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대고 잇대어 일어서는 바람아 - 집콕족을 위한 대리만족 역사기행
박시윤 지음 / 디앤씨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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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입니다. 최고급 용지에 예쁜 천연색 사진들도 잔뜩 실려 있고, 문장은 예술입니다. 책은 총 4부로 나뉘었고 모두 절터 이야기입니다. 어떤 절은 이름이 있고, 절터인 것은 알겠는데 어떤 절인지 알 수 없고 그저 터만 남은 것도 있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게 근 1500년이 넘다 보니 이 땅에는 참으로 많은 절이 있고, 절이 스러진 곳이라면 그 터가 웅숭깊게 남았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건봉사 곳곳엔 아직도 오래된 석재가 빼곡이 꽂혀 있다(p41)."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에 소재한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고성이란 이름을 가진 곳이 경상남도에 한 곳 더 있지만 쓰는 한자가 서로 다릅니다. 능파교 아래 물이 꽁꽁 얼었다는 말이 있는데, 강원도 산골의 춥고도 추운 겨울 날씨가 지면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문장이었습니다.

"한국전 이후, 고성땅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탑이라우(p60)." 수타사 터의 4층석탑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어느 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절에 머문 사람이 다름 아닌 공양왕이라는 전설도 남았으니 고성 땅의 높을 고(高)자가 새삼 의미를 더합니다. 옥좌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죄인의 누명을 쓴 채 먼 땅으로 쫓긴 군주의 소회가 어떠했을까요? 또 불교 역시 그즈음 유학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의 등쌀에 밀려나 차츰 제 자리를 잃었으니, 쇠락한 절터가 그 모신 객(客)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는 셈이네요.

p156에 나오는 삼척 부사 김효원은 선조 연간에 사림 동서 분당의 단초가 된 바로 그 인물들 중 한 분입니다. 이분이 남긴 <두타산일기>에 바로 거제사에 얽힌 사연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두타산에서 만난 이름모를 남성은 깊은 침묵을 지켰다고 합니다. 과연 동해 거제사의 흔적만 남은 절터를 찾은 그분은 무엇을 사색하느라 말을 아끼셨을지 궁금해집니다.

철불은 고려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그저 미려하고 섬세한 미(美)만 찾던 신라 시대의 풍조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고려 본색을 드러낸 당당함과 소박함을 품은 형태입니다. "철불좌상은 거기에 있었다(p174)." 마치 산이 거기 있기에 나는 오른다고 했던 힐러리 경의 명언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울진 구산리 절터는 한때 강원도에 속했으나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북에 편입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왕피천(p196)이 있는데, 말 그대로 왕이 피해서 왔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당시 개경에서 여기까지 피난을 왔다고 합니다. 말이 울진이고 피난이지 개경에서 울진이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사람 수도 엄청 많은 중국 본토에서 한번 정치적 불안이 발생하면 인근에 어떤 규모로 피해가 미치는지 짐작이 가능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간단한 논리와 상식으로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많습니다. p218을 보면 포항 법광사에 중수(重修)를 거치며 한 차례 사리장엄이 열렸는데, 무려 닷새 동안 사방을 환히 밝히는 서광이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 고을이 신광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게 그때였다고 하는데, 과연 상서롭고 귀신이 힘을 끼친 듯한 빛깔과 기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유독 신라에만 돌무지덧널무덤이 유행했으며 이것이 바로 무차별 도굴로부터 신라의 고분 고총을 보호한 비결이었습니다. p239에는 고선사 터에 대한 자세한 답사 기록이 나오는데 2018년 여름에 대대적으로 보수를 마치고 일반인들을 맞았다던 기억이 저도 납니다. 천년 도읍의 유구한 내력이 어디 가겠습니까.

