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끝 소설 르네상스 12
한수산 지음 / 책세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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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프 25기 7주차에 이 작가님의 <아프리카여 안녕>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한수산 작가는 알려진 대로 197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소설가였고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아프리카여 안녕>은 젊은이, 20대 초반 정도, 아직 정신적으로 십대 티를 못 벗은 청춘들의 성장통을 다뤘는데 그 느낌은 시대의 한계가 있어서인지 매우 미숙해 보였다고 그 독후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책은 한수산 작가의 단편집이지만 어떻게 된 게 지금 와서는 단편집 자체로 주목받는다기보다 "<대설부>라는 작품이 실린 책"이란 의의가 더 큽니다. 그만큼, 옛 독서인들한테서도 지금까지 안 잊히는 작품이 바로 <대설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죠. 


지금 이 작품 <대설부>는 한수산 작가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역시 시대가 많이 지났다 보니 그런 느낌을 아주 지울 수는 없으나, 적어도 왜 당시에 이분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상당 부분 해소해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사는 젊은 세대 특유의 감각과 고민, 발랄함이 물씬 묻어나며, 그런 한편 장래에 대한 불안감, 이 젊음이 지나가면 설움을 어찌 달랠까 하는 애상이 잘 풍깁니다. 물론 요즘 MZ 세대는 재테크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느라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한수산 작품이 거의 언제나 그렇듯 현실에 대한 감각이 흐릿하며 특유의 이상주의자 같은 기질로 여자가 잘 따르는 타입입니다(요즘 같으면 모쏠 되기 딱 좋은 조건). 이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연극에 심취해 계신 분인데 그야말로 돈안되는 것만 골라가며 몰두한다고나 하겠습니다. 주인공의 본업은 화학공학도이며 교수도 그의 장래를 유망하게 보고 지원도 해 주건만 저모양입니다. 이유는 어려서부터 무척 따르던 형이 주어서입니다.


어느날 주인공은 형의 방을 노크도 없이 찾았다가 <PLAYBOY>로고가 선명히 새겨진 알록달록한 잡지를 보고 있는 형을 당혹스럽게도 목도하게 됩니다. 이지적이고 현명한 줄로만 알았던 형이 그런 저질 매체를 즐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 남자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여자란, 그건 이미 폐물인 법이야."


이처럼 속물적인 면도 있지만 항상 이치에 밝고 자신의 문제를 잘 헤쳐나가던 형, 그가 갑자기 죽고 남은 건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 그리고 형이 생전에 사귀던 여성이었습니다. 이 여성에 주인공은 베아트리체의 심상을 투영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것처럼 이는 그저 당사자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주인공에게 형은 뭐랄까, 도스토옙스끼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드미트리와 이반, 첫째 형과 둘째 형을 합쳐 놓은 사람입니다. 큰형은 야성적 충동과 정열을, 작은형은 면도날 하나도 들어갈 틈 없을 견고한 이성의 방벽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


