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폐경 - 2005 제5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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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성격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엔 황순원문학상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물론 황순원문학상이 있는 줄 몰랐다는 거지 우리 나라의 문호 황순원이라는 분을 모른다는 게 아닙니다(24기 46주차에 <신들의 주사위>를 리뷰한 적 있고). 생전에 박완서 작가는 황 선생 서거 당시에 "이런 분이 돌아가실 때는 대통령이라도 나와 조상(弔喪)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최근 동 작가가 <하얼빈>을 발표하여 다시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여튼 이 작을 읽어 봐도 김훈씨 특유의 집요하고 치밀한 주제 탐구 태도가 돋보이긴 합니다. 이순신의 가장 힘든 순간들을 다뤘던 <칼의 노래> 같은 걸 봐도 그렇고 말입니다. 

폐경 같은 소재는 남자가 알기도 어렵고 알려 들지도 않는 게 보통입니다. 여성의 가치가 그저 출산 가능 여부에만 달려 있던 과거도 아니고, 특정 생리 기능이 멈춘다는 사실에 당사자가 큰 충격을 받거나 우울해질 이유는 사실 없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사회에서 해 오던 일을 이어갈 수 있으며 교우 관계가 끊기거나 가족으로부터 퇴출되는 것도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이 소설에 자세히 묘사되듯) 이런저런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고(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고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어떤 전환점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제가 참 답답하게 느낀 건 당사자의 한없이 무기력한 태도였습니다. 아니 요즘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다 있나, 폐경이라는 게 어느 여인에게나 닥치는 어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저 여성에게 개인적으로 가하는 해꼬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물론 남편은 유달리 뻔뻔스럽고 질이 안 좋은 인간일 뿐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겠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여인이 겪는 모든 고충, 심지어 생리적 폐경과 그에 수반하는 모든 불편들도 다 저 남편이 그 원인 제공자인 듯 보입니다. 

한편 그 딸도 참 문제인데, 왜 이혼을 하면서 더 챙기지 못했냐고 합니다. 이게 엄마를 배려하는 소리가 아니라, 아빠가 딸 유학 비용을 엄마가 대는 걸로 했는데 엄마가 덜 챙기면 자신이 쓸 돈이 줄어서라고 합니다. 왜 자신은 아빠한테 연락해서, 저런 치밀하고 악착스러운 태도로 돈을 좀 뜯어내지 못하고 힘없는 엄마한테만 난리일까요? 참 못난 딸입니다. 엄마 편까지는 못 들어 준다 해도 최소한 제 앞가림은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그마저도 안 됩니다. 현실에도 이런, 차라리 부모 학대라고 할 만한 행위에 가담하는 병x 같은 딸들이 있습니다.  

아무튼 한 여인에게 이런 일이 한꺼번에 터질 수고 있다는 게 안타까우며 이런 소재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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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종, 계급 Philos Feminism 2
앤절라 Y. 데이비스 지음, 황성원 옮김, 정희진 해제 / arte(아르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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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더 단단히 먹고 읽기 시작했어야 마땅한 고전이었습니다. 앤젤라 데이비스는 여러 책이나 미디어에서 매우 자주 거론, 인용되는 저자이며 활동가인데 한때 가장 과격하고(?) 괄괄한 액티비스트의 대명사로 꼽혔고, 그런 면모는 이 책 중에서도 다시 확인됩니다만 책에는 그 이상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녀의 지성을 증명하듯 꼼꼼하고 치밀한 논증이 펼쳐지며, 또한 다양한 소설, 논문, 저서가 인용되어 그녀의 꼼꼼함과 부지런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책에서 펼쳐지는 고발 그 내용은 처절하고 어조는 정의로우며 길이는 면면합니다. 1장은 노예제의 유산을 다루는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사례와 증언을 통해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던 남북전쟁 이전 남쪽 여러 주들의 사회상을 다룹니다. 특히 흑인 여성들이 겪었던 온갖 모멸적인 처사들이 자세히 묘사되니 독자들은 주의해서 독해를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이 고전은 특히 저명한 사회학자 에드워드 프랭클린 프레이저(1894~1972)의 <The negro family in the US(1939)>에서 여러 대목을 인용하는데, 잘 알려진 저서이긴 하나 책의 후주들에서 op.cit가 여러 번 쓰이므로 17번까지 거슬러가야 비로소 풀네임을 볼 수 있는 저 책 제목을 비망 목적으로 이 독후감에 적어 둡니다. 또 앤젤라 데이비스의 성향과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레퍼런스 중 하나로 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이게 영어 번역서가 아니라 독일어 원본이라는 데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남북전쟁 전후의 흑인 차별 참상에 대해 가장 큰 영향력으로 대중에 알린 작품은 누가 뭐라 해도 스토 부인의 장편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겠습니다(당대에나 지금이나). 이 고전 중에서 데이비스는 특유의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을 과시하며 저자의 의도를 짚는데 때로는 분석적이며 때로는 비판적입니다. 비판적이라 함은, 믈론 스토 부인은 흑인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처지에 대해 대단히 동정적이었고 당대 대중의 태도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그녀 역시 출신 성분상의 한계 때문에 여러 인식상의 문제를 노정하고 있음을 데이비스가 예리하게 지적한다는 뜻입니다. 

