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너이지만 안아주고 싶어
피지구팔 지음 / 이노북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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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의 무게에 짓눌리다 보면 자세가 비뚤어진 줄도 모르고 지내지만 누군가한테 지적을 받은 후에야 흠칫 놀라고 바로잡으려 듭니다. 그런데 이미 그리 자세가 굳어서인지 잘 교정이 안 되고, 나만 모르지 누군가는 내 비뚤어진 자세를 보고 흉을 잡겠거니 생각하면 마음도 우울해지고 자신감도 빠집니다. 그런데 이 책 p30에서는 괜히 기 죽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누구나 조금씩은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묘한 건 거울을 봐도 내가 기울어진 건 잘 안 보이는데 남의 나쁜 자세는 귀신같이 캐치된다는 겁니다. p31의, 작가가 직접 그리셨다는 일러스트를 보면 어떤 교복 입은 여학생 같아 보이는 이가 웃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보고 재미있어서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마음이 놓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음이 편해서 웃는 웃음은 누가 봐도 누가 웃어도 좋습니다. 


"여태 나를 짓누르는 돌인 줄 알았는데 그냥 털어내면 끝인 가벼운 모래일 뿐이었다.(p26)" 그래서 사람은 고장난 냉장고 안에 갇혀서도 얼어죽곤 하나 봅니다.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는 법이라 썩은 해골물을 마시고도 오장육부가 정화되는 듯 시원해하기도 합니다. 모래가 모래인 줄 알고서야 그게 가볍게 느껴집니다. 오른쪽 그 여성의 웃음은 이번에는 뭔가 통쾌하게 보입니다. 어떤 타인의 (보잘것없는) 실체를 알고 후련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p31에서보다는 약간 악의 같은 게 셖인 듯도 합니다. 


초심자인데도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저맘때는 못 저랬었는데 생각하면 좀 속상하기도 하고 약간 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 역시, 다른 후배나 상관에게 그리 보이지 않았을까요? 부족하다 아쉽다 하는 포인트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별로 의식하지 않던 나의 장점이 다른 이들에게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이고 내일이고 우리가 다 처음 살아 보는 하루인데 어떻게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p20)" 거울을 보는 여성의 표정이 "에이, 사소한 건 잊자"며 뭔가를 툴툴 털어내려는 듯, 그러면서도 약간은 멋쩍은 듯 보입니다. 


p10의 "두려워하지 말자"도 이것과 약간 통하는 메시지입니다. 특히 뭘 두려워하지 말자는 거냐면, "넘어지는 것", "천천히 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도 경쟁이 치열해서 남들 앞에서 뭔가 좌절하는 걸 특히 무서워합니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를 해도 남 모르게 하는 실수면 별로 무섭지가 않은데 말입니다. 경쟁에서 남보다 처지는 건 너무도 싫습니다. 오히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진짜 마음 깊은 곳에 남겨 둔 꿈을 실현하려 노력 못 한다면 그거야말로 두려운 일입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밝은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걸어가는 분의 전신샷이 인상적입니다. "뭐 별 것 있겠어?"라고나 하듯. 


하지만 너무 꿈이 먼 곳에만 치우쳐서 정작 가까운 행복을 잊고 산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맞아, 그걸 잊었었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p51)입니다. 사람이란 당장 천 길 벼랑 밑에 떨어질 듯한 위기에 처해서도 눈 앞에 맺힌 딸기의 달콤한 맛 덕분에 무서움을 잊는 동물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지금의 이 맛을 놓친다면 그 역시 인생을 누리지 못한 죄를 짓는 행동이며 절대자는 아마 그런 사람에게 튼튼한 동앗줄을 내려 구원을 해 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이웃들, 지인들, 가족들에게 잘하고 살아야겠습니다. 


그런 내 주변의 고마운 이들에게 "사랑해"라는 말 한 마디를 건네면(p138), 나도 행복해지고 모두가 만족할 것 같습니다. 옆 페이지 일러스트 중 여성 얼굴에 주근깨인지 혹은 행복감의 폭발인지 무엇인가가 발그레한 색깔과 함께 가득해집니다. 부끄러운 마음도 크고 사실 좀 가벼워 보이기도 해서 쉽게는 하지 못할 말이긴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은, 말하는 사람 본인이 더 행복해지는 마법의 주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원치 않았던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쿨하게 보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보낼 때 중요한 건 내 기분이 정말로 쿨해져야 한다는 거죠. 쿨한 건 그리 가장한다고 쿨해 보이지 않고 미묘하게(혹은 대놓고) 표시가 납니다. "그래도 덕분에 하루가 설렐 수 있어서 좋았어(p160)." 말은 이렇게 합니다만 속은 속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 p161에 보면 여성의 표정은 정말로 쿨합니다. 정성껏 무엇을 싸는 중인데 아마 처음부터 그리 심각한 관계가 아니었나 봅니다. 이분 앞에서의 모습들을 보면 그리 냉정하게 뭘 못 끊어낼 것 같던데.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결코 판단할 수 없습니다. p163에는 무엇을 잃고, 혹은 잊고 편안히 잠을 자는 그 여성이 나오는데 "잃은 것은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잊은 것은 다시 찾아낼 수 없기에 나는 아직 너에게 잊히고 싶지 않다(p162)"고 합니다. 하긴 예전에 아주 나이 든 사람이 통속적으로 떠들기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건 잊혀진 여자"라고도 했죠. 그 시커먼 얼굴에 뭘 잊고 말고 할 여자나 과거에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여튼 이렇게 쿨하게 말하는 걸 보면 이 여성은 보통 심지가 굳은 분이 아닌가 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가 약한 것입니다. "시계를 보다 문득, 물을 마시다 문득, 누워 있다가 문득, 네가 자꾸 생각나서, 나는 '또' 이렇게 글을 쓴다(p186)" 예전에 본 사랑과 전쟁 시즌 2의 어느 에피소드 중 여주인공이 폰을 자꾸 들여다보는데도 연락이 안 오자 "고장났나?"고 하던 게 생각납니다. ㅎㅎ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뭔 말이든 연락을 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진짜 세상에서 제일 못할 게 뭘 기다리는 짓입니다. 


