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어떻게 통치되는가 - 대통령제, 내각제, 이원정부제
강원택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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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이란 말은 아서 슐레진저가 당시의 미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비판하기 위해 처음 쓰인 말이라고 합니다(p30). 그러나 닉슨은 탄핵 위기에 몰려 결국 자진사임 형식으로 물러났고, 이후에는 이런 비판이 일어난 적이 드뭅니다. 대통령제란 그 본질적 특징으로 인해 원래부터가 제왕적 시스템으로 흐르기 쉽기는 하나 유독 한국에서만 이런 시비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 대통령제가 이제 더이상 한국의 정치 현실과 사회 구조에 안 맞는 점이 있다면 이는 자연스럽게 개헌 논의로 이어질 만한데 만약 개헌이 필요하다면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미국은 한국과 달리 연방제 국가입니다. 또 책 p40에 잘 나오듯, 미국의 정당은 소속 의원들에 대한 기율, 기속이 느슨하며 이 때문에 이른바 크로스 보팅이 자주 생깁니다. 이러다 보니, 양원제도 아니고 단일제(unitary) 국가 체제인 한국에 과연 대통령제가 최적이긴 한지 의문이 들 법합니다. 또 pp.50~57에 서술되듯 정치적 책임성 구현의 어려움, 임기 후반의 통치력 약화 등 고질적인 문제가 번번이 모든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었습니다. 또 한국은 거의 주기적으로,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과 의회 다수당이 블일치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런 이원적 정통성(dual legitimacy. p63)은 종종 여야 간의 극한 대립을 부르며 심지어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이 탄핵되기도 합니다. 책에서는 1992년 브라질의 꼴로르 대통령, 1988년 한국 13대 국회 여소야대, 2006년 대만 천수이볜 총통 탄핵 시도 등을 예로 듭니다.  

물론 의회도 전국민이 참여하여 구성되는 의사체이긴 하나 그 구성원인 헌법기관(즉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은 평균 20만 정도의 선거구에서 뽑히는 대표이며, 대통령은 거의 4천만에게 주어지는 선거권이 모이고 모여 선출되는 자리이고 보면 민주적 정당성과 권위가 막대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한 나라의 이상적인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p86. YTN 방송 중 호준석 앵커 멘트 재인용)"이라야 하겠는데, 현실적으로 이게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이 내내 문제된 건 집권여당의 이른바 "총재"직을 대통령이 거의 언제나 겸직해 온 관행(p91) 때문이었는데 이 전통은 노무현 대통령 때 깨졌고 "총재"라는 다소 시대착오적인 직함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총재"는 한국은행 수장 자리가 거의 유일한데 이 직위에 이런 이름이 계속 남게 된 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죠. 여튼 저자는 대통령제가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그 나라의 토착 정치 현실에서 뿌리내린 예가 거의 없음을 지적하며, 왜 세계최고의 민주주의 모범국인 미국에거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제도가 다른 나라들에서는 유독 독재로 변질되거나 극심한 시행착오를 겪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뢰벤슈타인이 창안한 신대통령제에 보다 풍성한 내용을 더한 모리스 뒤베르제는 바로 자신의 이름을 딴 어느 법칙에서, 단순다수대표제 하에서는 양당제나 거대 정당의 과대대표 현상이 벌어지기 쉽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반면 대표성의 보다 철저한 구현을 지향하는 독일 의원내각제는 이미 바이마르 헌정 초기부터 소수정당의 난립으로 인한 폐해가 심했는데 이를 지양하기 위해 전후 이른바 건설적 불신임제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내각제는 그 총리를 다수당에서 배출하는 게 상식이고 자연스럽게 간선제(의회 선출) 형식이 되는데, 독특하게도 이스라엘만큼은 한때 이를 직선제로 또 뽑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통령제의 대통령과 다를 게 뭔가 하겠는데, 의회에서 총리를 불신임할 수 있는 점 등은 내각제 요소 그대로이고 오로지 총리 선출시에만 국민직선이란 거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이러면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단점만 고스란히 유지하는 셈이며 이 기형적 제도는 얼마 안 가 폐지되었습니다. 

