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김탁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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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는 게, 처음부터 그렇게 딱 만났어야 했을 두 사람들끼리만 만나서 마음에 드는 자녀들만 슬하에 두고 백년을 해로하다가 한날한시에 손잡고 마감하는 것이라면 참 좋을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없다며 불평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그런 식으로만 사랑하고 마는 이들은 아무도 없지 싶습니다.  

부부 사이에 네 명의 자녀, 그것도 딸로만 네 명을 두었다면 아마도 정말 다복하고, 또 금슬이 좋은 사이라며 주변에서 부러움이 자자했을 듯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리 보일 뿐, 진실은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첫째는 알고 보니 여성(이수인)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이미 포태하고선 출산만 혼인 중에 이뤄졌던 것이며, 넷째는 아예 균형이라도 맞추겠다는 듯 업둥이를 남편이 어디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행복한 결합이었다면 어쩌면 첫째 하나로 영원히 만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역시 남자(한주열)이 이미 사정을 다 알고 맞았으며, 심지어 그 모친, 즉 시어머니의 동의 하에 진행된 결합이었기에 더 충격이 큽니다. 알 만한 사람, 속 깊고 많이 배운 남편이 아내 될 이에 대한 전폭적인 이해, 감동적인 포용의 제스처를 이미 보였었기에(나중에 배신당하듯 알게 된 게 아니라), 아 이런 종류의 상처는 무슨 노력을 해도 극복이 안 되는 거구나, 이런 씁쓸한 결론만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주열은 기어이 이상한 여자(오홍자)와 잠시 인연을 맺고 거짓으로 둘러대며 자신의 핏줄을 들입니다만 누가 이런 어설픈 수작에 계속 속(아 주)겠습니까.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고, 남달리 영특들 했던 친구들이 서로의 속사정 알 것 다 알고 의 좋게 지냈어도, 기어이 마음대로만 가지를 못하는 게 남녀관계입니다. 아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걔가 그녀와 엮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창창한 전도를 닦느라 젊었던 한 구간에서 학업에 몰두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학, 법학... 또 거개가 그 노력의 결실을 봅니다. 부도 쌓고 명성도 누리는 축복 받은 인생들이지만, 사랑만큼은 뜻대로들 되질 않고 자식 농사는 그보다 더합니다.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재능도 두루 발휘하면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이들이 있고, 태어날 때부터 남의 경멸을 받고 자신 역시 그런 남들의 시선에 대응하듯이 좋지 못한 방식으로 삶을 개척(?)하는 이도 있습니다. 머리도 좋고 용모도 빼어니지만 한다는 짓은 남의 남편을 뺏어사는 건데, 수완이 좋다 보니 성공도 퍼펙트한 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그 업보도 고스란히 받는지 자신 포함 4대가 내리 사생아 인생입니다. 나중에 자신의 출신 내력을 알게 된 손녀에게까지 저주를 들으니 이런 인생이 어찌 복을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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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 - 김유정 단편선 한국현대문학전집 (현대문학) 8
김유정 지음, 김미현 엮음 / 현대문학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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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 말고도 김유정의 단편 16작이 같이 나옵니다. 우리는 김유정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 실린 작품 정도는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그를 논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동백꽃>을 처음 읽은 건 중1때였는데 월간 학습지의 부록에 전문이 실려서였습니다. 마지막에 점순이가 주인공과 함께 넘어질 때 저는 청소년용 읽을거리라서 몇몇 문장들이 삭제되었겠다고 여겼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이처럼 적절하게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선택과 센스 역시 빼어난 필력의 소치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봄•봄>은 표제작이기도 하고 역시 김유정의 해학과 특유의 미학이 가장 잘 구현된 대표작일 듯합니다. 무엇보다, 현대 독자들이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다. 순박한 주인공만 모를 뿐 지금 그를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었으며 앞으로 어찌될지는 모두가 다 눈치챌 수 있습니다. 점순이가 자신의 어머니와 "에그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라며 주인공을 구타하는 장면은 주인공의 황당해하는 모습과 함께 너무도 우습습니다. 

