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정치사 경인한국학연구총서 152
김창현 지음 / 경인문화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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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김창현 교수입니다. 제가 2018년 책프 17기에 참여할 때 9주차에 이분의 저서 <고려의 불교와 상도 개경>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이 책은 독특하게 고려 후기를 무인정권 시대 상, 중, 말, 그리고 최씨 정권 시기, 강도(江都) 시대, 충선왕 재위기 전후, 신돈 정권, 그 이후 등으로 구분합니다. 일반적인 무인정권 시대에서 최씨 가문 집정기를 완전히 분리한 것도 그렇고, 원 간섭기 중 특히 충선왕 시기를 대표로 꼽은 것도, 공민왕 재위 초기를 아예 "신돈 정권"이라 규정한 것도 모두 특이합니다. 매 장마다 머리말을 따로 붙여 놓은 편제도 눈길이 갑니다.

중고교 교과서에서 보통 이의방은 언급하지 않습니다만 무신집권 초기 매우 중요한 지도자였으니 어떤 학자의 저자에서도 이 사람이 토픽에서 빠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앞 시기 실력자 중 한 명였던 이고를 독립적인 정권 담당자로 꼽는지는 학자에 따라 입장이 갈립니다.

정중부 정권은 5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특히 후기에 들어서는 그 아들 정균이 사실상 2인자였다고 해도 괴언이 아닙니다. 경대승은 이 정균을 척살한 후에야 자기 시대를 열 수 있었습니다.

이의민은 아주 독특한 케이스인데, 일단 고려 시대 천시 받던 신분 출신에서 일약 고려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 지도자의 위치로 올라섰다는 게 주목할 만합니다. 정선 이씨의 시조이나 본인은 경주 출신이며 정권이 몰락한 후 그 후손들이 강원도 정선에 피신하여 터전을 새로 일궈서 그리된 것입니다.

이 책 저자는 특히 최씨 가문 4대 60년 통치기를 "私第 정치"로 규정합니다. 第(제)라는 글자는 스승과 제자, 혹은 순서(차례라는 단어가 여기서 왔습니다) 등의 뜻을 가지지만 본디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私第는 私邸(사저)와 통합니다.

원 간섭기 고려의 왕들은 시호에 "충(忠)"이 반드시 붙고 대도(大都. 북경)의 호출을 수시로 받는 등 제약이 심한 채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부마국이긴 하나 이곳에 시집오는 공주가 반드시 황제의 딸은 아니었고 널리 황실 출신인 정도도 많았습니다. 다만 공민왕 같은 이는 직계 1대 기준 반드시 혼혈은 아니었으니, 저자가 특히 충선왕을 "혼혈 군주"로서 이 시기 대표로 올린 배경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제6장 한 챕터를 할애하여 "금강산 신앙"에 대한 분석을 행하는 게 독특합니다. 원 불교는 미신적인 라마교라고 해서 고려 고유의 불교 종단에서는 그리 반가이 여기지 않았는데 이 책 6장에서 특히 많은 시사점을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신돈 이후 고려 정치는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마치 조선 후기가 비변사 중심으로 운용된 것과 같은 패턴을 보입니다. 8장, 9장에서 시스템을 축으로 한 정치사 분석이 이뤄지는 점이 이 책의 큰 장점 중 하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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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 방안 - 3월혁명(1848) 이후를 중심으로
김장수 지음 / 푸른사상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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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제국은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이었으나 18세기에는 프로이센 왕국 호언촐러른 가문의 공격적인 정책 때문에 많은 상처를 입고 국세가 위축되었습니다. 이미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당시 부르봉 가문과 이를 보좌한 콜베르의 영리한 책략으로 일격을 당해 타격을 입었고, 아직 민족주의가 전면에 대두할 시절은 아니지만 제국 내의 다문화 구성 때문에 운영 비용이 너무 크게 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1848년에 일어난, 놀랍게도 슬라브 족 중심의 제국 존속 방안에 대해 분석합니다. 이 방안의 핵심을 추리자면 "연방제"의 도입인데, 황실로서는 마뜩지 않았을 겁니다. 마치 이때로부터 근 반 세기 후 독립협회가 입헌 군주제를 제안했을 때 고종이 아주 떨떠름해했듯 말입니다.