그리고 그 여성은 아마도 주인공이 여성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미덕을 합쳐 놓은... 것처럼 착시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허나 여성은 결국 주인공을 남자로 봐 주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데 이는 당연합니다. 실험실에서부터 그를 졸졸 따르는 후배 여성도 하나 있는데 결국 형의 그 여자가 자신을 보듯, 자신도 그 후배를 끝내 여성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정념을 부르는 여름이 괴롭다면, 청춘은 차라리 만물이 시들고 난 겨울을 기다릴 밖에요. 제목은 그래서 겨울(=눈)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설(待雪)부(賦)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MBC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적 있는데, 대학원 여성 후배 역에 박순천씨, 주인공에 길용우씨가 나옵니다. 자신의 뜻을 안 알아주자 두 비커에 염산, 황산을 각각 담고와서 잔뜩 협박한 후 마셔버리는 장면이 재미있습니다. 물론 그런 강산용액이 아니라 탄산음료였다는 게 밝혀집니다. 교수 역에 이호재씨, 죽은 형 역에 당시 한창 주부층에 인기를 끌었다는 박영규씨, 형의 여인 역에 허윤정씨가 나옵니다. 세상 모든 일을 다 통달했다는 양 허풍을 치는 선배 역의 정한헌씨 연기도 볼만합니다. 저 시절 대학생들이란 유치하고 귀여운 맛이 있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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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조 이문열 중단편전집 2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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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조에서 "시(翅)"는 날개라는 뜻입니다. 받침인 支가 발음을, 깃털 羽가 뜻을 나타내는 형성자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라고 나오는데, 그럼 팔부중에는 무엇이 있는지 찾아 보면 여덟 개 중에 "금시조"가 또 없습니다.  같은 사전 안에서 설명이 완결되지 않는다는 건 사전의 품질을 의심케 하는 거죠. 물론 요즘은 사전보다 강력한 구글이 있어서 찾아 보면 나옵니다. 국어사전에도 팔부중 중 가루라를 들어 놓았는데 이 가루라가 금시조입니다. 금시조는 음역이 아니라 뜻으로 풀어 놓은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이 장편은 이문열 작가의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며 읽어 보면 과연 장중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 분위기에는 좀 맞지 않는 듯한, 다소 정형적인 구조와 전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 떨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교훈과 미학적 효과는 올타임 리퀘스트에 속하며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메시지라는 건 뭐 틀림없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스승 석담은 예술이 도, 학, 삶과 유리된 채 존재할 수가 없다는 입장이며, 제자(주인공)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고 예술은 어떤 입장이나 철학과는 따로 떨어져 그 자체의 존재 영역이 있다는 쪽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rt for art's sake라고 하겠죠. 그런데 훨씬 앞선 시기,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김동인의 단편들에 나오는 피상적이고 설익은 입장보다는 훨씬 깊이가 있습니다. 소설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깊이 있는 사색 그 결과를 담아야 그게 독자에게 어떤 감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이 정도 담론은 현대 독자에게는 이미 상식이 되었으므로 길게 재인용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장편을 읽으면서, 과연 예술의 가치는 누가 알아보며 누가 값을 매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5년 동안 한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이 되는지는 평등하게 주어진 한 표에 따라 돈이 있건 없건 유식하건 멍청하건 간에 모두가 모여서 결정합니다. 주식의 가격은? 개미의 시시한 돈도 모이고 모이면 그 볼륨을 무시 못 합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을 "보통 선거"로 평가하면, 뒤샹의 <분수>는 단돈 이만원에 그 모든 가치가 결정되고 말 것입니다. 예술은 첫째 백아 곁에 종자기가 있었듯이 고독한 예술혼을 해례(?)할 수 있는 영혼의 교통자들이 있어야 그 가치가 비로소 밖으로 드러납니다. 둘째 그것에 고가를 매기고 손에 넣으려는 부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미적 감각이라는 게 과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돈 많은 호사가들의 변덕에 의해 좌우될 뿐일까요? 답은 알 수 없습니다. 부정적이라는 게 결코 아니고, 말 그대로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작품은 KBS에서 극화된 적이 있는데 석담 역에 신구씨, 고죽 역에 고 김흥기씨가 나와 볼만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신구씨 특유의 사람 갈구는 연기는 이게 배역이 배역이다 보니 설득력이 있지만 김흥기씨 연기는 사실 저 인물이 뭘 말하고자 하는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 김흥기씨를 최고의 연기자로 평가하는데, 극이 저렇게 된 건 제 생각에 각본이 나빠서입니다. 원작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스승과 제자가 대립하는 건데, 드라마는 그게 아니라 두 인물의 신분 차이라든가 개인적 애증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뭐 그렇게 해도 하나의 (재)해석은 되는 건데, 문제는 원작 소설의 진행에서는 또 벗어날 수 없다 보니 드라마가 처음에 꺼낸 단서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거죠. 드라마만 보고 실망한 사람은 원작 소설을 읽어 보고 원작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 필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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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의 나성 - 윤흥길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7
윤흥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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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작품에서 만약 로스앤젤레스, LA를 "나성"으로 표기한다면 그에는 아마 무슨 특별한 의도나 사정이 있겠거니 독자가 짐작하는 게 보통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이 책이 출간된 시점이 아니라)에는 저런 표기가 보통이었으므로 그냥 독일(도이칠란트), 호주(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윤흥길씨는 새삼 소개가 필요 없는, 중고교 교과서에도 작품이 소개되는 작가입니다. 