이원집정제 혹은 반대통령제는 특히 프랑스 5공화국 기간 중 동거정부(대통령 좌파 미테랑, 총리 우파 시라크) 하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졌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동거정부는 좌우진영을 달리하여 여러 차례 등장한 적 있죠. 책에서는 이런 이원정부, 예컨대 폴란드나 핀란드 등이 서서히 내각제에 수렴해 간 역사적 예(p211)를 드는데 사실 프랑스 역시 7년제였던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줄이는 등 내각제스러운 면모를 더해 가는 중입니다. 

시스템이라는 것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내용과 형식이 변화할 필요가 있고, 그런 요구가 모이고 모이면 개헌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치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대정신의 변화도 변화이거니와 애초에 시스템 자체에 내재적 결함이 행여 있었다면, 이를 고치기 위한 시도에 국민적 용기를 낼 이유도 한층 근거를 강화한다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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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식당 4 : 구미호 카페 특서 청소년문학 30
박현숙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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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은 컸다(p6)." 주인공인 오성우는 집안에 돈이 없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돈이 없다 보니 연예인들 다니는 피트니스 센터(p123)를 등록할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몸도 정말 빈약합니다. 돈이 없다 보니, 마음에 드는 여자애한테 이종사촌 재후처럼 비싼 반지(...)를 척척 선물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재개발지역에서 어울리지 않게 덩그라니 개업 중인 카페에 들어가서 수상쩍은 중고 아이템을 사게끔 유도되는데 오성우를 꼬드기는 건 점원 "꼬리"와 (잠시 후에 등장하는) 가게 주인 "심호" 두 사람입니다. 

"그 말은 다이어리 주인처럼 돈을 마음껏 쓰며 살 수 있다는 뜻일 거다(p46)." 그런데 이는 성우가 오해한 것이었고 구미호 카페에서 산 중고품에는 그 사용에 (18일 동안 모두 써야 한다는 점 외에도) 알고 보니 여러 가지 추가 제약 조건이 많았습니다. 돈이 그냥 무제한으로 들아오는 게 아니라, 하루 사용분이 정해져 있어서 당일이 지나면 그냥 사라집니다(p150). 나중에 보면 돈뿐 아니라 물건(p187)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성우는 이 사정을 몰랐기에 순댓집 딸 이영조를 괜히 도둑으로 의심하기(p111)까지 합니다. 

영조는 눈치도 없이(?) 막무가내로 성우를 좋아한 것 외에는 아무 죄도 없는데, 더군다나 (별 장점도 없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애한테 그렇게까지 굴다니 성우가 너무도 한심해 보였습니다. 이런 성우한테 원래 소원했던 돈은 안 들어오고 갑자기 짝녀 홍지레가 관심을 보여 옵니다. 마법이라더니 이건 뭐가 잘못된 거 아닐까? 그런데 성우는 여기서 "따지고 보면 그 돈도 홍지레 때문에 원했던 거잖아?"라며 "고객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는 구미호 카페의 능력이 새삼 놀라웠다(p86)"고 합니다. 이 대목이 엄청 우스웠는데 만약 타락한 어른 같으면 아 지레고 뭐고 간에 그저 돈이 최고이며 돈만 있으면 고작 동네 퀸카인 지레 아니라 전국구 장원영 같은 여자도 만날 수 있었다며 억울해했을 것 같아서입니다. 

고객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다... 사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한심하게도 우리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모릅니다. 구미호 샵(?)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냥 단순하게 소원만 들어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영혼을 올바른 방법으로 구제해 주기 위해 일견 이해가 안 되는 조화를 부립니다. 사실 진짜 기적은 하루 88만 2,400원이 (좀 이상한 영어 선생인) 강신도에 의해 입금(p88, p99)되는 게 아니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 오성우한테 홍지레가 갑자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한계, 자신의 열등감을 필터로 삼아 세상과 타인을 봅니다. 오성우는 여태 그저 비싼 반지를 사 줄 수 있어서 지레 같은 아이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재후를 부러워했는데(사실 재후에게는 큰 키, 잘생긴 얼굴, 훌륭한 체격 등 그 외에도 장점[p26]이 많습니다), 재후는 사실 홍지레한테 큰 관심도 없고 그냥 반 아이들 생일을 본래 잘 챙기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었다고 합니다(p179). 하긴 정말로 사랑하는 아이한테 주는 반지였다면 사기를 친(p101) 이모한테 시킬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백화점에 가서 샀겠지요. 

