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전통 갓을 만드는 장인(匠人)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갓 만드는 전문가입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골수스러운 성격과 시류를 파악 못 하는 답답한 태도에 몹시 불만이 많습니다. 업종 전환을 해야 생계나 유지할 수 있다며 닦달을 하는데... 이 와중에 전염병까지 도는 통에, 가장은 혼자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해서는 남은 가족들을 구하려 듭니다. 결국 그는 목숨을 잃고, 아직 젊었던 주인공은 부친의 희생 정신을 가슴에 새기지만 그 모친은 여전히 아들의 고집스러운 가업 유지에 불만이 많습니다.

이 집안에서는 안주인 되시는 분이 사려 깊지 못하게 세팅된 듯합니다.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아버지가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그 부인은 대개 순종적이며 아들이 부친에게 반항적인데, 이런 점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그 모친이 생활력이 강하다거나 현실적이라거나 진취적인 건 또 아니고, 대책 없이 징징거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실 주인공인 아들이 부친보다 더 고집이 세고, 더 융통성이 떨어진다고 봐도 됩니다. 그래도 그 부친을 엄청 따르는데, 마치 케플러가 스승 티코 브라헤를 신이나 되는 양 믿고 따르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부친은 그나마 조선말에 살던 사람이라 타격이 덜했지만, 주인공은 활동 시기가 일제 강점기이다 보니 아무리 품질 뛰어난 갓을 만들어 봐야 이제는 누가 사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24기 35주차에 김용익 소설가의 <꽃신>을 리뷰한 적 있는데 그 작품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신분의 문제가 비교적 적게 부각되며, 다만 결말에서 "서양식(사실은 왜식)"으로 머리를 자르고 지배층의 체신을 못 지키는, 선대부터 단골 고객들이었던 양반들에게 배신감에 주인공이 호통을 치는 장면에서 일정 태도가 드러나기는 합니다. ("그간 대어드린 갓 값 다 물어내쇼!")

이 작품은 KBS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적 있는데, 부친 역에 김성겸씨, 주인공 역에 신구 씨가 나옵니다. 외모가 주는 인상과는 달리 사실은 김성겸씨가 신구씨보다 오히려 나이가 아래라는 점이 재미있고, 다만 다들 워낙 연기가 빼어나다 보니 별 위화감이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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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지금 이 책처럼 이름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대계(大係)"라는 이름으로 모아 놓은 기획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된 게 과거의 책들이 모두 절판된 건 물론, 비슷한 시리즈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이 책에는 이청준 작가의 유명한 단편 <병o과 머저o>, <이어도>, <화석촌>이라든가, 전남 순천 출신인 서정인 작가의 <가위> 등이 실렸습니다. 이 작품들은 너무도 유명하기에 이 책에서가 아니라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읽어 봤을 단편들입니다. 확실히 장편도 그렇고 단편도 예전 작가들의 작품이 필력이나 주제의식, 행간에 배어나는 공력 등 모든 면에서 요즘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이동하 작가는 혹 모르는 이들도 있겠는데 1980년대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들을 보면 그 단편이 자주 수록되곤 했던 분이더군요. 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 중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손오공>입니다. "손오공"은, 본명이 "손오억"인 주인공 기업인을 풍자한 네이밍인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작품을 잘 읽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손오억씨는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와 능력 하나로 전무직까지 올랐으며 오너의 사위이므로 곧 이 큰 회사의 살림을 도맡아할 신분입니다. 아랫사람들한테는 대단히 고압적인 매너이지만 워낙 능력이 출중하기에 아무도 반발하지 못합니다. 능력은 뛰어난데 인성은 아주 좋지 못하며, 회사 한 여직원과 깊은 관계를 이어오다가 싫증이 나자 이별을 통보합니다. 요즘과는 달라서 1980년대에는 이런 경우 여직원이 그냥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나 봅니다. 모든 상처와 불명예는 여자 쪽에서 뒤집어쓰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손오억은 갑자기, 모든 양심과 상식이 그 영혼에 회복되어, 여직원에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합니다. 즉시 회사 건물로 돌아가 여직원을 불러 상황을 수습하려 드는데, 방호원이 그를 가로막습니다. "누구신데 이 건물에 들어오는 거요?" 아니, 방금 전에 내게 호통을 듣더니 이 자가 정신이 나갔나, 어떻게 이 회사에서 나 손 전무를 몰라볼 수 있지? 그런데 방호원(경비)뿐 아니라 아무도 손 전무를 몰라봅니다. 기가 막혔지만 현실이 이러니 일단 인정하고, 자신의 사무실에는 지금 누가 앉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 전무 면담을 요청합니다.