나무위키 같은 데 보면 이때 점순이가 주인공을 배신했다고 하는데, 그건 그야말로 어리석은 주인공 입장에서나 그리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점순이가 처음에 주인공과 살짝 만나 반란을 사주한 것도 맞고, 그 사주에 주인공이 과하게 호응하여 장인을 고자로 만들 뻔한 걸 보고 딸 입장에서 급하게 구조한 것도 맞습니다. 두 행동과 그에 깔린 심리는 전혀 모순된 게 아니며, 이런 모순 아닌 모순이 빚는 해학 때문에 우리 독자가 크게 웃을 수 있습니다. 점순이나 주인공이나 나아가 그 장인 될 사람이나 모두 당장만 생각하는 단순하고 순박한 사람들이라서 이런 반응이 가능합니다. 

장인 될 사람도 약간 모자란 젊은이를 이후 무한 반복 패턴으로 부려먹는다, 뭐 이렇게만 새길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터진 머리를 간호해 줄 때 이번 추수 후엔 반드시 장가 보내 주겠다고 한 건 적어도 그 순간엔 진심이 아니었겠나,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아 물론 그 진심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진심에 의해 얼마든지 번복이 가능합니다. 적어도 어떤 그랜드플랜에 의해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속이는 건 아닐 뿐.  

<봄•봄>은 21세기 들어 HD로 KBS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졌는데 배경이 일제 강점기 어느 시골이 아니라 우리 시대 제주도이며 점순이나 주인공이나 제법 큰 젊은이들입니다. 점순이는 키가 작은 걸로 유명한데 여기서는 늘씬하며 이름도 점순이가 아닙니다. 후반까지 극을 찬찬히 보면 장인 될 분과 그 아내야말로 수십 년 전 머슴(주인공)과 점순이였던 커플임을 알 수 있으며 이걸 알아야 왜 나이도 지긋하신 저 남편이 아내한테 꼼짝도 못하고 쥐여사는지 이해가 가능합니다. 처음 극을 보면 아니 왜 나이도 많은 아저씨가 젊은 놈한테 저런 대접을 받나, 혹시 남편, 가장이 아니라 늙은 머슴 비슷한 처지인가 갸우뚱해지는데 이런 느낌도 아주 틀린 건 아니며 다분히 각색자의 의도가 그러했던 겁니다. 

또 왜 주인공을 그렇게 챙기며 (착취를 하기는커녕) 용기를 잃지 말고 자기 딸한테 꼭 청혼하라는 의도로 증서까지 받았는지도 알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젊은이한테서 자신의 젊었을 때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도와 주기만 하면 자존감이 없는 어른으로 성장하겠으므로 스스로 해 내는 자립의 성취를 도우려고 그렇게까지 속 깊은 배려를 하는 것이죠.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우며, 사실 김유정의 이 원작부터가 대단한 구조를 지녔기에 이런 해석까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장인 역은 박근형씨가 맡았는데 머슴한테 주인집딸이 먼저 대시할 정도면 적어도 젊었을 때 인물은 엄청 훤칠했겠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아주 적절한 캐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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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처럼 여러 중견 작가들의 멋진 단편들을 묶어서 낸 작품집이 많이 출판되었는데 요즘은 그런 기획이 드물어져서 아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시절보다 작가들의 필력, 사고의 깊이, 문장력 등 모든 면이 다 후퇴한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깝기도 합니다. 출판사인 금성츨판사는 세계문학전집 같은 것도 내곤 했었는데 요즘은 뭘 만드는지 모르겠네요. 

수록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정말 쟁쟁합니다. 이 중 아마 가장 유명한 분들을 꼽자면 현기영, 유홍종, 강유일 씨 등일 텐데, 순전히 지명도만을 기준으로 삼자면 이외수씨도 빠질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외수씨는 저무렵만 해도 "베스트셀러를 쓰는 기인" 정도 취급이었지 진지한 작가로 대접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아무튼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비평은 다른 분이 운영하시는 이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madrabbit7&logNo=40039174513 의 한 포스트에 잘 정리되었으니 참조하셔도 좋겠습니다. 제가 따로 첨가할 말이 생각 안 날 정도입니다. 

