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스파르타쿠스는 어쩌다 손흥민이 되었나 건들건들 컬렉션
하마모토 다카시 외 지음, 노경아 옮김 / 레드리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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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이 생겼을 때 담백하게 당사자 둘의 물리적 대결로 해결하는 건 인류의 오래된 관습입니다. 두 사람의 피지컬이나 격투 실력이 비슷할 때에는 더 간절하고 더 억울한 쪽에 승산이 있겠으므로 이 방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소리 같아도, 중세에 벌어진 귀족, 기사 사이의 많은 다툼을 해결하는 데 이 방법이 큰 지지를 얻은 건 이런 이유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이런 식으로 당부를 가리자면 폭력배가 매번 올바른 승자가 되는, 아주 부당한 결과가 빚어지기 십상이라서 근세 이후 문명 사회에서는 결투를 칭송하기는커녕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형사 범죄로 규정하기에 이릅니다. 책에서는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 영향도 분석합니다(p120).

30년 전쟁의 향방을 프랑스 왕국에 이롭게 이끈 노회한 정치가였던 리슐리외 추기경(p62, p106)은 루이 13세를 보필하며 내정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1626년의 반결투법이 의회에서 통과되게 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p63,  또 p152 등에 나오지만 이 결투라는 방식은, 명예라는 게 뭔줄 알고 또 지킬 명예라는 게 있기나 한 귀족들의 전유물입니다. 루이 14세 때에도 결투에 몸이 단 양 당사자를 똑같이 엄벌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비로소 분쟁이 해결되었다는 사례가 책에 나옵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웨덴, 러시아에서도 결투가 군주의 명에 의해 금지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인명중시나 인도주의 같은 의도가 아니라 절대 왕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고 합니다. 단 이후 계몽군주의 시대(p111)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지긴 합니다.

그럼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이 몰락했으니 이 결투라는 관습도 자연히 같이 사라졌을 법합니다만 그렇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저자는 오히려, 이때부터 근대적 결투가 새로 시작되었다고까지 단언합니다. 인간의 욕구 중에는 명예욕이라는 게 있고, 결투 신청을 통해 구 귀족처럼 품위 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것도 속물 근성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단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널리 결투가 퍼지지는 않았는데, 이 배경에 대해서는 책에 특별한 설명이 나옵니다.

결투는 이른바 신명(神命) 재판의 일종이었습니다(p47). 물론 모든 결투 재판이 중세에 교회 주관이었던 건 아니고, 종교와는 무관하게 귀족, 왕의 공권력에 의해 열린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820년 바르셀로나 백작 베라가 이슬람 세력과 결탁하여 반역하려 들었다는 혐의를 쓰자, 루도비쿠스 황제는 고소인인 루시용 백작의 대리인 사이의 결투를 마지못해 승인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고트 족의 명문 혈통이었으며 고트 전통 역시 결투로 누가 신의 뜻을 얻었는지 가리는 방식을 좋아했습니다. 이 역시도 신명재판이었기에 패자가 된 바르셀로나 백작은 죄를 자인하고(!) 다만 황제의 자비로운 사면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습지만, 신이 반대편의 손을 들어 주어 결투에서 이기게 했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이런 재판은 중세말에 이르러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일단 종교 당국이 폭력을 점차 금하게 되었고(p63, p96), 대중 역시 그저 물리력이 우세한 자(혹은, 그저 결투 당일 운이 좋았던 자)가 정의롭게 판정되는 이런 결과에 대해 점차 불신하게 되었다는 설명인데 상식에 비추어서도 타당합니다. 중세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 <엘시드>에도 자우스팅 장면이 있습니다. p80, p194 등에 나오듯 결투는 이를 지켜보는 대중에게 하나의 오락으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와 스웨덴 왕 칼 9세 사이에 있었던 서신 결투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후자가 덴마크 측의 칼마르 점령을 항의하며 일대일 물리적 결투를 신청하자 전자가 "결투까지 갈 것도 없이 당신에게는 이미 신의 벌이 내렸음이 분명하다! 결투니 뭐니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벌써 정신이 돈 것 아니겠는가?"라며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확실히 크리스티안 4세의 반응이 훨씬 성숙하고 이성적입니다. 이 일은 1611년에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 말에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항우가 유방더러 일기토를 신청하자, 유방이 "남아라면 당연 지혜를 놓고 한판을 겨룰망정 어찌 폭력으로 자웅을 가리겠는가?"라며 상대를 점잖게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실제 싸움이 벌어졌다면 이미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데다 변변히 무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는 평민 출신 유방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을 텐데 약아빠진 그가 이런 방식을 수용했을 리 없습니다.