불법(佛法)이 왕성하던 시절 이 강역의 백성 대부분은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한때 구름이 일듯 성하게 일어났을(p319)" 운흥사(울산 소재)에 대해 "지금은 그저 풀이 빼곡히 들어찬 초흥사"가 되었을 뿐이라며 그 막막한 소회를 요약합니다. 어디 운흥사 한 군데뿐이겠습니까. 인간사 모든 곡절과 고비가 다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개인적으로 올해 상반기에 만난 중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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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꾼들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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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이 생긴 지 몇 년 안 되었을 무렵에도, 홈페이지에서 베스트셀러라고 맨 앞에 내세운 책들은 언제나 관심을 모으곤 했습니다.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쓴 <미들섹스>였는데 지중해 특유의 기후와 풍토 때문에 발성하는 간성인들을 소재로 하여 젠더 이슈를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는 다른 작가가 생각도 못한 소재를 골라잡아 희한한, 기발한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막판에 의외의 감동을 주고 마무리짓는 실력이 있는데 이 신작도 마차가지였습니다.

자그마한 사람의 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체액이 담겨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미스테리물에서 자상을 입은 사람 몸에서 끝도 없이, 또 맹렬한 기세로 솟구치는 피, 피를 생생하게 묘사한 대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멋진 작품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의 몸은 비록 자그마하지만 어떤 우주와도 같습니다. 병에 걸린 몸이라면 더욱더, 병균이나 바이러스 등 온갖 미생물을 다 품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대체 언제, 자신의 장기와 피부와 조직으로부터의 그 내밀한 느낌에 익숙해질까요? 아플 때입니다. 그때는 내부의 온갖 장기가 보내는 신호와 외침과 호소에 하나하나 개별 반응이 가능해집니다.

사람은 갈데까지 가서 바닥을 보는 순간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에 있어 한 번도 이런 순간을 안 거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제 가진 모든 것을 잃고 허름한 여관방으로 도피하여 남은 날을, 남은 몇 푼의 돈을 세는 사람, 과연 이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남았겠습니까? 그러나 벼랑 끝에 매달려서도 한 떨기 열매를 핥으며 최후의 도약과 기적을 꿈꾸는 게 우리들 못난 인간의 심리입니다.

성(性)은 무의식의 영역이자 원초적 본능이 똬리를 튼 본진입니다. 학계에서 오늘 각광 받던 이론도 내일 차가운 뒷방에 묻힐 수 있으며, 한 문명이나 사회에서 두루 통하는 원리도 다른 경우에 일반화할 경로가 차단당할 수 있습니다. 학자는 끝내 자신의 이론을 굽히지 못하고, 다시 학계로 화려히 복귀하게 도와 줄 논거를 찾아 부족 사회로 향합니다. 그들과 소통하며, 혹은 갈등하며 그가 마주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남과 여가 만날 때 마주하는 보람은 그저 성적 쾌락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설계하며 현재의 자신들이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하늘 끝까지 솟은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젊은 커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허나 험난한 세파는 그들을 순수한 처음의 모습으로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결혼은 현실"이라고들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밀려오는 환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이 마지막 전투는 공동으로 치러야 할까요, 아니면 각자의 몫으로 남겨야 할까요?

순수한 야망과 성실함을 과시하며 죽어도 살아도 조직과 운명을 함께하리라는 각오가 신입 시절에는 누구나 있습니다. 아니면, 그저 호구지책이나 마련하자는 안일한 생각에 잠시 몸 좀 담자는 생각으로 회사에 들어오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겁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도시의 화려한 삶은 많은 지출로 누구나를 유혹합니다. 때로는 절실한 소용도 있겠으나 욕심의 편차는 끝에 가서 비슷한 지점으로 수렴합니다. 아무 야욕 없이 순치되어 살다가도 "언제까지 푼돈에 목매며 비루한 삶을 살아야 하나?"며 울컥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누구나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어이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의 모습이기만 할까요?

