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암의 단편 소설 11편이 실렸습니다. 오래 전 소설들이라서 솔직히 뭔가 깝깝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예전 소설가들은 이런 소재를 즐겨 작품에 형상화했나 보다 하고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서양에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이야기가 오랜 동안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누구나 남한테 사랑을 받는 건 좋아해도 남에게 뭘 베풀 줄은 모르는데 책 중 처음에 나오는 단편 <갯바람>을 보면 아 이런 삶도 있구나 하며 새삼 고개가 숙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과거에는 다들 빈곤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위생 상태도 좋지 못했으므로 배우자를 여러 이유를 통해 일찍 잃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럴 때 며느리, 혹은 사위였던 이가 시부모, 혹은 장인장모와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지가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겠습니다. 저무렵에는 또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배우자 사별시 동일 생계를 이루고 사는 그 관계부터 쉽사리 청산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책프 25기 22주차에 안장환의 <안개강>을 리뷰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내를 잃고 자신은 월남전 참전 부상으로 다리를 저는 상태인데 장모와의 관계가 애매해집니다. 물론 장모나 사위 모두 나쁜 사람들은 아니며 작품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그저 가난이 원수인 셈인데 세상에 아무리 가난한 세상이었다고는 하지만 한강에서 잉어 낚시를 통해 생계를 이어간다는 설정이 기가 막혔습니다. 그나마 공업화가 진척되면서부터는 강이 오염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아무튼 저 시아버지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가 잘 되고, 개인적으로는 OOO이 저 상황에서 꼭 그래야 했나 싶기도 합니다. 다른 단편들에도 1970년대 서울의 빈곤층(이라고는 하나 당시 기준으로는 평균적인 서민들)의 삶이 잘 드러나는, 마음이 좀 답답해지는 그런 작품집이었습니다. 가난할 때 오히려 훈훈하고 따뜻한 인간성이 공유되고 표현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판단은 독자들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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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스어학연구소 지음 / 해커스어학연구소(Hacker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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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스 리딩 스마트 시리즈 레벨 1, 즉 가장 낮은 단계의 리더(=읽을거리)입니다. 어제 올린 레벨 2의 리뷰에서 시리즈의 특성이라든가 체제에 대해 설명을 다 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참조 바랍니다. 이 리뷰에서는 시리즈 전체 말고 이 책만의 특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가장 낮은 레벨이기 때문에 단어와 문장구조가 너무도 쉽고 그 담은 내용도 상식선에서 다 알던 이야기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면(학생 아니라 지도하는 어른 입장에서), 그렇지는 않다고 하고 싶습니다. 이 책도 총 10개의 유닛, 그 유닛마다 네 개의 지문, 지문마다 4개의 문제, 유닛 끝에 리뷰 테스트가 실렸습니다. 예를 들어  p46, 유닛 04-2의 지문을 보면 주제는 울버린이라는 동물의 습성과 외양, 혹시 마주칠 경우 주의할 점(북미가 아닌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가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등입니다. 주제가 이런 것이니 한국의 학부형 평균이 잘 알 만한(적어도 지루해할 만한) 내용은 아니고 어차피 영어가 세계인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니 이런 주제는 영어 공부를 떠나 상식으로 알아놓아도 유익합니다. 또 "울버린"이란 동물 이름에 귀에 익다면 아마 2000년도의 헐리웃 화제작 <엑스맨> 덕분일 가능성이 큰데 아니나다를까 이 지문도 그 얘기부터 대뜸 시작합니다. 