자책할 것도 아니고, 남과 나를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p214). 사실 나는 나일 뿐 하며 억지로 기운 내거나 상처를 다스리는 게 정말 처량한데, 내 기분이 그렇다고 해서 저 말이 틀린 건 또 아닙니다. 무력한 위안이긴 하나 말 자체가 그릇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너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않아도 돼." 에휴...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으나 실제로는 내가 다 떠안아야 할 짐과 책임이 너무도 많은 게 사실이죠. 


이 책 후반에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듯한 위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마치 잘못 배송된 택배처럼 이건 제 주인에게 돌려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기도 한데 여튼 중요한 건 내 감정을 잘 추스리고 쓸데없이 다운되지 않는 겁니다. 내가 날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누가 날 돌보겠습니까. p240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으나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아무도 내게 그렇게 안 해 준다면 나 자신이라도 날 소중히 챙길 줄 알아야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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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의 꿈을 찾아라 -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김종갑 지음 / 비비투(VIVI2)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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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은 변화했다. 동그란 사람에게는 세상 곳곳을 굴러다닐 수 있는 자유롭게 능력을, 별 모양으로 생긴 사람에게는 세상 곳곳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p7)"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간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고도 압축 성장의 강박에 짓눌려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생긴 틀에 맞추어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구시대적 교육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이런 획일적 교육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어서 지금껏 그 혜택도 적잖이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4차 산업혁명(p246, p9 등)을 논하는 시대이며, 더 이상 많은 아이들을 제도의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낡은 교육의 효용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교육 현장에서부터 혁명이 이뤄져야 하며, 그 혁명의 첫걸음은 학급 경영의 정상화, 소통 위주로의 전환입니다. 


"이 책은 교사 생활 30년의 기록이기도 하며... (중략) ...계층화하고 개별화한 학생들의 에피소드를 통찰할 수 있는 사회적 법칙 33가지를 통해 교사의 시선이 무엇인지, 교사의 선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전하고자 했다(p13)." 저자의 말입니다. 특히 저자는 성장기 학생들의 내면에 교사 자신이 공감해야 참된 인도, 참여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현재 저자는 교장 선생님이시지만 아직도 현장에서 담임을 맡아 아이들 하나하나와 대화하고 교감하며 참된 미래 비전을 찾아주던 시절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33가지의 원칙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대목에서 젊은 시절 저자의 열정과 설렘, 기대, 사명감 같은 게 고스란히 독자에게 다가와서 읽으면서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진심이란 본래 물리적 거리도 초월하고 지면의 한계도 넘어서는 법일까요. 


"지식은 결국 기억이다. 기억에 저장되어야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p17)" 첫 기억의 힘은 무섭습니다. 저자는 대학 시절 수강한 "현대인의 정신 건강" 수업에서 인간의 생후 18~36개월 사이의 첫 기억이라는 게 평생을 간다는 가르침을 떠올립니다. 저 역시 학교 다닐 때 많은 교양/전공 수업을 수강했었습니다만 저만큼이나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게 잘 없는데 저자께서는 참 오래도 기억하고 계시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 역시 "기억과 저장의 힘"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이 챕터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초보였을 시절 첫 수업을 할 때 J 선배 교사로부터 들었던 조언, 또 첫 수업을 마치고 나서 받았던 열렬한 칭찬 등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적인 교육 커리어를 쌓은 분조차도 "초보" 시절이라는 게 있었다는 점, 아마도 고비를 맞을 때마다 초심을 되새긴 분이기에 저 장면이 그처럼 오랜 동안 선명히 기억에 남은 게 아닐까 짐작해 봤습니다. 


앞서 젊은 초임 교사 시절의 저자에게 힘을 불어넣어준 J 선생님도 훌륭한 멘토 중 한 분입니다. p32에는 멘토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다름 아닌 저자 자신의 인생 곳곳에서 좋은 말씀을 들려 준 여러 멘토들을 회상합니다. 독자인 저는 거꾸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타인의 인생에 모범이 될 만한, 어떤 자격이 있는 분들이 이처럼 거의 매번 나타나 조언을 해 준다면, 그분 자신이 그만큼 배울 자세가 되어 있고 인격에 끌리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닐지. 도움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멘티)한테 베풀어지는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런 분이, 이번에는 다른 어린 학생들에게 좋은 멘토, 스승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베푸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사회는 이처럼 세상에 빛과 소금 구실을 하는 소수의 노력과 열정이 모이고 모여 그 생명력과 선도를 유지합니다. p35에 저자가 인용한, 김무곤 교수가 제시한 개념인 "NQ"라든가 관련 저서도 함께 찾아 보면 좋을 듯합니다. 