1848년이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부터 정확히 두 세기가 경과한 해입니다. 이 해에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2월 혁명으로 왕정의 최종적 폐지)를 위시하여 전 유럽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들불처럼 번져가던 시점이었습니다. 특히 이 해에는 시칠리아 왕국에서 본격적인 봉기가 일어나 국체가 흔들렸고 결국 십여 년 후에 왕국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포스트 나폴레옹 체제를 건설한 사람이 오스트리아 재상 폰 메테르니히인데 이 해에 그가 실각하고 국외 도피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러니 "제국의 존속"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겠죠. 특히 제국의 상당수 영토는 슬라브 거주지로 구성되었는데 보히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루마니아 일부에 걸친 제국의 판도를 생각하면 순수 게르만 지역은 오히려 적었습니다.

그러나 황실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제2의 민족 세력이었던 헝가리와 타협하여 이른바 카 운트 카(K. und K.) 제국을 새로 구축하는데 이것이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이원 제국(더블 모나키)입니다. 동군 연합으로 헝가리 왕위는 합스부르크에서 겸했습니다.

책의 취지에는 반하지만 독자인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른바 아우스글라이히, 즉 이 게르만과 헝가리 간의 대타협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반동에 가까웠으나 헝가리인의 드센 민족적 기질을 감안할 때 황실이 그들에게 한 자리를 떼어주고 종전의 권위적 지배를 이어나갈 작정이었으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을 텐데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터입니다. 아우스글라이히 이후 반 세기를 더 지속하다 1차 대전의 패배로 인해 힘 한 번 못 써 보고 그 유서 깊던 합스부르크 황실은 모든 특권을 잃고 평민의 지위로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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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전쟁사 연구
문안식 지음 / 혜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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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본디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 웅거하던 호족 아자개의 아들입니다. 아자개에 대해서는 상당한 무력을 갖추고 해당 지역에서 행세깨나 하던 호족이라는 점, 그 자녀 등 가족들에 대한 사항, 원래 성이 이(李)씨였다는 점, 아들인 견훤과 불화했다는 점 외에는 그리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해당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원종, 애노와는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해서도 그저 아주 불확실한 추정이 가능할 뿐입니다.

독특한 건, 견훤이 젊은 시절 일개 장교로 근무하던 무진주에서 현지의 질서 혼란을 틈타 거병하여 자립했다는 점입니다. 사극 <태조왕건>에서는 지역 해상 군벌인 능창(별명 수달)과 한판 겨뤄 제압한 후 현지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등의 특정 상황이 자립의 계기로 작용한 걸로 나오지만 이는 작가의 상상일 뿐입니다. 능창 자체는 실존 인물이긴 합니다. 또 그는 처음에 무진주(현재의 광주광역시)에서 자립했지만 정작 도읍은 구 백제의 중심지 중 하나로 기능할 뻔했던 완산주(현 전주)로 옮겼습니다.

견훤은 여러 차례 대야성을 공략하고 이 과정에서 신라의 토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대야성은 현재의 경남 진주인데 지리적으로 이 곳이 흔들리면 신라로 향하는 길이 무주공산으로 뚫리다시피하는 게 당시의 군사. 지정학적 사정이었던 듯합니다. 이 대야성에는, 비록 말기적 증상을 노정하긴 했으나 언필칭 천년존립의 신라가 그 마지막 저력을 투입하고 있었으므로 그 공략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후백제는 인력과 물산이 풍부했던 데다 근거를 남쪽에 두고 있는 신라를 이처럼 근거리에서 궁지에 몰아넣었으므로 대야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마치 통일을 목전에 둔 듯 크게 사기가 고양되었을 것입니다.