반면 19세기 서부개척시대에 벌어진 미국의 결투는 귀족적이라거나 명예로운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야만적 행태였습니다. 등 뒤에서 총을 쏘지 않는다는 영화적 허구가 퍼져 있긴 하나 그런 신사적 낭만이 무법천지 미국 서부에서 통했을 리 만무합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영화에서 즐겨쓰던 대표적인 배경이 애리조나인데 이곳은 합중국 가입이 보류되던 준주(準州. territory)에 블과한 지위였습니다. 이 책에는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결투 그 유명한 사례들도 소개되는데 하나 아쉬운 건 미국사상 아마 가장 큰 화제가 된 결투였을 알렉산더 해밀튼과 애런 버 사이의 총격전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여튼 책은 후반부에서 나치 독일이 어떻게 결투를 하나의 제의(際儀)와 오락, 스포츠로까지 발전시켰는지 분석합니다. 이 점이 책의 품격을 높이며, 독자에게도 그저 역사잡학 가십거리의 제공을 뛰어넘어 체계적이고 통찰력 있는 역사 고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미도 있고, 생각할 소재도 많았던 고마운 책이었어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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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1 - 순풍과 역풍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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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혹은 광개토태왕(太王)은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걸출한 역량을 보여 준 정복 군주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때로부터 천 년 후에 등장한 명 3대 황제 영락제도 그를 흠모하여 연호를 그리 지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광개토태왕이 활짝 열어젖힌 위대한 역사는 이후 이백여년 동안 주변의 강호들이 감히 고구려와 한반도를 넘볼 수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이 대하소설 1권은 아직 광개토대왕의 시대와 거리가 먼, 고국원왕이 다스리던 고구려와 이제 막 국위를 떨치기 시작하던 근초고왕 구가 통치하던 백제의 시대를 다룹니다. 5호 16국의 난립으로 혼란스럽던 중국은 요하 서부를 채 경영할 능력이 되지 못했기에, 이 힘의 공백을 백제의 명군주 구가 파고들어 큰 이익을 취하고 동시에 국격을 선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요동을 예전부터 다스려 온 고구려에 위협이 되고, 또한 당시에 북중국을 통일했던 저족 출신 영웅 부견이 황제로 있던 전진(前秦)의 위신에도 누가 됩니다. 따라서 고구려와 전진은 손을 맞잡고 각각의 방해물인 백제와 동진을 제압하려 듭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국제 정세는 이렇지만, 특히 고구려 국내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 또한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선 현재 고구려를 다스리는 군주는 사유라는 인물인데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 아는 고국원왕입니다. 고국원왕을 지지하는 신료나 귀족도 많지만,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 거상(巨商)인 하대곤 같은 사람은 그의 군주적 자질을 대단히 낮게 평가합니다. 한마디로 금상(今上) 사유는 우유부단하여, 대외적으로 후연(後燕)의 모용씨에게 겪은 국치를 씻기는커녕 나라를 단결시켜 이끌어갈 능력조차도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죠.

그럼, 이 웅대한 포부를 품고 우국충정에 가득한 하대곤이 염두에 둔 왕재는 누구인가? 모용씨와의 담판을 통해 왕후와 태후를 귀환시키고 자신은 초야에 묻혀 버린, 왕제(王第) 무야말로 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주변 오랑캐를 진무하며 남쪽의 백잔(백제의 멸칭)을 굴복시킬 왕재라고 그는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는 시운을 잘못 만나 세상으로부터 잊혀졌으며, 그의 아들(즉, 현재 왕의 조카) 해평이 언젠가는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여겨 양자로 들여 지금껏 비밀리에 키웠습니다. 해평이 그토록 고귀한 혈통과 운명의 소유자임은 심지어 본인도 모르고 있었으나, 이 1권 중반부에서 하대곤이 드디어 고백합니다. 그러나 과연 해평은 대단한 포부와 국량을 지닌 청년이라서, 이 사실을 드러내기보다 둘 다 은인자중하기로 결정하며 하대곤 역시 그에 수긍합니다.