이 독해 시리즈는 지문 오른쪽 페이지 하단에, 지문과 문제 중에 사용된 어휘를 설명하고 있는데 단어만 있는 게 아니라 be based on 같은 어구도 설명합니다. 이것이 관용어나 숙어는 아니므로, 아마 수동태 표현에 대해 낯설어할 학생들을 배려한 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만약 수동태를 배운 학생에게라면, 이걸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대체로 수동태는 중 2때 배우므로 이 교재가 그보다 앞선(=낮은) 단계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reindeer는 고 1 정도, predator는 중 3 정도이므로 확실히 단어 수준은 조금 높은 편이긴 합니다만 요즘은 선행학습이란 것도 있으니. 또 사실 단어는 너무 학년별 권장 수준에만 꽁꽁 묶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지문을 주고 그 제목을 고르게 하는 문제가 누구에게나 어려운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에서, 본문과 전혀 관계가 없는 문항은 나오지 않습니다. p47을 보면 ①은 "야생 울버린을 사냥하는 것을 멈춰라"인데, 만약 이 글이 제시 부분에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진다면 충분히 이것이 주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②③④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목이 될 수 있는 정답군과, 다른 선지가 아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답은 정상적인 교훈을 받은 누구의 눈에도 ⑤입니다. 이견이 있기 힘듭니다. 덧붙이면, 저는 이 시리즈에 나온 거의 모든 "제목 고르기" 문제들이 매우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아이들은, "내 생각에는 이런 오답도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안 되나요?"라고 묻다가 선생에게 혼이 납니다. 그럼 아이는 "아 혼이 안 나려면 이걸 답으로 그냥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이것 역시 바람직한 반응이 아니지만), 그 답에 대해 일종의 원한을 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이유 없이" 무엇을 강요한 선생, 나아가 자신을 거부한, 알 수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지식 체계에까지 적대감을 지닙니다. 이런 아이가 커서 반사회적 성향을 띠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고, 이런 아이들을 어떤 불순한 세력이 이용하여 수족처럼 부리는 것도 놀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다양한 선지가 답이 될 가능성이 있는 문제라면, 지도교사나 학부모는 대체 왜 그게 답이 안 되는지, "제목이나 주제를 고르라"는 지시사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납득을 잘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성인들이 모여 이런저런 잡답을 나누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자주 올라오는 사진(이른바 "짤")이, 바로 화장실에 걸린 두루마리 휴지입니다. 이것을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국룰(!)인가로 싸움 아닌 싸움이 나기도 합니다. 뭐 누구나, 이것이 논쟁거리가 될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재미로 이러고 놀곤 하죠. 그런데 이 책 p68에도 toilet paper를 어떻게 걸어야 하느냐를 놓고 양쪽의 의견이 갈린다면서 참으로 재미있는 논쟁거리를 짓궂게 꺼내고 있습니다. loose end가 slight하게 hidden되는 편이 좋지 않냐는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걸어야 휴지를 끊을 때 따로 벽(더러울 수 있으므로)에 손을 댈 필요가 없다는 쪽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 쪽인데 벽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바로 잘라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공공장소에 저런 게 있다면 그나마 위생에 유리한 편이 낫다고 볼 수도 있죠. 이 지문에서는 결론을 "논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고 내고 있습니다. 이 지문은 131년 전 이 휴지가 처음 발명되어 걸렸을 때는 후자쪽이었다고 상식 하나를 알려 줍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과학 소재 지문이 많았던 점이었습니다. 과학 이야기는 역사나 사회문화 과목처럼 어떤 사항을 그저 암기해야 하거나, 혹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적 사항만을 강조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화학적 사실들을 이치적으로 이해하게 도움을 줍니다. 또 오늘날의 한국을 이처럼 잘살게 해 준 반도체 기업의 엔지니어들도,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각별히 뛰어난 사고를 하는 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심지어 영어 공부를 할 때에도 과학적 사고를 할 기회가 생기면 얼마나 더 유익하겠습니까. 


에티오피아는 우리가 그저 기아선상에 시달리고 내전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나라로만 알지만, 사실 인류 문명이 가장 일찍 싹튼 지역 중 하나며 고대에 크게 번영했고 20세기 중반에는 한국에 지원군을 보내 주기도 한 나라입니다. 황제가 다스리던 위엄 가득한 나라였으나 현재는 분열주의자들의 무책임한 선동 때문에 나라가 사분오열되고 엉망진창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와카 타워는 마치 우리나라의 첨성대처럼도 생겼는데, 벽 표면에 물이 맺히는 걸 보고 온도를 측정하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책에는 이를 가리켜 "응결"이라 하여 한국어 해설에서 잘 가르쳐 주는데, 중 1 지구과학이 원래 엄청 어렵습니다. "응결"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혹 이 영어 교재를 통해 쉽게 이해할 학생들도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힙합을 발레에 접목한 게 "힙렛(hiplet)"이라고 한답니다. 힙합 댄서들이 발레 동작을 그대로 혹은 상당히 참고하여 따와 힙합음악에 붙인 것입니다. 발레 역시 철자는 ballet이라 쓰니 저 단어의 고안 배경이 뭔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지문은 다소 열광적인 어조로 "힙렛은 두 장르의 완벽한 믹스"라며 이 새로운 크로스오버 장르를 찬양합니다. 이 지문에도 문제 넷이 딸렸는데, 역시 제목 고르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①은 "힙렛: 음악의 또다른 형태"이고 ②는 "두 가지 춤 장르의 독특한 조합"인데, 사실 이 지문은 음악보다는 댄스에 대한 서술이므로 답이 ②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책 중간중간에는 아재력 테스트라든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를 어떻게들 보내는지에 대한 한국어 읽을거리도 실렸는데 아마 아이들 지도하는 중간중간 학부형들 지루하지 말라고 심어 놓은 아티클 같습니다. 미니암기장과 워크북(익힘책)은 책에서 따로 떼어낼 수 있게 별책 분리가 가능한 편집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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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스 리딩 스마트 Hackers Reading Smart Level 2 - 최신경향의 흥미롭고 유익한 지문 l 최신 중학교육과정이 철저히 반영된 문제 제공 해커스 리딩 스마트
해커스어학연구소 지음 / 해커스어학연구소(Hacker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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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재는 책 뒷면에 나와 있듯 렉사일 지수 770이상부터, 또 어휘 110~150개 수준에서 읽게끔 고안된 읽기 교재입니다. 교재는 모두 1~4레벨까지, 네 단계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 이 책이 레벨 투이니 중하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딱 펼쳐 보니,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매우 닮은 모습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배우는 중학교 교과서를 딱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영어 실력을 늘리려면(국어 실력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영어 교과서만 읽어서는 안 되고 다양한 읽을거리(이른바 reader)를 널리, 또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이 책은 교과서를 이미 다 공부하고 나서 약간 지루함을 느끼는 아이들이, 영어 실력도 키우고 재미도 동시에 느끼게 할 만한 그런 읽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국 출판사, 예를 들어 프린스턴 리뷰라든가 하는 곳에서 라이센싱한 건 아닌 듯 보이고(제 생각입니다), 현재는 국내 탑이라고 봐야 할 해커스에서 자체 개발한 교재인 것 같습니다. 


