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양이경 지음 / 포춘쿠키 / 2022년 9월
평점 :
품절


책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라고도 하는데 이 시집은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역시 이 시집이 촘촘하게 짜여진 세상이라는 점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이 왜 "여름방학"일까도 생각해 봤는데 여름방학은 1학기, 2학기 사이에 놓인 독립된 시간이며, 그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흥분되는 시간이 하나의 꿈과도 비슷해서가 아닐까 독자로서 저 마음대로 결론내기도 해 봤네요. 

p114에는 "이필녀의 죽음"이라는 시가 나옵니다. 예전 분들은 애를 많이 낳았으며, 넉넉하지도 못한 살림에 폭력적인 남편의 등쌀 때문에 아주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이 시 중의 이필녀씨는 말하자면 지난시절 다 비슷비슷한 삶을 산 여성분들을 가리키는 대명사 혹은 총칭 같은 분이겠습니다. 사실 이 작품 중에 "남편의 폭력"은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만 스무 살 많다는 소개 안에 그런 암시가 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중 상당수)이 왜 엄마를 증오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나쁜 가정 환경이 그들에게 어떤 비논리적이고 잘못된 귀인 방식을 가르치지 않았나 추측이 가능합니다. 바로 앞 작품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와 함께 천재시인 이상(李箱)의 여러 대표작을 다분히 오마주한 것 같습니다. 

p28의 "벽장"은 어느 법대생의 짧고 기이한 체험을 담습니다. 애인(이란 말부터가 벌써 아득한 예전 사람 같네요)이 경리라는 사실 때문에 주인공은 그 부모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하니 모르긴해도 화자는 상대여성과는 대조되는 넉넉한 형편에 위세등등한 집안 출신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여성의 부모가 부재한 틈을 타 방문한 그녀의 집은 비정상일 만큼 크다고 하는데다, 급작스러운 부모의 귀가로 인해 벽장 안에 몸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라니 지금 누구 쪽에서 누굴 반대하는지에 대해 혼란이 생깁니다. 벽장 안에서는 또다시 카프카적인 비일관적이고 모순 가득한 세상 하나가 펼쳐지는데 화자는 속수무책으로 "모든 것이 되돌려져 있기를 (수동적으로) 기대"할 뿐입니다. 사실 되돌려져야 할 정상이 애초에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판입니다. 나아가 어디가 벽장 안이고 어디가 밖이었는지도. 

p57에는 "검은 책"이란 작품이 나옵니다. 요즘처럼 세상이 풍요롭고 재미난 게 많으면, 적당한 수준에서만 경제활동에 참여한 후 즐길 걸 즐겨도 참 행복한(꼭 바람직하다는 건 아닐지라도) 생을 살 수 있습니다. 반면 책을 읽는 시간은? 아마도 현실의 투쟁에서 패배했거나 뭔가 부적응의 시간을 지내야 할 때에나 펼치는 게 솔직히 보통이죠. 그러나 이 작품에서 "검은 책"은 어린 소년에게 엉뚱하게도 더 지독한 악몽을 선사합니다. 책의 암울한 비전에 질린 소년은 거꾸로 현실을 향해 탈출하네요. 

"왕의 길(p48)." 뭐 일본군국주의가 공연한 망동만 부리지 않았어도, 히틀러가 망상의 사이즈를 조금만 낮춰 잡았어도 조선국은 그대로 일제 식민지로 남았을지 모르며 우리는 제국주의자들 당초 계획대로 내지(!)에 동화되어 "일본어로 (말과 생각을 행하거나) 시를 쓰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일본어로 생각하고 말을 할 뿐 아니라 사고 자체도 철저히 노예화하여 마치 북한 인민들이 수령께 범사 감사하듯 덴노 만세무강을 외치는 중일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나마 개인으로 자각하여 비판이나 객관화의 넋두리라도 뇌까리는 것 자체가 "왕의 길"이요 왕의 특권을 누리는 것 아닐지. 