이 1권은 젊은이들의 애정사도 제법 복잡하게 얽힙니다. 우선 아름다운 용모에 빼어난 무술 솜씨까지 갖춘 연화라는 여인이 있는데 하대곤의 종제(從第. 즉 사촌동생) 하대용의 딸입니다. 해평은 이 연화를 좋아하지만 연화는 거부하는데 대외적으로는 둘 사이가 6촌간이라서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아무 혈연 관계도 아님을 해평만은 알고 있으나 이 사실을 발설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연화는 이련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국원왕의 둘째왕자를 좋아하는데 이련은 해평에게 사촌형제가 또한 되는 셈입니다. 자신보다 자질도 떨어져 보이는 사촌에게 왕좌와 여인 모두를 빼앗길 판이니 젊은 혈기를 도무지 억누를 수 없으나, 하대곤은 사세가 불리하다며, 자신은 고국원왕에 비해 힘이 부족하고 해평은 이련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그저 참는 게 상책이라며 해평을 다독입니다.

하대곤은 대사자 우신과 일단 손을 잡고 우신의 딸을 (연화 대신) 왕자 이련과 맺게 하려는 책략을 시도합니다만 순탄치는 않습니다. 이무렵 고국원왕은 대군을 일으켜 평양까지 진군하고 백제를 치려 드는데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백제 장군 막고해의 기막힌 전술을 채용한 근초고왕 구의 지혜로운 대처 앞에 패퇴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하대곤의 가신 두충은 백제의 세작 사기(이름이...)에게 속아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는데 아마 2권에서 상인 조환으로 거듭난 후 복수를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편 고국원왕에게 직언을 하다 투옥된 괴승 석정은 뒤늦게 그의 가치를 알아본 고국원왕에게 격식을 갖춰 모셔지며 나라를 위한 큰 계략을 설파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 외에도 혜안을 갖춘 을두미와 그의 제자 추수(말갈족 츨신)도 앞으로 많은 활약을 할 듯한데 이처럼 이 소설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의 흥미를 더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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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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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일주>는 "쥬울 베르느", 요즘 표기로 쓰면 쥘 베른이 지은 멋진 SF 고전입니다. 확실히, SF라는 말을 "공상과학"이라 옮기는 건 문제가 있는 게, 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보면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유쾌하고 기발한 상상을 담은 데다, 자연지리적으로 치밀한 조사와 지식에 기반하여 창작되었지만, "공상"의 요소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필리어스 포그라는 매우 개성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 공적만으로도 문학사에 길이 남아 마땅합니다. 1960년대에 영국 배우 데이비드 니븐이 이 역을 맡은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지금 봐도 재미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집으로 배달되는 조간신문이 구겨진 채 배달되자 하인더러 다시 새 걸로 한 부 사오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고, 요즘 일부 불량 제책본에서 보듯, 페이지가 아직 잘려지지 않은 채 배달된(물론 19세기 런던 타임즈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신문을 포그 선생이 편지 봉투 자르는 칼로 능숙하게 자르는 그 대목이 오리지널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은 다소 장광설이 늘어지는 게 하나의 공통점인데, 이 작품 초반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하인 파스파르투는 캐릭터 자체보다 더 수다스러운 전지적 화자에 의해 요란하게 소개되는데 작품의 프로타고니스트가 영국인이요, 고작 산초 판사 격의 사이드킥이 프랑스인으로 설정된 건 의외의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작가가 프랑스 사람인데). 개인적으로 저는 영미식 군대에서 사병이나 하급자에게 징계를 내릴 때 체벌을 가하지 않고(물론 야만적인 수단이지만), 쫀쫀하게(?) 벌금이나 감봉 처분을 내리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가스 잠그는 걸 잊고 집을 나온 파스파르투에게 "가스 요금은 자네가 내!"라고 하는 포그의 말이 우스웠습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마치 현대 헐리우드물처럼, 이중삼중의 흥미 요소를 진행 전반에 깔아 놓은 점도 놀랍습니다. 필리어스 포그 나리께서 클럽 동료들에게 순전히 자신의 지식과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그 큰 돈을 걸고 무려 세계일주에 즉석에서 나선 것도 놀랍지만(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여장을 챙김), 공교롭게도 하필 은행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범인의 행방이 핫이슈였던 시점 그런 결정을 내린 통에 주변인물들은 물론 독자들마저도 필리어스 포그를 의심하게 되니 말입니다.