총 열 개의 unit으로 이뤄졌습니다. 각 유닛은 패션, 동물, 장소, 기술 등 주제 하나씩이 주어져 있습니다. 유닛에 제목은 안 붙었는데 보통 교과서가 일일이 매 과마다 제목을 달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죠. 그 이유 중 하나가, 본문을 읽고 그에 알맞은 제목을 고르는 문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 개의 unit마다 네 개의 지문이 나옵니다. 또 각 지문마다, 이 지문에 쓰인 단어가 몇 개인지 그 수가 표시됩니다. 그러니 학부형이나 교사는 아이의 수준을 감안하여 세밀하게 지문을 골라 학습을 시킬 수 있고, 이 점이 학교 교과서와는 크게 다른, 이 시리즈, 즉 reader로서 본연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다하게 위한 장치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지문에는 문제 네 개씩이 딸려 있는데, 제목 묻기, 빈 칸 채워넣기, 문장이 들어갈 만한 적절한 곳 찾기, 내용 요약하기 등의 유형이 번갈아가며 나옵니다. 성인이 되어 접하게 될 텝스나 토플, 토익 등 공인영어능력시험의 RC 유형과 똑같습니다. 


지문에 실린 단어의 뜻은, 지문의 오른쪽 페이지 하단에 모두 몰아 정리해 놓았습니다. 지문에 나온 단어는 그대로 설명을 싣고, 지문이 아니라 오른쪽 페이지 문제 중에 나온 단어는 앞에 <문제>라고 따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친절한 태도입니다만 저 개인적 생각으로는 아예 칸을 따로 질러 구분했으면 더 좋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네 개의 지문과 그에 딸린 문제가 끝나면 "REVIEW TEST"가 열 문제 정도 따로 나옵니다. 이런 구성은 사실 거의 모든 영어 교재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태도이지만, 특히 해커스의 다른 중고등 교재들이 일관되게 취하는 체제이기도 합니다. 일 년 전쯤에 개인적으로 이 출판사에서 나온 중고등 어휘 공부 교재들을 다 리뷰한 적 있으니 필요한 분은 참조하십시오. 


해커스 교재를 풀며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하는 부분은 해설이 참 좋다는 겁니다. 이 교재를 보면, 뒤에 분권이 이미 되어 있는 제2의 책, 해설집이 있습니다. 이 해설집은, 앞에 나온 네 개 지문 x 10 유닛 = 총 40개의 지문에 우리말 해석을 싣고(여기까지는 당연합니다), 밑줄을 쳐서 단어 하나하나 밑에다 뜻도 달아 놓아서 아이들에게 직독직해 버전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물론 깔끔하고 정돈된 우리말 순서에 따른 완전 해석본도 그 옆에 따로 배치했습니다. 보통 영어 공부하면서 중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생들도 가장 아쉬워하는 게, 지문 밑에 단어 뜻 바로 달아 놓고 직독직해본이 좀 제발 있었으면 좋겠다고들 합니다. 이 교재는 현장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바로 이 포인트를 정확히 짚고 반영, 구현했다고 생각됩니다. 