대개 미국 현대사에서 흑인이 비참한 처지에서 해방된 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시혜적 조치(1863)에 의한 결과라고만 알고 있으나, 이 고전에서는 예컨대 1831년 냇 터너 주동의 반란까지 짚어가며 흑인의 주체적 노력과 투쟁 과정에도 충분히 주목합니다. 미국 본토를 벗어나면, 카리브해의 아이티에서 감연히 봉기했던 투생 루베르튀르 같은 지도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론 가짜 해방자 나폴레옹 1세의 진압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히긴 했지만(30년 후의 냇 터너도 존 플로이드 버지니아 주지사에 의해 비슷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여성해방은 흑인해방과는 또 별개의 평면에서 검토, 인식, 실현, 완성되어야 할 과제였지만 19세기에는 아직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어떤 컨센서스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이미 남북전쟁 당시에도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같은 선구자가 이 점을 명쾌하게 지적합니다. "이류 남성의 노력에 힘을 보태거나, 그 성별을 자신보다 치켜세우지 말라." 인상적인 쿼트입니다. 또 북군 진영 핵심이었던 당시 공화당 주류가 엄연히 백인, 남성, 산업자본가 계급 이익을 위해 이 전쟁을 주도했음을 잊지 말라고도 합니다. 이때 같으면 아직 칼 마르크스가 현역 혁명가로 활동을 할 무렵이니 이런 인식과 주장이 얼마나 시대를 앞섰는지 짐작이 가능하죠. 

독자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건, 19세기에 만연했던 흑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가해자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의 자존을 완전히 깔아뭉갬으로써 자신의 지배자로서의 위상을 굳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장면은 예를 들어 1984년작 스필버그 감독, 우피 골드버그 - 오프라 윈프리 주연 영화 <컬러 퍼플>에도 나옵니다. 저자는 이런 효과를 가리켜 "인종주의의 혹세무민 능력"이라 규정짓습니다. 

일본 혐한 진영에서도 한국인들의 심성이 다분히 폭력적이라든가, 강간이 만연하다거나 하는 식의 왜곡된 프로파간다를 통해 식민지배 역사를 정당화하고 양국간 적대상태를 심화 선동하는 데 씁니다만 이 책에서는 프랜시스 윌러드 같은 여성 선동가가 "흑인 강간범 신화"를 어떻게 퍼뜨렸는지에 대해 자세히 다룹니다. 특히 이 사례는 같은 여성에 의해 주도되고 여성 진영을 크게 약화, 분열시켰다는 이유에서 주목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책은 "조립라인의 노예"가 "부엌가사노동의 죄수"와 어떻게 연대해야 이 모든 예속, 착취의 기제를 끝장낼 수 있을지를 말미에 가서 환기합니다. 데이비스의 결론은 모호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그 모든 모순을 종식시키려면 자본주의 자체를 끝장내고 사회주의로 이행해야 한다는 거죠. 이에 대한 판단은 물론 책을 읽는 독자들 각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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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비즈니스를 바꾸다 - 경험을 설계하고 트렌드를 만드는 공간의 힘
정희선 지음 / 미래의창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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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의식을 공간이 규정한다고도 하고, 그러고 보면 비즈니스 역시 공간에 맞게 어떻게 잘 구성하는지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해당 비즈니스가 가장 크게 번성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찾아내는지가 사업의 첫 단계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공간을 모르는 자 비즈니스를 말하지 마라" 

현대자동차의 경우 구 한전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2014년 엄청난 금액을 베탕하여 큰 비판을 받기도 했었는데, 이 책 p38 이하에 나오는 "거점 오피스"의 사례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교훈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즉, 도시의 주요 거점에 소규모 사업 공감을 여럿 두는 전략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재택 근무의 약점을 보완하는 외에도 타 부서 직원들과의 소통이 증진되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저 후자의 장점이, 책을 읽는 제게는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타 부서 직원들과는 여간해서 의견 교환의 계기가 마련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선 KT,  쿠팡 등이, 이 전략을 채용한 모범 사례라고 합니다. 책에도 나오는 "워크 프롬 에니웨어" 개념은 제 기억으로도 아주 예전부터 있었으나 이처럼 구체화된 건 관련 여러 기술이 발전한 후인 듯합니다. 

