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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이라는 함정 - 리더는 당신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라이너 한크 지음, 장윤경 옮김 / 시원북스 / 2021년 12월
평점 :
절판
"리더는 당신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책 앞표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전근대적인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어이없는 자칭 참칭 리더들이 많습니다. 그 리더가 조직의 성과를 그런 식으로 보장이라도 하면, 강요하지 않아도 부하직원들이 알아서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그렇지도 못하면서 리더랍시고 온갖 불합리한 지시를 남발하고 인격적 종속을 요구한다면 그런 조직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제는 내가 리더나 그 비슷한 자리에 올랐을 때, 하위 랭크에 대고 함부로 충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됩니다. 직원들이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조직의 성과를 올바르게 내려면 그런 방식은 당연 지양해야 하니 말입니다.
확실히 독일 책이라서인지 다른 책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채로운 사례나 교훈이 많이 인용되어서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독일 특유의 어려운 말투로 내용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며, 초등학생 정도만 되어도 쉽게 읽어나갈 수 있는 포맷입니다. p28에는 미국 예일대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의 사례가 나오는데(이름은 그리스식이네요) 여기서 이 교수님은 "진화의 우울한 현상"이라는 원리를 도출해 냅니다. 집단끼리는 동질감을 갖고 더 큰 호의를 베풀며, 그 집단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차별"이라는 원칙(?)으로 대응한다는 겁니다. 재미있는 건 내(內)집단에 속한다 아니다를 가르는 기준이 매우 자의적이고 허술하며 유치할 수도 있다는 점이네요. "우리는 다른 집단에 속한 일원보다 고유의 집단에 속한 구성원을 기꺼이 도와 준다." 저자는 이런 본성과 경향성을 두고 "마치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잘 알려진 "던바의 숫자"를 거론하며, 제아무리 잘 작동하는, 또 내적인 인화를 자랑하는 집단이라고 해도 구성원이 150인을 넘어가기는 힘들다고도 합니다. 이 수를 넘어가면 "충성도 연대도 해를 입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저 숫자만 많다고 어느 집단의 무한확장을 도모할 수는 없고 임계치를 넘으면 역효과가 나는 셈입니다. 집단도 그러하고 한 개인이 자기 중심으로 구축하는 네트워크의 효율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

작가 미하엘 클리베르크는 "지키려는 소수 정체성과 바뀌려는 다수 정체성이 서로 만나는 건, 이민국 내 상호 통합에 결코 좋은 전제조건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고 합니다(p40). "혐오"라고까지 단정지을 수는 없어도 논란을 부를 만한 소지는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저자는 "독일 대학에서 이야기를 하려면 진보 보편주의를 믿는다고 고백을 해야 하니까" 이후 문학상은 클리베르크에게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명백한 헤이트 스피치가 아닌 이상 이 정도 발언의 자유는 개인에게 주어져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해서 씁쓸한 구석이 있네요. "용납될지는 모르나, 원하는 의견은 아니었다." 결국 원하지 않는 의견은 용납되지도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한국이라면 혹 부모의 교육 수준, 경제적 계급이 낮더라도 그 자녀가 이를 극복하여 상위 랭크로 올라서려는 노력이 집요할 것이며 "내가 열심히 하면 그건 부모의 계급을 배반하는 거야" 같은 생각은 아무도, 정말 아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ㅎㅎ 그런데 독일은 사정이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이른바 "사회적 상승 의지의 결핍"은 한국에서는 절대 찾아보기 쉽지 않으며, 교육이나 경제 활동을 통해 가열차게 신분 상승을 노리는 건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 특징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저자는 이런 분석틀을 통해 독일에서 발생하는 계급 배반 회피 현상, 혹은 그 반대 현상의 원인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충성"이라는 개념이 이렇게까지 확장되어 적용된다는 게 너무도 재미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엄청난 충격을 안긴 폭스바겐의 배기량 조작 스캔들, 이른바 디젤게이트에 대해 저자는 독일 사회를 암울하게 짓누르는 "충성"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접근합니다. 한국인들도 벤o, 또 저 폭o바겐이라고 하면 거의 무한에 가까운 브랜드 신뢰도가 엄연히 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한층 컸었습니다. "규칙 위반의 도덕화는 무의미하며 틀림없이 위선과 가식으로 이어진다." 슈테판 퀼의 주장(p87)입니다. 독일인들은 특히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므로, 그 특유의 정직함과 직업 정신에도 불구하고 저런 대형 사고가 터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라면 설령 비슷한 스캔들이 터져도 그 동기가 저런 쪽은 아닐 것입니다. 여튼 그래서 저자는 챕터 3에서 "내부 고발자"의 중요성과 의의에 대해 길게 논의합니다. "'탐욕스러운 기관'의 위험성을 항상 잊지 말자(p105)." 이어서 그 유명한, 백 년 전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회고도 나옵니다.
"소속감은 집단 자아(그루펜 이히)를 만들어 공동의 씨족 양심을 형성한다(p141)" "충성은 호혜를 기초로 하며 따라서 집단에 대한 충성을 보답을 받는다. 보답이 없는 타 집단에는 그럴 의무가 없으며 오히려 공격으로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이어 (역사적) 독일 공산주의자에 대한 비판도 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보다도 공산주의를 더욱 확실히 믿었다" 이런 병리현상이 극에 치달으면 배타적 패륜적 파괴적 진영논리로 바뀌며, 진영의 이익이 인간 본연의 양심이나 도덕률에 우선한다고 대중 앞에서 당당히도 털어 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구호는 신체적 무아경과 관련된, 군중 속 몸의 언어행위라 할 수 있다(p158)." 재미있게도, 저자는 배교자(널리, 배신자라고 할 수 있는)에 대해 가혹한 제재를 가하는 예시로 두 집단을 드는데 하나는 크리스트교요 다른 하나는 이탈리안 마피아입니다.
"민주주의 찬양은 과도한 걸까? 싱가포르 같은 권위주의 체제도 코로나 위기를 잘 헤쳐나가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짓 폭포가 다수에게 무제한으로 흐르도록 자유로운 길을 허락하는, 포퓰리즘적 입헌 민주주의 법치국가들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p229)." 이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거짓 폭포나 포퓰리즘이 좋다는 게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키는, 굴종의 독과 순응의 덫을 해체하는 "불충의 영웅"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자유롭고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머물자! 당신 자신이 되자!(p240)"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게 인간 조건의 본연입니다. 이걸 부정당하거나 스스로 부정하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