궁예는 왕건 자신도 후에 평하기를 사람 다루는 기술과 군사적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자신의 폭정과 실책으로 하루아침에 정변이 일어나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공할 적수가 사라지고, 상대적으로 기반이 허약하다 여겼던 왕건이 정권을 잡았으니 견훤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판도를 표시한 지도만을 보고 후고구려(마진, 태봉, 고려)의 대단한 성세를 추측하지만 이 시대의 경우 영토의 넓이와 국세가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백제의 경우 앞서 말했듯 소출이 풍부하고 그에 걸맞은 인구를 보유했으며 지근거리에서 정통왕조를 압박했으므로 오히려 이 시대 삼국 중 최강국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중국의 후한에 오나라가 아무리 강역이 넓어도 이를 최강국에 준하여 평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후고구려는 또한 왕건이 잦은 반란에 직면했던 사실에서 보듯 내부 사정이 그리 튼실하지 못했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은 조물성 전투, 공산 전투, 삼년산성 전투에서 세 번 연달아 왕건 군대를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왕건 개인이 (드라마 등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군사적 역량 자체는 대단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는 대단한 성과입니다. 이렇게 우군이 맥을 못 추리니 가뜩이나 대야성까지 넘어간 판에 신라가 더 이상 존립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견훤이 경주까지 진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왕실의 존엄을 크게 모독한 사건은 마치 18세기에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가 무굴 제국까지 쳐들어와 대약탈을 저지른 사실과 비슷합니다. 둘 다, 세상을 놀라게 하고 해당 정복 군주의 위엄에 온 천지를 덜덜 떨게 만들었으나 결국 승자의 뒤끝을 좋지 않게 만든 결과까지 서로 닮았습니다.

견훤이 삼국 일대에서 결국 인심을 잃었으니 국제(?) 정세를 서투르게 다뤘음도 분명하나 좀 의외인 건 국내 정치에도 결국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러 엉뚱하게도 훈신과 신검 세력의 결탁을 불러 모든 것을 잃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곧바로 왕건에게 투탁한 사실도 조금은 우스운데 물론 왕건의 사람 다루는 실력이 대단했다는 점도 확인이 가능하나 견훤의 인물됨됨이나 국량이 그의 군사적 실력에는 현저히 못 미치지 않았나 하는 짐작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 또 구 심복들을, 창업군주가 제대로 콘트롤 못 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점에서입니다. 이런 걸 보면 예컨대 한 고조 유방 같은 이가 얼마나 귀신 같은 재주를 보유한 정치의 천재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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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좋아지는 연습 -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루틴 에세이
성스런 지음 / 채륜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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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잃은 충격은 젊은 나이에 큰 트라우마로 오래 남기 쉽습니다. 저도 이름이 XX철이라는 친한 친구가 20대 중반에 죽었더랬는데 그때 받은 엄청난 아픔, 상실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자분은 친구 H라는 분이 세상을 떠난 충격을 요가로 극복했다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아픔을 극복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고 사람마다 다 다른 처방이 유효하겠으니 여러 의견을 들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요가에서는 특정 동작이 잘 안 될 때 느끼는 무력감, 자괴감이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요가를 해 본 사람이 아니라도,아마 이 비슷한 체험과 기억은 다들 갖고 있을 겁니다. 일이 잘 안되고 자꾸 내게 열패감을 떠올리게 하고, 생각만 해도 피로감과 짜증이 몰려올 때, 대뜸 우리가 선택하는 하나의 방법은 "회피, 도망"입니다.

"(요가) 매트 위에서의 태도가 삶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p25)."

사실 어떤 특정 과제가 삶 전체를 대표하는 건 아닙니다. 철봉을 잡고 턱걸이 5개를 못 해도 그것만으로 루저가 되는 건 아니죠. 하지만 내게 특별히 좌절감을 느끼게 한 무엇을, 어떤 계기를 통해 극복했을 때 그때 만나게 되는 성취감은 아마 인생 전체에 두루 통할 만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건 어디서건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때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 책 저자분도 회사에서의 경험을 털어놓는데 "숨을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p39)"라고 일부러 생각을 해야만 가능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실 어떤 스트레스는 내가 나인 줄을 잠시 잊게 하고, 어떤 자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정상인지(또는 내가 여태 익숙히 해 왔던 반응이 무엇인지)까지 까맣게 잊을 정도가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아마도 "숨 쉬는 방법이 잠시 생각 안 나는" 상황이겠죠.

이럴 때 저자의 친구분은 자신도 어느 스님에게서 배운 "교호호흡"을 가르쳐 줬다고 합니다. 양쪽 코를 번갈아 들이쉬고 내쉬는 방법인데 생각보다 어렵다고 하네요. 여튼 이런 반응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분명히 스트레스를 받아 화가 났는데도 이것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거나, 내 자신에게 이 사실을 숨기려 하는 생각 때문인 듯합니다. 뭘 억지로 무시하거나 잊으려 드니 다른 것도 덩달아 잊힐 수밖에 없습니다(혹은, 정작 잊어야 할 건 안 잊혀지고 엉뚱한 게 잊히는 식).

