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그녀의 마지막 여름 - 코네티컷 살인 사건의 비밀
루앤 라이스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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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추천사(p4)를 보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리 차일드의 말이 나옵니다. 리 차일드는 책좋사에서도 여러 번 소개된 <잭 리처> 시리즈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다 읽고 느낀 감흥은, 이 스릴러의 진수와 본질을 저 리 차일드만큼 몇 마디 말로 잘 요약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확실히 그의 말은 공력 깊은 저자 답게, 소설 내용에 대한 스포가 전혀 없으면서도 작품의 핵심을 꿰뚫는 안목의 산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자신의 노력과 재능을 다 쏟아 부어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태어나 보니 생의 온갖 행운과 축복이 다 제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그럼 전자는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고, 후자는 그저 비난과 비웃음의 대상이라서 평생 죄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그저 주어진 처지에서 최선의 레이스를 펼치면 생이 주어진 목적은 다 달성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생을 부실하고 안이하게 사는 사람이 욕 먹어야 할 뿐입니다. 


소설에서 AK 47이 발견(p64)되면 일단 독자는 긴장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분위기에서 갑자기 화기를 마주하게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소설에는 중국제라고 나오고 실제로 중국 아니라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건 쉽게 제조할 수 있는 화기입니다. 그러나 아득한 기원은 러시아(구 소련)이며 많은 가난한 전사들에게 성능 면에서나 가격 면에서나 큰 도움을 준 친구라고 봐야 하겠죠. 여튼 톰은 우리 독자처럼 이 수상쩍고 운수 불길한 물건을 보고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 들어!'


"케이트가 한 걸음에 두 계단을 올랐다. 473개라는 계단의 숫자는 예전에 베스와 함께 세어 봐서 알 수 있었다.(p124)" 마음이 급할 때에는 아직도 올라야 할 수가 한참 남은 계단의 수만큼 야속한 것이 또 없습니다. 이 장면은 나중에 소설을 끝까지 다 읽었을 때 제법 의미심장한 상징이 숨어 있었음을 독자가 나중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명작 회화를 실제 소유할 만한 재력이 되는 사람뿐 아니라, 그저 일반인이라고 해도 수천만 달러를 상회하는 인류 전체의 문화재를 감히 훼손할 마음 자체를 품지 못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케이트에게 코너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알면 아마 놀랄 걸요?(p182)" 정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인지, 누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이 될 때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줄 압니다. 


이상하게도 클로드 모네의 <수련>은 스릴러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이 스릴러 작품에 잠시 언급되는 경우는 너무도 많고, 아예 작품의 주된 제재로 등장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케이트는 작품을 응시하면서 그 섬세한 색과 음영에 빠져들어갔다(p254)." 여기서 조금만 더 몰입하면 그건 그녀건 스탕달 쇼크를 받는 거죠. 