휼륭한 자질을 갖춘 분이라고 해도 자유로운 옷차림 등이 문제가 되어 교단을 떠나기도 하는 사례가 책에 나옵니다. 사람은 어쩌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몇 가지 문제가 소통 과정에서 흠으로 잡혀 더 이상의 커리어 발전이 어려워지기도 하나 봅니다. 저차처럼 특히 교육계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려면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 없이 다양한 미덕을 고루 갖춰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분은 스스로의 자질과 능력에 대해 뿌듯해할 만도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피터의 법칙"을 거론하며 우리들 누구나 자신이 혹시 이에 해당하지는 않는지 자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확신을 가지며, 뛰어난 사람일수록 회의를 품는다는 말을 남겼는데 저자는 p41에서 이 명언을 인용합니다. 알렉산더 포프의 "fools rush in where angels fear to tread."도 생각이 납니다. 이 말이 과연 유명하기는 한지 구글에 where angels까지면 쳐도 자동완성이 되는군요. 


교사로 봉직하다 보면 속된 말로 "진상인" 학부형 역시 얼마나 자주 만나겠습니까. 만약 독자가 현직 교사라면 p46에서 저자가 특히 이런 경우에 맞게 들려 주시는 충고를 유심히 읽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자는 말미에 빌 스완슨의 법칙도 소개하며, "나에게 비록 친절하더라도 남(이 일화에서는 웨이터)에게 지독하게 굴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아마 그 사람은 "나는 이런 웨이터 따위와는 격 자체가 다른 인간이며 지금 스완슨 당신을 나와 같은 부류로 여겨 이처럼 친절히 구는 것이니 고마운 줄 알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보내는 의도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뭐 갑작스러운 실수에 놀라고 짜증이 나서 무심결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그 본성이 드러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대체로 건전한 성장과정을 보내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이들은 저런 경우에도 여유를 보입니다. 거꾸로 이런 여유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흉내내지 못하는 거죠. 


전문계라고 하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도 있지만 이 책 p57에 나오듯 "비교적 우수한 여학생들이 입학하는" 좋은 여건의 고교도 많습니다. 저가가 교직 생활 30년차에 이 학교로 부임했을 시 그 설렘과 만족감이 그대로 표현되는 문장이 독자 입장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최고로 꼽히는 대학교 바로 근처에 위치한 어느 전문계 여고(p7에 보면 이 학교 교장 선생님의 추천사가 나옵니다)도 있는데 그 여고를 졸업하신 어떤 분이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게 살짝 생각이 나서 웃음이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여튼 여기서 저자는 수능 문제 출제 경험을 이야기하십니다. 참 대한민국 50만 수험생이 공통으로 응시하는 시험에 출제위원으로 차출된다는 건 실로 막중한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저자께서 어떤 성장기를 보냈는지, 학생 시절에 어떤 이색적인 체험을 했는지는 p96 이하에 잠깐 나옵니다.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학급 담임을 맡는 일은 곧 "경영"과도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인간 경영은 곧 올바른 교육이지만 그 뜻 말고 상점이나 기업을 경영한다고 할 때의 경영, 그 모범이 드러나는 대목도 있습니다. 군 전역 후 서울 망우동에서 만화방을 잠시 운영하신 체험을 이야기하는데, 이 만화방은 "순정 만화"에 특화된 곳이었나 봅니다. 사실 일반 만화방이면 다양한 장르가 들어가고 때로 다루기 어려운 남학생들도 찾아오므로 아무래도 말썽의 소지가 적고 어떤 컨셉, 특별히 노리는 고객 타겟에 맞춰서 내실있는 운영에 초점을 맞추는 장점이 있다고 봅니다. 이후 다시 서점, 대여점 등을 잠시 운영했는데 뭔가 경영 쪽에 확실히 적성이 있으셨던 듯합니다. 돈이 가는 길을 빤히 잘 캐치하는 분이 확실히 따로 있습니다. 여튼 이후 교편을 잡으시고 어느 학생이 "선생님! 혹시 책방 아저씨 아니에요?"라고 물어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렇게도 사람 사이의 인연이 이어지나 봅니다. 


담임 교사가 신경 써야 할 사항은 한둘이 아닙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 자주 다니는 곳에서는 교통 신호 체계에 실수는 없는지, 있다면 공무 당국과 협의하여 바로잡아야 하는 등 살펴야 할 부분이 무척 많습니다. p151에는 저자가 구의원과 협의하여 보행로 확보, CCTV 설치 등을 이뤄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역시 실무에서 난관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아이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아마 당국자 누구와의 소통에서도 잘 확인되었기에 마침내 성과가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학급 임원(학생)은 교사의 손발과도 같습니다. 손발처럼 부려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교사와 일차 소통이 잘 되어야 하고 물론 동료 학생들과도 적극적으로 교감하는 재목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만큼 예나 지금이나 학생 투표로 뽑는 게 일반적인데 어느 해에는 학급 운영이 잘 안 되어 저자 같은 분도 큰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해리의 법칙을 인용하는데, 이를 반어법(p141)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뛰어난 상급자이건 그렇지 않건, 그 아랫사람은 반드시 유능한 사람을 써야 한다는 거죠. p217에 패커드의 법칙이 나오지만 어떤 조직이건 우수한 인재를 두루 확보하고 이를 곳곳에 심어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경영인의 핵심 직분입니다. 하물며 교육자는 이런 CEO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인간 경영자인데요. 