여기서 또 주목해 볼 것은, 프랑스 작가인 쥘 베른이 당시 영국 금융기관 내의 질서에 대해, 그야말로 도불습유, 즉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안 주워가는 놀라운 사회적 신뢰가 지배하는 분위기였음을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필리어스 포그가 혁신 클럽(원어는 Reform Club입니다)에 가입할 수 있게 추천해 준 이들이 베어링 형제라고 나오는데, 1995년 닉 리슨이라는 신출내기 금융인의 실수로 232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파산해 버린 베어링스 은행이 생각나기도 하죠. 작중에서 필리어스 포그가 과연 모험에 성공할지를 두고 내기가 벌어지며 아마도 성공 시 상금을 딸 수 있는 권리가 증서화하여 시장에서 거래까지되는 모습이 또한 놀랍습니다. 심지어 현물 말고 선물(future) 상품까지 등장합니다. 런던은 이처럼 19세기에조차 파생금융시스템이 고도화했던 것입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아니 구태여 세계를 한 바퀴 다 돌게 아니라 적당히 카이로 같은 데서 놀다가, 지중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빠져 유유히 귀항하면 알 게 뭐겠습니까? 그러나 거액의 판돈이 걸린 내기에서 깐깐한 영국 신사들이 그리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리 없고, 이 작품을 보면 일일이 영사관에 들러 사증(査證)을 받는 걸로 나옵니다. 이 사증 발급 여부는 작중에도 나오듯 전신(電信)상으로 런던에 타전되어 필리어스 포그가 지금 지구상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까지와 함께 당사자들에게 공유되는 식입니다.  

이 작품에는 영국인의 특징적인 행태가 다채롭게 묘사되는데 p126에는 인도 갠지스 강의 아름다운 계곡을 앞에 두고서도 보려고 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 앞 p61을 보면 "영국인이란 관광조차 하인을 시켜 대리하는 족속"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게 뭘 개탄한다거나 경멸하는 의도가 아님은 물론 독자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p71에서는 또 이집트 홍해에 도달한 포그가 "태초의 추억을 품에 안은 이곳"을 구경하려 들지도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그런가하면 p81에서는 고양이조차도 한 명의 "여행자"로 융숭히 대접할 것을 지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실 이 대목은 현대 PC 관점에서라면 인종차별로 단정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또하나 흥미로운 캐릭터는 픽스 헝사인데, 마치 장발장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자베르 경감처럼 주인공을 쫓아다니지만 물론 일종의 강박증 환자인 자베르와는 달리 유쾌하고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상식의 세계에 철저히 머무는 그가, 훨훨 상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는 포그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그토록 약이 올라 포그를 망치려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상식으로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완성될 수 없는 과업이어야 하며, 이를 증명하는 게 범죄자로서 포그를 법정에 세우는 것보다 사실은 더 중요한 동기였던 거죠.

p163을 보면 쥘 베른의 놀라운 과학 상식, 또 항해공학적 지식이 잘 드러납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참조해서 소설에 끼워넣었을지 경이롭기만 합니다. 이런 대목들 때문에 이 소설은 그저 픽션이 아니라 독자들을 상대로 "80일간의 세계일주" 정말로 가능하다, 운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바로 작가 자신의 웅변을 매뉴얼처럼 증명하는 하나의 시방서가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p367의 루주3에 보면 바이런 경을 설명하며 "장애자"였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김석희씨가 연로한 분이라서 별 생각 없이 이런 단어를 쓴 듯합니다만 편집측에서라도 교정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작품은 또한 마지막의 반전으로도 유명한데 그 반전장치 또한 자연지리적 원리에 의한 것이라서 독자는 전율마저 느끼게 됩니다. 다른 하나의 반전이 있다면 정말 재수없는 이지적, 이기적 신사인 필리어스 포그가 드디어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여성과 잘된다는 로맨틱한 결말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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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의 목격자
E. V. 애덤슨 지음, 신혜연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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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도 데이트 폭력이다, 혹은 가스라이팅이다 해서 여러 말들이 많습니다. 서로 사귀는 이성 간에는 부모, 친구보다도 훨씬 내밀한 사정까지 공유되는 게 보통인데, 나는 상대를 그토록 믿고 의지했건만 상대는 전혀 그렇지 않고 나를 이용할 생각만 품었다면 그 배신감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하물며 그 과정에 폭력까지 따른다면...