더 놀라운 건 이런 사정이 지레한테도 마찬가지라는 건데 얘는 여태 오성우가 챙겨 준 반지뿐 아니라 재후가 전에 선물해 준 반지도 원하면 너 가지라고 무심하게 내어 주기까지 합니다. 그럼 애초에 왜 홍지레는 오성우에게 마음을 열었을까? 수학을 잘해서?(p97) 그건 아니고(노력을 좀 했을 뿐 공부머리가 그리 좋은 것도 아닙니다. p26)사실 오성우는 이상하게 다른 친구들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재후도 p83에 나오는 사건 때문에 지금까지 오성우한테 고마움을 느끼고(게다가 p106 사건도), 영조가 오성우를 좋아하는 것도 p59에 나오는 사연이 예전에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사건들은 오성우가 잠시 잊었을 뿐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죠.  

그런데 오성우 머리에서 완전히 사라진 기억, 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오성우가 간절히 바랐던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고, 동시에 영조 아빠(순대 장인), 재후한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시 사람에게 중요한 건 돈이나 외모, 스펙 같은 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하는 착한 마음이지 싶습니다. 그러니 행여 내가 좀 부족해도, 내 진실된 마음을 홍지레가 알아 줄 수도 있으니 용기를 내어 대시해 볼 일입니다. 

그런데 혹, 지레가 영 속물적이고 돈만 밝히는 애라면? 그런 애는 내 순정을 받을 가치가 없으니 내가 그냥 포기하면 됩니다. 이런 점도 잘 가르쳐 주는 다른 구미호 카페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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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먹는 분자세포생물학 -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추천도서
신인철 지음 / 성안당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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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인철 박사님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현재 한양대에 재직 중인 중견 교수이신데 지금 이 책의 텍스트뿐 아니라 스토리, 일러스트, 말풍선이 딸린 캐릭터들 그림까지 손수 다 그리셨다고 나옵니다. 보통 만화를 봐도 이야기와 그림이 한 작가 솜씨라야 더 재미있고 흡입력이 있는데 이 책도 그렇습니다. cell biology는 요즘도 한국에서 인기 전공 분야이며 매년 우수한 학생들이 장래 진로로 삼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어려운 이름부터가 왠지 거리감을 주곤 하는데, 이처럼 재미도 있는데다 그 내용도 권위와 정확성을 동시에 갖춘 책을 보면서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장래에 대해 새로운 꿈을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활면소포체(滑面小脯體). 역시 생명과학 용어는 다들 어렵습니다. 표면에 리보솜이 없어서 미끌미끌한 탓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나옵니다(p58). 이 페이지 일러스트에는 큰 한자로 배경에다 滑이라고 썼는데 저자는 "깨알 같은 한자 공부!"라며 독자를 웃게 만듭니다. 사실 용어들은 대부분이 한자어인데 이처럼 그 정확한 뜻을 알면 기억에도 오래 남고 여기서 익힌 한자가 다른 분야 공부나 독서에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어이 형씨, 모든 약은 다 독이라는 말 알죠? 치료 효과도 있지만 우리 자체가 조금씩 독성이 있어요." 그러니 약은 당장 효능을 본다고 남용해서는 결코 안 되죠. 이런 이치를 우리 독자들이 알기 쉽게 전달하려고 약병, 또 활면소포체 등을 살아숨쉬는(게다가 말도 하는) 캐릭터들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활면소포체가 좀 나이가 있으신 분인가 봅니다. 형씨 같은 올드한 어휘를 쓰는 품이... 