1970년대라면 한국에도 많은 회사가 들어서서 사무직 직원을 뽑았고, 소 팔고 논 팔아서 아들을 대학 보낸 부모들이라면 이런 버젓한 회사에 취업하여 자신들처럼 고생을 하지 않고 더 우아한 일을 하며 돈을 벌 것을 기대했겠습니다. 소설에 묘사된 대로라면 이 무렵부터 벌써 사내 정치가 만연하여 승진을 둘러싸고 치열한 줄서기, 모략, 음모가 판을 치며, 마치 몇 년 전 간부급 검사들(그 중 한 분은 장관이 된)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한 놀라운 일이 있었듯 이 소설 속에도 명색이 화이트칼라(당시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을)끼리 아주 한심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 역시 모두 시대상 단면들을 보여 줍니다. 


그 와중에도 주인공은, 어렵사리 회사에 들어가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 고뇌를 합니다. 자신을 좋다고 따라다니는 젊은 여성도 있지만 무슨 생각인지 쉽게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주인공을 자기 라인으로 끌어들이려는 과장도 있고, 그 과장이 타깃으로 삼는 부장도 있어서 막후의 싸움이 본연의 업무보다 더 불꽃튀깁니다. 이 와중에 부장은 그나마 고지식한 사람이라서 한눈팔지 않고 업무에만 전념하지만 다른 사원들은 그런 제스처 하나도 다 자신에게 유리할 대로만 왜곡합니다. 눈치싸움에 열심이라고 다 똑똑하게 구는 건 아니라서 외부에서 보면 저 인간들이 왜 저러나 싶게 삽질과 헛다리의 연속입니다. 


스트레스를 풀려면 근처 다방에 가서 마담이나 종업원들과 수다도 떨고 커피 한 잔에 담배 한 대(실내 흡연은 거의 필수)가 화이트칼라의 낭만입니다. 이 여자들도 다 시골에서 올라온 처지들인데 따지고 보면 영혼을 팔고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하는 사무직이라는 게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여성들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물장사 자리 장사라서 테이블을 오래 차지하고 게다가 커피 한 잔도 안 사며 죽치고 앉은 영감님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는데 처음에는 전화 한 통화 쓰자는 영감님한테 친절했으나 두번째부터는 온갖 눈치를 다 줍니다.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쫓아내다시피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주인공은 "점잖아 보이는" 영감님한테 그러지 말라며 역성을 들기까지 합니다. 고향에 있는 부친이 생각나서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꿈꾸는 자"는 그 영감님이고, 이 꿈꾸는 자를 동정하는 게 바로 주인공입니다. "나성"은 한때 희망을 걸었건만 결국 아무 소식도 없는 어떤 지향점을 상징합니다. 지금이야 특별한 다른 목적이 없다면 미국 이민을희망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1960년대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진 이가 많았죠. 이 작품에도 그런 지난 시대의 흔적이 묻어나며, 영감님은 마침내 국제전화 걸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버스터미널로 돌리는데 그 허탈한 웃음을 보니 아마 자살을 염두에 두는 것도 같습니다. 


이 단편은 TV 단막극으로도 만들어졌는데 영감님 역에 2개월 전(2022. 5) 지병으로 타계한 이일웅씨, 주인공에 <태조 왕건>에서 백두산 도인 역으로 나와 의도치 않게 큰 웃음을 준 강태기씨, 혼자서 검소하게 살다 엉뚱한 오해를 받은 소심한 회사원 역에 백윤식씨, 도시적인 미인 역으로 자주 나온 권기선씨, 음모를 꾸미는 못된 과장 역에 민욱씨(항상 그런 역만), 무덤덤한 부장 역에 문오장씨, 몇십 년 뒤 <사랑과 전쟁>에서 미친 시어머니 역으로 단골 출연한 젊었던 곽정희씨 등이 나와 볼거리를 선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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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교수는 1970년대~80년대 인기 작가였으며 소설, 시 두루 창작했고 특히 소설은 고전적 정제미가 돋보이는 작품 세계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열 아홉 편의 소설과 시들이 실렸으며 <흙덩이와 금불상>, <처형의 땅> 등이 유명한 단편입니다. 그의 본령은 시(詩)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쪽은 그의 소설들입니다. 