교사는 학생들을 좋은 상급 학교에 보내고, 출세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할까요? 그러면 좋겠지만 그게 일차 사명은 아닙니다. 저가가 말하는 첫째 소명은 바로 "행복한 사람 만들기"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이 불행하면 그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마음이 지옥인데 부(富)와 지식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학생 시절 장차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쳐 준 스승은 그 학생에게 평생의 자산을 미리 무상 증여한 셈입니다. 이런 자산은 나누면 나눌수록 늘어나며 만인을 풍족하게 만듭니다. 


p230에는 도도새 이야기가 나옵니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없고 평생 편하게 먹고사는 동물은 결국 바보가 돈다는 겁니다. 사람의 인생에는 적절한 위기도 있어야 하고 이로부터 도전과 응전(토인비의 명제) 기제가 생겨 그 개체, 혹은 종 자체가 더 생존에 최적화한 지혜로운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저자는 이런 이치를 학교 경영에도 적용합니다. 


이 책의 제목을 보십시오. "코이의 꿈을 찾아라"입니다. 그 뜻이 뭔지 궁금해할 분도 있을 텐데 책 p88에 그 뜻이 나옵니다. 이 코이라는 이름을 가진 관상어는 작은 어항에 넣어 주면 8cm 정도밖에 못 자라지만 강물에서는 무려 120cm까지 성장하기도 한다는 거죠. 그 편차가 무려 1500%입니다. 아이한테 격려를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면 그 아이는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큰 인물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될성부를 싹도 미리 그 기를 죽이고 딴지를 걸면 그런 인재는 몇십 년 아까운 인생을 방황하고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교사, 스승이란 얼마나 책임이 막중하고, 또 엄청난 권능을 지니기도 한 직분이겠습니까. 작은 밀알 하나가 썩어 온 평원을 풍요롭게 하고 수많은 생령을 먹여살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며, 공동체의 앞날은 올바르고 정의로운 교육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교육이 바로서면 나라가 살고, 교육이 경색되면 나라가 썩고 기우는 건 만고 불변의 이치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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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좋은 습관 1일 1실천
이형준 지음 / 피플앤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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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좋은 습관을 들여야 그 습관이 몸에 배어 평생을 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좋은 습관이라는 게 한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당사자가 각성한다고 해도 좋은 습관을 (단 하나라도) 몸에 붙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문가(p136)가 쓴 책을 읽고 체계적으로 노력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세상 일이 그저 의욕만 갖고 척척 진행되는 게 아니니까요. 


이 책은 5주(7x5=35일) 하고도 3일 분량, 총 38일치의 매일 노력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감사, 배움, 단정함, 목표 설정, 전문성, 용기, 존중, 창조성 등 다양한 덕목들이 38일동안 함양되게끔 치밀한 설계로 독자에게 제시됩니다. 십대 청소년 혼자 읽고 실천에 옮겨도 좋겠으나 현직 고교 선생님이신 저자가 쓰신 책이니만큼 보호자가 곁에서 지켜 보고 도움을 주면서 함께 진행하면 더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단정한 외모를 꾸밀 줄 압니다. 저자께서는 "아무리 겉모습이 아니라 그 내용물이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일단 외모를 보기 마련이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결코 소홀히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옷차림은 제2의 태도"이며, 저자 자신도 청바지 같은 건 따로 준비하지 않고(입을 일이 없으므로) 잘 다린 양복만 수십 벌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양복이라 해도 꼬질꼬질하거나 꾸깃꾸깃하면 안 됩니다. 결국 칼 같이 잘 준비된 옷차림 속에, 그에 상응하는 마음도 저절로 깃들지 않겠습니까. 군대에서 (총뿐 아니라) 군복과 군화를 언제나 깨끗이 간수하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유가 있죠. 재미있게도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예를 들며 공무 중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을 유지한 그를 일종의 모범으로 제시하는데 만약에 그가 당대 실력자들 앞에서 군주의 단호한 자질을 역설하는 중 옷차림이 꾀죄죄했다면 그가 주장하는 바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을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p51에서는 <맹자>의 "고자하"편을 인용하며 "하늘이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면 반드시 그 이전에 시련을 준다"고 말합니다. 이 책 앞(p30)을 보면 "모든 reader가 leader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이라고 해서 나중에 다 어떤 큰 소임을 맡게 되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기왕 이 시련을 피할 수 없다면, 이 고비를 자양분으로 삼아 나중에 큰 과업에 도전하면 어떨까? 라며 스스로에게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으면 또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꼭 어떤 출세를 해야 인생이 보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건 그 자체로 위대한 여정이며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남 보기에도 언제나 좋기 마련입니다. 


호기심(p18)은 지적 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책에서는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인용되는데 역으로 생각하면 호기심이 없는 고양이는 벌써 (아홉 개나 되던)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책을 쓸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던 저자였지만 지금은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여 독자들과 소통하는 전문가(p30)로서 많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기까지 합니다. 호기심 때문에 죽을까 두려워하는 고양이에게는 인생의 발전도 기대하기 힘든 것입니다. 


