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로 가니 - 식민지 교실에 울려퍼지던 풍금 소리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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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한국인 이야기" 그 네번째 책이자 완결편입니다. 앞에 나온 세 권을 읽고 난 후라면 더욱 좋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앞 세 권처럼 독특한 편집 체제를 취했는데 모두 12장의 챕터[章], 각 장마다 3~5개의 꼬부랑길들, 또 각 꼬부랑길마다 3~4개의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파람북만의 개성 있는 모습이고 시리즈의 일관성이 간직되는 피처라서 더욱 마음에 드네요.

p147을 보면 선생은 날카롭게도 "...우리 나라는 바다와 면한 지명에도 鎭, 浦보다는 山이 붙은 경우가 더 많다.."라고 지적합니다. 읽고 보니 과연 그런데, 그 이유를 여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의 답은 일본에 의해 가로막힌 바다에 대해 우리 민족이 다소 수동적인 태도를 가져서라고 해석합니다. 지명 중에 진, 포 등이 더 많고 "방방곡곡" 보다는 "진진포포(쓰쓰우라우라)"라 부르길 좋아하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바다에 나가도 "돌아오는 것"을 더 신경썼다고 합니다. 항구로 돌아오는 눈에 바로 보이는(보여야 하는) 랜드마크가 바로 "산"이란 것입니다.

이랬던 한국인들이지만 일단 세계로 향해 나아가는 바다를 알게 된 한국인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고, 이제부터는 무서운 사람들이 된다는 게 선생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선생은, 최남선의 잡지 <소년> 창간호에 유독 바다에 대한 글(번역 혹은 창작)들이 많은 게 이런 이유라고 하네요. "자넨 방구석이 무섭지 않나?"라는 제목의 짧은 글도 인용되는데 재미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좁은 세계에 가두고 눈을 어둡게 만드는, 이러이러한 건 알 필요가 없다며 시대에 뒤떨어진 도그마로 사람을 세뇌하는 어리석은 방구석 마인드만큼 무서운 건 없습니다.

천자문의 첫 구절은 天地玄黃인데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란 뜻이라고 우리 모두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이 책에서는 현(玄)의 뜻이 직설적인 색채를 뜻하는 "검다"가 아니라, 그 뜻을 쉽사리 알 수 없는 "심오한"에 가깝다고 합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으나 사실 아인슈타인도 우주의 90% 가까이를 채우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두고 "암흑물질"이라 부른 적이 있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비웃음을 받았으나, 최근 속속 알려지는 관측 결과들에 의해 오히려 근거가 더 강해지고 있죠. 이 역시 천재의 현묘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알고 보면 발광체를 상정하지 않은 우주 공간은 그 자체로는 검을 수밖에 없으니 이런 이유에서도 하늘이 검다 한 건 틀린 말이 아니겠습니다. 

"공부해서 남주냐"란 말이 있는데 공부가 그 정도로 힘든 고역이 되어서야 공부하는 당사자이건 그런 걸 시키는 사람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공부의 어원은 본래가 힘든 노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하고, 이 책에서는 그게 또 중국, 일본, 한국에서의 쓰임이 다 다르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박사님이 알려 주시는 사항, 특히 일본에서 단어 쓰임이 그러하다는 가르침이 솔직히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만 박사님 같은 현명하시고 박학다식한 분이 그렇다 하시니 일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네요. 