이 책에 실린 중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인형의 교실>입니다. 중의적인 제목이며 어떻게 보면 제목 속에 스포일러가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네요. 향토색도 짙게 배어나고 휴머니즘, 참된 스승의 자세 등을 강조한 작품이긴 하나 읽기에 따라서 이 작품을 미스테리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5기 13주차에 서영은의 <뱁새의 꿈>을 리뷰했었습니다. 그 작품도 젊은 여선생이 벽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답답하고 발전 없는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이 단편에도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여선생이 시골에 부임하며 겪는 사연이 나옵니다. 물론 <뱁새의 꿈>은 아주 가난한 도시 빈민 가정 태생의 여선생이었다는 점이 다르며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도 생판 다르긴 합니다만 여튼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서영은 작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당대의 문호 김시종 선생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도 한 분인데 저 <뱁새의 꿈> 여주인공도 작품 속에서 돈 많은 재일교포 사업가와 연을 맺을 뻔한 게 어떤 연상을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큰 차이도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고인들께 실례가 될 수 있어 여기서 언급을 줄이겠습니다. 


여선생은 깡촌 어느 학교에 부임하여 그 나름 의욕적으로 교사의 직분을 수행하려 듭니다. 이상한 건 부임 첫날 수업 중 옆 책상에 벗어 걸어 둔 자켓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학생이건 뭐건 손버릇이 나쁜 애를 잡아 교정하는 건 교사의 임무이기도 하니 절도범을 색출할 만도 하겠건만 여선생은 그러지 않습니다. 옷 욕심이 많을 젊은 여성인데도 엄청 대범하고 어른스럽게 굽니다. "아이들을 범죄자로 몰고 의심하며 난리를 치기보다,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고 물건을 돌려놓길 기다리자." 구태여 저렇게까지 안 해도 선생답지 않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자켓은 돌아오지 않고 다음에는 모자가 사라집니다. 이제 선생은 어디 어쩌나 보자는 생각으로, 이것도 한번 가져가 보라는 식으로 스카프를 창틀에 걸어 놓습니다만 기대는 배반당하고 나중에는 펜, 반지 등 귀중품들도 사라집니다. 선생 본인의 입장에서나 작품 밖의 독자가 보기로나 이제는 구제불능의 악질 도둑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선생 물건을, 어쩌다 한둘도 아니고 아예 가산을 들어먹을 만큼(?) 가져가는 애들에게 뭘 기대하겠습니까?


이 학급에는 선배 여교사(시골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촌아낙인지 교사인지도 모를 외양입니다)의 어린 딸도 속해 있습니다. 이 아이만큼은 거짓말을 안 하겠지 하는 기대로 선생은 조용히 따로 불러 물어 봅니다. 그러나 얘마저도 "몰라요!"라 소리치며 도망갑니다. 이 장치는 치밀한 복선입니다. 이런 아이는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설령 악질 급우의 위협, 친분 같은 게 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선생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는 것입니다. 눈치빠른 독자는 여기서 사태의 진상이 무엇일지, 적어도 어떤 방향성을 띨지 감을 잡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한편 주변 인물들은 선생 주위에서 "이제 떠날 때가 되었나?"라며 계속 독자를 향해 암시를 줍니다. 물론 독자는 결말을 다 읽고 나서야 이런 대목들이 암시요 복선인 줄 깨닫습니다.


