마녀가 저주를 건 탓인데 휴게소가 길 옆에 위치한 게 아니라 "길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는 이상하게 여깁니다. 또 그리는 나무가 기분 나쁘게 웃는 것도 봅니다.

마녀(그리 눈에는 "할머니"로 보입니다)는 휴게소 문지기보다 더 먼젚 네 가족 앞에 나타나서, "나에게 친절하게 굴지 않았으니 너희가 저주를 받는 것"이라며 내역을 설명하고 호통을 칩니다. 수수께끼를 못 풀면 마리네 가족은 그저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 못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휴게소 문지기의 "부하"가 됩니다.

먼저 만남의 광장 휴게소 문지기가 "정색"을 하고 문제 8개 한 세트를 내는데, 마리네 네 식구가 모두 풀자 이 문지기는 몹시 당황합니다.

"항상 속에 흑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p29 7번)

이렇게 쉽고 오래된 것도 있지만 8번을 보면 문제가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중학교는?"

저는 답으로 "로딩 중"을 떠올렸지만, 속으로 이건 책에서 요구하는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떠올린 답도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 책에서 밝히는 답도 "로딩 중"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해답은 p258 이하, 뒤에 따로 몰아서 나옵니다.

아무튼 마리네 가족은 실력이 장난 아니어서 문지기들이 팡팡 나가떨어집니다. 그런데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마녀가 조금 배려한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수께끼는 휴게소에서 문지기만 내는 게 아니라, "길도 저주에 걸렸는지" 돌로 가득찬 모습으로 길이 갑자기 바뀌기도 하고 여기서 또 수수께끼가 나옵니다. 다 풀면 길은 다시 포장도로로 바뀝니다.

"오리가 얼면?" (p38 9번)
답은 "언덕"인데 ㄹ불규칙의 활용형을 알아야 풀 수 있겠...는 건 아니고 뭐 센스만 있으면 문법을 몰라도 가능하죠. 좀 어려우면 "오리가 영어로 뭐지?" 같은 힌트가 옆에 나옵니다.

p41에서는 갑자기 차 문이 안 열리는데 마리는"차 역시 저주에 걸린 게 아닐까요?"라며 새로운 문제 인식을 드러냅니다. 이 역시 수수께끼 다섯 개를 풀면 풀립니다.

안성휴게소의 문지기는 눈이 하나만 달렸는데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퀴클롭스 같습니다. 얘는 열 개의 문제를 내는데 누리네 가족은 이 역시 모두 해결합니다. 녀석은 "이전의 실력이 단순한 운은 아니었구나!"라며 감탄합니다. 문지기는 마리네 가족이 다 풀릴 때마다 구슬을 내어놓는데 괴물은 그러지 않습니다(p105)

p60에서 다시 길은 숲으로 갑자기 뒤덮이고 엄마는 "역시 휴게소뿐 아니라 길도 저주에 걸린 게 분명해요"라고 상황을 분명히 정리합니다(만 그게 무슨 소용?). 여기서는 다시 문제 수가 8개로 줄었습니다.

망향휴게소에서는 문지기뿐 아니라 식당의 계산원도 문제를 냅니다. 못 풀면 계산을 못 하고 따라서 밥도 못 먹게 됩니다.

망향휴게소와 죽암휴게소 사이의 길에서 갑자기 덩치가 큰, 보라색 네모난 괴물이 나타나는데(p93) 얘는 p6의 등장인물 소개에도 안 나오던 애입니다. 엄마 아빠가 얘 손아귀에 잡히는데 마리와 그리 두 아이가 자기들 힘으로만 문제를 풀어야만 합니다. 일단 문제를 풀어 괴물이 사라져도, 엄마 아빠가 괴물의 손아귀(=감옥)에서 벗어나려면 다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가장 보기 싫은 개는?"(p171 161번)

답은 "꼴불견"입니다.

책 제목이 "빵빵한 수수께끼"라서 저는 캐릭터들(마리네 가족)이 빵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그런 이유도 있지만) 이 책 안에 정말로 수수께끼가 빵빵하게 많습니다.

결국 이야기도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책은 약간의 교훈도 담고 있는데 1)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자. 2) 재능이 뛰어난 사람에게 그 장점을 인정하고 칭찬도 해 주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마리네 가족이 즐거운 시간 보내기를!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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