사무실 안에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누군가가 앉아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여튼 손오억은 간만에 돌아온 양심의 힘을 빌려, 여직원에게 몹쓸 짓을 한 자신(?)을 혼내 주자는 생각에 그간 손오억이 저지른 모든 비리를 낱낱이 꾸짖습니다. 손오억의 탈을 쓴 저 누군가는 크게 당황하는데, 아마 자신의 비리를 캐려고 이 자가 장기간 미행이라도 한 줄 알고 거액을 제시하며 입을 막으려 듭니다. 손오억은 자신의 집까지 가서 아내와 어린 아들도 만나는데 이들 역시 손오억을 전혀 몰라 보고 저 남의 탈을 쓴 누군가를 남편, 아빠로 반길 뿐입니다. 





한편 손오억(진짜)은 회사를 관둔 여직원의 뒤를 몰래 쫓는데 놀랍게도 여직원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밖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 듭니다. 손오억은 잽싸게 그녀를 구해 준 후, 자신의 정체를 밝혀 봐야 아가씨가 안 믿을 게 뻔하므로, 용한 점쟁이라고 신분을 속인 후 그녀가 겪은 모든 불행을 다 짚어내는 척합니다. 아가씨는 놀라면서 점쟁이(사실은 겉모습만 달라지고, 과거의 기억은 그대로 가진 채 착한 마음만 도로 찾은 손오억씨)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진심어린 위로를 받아 기력을 회복하여 고향에 돌아가 늙은 아버지와 함께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립니다. 아버지도 갑자기 젊은 사위(?)가 찾아와 일도 돕고 딸한테 잘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제목이 손오공인 이유는, 마치 손오공이 서유기에서 제 머리털을 뽑아 분신을 만들듯, 악한 손오억의 만행을 견디다 못한 그 내면이 착한 손오억 하나를 뽑아내 세상에 내보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다만 겉모습은 전혀 달라진 채로... 겉모습이 그처럼 달라진 건, 내면이 극도로 타락하면 그를 반영해 겉모습 역시 다른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바뀐다는 일종의 비유, 상징으로 보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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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느 스토킹 살인이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이런 사건에서 성별 위치가 바뀔 수도 있긴 합니다. 남자 주인공은 소설가이며 여주는 잡지사 기자입니다. 이 둘은 오래 전 연인이었고 결혼식 직전까지 갔었으나 어떤 여인의 현장 난입으로 인해 엉망이 됩니다. 신랑이 처가 쪽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이 결혼은 없던 일이 되어 버리는데 여튼 주인공은 시간이 흐른 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새 반려자를 맞습니다. 

독자인 제 눈에는 이 부인이 훨씬 사려 깊고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보였으며, 반면 여주인공은 가뜩이나 어려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이상한 경향마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저는 이 여성의 내러티브로 전달되는 "난장판이 된 결혼식장"이 과연 벌어졌던 일이었는지조차 살짝 의심이 들었습니다. 소설가를 혼자서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정신 착란을 일으켜, 없던 일을 실제인 양 망상에 빠진... 

물론 그렇다고 보기엔 주인공 소설가가 여인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진지합니다. 미친 스토커한테 저렇게까지 대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주인공이 점잖은 인격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두 남녀가 젊었던 어느 과거의 한 시점에 저 소동이 벌어졌던 건 사실입니다. 

여주인공은 알고 보니 2대에 걸쳐 애정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 모친 역시 남편(즉 여주인공의 부친)과 이혼한 상태인데 전남편은 이미 재혼하여 새 가정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문제는 이미 완전히 감정적으로 전처와 절연한 상태인 남편과 달리, 이 노부인은 최근 들어 전남편에 대한 집착이 불 같이 살아났다는 점입니다. 남편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아 혼자 기다리다가 귀가합니다. 일종의 정신 착란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여주인공은 남주 소설가에 대해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중입니다. 소설가의 회식 자리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자작(自酌)하는가 하면, 소설가 부부가 간만에 함께 휴식을 즐기러 온 별장에 먼저 나타나 몸을 숨기고 엿보기도 합니다. 낌새를 챈 소설가가 아내에게 딴청을 피우며 급히 몸을 피하자고 재촉하는 모습까지 다 훔쳐본 후, 여주인공은 혼자 남아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자학, 자조의 뜻입니다. 