유익서 작가님은 근황이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이 책에는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 외 두 편이 실렸습니다. 주인공은 시골에서 상경하여 어느 중견기업에 취직한 신입사원인데 키도 작고 주변머리도 없어 보이는 루저 타입입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이 사람을 사윗감으로 찍고 사모님한테까지 열심히 설득합니다. 회사 안에 괜찮고 똑똑한 젊은이들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이 사람일까요? 일단 사윗감이 너무 잘나고 똑똑하면 회사가 결국 남의 집안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고명딸한테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으니...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하겠으며, 구태여 말 안 해도 이무렵 통속물의 뻔한 전개라서 누구나 다 예측이 가능한 내용입니다. 이번 기수 5주차, 또 30주차에 <사계의 후조>, <촌남자> 두 작품을 각각 리뷰했었고, 또 26기 2주차에 <말괄량이 도시>를 리뷰했었는데 모두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 남성이 주인공이며 각자의 방식대로 어떤 출세를 꿈꾸는 게 공통점입니다. 어떤 건 아주 한심한 망상이며, 어떤 건 무모한 당랑의 몸부림입니다. 아무튼 저무렵에는 이런 망상이나 도전이 당시 청춘들의 패턴형 로망이었기에 이런 소설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겠다 싶긴 합니다.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는 1980년대 MBC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회장님 역에 최불암씨, 사모님 역에 나문희씨, 딸 역에 미스코리아 진 출신 김성희씨가 나옵니다. 김성희씨의 깜짝 놀랄 만한 미모가 눈에 띄며, 나이 어린 식모 역에 (비슷한 또래인) 송옥숙씨가 나와 재미있는 연기를 보여 줍니다. 28주차에 김지연 작가의 <마술의 사랑>을 리뷰했는데 거기서의 커리어 우먼 연기와 비교해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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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하지 않습니다 -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과 웃으면서 소통하고 해결책을 찾는 법
마이클 브라운 지음, 윤동준 옮김 / 알파미디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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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의견으로 완전히 통일이 된 조직은 겉으로만 보면 평온하고 효율적이라고 착각할 수 있으나 그 내부는 곪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조직은 내부의 다양한 의견들을 두루 수렴하게끔 큰 그릇을 지녀야 하는데, 그러려면 갈등과 이견을 조정하는 시스템이랄까 성원 간의 컨센서스가 마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치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설령 아주 마음에 안 들거나, 뭔가 좀 부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싶어도 일단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중인지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보면 이좌거가 스스로 겸손하게 이르기를 "우자(愚者)도 천려일득"이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게서도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어야 진정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게 유도한다면 그 직원의 적성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p49)." 요즘은 유능한 지도자, 경영자라면 직원들 기를 죽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직장에서 최대한 기가 살게 북돋우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저자는 각자가 자신의 미래 청사진을 자랑스럽게 제시하도록 조직이 도와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물론 이런 비전은 우선 그 개인(직원)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조직 문화를 개선한다거나, 보다 협력적인 팀을 만드는 데까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다소 뜻밖의 조언도 하는데, 이미 시행착오를 통해 실패로 드러난 협업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p62). 저자는 기본적으로 수직과 수평이 충돌하는 교차점에서 갈등이 발생한다고 보는데, 참 우아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협업은 본질적으로 수평이며, 각 파트너나 참여 인원들은 각자만의 수직 이해 관계가 있습니다. 진행해 봐야 나한테 이익이 안 생기는데 뭐하러 이 프로젝트에 열의를 갖고 참여하겠습니까. 리더라면 이처럼, 수직과 수평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각자에게 그 입장을 정리해 줄 만한 능력과 수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레고리 1세는 서유럽 역사에서 대교황으로 불리는데(p88), 그만한 이유가 물론 있겠으나 책에서는 유머러스하게, 그가 일곱 가지 대죄 그 순위를 규정한 일을 우리 독자에게 환기합니다. 중세 가톨릭에서는 자만이 큰 죄였으나, 치열한 경쟁 체제 하에 조직 안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자존심과 양면 관계(책에서는 둘이 "이복 형제"라는 비유도 씁니다)인 자만은 마냥 터부시할 건 아니겠습니다. 

다만, 자존심이라는 게 유치하게도 타인에 대한 우월감 과시 형태로 나타나서는 곤란하며,  저자는 나의 자존심이 타인 사이에서 "신망(信望)"의 외형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말로는 저렇게 신망으로 번역되었고, 저자 마이클 브라운은 원어로 prestige라는 말을 썼다고 이 책 본문에 나옵니다. 