이 책에는 모두 열 편의 단편이 실렸습니다. 유제니디스답게 내러티브는 기괴하면서도 솔직하고, 읽다 보면 아니 이게 과연 누구 이야기일까 싶게 무서운 템포로 독자를 주인공들에 공감시킵니다. 희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내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작품 속의 인물을 통해 미리 백신을 맞히고 현실에서의 사고를 예방하는 것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외에 또다른 보람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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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전사, 마법사, 연인 -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을 위한 심리 수업
로버트 무어.더글러스 질레트 지음, 이선화 옮김 / 파람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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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무어와 더글러스 질레트의 전설적인 명저인데 드디어 우리말로 된 책으로 읽게 되어 너무도 기뻤습니다. 부제로는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을 위한 심리 수업"이라고 표지에 나오는데 이 역시 매우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멋진 규정입니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선물을 가져다 주는 노인을 두고 산타 할아버지. 혹은 산타 클로스라고 부르는 나라는 미국이나 한국 정도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 할아버지" 정도로 부르지요. 아무튼 신성한 날의 신성한 탄생, 신성한 아이에 대한 어떤 원형적 심상은 종교나 문화를 떠나서 세계 남성 일반이 공유합니다. 구유에 모셔진 신성한 아이에 대해서는 종교 불문하고 외경심을 가집니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참으로 멋진 해석을 합니다.

폰틀로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지난 세기까지 널리 쓰였으며 구태여 프랜시스 버넷 여사의 소년 소설에 주인공의 것으로만 채용되는 건 아닙니다. 또 그 이름이 딱히 고귀한 태생을 암시하지도 않습니다만 여튼 그 소설 덕분에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저자는 "아기 의자 폭군"이라는 원형을 도출합니다. 앞서 말한 "신성한 아이"나 이것이나 미성숙한 남성을 옹호하는 출발점 격인 이미지가 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ㅎㅎ 폰틀로이 이야기, 즉 소공자 이야기가 그저 상투적 해피 엔딩, 신분 상승 패턴 외에도 (미성숙한ㅋ) 남성들에게 어떤 쾌감을 주는 건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웅은 소년을 한계에 부딪히도록 하며, 불가능해 보이지만 도전할 용기가 있다면 실현 가능한 꿈을 꾸게 한다(p76)." "영웅의 죽음은 소년 심리와 소년기의 죽음이다(p77)." 영웅의 원형에는 양극단이 있고, 그 중에는 비겁자의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톰 크루즈는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소년 같은 이미지로 영상물에서 비춰지는지도 모릅니다.

근대 서양 문명이 타 문명과 단호히 구별되는 건 개별화입니다. 이와 반대로 동아시아는 어떤 모범적인 위인상에 개인이 동화, 수렴, 모방할 것을 권장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칼 융을 인용(p83)하며, "개별화, 개성화"가 사람들, 특히 남성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문제를 사회 탓으로 돌리는 건 마치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 나오는 불량 청소년들이나 보일 법한 못난 태도일 수 있다는 식입니다.

"왕의 에너지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식력과 축복이다(p92)." 그래서 소년들은 불안감을 애써 누르고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애쓰지만, 그에는 어떤 왜곡된 자아상과 롤모델, 혹은 유치한 영웅심리가 깃듭니다. p128에 보면 유대 민족의 예를 드는데, 성경 속에 묘사된 유대인들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가 하면 매우 미숙한 충동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전투 민족이었습니다. 많은 소년들,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이 가진 자아상 중 하나가 바로 전사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이는 매우 왜곡되거나 무리한 방식으로 자아에 투영됩니다.

"전사는 많은 경우에 파괴자이기도 하다(p139)." 그래서 적절한 방식으로 중화되거나 여과되지 않은 전사상(像)은 많은 경우 소년들, 아니 미성숙한 남성 어른들에게 과도한 정신적 하중을 안깁니다. 엉뚱하게도 어린 소년들은 <스타워즈>를 보면서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나 한 솔로가 아닌 다스베이더에게 열광하기도 합니다(p144). 이런 소년들 중 상당수는 성장한 후 네오나치가 되지나 않을지 우려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 근거는 증오, 복수심 따위를 심리의 배후에 깔고 있다는 게 거의 확실시되어서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죠.

남성들이 빠져드는 원형에는 중독자 타입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너무 민감해서 조그마한 교란이나 질서 위반에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중독성과 예민함이 "연인의 그림자 원형(p205)"이란 키워드로 연결된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주장이며 독창적입니다.