이런 "나쁜 남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간 그런 사이코패스들을 소재로 삼고 또 악질적인 범죄자로 묘사한 스릴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 작품에도 처음에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대니얼, 또 주인공의 전 남친이었던 로렌스 같은 잘생긴 남자들이 등장해서 여성 독자들의 분노 그 초점을 이룹니다. 대니얼은 저처럼 대놓고 살인자이니 말할 것도 없고, 로렌스 이놈도 되어가는 꼴을 보니 분명 끝에 가서 가장 흉악한 스토커, 바람둥이, 배신자로 등장할 것만 같습니다. 



이런 나쁜 남자(들)는 일단 잠시 잊고, 이 소설은 두 명의 여성이 번갈아가며 1인칭 화자로 등장합니다. 벡스와 젠이 그들인데, 우리 독자들에게 비치기로는 벡스가 더 성숙하고 감정이 안정적이며 모르긴 해도 더 넉넉한,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습니다. 물론 그런 말은 없지만 다른 한 명의 화자인 젠이 너무도 불안정하고 상처가 많은 데가 자기 일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타입이라서 독자는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혹시 벡스와 젠이 단순한 친구를 넘어 더 내밀한 사이인가 생각도 들었고, 젠이 벡스의 좁은 집을 떠나 부유한 은퇴 저널리스트 페넬로페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벡스가 뭔지 모르게 불편해하는 걸 보고 더 그런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습니다. 이 정도는 리뷰에서 밝혀도 될 것 같은데 결론적으로는 전혀 아닙니다. 소설 맨앞에 제이미와 알렉스라는 커플도 나오기 때문에(이들은 끔찍한 살인 현장의 목격자이기도 합니다) 더욱 그런 착각으로 기울었는데 작가가 교묘하게 이런 장치를 만든 듯도 합니다. 



제이미는, 그런 이들에 대해 쏟아지는 사회적 편견과는 아주 달리, 살인의 그 끔찍한 현장에서 비극을 막으려고 매우 영웅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제가 다소 이상하게 본 건 알렉스의 반응이었는데, 애인의 그런 행동에 대해 다소 서운해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마치 그럴 열정과 과감함을 자신에게 더 쏟아 주었으면 어땠을까 여기는 것처럼.... 이 반응은 소설 초반에 잠시 나오고 마는 정도인데, 이후 p348에서 사실임이 결국 드러나긴 하더군요. 물론 이 점이 미스테리의 진상이라든가 결말과 큰 관계는 없습니다(관계가 있으면 리뷰에 이렇게 쓸 수가 없죠). 



이 소설은 아무래도 진상을 끝까지 숨겨야 하다 보니 이런저런 다른 주변 인물들에게 비중을 골고루 주는 편입니다. 독자도 장르의 관습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보니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은 절대 범인이 아니겠지, 따라서 지금 이 대목에서 이런 대사를 하거나 이런 반응을 드러내는 건 다 페이크겠지 일일이 정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결말에서 보이는 행동은 진짜 반전이었습니다. 이런 멋진 포인트가 있으니 혹 중후반부에 범인이 누군지 드러나더라도 끝까지, 진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집중해서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 범인이 누군지를 알아내는 게 독서의 포인트가 아니며 특히 이 작품 같은 경우는 그렇습니다. 사실 서두부터 자꾸 시선을 OOO에게 돌리려고 애 쓸 때부터 아 얘는 범인이 (오히려) 아니겠구나 누구나 눈치를 챌 수가 있습니다. 그럼 남은 사람이 ㅎㅎ 사실 몇 안 됩니다. 



살면서 상처를 많이 받고 큰 사람은, 주변의 누구한테 자꾸 의지하려고 듭니다. 그럼 그런 사정을 다 받아 주고 친하게 지내 주면 또 이런 사람은 의외의 까탈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 마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라도 주장하는 양 또 이상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사실 이런 유형하고는 안 엮이는 게 나은데... 소설에서 젠은 우리 독자들에게 많은 짜증을 안깁니다. 그녀가 매체에 연재하는 칼럼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일종의 관종짓입니다. 그래서 사려 깊은 OOO은 p196 같은 곳에서 "고백적 칼럼니스트"라는 표현에 회의를 드러내며 젠에게 정직한 충고를 합니다. 그러나 젠 같은 미숙한 인격의 소유자가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p139에서 OOO는 젠에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젤 쓰레기"라며 극단적인 말을 합니다. 물론 독자가 당황해하겠으므로 OOO는 아 이 단계에서 (정상이 아닌) 젠에게 극약처방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합니다.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p63에서 OOO는 젠의 행동이 자신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나가자 크루아상 상자를 쓰레기통에 바로 버리는 등 정상이 아닌 행동을 이미 이 단계에서 합니다. 그러니 독자가 눈치가 빠르다면 이 사태의 진상 그 큰 줄기를 벌써 감 잡을 것입니다. 