어느 누군가에게, 다른 누군가를 지킬 만한 "자격" 같은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요?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적어도 누군가는 그럴 만한 자격을 요구할 권리가 있거나, 혹은 그럴 자격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 안의 내밀한 일은 외부의 누군가가 들여다보기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용의자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어느 누구도 감히 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결말을 알면 마음이 몹시 무거워지지만, 반대로 결국 진실(그 밝혀지기 어려웠던)은 밝혀진다는 안도에 가슴이 가벼워지기도 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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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달러 미래 - 기회와 추월의 시간
권세호 지음 / 청년정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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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자체 모순으로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공산주의 체제 이행을 주창한 이래 인류 역사는 어떤 이념, 당위에 대한 신념이 역사의 큰 부분을 이끄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소련이 체제 경쟁에서 서서히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이가 "역사의 종언"을 논했고 그 무렵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진화의 종점(p26)이 되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던 게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체제 경쟁의 최종 승자가 과연 누구였는지도 불분명해질 만큼 여전히 많은 이들이 좌파 이념, 적어도 가치를 지지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 위상은 쪼그러드는 인상이며, 이에 대항하는 패권 세력으로서의 중국, 러시아 등은 성장 동력이 별반 축소되지 않는 느낌입니다. 역사는 어떤 정점에 도착하여 내적 성숙만 다져 가는 것 같지 않으며, 그 방향성만 예측 불가일 뿐 여전히 그릇 안에서 끓어 오르며 밖으로 넘치려는 불안정한 그 무엇처럼 보입니다. 확실한 건, 이처럼 변동성이 확산된 국면에서라야 커다란 부(富), 권력의 변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사에서 미국에게 커다란 굴욕을 안기고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시각은 조금 다르며, 10년 동안 이어진 경제봉쇄 때문에 베트남은 결국 백기투항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개방 정책을 도이머이라고 부르며, 다만 미국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방한 것이라면 현재까지 베트남 경제가 미국이나 기타 외부 영향에 그리 종속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베트남 경제가 자립적인 것도 아니며, 최초 기대와는 달리 이도저도 아닌 정체 상태가 지속도되는 듯도 합니다. 여튼 저자는 미국이 베트남식 모델을 북한에도 적용하려 든다는 분석인데, 만약 이 시각이 옳다면 두어 해 전 트럼프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의 2차 회동 장소가 베트남이었던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전에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도전으로 곤욕을 치르고 나서 "돈 가진 사람이 권력까지 쥐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긴 했습니다. 그 영향이라는 건 아니지만 책에도 p63 같은 곳에서 "어떤 가치 영역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다른 가치 영역의 재화(sic.)를 쉽게 소유하게 되는 전제는 반대한다. 또 지배적 가치는 자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평균적인 상식을 지닌 어떤 한국인에게 질문해도 이 명제, 원칙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 같습니다. 


정당의 혁신, 또 정치 결사가 활동하는 기반을 이루는 규칙 체계는 정치 참여자 모두의 합의를 거쳐 마련되어야 합니다. 책 p68에는 링컨 대통령이 남북 전쟁 중 노예 해방 조치와 더불어 헌법 개정을 통해 해방 선언의 항구화, 제도화를 도모한 예가 거론됩니다. 80여년 후 FDR의 뉴딜 같은 것도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이 나 원상복구가 되기도 했으니 현명한 결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혁이나 어떤 정치적 결단은 1회성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자는 이어 지구 생태계와 환경 이슈로 논의를 확장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인류를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 보는 중이다.(p82)" 사실 다른 어느 동물보다 인류를 두려워할 만한 생물은 바로 인간입니다. 같은 종인데도 타 개체를 배려하지 않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근시안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생물이 어찌 두럽지 않겠습니까. 한밤중에 산길에서 마주치기가 호랑이보다 두려운 건 바로 인간이죠. 여튼 그래서 세계 각국은 대체 에너지 개발에 그간 골몰해 왔는데 책에서는 p89 등에서 ITER 프로젝트 등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한국은 주도적 위치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중이 작거나 소극적인 스탠스는 더욱 아닙니다. 1990년대만 해도 탄소세라든가 배출권 거래 같은 게 꿈 속의 허황된 논의 같았으나 이제는 엄연히 실현되는 중이며 테슬라가 요 몇 년 동안 주가 고공행진을 한 것도 이에 비롯한 바 큽니다. 챕터 말미에는 제레미 리프킨이 최초 제언한 "피어 어셈블리" 같은 것도 환기됩니다. 이런 문제는 국경을 초월하여 논의될 필요가 크기 때문이죠. 


여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 질병은 무척 많았으나 코비드19처럼 큰 혼란을 초래한 경우도 드문 듯합니다. 페스트처럼 치명률이 높지도 않으면서 일상에 충분히 큰 지장을 끼쳤으며 많은 나라들이 집단 면역을 거의 포기하고 들어가는 단계입니다. 30여년 전 에이즈, 20년 전 사스 같은 게 유행할 때도 결국 진압되리라는 확신이 모두를 지배했던 걸 기억하면 이번 팬데믹은 무척 우려스럽고 실망스럽습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출산율 전망이 가장 비관적인 편입니다. 고령화로 고생 중인 일본에 결코 못지 않습니다. 생산활동참여인구가 줄면 현재 노동일선에서 퇴진한 노령층의 생계에 무척 큰 타격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사회적 안전망의 확충과 노동시장 구조의 대대적 개편, 노후 대비 교육과 컨설팅의 강화입니다. 