특히나 요즘은 소셜미디어가 발달하여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공감을 나눌 줄 아는지의 자질도 무척 중요합니다. 저자는 네 번의 큰 수술을 받은 경험담을 말하는데 이런 수술을 통해 큰 고비를 넘기고 나면 나를 치료해 준 의사, 간호사, 심지어 보험회사 등의 다른 행위주체나 조직도 다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인다고까지 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사회적 동물이며 제아무리 잘난 사람도 혼자 고립된 생활을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는 없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라고 해도 그 지식과 기술은 사회에서 다른 이들에과 함께 지내면서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배운 것입니다. 


요즘은 책들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논쟁에서 타인을 이기려 들지 말라." 논리로 상대를 제압해 봐야 그 패배한 사람은 승자에게 경외심을 갖는 게 아니라 오히려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려 듭니다. 어떤 바보는 논리도 뭣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목소리만 높여 상황을 망치고는 자신이 논리에서 이겼다고 착각에까지 빠집니다. 애초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인간의 머리 안에 무슨 참된 지식과 논리가 자리했겠습니까. 똑똑해서 남을 제압하는 것도 원한을 사기 일쑤인데 하물며 똑똑하지도 못한 사람이 우격다짐과 폭력으로 상대의 인격을 모욕했다면 그 사람은 아마 밤길을 무사히 다니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멍청이는 머리 위에 재앙이 떨어지기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혼자서 태평을 즐깁니다. 


"경제가 불확실할 때는 많은 사람이 전문가를 자처한다.(p120)"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스운 건 어디 이상한 사이트에서 근거도 없이 떠들어 놓은 걸 절대진리로 믿고 함부로 퍼뜨리는 짓거리입니다. 무슨 앞바다에 보물선이 침몰했는데 이걸 인양하면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더라, 미국인들이 갑자기 서울에 자금을 몰고와 투기를 하는 바람에 집값이 폭등했다더라... 근거를 하나하나 따지며 분석하면 아무 타당성도 못 갖춘 그야말로 유언비어 가짜뉴스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걸 퍼뜨립니다. 형사처벌을 받고 감옥에 가 봐야 정신을 차릴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목표를 애초에 설정 못하고 사는 인간들이 이런 한심한 짓을 저지르고 뒤늦게서야 후회하기 마련이죠.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성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엄연히 사회적 동물이니만치 소통과 교류가 없으면 도태되기나 좋지만, 반대로 너무 싸다니기만 하고 나를 차분히 성찰할 시간을 갖지 않으면 이 또한 껍데기만 남은 인생이 되기 쉽죠. 왜 수양이 부족한 인간은 도박에 빠질까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애초에 무엇인가에 중독되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감옥에라도 갇혀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이전에는 떠오르지 않던 여러 상념과 조우하여 참된 자신의 모습이 보일 날이 올 것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둔재를 못 이긴다고도 합니다. 다빈치의 창의성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물론 그가 타고난 재능에도 크게 기인하겠지만 그 역시 꾸준히 노력하는 유형이었습니다. 노력 없이는 그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빈치가 아니었겠으며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널리 인정 받은 위인도 아니었을 겁니다. 꾸준한 노력은 기록과 함께 간다는 점 새겨야 하겠습니다. 꾸준히 노력하면 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어떤 이치도 비로소 확신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 이런 걸 가리켜 통찰이라고 합니다. 


휼륭한 사람은 타인에게 너그럽고(p23) 유머(p55)를 잃지 않습니다. 책에서는 맹상군의 식객이었던 풍환의 고사를 소개합니다. 맹상군이 비록 현명했다고는 하나 구중궁궐에서만 나고 자란 신분이었던 만큼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풍속을 낱낱이 알기에는 부족했을 겁니다. 맹상군이 진정 뛰어났던 점은 일견 불편하게 들리는 풍환의 고언과 충고를 진심으로 수용하고 이해했던 데 있습니다. 유머 안에는 그저 해학만 있는 게 아니라 웅변가 카토를 순식간에, 별 노력 없이도 바보로 만들어 자신의 곤경을 탈출한 카이사르 같은 이의 책략도 있습니다. 경세인들의 이런 자질이 어디 하루아침에 갖춰지겠습니까?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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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토템과 터부 미래지식 인문 고전 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원당희 옮김 / 미래지식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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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중에 자주 인용되는, <황금가지>를 쓴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경도 그렇고 프로이트 역시 "미개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요즘처럼 PC에 의한 규제가 일상화된 풍조에서는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언어 사용이지만, 거꾸로 독자인 저는 "그들"과 문명인이라 자처하는 우리들 사이에 (알고 보니) 별 차이가 없더라는 역설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토템과 터부는 비교적 근세의 역사 중에도 의외로 그 흔적이 흔하게 발견되며, 특정 역사의 국면에서 잘 이해가 안 되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태도에 이 프로이트적 개념을 적용하면 의외로 그 해석이 쉬운 경우가 많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 새삼 깨닫게 돠었습니다. 이런저런 문명의 더께가 덧씌워져 쉽사리 눈에 안 띄었을 뿐, 여전히 우리의 행동과 사고는 이성과 세련된 관습보다는 이런토템과 터부에 의해 좌우되는 면이 많았다고나 할지.


p41을 보면 "터부"는 그 의미가 상반되는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하나는 "신성함",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금지된, 부정(不淨)한" 등입니다. 이런 걸 두고 contranym이라 부를 수도 있겠는데, 중세 로마 가톨릭 교황이 행했던 sanction은 특별 허가와 금지의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오늘날도 국가 원수 등이 많이 변형되긴 했으나 이런 조치를 행합니다). 영어에서 cleave 같은 단어도 "갈라지다"와 "들러붙다" 두 가지 뜻을 다 갖습니다. 


