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2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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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주인공들은 스핑크스 고양이한테 구원을 청하지만 냉정히 거절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가 막힌 게, 오히려 그들은 이런 위기에 몰린 주인공들을 적에게 팔아넘길 생각마저 품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에는 이처럼 뜻밖의 배신과 책략이 부지기수로 횡행하는 대목이 등장하고, 1권에는 정복자 티무르(실존 인물)가 어려서부터 싸움의 승자가 되기 위해 배신과 번복을 밥먹듯이 할 필요가 있음을 교육받았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고양이 보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튼 그 스핑크스, 사람처럼 몸에 털이 없고 얄밉게 깍쟁이짓을 하던 녀석은 이 2권에서 어느 정도 응보를 받습니다.

1권에서 p293에 잠시 동물 돼지에 대한 언급이 나왔는데, 사실 그 말대로 돼지는 지능이 의외로 높고 사람을 좋아하죠. 이 2권에서는 p57에 돼지고기에 대한 설명이 잠시 나오고, p103에는 돼지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펼쳐지며, 급기야 돼지가 재판관이 된 어떤 소송 절차가 이뤄집니다. 아마 <문명>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장면 중 하나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한말에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이라는 신소설이 나왔습니다만 마치 그 장면과도 비슷합니다.

여기서 로망 웰즈 교수 등 우리 주인공들은 아주 호된 고생을 하는데, 독자인 저는 읽으면서 만약 내가 저 법정에 피고로 섰다면 어떤 기분이겠으며 어떤 자기 변론을 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사실 할 말이 많이 생각이 안 나더군요. 사람은 순전히 미식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동물에게 아주 몹쓸 짓을 많이 저지릅니다. 이 책 1권에서 바스테트가 "사람의 미각이 정말 대단하다"며 맛있는 음식을 조리해 먹는 그 습성을 칭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희생되는 동물들의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예전 서부극 <맥린턱>을 보면 통돼지 한 마리를 뼈가 훤히 드러나게 꽂아 놓고 바베큐를 해 먹는 장면이 있는데 저 영화를 찍을 당시라면 관객들이 군침을 꿀꺽 삼켰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특히 비건인들 중심으로 몸서리를 칠 것입니다.

로망 웰즈 교수는 소와 한판 대결을 벌이지만 애초에 이게 싸움이 될 리 없습니다. 일종의 베르베르 자학 개그처럼 보이는 장면입니다. 여튼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바스테트는 재판장 앞에 가 마지막 변론을 행하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아니 대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 변론 논거 핵심은 결국 "문명"입니다. 이 말은 (아마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동물농장>의 주인공 나폴레옹 앞에 가서도 해 줄 만하며, 혹은 <혹성탈출>의 그 원숭이 반란군한테 가서 해도 어느 정도는 통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둘리틀 선생의 모험>에 보면 주인공은 동물과 말이 통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도 새들과 말을 나눴다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1권 말미에 바스테트가 특별한 시술을 받고 "제3의 눈", 즉 정보를 이식받고 인간과 소통이 가능한 능력을 추가로 지니게 됩니다. 가뜩이나 센스가 넘치고 인간에 대해 많은 공감을 해 온 바스테트인데 이제 이런 능력까지 생겼으니 파라다이스에 포위당한 이들뿐 아니라 독자의 마음까지 든든합니다.