유닛마다 네 개의 지문이 있고 그 지문마다 네 개의 문제씩이 딸렸는데 유닛에서의 마지막 지문(즉 네번째 지문)에 딸린 문제 세트는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묻습니다. 당연하지만 해설집에 보면 이 문제들 역시도 다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해설집에는 이런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마주보는 페이지 하단 둘을 이어서 "구문 해설"을 따로 하는데 구문은 문법과 독해의 중간 영역으로서 독해와 영작이 자유자재로 되려면 이 구문의 세계를 반드시 정복해야 합니다. 


해설집에는 물론 리뷰 테스트(각 유닛 끝마다 나오던 총복습 문제 세트)에 대한 번역과 해설, 정답이 다 나옵니다. 이러니 참 교재가 아쉬운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유닛의 각 지문에 딸린 문제 중에는 간혹 "심화형"이라든가 "서술형"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p75, unit 06-4의 문제 3번 같은 게 심화형 문제의 한 예입니다. 그런데 딱히 심화인지는 잘 모르겠고, 이 문제 같은 경우 다음 진술이 옳으면 T, 그르면 F를 기입하라고 지시하는 유형입니다. 진술을 살짝 비틀어서 헷갈리게 한 것도 아니고, 셀 바이 일자가 경과하면 물건을 팔지 못한다, 80% 이상의 미국인들이 멀쩡한 음식을 버린다, 같은 것도 함정 없이 맞는 진술입니다. 아쉬운 건, T/F를 판단할 때 지문 전체를 고루 판단해야 당부를 가릴 수 있게 하지 않고, 해당 단어가 나오는 문장을 눈으로 대충 찾아 그 한 문장만 읽어도 답이 바로 나온다는 점이었습니다(더 눈치가 빠른 애들이라면, 아예 본문은 읽지도 않고 이 고립 진술만 읽고도 바로 답을 고를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심화형이 아니죠. 다만 이 교재가, 중하급 학습자 기준인 레벨 2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습니다. 


unit 08-4, p99의 4번 같은 문제는 빈 칸에 단어를 채워 넣는 유형이니 대단히 어려워보이지만 왼쪽 본문에 똑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지간히 둔하지 않다면 애들이 다 힘들이지 않고 답을 써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15의 4번 역시 표시는 심화형이라고 나오지만 잘 보면 옆 지문의 단어를 거의 그대로 옮겨 쓰는 수준입니다. unit 10-4, 1번처럼 아예 본문의 순서를 바로잡게 하는 문제, 이런 게 진짜 어려운 문제입니다. 논리적인 구조, 혹은 서사의 자연스러운 형태가 무엇이다 하는 관념이 머리 속에 자리를 잡아야 풀이가 가능하기 때문이죠. p37의 4번은 옆 지문의 교훈(moral)을 묻는데 이런 게 심화형다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처럼 수준별 교재로 구성된 시리즈는 가급적이면 1~4까지를 모두, 아이한테 보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수학의 경우 당연하고 쉬운 문제를 잘하는 애한테 일일이 풀게 할 이유는 없고 그냥 고급으로 뛰어넘어도 됩니다. 그러나 영어의 경우 하급 리더라고 해도 고급 지문이 하급 지문의 모든 요소를 포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쉬운 문장은 쉬운 문장대로 밟아 나가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잘하는 애한테도 레벨 1 레벨 2를 가급적이면 생략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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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시선 -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
이윤희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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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 서두에서 "왜 훌륭한 미술가는, 여성이 칭송을 듣는 일이 드문가?"라는 질문부터 던집니다. 사회 모든 분야가 남성 중심 아닌 곳이 없었으나, 심지어는 미술 역시 결국은 남성 위주로 돌아갔다는 점은 새삼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래도 여성의 타고난 섬세한 감성이란 게 있어서 미술만큼은 꼭 그러란 법이 없었을 듯한데 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결국 여성이 어느 분야에서도 능력을 못 발휘했다는 건 사회 구조 자체가 억압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1970년대에 들어 다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고 합니다(p53). 실제로 저자는 책에서, 심지어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유력한 활동을 벌이던 여성 화가들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그들이 남긴 작품도 소개합니다. 힘 있는 필치와 작풍을 보고 당시 맹활약하던 몇몇 유명 남성 화가들을 대뜸 떠올릴 만하지만 그런 선입견을 정면으로 배반하듯 저작 명의가 여성들입니다. 이처럼 이 책은 팩트에 기반하여 여성 화가들의 실력과 성취를 독자에게 잘 소개하고, 흥미롭게도 도판까지 곁들이기에 우리 독자들은 자신의 두 눈으로 힘있는 실증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져자는 비제 르브룅의 일화를 소개하며 현재까지도 인기 있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오래된 믿음마저 사실은 남성들이 조작하거나 조장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책을 읽어 보면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주장이라고 해도 어떤 저자가 내세우냐에 따라 그 무게가 다른 듯합니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당대에 문제적 그림이었음은 우리 독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의 이상적인 나신은 아름답다며 찬양을 받아도, 실제 창녀의 군데군데 망가진 리얼한 누드는 "음란하다"며 비난을 받았다는 게 너무도 아이러닉합니다. 저자는 그 아릅답지 못한 현실 창녀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었다는 이유 말고도, 마네가 당시 욕을 먹었던 이유는 "그 주제에" 화면 밖(의 남성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대담한 시선에 더 큰 불쾌감을 당시의 (남성) 관객들이 느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미술사 대부분의 시기 동안 그림을 주도적으로 관람하고 비평적 언사를 표현해 온 관객은 남성이었다(p82)." 그래서 그렇게나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 누드가 화폭에 담아지거나 조각으로 표현되었다고 저자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유만으로는 남성 누드 역시 오랜 역사를 두고 즐겨 쓰이던 소재였던 점이 시원하게 해명되지는 않습니다. 