여튼 박사님의 결론은 이렇게 획일화한 체제 하에서 국제인이 제대로 길러지겠냐는 우려 쪽입니다. 다만 애초에 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인재 유형이 있고(정주영 현대 창업주 같은), 이런 사람은 최소한의 행동 자유만 주면 알아서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니 교육 체제가 구태여 뭘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육 체제는 그런 사람이 부품처럼 밑에 두고 부릴 수 있는 인재를 양성만 하면 되죠. 그게 사회에 배출된 게 서울대, 카이스트, 포스텍 같은 소위 명문대 졸업자들이고요. 그래서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이 오늘날처럼 발전할 수 있었고 말입니다. 결과가 말을 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식민지 36년 세월도 "국민학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선생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른바 국민학교 설립 이후로는 민족 말살 정책이 보다 노골화했는데 이전 세대가 그래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감을 갖고 있었다면 국민학교에서 교육 받은 이후 세대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이게 소학교(혹은 서당) 세대와 국민학교 세대의 차이점이라는 건데 무엇보다 박사님 자신이 1933년생, 국민학교 세대의 첫물이었으니 더욱 설득력 있는 주장이겠습니다. 이처럼이나 문제가 많은(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적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놀랍게도 1990년대초까지 사용되었으니... 우리도 무슨 X세대 Z세대 이런 걸로 가를 게 아니라 국교/초교 세대로 나눠야 맞을 듯도 합니다. 박사님 주장대로라면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말 "국민학교"에서는 오로지 "천황폐하"를 향한 충성만 강조했고, 책표지에도 나오듯 가르치는 일본어를 잘 따라하지 못하는 열등생들을 그 무서운 훈도, 교사 들이 혼을 내곤 했겠습니다. 박사님 같이 똑똑한 학생은 일본어든 뭐든 못하는 게 없었겠으나 한편으로 그 공부 못하는 어린 낙오자들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곤 했겠죠. 실제로 박사님의 천재성은 그 빼어난 일어 실력으로 잘 표현된 저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더 극찬을 받았으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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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바다로 간다면 - NASA의 과학자, 우주의 심해에서 외계 생명체를 찾다
케빈 피터 핸드 지음, 조은영 옮김 / 해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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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이치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철학에서 가장 근본되는 물음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라고 하는데, 이 질문은 너무도 심오해서인지 우리는 이 질문이 대체 무슨 뜻인지부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연과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생물학은 아직 도약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생명 현상은 믿을 수 없이 드문 현상인가? 아니면 조건만 맞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생명이 발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생물학적 우주인가?(pp.30~31)"

이 질문은 생물학뿐 아니라 모든 자연과학에 공통된, 가장 근본이 되는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이 어느 정도 명확하게 정의된다면, 1)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병 없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체를 우리가 만들 수 있고, 2) 우주 어느 곳에 생명체가 살고 있거나 혹은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비로소 첫 걸음을 떼는 게 가능하겠습니다. 저자는 주로 2)의 과제에 대해, 이제는 기술적으로 많은 애로가 해소되어 유의미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파악합니다. 책은 바로 이 전제에서 출발하여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아바타>, <타이타닉>, <터미네이터> 등 여러 흥행작을 만든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이미 1980년대 후반에 대작 판타지 <어비스>를 만들어 공개했으나 대중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 감독은 여전히심해 세계를 다룬 아름다운 영화 제작에의 꿈을 버리지 못했었는지, 2003년도에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우주생물학자인 저자에게 참여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20년 전의 그 설레는 제안이 지금 이 책을 저술한 계기가 된 셈입니다. 

소련이 망하기는 했으나 그간 축적한 자연과학 지식, 기술의 수준이나 양은 여전히 막강한 경쟁력을 지닙니다. 저자는 책 들어가는 말에서 러시아의 켈디시 호, 그 부속 잠수정인 미르 호 등에 탑승하여 유익한 연구를 수행했던 기억을 털어놓습니다. 책에 보면 "미르"는 러시아어로 "세계, 평화"라는 뜻이라고 나오는데,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도 원제가 "보이나 이 미르"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느낀 건, 저자 혹은 (이 책에 언급되는) 동료 과학자들처럼, 이런 우주학자, 생물학자 들은 영위하는 직업도 물론 그 분야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연구 대상에 대해 참으로 비상한 열정을 가진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지금의 단계보다 한 레벨을 뛰어넘는 성과는, 바로 저런 특별한 열정이 빚는 상상력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과학자가 쓴 책은 커뮤니케이터들이 쓴 책과 달라서, 일반 독자가 바로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운 내용을 담는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은 그렇지도 않아서, 예를 들어 물은 지구상의 다른 물질과 달리 고체(얼음)가 되면(응고) 오히려 부피가 커지며, 섭씨 4도에서 부피가 가장 작아집니다. 바로 이 성질 덕분에 추운 겨울에도 강이나 바다 밑에 생물들이 얼어죽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이치를 쉽고 재미있게 저자는 설명해 줍니다. 이런 특이한 성질을 물이 갖는 이유는 수소 결합 구조 때문인데, 이런 내용은 늦어도 고2때 배우는 사항이지만, 이 책이 훨씬 이해가 쉽게끔 풀어 주고 있네요. 