과거에는 국제기구나 NGO에서 어떤 선제적인 아젠다를 제시하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라 해도 그저 소 닭 보듯 할 뿐이었습니다. 아직 여건이 미성숙하기에 일일이 선진국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는 핑계 하에 졸렬한 기존 방식을 고수하려는 의도 때문이었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 대기업들이 소극적으로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기준과 비전도 (사후적, 동조적으로나마) 발표하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작게 보면 초국적 플레이어들이 두루 참여하는 증시에서 보다 유리한 포지션을 잡기 위한 PR이나 마케팅의 일환이지만, 크게 보면 국제기준의 충족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작용한 것입니다. 이 책 뎍시, 변화의 방향성을 일단 캐치했으면 간 보지 말고 필드에 적극 뛰어들어 분위기를 주도한 후 큰 기회를 잡자는 주제이므로 맥락이 정확히 일치하는 현상입니다. 


메타버스는 이미 물리학자들이 4차산업혁명 같은 용어보다 더 이른 시기에 창안한 개념입니다만 요즘 특히 산업, 증시 섹터에서 다양하게 응용되어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여중생 여고생 등도 좋아하는 연예인들이 소속된 회사에서 야심차게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꼭 들어가는 용어이므로 그 뜻을 그리 낯설어하지도 않습니다. 알아가면 갈수록 어려운 개념인데도 말입니다. 책에서는 이 외에 암호화폐, 블록체인 등에서도 간단히 조감합니다. 


AI와 로봇은 일자리 감축의 원흉이자 동시에 혁신적인 일자리 창출의 주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이 트렌드에 잘 적응하는 나라, 사회, 조직에서는 기존의 일자리를 다 뺏어와 자신의 수입원으로 삼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주체는 종전보다 가난한 처지에 빠지는 게 필연입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사람 겁주는 디스토피아상은, "미래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이라는 전제가 붙고 도출되는 결론입니다. 혁신에 성공하여 경쟁에서 살아남은 승리자는 애초에 어떤 불안에 떨 이유가 없습니다. 


경쟁에 뒤처진 국가, 조직의 노동자는 기존의 파이마저 내어준 채 더욱 불안정한 지위로 내몰립니다. 현재는 그나마 노조에 소속된 정규직은 생계에 큰 위협은 받지 않는 형편이나, 4차 산업혁명의 파고가 휩쓸고 간 후 종래의 프로레타리아트는 이제 프레카리아트(p200)로 한 단계 더 떨어질 위기에 놓입니다. 마찰적, 구조적, 계절적 실업 외에 이제 기술적 실업이 사회의 위협 요인으로 부각될 것입니다. 


1990년대 세계화 바람이 한창 일 때 오프쇼어링이란 어떤 불가역적인 대세였고 자유무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엉뚱하게도 보호무역 바람이 각국에서 부는 중이며 리쇼어링도 여러 선진국에서 거리낌 없이 정책적으로 장려됩니다. 20년 전에는 예측이 어려웠을 동향들입니다. 


현재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기준금리를 올리려는 애드벌룬이 자꾸 띄워지며 증시도 덩달아 요동칩니다. 책에서는 금리 인상에 모든 경제주체들이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걸로 보아 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기는 듯도 합니다. 단, 언제나 금융으로부터 소외되기 쉬운 계층에게 접근을 더 쉽게 해 줄 정책적 이니셔티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기업에는 세금 관련 우대 정책을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보호무역주의 대응의 일환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하며 각종 경제협정과 공동체에 참여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대응이 있어야 국민소득 10만달러를 일찍 달성하여 더이상 국제정세 속에 종속 변수 신세를 면하고 통일국가를 이뤄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는 비전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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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 바디 밸런스 - 바디 프로필로 올린 자존감
오우진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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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이라는 말은 요즘 많이 씁니다. 일(워크)과 삶(라이프) 사이의 균형이란 뜻이죠. 이 책 저자 오우진 교수께서는 마바밸이란 주제를 책에서 부각합니다. 마인드(마음)와 바디(몸) 사이에 자리하는 균형을 강조하는 의도겠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몸을 일으켜세워야 하겠습니다.(p10)"


"신체성은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증명이자, 자기 미래의 가능성도 담고 있는 잠재성이다.(p6)"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이다.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무너진다. 몸을 먼저 일으켜세워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몸과 마음의 조화와 균형이 이뤄진다.(p4)"