본격적인 서양 문명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았던 곳의 토착민들이 사진을 처음 보고 보인 반응은 카메라로 찍는 행위가 찍히는 이의 영혼을 뺏어간다는 경각이었습니다. 사실 이건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닌 게, 이 책에도 나와 있듯 누군가를 카메라로 찍는 행위는 "공격적, 폭력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생긴 사진작가(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행여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라도 하면, 어떤 여성들은 은근히 포즈(?)를 취하기도 합니다. 여성 사진작가 로리 앤더슨은 길에서 찍은 남성들의 시선 부분을 일부러 지웠는데, 이는 그들의 초상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공격적인 시선을 제거하기 위한 미학적 의도라고도 합니다. 이제 남성은 평소처럼 지나가던 여성을 일방적인 욕망이 담긴 시선으로 볼 수 없는데 적어도 앤더슨의 세계 안에서 그는 거세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음, 혹은 성 관련 컨텐츠를 소비하는 자세란 시대를 불문하고 서로 닳았습니다. 역사의 단면을 다룬 상상화도 아니고, 왜 먼 지역의 미개하고 개탄스러운 풍습을 화폭에 담았을까? 저자가 3-3에서 이야기하는 건 성매매, 물론 결혼시장이라는 미명으로 위장하지만 사실은 처참한 인신매매를 다룬 그림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남았냐는 질문입니다. 답은, 당대 파리나 런던에서도 얼마든지 이뤄졌을 인신매매를 화폭에 담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실제 그런 시장에 몸을 담고 매매를 해 봤을 권력, 돈 있는 남성들이 대번에 그림 시장에서 불쾌감을 느꼈으리라는 이유라는 겁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결국 이름난 명화의 창작, 거래 동기 중 상당수는 그저 예술이란 이름으로 윤색되었을 뿐 불측하고 더러운 욕구 충족에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거죠. 


누구의 잘못인가? 에덴 동산에서 축출당한 건 남녀가 똑같이 잘못한 건데도 어느 시대에나 이브가 더 욕을 먹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봐도 잘못은 동등한데 이 역시도 "이브가 더 잘못함"이란 일종의 정답을 어느 세대나 다 강요당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아담과 이브만큼 그림과 조소에서 자주 형상화된 주제도 없고, 이들 중 어떤 그림은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이브 쪽에 자연스럽게 비난이 쏠리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도 분명합니다. 프란츠 폰 스툭의 작품에서는 아예 이브와 뱀이 한몸인 것처럼 묘사된다고 합니다. 악녀로 손꼽히는 역사상의 여걸들이 뱀을 애완동물로 키웠다는 이야기도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크죠.


히브리의 여러 설화도 대단히 남성 위주이지만 다른 경우에 비해 여성 의존적 화소도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이 민족이 환란에 처해 있을 때 더 두드러집니다. 유디트는 어떤 색적인 팩터로 유명해진 게 아니라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여걸인데 심지어 이 캐릭터에 대해서도 성적 분위기를 가미하기도 합니다. 젠틸레스키의 유명한 그림은 화가 자신이 여성이다 보니 오히려 예외에 속하며 심지어 남자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한 여걸에 대해서조차 몽롱한 분위기를 입혀 성적 대상화하는 전통이 뚜렷한 건 정말 못 말릴 일이다 싶습니다. 