2년 전부터 제가 개인적으로 읽은 책들은 "코로나가 앞당겼을 뿐 언젠가는 오고야 말았을 변화들"에 대해 강조했었는데 그런 필연적 변화들 중에 반드시 꼽히는 게 재택근무였습니다. p55를 보면 "미래에는 100% 재택?"이라면서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데 사실 이런 신중한 태도가 저는 더 공감되었습니다. 책에서 예측하는 방향은 하이브리드, 즉 재택과 물리적 출근이 적당히 혼합된 형태입니다. p65 이하에 이런 "리모트 워커"들의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일만 하고서 살 수 없고 그렇다고 내내 퍼질러 놀 수도 없습니다. 일과 놀이는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책에서는 휴식 공간과 일하는 공간이 더 이상 구분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홈오피스가 오션 오피스로 바뀌는" 트렌드도 예측된다고 합니다. 멋진 오션 뷰를 미리 확보한 회사가 인기 직장이 되는 미래... 그러고 보면 삼성동 부지 확보 경쟁도 꼭 오너의 위신 과시 수단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평가될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집안 청소도 (아직 원시적 단계이긴 하나) 로봇이 알아서 하는 세상인데 AI가 관리하는 휴게 시스템이 포함된 사무실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책에 나옵니다. 특히 파나소닉이 운용 중인 "워크스랩"의 경우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은 결국 직주일치라는 개념에까지 도달하게 되는데, 직주근접이 요즘 부동산 가격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를 보면 이 이슈의 중요성이 새삼 확인도 됩니다. 

꼭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요즘은 호텔에서 장기 투숙자를 모집하기도 하는데 p140 이하에 보면 "호텔을 집으로 삼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미 서울드래곤시티 같은 곳이 이런 개념을 잡고 관련 환경을 발전시킨다고 합니다. 아파트하고 호텔의 경계도 모호해진다고 하는데 실제로 서울 강남의 극히 일부 고급 아파트를 보면 어느 정도 이런 컨셉을 이미 잡고 저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호텔에 머무는 많은 이들(주거와 일 목적으로)은 여러 호텔에 번갈아가며 묵는다고도 합니다. 하긴 어차피 내 집을 둘 게 아니라면, 또 일이 주된 목적이라면 자주 주거를 옮기며 최상의 마인드를 유지하고 창의력이나 집중력, 활기를 끌어낼 일입니다. 아직은 미래의 일입니다. 

소셜 미디어에 이런저런 과시용 사진을 올리는 것도 오래된 유행인데 앞으로는 주거와 오피스가 혼용된 공간을, 자기의 개성이 잘 드러나게 꾸며 남들에게 보이는 게 주된 트렌드가 되리라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려면 공간에 대해 (건설업체가 미리 마련한 획일적인 컨셉이 아닌) 자신만의 확실하고 차별되는 감각, 관점이 평소부터 몸에 배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 콘셉트에 대해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여러 사례에 대한 소개가 p225 이하에 나옵니다. 

direct to consumer 방식을 줄여서 D2C라고 하는데 미래에는 이 패턴을 특히 유의하여 공간을 꾸밀 필요가 기업 측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크게 매장을 만든 후 대량의 물건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샵은 차별화되어야 하고, 그 차별화의 방향은 해당 샵이 무엇을 팔고 무엇을 호소하려는지를 철저히 고민한 후 하나의 치밀한 전략 하에 정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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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클래식 - 천재 음악가들의 아주 사적인 음악 세계
오수현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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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전음악은 기계, 전자 음악이 일상화된 요즘에도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예술혼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모두 16분의 위대한 일생과 음악관이 실렸는데, 읽어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합니다. 남긴 예술 작품을 보면(들으면) 너무도 조화롭고 완벽한데, 이 책을 읽어 보면 그들 역시 인간이었구나, 허점도 많고 과오도 있었으며 어떤 어리석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다가 제 발등을 찍기도 한 일화가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슈만은 그 감미롭고 달콤한 트로이메라이 같은 곡이 우리에게 너무 유명한데 이 책에 실린 클라라와의 사연을 읽어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슈만의 열혈 팬 중 한 사람으로서 약간은 얼굴이 븕어지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이처럼 인간적이고 솔직한 정서를 품었기에 그런 명작이 나올 수 있었겠다 싶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나서 해당 작곡가와 작품이 더 좋아질지 그 반대가 될지는 사람마다 경우가 다 다를 것 같네요. 