너무 더운 여름엔 잠시 정신이 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함께 느슨해지거나 미쳐 날뛸 수 있는 계절은 즐겁고 그 자체가 방학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남는 중입니다, 이 결혼에서 - 사랑과 결혼 그리고 삶이 던지는 문제의 해답을 찾아가는 기록
박진서 지음 / 앵글북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체로 여성분들은 학력, 재산, 외모, 사회적 지위 등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나은 상대와 결혼하려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간혹 학력, 재산, 외모, 집안 요소 중 일부 혹은 거의 전부가 자신보다 못한 남자를 아주 자신만만히 고르는 여성분도 있는데, 이에는 다양한 동기가 작용합니다. 누가 나보다 낫다 못하다 어떻다는 물론 지극히 속물적인 판단이므로, 사실 둘 사이의 격정적인 사랑 외에 다른 동기가 없어야 그게 행복한 결합이긴 하겠는데,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이 그렇게 낭만적으로만 결정된다면 나중에 후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여튼 한번 맺어진 소중한 인연이 끝까지 아름답게 이어지기란 정말 어려우니, 이혼이다 불륜이다 혹은 쇼윈도다 하는 흔한 전개가 아닌, 당사자 간의 노력을 통한 바람직하고 우아한 진행이라면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기까지 합니다. 

"마더 데레사의 사주(p175)" 사실 개인적으로 사주니 이름 통변이니 하는 걸 믿지 않는데 이런 분들이 대체로 이미 주변 정보를 통해 당사자의 사정을 훤히 안 상태에서 설명만 그럴싸하게 갖다붙이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분은 야맹증이 있었으나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는데 어느날 드디어 올것이 오고 말았다고 합니다. 마치 코미디언 이동우씨의 경우와 비슷했는데 다만 증상이 서서히 진행되었던 게 차이였다고 하네요(p26). 남편이 시각장애 판정을 받고 직장 등 모든 일거리를 잃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저자께서도 희귀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불운한 일이 또 있겠나 싶습니다. 시각 상실은 일상에서 겪는 불편이 너무도 크기에 이런 분을 돌보려면 그야말로 성인의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겠는데 하물며 본인까지 병에 걸리시기까지 했으니... 

"인생은 정말 별것이 없"습니다(p193). 뜻하지 않은 횡재로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기도 하고, 마땅히 잘되어야 할 분들(이 책 저자분 부부 같은)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극한의 불운을 겪기도 하는... 그 와중에 작은 보람이나 행운이 찾아온 걸 두고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지기도 합니다. 인생이라는 주사위놀음이 본디 얼척이 없고 아무 필연이나 응보가 작용하는 게 아니기에, 불운에 지나치게 분노하고 반대로 행운, 요행에 성취감을 느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별게 아니며, 조용히 관조, 달관할 수 있는 이가 진정한 승자입니다. "놀랍게도, 불친절한 삶 속에도 행복은 숨어 있다."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내 스스로가 채운 것이다... 그저 인내할 뿐이다(pp.62~63)." 그런데 어떤 극한의 불운, 불행 속에서도 이 부조리함을 담담히 수용하고 그 안에서 어떤 불변의 이치, 도리를 깨닫고 내면화할 수 있다면, 사실 부처나 예수의 길이 따로 없을 듯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찾아지는 내면의 평화나 안온함, 도덕적인 희열감 등은 그걸 실제 겪어 본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엄숙한 이야기나 교훈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책에는 그야말로 우리 이웃들이 일상으로 겪을 만한(알고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소소한 기쁨이나 소박한 깨달음도 많이 언급됩니다. 만약 책의 처음과 끝을 우연히 생략하고 중간부분만 읽게 된 독자라면 책의 성격이나 저자께서 처한 상황에 대해 완전히 착각하고선 유쾌하게만 읽어나갈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분위기가 그만큼 밝을 수 있는 건 저자의 초극, 달관이 그만큼 높은 경지에 다다른 방증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라스무스의 저술 <우신예찬>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함께 서양 르네상스의 서막을 열어젖힌 계몽주의 사상을 담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며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가르칠 정도로 중요합니다. 

"우신(愚神)"이라 함은, 이 책 p298 이하 역자 해제에 잘 설명된 대로, 어리석음이라는 속성을 상징, 혹은 체화한 추상명사로서의 신입니다. 말하자면 어리석음이라는 부분적 속성을 지닌 신이 아니라(유일신 체계에서 이런 표현을 쓰면 바로 신성모독이겠으며 이런 책은 출판 자체가 블가능했겠습니다), 어리석음 그 자체의 신입니다. 박문재 박사님의 설명처럼, 인도 유럽 어족의 여러 언어들에서는 추상명사들이 매우 자유롭게 신격을 갖춘 채 이야기 속에서 쓰이곤 합니다. 그런데 μωρία는 그리 쓰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바로 이 고전 <우신예찬>에서가 거의 유일한 예?), 구태여 비슷한 걸 들자면 κοάλεμος이겠습니다. 