어렸을 때도 참 당혹스러웠던 게 어린이들 보라고 만들어 놓은 명화 도감에도, 아니 여성 누드가 나오는 건 또 그렇다 쳐도 왠 약탈, 납치... 성폭력의 직접 단계만 묘사 안 했다뿐 그 전단계를 소재로 삼은 게 너무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기대라도 해 보라는 듯 여성들은 그림 속에서 절망과 공포와 무력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약탈자인 남성들의 표정은 세상 둘도 없는 쾌락을 맛보기 직전인 듯 자긍심과 득의양양함으로 꽉 차 있습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납치 단계에서부터 이미 옷이 벗겨져 있습니다. 이런 묘사가 이뤄진 건 사실 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남성 위주의 시장에서 이런 그림이 고가에 거래가 되었다뿐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게 저자의 솔직한 답입니다. 다만 노골적인 음란물의 혐의를 벗기 위해 인체 묘사의 이상적인 터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성경이나 신화의 맥락을 애써 집어넣었을 뿐이라는 것. "여성에 대한 폭행의 장면이 아름답게 묘사되는 건 정당한 재현 방식인가?(p189)"


안그래도 새로 만들어지는 <백설공주>의 주인공에 히스패닉 여성이 캐스팅되어 화제가 됩니다. 캐리 메이 윔스는 흑인 여성으로서 가장 평온하고 자신에 몰입할 수 있는 순간, 즉 거울을 보는 때마저도 백인 남성들이 심어 놓은 강박관념, 즉 흑인 여성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가상의 폭력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아를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여성 미술가들은 연대의 수단으로 거울을 즐겨 채택하는데 이에는 일정한 맥락이 깃든 것입니다. 대체 왜 타고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떳떳지 못하게 여겨야 하는가? 저자는 이 대목에서 미술을 넘어 사회 체제와 의식 곳곳에 스민 차별과 혐오의 기제를 조명하며 무의식중에 새겨 넣은 세뇌와 기만의 악순환에서 스스로 벗어날 것을 촉구합니다. 


저자는 책의 맨앞에서 나혜석이라든가 프리다 칼로의 경우 예전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 있으며, 요즘 어린이들이 보는 책에 유독 자주 선정되어 다뤄지는 건 그녀들의 작품도 작품이거니와 그들이 살고 간 불꽃 같은 생애의 매력이 더 클 수도 있다고 잠시 언급했습니다(p16). 책 후반부인 p238 이하, 또 p249 이하에서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이 집중 조명됩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그간 인식되어 한국 어느 세대의 교과서에서도 자주 등장했고 칭송되었습니다. 마치 그녀가 남긴 예술 작품들이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증명이라도 하며 또 그런 윤리적(?)인 삶과 분리되는 순간 덩달아 평가절하나 되어야 한다는 듯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 어린 세대에게 소개되는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은 신화 속에서 박제화한 그런 삶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으며, 나이 든 이들이 보면 당혹스러울 만큼, 아니 단죄를 하고 싶을 만큼 분방하고 자유롭게 살다 간 이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 같은 소설가는 당대의 금기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면이 있으나, <롤리타> 같은 건 명백하게 페도필리아입니다. 이 사람이 21세기에 살았다면 오히려 더 큰 비판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소아청소년 상대 성문화는 칼 같이 단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폴란드계 화가 발튀스가 자주 소재로 삼은 "소녀"들을 다각도로 고찰하고 이런 남성 작가들이 즐겨 묘사하는 방식과, 여성 작가들의 시선과 터치를 선명하게 대조시킵니다. 바람직한 건 관음적 요소가 배제된 후자의 선택이라는 결론입니다. 


책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들의 충격적인 표현 방식이 소개되어 독자는 흔들리게 되는데, 이 책 앞표지에 쓰인 말 "훔쳐보지 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겠다."가 떠오릅니다. 확실히, 성적 욕망은 나만 혼자서 상대를 훔쳐본다는 상황 세팅 자체가 흥분을 고조시키며, 그저 대상이고 피사체가 되어야 할 그녀가 프레임 밖으로 나올 듯 나를 대등하게 지켜본다면 산통 다 깨지는 겁니다. 그림을 통해 그간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요해 온 누군가를 동시에 보게 되고,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프레임이 깨지고 나면 그녀뿐 아니라 이제 내가 새롭게 보인다는 점이 놀랍고 흥미롭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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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트 게임 - 세상에 없던 판도를 만든 사람들의 5가지 무한 원칙
사이먼 시넥 지음, 윤혜리 옮김 / 세계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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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든 축구든 이닝이나 제한 시간이 있으며 일정 요건이 충족되면 경기가 끝나고 승자 패자를 정해야 합니다. 또 팀제 프로스프츠의 경우 1년 정도를 시즌으로 삼아 우승팀을 따로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예를 들어 비즈니스의 경우 그런 식으로 승자를 정하지는 않습니다. 1990년대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한국 재벌 기업들 중 상당수는 망해서 없어졌고 현재 뉴스에 나오는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이름만 대우일 뿐 그룹 창업자 김우중씨도 죽었고 그 후계자가 맡아서 경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20년 전에는 이름도 못 들어본 기업들이 지금은 대기업 반열에 올라 활발히 사업을 벌이지만 이들 중 과연 몇이나 십 년 후에 살아남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p20에서 저자는 비즈니스야말로 무한게임의 대표적 예라고 하는데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승자도 없고 또 영원한 패자도 없는 게임입니다. 사실 1980년대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어떤 기준을 잡으면 삼성이 1위였고 다른 기준을 잡으면 현대, 심지어 럭키금성(현재의 LG, GS 등의 전신)이 더 높은 순위를 점할 때도 있었습니다. 애초에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데 설령 단기간으로 잡는다 해도 승자 패자를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그런데 저자는 유한게임일 때와 무한게임일 때 플레이어들의 전략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책에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독자인 저는 책을 읽으면서 이 점은 특히 유한게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프로야구 같은 데에 잘 들어맞는다 싶었습니다. 프로야구(현재 명칭 KBO 리그)에서는 몇 번의 시즌을 우승했냐를 두고 감독이나 팀의 업적, 성취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단기의 고성적이나 우승에 집착하다 보면 특정 선수를 혹사하며 운용할 수가 있습니다(이른바 "갈아넣기"). 특정 연도에 반드시 우승헤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처럼 "갈아넣기"를 일삼다 보면 결국 그 팀은 향후 몇 년, 혹은 십 몇 년 동안 하위권에서 맴돌 수 있고 그 혹사된 선수들도 커리어가 훨씬 짧아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유한게임의 대표적인 폐해라는 것입니다. 