예전, 불교의 고승들과 유학자들은 마음이 바로서고 그 안에 사특한 의도가 깃들지 않게 하는 걸 인생 최우선의 가치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수련과 정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완전한 지혜를 터득하고 평정심을 유지한다면 최고의 현인으로 대접 받아 마땅하겠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그런 그윽한 경지에 도달하기 무척 힘듭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확신을 갖기란 쉽지 않기에 그래서 지치고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몸을 통해 마음을 볼 수 있으니 단련시키고 교정이 가능할 것이다.(p48)"


라운드 숄더(p80)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을까요? 구부정하게 앞으로 휜 어깨를 가리킵니다. 현대인들은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도 하며, 게다가 요즘은 스마트폰 사용 시간까지 과하게 많다 보니 더욱 체형이 나빠질 만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거울 속에 굽어진 내 어깨를 보니 내 움츠려든 자존감이 연상되었다"고 합니다. 자존감이 불충분하니 자세가 나빠지고, 자세가 나빠져 체형이 흐트러지니 자존감이 더욱 추락하는 악순환이 생깁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p175)."


저자는 20대 때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때 심리치료를 받았고, 처음으로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저자는 말합니다. "몸 자세가 잘못되면 체형이 변화되듯, 마음자세가 변형되면 심형이 변형되는 것이다.(p81)" 어떻게 심형(心形)에 문제가 생긴 줄 알 수 있을까요? 꾸준히 운동을 하여 내 몸이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는 게 관찰이 되면 그게 하나의 신호입니다. 운동을 안 하는 사람은 내 몸 자세에 어떤 이상이 오는지 아닌지도 캐치 못합니다. 


p182에서 저자는 처음에 그런 진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0대 때 얼음공부라 불릴 만큼 완벽주의자였고 공부의 의문점도 질문이 아닌 독학으로 해결할 정도였으며 20대 때에도 또래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이뤘다고 자부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건 자존심이지 자존감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아이들의 몸은 유연하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뻣뻣해지고 유연성을 잃는다. 가장 이상적인 마음 상태도, 아이들의 마음 상태와 같다. 유연하지 못한 마음은 관계를 악화시키고 주위의 사람들도 잃게 한다.(p43)" 


"처음 벤치프레스를 했을 때 30kg 바벨을 겨우 들고 며칠 동안이나 통증에 시달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몸 근육이 성장했다는 걸 느꼈다. 지금 일어난 사건으로 마음이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고 내 마음의 근육도 성장할 것을 알게 된다(p55)."


이처럼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저자는 승무원 경력을 지닌 분이기에 카타르를 자주 왕래했고, 따라서 라마단 기간의 금식을 (종교를 떠나) 수행하며 그 고통과 그에 따르는 고마움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도 안다고 말합니다(p31). 이처럼 번잡한 고민과 충동과 감정의 격동이 괜히 정신을 괴롭히는 걸 막기 위해서도 저자는 운동에 몰입한다고 합니다. 운동을 통해 자세가 바로잡아지고 체지방을 줄이면 몸의 건강과 동시에 마음의 평안도 찾아집니다. 바른 자세, 날씬한 체형을 통해 나의 자존감은 높아지며, 자존감이 일단 높아지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유발되는 온갖 스트레스도 대범하게(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선순환의 시작은 마음보다는 몸의 건강인 셈입니다. 꼭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몸이 멋있어지면 절로 자존감이 생기고 마음의 안정이 찾아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p68:2에는 랫 풀다운 운동이란 말이 나옵니다. <2장 무산소 운동> 파트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운동입니다. 랫(lat)이 무슨 말일까 하여 찾아봤는데 latissimus muscle, 즉 p68:5에 나오는 "광배근"과 같은 뜻이었습니다(활배근이라고도 합니다). 이 장에서도 저자는 몸의 운동이 곧 마음의 수련으로 연결되며, 매 순간 운동할 때마다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함께 떠올리라고 조언합니다. 감정은 내가 달래 주어야 할 "아이"이며 나와 분리해서 바라볼 줄 알라고 합니다. 그 누구보다 내가, 내 감정을 토닥토닥해 줄 줄을 알아야 합니다. 


p72에는 저자 오 교수께서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실렸는데, 복근과 thigh에 선명한 데피니션이 누구 눈에도 역력합니다. 이런 사진을 우리는 바디 프로필이라 부릅니다. 이 책은 산문 형식이지만 레이아웃이 마치 시집처럼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저자의 바디 프로필이 20% 이상의 비중입니다. 아름다운 몸은 그 자체로 시적 감흥을 부르죠. 다이어트나 피트니스에 느슨한 마음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이런 바디 프로필을 보고 정신이 버쩍 들만합니다. "아 나 큰일난 거구나"하고 말이죠. 