"원형처럼 행동"하는 건 때로 무력하고 나약한 자신을 초월하여 위대한 그 무엇인가로 단번에 도약할 수 있다는 어떤 환각을 갖게 합니다. 머리가 좋지 않고, 교육이 부족하며, 빈곤하고, 자신 없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계만 발견하는 사람들이 어떤 환각처럼 원형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몸에 맞지 않는 큰 외투는 결국 입은 사람에게 무리만 가할 뿐입니다. 원형으로부터 영감이나 에너지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이를 넘어 집착하거나 과도한 투사, 동일시는 결국 당사자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칠 뿐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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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팩터의 심리학 - 정직함의 힘
이기범.마이클 애쉬튼 지음 / 문예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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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성격 요인이라고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책 p21에서는 1) 외향성 2) 원만성 3) 성실성 4) 신경증 5) 개방성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이는 특정 학자만의 견해라기보다, 성격심리학 분야에서 어느 정도 통설로 자리잡은 관점이라고 책에서는 설명합니다.

그런데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것이, 이 다섯 가지는 사람의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 즉 팩터(factor)이지, 다섯 가지의 성격 유형을 나타내는 게 아닙니다. 책에서도 특히 p21에서 독자들이 오해하는 일 없도록 주지시킵니다. 요소, 즉 팩터라고 했으므로, 다섯 가지 팩터가 이리저리 다양한 비율로 결합하여 사람의 성격을 발현합니다. 이 다섯 가지 팩터 외에, 다른 어떤... 기본적인 요소 같은 건 오랫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독후감을 여기까지 읽은 이들은 대부분 눈치채시겠지만, 이 책은 이제 여섯번째 요소, 즉 H 팩터, 다른 말로 하면 정직성 요소를 사람 성격 구성 성분 하나로 추가하려는 논의로 채워집니다. 이 책은 올해 처음 나온 건 아니고, 2013년에 1판이 나온 적 있던 것을 이번에 제2판 1쇄가 찍힌 것입니다. 이기범 캘거리대 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해서 더욱 의미 깊은 저술이기도 합니다.

p36에 나오듯 "헥사"는 그리스어로 6을 나타내는 어근입니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제 사람 성격을 규정하는 6요소를 일러 헥사코 모델이라 명명하는데, 이 HEXACO라는 단어가 발음으로도 유사하지만 동시에 저 앞 5요소에 덧붙여 제6요소, 즉 정직-겸손성(honesty-humility)의 두문자를 딴 축약어 구실도 한다고 말합니다. 묘하게 우연이 겹쳐 멋진 모델 이름 하나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격은 대부분 유전자의 영향이며, 환경은 상대적으로 적은 영향만 끼친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p61). 특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전자들의 아주 적은 효과들이 결합해서 성격을 만든다"는 저자들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에서는 "운명"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처럼 성격이다 기질이다 하는 게 결국 태어나던 순간의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는 건 다소 숙연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저자들은, 유전 영향을 제외한 나머지 1/3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물론 나쁜 환경에 의해 성격이 결정된다 뭐 이런 요소보다는, 우리가 노력 여하에 따라 후천적으로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긍정적 면모에 주목해야겠습니다.

H팩터를 도입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결합하여 특정 성격을 빚어내는지를 살피면 무척 재미있습니다. 6)정직성이 낮고 2)원만성이 높으면 서글서글한 아부꾼이 많다고 하는데(p90) 재미있는 설명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절대 이런 사근사근한 매너를 보이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사회에서 이런 자를 조심할 필요가 있죠. 이런 못된 인간은 남한테 뭘 호의를 구할 때에도, 자신보다 열위에 있는 상대(대부분 착각입니다)에게는 뻔뻔스럽게 무엇인가를 요청하며, 자신이 뭘 받아낼 때는 한없이 고압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일상에서 상종을 말아야 할 유형입니다. 대부분 범죄자이거나, 그 가족 중에 범죄자가 있고 말도 안되는 핑계나 합리화로 일관하죠. 그 핑계는 사실 자신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정직도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그 판단은 어느 정도의 정확성을 가질까요? 책에 의하면 "친숙하지 않다고 여긴 사람의 정직성에 대해서는 특히 정확도가 떨어졌다(p130)"고 합니다.