정언명령(p48. 독일어로 카테고리셔 임페라티프)는 임마누엘 칸트가 정교히 정립한 개념으로서 본디는 어떤 조건이 붙지 않는 무조건적인 당위를 가리킵니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 부모에게 효도하라 등은 어떤 정당화 근거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가장 원초적인 규범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따지는 게 하나의 습성이며, 따라서 의외로 이런 아득한 상위 규범조차 순수하고 엄격한 "정언명령"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바로 터부를 두고 정언명령이라 규정하는데 어쩌면 기막히게 맞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예컨대 근친상간 같은 것에 대해 "왜 하면 안 되는 거지?"라 의문을 갖지 않고 곧바로 극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절대적인 금지의 범주에 넣습니다. 효도보다도 더 즉각적인, 절대적인 규범성이 부여되는 게 근친상간 금지입니다. 이걸 의심하는 자는 규범의 근원을 파헤치는 혁신가가 아니라 "좀 모자라거나 대단히 잘못된 인간"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터부의 설정은 윤리적인 각성이나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한 요구 같은 게 아니라, "악마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p49)"이라는 더 근원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p33을 보면 나일 강 상류에 거주하는 바소가 족은 심지어 가축의 근친상간에까지 벌을 가한다고 합니다. 중국이나 한국 등 동아시아도 동성동본이라는 아주 광범위한 집단(거의 혈족이라고도 할 수 없는)에까지 통혼 금지 의무를 부여하는데 프로이트는 여러 원시 부족(일단 이 말을 그대로 쓰겠습니다)들이 심지어 같은 토템을 쓰는 범위 안에서도 혼인을 금지하는 풍속에 주목합니다. 독자인 제 눈에는 이게 매우 닮았습니다. 아마 프로이트가 생전에 이 관습을 봤다면 비슷한 결론을 내었을 텐데 우리는 오히려 광범위한 통혼 금지 터부를 무시하는 프로이트 같은 이를 미개인, 파렴치한, 금수 정도로 단죄했을 겁니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규범에 대해 이성과 강도가 약한 감정을 통해 "하지 말아야지! 지켜야지!"하고 다짐할수는 있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어떤 신경증적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물론 사람에 따라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터부 사항은 일종의 강박신경증(츠방노이로제. p55)를 유발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떤 종류의 근친상간에 대한 상념은 이를 떠올리기만 해도 무척 마음이 괴로워질 것입니다. 아직 감정이나 생각이 무르익지 않은 청소년기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강박적 금지(츠방페어보트. p54)는 엄청난 전이가능성이 그 고유한 특징이다." 이는 예를 들어 소위 문명사회의, 프로이트 박사를 찾아온 여성환자들(과 그 지인들) 사이에서나, 마오리 족 사회에서나 거의 같은 패턴을 드러냅니다. 이를 신경증으로 규정하고 안 하고의 의의는, 저 뒤 p113에도 나오듯 그 해결책을 "(환자의) 현실 탈출"에서 찾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의사였으니. 


"터부의 원시적 초기에는 신성한 것(하일리히)과 부정한 것(운라인)을 구별하지 않았다(p51)" 이런 성격을 두고 프로이트는 p68에서 "양가성(암비발렌츠. 영어에서도 비슷한 발음이고 철자입니다)"이란 말을 씁니다(저 뒤 p105에도 다시 강조됩니다). 신경증이나 터부나 그 핵심 증상은 "접촉금지"라고 하며(p53), 만약 터부를 범한 자가 있다면 이제는 그 자신이 터부가 된다(p44, p60)고 합니다. 접촉공포라는 말은 저 뒤 p112에도 나옵니다. 중근세에는 예를 들어 보댕 같은 이가 왕권신수설을 논했는데... 프로이트는 논하기를 왕은 그저 권력과 무력, 권위 등을 가져 무서운 게 아니라 저 원시 부족들이 족장에게 있다고 여가는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힘과 거의 차이가 없는 무엇을 지녔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왕권 신수설"은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한 셈입니다. 책에서 프로이트는 잉글랜드의 찰스 1세 같은 비교적 가까운 시기(1633)의 왕도 백 명에 가까운 환자를 치유하는 의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고대의 샤먼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구분이 안 되는 셈인데 비슷한 시기 조선의 광해군이나 인조한테 가서 병을 낫워 달라고 청하는 백성이 있었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런 왕을 향해서도 저 터부의 본질 중 하나인 "양가성"은 여전히 남습니다. 책 p76 같은 곳을 보면 "오늘은 신으로 존경을 받다가 내일이면 범죄자가 되어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나곤 하는 지배자"란 구절이 있습니다. 러디야드 키플링의 장편 <왕이 되려던 사나이>를 보면 일단 여인에게 물려 피를 흘리는 망신을 겪은 대니얼 드래봇(한때 시칸더[알렉산더 대왕]의 후예인 신으로 여겨진)을 카피리스탄인들이 무참히 처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신화 속에서도 영웅은 그 상승기에 찬란히 부상하다가 몰락기에는 이루말할 수 없이 비참해지며 오르페우스 같은 이도 죽을 때 광신여성들에게 갈갈이 찢겨 죽었습니다. 터부는 이처럼 신성하면서도 한없이 더러운 건데 우리 나라 무당들도 급할 때는 민중들이 가서 의지하면서도 평상시에는 천민 취급받은 걸 떠올려 보십시오. "종족의 구성원들은 이런 지배자를 경계하고 때로 지켜야만 한다(p48)." 그런데 각주(역주)를 보면 영어 번역문과는 강조의 포인트("지킴"보다는 "경계")가 조금 다른 듯합니다. 