범인이 벌써 이렇게 이른 단계에 드러나 버린다면 읽는 재미가 없지 않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상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추리하는 재미가 여전히 남았고, 또 소설 맨처음을 장식한 살인 사건 역시 그 실체 전부가 안 드러났기 때문에 독자는 진짜 숙제를 아직 처리해야 합니다. 사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기존 장르물과 스스로를 차별화합니다. 



젠은 소설 전반부에서 독자를 참 짜증나게 합니다. 이 사람 하나만 행동을 똑바로 하면 많은 주변 사람들이 편해질 텐데... 하지만 소설이 결말로 치달으면서 오히려 젠은 우리 독자들과 많은 아픔, 단점, 그녀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었음이 드러나는 여러 과거를 오히려 공유하는 듯 보입니다. 진짜 악당이 실체를 드러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찌질이의 최고봉 같았던 젠을 서서히 우리 친구로 만들어가는 것도 작가의 능력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말이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아마 이 결말을 예상한 독자는 제가 장담하건대 지구상에 없지 싶습니다. 다 읽고 나서 한 방 맞은 느낌이니, 제발 범인의 정체를 알았다고 소설 읽기를 도중에 멈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너무 쉽게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는, 대개 진짜 문제가 더 숨어 있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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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 인간
김준성 지음 / 홍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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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준성은 경성고상, 즉 이후의 서울 상대 전신이었던 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경제고위관료(부총리 포함), 한은 총재, 삼성전자 회장, 이수그룹 회장 등을 역임한 분이고 2007년 타계헸습니다. 지금 이 책은 이분이 쓴 소설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스타일이 매우 특이하고 소재가 기발합니다. 군데군데 엿보이는, 당시로서는 제법 높은 소양 수준이었을 과학 지식도 눈에 띕니다. 


빛이 들릴 수도 있을까? 지상의 다양한 생명체는 우리 인간이 보지 못하는 빛깔(어차피 인간 편의로 구분한것이므로 의미 없습니다만), 들리지 않는 소리를 감지합니다. 그래서 이런 소음을 내어 벌레를 퇴치하는 기계도 있고, 인간이 보지 못하는 적외선, 자외선을 알아 보려면 특수한 장비를 써야 합니다. 


1988년작 영화 <프레데터>를 보면 가공할 만한 전투 능력을 지닌 생명체가 지구에 훈련을 위해 잠시 방문하는데, 쓰는 장비도 뛰어나고 타고난 생체 능력도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시각 능력이 매우 원시적입니다. 우리 눈에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자연의 형태와 색을 있는 그대로(어폐가 있지만) 보지를 못한 채 그저 형체만 감지하는 식입니다. 반사신경과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나니 어차피 그들에게는 필요가 없지만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처럼이나 섬세하게 형체와 색을 분별하게 진화한 건 그만큼 아름다운 걸 좋아해서가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아름다운 걸 보고 기뻐하는 능력을, 험한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과 얼마간 바꿔치기 했다는 뜻이니 더 놀랍습니다. 


주인공은 빛이 들린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배울 만큼 배운 분이고 자신이 느낌이 그저 착각이 아니라고 여길 만한 근거도 있습니다. 말도안되는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어느 의사 역시 이 환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집중 상담을 합니다. 확률이 낮긴 하나 잘만하면 학계를 근본에서 뒤집을 엄청난 발견을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소리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빠르므로 정말로 (일부를 향해서라도) 이런 능력을 가진 이가 있다면 편익보다는 엄청난 착란 때문에 차라리 생존과 일상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환자와 의사는 결국에 이 환자의 지나간 과거 중 어떤 사건, 기억이 이런 현상을 초래했음을 알게 됩니다. 책프 25기 16주차에 리뷰한 유재용 작가의 <어제 울린 총소리>와도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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