이 단편은 MBC에서 단막극으로 1980년대 중반에 제작 방영되었는데 시나리오 각색자가 장선우 감독입니다. 아주 젊었을 시절의 솜씨이겠으며 원작과는 차별화되는 여러 기법도 눈에 띕니다. 가령 끝까지 교사의 직분을 다하며 아이들과 한마음이 되고 싶었으나 좌절하는 대목에서, 선생은 마음 속으로 전학급이 자신의 모습을 화폭(초등용 스케치북)에 담아 선물하며 여태 가져간 옷, 물품 들을 모두 돌려 주는 감동적인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내 그녀 마음 속의 환상인 게 드러납니다. 또 당시로서는 드물었을 장거리 전화가 서울 본가 모친으로부터 걸려와서 대기업 취직 자리, 혼처 등을 권하는 말을 들을 때 선생은 교직을 단념하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며 아이들 앞에서 교사인 자신이 거꾸로 벌을 서는 환각을 떠올립니다. 이런 장면은 교사로서의 좌절, 낙담을 하나의 시퀀스(일종의 극중 극이라고 할까)로 은유한 것인데 역시 원작에는 없는, 감독 장선우만의 이지적인 창의입니다(단막극 연출자는 다른 분이며, 장선우씨는 이 작품에서 각색만 했습니다). 아무튼 젊은날의 장선우 감독의 한 흔적을 이런 드라마에서 발견한다는 게 재미있는 체험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여주인공역은 젊었을 때의 김혜수씨가 나오는데, 1970년생이라고 되어 있는 김혜수씨가 드라마 제작연도인 1986년이라면 고작 열 여섯 살때입니다. 그런데도 교대를 갓 졸업하고(물론 2년제 졸업자 교사도 당시에는 많이 뽑을 때였으므로 더 어린 나이일 수 있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역을 맡았던 것입니다. 어리긴 확실히 어린 모습이나 16세로 보기엔 또 숙성한 외모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는 주인공이 거울을 보며 "참 예쁘긴 하지만 어리석게도 생겼구나" 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 역시 원작 소설에는 없습니다. 아마 장선우 각색자가 신인배우 김혜수씨를 보며 느낀 바 그대로를 대사 안에 담은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김혜수씨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오히려 커버가 되지만) 10대때는 물론 20대, 30대 내내 특유의 얇은 목소리 때문에 뭘 말해도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여기서도 대사연기만큼은 솔직히 국어책입니다. 그러나 그녀만의 엄청난 매력이 있어서, 극에 몰입하는 데에, 더군다나 여교사의 거의 1인극에 가까운 이 드라마에 집중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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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 윌리엄 제임스의 운명과 믿음, 자유에 대한 특별한 강의
윌리엄 제임스 지음, 박윤정 옮김 / 오엘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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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껨은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는 바로 자살에의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언명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식욕, 성욕, 명예욕이나 자아실현 욕구 같은 것도 순수한 나의 것은 아닙니다. 속한 사회나 준거집단이나 가족, 친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 역시 자아상이나 정체성이나 자신의 욕구 같은 걸 어디서 모방했을 것입니다. 한편 식욕 등의 원초적 욕구는 그저 생체 작용의 유지를 위해 주기적으로 발동되는 것일 뿐 나의 인격 등과는 무관합니다. 이처럼 알고 보니 우리 자신의 것도 아니고 그저 비천한 생리작용의 결과물이거나 주입된 착각의 산물이라면 생이 과연 살 가치가 있는 것일지 의문이 들 만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두고 "이렇게 가난하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생산활동에 참여 않는 기생분자 입장에서 어떤 가난한 사람을 가리켜 "저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면, 이 둘은 똑같은 이유에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봐도 됩니다. 본인은 어리석어서 모르겠지만 후자 역시 자신이 잉여인간임을 자인하는 꼴이지요. 이들에게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이 (그나마) 명쾌해서 좋겠습니다만 이들보다 복잡하고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위의 저 질문은 좀처럼 답이 안 나오는 난제입니다. 19세기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짧지만 짧지 않은 이 고전에서 편 논변은 아마도 독자가 자신만의 답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보면 중세 가톨릭이 어떤 이단(그들 입장에서)을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탄압하고 절멸하려 들었는지 잘 나옵니다. "죽여라.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알아 보신다." 이 책 p40 이하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발도파를 말살하려 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다소 뜬금없이 저자가 발도파 이야기를 꺼낸 건, 저들이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압제 세력 앞에서 어떻게 자존과 자유를 지키려 애썼는지의 과정을 돌아봄으로써,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생이 거의 언제나 살 가치가 있는 것임을 증명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이들이 오히려 삶의 가치를 증명했다는 게 역설이긴 하지만 그 결론에는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되죠. "저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 같은, 가장 비천한 인생관을 거꾸로 프라이드 삼아 떠드는 인간(물론 이런 인간들이 실제로 곤경에 몰리면 죽을 용기도 없습니다 ㅋ)은 예외로 치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생즉필사 사즉필생"이란 담백한 경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사자가 어떤 삶을 산 분인지를 알면 더 소름끼치는 명언이기도 합니다. 


