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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의 발톱, 캐나다에 침투한 중국 공산당 ㅣ 미디어워치 세계 자유·보수의 소리 총서 4
조너선 맨소프 지음, 김동규 옮김 / 미디어워치 / 2021년 9월
평점 :
중국은 21세기에 접어들며 이른바 "대국굴기"의 기치를 내세우고 세계 곳곳에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움직임을 펴 왔습니다. 물론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는 노력은 어느 나라나 하는 것이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심지어 한국 같은 중진국도 그 능력 범위 안에서 얼마든지 펼쳐 왔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그 방향성이 대단히 공격적이거나 심지어 약탈적이기까지 했고, 상대국의 이해를 심각히 침해하는 결과도 빈발했기에 여러 이유에서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원래는 이 정도로까지 주목을 받지는 않았으나, 최근 몇 년 들어 심각하게 외교 마찰까지 빚어지는 단계까지 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런 책들도 다양한 저자들로부터 저술되곤 하는 것입니다.

"시 주석은, 2차 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핵심이 되어 온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p27)." 물론 이는 이 책 저자의 주장이며, 독자인 저는 개인적으로 시 주석이 여태 그런 분명한 워딩으로 "인권에 관심이 없다"고 한 적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2015년 필리핀과의 영토 분쟁 당시 헤이그의 국제 재판소에서 내려진 판결을 두고 중국 정부가 낸 성명은 명백히 국제 질서의 근간을 부정하는 표현으로 가득했습니다. 또 위구르, 티벳 등지에서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도 논점을 흐리거나 박약한 근거만을 들어 파렴치한 변명을 일삼는 태도 등으로 볼 때 저자의 저런 주장, 평가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면이 있죠.
전(前) 대통령 트럼프가 화웨이에 대해 제재를 내릴 때, 평소에는 미국과 일정 부분 대립각을 세워 온 캐나다 정부와 그 총리가 유독 이 사안에 대해서는 멍완저우를 구금하는 등 즉각 보조를 맞추기도 했습니다. 이는 캐나다 정부가 종래 반중 스탠스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간 중국이 보여 온 행보에 대해 드디어 우려 섞인 반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캐나다에는 중국계가 많이 살며, 이들은 그간 거침없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해 왔기 때문에 과연 인종차별의 실태가 북미에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물론 존재하지만).

파룬궁 같은 경우 우리 나라에서도 서울, 경기 외곽 등에서 그 옹호자들이 전단지도 나눠 주고 비교적 활발히 움직이는 편입니다. 이들의 움직임이 역사가 오래된 만큼 중국 정부측의 대응도 뚜렷한데, 책에서는 이를 두고 "(중국 정부의) 혐오 선전(p55)"이라 규정합니다.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이미 2003년 사스(급성 호흡기 증후군) 유행 당시부터 중국 정부가 특히 캐나다 같은 곳에서 아주 열심히, 소송 같은 적극적 조치도 불사하며 파룬궁에 대응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은 저 즈음만 해도 중국에 대한 이미지기 그리 나쁘지 않았고 젊은이들이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등 미래를 좌우할 강대국으로 존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개신교) 분포를 보면 개화기에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등에서 온 선교사들의 활동 여부에 따라 현재의 교파 정착이 이뤄진 흔적이 뚜렷하죠. 이 책에서는 예컨대 p105 같은 곳에서 "캐나다 국민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 선교사의 아이들이 만들어낸 것이었으며..."라는 구절을 통해 기독교 선교 활동이 이 나라의 가치관과 정체성 형성에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설명합니다. 캐나다는 또한 프랑스계 주민들의 지분도 매우 높은 나라이므로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도 아직은 무시 못합니다. 책의 이 파트에서는 20세기 전반, 즉 아직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기 전에 캐나다의 선교사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또 당시의 중화민국 정부와 서양 여러 나라가 어떤 관계였는지도 제법 자세히 조망합니다. 이 책의 가치는 이처럼 현재의 상황을 지난 역사에 비추어 입체적 맥락에서 들여다보는 데에도 넉넉히 있다고 하겠습니다.