무한게임이 되면 게임이 장기전이 되므로 기업의 단기 실적에 집착(p152)하지 않고, 오래살아남아 장기간 호실적을 올리거나 아예 게임체인저가 되는 선택이 가능해집니다. 흔히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절대적인 미덕으로 꼽기도 하는데, 임기가 정해진 단기 CEO들은 그해 주총에서 주주들에게 내세울 업적만 중시하기 때문에 기업의 장기 투자를 소홀히할 수 있습니다. 이재용씨가 감옥에 있을 때 삼전은 단기 실적에 치중하느라 무리하게 원가를 절감하려 들어 결국 지난번 고스파동이 일어났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책 p28 같은 곳에서는, 특히 유한게임에 치중하는 경영자들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다 장기를 보고 과감히 행동하는 경영자들은 오히려 안정된 현재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1990년대 전반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했던 이건희씨의 결단이라는 게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는 이미 부친으로부터 한국 최고의 기업을 물려받았고, 경쟁 기업이었던 현대의 당시 삽질 때문에 그저 그 당시의 위치만 지켜도 아쉬울 게 전혀 없던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진 걸 과감하게 특정 분야에 베팅하여 몇 십 배로 자산을 불렸고, 경영 혁신도 "최고의 품질"에 초점을 맞추어 오늘날 지구인이 다 알다시피하는 글로벌 일류 기업을 만들어냈습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삼성 임원진이 해외 소비자들이 삼성을 일본 기업으로 안다면서 이런 착각이 도움이 된다는 인터뷰가 있었는데, 지금은 갤럭시나 삼성가전 덕분에 코리아라는 나라도 덩달아 알게 됩니다. 외국의 IT 인재가 삼성에 입사하러 왔다가 그 나름 높은 기준 때문에 좌절하고 돌아가기도 하는데 일단 외국의 청년 인재에게 한국 기업이 입사의 꿈을 심어 주기도 한다는 자체가 놀라울 뿐입니다. 


독자인 제 생각으로, 지난시절의 삼성이야말로 또 고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이야말로 인피니트 게임이 뭔지를 제대로 알았던 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박정희 때 거지 나라에서 이제 먹고는 살 수 있는 나라로 바꾸었다, 이런 레벨하고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냥그저그런 수준에서 일류로 도약하는 건 넥스트 레벨 이슈이기 때문이죠. 흙수저가 건실한 중견 기업을 일으킬 수는 있는데(이것도 물론 보기 드물지만), 이런 기업이 재벌급으로 도약하는 건 완전히, 완전히 다른 난이도입니다. 