요즘은 인스타그램에 자기 바디 프로필을 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p214에 나오듯이 2017년 즈음만 해도 바디 프로필이라는 게 지금처럼 유행을 타지 않았죠. 세상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바뀌며 예전엔 부끄러워서 상상도 못 하던 걸 어떤 티핑 포인트가 지나 대세가 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유행에 동참합니다. 


저자는 과감한 체험, 경험을 통해 "뇌에 새로운 길을 내자(p112)"고 합니다. 사실 우리 독자들도 이런 책을 읽고 저자의 주장과 각성에 공감하고, 나도 나의 인스타에 바디 프로필 한번 올려 보자는 생각으로 운동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정도는 "내가 원하는 나로 다시 태어날(p193)" 필요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 못 해 보면 언제 다시 기회를 찾겠습니까?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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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배움의 주인이 되는가 - 학습자 주도성과 생성 교육
정기효 지음 / 비비투(VIVI2)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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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목적은 창의적이고 주체적이며 사회에 건설적 기여를 할 수 있는 도덕적 인간을 길러 내는 데 있겠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지식을 기계적으로 주입하는 데 그친다거나, 지식만 잔뜩 외울 뿐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모른다거나, 반대로 자신만의 아집에 사로잡혀 이 이상은 알 필요 없다며 자기 합리화의 덫에 빠진 인간만을 길러낸다면 그 교육은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학교라는 곳이 좀비처럼 획일화한 유령 같은 인간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한다면 이미 교육은 사회에 해악을 끼침에 다름 아닙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만큼 풍요롭게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 제도의 건강성에 대해서는 많은 우려가 제기됩니다. 이 책은 실용적으로 쉽게 저 난제에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교육학 전문가의 고견을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인용함으로써 학문적 엄정성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20세기는 전체주의를 낳은 시대다.(p29)" 후지타 쇼조라는 일본 사상가의 말입니다. 소련, 나치 독일 등 세계를 전화로 몰아넣은 서방의 풍조뿐 아니라, 바로 동아시아에 커다란 비극을 부른 모국 일본의 죄과 역시 상기시키는 준엄한 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체주의는 다양성을 배제하며, 어떤 불쾌감을 부르는 타자를 모조리 제거하려 드는(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존마저 담보 못하는) 위험한 시스템입니다. 이런 전체주의를 공고화하는 가장 핵심적인 제도 중 하나가 (잘못 형성된) 교육 제도였습니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말살하려 드는 혐오, 이것을 낳은 온상이 바로 파시즘 등의 전체주의입니다. 단일한 주파수에 공명하기를 거부하고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도우려면 올바로 선 교육 시스템의 원활한 기능이 필수적입니다. "있지도 않은 평균의 허상"을 과감하게 깨부수는 것이 또한 교육의 사명입니다. 


배움의 과정을 거치면 사람은 종전의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보다 큰 자아를 의식하고 사회에 올바른 방향으로 통합됩니다. 배움의 전과 후가 같다면 이는 바른 배움이 아닙니다. 나아가 책에서는 "배움의 탈영토화"를 강조합니다. 개인 단위에서는 종전의 협소한 인식과 마음가짐을 탈피해야 하며, 더 넓은 평면에서는 자신의 가족, 고향, 또래 집단, 혹은 국가에서만 통용되는 비 보편적 지식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합니다. 의학, 자연과학, 언어학 등은 모든 인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어떤 보편의 진리를 담을 뿐, 한국과 중국, 일본, 미국의 진리와 명제가 서로 다를 수 없습니다. 과거 편협한 자국 이익 우선주의만을 주입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이 실패작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유일체제 고유의 진리 체계를 강요하는 북한의 교육은 또 어떻습니까. 