(약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환생"을 주제로 자주 다룹니다. 1권에서 불교 관련하여 제법 깊이 있는 설명(물론 <상대적이고 절대...>에서 인용)이 나온 것도 그가 워낙 이 주제에 대해 평소부터 천착한 덕분입니다. 왜 바스테드는 그토록 인간에 널리 공감하고 동정적이었을까? 답은 일단 2권 p158에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2008년작 <쿵푸 팬더>가 잠시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지구는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공간이며, 환경은 그래서 인간이 잠시 빌려쓰는 곳일 뿐 결코 마음대로 오염시키고 파괴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번에 이처럼 뜻하지 않게 전염병으로 고생하게 된 것도, 또 <메두사 호의 뗏목>처럼 작은 아포칼립스를 맞이하기 직전인 것도, 다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동물들이, 어쩌면 전생 혹은 내세에 나나 내 이웃이 환생한 모습이거나 그 영혼이 담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하더군요. 이런 천진난만하면서도 선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베르베르 문학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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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앙아시아의 이해
윤성학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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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는 그 지리적 범위도 명확지 않고 그 지난 역사나 문화의 흔적을 어디까지로 잡아야할지도 모호합니다. 그렇다고 이 지역이 세계사에 끼친 흔적이 미미하냐면 그건 또 전혀 아닙니다. 이 지역에서 새로운 강자가 출현하여 로컬 패권만 완성해도 인근의 대제국들조차 벌벌 떨었습니다. 이렇게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지만 1)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중앙아시아인지 불명확하다 2) 이들 문명이 남긴 흔적이 (잦은 권력 변동 탓에) 많이 남아있지 않고 그 정체성도 경계 획정이 어렵다. 등의 이유로 전문가들의 연구조차 여간 난감한 게 아닙니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 나아가 아나톨리아 반도, 페르시아 일대를 호령하고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산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에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현재로 치면 이 사람은 어디 출신이라 봐야 하나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몽골? 이에 대한 답은 한 마디로 나오지 않습니다. 티무르가 세운 제국은 심지어 제국으로 불러야할지조차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주체의 명나라를 위협할 만큼 위세가 당당했는데도 말입니다.

청나라가 그 전성기에도 벌벌 떤 적수 중 하나가 오이라트, 준가르 부족이었습니다. 청나라뿐 아니라 이른바 강건(康乾)성세(盛世)라고 해서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강역(疆域)이 넓어지고 무적의 국력을 자랑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 유목의 강자로 마지막으로 등장한 게 준가르였습니다. 청나라 그 자체로도 유목-농경 통합 제국으로서 최강이었는데 이 청조를 위협하는 신 유목 세력이 그 전성기에 하필 또 등장했다는 자체가, 후대의 우리 눈에는 경이롭습니다. 영특하고 자신만만했던 건륭제도 나라의 존망이 걸렸다며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이른바 "거울 제국 이론"으로 설명하는 퍼듀 교수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이게 절판되어 지금은 중고판이 12만원이나 하네요? 나 9만원 벌었네 ㅋ).

오이라트, 준가르는 여튼 청제국에게 박살이 나며, 이후 몇 번의 과정을 가쳐 중국 영토에 완전히 편입되었습니다.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인권 탄압이 크게 문제되는데 그 연원이 바로 여기인 것입니다. 청나라가 이후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마오의 공산당이 다시 권력을 다지기까지 길게는 반 세기 가까운 기회가 있었는데 동 투르키스탄이 단합하여 독립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저리된 건 그들의 잘못도 적지 않습니다만 인권 이슈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이라트의 다른 세력도 이후 러시아 제국의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크라이나 인, 기타 슬라브 족이 두루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정복자들에게 밥 노릇을 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마치 미국 백인 정부에 의해 사냥감 신세로 전락한 아메리카 원주민(얼마나 용맹한 전사들이었습니까)과 비교될 만합니다.

카자흐스탄은 영토가 광대합니다만 다양한 종족이 섞여 사는 통에 중앙아시아에서 큰형님으로 그리 위신이 크지 못합니다. 정복자들의 전통, 적통을 잘 간직한 건 오히려 우즈베키스탄인 편입니다.

터키는 범 투르크 족을 넘어 아예 이슬람 수니파 권역 전체에 다시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분위기입니다만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장 동투르키스탄의 무슬림 형제들이 제노사이드 위기를 맞았는데도 별 목소리를 못 내니 말입니다. 중앙아시아인들이 대체로 이슬람 교를 믿으나 매우 세속적 분위기라서 어떤 종교적 믿음을 통한 단합이나 경제적 협력이 이뤄질지는 미지수입니다. 게다가 많은 나라들에서 제각각의 독재자들이 자신의 사리사욕만 내세우는 판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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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남 - 폭발적으로 깨어나고 눈부시게 되살아난 사람들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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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코로나 19 때문에 전세계가 고생입니다. 그런데 1910~20년대에는 "기면성(嗜眠性) 뇌염"이라는 게 크게 유행해서 수백만 명의 환자를 발생시켰다고 합니다. 모기에 의해 전파되었던 것도 아니며, 얼마 전 코로나 초기 유행 당시에도 대구의 17세 소년이 이른바 사이토카인 증세 때문에 사망했는데 이 병 역시 그와 유사하게 자신을 공격하는 과다 면역 반응이 그 원인이었다고 추정한다고 합니다.