책에는 20세기 전반 소련의 과학자였던 바빌로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스탈린에 의해 탄압 받고, 동시에 그의 조국은 2차대전이 터지자 레닌그라드 공방전 등 나치 독일의 침략에 의해 엄청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빌로프의 대의에 찬성하던 동료 과학자들은 이런 이중고에도 굴하지 않고 본연의 업적에만 몰두했다고 하는데, 요즘 돈 몇 푼만 더 쥐어주면 불순한 나라의 불순한 기업에 매수되어 일회성 도구로 쓰이다가 결국 어느 나라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불쌍한 일부 엔지니어들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화지요. 이런 정의로운 과학자들 역시,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인피니트 게임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여기까지 책을 읽고도 독자들이 이미 눈치를 챌 수 있겠지만, 저자가 "유한 게임"이라 부르는 판에서 플레이어들은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목표에 보다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무한 게임 플레이어, 적어도 자신이 지금 무한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각하는 이들은 보다 긴 안목으로 상황을 봅니다. 오늘 보고 내일 다시 안 보겠다 싶은 사람하고는 얼마든지 안면몰수하고 더티한 게임을 할 유인이 생기는 법입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무한게임을 하는 사람의 특징은 "대의 명분을 보고 간다"입니다. 


오래가는 기업은 그 수뇌가 단기 이익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보면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 운 좋게 큰 돈을 손에 넣고 한때 행세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잘나가는 기세가 언제까지 가느냐가 문제인데, 모든 사장 모든 회장이 그 끗발 그대로 가는 게 아니고, 그릇과 깜냥이 안 되는 인간은 반드시 무리수를 두다가 꼴아박고 전과자가 되거나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해서 전보다 못한 처지로 떨어집니다. 


우리가 무슨 정주영이다 이병철이다 하는 뭐 이런 사람들은 그런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기보다 훨씬 먼 그림을 보고 승부를 걸었기에 그 기업이 이처럼 자식 대에까지 오래 가는 거지, 무슨 자선사업가로 살았다거나 심성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었으나, 적어도 남들 눈에 그 속이 훤히 내비치는 얕은 수는 안 썼다는 거죠. 졸부, 사기꾼이나 잡범을 보면 제딴에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기발한 수를 내는데, 남들이 절대 눈치를 못 챌 것이라고 엄청 의기양양해 합니다. 남이 보면 속이 그 훤히 들여다보이는 꼴이 참 우습기 짝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수중에 돈이 오래 머물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피니트 게임 플레이어는 이처럼 주변 사람들로부터 진정하게 마음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단어 선택에도 신중합니다. 저자는 예를 들기를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오늘 나에게는 계획이 있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했던 그 유명한 연설에 주목하자고 합니다. 꿈이 있다고 하니 설령 흑인 민권 운동에 두려움을 느끼고 경계했던 백인들조차, 저 연설을 듣고 인류 보편의 양심과 가치에 호소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인피니트 게임 플레이어는 사려깊습니다. 사려깊다는 평판을 듣기 때문에 그의 활약과 노력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 받고 또 오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미국 자본주의에 크게 실망하고, 이 체제가 과연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하며 회의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게, 2008년 주식시장으로 대변되는 금융 시스템이 대단히 큰 모순에 가득하고, 소수의 비합리적인 이익에만 종사한다(실제 기여하는 바도 적은)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져야지, 오히려 거액의 성과금을 나눠갖는다, 뭐 이래서는 안 되죠. 차라리 그런 돈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업을 전개하는 사업가한테 가도 가야 마땅한 것이고.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밀턴 프리드먼이 한 말, 즉 "기업의 목적은 언제나 이익 극대화이다"를 거론하며, 이제는 이런 마인드로 기업을 운영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합니다. 


무한게임 리더는 직원을 자원으로만 보지 않고, 먼 여정 동안 같이 가야 할 동료로 보기 때문에 직원에 대한 처우부터를 달리합니다. 구태 블랙 기업이나 일부 악질 사회단체에서 직원들을 그저 expendable로 보고 함 부로 쓰고 함부로 버리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희생하게 만드는 걸 보면 이들의 안목이 얼마나 좁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로는 노동이 최고 지상의 가치인 양 떠들지만, 실제로는 일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마치 자신들이 그들에게 큰 은혜나 베푸는 양, 자본가가 노동자를 하대하는 것보다 더 졸로 취급합니다. 영혼을 무슨 집단내 촤상위 포식자에게 위탁한 것처럼 얼빠진 혼자만의 충성을 바치는 최말단 분자의 모습을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건 사람이 아니라 좀비라고 봐야 마땅합니다. 


이 책에서는 그저 주주에게만 최선을 다하는 회사가 아니라, 주주가 아니라도 예컨대 공장이 위치한 지역 내 주민이나 불특정 다수 소비자처럼 자신의 회사와 직간접으로 이해를 함께하는 이른바 셰어홀더들도 중시하는 회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포드라든가 잭 웰치 같은 사람들도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지역 주민이나 노동자에게도 매우 전향적인 태도로 대한 것입니다. 판을 길게 보고 더 깊은 사려를 베풀어 사람을 대하는 것과, 날품팔이처럼 내일 이후로는 이 사람을 안 볼 것으로 작정하고 이용 대상으로 삼는 쓰레기들의 미래가 결코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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