"훼방꾼들을 훼방해라(p125)." 대안도 없으면서 무작정 부정적인 기류만 확산시키고 화합을 저해하며 막상 책임 있는 자리에 앉혀 놓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조직 안에서 활개를 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회자의 역할이 강력해야 한다는데 구체적으로 회의를 운영하는 이들이 이 부분 꼭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각 성원에게는 평등한 참여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런 참여 기회가 주어지는데도 어떤 성원들은 마음놓고 의사 표시를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가 성장한 문화나 전통이 그런 행동이나 선택을 무의식적으로, 혹은 대놓고 억눌러와서일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르완다의 참담한 예를 드는데 우리 독자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유리한 환경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알게모르게 침투한 무의식적 편견을 또한 주의해야 하며 책에서는 비교적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미국 같은 나라도 지금 보수주의자와 개인주의 사이에 전쟁과도 같은 갈등이 벌어지는 판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라 하며, 미국뿐 아니라 요즘은 어디나 다문화, 다인종의 환경과 조건이 크건 작건 전개되는 형편입니다. 꼭 인종적 차이가 아니라 해도, 1차 집단이든 회사든 간에 성원들은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니게 마련인데, 이런 경우에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의견을 무시하는 풍조가 여전하다면 그 조직은 소정의 성과를 낼 수가 없습니다. 저자는 어디까지나 이런 다양성의 표출이 용인되어야 하며, 이를 품에 안지 못하는 편협한 조직은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결국 도태되기 마련이라고 경고합니다. 

책 표지를 보면 I DON'T AGREE 라는 텍스트에, 흰색 취소선으로 N'T 부분을 살짝 가려 놓았습니다. 그러면 I DO AGREE라는 정반대 뜻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동의한다." 조직의 주류 의견에 대해 반대를 표시하는 사람은, 조직의 앞날을 막겠다, 딴지를 걸겠다는 게 아니라, 사실은 조직의 앞날을 그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당 태종이 자신의 반려동물인 매를 죽게 한 위징에게 분노하려 들자, 그 처인 장손황후가 진정 충신을 곁에 두셨다면서 오히려 하례를 올렸다는 고사를 새겨야 하겠습니다. 갈등이 없는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이며, 문제는 이런 갈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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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불 - 김동리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3
김동리 지음, 이동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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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단편이라기보다 중편에 가까우며, 한때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는 명작입니다. 객관적인 평가가 그러하나, 개인적으로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며 너무도 비관적이고 극단적인 상황 설정이 눈에 거슬립니다. 이 작뿐 아니라 같은 작가의 <바위>도 비슷하게 봅니다.

소신공양은 실제로 오래전부터 있었던 불교 전통인데 이 작이 1961년에 발표되었고 베트남 승려 석광덕의 일이 1963년에 있었으나 두 일 사이의 어떤 연관은 없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산 채로 자신의 몸을 태우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열반에 도달하는 건 확실히 불가능에 가까운 경지이며, 만약 도중에 고통을 표현한다거나 하면 이는 수양이 부족했다는 뜻이므로 대형 참사만 빚을 뿐 아니 시도함만도 못하게 됩니다. 태운다는 이벤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몸을 산 채로 태운다는 이벤트도 자극적이지만 소설 액자 속에 펼쳐지는 사건도 매우 엽기적입니다. 한 여인이 재가한 후 전처 소생들을 학대하다 마침내 독살을 시도하고 이를 감지한 만적(그 여인의 아들)이 살인을 막으며, 이후 집안에서 쫓겨나다시피한 전처 소생은 거지가 되어 떠돌다 나병에 걸리며 주인공 역시 집을 나와 중이 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이들을 조우하고 소신공양을 감행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김동리는 꽤나 먼 거리를 두고 관찰하거나 심지어 경멸, 적대시하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작품 속에서 다루었던 편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만적은 회개의 기미가 안 보이는 그 어미를 대신해서 자신이 죽는 건데(성불이라는 다음 단계는 일단 차치하고, 이것이 소신공양의 일차 동기입니다) 누구의 죄를 대신해서 갚는다는 발상부터가 다분히 기독교적입니다.

다만 액자 밖의 주인공이 지금 이 사연을 자신의 드라마틱한 인생 한 단계와 결부시키기엔 너무도 속물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됨이며, 그래서 액자와 액자 안이 서로 너무 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한 비극적인 사건과 그에 따르는 위인의 한없이 고상한 결단을 진행시킴에도 불구하고 문체가 너무도 드라이해서 정작 이를 전달하는 사람이 거룩한 행동과 사건에 별반 공감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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