책에서는 들뢰즈의 개념을 인용하며 앎과 신체를 일체화하는(따라서 지필고사 위주의 방식을 지양하는) 교육이 이상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신체에도 위도와 경도가 있는데 위도는 욕망이요 경도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욕망만 하늘을 찌르고 올바른 능력이 결여된 상태나, 반대로 능력은 출중하지만 욕망의 방향이 잘못된 경우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스칼라량과 달리 벡터는 방향성 차원이 하나 추가됩니다. 교육은 바로 이 방향성을 올바로 함양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이 두 차원 외에, 맥락이라는 제3의 차원이 올바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맥락은 구체적인 삶의 공간을 뜻한다고 하며, 독자인 제가 해석하기로는 "사회"라고도 파악이 됩니다. 방향도 건강하게 설정되고 능력도 뛰어나지만 이를 구체적인 사회 안에서 올바른 포지셔닝까지 마쳐야 비로소 개인이 온전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고 이것이 바로 교육의 목표입니다. 


개별 지식에 매몰되면 안 됩니다. 학습은 이산적이기보다는 연속적이어야 하며, 단편적이기보다는 포괄적이어야 하며, 기술적이기보다는 전인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학습을 저자는 "긴 호흡의 학습(p105)"이라 부릅니다. 또한 교육은 획일화의 틀에 갇혀서는 안 되고, "학습 공원(p120)" 안에서 모든 학생이 자신만의 개성과 잠재력을 발휘하여 고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저자는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행위주체성, 혹은 학습의 주도성을 강조합니다. 이때 주도성이라 함은, 자의성(恣意性) 내지 방종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도성이라 해도 그것이 "교육"의 틀 안에서 이뤄지는 이상 수동성을 전제로 한 제한된 능동성(p135)이라야 하죠. 가능성에 머물러 후행적 깨달음을 강조할 뿐인 결과론과는 달리 들뢰즈는 잠재성의 현행(顯行)화를 강조하는데(p135) 이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주도성의 본체입니다. 이 주도성은 일회적이고 고정적인 결론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 진화합니다. 또 고립적이지 않고 공동의 집단이 가지는 특성을 공유합니다.(p137)


이러한 교육은 고정된 체계를 전승하지 않고 "생성"의 본성을 가집니다. p150에는 이런 교육의 특성으로 산각 구조가 도시되는데 각 꼭지점에는 학습자, 새로운 가치, 탐구가 상호 작용을 이루며 서로를 뒷받침합니다. "생성의 학습자는 방랑자도 표류자도 아니다(p151)." 왜냐하면 이제부터 그가 가는 모든 항로는 다른 사람에게 참고가 될 수 있는 독창적인 해도의 구성 부분이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도, 그가 간 궤적을 기계적으로 따라 밟을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다만 타인들이 그들 고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경험이 가치에 선행한다.(p169)" 왜냐하면, 경험에 선행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획일성의 추구일 가능성이 높겠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제시하는 목표와, 그것의 성취를 표시하는 모든 탬플릿은 교과서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또 이를 바탕으로 한 수업 에세이 쓰기(p194) 역시 주도성 학습의 핵심 과정입니다. 앞에서 벡터의 세번째 차원으로 "맥락"이 제시되었는데, p211에는 "배움은 맥락에서 비롯하지만 맥락을 넘어서야 한다"고 합니다. 종전의 맥락에 배움이 머물러 있으면 그건 이미 "생성"이 아닌 "정체(停滯)"이기 때문이죠. 