모눈종이 위에서 점은 가로세로선의 교차점 위에 놓여야 하며 중간점이란 인정되지 않습니다. 한 남성은 한 여성과만 맺어져야 하며, 제3자가 혼인에 끼어든다거나 혼외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는 일 따윈 사회가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작가가 지적하고자 한 "모눈종이 위의 생" 그 모순인데, 그러나 우리들 상당수는 모눈종이 위의 규격화, 정형화한 삶과 소통, 교류가 차라리 훨씬 편할 수 있습니다. 24기 37주차에 조선작 작가의 <미끼와 고삐>를 리뷰하며 지금 이 작을 제목만 잠시 언급했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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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어느 아주 작은 회사를 다니는 청년(?)인데, 어느날 사장으로부터 터무니없는 질책을 받습니다. 업무상의 과실로 대금을 분실했으니 회사에 손해를 메꾸어 넣으라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오히려 회사와 상급자, 고용주가 처벌을 받을 만한, 얼척없는 무리한 요구이지만 주인공은 워낙 성품이 고지식한 통에 저런 말도안되는 갑질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이제 그는 일주일 동안 3천만원(2만 9천 달러 상당의 원화)을 구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은 금토일 그리고 월화수. 

한편 강원도 어느 고급 호텔로 가는 도중 주인공은 묘령의 여인과 조우하며, 그 외모로 보아 이런 여성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법한 자신에게 이상하게도, 마치 스토커처럼 사사건건 부딪히고 엮여드는 게 대단히 수상하다고 여깁니다. 알고 보니 과연 이 여성에게는 뚜렷한 동기와 목적이 있었으며, 자신은 어느 나이 많은 사업가와 불륜의 관계인데, 주인공이 마치 실제 남편인 것처럼 꾸미고 현장(?)을 덮쳐 위자료를 뜯어낸 후 돈을 나눠갖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이 당장 공금을 메꿔야 할 처지이다 보니 이런 나쁜 짓에 마지못해 가담하게 됩니다. 

늙은 사업가는 주인공의 험악한 인상과 태도에 바로 주눅이 들어 요구를 들어 주고, 주인공은 이제 여성과 호텔방에서 돈을 나눌 일만 남았습니다. 성공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늙은 사업가한테 하청을 받아 연명하던, 을(乙)의 처지에 놓인 이가 바로 주인공네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이제 사장은 주인공에게 그 검은 돈을 같이 나누자고까지 나오는 판인데, 순간 주인공은 갑자기 제정신이 들어 이 모든 불법과 부조리를 거부하고 그냥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맙니다. 

이 소설에는 큰 반전이 있는데 마치 김창동 소설가의 <보석 고르기>(아직 리뷰는 쓰지 않았습니다)에서 엄청난 재산가가 신분을 숨기고 사윗감을 고르는 설정과 닮았습니다. 또 25기 30주차에 리뷰했던 김지연 작 <촌남자>와도 진행이 꽤 비슷한데, 저무렵 젊은이들이 꿈은 크고 현실은 비루한 데서 마주쳤던 갈등과 좌절을 이런 통속 소설들이 반영한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이 작품은 1984년 MBC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적 있는데, 인상이 무서운 개성파 연기자였던 故 김추련씨가 정의로운 주인공 역입니다. 또 늙은 사업가 역에 정욱씨가 나오는데, 이분은 저때로부터 17년 후인 2001년 11월에 KBS에서 방영된 부부클리닉 어느 에피소드에서도 또 어린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늙은 교수 역을 맡았기에, 아주 이런 캐릭터 전문이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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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타임 - 빛도 시간도 없는 40일, 극한 환경에서 발견한 인간의 위대한 본성
크리스티앙 클로 지음, 이주영 옮김 / 웨일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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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유행 초기에 미국의 어떤 백만장자가 자신이 아직 감염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p9와 책 뒤표지에 인용된 박한선 서울대 교수님의 추천사를 보면 "컴컴한 동굴처럼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햇빛은 바로 사람이다."라는 아주 멋진 말이 나옵니다.

이 추천사에서는 "(없던) 시간을 만들어낸 게 바로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반대로, 만약 그 시간의 흐름이라는 게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면, 인간은 잠시 그 시간을 없앨 수도 있다(p2)고 합니다. 올해 8월 태풍 피해 와중에  지하주차장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기어이 고립상태에서 구조된 분의 실화가 모든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바로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 증명되고 확인됩니다.  