요즘 나오는 생명과학 책들은 심지어 기생충이나 각종 미생물들이 우리 인체(system)와 애초에 적대적이거나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 같은 세상 안에서 공생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이른바 내부공생설(p78)에 따른 서술들을 많이 합니다. 알고보니 미토콘드리아의 조상이 박테리아더라...  파스퇴르 이전의 많은 과학자들은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생명체들이 각종 질병의 원인을 옮기고 다닌다는 생각에 그저 코웃음만 쳤습니다. 자신(미토콘드리아)이 만들지 못하는 종류의 단백질은 자신의 숙주 세 포로부터 원료를 얻어 와서 만드는 이치를 두고, 저자는 "국내에 부족한 공산품은 해외에서 수입해 오기도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설명인데, 들으면 들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세포 연접은 다양한 패턴들이 있습니다(이 파트가 내용이 상당히 어려운데 그림도 재미있고 워낙 권위자분의 서술인지라 이해가 쏙쏙 되었습니다). ATP는 에너지를 수송하는 최소 핵심 단위이며, 인산화 효소는 이 ATP에서 인산을 분해하여 다른 커다란 분자에 갖다붙이는 효소라고 합니다(p154). 여기서 부착연접이 등장하는데 상피세포들을 서로 촘촘하게 연결시켜 주는 기능이라고 하며 이는 접착연접과 데스모솜으로 다시 나뉜다고 나옵니다. 다시 저자의 탁월한 비유법이 나오는데 접착연접이 마치 벨크로(찍찍이)와도 같다고 합니다. 그저 비유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국내 최고 권위자의 설명답게 실질에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는 게... p168에는 벽돌이 시멘트로 인해 서로 붙어 있듯 세포연접이 그런 기능을 한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우리도 세포분열을 중3, 고2 때 배웠고 중요한 내용은 교과서에도 잘 나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기본이 만화책 포맷인데도 내용이 깊이가 있고, 중고교 교과서에 안 나오는 설명도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G1기에서 S기로, 또 G2기에서 M기로 넘어갈 때 CDK와 사이클린이 필요하다고 합니다(p187). CDK4와 사이클린D의 관계가 어떤지, 코믹한 그림을 통해 잘 보여줘서 아마 이 사항이 머리에서 좀처럼 안 잊힐 듯하네요.     

우리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우기로 동물세포와 식물세포 사이의 차이가 세포벽이라고 배웠습니다. 두 딸세포 사이에 세포판이 만들어져 세포분열을 돕는다는 설명이 시원하게 이어집니다(p198). 세포 주기  파이 차트는 중고교 참고서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 책에는 유독 자주 등장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세포주기가 혹 대충 진행되기라도 한다면, 마치 방학 생활 계획표가 대충 그려져서 학생의 계획이 망쳐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 설명을 듣고 보니 세포 하나의 내실 있는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낌이 오더군요.  

책 곳곳에 유머러스한 설명과 comic relief가 많아서 이 어려운 학문의 큰 줄거리를 대강이나마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안당 특유의 세밀하고 선명한 편집도 독자를 즐겁게 해 주네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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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가지다
주연화 지음 / 학고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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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은 상속이나 양도에서 세제 우대를 받기 때문에 부자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최근에는 MZ 세대 중심으로 저런 경제적 측면이 꼭 아니라 해도 그저 순수한 심미적 욕구에 의해 관심이 집중되거나 선호된다고 합니다. 어차피 개인의 만족을 위해 뭘 모은다면 꼭 시장 가치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겠으나 기왕이면 뜻있는 동호인들과 소통도 하고 투자 목적까지 달성할 수 있을 때 더 큰 보람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감상과 투자 그 무엇에 주안을 두든 간에 작품 자체를 더 잘 알고, 미술품 시장에 대해 더 정확한 이해가 뒤따를 때 나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만족이 더 커질 수 있겠네요. 

마르셀 뒤샹은 고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분수>라는 제목(컨셉트)의 변기 재활용(?) 작품으로 일단 유명한, 지난세기의 미술가입니다. 그의 등장과 새로운 활동은 향후 미술품 창작의 공간과 거래 시장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 많은 걸 시사했다고 평가됩니다. 책 p41에서 저자께서는 그의 작품 "자전거 바퀴"를 평가하며 미술품 작가의 개념과 세계관에 대해 친절히 설명합니다. 그의 등장 이후 평론가와 대중은 "오브제"의 의미에 대해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술 작품이란, 대중한테 주목을 받아야 그 성취가 증명됩니다. 반대로 대중한테 인정 받는 것만 신경 쓰는, 이른바 상업예술만 너무 성행해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겠는데, 저자는 애초에 고상한 순수예술과 상업 통속 예술 사이에 경계가 있을지에 대해 의문(p57)을 표시합니다. 고 백남준도 "예술은 어차피 고등 사기"라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p75에도 나오듯이 비단 미술품뿐 아니라 모든 상품, commodity, 증권, 부동산 등 인간의 소유욕이 발동되는 목표물들에는 투기 수요라는 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가 갈파했듯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는 사람의 생존에 아무 기여를 못 하는 아이템들이 터무니없다 싶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재미있는 지적을 하시는데, 주식 같은 것은 일시적으로 시장에서 저평가되어도 그 회사나 공장의 생산력이나 매출에 직접 지장이 생기지는 않으나, 미술품은 한번 그 작가와 함께 가치가 내려가면 회복도 힘들고 또 그때부터 작가의 창의성, 생산성 자체에도 타격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나친 투기적 수요(의 개입)는 작가와 미술계 전반에 해롭다는 취지이시겠는데... 이런 이치는 사실 주식도 큰 차이가 없어서, 오른다 오른다 하다가 결국 주저앉은 종목, 세력이 해먹고 나간 종목은 이후 내내 회복이 힘듭니다. 물론 저자님 지적대로, 주식에서는 예를 들어 시황이 나쁘다고 이에 회사가 "직접" 그 매출에 타격을 받거나 하진 않습니다만. 