"나를 따라 하시오(뻬 꼼 무아)"는 동일성의 재현이요, "나와 함께 하시오(뻬 아베끄 무아)"는 차이의 생성을 말한다고 들뢰즈는 표명합니다(p129). 여기서 차이라 함은 민주사회 교육의 핵심 지표 중 하나인 다양성 지향을 뜻하겠습니다. 절대적 진리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그것의 타당성과 자신의 인지 정합성 여부를 의심해 보는 데에서 메타인지(p142) 능력이 자라납니다. 배우되 의심하고 반성하며 새로운 결론을 향헤 도약하려는 생성의 의지와 능력이 자리한 정신(그리고 이와 통합된 신체)이야말로 21세기 교육의 궁극적 목표라고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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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지음, 김수현 옮김 / 미메시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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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직이건 간에 핵심적인 활동을 하며 남들 몫의 2~3배를 기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냥 머릿수만 채우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잉여 분자는 남들의 눈총을 받아 가며 결국 도태되는 게 보통이겠는데... 때에 따라서는 정반대로, 다들 자기 몫을 하지만 최소한의 형식을 채울 만한 인원에는 부족할 때, 그저 구색만 맞추는 일로도 수요되는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싶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오히려 찾으려 들면 막상 아쉬워지는 게 그런 존재들입니다. 아예 이런 일만 전문으로 해 주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책의 저자 "렌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같은 이들입니다. 필요하면 누구한테나 그런 인력을 일시 대여한다고 해서 앞에 "렌탈"이 붙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 영화 중에는 "도그 워커", 즉 개 산책 시키는 일만 전문으로 하는 어떤 젊은이의 이야기가 담긴 게 있는데, 저자의 전직(前職)은 그것보다는 훨씬 난도 높은 직업이었습니다(게다가 저자는 대학원까지 다닌 인력이기도 합니다[p66]). 학습지 등 교재 편집에 관한 것이었다는데, 저자는 그 일을 하면 할수록 흥미를 잃고 스트레스를 받던 통에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블로그를 통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것이 발전하여 지금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직업" 영위에 이른 것입니다. "직업"이란 무엇인가 쓸모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냥 머릿수만 채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직업"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컬합니다. 


그럼 어떤 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일까요? 예를 들면 p23에는 평소에 층간 소음 때문에 불편하게 지내던 아래층 세대에가 빨래를 떨어뜨려서 찾으러 가야 하는데, 혼자서 가려니(독신 가구인 듯) 겁이 나서 누가 같이 따라가 줄 사람을 찾는다는 의뢰가 나옵니다. 이때 따라가는 사람은 어떤 실력 행사나 말로 하는 청구 같은 걸로 돕는 게 아니라, 그냥 뒤에 서서 일행임을 가장만 하면 되는 겁니다.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나서는 것과, 그래도 비슷한 처지에서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있는 게 결과가 다를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누구라도 혼자 사는 게 드물었고, 따라서 머릿수는 어떤 경우에도 자동으로 채워지는 게 보통이었으나, 현대에는 그렇지가 않죠. 얼마든지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예컨대 한국 같으면 "입맛이 맞아 단골 식당으로 삼던 곳이 있는데, 여친과 헤어진 후 계속 혼자서 거길 찾으려니 어색해서 같이 밥만 먹어 줄 사람을 구하는" 의뢰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아마도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런 일을 하지만 미래에는 이보다는 발전한 어떤 일을 하는 꿈"을 갖는 게 보통이겠죠. 그런데 저자는 "지금 이 시점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일을 한다는 꿈을 모두 이미 이뤘는데, 또 무슨 꿈을 미래를 향해 가지라는 어떤 강박"을 거부한다고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현재가 불행하거나 덜 만족스러워도, 어떤 꿈을 품으며 현재의 곤란을 이겨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저자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가 지극히 좋은데 왜 또 다른 꿈을 품냐는 거죠. 오히려 꿈(있지도 않지만)을 생각하면 저자 같은 사람은 (괜찮던) 현재가 (갑자기) 괴로워지는 겁니다. 저자의 의도는, 이뤄질지 안 이뤄질지도 불확실한 꿈 같은 것으로, 괴로운 현재에 최면을 거는 당신들은 과연 건강한 사람들이냐고 되묻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질문에 얼마나 당당하고 확신 있게 받아칠 수 있을까요?


과거 X세대라는 개념이 코인될 때부터, 현대인들은 더 이상 집단이나 군중 속의 일원이 아니라 자기 개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게 하나의 사명처럼 여겨졌습니다. 이걸 못하면 멍청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감각의 소유자로 치부되었죠. 그런데 세월이 다시 한참 지나 이 책 저자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는, 왜 개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냐며, 오히려 튀지 말고, 나답지 않아도 된다며 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제법무아, 물아일체의 경지(?)가 더 모던한 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고보면 개성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기껏해야 삼류 잡지나 TV(이미 철저히 상업화한)를 보고 양아치 패션 따라하는 걸 개성이라며 미화, 포장, 왜곡하는 거죠. 