정통 영국인의 가치관을 강하게 상속한 저자답게 책 곳곳에서, 어리석은 대륙의 미신과 고집, 인습 등과, 각성하고 깨어 있는 영국식 성품을 대조시켜 부각하려는 습관도 드러납니다. 사실 그가 집필 무렵에 참조한(혹은 소일삼아 읽은) 여러 책들은 지금 사학의 관점에서는 많은 오류를 노정했음도 드러나지만 여튼 저자의 좋은 의도(혹은 좋게 이해할 수 있는 취지)가 무엇인지는 우리 독자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영국인들이 저런 발도파의 후예, 혹은 한참 후에 각처에서 추방당한 혁명가 등을 잘 받아들여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게 도운 건 그 특유의 관용의 정신이라며 얼마든지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시대는 또한 미국이 국제 무대를 향해 서서히 발언권을 높일 무렵이므로 책에는 그를 반영한 기술도 있습니다. 영구 먼로주의(고립주의)도 언급되며, p74에는 아서 밸푸어의 이름도 나오는데 책 후주의 설명처럼 이 사람은 영국의 수상이었으며 우리가 잘 아는 밸푸어 선언의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p72에는 올더스 헉슬리의 이름도 나오는데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멋진 신세계>의 작가이죠. p111에는 결정론에 대해 약한 결정론/ 강한 결정론의 이대별을 설명하는데 아마 이 무렵에 시도된 구분인가 봅니다. 당시 미국의 표준적 지성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많은 시사점이 발견됩니다. 