미국 등 북미에도 좌파 성향의 개인, 단체는 언제나 있었고 그 뿌리도 깊습니다. 냉전 시대에도 이들은 대중에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했었으며 이 책에서는 체스터 로닝 같은 좌파 포퓰리스트(책의 표현입니다)에 대해 그와 저우언라이(주은래)와의 관계까지 거론하며 자세히 설명합니다. 선교사라고 해서 언제나 우파 스탠스이리라는 짐작이 어느 정도 큰 오류를 낳을 수 있는지도 잘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이 사람은 캐나다가 중국을 1970년대에 승인하는 데 유의미한 기여를 했다는 게 책의 평가이며, 그저 미국의 키신저와 닉슨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받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베트남 전쟁은 해당 국가의 운명을 크게 바꾸었을 뿐 아니라 미국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의 세대간 대립을 격렬히 부르는 역할도 했습니다. 빌 클린턴 부부로 대변되는 특정 세대는 이후 미국 정치가 좌성향으로 선회하는 주체 노릇이었으며 프랑스의 이른바 68세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5장의 제목은 "중국이 미국의 뒷마당에 만들어 놓은 친구"인데, 그동안 미국의 뒷마당이라면 쿠바 등 중남미 국가들만 생각했고 캐나다는 오랜 동안 영국의 주권이 미쳐 온, 어찌보면 미국보다도 더 서구적인 나라로 여겨 왔으나 이 책은 중국이 오랜 동안 이 나라에 공을 들여 왔다는 걸 설명하고자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자의 관점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캐나다는 지금(1986년 당시) 중국이라는 환상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중국과 대화를 많이 나눠도, 중국이 캐나다를 (자신과 같은) 대국으로 인정해 주지는 않는다. 중국은 소련, 동유럽 국가들과 더 닮은 나라이며, 폐쇄된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들 특유의 이기주의, 자기중심성을 노출한다. 게다가 이 나라는 제국으로 군림해 온 오랜 과거 역사를 들먹이며 극단적인 우월감을 표현한다.(p212)" 이게 1986년 당시 주중 캐나다 대사의 보고 문건 중에 나오는 문장들인데 오늘날 우리가 중국에 대해 갖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간만에 문호를 개방하고 세계를 맞이했던 과거의 대국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 반가움 등도 우리가 한때 지녔던 느낌과 비슷합니다. 배울 점도 많고 새롭게 사귀게 된, 장래가 유망해 보이는 친구에 대한 급작스러운 실망감(을 넘어 공포감)이라는 게 캐나다와 우리가 닮았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캐나다에는 중국계가 많이 삽니다. 한국은 본래 화교의 불모지에 가까웠고 몇 안 되는 화교들도 사실상 한국인과 별 차이가 없을 만큼 완벽히 동화되었었으나 최근 조선족의 대거 이주 때문에 상황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여튼 중국계가 많이 사는 이유 때문에 캐나다에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언론 매체가 발달해 있으며, 이런 기관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은 마치 몇 해 전 홍콩의 저널리스트들이 경험한 것과 유사한 곤경을 츠치르는 중이라고 합니다. 사실 책의 이런 대목뿐 아니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여러 명이 있습니다)에서 발표하는 성명 같은 것을 보면, 정말 외교관의 처신이 맞는지가 의심스러울 만큼 원색적이고 무례한 언사들이 많습니다.
11장에서는 특히 화웨이가 그간 캐나다의 지적재산권을 어떻게 약탈해 왔는지를 자세히 분석합니다.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실상만으로도, 중국 기업(을 가장한 정부의 에이전시)들의 기술 침해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 수 있는데 사실 이게 남의 이야기하듯 할 게 아닙니다. 당장 한국만 해도 중국에게 핵심 기술을 탈탈 털려 바로 경쟁력을 잃는 경우가 많고, 이처럼 명백한 불법이 있는데도 "원래 중국이 한국을 추월하게 되어 있었지" 같은, 체념인지 자포자기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태도로 현실을 회피하려는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중국이 과거에 얼마나 위대했건 관계 없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자존과 생명을 지키고 번영을 이어가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처럼 사대주의에 흠뻑 젖어 간도 쓸개도 다 내어 주는 게 약소국으로서의 분수를 지키고 전통을 따라 효도(?)하는 길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