우리가 우주에 대해 현재 파악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은, 알고 보면 100% 정확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여태 지구 안에서, 위에서 얻어 낸 물리 법칙이 지구 밖에서도 타당하리라고 가정한 후 그리 추론한 정도죠. 이런 명제들은, 향후 정밀 실측과 연구가 더 진전됨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p92를 보면, 정말 다행스럽게도 여태 과학자들이 추론한 바 상당수가 과연 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저 얼음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고 지구에서 측정한 분광 결과가 옳았음을 확인했다." 분광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뒤 p190 같은 곳에서 다시 알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또한 얼음의 존재에 계속 주목하는데, 책 앞부분에서 물의 온도에 따른 밀도 변화를 지적하고, 겨울에도 얼음 아래에 많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신비를 자꾸 지적한 게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구의 얼음 밑에 그토록 많은 생명체가 살 수 있다면, 그런 일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우로파) 얼음 바다 맡에서도 있지 말라는 법이 없죠.

우리는 지저(地低)를 수천 km까지 파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외핵, 내핵의 구조와 성분이 이러이러하리라고 자세히 추론합니다. p119를 보면 관성모멘트 식을 이용해서, 유로파의 내부 상태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일러스트를 통해 잘 설명해 줍니다.  물리학 개념인 모멘트는 대략 고2 이과 과정에서 배우는데, 역시 이 책은 교과서보다 훨씬 알기 쉽게 독자를 가르칩니다. 갈릴레이가 정리한 관성이라는 개념(중학교 때 배우는 지극히 쉬운 내용)이 얼마나 근본적인지, 또 얼마나 많은 내용을 품었는지 다시 숙고해 보게도 됩니다.

나사는 1969년에 달로 지구인을 보낸 이후 많은 일을 해 왔습니다. 이후 화성, 금성 등에 대고 비슷한 업적을 못 남겼다는 이유로 1969년의 업적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이들(음모론자들)이 많은데, 그런 천체들에 대한 연구와 탐사는 난이도 레벨 자체가 다르므로 시간만 지난다고 단순 비례적으로 성과가 자동으로 나오는 건 아닙니다. 벌써 이런 대중서가 쓰인다는 자체가 그간 엄청난 성과가 쌓였기에 가능한 거죠. 이 책 2부 6장에서 인류, 아니 과학자들이 적어도 유로파에 대한 이해를 반 세기 동안 엄청나게 넓혔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행성계에 존재하는 물의 총 부피는 지구의 20배가 넘을 수도 있다(p181)."  이 책은, 순전히 물 하나의 화두 하나만으로 첫걸음을 떼어 외행성 전체로 논의를 확장합니다. 그만큼 우리 지구 생명체에게 물의 존재는 핵심적입니다. 1996년 시사주간 TIME은 화성에서 물의 흔적을 발견했음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는데, 다 이런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물이 일단 있다면, 그곳으로 우리 인간이 이주하여 거주 공간의 기반을 마련할 최소 근거가 생기는 셈이니 말입니다.
 
"행성이든 아니든 명왕성은 정말 놀랍다... 얼음의 천체이나, 한 가지 종류의 얼음이 아니다.(pp.196~197)"  그러나 우리 독자들은 의문을 품을 만합니다. 그렇게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얻어 살 수 있겠는가? 저자는 행성(아니지만) 내부에서 방사성 붕괴가 일어나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암석의 부족함은, 우리 지구와는 상당히 다른 종류라는 다른 물, 얼음의 여러 성분이 이를 보충해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상상력은 이처럼 한계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 종이 처음 생길 때부터 지금 같은 지능과 손재주를 가진 게 아니었습니다.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머리도 따라서 좋아졌고, 척박한 자연의 도전을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골디락스라는 말이 암시하듯, 대체 이런 아름답고 온화한 지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살고 번영할 수 있을까 싶기만 하지만, 사실 내내 에덴 동산처럼 낙원이기만 했다면 아직 나무 위 배부른 원숭이 처지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그저 포화상태 지구를 탈출할 필요만 갈급한 게 아니라, 다른 행성 다른 위성에 도달하여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습니다. 우주라는 바다를 항해하고, 더 잘 알아야 할 이유는 여기에도 하나 더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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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이렇게 말할걸 - 솔직하고 싶지만 상처 주기는 싫은 사람들을 위한 소통 수업
모리타 시오무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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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사이의 사랑이라는 게, 처음부터 그렇게 딱 만났어야 했을 두 사람들끼리만 만나서 마음에 드는 자녀들만 슬하에 두고 백년을 해로하다가 한날한시에 손잡고 마감하는 것이라면 참 좋을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없다며 불평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그런 식으로만 사랑하고 마는 이들은 아무도 없지 싶습니다.  