개념은 독일어로 Begriff라 하는데 "사유를 통해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칸트가 이에 Grenz를 붙여 한계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후주 17번(p163)에 나옵니다. 참고로 이 책의 후주는 원주도 있고 역주도 있는데 역주 역시 내용이 대단히 알찹니다. 윌리엄 제임스뿐 아니라 모든 위대한 저자들의 책에서 원주는 그 역시 본문 내용의 일부이므로 반드시 읽어야 하죠. p166의 후주 11번에 원주로서 자유의지에 대한 짧으면서도 강력한 논의가 있는데 윌리엄 제임스의 신학적 입장을 단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물론 신교측 입장에 훨씬 가깝지만 역주에서는 예컨대 "루카 복음" 등 신구교에 두루 통할 표기를 씁니다. 한국에서는 허버트 스펜서를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갤브레이스 시니어의 <불확실성의 시대> 같은 책이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펜서 본인은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한 사람이며 윌리엄 제임스는 이 책 여러 곳에서 그를 우호적으로 원용합니다.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 그 믿음이 삶의 가치를 창조하게 도와 줄 것이다(p60)."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서 앙리 4세의 말도 인용되는데 그 역시 편협한 기존 왕실(이 작자는 프랑스 혈통도 아니고 타국에서 시집온 주제에 미친 광신을 고집했죠. 가장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과거 회귀를 추구한 악질 반동을 놓고 자칭 진보주의자가 이런 류를 존경한다는 건 코미디 중의 코미디입니다)의 전통을 깨고 자국 영토 안의 모든 백성 모든 신앙을 감싸안으려 든, 진정한 진보주의자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무엇을 가져다주든,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p42)." 인생은 본디 고통과 부조리, 뷸평등, 불운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악덕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삶을 살아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악조건이 있다면 이를 극복하고 제거하는 과정이 또한 당사자의 인격과 자존에 플러스 팩터를 쌓으며, 그저 호조건 속에서만 사는 사람이 아무 적립도 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가치 있습니다(그러니 이미 이런 사람한테는 호조건이 더 이상 호조건이 아니죠). 물론 호조건을 타고난 사람은 생계 걱정 않고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두하며 얼마든지 조건을 잘 살려 의미있고 자긍심을 높이는 성과를 쌓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반지성적 본성은 분명히 우리의 확신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p76)." 어리석고 무지한 자일수록 자연과학이 증명하는 진리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과학의 몇 가지 도그마 중에서도 극히 편협한 몇몇을 가려 무지몽매한 미신을 믿듯 절대화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그게 무엇이든 절대로 맞다며 확신할 수도 없고 이런 걸 타인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의 견해를 마치 재해석이나 수정이 불가능한 것처럼 고집하는 건 대단히 잘못된 테도이다.(p81)"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을 보면 지혜와 공부가 부족하고 멍청한 인간일수록 무엇 하나를 절대 무오류의 진리인 양 숭배하며 고집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우주는 단순한 그것(it)이 아니라 그대(thou)가 된다(p99)." 저자는 물론 반지성주의를 배격하지만 동시에 종교가 여전히 진리에 대한 통로를 열어 준다고 여겨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현대 독자 사이에 찬반이 갈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도킨스 같은 사람은... ㅎㅎ 그러나 도킨스 역시 두 세기 전의 이 윌리엄 제임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격렬하게 호오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적정 수준의 회의주의를 드러내면서도 너무 나간(?) 회의주의를 경계하는 저자의 스탠스에서 독자는 중용의 미덕을 캐치할 수도 있습니다. 저 위의 인용구는 마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아리아 "투나잇"에서 "And here you are and what was just an address is a star"라는 유명한 가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p79를 보면 ad(a)equatio intellectûs nostri cum rê라는 라틴어 구절이 나옵니다. 사실 프랑스어도 아니고 û라는 건 라틴어에 없으므로 intellectūs가 맞겠으며, 이것은 intellectus의 단수 2격(속격)입니다. nostri도 자신이 꾸미는 명사를 그대로 따라가므로 역시 단수 속격입니다. 인터넷에 보면 이걸 corformity of our minds to the fact라고 영어로 옮겼는데 intellectūs는 1) 단수 남성 속격 혹은 2) 복수 주격이 있으나 의미상 이걸 2) 복수 주격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새기면 앞의 ad(a)equatio가 허공에 붕 떠버리는 셈이지요. 또 rê를 rê로 보면, 이것은 단수 탈격형태 뿐입니다. res가 intellectus와 단복 여부가 같아야 하므로 이런 이유에서도 intellectûs는 단수로 새겨야 하겠습니다. 사실 영어 번역 맥락에서 보아도 our minds가 아니라 our mind가 옳죠. 인류가 공유하는 정신이란 의미이므로(각각의 정신들이 아니라). 


"오 우주여 그대 자신을 보라 그대는 나빠지는 게 아니라 더 좋아지고 있다(p146)." 이 시구(詩句)는 저자 윌리엄 제임스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무는 그것대로 끝내고 나머지는 더 고차원적인 권능에 맡기자는 저자의 제안은 확실히 우리의 삶을 더 경건하게 만드는 느낌을 줍니다. 마치 동양의 경구 진인사대천명이 생각나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 책에는 <삶은...> 외에도 <믿으려는 의지>, <결정론의 딜레마> 등 기독교적 인사이트가 가득 담긴 두 편의 글이 더 실려 있습니다. 이 세 권 모두 윌리엄 제임스의 평판과 문명 그 자체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걸작들이며 그 가치는 독자가 읽어 보고 바로 확인할 수 있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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