프레지어 경은 그래서 "본래 사제를 겸하던 왕권이 종교와 세속 권력으로 나뉘어진 게, 각종 터부와 신성의 부담에 짓눌리던 왕들이 피치 못해 내린 결단(p80)"으로 해석합니다. 프랑스 왕, 신성 로마 황제 등도 교황에게 굴욕을 주고 종속시킬망정 자신이 그 역을 겸하지는 않았던 것도 현실적인 어려움 외에 이런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었겠죠. 지배자에 대한 감정적 태도가 이처럼 격렬한 무의식적 적의 요소를 포함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프로이트는 말하지만(p85) 이미 그는 다른 저작에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적의와 증오 등에 대해 자세히 논한 바 있습니다. 이걸 유추하면 이 역시 설명 안 될 바가 없습니다. 그의 천재성과 전례 없는 혁신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죠. p193에서는 "토템(동물)의 아버지 대체"도 언급됩니다. 


투사(投射. 프로옉치온. p98)는 어떤 고통을 전위(p109. 페어쉬붕)하거나 주체의 느낌을 대상으로 옮기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경영학에서도 인적자원관리이론 등에서 자주 다루는데 이처럼 본디 심리학 개념이죠. "살아남은 사람은 사랑하는 고인에게 적의를 품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고인의 영혼은 적의를 품고 애도 기간에 걸쳐 적의를 행사하려고 한다(p98)." 시에라리온의 티메 족은 선출된 왕에 대해 대관식 하루 전날에 매질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는 말도 p83에 나옵니다. 


p127에는 감염주술(콘타글뢰제 마기에)이란 말이 나옵니다. 주술의 핵심은 자연 법칙(때로 의학 법칙)을 심리학의 법칙으로 대치한다는 오해(p128)를 연상이론은 설명하지 못한다고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애니미즘의 핵심 원리는 '생각의 만능(알마흐트 데어 게당켄)'"이라 요약합니다(p131). 뭔가 맞는 듯하면서도 그 자신이 호되게 비판했던 이론에 대한 완전한 극복 지양에는 못 미치지 않냐는 게 문외한인 저의 소박한 느낌입니다. "생각의 만능"은 지적인 나르시시즘(p136)이란 표현도 있네요. 


3부의 마지막에서 애니미즘의 체계와 꿈생각, 꿈작업, 의미 등에 논한 후 프로이트는 4부에서 이상의 논의를 토테미즘과 대대적으로 결합합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토템과..."인지 본격적으로 보여 주려는 듯 말입니다. 그는 기존 인류학의 성과를 매우 능숙하게 요약한 후, 협동주술 등 인류학 개념과 동물공포증, 야경 등의 의학적 개념을 화려한 언변으로 결합합니다. 죄의식은 자발적 금지, 사후 복종(p207)에 의해 치유되려 합니다. 아버지 중심의 부족은 혈연을 통해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형제 부족으로 대체됩니다(p211). "신은 그의 본질에 포함된 동물적인 부분을 극복한다는 뜻(p216)"에 이르면 왜 이 논의를 구태여 토템으로부터 끄집어내었는지 그의 의도가 최종적으로 확인됩니다. 유익하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그 논의 구조가 아름답기까지 한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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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나를 위해 - 누군가를 위한 인생 40년. 오늘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한 걸음 더
김동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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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분은 1946년생으로 거의 한평생을 포철(현 포스코)에 봉직하고 은퇴한 분입니다. 일생을 두고 조직과 가족들만을 위한 삶을 살았으나 이제는 잠시 숨을 돌려 "나 자신을 위한 삶"도 맛보고 싶다는 게 책 제목의 취지인 듯합니다. 


"세상에는 논리를 따져봐야 소용없는 것들이 있다(p36)." 저자께서는 광주 출신 지인들과 함께 산행 끝자락에 항상 들르는 식당이 있는데, 그 식당의 위치가 구 광산면(현재는 자치구인 광산구) 오치면과 비슷하다 하여 식당을 오치, 주인분을 오치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맥락이 없고(p114) 논리도 없는 편의적인 명명이라 하시는데 본래 세상 모든 별명이 다 그렇죠. 이것은 별칭 통칭의 맥락이요 논리가 오히려 맞습니다. 다만 식당 사장님의 의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인 게 마음에 좀 걸리시긴 하나 봅니다. 많이 팔아주시면 된 거죠. 재미있는 건 그 사장님의 응대입니다. 고향이 수시로 바뀌는데 부산도 되고 대전도 된다고 합니다. 융통성이 그 호적상 팩트에 얽매이지 않으니 오히려 더 좋습니다. 