"기가 빨리는 듯한 느낌"도 저자는 털어놓습니다. 즉 에너지를 쏟아야 할 작업 외에는 모두가, 신경 쓰는 것조차 싫어져서, 하다못해 "TV를 오래 보는 것도 기가 빨리는 듯해서" 일찍 끄고,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려고 생각하는 것도 시간 낭비인 듯해서 똑같은 것만 먹고... 그런데 똑같은 것만 먹는 건 정말 건강에도 위험할 듯합니다. 여튼 이 모든 괜한 집착, 강박이, 어느날 우연히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야 할 상황 덕분에 다 사라졌다고 합니다. 확실히, 일에 너무 바쁜 사람들은, 때로는 멈추고 주위를 여유 있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할 때 매번 체중계에 올라가서 조바심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체중계에서 목표 체중 달성을 확인하고 뿌듯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아니 왜 이렇게 안 먹고 참는데도 숫자가 그대로지? 같은 좌절감, 분노에 시달리다 스트레스를 받아 더 먹습니다. 그러니 체중계는 다이어트를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합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일지를 쓰라는 것입니다.

운동은 일단 그걸 하려면 뭘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기운이 없으니 운동을 시작할 수가 없죠. 반면 요가는 뭘 먹으면 동작이 힘들기 때문에 조금만 먹는 게 습관이 되고, 요가를 잘 마치면 만족감, 정서 평온 덕에 덜 먹게 된다고 합니다(p70). 이 요가와, 일지 쓰기가 병행이 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체계적으로 체중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커피를 "제한"하면서 전보다 일찍 자게 되고, 간식도 줄이고, 힘이 덜 나니까 저질체력을 자인하게 되어 그 전보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커피는 특히 한번 습관이 되면 쉽게 끊거나 "제한"하기가 힘든데 이렇게 하려면 담배 끊는 만큼이나 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 저자분은 독해서 뭘 한순간에 끊고 이런 분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잘 달래고 설득하면서 하나하나 해 나가는 그런 스타일 같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독하질 못하니, 이 책에서 가르치는 바도 결국 그런 쪽이고 이런 마일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좀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학교 다닐 때도 잠자는 시간 확보하기가 힘들지만 졸업하고 취업하면 더합니다. 저자분이 20대 때 다녔던 회사처럼 대놓고 출퇴근 시간을 빡세게 관리하는 곳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도 일단 경쟁이 붙으니까 다들 잘 거 다 자고 일을 하지는 못하죠. 그래도 저자는 화장실에서 자다가 청소하는 아주머니한테 말까지 들었다(p96)고 하니 이런 예는 드물 것 같네요. 여튼 이제는 정반대로, 한때 저랬던 저자가, 잠 잘 자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아 최대한 꿀잠을 자고 컨디션을 관리한다고 합니다. 잘자는 것도 못자고 덜자는 것만큼 (처음에는) 힘들어서, 책에 나온 대로 따라하는 것도 여튼 예삿일은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책 맨앞에 잠시 언급된 H라는 분이 p120 이하에 다시 등장합니다. 또 다음에는 고양이 리온이도 강아지 공주도 죽었는데 이 역시 특히 여성분들에게는 참 극복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내가 네 몫까지 열심히 살게." 이 말이 진심에서 흔쾌히 나올 수 있어야 상처도 극복이 되고 동시에 새로운 활력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딱히 일상에 불편이 없다는 이유로 나쁜 자세를 의식도 않고 계속 유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 역시 (알바생 시절) 무의식중에 짝다리를 짚다가 사장님한테 지적도 받았다(p130)고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의도치 않게 지적 받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건강입니다. 이 역시 문제를 꼼꼼히 짚어 보고 기록을 일지처럼 쓰면서 어떤 문제가 얼마나 나아지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하네요.

배우 위노나 라이더(p162)는 얼굴도 예쁘고 당차고 자기주도적이며 반항아 같기도 하면서 이지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다 조금씩 갖춘 좋은 자원이었는데 결국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저리 끝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녀가 나온 작품 중 <지상의 밤>을 거론합니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건, 훌륭하고 재능 있고 "그릇 크고" 멋진 이들을 보며 충분히 배우되, 이들과 비교하며 나 자신을 괴롭히거나 위축되지는 말자는 겁니다.