cultivated class, 즉 "교양 있는 계층(p85)"의 존재... 사실 미술품 시장이란, 일차로는, 대체 미술품에 대해 관심이나 소양이라는 게 있기나 하고, 누가 이렇다더라 찔러 주는 이야기에 일시 혹하거나 트렌드에 마구 쏠리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느낌, 유니크한 열정(enthusiasm), 흔들리지 않는 안목을 갖고, 전시회나 경매장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자신의 정직한 욕구에 의해 구매도 하는, 교양 있고 예산도 있는 소수, 일부가 일단 선도를 해야 시장에 공정가격 비슷한 게 생기는 게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변기통이 그저 변기로만 보이는 대중, 혹은 못 배운 속물적인 졸부 등이, 애초에 오브제에다 대고 무슨 의미를 찾거나 예술적 감흥 같은 걸 발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증시에도 시장 조성자라는 게 있듯이 말입니다.  

중세 극소수 왕족 귀족이 커미션을 주고 미술가들에게 활동 공간을 마련했을 때에는 예술이라는 게 천편일률로 종교 테마만 표현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르네상스 들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더 솔직히 표현하는 계층(역시 안목과 재력을 동시에 갖춘)이 등장하자 예술도 그에 상응하여 발전했으며, 책 p122 이하에 나오듯 19세기 들어 자본주의와 시민 계급의 발달이 완전 성숙기에 접어든 프랑스 파리가 미술품을 비롯 각종 문화의 중심지가 된 건 당연했겠습니다. 

이러던 게 20세기 들어 미국으로 미술 발전의 중심이 옮겨가고(결국, 돈 있는 곳에 예술도 옮아가는) 종전과 달리 팝아트 등 보다 대중적 성격을 띤 미술이 주류를 이루게 된 과정도 일관된 설명이 가능하죠. 또 이때부터 "브랜딩"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는데(책에서는 p127 이하에서 스컬 옥션의 예를 듭니다) 이제 일반 상품과 미술품 사이의 경계마저 점차 모호해져 가는 시대의 흐름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소더비 등은 명작을 거래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급 문화 체험을 제공하는 일류 브랜드입니다.  

종전 시대 구간에 갤러리와 큐레이터들의 탁월한 입지와 품격, 평판, 안목이 중요했다면, 이런 영향력의 일부를 이제는 소셜 미디어가 잠식하여 가는 추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책을 사도 특정 유튜버가 이 책이 좋다더라 방송에서 한번 띄워 주면 그 책에 관심도가 늘어나는 세상입니다. 또 증강현실, NFT 등이 얼마나 미술품 창작의 장(場)과 거래 기회에 깊숙이 침투했는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투자 대상, 재테크 수단으로만 미술 작품을 본다 해도 최소한의 어떤 교양과 지식이 갖춰져야 첫걸음을 뗄 수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이런 심미안이라는 게 결국은 세상 전체를 조화롭게 받아들이는 관점과 태도 등과 불가분이라는 점도 확인 가능했네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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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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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인", "서스펜스의 대가" 이 책 책날개에도 나오는, 생전의 P 하이스미스에 대한 압축된 찬사입니다. <재능있는 리플리 씨> 같은, 우리가 다들 잘 아는 그녀의 대표작만 봐도, 분명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쫓겨다니는 주인공이지만 우리는 그의 위태위태한 행보를 계속 좇으며 불안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은근 응원까지 보냅니다. 서스펜스가 곧 불안이라는 뜻인데 이 서스펜스라는 단어에 대고 하이스미스는 거의 새로운 의미 하나를 창조해 낸 듯합니다. 