지리산에는 화엄사라는 명찰이 있죠. 그 각황전(p23) 앞에도 오래된 한 분이 있고, 순천 선암사에도 수령이 600 넘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신선"이라든가 "이분"으로 칭합니다. 역사가 오랜 한반도 곳곳에는 이처럼 수백 년 단위를 어렵지 않게 넘기는 수목들이 많습니다. 벚꽃을 보고 봄의 절정을 알고, 매화를 보며 봄의 시작을 안다... 구태여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매화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는 고르는 사람의 가치관, 인생관의 투영일 수 있는데 내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만인의 앞에 서고 싶은 이들은 벚꽃을 고를 수 있겠죠. 저자는 오랜 동안 기업에서 근무한 분인데 난데없이 기자가 되어 저 매화로부터 인터뷰를 따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집 근처에 양재천(p57)이 있다 하니 대략 어디 사시는지 알 만합니다. 산책은 발바닥으로 하는 것이다, 발바닥이 지면에 착착 닿아야 그 피로, 스트레스, 고뇌가 몸에서 땅으로 다 빠져나간다... 의학적 근거는 없다 하시나 당사자가 그리 믿으면 그때부터 의학적 근거가 생기는 법이죠. 이렇게 착착 발을 내디디면 몸의 나쁜 기운이 다 떨어져 나간다! 그리 믿으면 그리 되는 것입니다. "팔을 직각으로 꺾어 하늘을 찌르면서 다가오는 아가씨가 나를 보고 웃는다.(p58)"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어폰으로 누구와 대화를 하는(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외계의 누군가와 교신을 하는) 중이었던 겁니다. 세상은 참 그 내막을 모르면 자기 편할 대로 오해를 할 만한 여러 착각의 신호들로 가득합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개체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늑대 같은 동물은 집단의 다른 성원이 보내는 의사표시를 못 알아듣는 순간이 바로 죽음을 뜻합니다. 


"그때도 번화가이긴 했지만 지금은 복합적 상업지역으로 천지가 개벽한 듯 바뀌었다.(p60)." 홍콩 중심의 중환(中環)을 이름인데 저자는 30년 전부터 이곳에 파견되어 업무를 맡았다고 회고합니다. 울릉도 도동해안 산책로, 저곳 홍콩의 중환, 올림픽 공원, 경복궁 등이 저자가 즐겨 찾는 산책로라고 하네요. "다리뿐 아니라 생각도 함께 걷는다." 생각이 어딘가를 거닐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산책이겠습니다. 반대로 걸음은 물리적으로 어딘가를 걸으나 생각이 어딘가에 묶여 있다면 그게 적어도 산책은 아닙니다. p155에도 나오듯 따님은 아예 홍콩이 그 삶의 터전입니다. 


"니싱푸마(伱幸福嗎)?"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데, 비록 회사에 바친 보람된 한평생이었지만 저자더러 북경 징산(景山.경산)공원의 인파가 "선생은 행복한가?"라 물으면 대답이 "스(是.시)"라고 바로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고백(p94)합니다. 남의 시선이 두렵지 않은 저들이 부럽다고 합니다. 소셜 미디어에 이런저런 글을 올리면 평소에 쌓아온 진중한 이미지가 무너지지 않을까 두렵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연배쯤 되는 분들이 가장 신경 쓰는 대목이 여기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답은 누구나 잘 아는 바입니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요. 자금성을 내려다보며 그는 말합니다. 지금 내 인생 자체가 바로 횡재(橫財)이며 황제(皇帝)이다."


"단순화, 획일화, 편리함이 발전이고 개선이라고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았다(p113)." 소처럼 일만 하며 살아온 게 자랑이었는데 프랑스에서 그런 자신만의 긍지가 한없이 작아졌다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산업화, 근대화 모두 프랑스가 멀찌감치 앞선 나라인데도 여전히 남은 시골 마을은 우리보다 더 전통적이고,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모두 잃은 인간다움, 파격, 자연스러움, 여유 등은 그들이 고스란히 또 간직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유행가 가사 "모모는 철부지"를 읊조리며 어떤 인생이든 빠져서는 안 될 고갱이가 바로 사랑임을 깨닫는 저자입니다. 


프랑스 등 외국뿐 아니라 이곳 좁은 반도, 그 중에서도 남반부지만 풍광이 다채롭고 사람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사로잡는 고장이 많습니다. 책에는 울릉도에 들러 찍은 여러 사진들이 실려 있습니다. 나리분지, 편지, 외로움 등이 여정의 키워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착각하며 예사로 넘기지만 실은 전혀 알지 못하던 여러 대상들에 대해 생각과 느낌을 다시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집안 정원 등을 꾸밀 때 선장후로, 즉 먼저 감추고 서서히 드러내는 억경(抑景)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 풍경을 주변에서 빌려와 이를 자연스럽게 꾸미는 방법을 쓰는데 이걸 차경(借景)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저자는 호암미술관의 조경을 언급하며 나는 과연 주위를 끌어안으며 살아왔는지 먼저 돌아볼 것을 충고하는 듯도 합니다. "뒤돌아보니 우리는 어느덧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p174)." "이 영감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p212)" 진심으로 시도하는 소통, 혹은 인생은 표현 방법에 무관하게 결국은 공감과 동의를 얻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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