부부 사이에 네 명의 자녀, 그것도 딸로만 네 명을 두었다면 아마도 정말 다복하고, 또 금슬이 좋은 사이라며 주변에서 부러움이 자자했을 듯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리 보일 뿐, 진실은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첫째는 알고 보니 여성(이수인)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이미 포태하고선 출산만 혼인 중에 이뤄졌던 것이며, 넷째는 아예 균형이라도 맞추겠다는 듯 업둥이를 남편이 어디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행복한 결합이었다면 어쩌면 첫째 하나로 영원히 만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역시 남자(한주열)이 이미 사정을 다 알고 맞았으며, 심지어 그 모친, 즉 시어머니의 동의 하에 진행된 결합이었기에 더 충격이 큽니다. 알 만한 사람, 속 깊고 많이 배운 남편이 아내 될 이에 대한 전폭적인 이해, 감동적인 포용의 제스처를 이미 보였었기에(나중에 배신당하듯 알게 된 게 아니라), 아 이런 종류의 상처는 무슨 노력을 해도 극복이 안 되는 거구나, 이런 씁쓸한 결론만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주열은 기어이 이상한 여자(오홍자)와 잠시 인연을 맺고 거짓으로 둘러대며 자신의 핏줄을 들입니다만 누가 이런 어설픈 수작에 계속 속(아 주)겠습니까.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고, 남달리 영특들 했던 친구들이 서로의 속사정 알 것 다 알고 의 좋게 지냈어도, 기어이 마음대로만 가지를 못하는 게 남녀관계입니다. 아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걔가 그녀와 엮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창창한 전도를 닦느라 젊었던 한 구간에서 학업에 몰두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학, 법학... 또 거개가 그 노력의 결실을 봅니다. 부도 쌓고 명성도 누리는 축복 받은 인생들이지만, 사랑만큼은 뜻대로들 되질 않고 자식 농사는 그보다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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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반도체 지정학 - 21세기 지정학 리스크 속 어떻게 반도체 초강국이 될 것인가
오타 야스히코 지음, 임재덕 옮김, 강유종 감수 / 성안당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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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 이후 미국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급격히 나빠져서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향해 강력한 무역 제재를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웠던 사람이라서 보호무역 기조가 새삼스러울 건 없었는데, 선거 운동 기간에는 중국의 구단선(九段線)이나 인공섬 등에 대해 체념적, 소극적 코멘트를 하기도 한 터라 친중 미디어에서는 그가 집권하면 애초에 셰일오일도 개발되었던 터라 아예 이참에 고립주의로 회귀하리라는 희망적 기대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고립주의는커녕 트럼프 정부는 유례없을 만큼 강경한 반중 정책을 폈는데, 정권 교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임자 바이든 역시 이 기조를 이어갔습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도양단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중국과 절연하고 미국 중심의 공급망이 새로이 구축되면 한국(혹은 어떤 다른 나라라도)은 그 체인에 가담하여 새로운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일본인인 저자는 회의적입니다. 파운드리의 세계적 거인인 TSMC가 중국과 손을 끊고 본격적으로 미국 중심의 권역에 포함된다... 글쎄 그렇게 되기만 하면 좋겠지만 현재 미국이 제시하는 조건은 그닥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런 타국 기업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데, 이는 TSMC뿐 아니라 한국의 삼전, 하이닉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두어 달 전 우리나라 국회에서도 그리 큰 논란이 일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보다는 더 큰 갈등을 겪을 만한 곳이 대만(크게 보아 같은 중화권인)의 TSMC입니다. p125 이하에 모리스 창의 참으로 흥미진진한 사연이 나오는데 개인으로 보면 공산당에 원한을 가질 만하지만 미국의 무리한 요구가 거듭되면 같은 민족에 대해 저들이 언제까지 등을 돌릴지 의문이죠. TSMC야 중국계이니 그렇다 쳐도, 아무 관계도 없고 오히려 갈등 관계인 한국 기업들에 대해 왜 미국이 치사하게 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21세기 초 중국은 여러 외국(한국 포함) 기업을 유치하며 저렴한 인건비, 토지 사용료 등을 내세우며 유혹했었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그런 기업들이 내부 영업비밀이나 노하우 등을 탈탈 털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귀국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앞장서다시피했던 그런 약탈적 조치에 대해 많이들 비난했었는데, 이제 미국이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풀겠다는 듯 중국보다 더한 날강도 심뽀로 대만이나 우리한테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작은 나라는 이래서 서럽다는 것이며, 우리도 무작정 미국만을 추종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요구할 건 요구하고, 행여 부당하게 국익이나 기업의 권리를 희생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대만이 확실히 우리보다 앞서간다 싶은 건 p117에 나오듯 도쿄대 같은 곳과 3년 전부터 협약을 맺고 R&D에 집중 투자를 해 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삼성은 17년 전 이 기사( https://m.khan.co.kr/national/education/article/200501281749421 ) 에서 보듯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더 야심차게 선제적으로 기술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었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제자리걸음 내지 퇴보한 모양새입니다. 괜히 잘하지도 못하는 바이오시밀러니 뭐니에 역량을 분산하다가 이지경까지 왔고, 엉터리 교육 때문에 그나마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여태 의존할 수 있던 인재 풀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청년들 중 어설픈 정치병자나 사기꾼들은 사방에 득실거리는데 한우물만 파는 착실한 엔지니어는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반도체 굴기를 야심차게 외치고 국가 차원에서 집중 투자를 했건만 여전히 제자리걸음, 과연 짝퉁 상품 대량 제조 판매와 최첨단 기술 개발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에 있었음을 요즘 절감하는 중국이겠지만 과연 그렇기만 할까요? 저들의 반도체굴기가 만약 성공했더라면 TSMC나 삼성이 미국 편에 붙건 말건 중국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을 터입니다. 물론 미국으로부터의 어떤 요청 따위도 없었겠고, 중국을 서플라이 체인에서 축출해 봐야 오히려 미국만 손해였겠죠. 중국의 굴기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며, 이 책 p167에는 특히 국제 친중 그룹 핵심에 싱가포르가 놓여 있음을 지적합니다. 사실 싱가폴은 북한과도 매우 친하며, 아마도 특권 귀족 계급의 세습 풍조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많지 싶습니다. 