XXX이나 기타 사회에 크게 물의를 빚은 자의 재판이 열리면 그를 방청석에서나마 응징(?)하고자 몇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참석하려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원래 민주주의 국가에서 재판은 공개재판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재판을 방청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반대로, XXX의 경우처럼 피고인을 응원하기 위해 방청석을 일부러 메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p65에는 교수의 비위를 폭로하는 어느 학생이 외롭게 투쟁하며(소송 진행 중),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걸 상대에게 알리기 위해 법정 방청객 알바를 의뢰하는 예가 나옵니다. 이런 경우는 웃고 넘어갈 수가 없죠. 꼭 대가를 지급하지 않아도,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유명 커뮤니티게시판에 글 하나만 올려도 "의용군"이 대거 몰려들 겁니다. 방청뿐 아니라, 법정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야유도 적절히 보내는 등 "덕불고 필유인"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많지 싶습니다. 


이분이 "아무것도 안 하는 직업"으로 유명해지자 반대로 이를 오마주(p83)해서 "무엇이든 다 해 주는 직업"도 등장했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무엇이든 들어(聽) 주는 일" 같은 건데, 저자는 자신의 일과 저런 (모방자의) 일을 미묘하게 구별합니다. 즉 자신의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중 일부인 그저 듣는 일"이지만, 오마주하는 사람들의 "듣기만 하는 일"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 하는 일"이란 거죠. 요약하면 자신은 총체적 부작위, 그들은 "특정 작위"라는 건데 이쯤되면 심오한 철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듯도 하네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카운슬러"하고는 다릅니다. 카운슬러는 (이 책 저자와 그의 폴로어[이 책에서는 팔로워를 이렇게 표기합니다]들의 생각에 따르자면) 내담자와 결국은 상하관계가 형성되기 쉽기 때문에 완전한 힐링이 어렵다고 합니다. 반면 "들어 주기만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이미 내린 해법에 전폭 동의해 주는 셈이므로 더 도움이 많이 되는 거죠(어디까지나 이분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떤 해답을 주려 애쓰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 주는 걸 원하고, 그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반대로, 맞장구도 과하게 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중에는 과거 옴진리교 신도였는데 그 종교 단체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물의를 빚은 후 어디 가서 자신의 그런 이력을 이야기도 못 하고 냉가슴을 앓던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분한테는 적절한 리액션을 좀 보여 줘야 효과가 더 좋은 텐데, 맞장구를 친다는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동조해 주었으며 저자는 그런 자신의 "자연스러운 반응, 응대"에 만족하는가 봅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옴 진리교 수뇌부가 과연 테러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데, 교단에서는 항상 자신에게 친절하게만 대해 주었기 때문이라네요. 대부분의 문제 종교 신도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외부인에게 "우리 OO교가 무슨 잘못이냐?"고 되묻는 습관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소외, 배제되는 건데 말이죠.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외부인은 아무도 그런 질문에 긍정하지 않고 즉시 상대를 멀리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직분이므로, 이게 무슨 봉사 활동으로 번진다거나 의뢰인에게 과하게 공감해도 안 됩니다. 의뢰인이 그걸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의뢰는 DM으로 저자에게 전해지는데 저자 역시 그런 식으로 소통합니다. 이때 아주 형식적인 DM만 보내며 응대하기도 하지만 그게 건성이라고 비판 받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과몰입은 의뢰인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스펙이 뛰어난 사람도 AI가 널리 보급된 미래에는 직업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직업 같은 일은 이미 어느 정도 "봇"에 의해 대체되고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저자도 조바심을 느끼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운이 없으면 이 저자의 다음 책은 "이제 실직했고, 새롭게 찾은 나의 일이 어떠한지"를 담았거나, 혹은 실직 후의 비분강개함을 털어놓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공감과 중립, 과몰입과 쿨한 동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미묘하게 오가며 적정선을 지키는 자신의 능력과 성취에 만족하는 듯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AI에 맞서 인간만이 해 낼 수 있는 영역의 한계가 어디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파일럿 노릇을 하는 중일 수도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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