사실 간절히 원하던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 무엇인가가 되고, 이런 성취를 이뤄도 당시에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지만 그 "유효기간(p178)"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 성취감 하나로 무한정 기분이 좋아지진 않고 좀 시간이 지나면 심드렁해집니다. 저자는 앞서 말한 대로 직장에서 일을 통한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잠도 못 자고 노력했지만 나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는 동료를 보는 순간 모든 게 허망해지더라고 말합니다. "감추지 않고 드러내야 성장할 수 있다(p192)." 무슨 뜻인고 하니, 내가 설령 내 분야에서 경쟁자보다 서투를 수 있어도, 진솔하게 차라리 서투른 대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오히려 주변으로부터 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긴 요즘 유튜브를 봐도 그냥 다 까고 솔직하게 가는 게 구독자가 더 늘어나는 방법이더군요.

인도에 다녀오는 여행자들이 요즘 무척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사는 걸 보고 새로운 각성을 얻습니다. 우리도 지금 열심히 가는 길이 아무리 나아가도 방법이 없고 같은 무력감이 되풀이된다 싶을 때, 때로는 정반대 방향을 주시하며 여유를 갖는 선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새삼 요가가 무척 끌리기도 하네요. 예전에 학교 다닐 때부터 친구가 같이 하자고 권하던데 아직도 못 해 보고 있어서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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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개론
김갑동 지음 / 혜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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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경종 대에 전시과 체제를 정비했는데 이는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며(왕토 사상), 따라서 토호, 호족, 귀족, 대지주 등이 땅을 부쳐먹고 사는 백성에게 함부로 수취할 수 없다는 대원칙이 비로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통일신라 때만 해도 관료전 도입이 성덕왕때 이뤄졌으나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되었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이며, 이후의 세련된 고려 대 시스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문신 귀족 정치, 무신 통치, 친원 권문세족 등으로 지배 양상이 변했지만 여튼 원칙은 전시과였습니다. 대농장 겸병으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토지 소유 형태가 타락하자 신진 사대부가 나라를 뿌리에서부터 뒤집고 과전법을 선포하여 바로 역성혁명이 이뤄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와 왕실 성씨만 바뀐 게 아니라, 전시과가 과전 체제로 바뀐 것이기도 합니다.

고려는 특히 불교 신앙을 중시했습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대승불교는 호국 사상을 강조하기도 했고, 이미 삼국을 거치며 백성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은 불교 신앙을 통해 대민 지배 체제를 구축해야 통치가 한결 수월했으리라는 추측이 합리적입니다. 다만 고려 후기로 가면 무격, 성황 신앙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고 특이하게도 한반도에서는 이미 통일 신라 말기부터 무속과 혼합된 미륵 숭배 사상이 유행했는데 이는 정통파 불교의 시선에서 보면 석가모니 부처를 적대시하므로 이단입니다. 아마도 불교가 벌써부터 타락하여 기층 민중을 착취하는 도구로 변형한 게 큰 원인 중 하나일 텐데 이는 중세 유럽 로마 가톨릭도 예외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중학교 때 국사 시간에 교생 선생님(젊은 여성분)이 들려 준 왕규의 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참고서나 교과서에는 안 나오는 스토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왕규는 고려 혜종이 죽자 갑자기 난을 일으켰는데 혜종의 후원자였던 개국 공신 박술희와도 적대했고 이해할 수 없는 망동을 일으켜 고려 초기 정국을 혼란케 하다 왕식렴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나옵니다. 특히 광주원군(역시 왕건의 아들 중 하나)을 옹립하려 들었는데 자신이 외척으로서 확고한 권력을 막후에서 행사하려는 책동이었다고 말합니다만 이설이 많습니다. 왕실에서 거의 미친 듯 근친혼이 행해진 것도 이런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종 인종 대에 가서 이자겸 같은 강력한 외척이 또 등장한 건....

조선 대에는 초기에 강력한 왕권이 유지되었고 비교적 영명한 군주가 많이 나와 외척의 폐단이 억제되었으나 이후 소윤 윤원형과 문정왕후 같은 이가 또 출현했죠. 중기 이후에는 사림이 등장하여 대귀족과 훈구 세력, 외척의 득세를 억제했으나 영조, 정조 같은 만기친람형 군주 이후에는 다시 세도 가문이 대두하는 등 이 문제는 봉건 체제에서 좀처럼 해법이 안 나오는 난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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