책 후반부에서는 일본의 반도체 부활 노력을 다룹니다. 원래 이병철씨가 1970년대 일본의 상황을 보고 자기 기업이 반도체에 올인해야 미래가 있겠다고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했고, 그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지독하다 싶을 만큼의 노력을 기울여 오늘의 글로벌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의 한국은 오로지 반도체로만 먹고사는 처지면서 이제 사방팔방에서 협공을 당해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현실을 바로 보고 의식 속에서 환상을 걷어내어 냉철한 전략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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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성지혜 지음 / 문이당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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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전음악은 기계, 전자 음악이 일상화된 요즘에도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예술혼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모두 16분의 위대한 일생과 음악관이 실렸는데, 읽어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합니다. 남긴 예술 작품을 보면(들으면) 너무도 조화롭고 완벽한데, 이 책을 읽어 보면 그들 역시 인간이었구나, 허점도 많고 과오도 있었으며 어떤 어리석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다가 제 발등을 찍기도 한 일화가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슈만은 그 감미롭고 달콤한 트로이메라이 같은 곡이 우리에게 너무 유명한데 이 책에 실린 클라라와의 사연을 읽어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슈만의 열혈 팬 중 한 사람으로서 약간은 얼굴이 븕어지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이처럼 인간적이고 솔직한 정서를 품었기에 그런 명작이 나올 수 있었겠다 싶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나서 해당 작곡가와 작품이 더 좋아질지 그 반대가 될지는 사람마다 경우가 다 다를 것 같네요. 

리스트의 유명한 연애 행각은 우리 현대인들도 다 아는 바이지만 책에 실린 구체적 사연은 더 충격적입니다. 그만큼 여성들이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선 이유도 있겠고, 그의 작품들도 여성들과의 끝없는(?) 교감과 소통을 통해 더욱 컬러가 생생해진 까닭도 있을 것입니다. "비창"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들은 무수히 많으나, 이 책에 실린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부른 교향곡 6번의 사연은 독자의 슬픔을 더욱 크게 만드네요. 구스타프 말러도 명곡을 그렇게나 많이 남겼는데 미숙한 여성관 때문에 그렇게나 고생했다니, 아무래도 어떤 위대한 예술 작품은 그 품은 정신의 미묘한 상처에서 발아하고 성장하는 면이 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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