"오늘은 2021년 3월 14일, 딥타임이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정확히 40일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난다(p18)." 이 세상에는 참으로 기발한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더 놀라운 건 그런 놀라운 발상을 자신과 동료,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프로젝트로 구체화한 후 이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프로젝트가 호사가들의 취미이기만 한 건 아니고, 각종 과학적 의문을 해결하고 여러 연구 성과에 실증을 더하기 위한 목적도 컸습니다. 크루들은 그래서 다들 자기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최고의 전문가들입니다.

"정말로 40일 동안 동굴에서 외부 연락 없이 지낼 건가요? 동굴 안은 항상 추워요.(p40)." 1995년 한국의 삼풍백화점 사고도 생각나고, 영화 <디센트>도 떠올랐습니다. 이런 대담하고 어찌보면 무모하기까지 한 도전이 지금(2022.9)으로부터 불과 1년 6개월 전에 있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이 힘든 40일을 남과는 다른 길이, 강도, 깊이로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딥 타임"입니다.

"멜뤼진은 내가 아는 최고의 모험가다. 현장 감각도 뛰어나고 어딜 가나 뛰어난 사람과 함께하며 언제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한다(p53)." 이 책에서 재미난 점은, 극한 상황에 일부러 처한 후 온갖 지혜와 인내를 발휘해서 극복해 내는 과정도 과정이지만, 저자이자 프로젝트 리더인 클로 소장이 크루를 모으고 통솔하는 솜씨입니다. 리더부터가 최고이니 밑에 모이는 사람들도 따라서 최고가 되며,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리더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없다면 팀과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습니다.

이런 동굴 극한 체험에서 가장 간절한 건 햇빛입니다. 아무리 진정성 있는 시도라고 해도 정말로 사람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기에 지상 팀이 따로 대기 중이었습니다. 숙소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태양은 가득히"인데 물론 영화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전문지식도 지식이지만 이런 극한체험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손재주 좋은 분이 팀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미앵 주밀고(p10, p41)는 46세였는데 이 팀에서 최고령자였으며 정비사, 소방대원, 목수 등 다양한 커리어를 가진 터라 이 모험에서 특히나 핵심적인 역할을 해 냅니다. 동굴 진입 전 그가 팀원들을 훈련시키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잠수함 승선원들도 그렇고 이렇게 고립된 공간에서 사는 이들에게 가장 까다로운 게 바로 배설물 처리입니다. 배설물이 세균 등으로 뒤범벅이라 위생상 해롭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건 바로 냄새겠고 이 책에도 아주 직설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이걸 이 팀은 일단 입구에 정기적으로 갖다 놓고 퇴비처럼 건조하여 재활용하기로 했는데, 영화 <백투더퓨처>에도 나오듯이 서양 비료도 성분은 비슷하지만 이처럼 건조 과정을 거친다는 게 다른 듯합니다. 반면 조선 초기부터 시행된 시비법은 습식 그대로인데 그래서인지 1950년대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재배된 채소를 절대 안 먹었다고도 하죠. 기생충이 들끓는 문제가 한국식 시비 패턴에서 끝내 해결 안 된 걸 보면 문제가 확실히 있습니다.

"딥 타임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다. 딥타이머의 시간, 지상팀, 가족들, 일반인들, 그리고 절대불변인 자연의 시간(p127)." 처한 상황에 따라, 그저 심리적으로 그리 느끼는 게 아니라 정말로 시간이 천천히(반대로 빠르게도) 가기도 한다는 걸 발견해 낸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그래서 더욱 놀랍습니다. 고난의 환경 속에서 시간이 더 깊게 흘러가는 중 다미앵이 결국 부상을 입습니다. 앞에서 "동굴 안은 참으로 춥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의 부상은 동상(凍傷)인 게 드러납니다. p145 이하에서 저자가 잘 정리하듯 뉴턴식 개념, 스위스 시계 기술자식 개념, 호킹의 개념 등은 각기 내포가 다릅니다.

"사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를 필요로 하고 다양성을 필요로 함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p207)" 저자는 이 뜻깊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팀 같이 불굴의 의지와 체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 독자들에게, 이 프로젝트의 진짜 소중한 교훈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연대하는 인간은 강하며, 어떤 시련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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