저자 올리버 색스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독자는 알겠지만 본래 그는 전문의 과정까지 마친 의사였습니다. 4년 전(2017)에 그와의 대담을 소재로 삼은 빌 헤이스 著 <인섬니악 시티>가 우리 책좋사에 이벤트로 나온 적 있었죠. 색스가 젊은 시절 기면증 환자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직접 그들을 맡아 여러 처방을 시도한 적 있습니다.

이 병은 눈도 멀쩡히 뜨고 있고 의식도 있지만 아무 말이나 행동을 못한 채 표정 하나 바꾸지 못하고 얼음처럼 사람이 머물러 있는 게 특징입니다. 책에 나오듯 예를 들어 테니스 공을 던져 준다거나 하면 기가 막히게 그 제한된 동작(공을 받음)만은 해 내는 게 신기합니다. 이들에게 엘도파를 처방해서 제한적 효과를 본 게 색스의 공로입니다. 엘도파는 본래 파킨슨병에 쓰는 약이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틱장애가 심하게 일어난다거나, 성격이 공격적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경우가 보고되었다고 합니다. 하긴 그토록 장기간 기면증을 앓아 사회에서 거의 격리되다시피한 환자들에게 무리 없는 적응을 기대한다는 게 애초에 무리이긴 합니다.

이 책은 영화로도 199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에서는 맬컴 새이어 박사가 주인공인데 이 캐릭터가 사실상 올리버 색스와 같은 사람입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이 역을 맡았는데 싱크로율 거의 100%로 그의 장인정신이 빛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가 소년 시절 기면증에 걸려 내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레너드 역인데 역시 인간 복사기입니다. 기면증 환자를 제가 본 적은 없지만 정말 무섭도록 병마에 신음하는 중년 남성의 갖가지 아픔을 잘 표현합니다. 영화 제목으로 찾으려면 <사랑의 기적>으로 검색해야 합니다(미완의 기적이긴 하지만).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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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스파이
박상민 지음 / 좋은땅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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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라는 건 참... 효율적인 스파이가 되려면 그저 맹목적인 애국심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맹목적인 애국심"으로는 안 된다, 이게 아니라, 맹목적인 애국심도 갖추고, 그 외에 다른 (상상이 불가능한) 스킬도 갖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맹목적인 애국심이 없으면, 어떻게 이중삼중 인격을 장착하고 필요에 따라 가면을 바꿔 낄 수 있겠습니까? 보통 사람은 비위가 약해서라도 이게 안 될 텐데, 그걸 다 참고 해 낸 다는 건 기본으로 맹목적 애국심이 갖춰져 있다는 뜻 아닐까요?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고, 역사상으로는 그저 이중삼중 간첩 노릇을 하며 중간에서 자신의 잇속만 채운 악질들이 더 많긴 합니다.

저자는 리하르트 조르게를 두고 "위대한 스파이"라는 규정을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스탈린이 그의 보고만 정당하게 신뢰했던들 훨씬 적은 (국가적) 희생을 치르고 (개인적) 정력을 덜 소모하며 승전할 수 있었을 겁니다. 기록대로 그가 밝혀낸 첩보가 모두 그리 성공적인 것들이었다면 스탈린은 상대 패를 다 알고 고스톱을 친 셈인데도 초장에 그리 당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충직하고(?) "위대한" 스파이보다 상대편 두목에 대해 (부당하게) 너무 큰 외경을 품은 탓이었습니다. 저자는 이 조르게에 대해 "순교자"라고까지 평합니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타임리스>라는 드라마를 방영해 줬는데 여기 보면 작중 캐릭터로 이언 플레밍의 첩보원 시절이 나옵니다. 물론 그는 이후 007 시리즈로 대성공을 거둔 작가이기도 합니다. 1998년 영화 <엘리자베스>를 보면 마리 드 기즈를 놓고 프랜시스 월싱엄이 그녀와 직접 동침(!)한 후 암살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없었다는 보장도 없지만 여튼 이는 영화 속의 상상입니다. 조선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예라면 장희재의 전처 자근아기의 마음을 산 후 결정적인 정보를 빼내 남인 세력을 궤멸시킨 김춘택 같은 이가 있겠습니다.