우신이 과연 누구인지, 신통기 속에서 어떤 항렬을 차지하는지 독자들이 잘 모르는 게 당연하므로 1인칭 주인공인 우신은 p30 이하에서 자기소개를 합니다. 과연 우신이라서인지 늘어놓는 그 자기소개도 바보스럽기 짝이 없으며 일단 객관적 팩트만 추리자면 아빠가 부와 재물의 신 플루토스라는데 여기서 저자 에라스무스는 "헤시오도스가 인정하지 않겠지만..."이라며 한 자락을 깔아 이 서술이 근본 없는 만문(漫文)임을 자인하고 듭니다. 

에라스무스의 이 저작은 사실 특정 정파나 교단에 비판의 초점이 놓인다기보다 거의 "모두까기"식입니다. 이를테면 p60 이하에서 우신, 아니 에라스무스 본인은 여성을 비판하는데 "그들은 아름다운 용모를 앞세워 폭군마저 쥐락펴락하고... 발그스레한 뺨, 사근사근한 목소리, 곱고 부드러운 피부 등을 가져 마치 영원한 소년기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여성들의 '어리석음'이 남자들을 기쁘게하며...그 시답지않은 행동들은..." 운운하는 중 여성과의 무의미한 소통과 환락에다 정력과 시간을 낭비하는 남자들을 비판하며 결과적으로 여성 일반을 신랄히 비판합니다. 우신은 이런 여성들의 행태에 전형적으로 깃들며 그 어리석음을 극단으로 치닫게, 혹은 도드라지게 한다는 뜻이죠. 

다만 일방적인 금욕주의 관점에서 일체의 감정 표현을 적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오히려) 광기에도 바람직한 광기와 그렇지 못한 게 있다"며 은근 역성을 듭니다. 이쯤되면 우신은 비판과 픙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며(책 속에서 원래 주인공이긴 했지만), 도리어 여태 부당히 단죄되어 온 어리석음이 대놓고 주인공의 상석에 오르지 못할 이유가 뭐냐며 항변하는 기조입니다. 

책의 구성은 의외로(?) 치밀하며 바보스러운 어조의 너스레 속에 결국 엄숙주의가 여태 짓눌러 온 온갖 종류의 감정 표현과 자연스러운 행동이 이제 수면 위로 당당히 드러나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도하게 설파합니다. 이 구성이 얼마나 치밀한 의도 속에 실현되었는지는 역자 박문재 박사의 각주만 꼼꼼히 읽어도 알 수 있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만 모르는 진실 특서 청소년문학 29
김하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좋지 못한 결과가 벌어졌을 때 그 책임을 누구한테 물어야할지 결정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이른바 인과관계의 확정이라는 건 따지고보면 모든 형사사건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conditio sine qua non이라는 원칙이 오랜 동안 서구권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했으나 이 원칙을 고수하자면 살인 사건의 머나먼 근원은 그 살인자의 출산으로까지 거슬러가야만 합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저질러진 정말로 나쁜 짓은 1) 도촬과 2) 그 책임을 은폐하려는 상해, 이 둘뿐입니다. 구태여 따지자면 3) 깡패가 저지른 폭행치사 하나가 더 있겠으나 이 작품에서 3)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양심, 정의, 죄책감 같은 것은 정상적인 도덕감을 지니고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문제가 될 뿐이라는 전제가 깔려서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p142를 보면 우진이는 비로소, 평소에 부러워했던 친구 oo의 본색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 앞에서도 잘 웃고 당당했으며.... 사실 이런 장점들은 그의 엄청난 무심함과 이기심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이런 거침없고 태연해하는 기질이 사실 장점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그를 발판으로 삼아 자신의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는 한없이 추악한 내면의 표출이라는 걸 늦게나마 꿰뚫어 보게 된 거죠. 