리스트의 유명한 연애 행각은 우리 현대인들도 다 아는 바이지만 책에 실린 구체적 사연은 더 충격적입니다. 그만큼 여성들이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선 이유도 있겠고, 그의 작품들도 여성들과의 끝없는(?) 교감과 소통을 통해 더욱 컬러가 생생해진 까닭도 있을 것입니다. "비창"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들은 무수히 많으나, 이 책에 실린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부른 교향곡 6번의 사연은 독자의 슬픔을 더욱 크게 만드네요. 구스타프 말러도 명곡을 그렇게나 많이 남겼는데 미숙한 여성관 때문에 그렇게나 고생했다니, 아무래도 어떤 위대한 예술 작품은 그 품은 정신의 미묘한 상처에서 발아하고 성장하는 면이 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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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대여점 - 무엇이든 빌려드립니다
이시카와 히로치카 지음, 양지윤 옮김 / 마시멜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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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끔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처럼 사람의 가치, 효용성, 심지어 내면의 빛깔까지를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시대라면 더욱 그런 충동을 느낄 것입니다. 강남 명품 샵에 가면 어떤 곳에서는 일정 기간 아이템을 대여해 주기도 하는데 겉으로 남에게 보이는 모습이라는 게 그만큼이나 위신, 자존감, 명예의 충족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흐음, 그랬군요. 그럼 오타 씨의 모습을 한 저는 뭘 어떻게 하면 되죠?" 세상에 공짜란 없습니다. 남의 외모를 뒤집어 썼으니 나 역시 어떤 이점이 있고 앞으로 목적을 달성할 여지가 생기는 거고, 그런 만큼 나는 상대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합니다. 쌍무계약의 이치가 세상을 지배하기에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큰 제재를 받습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서 여장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가 있을까요? 있으니까 세상에 이런저런 사고도 터지고, 심지어 수술을 받아 아예 여자가 되어 버리는(겉모습으로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겠습니다. 사실 이런 욕구를 가진 사람은 사회의 곳곳에서 충돌을 빚게 마련이며, 그런 갈등 없이 "연말 송년회 장기자랑에나 어울리는 모습을 한" 사람은 (속으로야 어떤 불만을 갖든 간에) 사회적 관계 설정이나 소통에 있어 마음은 당장 편한 것입니다. 세상엔 그저 무난하게, 평균 정도 하는 모습으로 태어난 게 가장 편한 것이란 각성이 들 때가 어쩌면 어른이 되었을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교건 직장이건 "옥상에서 만난 친구"가 꼭 있습니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사실 이는 그 사람의 잘못만이라고는 꼭 말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람은 괜히 조직에서 따돌린다든가 하는 외부의 잘못이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이 뭔가 다르게 생각하는 자아상이 따로 있어서 조직의 평균이 그리 여기는 모습에 적응을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꼭 보면 저렇게 "옥상에서 만난 친구"를 즐겨 찾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이 역시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자신의 인생 숙제입니다.

우리 전설에도 여우가 남의 탈을 쓰고 사람 행세를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인접국이라서인지 중국이나 일본도 그러하며 이 소설에서도 기본 설정 중 하나입니다. 재미있는 건 아무리 이런 능력을 지닌 여우라고 해도 남의 겉모습을 판에 박은 듯 닮은 변신은 불가능하며, 그 이상의 효과는 당사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내뱉은 악의에 지금 막 자신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절묘했다는 느낌이 든 구절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뿐 아니라 다른 여러 외모를 두루 "대여"합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그 곡절을 누군가는 꼼꼼히 궁리하여 추리해 냅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럴싸합니다. 사람한테 이런 편한 특권이 생긴 후에도, 저런 기발한 수를 더 생각해 낼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꾀의 경우의 수가 뻔한 것만 같아도 기실 상상의 경계란 게 없는 셈입니다.

외모 대여라는 발상 자체가 기막힌데, 더 기가 막힌 건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사연입니다. 이런 처지에 빠진, 혹은 자초한 사람이 다 있구나, 그 난관을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구나(혹은 반대로 이렇게 파멸하는구나), 이 과정을 보면서 인생의 기막힌 아이러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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