책에서는 몇 사람을 "세기의 스파이 두목들"로 묶는데 이 중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윌리엄 도노번, 라브란티 베리야, 또 존 에드거 후버 같은 사람들이 낍니다. 저 중에서 제일 무능한 인간은 (허리띠가 없으면 꼼짝도 못하는) 베리야가 아닐까요? 여튼 1~6장에 나온 인물들은 필드 에이전트로서 유명한 이들이고, 7장에 나온 사람들은 정보기관 수장들이라는 거겠습니다.

4장은 여성 스파이들을 다루는데 이 분야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을 마타 하리의 이름이 왜 없지 싶지만 그럴 리가 없고 제16번에 나오는 마가레타 젤러가 바로 그녀입니다. 물론 그 세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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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특별합본호 세트 - 전3권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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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트는 케이스입(入)입니다. 더군다나 창비판이고 황석영 역이라서 소장가치가 있습니다. 각권이 하드커버는 아니니 케이스가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약간 아쉬운 건 본격 인물 사전이라든가 상세 지도 같은 별개의 부록이 없으니(원래 전 6권판에도 황석영譯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그 점도 유의해야겠네요. 하드커버 아닌 것치고는 책값이 비싸지 않느냐고 물으면 역시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겠습니다.

그저 착각이겠으나 이렇게 전 3권판으로 읽으면 뭔가 6권, 심지어 10권판으로 읽을 때보다 분량이 짧아진 듯하여 읽는 부담이 줄어든 듯한 느낌도 듭니다. 실제로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황석영의 문장이라서 읽기에는 아주 편하고 유려한 맛이 있습니다. 단 딱히 그만의 관점이 드러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관점이나 개입을 중시하지 않는 독자라면 더 좋은 점입니다.

"젊은 세대도 다시 찾는 동양 고전 필독서"라고 하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젊은 세대가 더 많이 읽습니다. "세 번도 안 읽은 사람과는 말을 섞지 말고..."는 훨씬 나이 많은, 지금은 고인이 된 세대들에게나 적용되고, 지금 생존해 있는 나이 든 세대는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삼국연의>를 안 읽은 분들입니다. 그 밑 세대는 게임 때문에 처음 만화책으로 읽기 시작했겠고, 그 밑 세대는 정사까지 읽고 인터넷으로 각종 커뮤를 통하여 더 많고 더 정확한 정보를 접한 세대라서 각 역본의 오류나 아쉬운 점도 잘 짚어 냅니다.

조비는 자(字)가 자환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위(魏) 나라의 초대 황제입니다. 어려서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문재(文才)야 원래 뛰어났고, 정치적 능력도 부친 못지 않게 뛰어난 줄 알았으나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그렇다고 보기 힘드네요. 오주 손권이 비굴하게 몸을 낮춰 칭신할 때 어려서 읽을 때에는 이 역시 국제정세를 종합적으로 볼 능력이 없어서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촉과 위 양측에서 협공을 당하면 강동이 존립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지못해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는 몸부림이었는데 이 형식적 제스처에 헛된 위신을 만족시키느라 군사행동을 지체한 건 무능의 소치이자 실책이었습니다.

조비의 행적 중 재미있는 게 자기 동생도 죽이려 한 인간이 그 출신도 미심쩍은 맹달 같은 망명객에게는 그렇게도 너그로웠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그저 잘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죠. 이 사람을 수레 옆에 싣고 시가지를 돌아다닌 걸로 보아 비주얼 같은 요소가 정치의 상징조작에 아주 유용하던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뭐 요즘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말입니다.

촉이 등애와 종회에 의해 망하고, 엉뚱하게도 고평릉 사변이 일어나 사마씨가 정권을 잡은 후 위가 망하고, 미친 망국 군주가 오나라를 망하게 했습니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건 진(晉)이나 명분을 잃고 술수에 의지한 책동의 업보를 받았는지 이후 8왕이 난립하여 외적의 환을 유치한 셈이니 본디 청류의 가문으로 명망이 높았던 가문의 후손치고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종막을 맞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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