정직성이 낮은 사람은 사치를 즐기는 경향이 타인에 비해 높을까요? 책에서는 그렇다고 하며 특히 헤르만 괴링, 코즐로스키 같은 수집가가 그런 성향을 보였다고 합니다(p113). 수집가가 정직하지 않다기보다, 정직하지 못한 자가 자신을 실제보다 과장되게 보이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고 그런 습벽이 수집으로 나타난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저 뒤 p237에도 비슷한 언급이 다시 나옵니다(사치와 정직성 사이의 역[逆] 상관관계).

p84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분석이 나옵니다. 얼마 전 저도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오만과 편견>을 읽고 리뷰를 남겼는데, 이 책 저자는 다시와 엘리자베스 모두 H팩터가 높은 성격이며, 특히 다시에 대해서는 "오만하다고 볼 수 없고, 그저 솔직하며" 오히려 인간적 진실성이 돋보인다고까지 말합니다. 사실 우리 독자들도 다 읽고 나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게 보통일 겁니다. 또 그래서 그 두 사람이, 특히 다시가 처음부터 내내 엘리자베스에 끌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엘리자베스는 약간 변덕을 부리지만 다시는 사실상 초지일관 아니었습니까.

종교는 과연 정직한 인간을 만드는가? 저자는 원리적이고 교조적인 종교는 나와 타인을 구분짓는 데에만 열심인 반면,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종교는 그렇지 않아서 일찍부터 노예제 폐지 등 이타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고 합니다(p194). 저자의 견해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p175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분석이 또 나옵니다. 미국에서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가 나뉜다면, 이들 중 과연 누가 더 정직할까요? 어디까지나 평균 판단에 지나지 않지만, 사회 지배 지향성이 아무래도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걸 감안하면, 이와는 상충 관계에 놓인 정직성 팩터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즉 공화당 지지자들이 덜 정직하다는 결론이 나올 법도 한데... 결론은 "아니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정직성 팩터는 사회 지배 지향성에 의해 낮아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종교 변수에 의해 더 높아지기도 합니다. 이 부분 논의를 주의해야 합니다. 저자는 종교 일반을 낮추어 본다든가 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듯 종교를 믿는 사람이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정직한 경향이 있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대체로 공화당 지지자 중에 종교 믿는 이가 더 많으므로, H팩터가 여기서 중화된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 독자들도 여러 재미난 추론을 행해 볼 수 있겠네요.

인간은 체질적으로 정직하기도 하고, 반대로 거짓말을 일삼기도 합니다. 이게 상당 부분은 유전적으로 결정되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상당 부분 개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각별히 유념해야 할 건, 대부분 어느 정도 정해진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다양한 사람들, 그 동기를 정확히 이해하려 애 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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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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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지은 문명이란 덧없고도 위대합니다. 그런 문명의 과거와 현재, 또 본질과 속성을, 어느 영리한 고양이의 눈으로 지켜 보는 체험은 매우 흥미롭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고양이 바스테트인데, 그녀(암고양이이므로)는 마치 사람처럼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부심이 강하며 깊이 있는 사고...도 가능합니다. 고양이들은 대개 무리를 지어 지내는 편이 아니지만, 주인공은 남친 피타고라스를 비롯해 여러 명과 친분이 두터우며, 인간 집사들하고도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녀의 행동과 말을 지켜 보면 좀 별나다 싶긴 한데, 그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2권 p158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네요).

1권에서 고양이와 인간이 함께 누리는 어느 공동체는 무서운 쥐떼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1980년대 어느 B급 호러 무비에서는 엄청난 쥐떼들이 몰려와 사람 사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설정이 있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온몸이 흰빛인 쥐였습니다. 혹시 작가 베르베르도 그 영화를 본 적이 있었을까요? 이 소설에서는 티무르 랑, 영어로는 타멀레인(크리스토퍼 말로 원작의 희곡도 있습니다)이라 부르는 14세기 정복자의 이름을 딴 어느 쥐가 나와 파라다이스라는 곳을 포위합니다.