작중의 oo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이런 악마 같은 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강자의 탈을 썼지만 사실 모래성처럼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 자도 있고, 겉으로 약한 척 온갖 궁상을 떨면서 속으로는 남의 호의를 악용하여 사기를 치려는 구질구질한 싸이코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 잘생긴 우진이도 순전히 정의감만을 동기 삼아 결단을 내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oo의 권력(상당 부분은 그 아빠에게서 유래한)이 알고보니 그리 탄탄한 게 못 되었다는 냉정한 계산도 한몫했던 거죠. 우진이가 나쁜 아이는 물론 아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제갈윤의 남친이었던 그가 그런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도 어쩌면 그렇게 감정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었는지, 상당 기간 동안 자기 진로를 위해 oo 같은 나쁜 녀석한테 협조할 생각을 먹었는지, 윤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서라도 진범과 진상을 밝힐 책임을 지녔으면서도 본분을 그토록 오래 잊고, 터무니없는 데다 부도덕한 동기에서 자신이 죄를 뒤집어쓸 작정이었는지가 어이없었습니다. oo 같은 애당초 근본이 나쁜 인간은 차치하고, 저는 우진이가 이 소설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는 윤의 남친이었습니다. 어떤 위험과 불안으로부터도 여친을 지켰어야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따라서 어떤 편지를 보내거나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 소설은 그래서 "과연 진상이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을 마치 미스테리물처럼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네요. 윤의 엄마가 깡패와 맞서려고 차 밖으로 내린 행동은 물론 무모하긴 했으나 도덕적으로야 아무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경적을 울린 xx의 행동도 잘못이 없죠. 인과관계의 무한 소급은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자칫하면 진짜 귀책자에 쏠려야 할 비판을 분산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 속에서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지른 녀석은 oo일 뿐입니다(깡패는 인간이 아니니 논외). 

아무튼 정의가 마침내 실현되는 과정은 감동적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생각나고, 1991년작 미국 영화 <여인의 향기>도 살짝 떠올랐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대한의 정의를 끌어내려는 여교사 나현진의 젊은 양심도 아름답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트 리세션 2023년 경제전망
김광석 지음 / 지식노마드 / 2022년 10월
평점 :
품절


세계인들을 가장 큰 공포에 떨게 하는 알파벳 글자는 D(depression의 약자)이며, 그 다음이 R(recession)입니다. 사실 코로나19의 대유행 이후 반도체 슈퍼사이클부터 해서 오히려 호황이 찾아오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으나 보기좋게 빗나갔으며 이제는 거꾸로 경기침체가 모두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주류입니다. 벌써부터 강남 유흥가를 중심으로 불황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으며 이 깊은 골이 어디서 끝이 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세밑을 맞이하는 요즘입니다.  

경기 침체는 일단 미국이 자국 내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대폭 올린 데서 비롯했으며, 한국은 덩달아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외국 자본이 한국으로부터 대거 빠져나갈 것이 자명하므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금리가 오르면 기업이나 가계가 대출원리금 상환 부담이 가중되기 때문에 부도율, 폐업률이 상승하며 돈은 돈대로 시중에 돌지 않기 때문에 경기가 다시 나빠지는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한국이 영토도 좁고 자원도 부족하며 오로지 대외 무역이 창출하는 부를 통해 살림살이가 영위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건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하니 개인들은 냉철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알맞은 생존 전략을 찾아야만 합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세계화의 트렌드가 대세였으며 어느 나라건 문을 닫아걸면 미래를 포기하는 선택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 나라도 우루과이 라운드다 뭐다 해서 농업 부문의 일정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국제화의 물결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세였습니다. 문호가 개방되면 미국산 값싼 칼로o 같은 브랜드가 밥상을 휩쓸리라고들 아우성이었는데 (아직 그럴 위험이 남아있긴 하지만) 막상 지나고 보니 원산지 표시 규제가 의외로 큰 힘을 발휘하여 국산 농산물이 여전히, 적어도 개인 밥상 위에서는 사랑 받습니다. 뭐가 되었든 간에 (p81에 나오는 대로) 작금의 형국은 명백히 탈(脫)세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네요. 

특히 저자는 p136 같은 곳에서 대외채무의 현격한 증가세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IMF 외환위기 역시 대외채무의 상환이 어려울 만큼 외환 보유고가 줄어들어..." 돌이켜보면 한국은 외국에 빚을 지지 않을 때가 거의 없을 만큼 가난하면서도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였으며 현재는 비록 빈곤선상에서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외부로부터의 각종 리스크에 크게 노출된 경제 구조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정부 지출이 (코비드19 때문에) 크게 늘었으며 국채 발행이 잇달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입니다. 이 고비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길지 모두의 인내와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죠. 

이미 충분히 개방된 금융시장이며 선진화한 시스템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p170) 저자의 견해는 다릅니다. 대중은 공매도를 격하게 반대, 혐오하지만 이 역시 국제 룰의 일부이며 공매도는 올바른 정보의 보급과 비판을 자극 촉진하며 종목의 거품을 빼는 순기능이 있다는 취지이겠습니다.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위기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닥쳐오는 도전만 수동적으로 넘길 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고 선제적으로 스텝을 디디고 고지를 쟁취할 필요도 있는데 저자가 주시하는 포인트는 웹3.0, 속도의 경제, 모빌리티, 자율주행 등 패러다임 레벨에서의 목표들입니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