이 작품집에 실린 그녀의 단편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비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이 넓은 세상 어느 한 구석에는 반드시 있을 법한 색다른 실감으로 가득하고, 탄생시부터 뭔가 기이했던 사연과 사람들이 나중에는 더욱 예측 불가의 길로 폭주하다 괴상한 파멸, 혹은 찬란한 정복을 겪는 사연들이, 우리네 인생 곳곳에 도사리는 아이러니를 가장 생생하게 표현하는 듯 보이네요.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 수녀원도 수녀원 나름인지라 사실 우리 외부인들이 생각하는 만큼 모든 곳이 서로 닮은 분위기는 아닐 것입니다. 오드리 헵번 주연의 <수녀 이야기>처럼 음울하고 정치 투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수녀원도 있겠고,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처럼 비교적 평화롭고 구성원 사이에 우애가 더 지배적인 곳도 있겠는데, 이 단편에서의 공동체는 물론 후자에 가깝겠죠. 주워온 사랑스러운 아이가 평화롭던 관계에 파탄을 내는 건 마치 <십계>에서의 모세를 보는 듯도 합니다. 또 아무리 이별이 고통스럽다고는 하나 그 운명의 길을 걸어가야 할 아이는 결국 그리 가야만 합니다.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 

미지의 보물: 아마도 전후(戰後), 제대 귀환한 어느 베테랑, 한때는 훤칠하니 여자들한테 인기도 있었을 법한 남자는 이제 다리를 절고 귀 한 쪽이 날아간, 초라한 장애인 신세입니다. 장애인일망정 그 큰 키는 앞서가는 자그마한 또다른 남자에게 공포감을 주고, 이제 공황 상태에 빠진 작은 남자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간신히 귀가하여 그만의 컬렉션이 모셔진 작은 방 안에서 홀로 안도합니다. 평화란 무엇인지, 불안과 공포란 또 무엇인지. 

최고로 멋진 아침: 출근길에 대로변에서 듣곤 하는, 빽~!하는 열차 소리, 작품에서는 이를 두고 (사람의) 새된 비명에 비유합니다. 활기 있게, 바쁜 승객을 날라야 하는 택시기사가 맞는 아침은 매일매일이 최고로 멋진 아침들이 되어야 하겠으나 현실은 꼭 그렇지 못합니다. 클레먼트만으로도 고마운데 플레전트이기까지 하다니(p51), 이처럼 사소한 의미라도 일상과 주변에 부여하는 그 마음가짐에 여유가 넘칩니다. 애런, 프레야, 피트, ... 그러나 "오염되지 않은 낙원의 느낌을 스스로 추방하는(p81)" 어리석음 또한 우리가 늘상 저지르는 바입니다.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올 때: 이제 하나의 송곳니만 남은 개 레드독, 한때는 제럴딘 눈에 그 누구보다도 두드러진 미남으로 보였던 클라크... 이제 그녀는 익숙한 모빌이 아닌, 알리스테어를 경유하여 언니가 사는 버밍엄으로 가려 합니다. 올라탄 버스 안에는 직업도 나이도 다양한 남자들이 탔습니다. 결국 남편은 어느 낯선 경찰에 의해 살아있다는 안부가 전해지고 그녀의 입에서 즉각 튀어나온 건 비명입니다. 프랭키는 대체 그녀에게 여태 무엇이었다는 건지. 

프림로즈는 분홍색이야: 우리말로 앵초로 번역되는 프림로즈는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에도 종종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식물입니다.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정확한) 색깔을 뭐하러 신경 써?(p179)" 그래도 세상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무엇이 어떤 색인지 혹은 색이었는지는 합의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살색이 과연 어떤 색인지 내내 논란을 부르는 것과 달리, 프림로즈는 그저 프림로즈색일 뿐일까요? 

영웅: 루실 스미스는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의고 이제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하는, 예쁘고 당찬 여성입니다.거침없이 자신만의 호흡으로 앞날을 개척하려 하지만 어머니를 포함한(어머니로 대표되는) 어떤 과거 때문에 계속 뒤로 밀려나는 느낌입니다. 크리스천슨 부인과 그녀의 귀여운 두 자녀, 시중을 드는 젠킨스, 운전수 앨프리드 등도 다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해결 못 한 문제가 남은 듯 보입니다. 이미 충분히 좋은 사람인데도 왜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엄청난 영웅, 고귀한 구원자로서의 자신을 계속 증명하려 드는 걸까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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