"포위", 즉 siege는 인류 역사를 바꿔 놓은 엄청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이 책 1권에도 p120에 카이사르 관련하여 알레시아 포위가 나오고, 한반도의 고구려나 조선도 안시성 싸움, 남한산성 포위라는 대사건이 있었으며, 유럽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빈 포위가 있었고, 15세기에는 알탄 칸의 북경 포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포위는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는데 전염병 때문에 질서와 평온이 무너진 (이 책 중의) 세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그까짓 쥐 따위가 아무리 많이 몰려온들 뭐가 겁날 게 있겠나 싶지만 티무르는 인간의 실험 때문에 능력이 특별해진 상태입니다. 또 전염병 때문에 인간들은 종전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파라다이스는 포위되고 주인공들은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때 기발한 꾀를 내는데 열기구를 이용해 하늘로 길을 내어 포위를 뚫는 방법입니다. 작가 베르베르는 세계 최초로 열기구를 발명한 프랑스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이 발동했을 법도 하고, 뭐 사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다른 뾰족한 묘안이 없기도 합니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 백과사전 여러 항목이 중간중간 인용됩니다. 정복자 티무르는 우리가 중고교 세계사 시간에 배워서 익히 아는 인물이지만 이렇게 로망 웰즈(사실은 베르베르 자신?)의 버전으로 다시 바라보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행적을 남긴 인물임이 재확인되네요.

p134에서는 "모순적인 인간들이 지도자로서 지지를 받는다"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 신뢰성 있는 인물이 아니라, 나중에 책임도 못 질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는 선동가들이 오히려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망치곤 하는 현실을 잘 짚은 한마디 같습니다. p144에서 주인공은 인간들더러 "저렇게 감정을 숨기는데 어떻게 소통이 가능한지 궁금"하다고 합니다. 고양이는 그렇지 않고, 특히 이 소설 앞부분에서 암고양이인 주인공은 자신이 얼마나 관능적으로 수컷을 유혹할 수 있는지 매우 현란한 말솜씨를 뽐내며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바스테트가 좀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이라면) 사람들도 만만치 않거든요? 고양이로서의 한계 때문에 아마 집사들의 화려한 스킬을 감지 못 한 것 같습니다.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으면 그 박학다식 덕분에 상식을 배우는 게 많아지는 우리 독자들입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건 양력 외에도 여러 물리작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데, 이 1권에는 고양이가 높은 데서 추락해도 왜 대체로 안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저도 혹시 나중에 고층 건물에서 추락할 일이 있으면 (이 1권에서 설명된 대로) 사지를 쫙 펴고 마지막에 네 팔다리로 충격을 최대한 흡수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뭐 어차피 밑져야본전 아니겠습니까.

p241에는 파툼, 즉 숙명, 운명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어느 트롯 가수의 노래 제목 "아모르 파티"에서 fati도 바로 이 단어의 속격(=소유격, 2격) 형태이죠. 한 페이지 뒤에 막카리 고살라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그는 "어차피 인간은 숙명대로 흘러가며 자연히 해탈에 도달한다"는 가르침을 폈습니다. 이 역시 심오한 결론이나, 우리 귀에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설법, 즉 사소한 행동도 인과 연의 교란을 부른다는 자유의지 중시의 관점이 더 울림 깊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불교가 수천 년을 살아남은 고등종교가 아닐까 생각도 해 봅니다. 사람이 그저 운명에 종속되는 존재라면 그 존엄이 덜해지는 결과 아니겠습니까. (코를 곯다x 코를 골다o p275)

p66에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어원이 파리시 종족에서 왔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저술가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그 기원이라고 했는데 우연의 일치로 철자가 같습니다만 근거 없는 이야기였죠. p311에는 felix와 feles가 발음, 철자 모두 비슷한 우연 때문에 felicity로 말장난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고양이와 행운은 라틴어에서 어원이 다릅니다(서로 무관). 베르베르의 소설은 (거듭 말하지만) 이런 좋은 상식이 늘어서 유익하기도 합니다. p317에는 동아프리카 차보에서 식인 사자가 출몰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1998년에 마이클 더글라스, 발 킬머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p314의 거울 뉴런 이야기는 역시 베르베르다운 이지적인 통찰이 돋보입니다.

p46에는 서(鼠)해전술이라는 말이 있고, p136에는 안하무묘(猫)라는 말이 나오는데 인해전술, 안하무인 등의 사자성어를 재미있게 비튼 것입니다. 번역의 묘가 돋보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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