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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불행 - 사람은 누구나 얇게 불행하다
김현주 지음 / 읽고싶은책 / 2023년 1월
평점 :
"소영은 절대 이 남자와 썸을 탈 생각은 없었다. 세상에 누가 운명의 남자와 썸을 탄단 말인가." (p178)
혹 세상의 모든 남녀들이 (첫사랑과는 다르게) 각각 자신의 운명의 상대와 맺어진다는 법이라도 있다면, 아마 이혼, 불륜 같은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혼, 불륜이 생기면 그게 이미 운명의 사랑이 아니겠지! 그런 결과론적 개념 정의 말고, 한때나마 운명의 사랑이라고 서로가 동의했다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쉽사리 관계를 깨거나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는 게 어렵지 않겠나 싶어서입니다.
운명의 사랑은 확실히 운명의 사랑인 게, "이 남자"를 만나기 전 소영은 몇몇 남자를 (말그대로) 스쳐 지나왔습니다. 김소영 같은 여자는,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너무 순수해서 노잼 같은 여자라면, 많은 남자와 사귀면서 자신만의 남성관 같은 걸 형성하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이런 타입은 보통 주변의 동성 선배에게나 또래 집단한테 영향을 받고 그(들)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그대로 수용하는 게 보통인데, 김소영은 p34, p86 같은 데를 보면 또 자기 주관이 강하고 주위에 잘 휩쓸리지도 않아서 특이합니다. 그런 소영에게 운명의 남자란 느낌이 들었다라...
늘이는 김소영이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마음 설레며 가까이서 지켜 본 남자입니다. 다만 사랑이(좀 더 널련한)가 영 관심을 안 주는 걸로 봐서, 아니 그냥 깐 걸로 봐서는, 아직 남자 보는 눈이 현저히 부족한 소영이가 그냥 흔남한테 공연히 설렌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이름이 특이해도 이름 때문에 설렌다는 건 너무 유치한 감정입니다. 유치하다 아니다의 기준은, 나중에 끝까지 이 남자한테 실망 안 할 자신이 있냐는 겁니다. 하씨 성 아빠 밑에서 이름이 "늘"로 붙은 사정(p36)이 그 사람에 대해 뭘 말해 주는 게 있겠습니까. 다만 애가 좋으니까 그런 것까지 다 신기해 보이는 건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저 늘이 이후로 이름을 외자로 불리기로 작정을 했나 봅니다. 아니 다들 두 글자 풀네임이 있을 텐데 김소영은 늘이 때문에 앞으로 남자는 모두 외자로 부르기로 혼자 결정한 것입니다. 사실 수학 강사 민은 그런 추억의 대열에 합류하기엔 끔찍한 기억을 유발한 문제아이긴 한데.. 이 학원에서 사고가 터진 후 동료 강사들이 "나는 김선생도 좋아하는 줄 알았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걸로 봐서 김소영도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거절 의사를 처음에 명확히했었어야죠. 물론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찾아와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누르고 소동을 피운 건 민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습니다(그 앞의 수작질도 마찬가지. 성범죄자 기질이 다분해 보이네요). 누구 눈에도 이미 범죄를 저지른 거고, 요즘 세상에 간이 부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남자 미저리(p260)입니다.
제가 만약 원장이었다면 일단 소영에게 주의를 주되, 덧붙여 지금 이 학생(건)과의 사단을 이렇게이렇게 수습하라고 조언하고, 앞으로 이런 경우 저렇게저렇게 대처하라고 요령을 가르쳐 주지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안달복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원장은 자기 학원 평판을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냉철하게 대처해야 하며, 피용인에게 일단은 같은 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원장님이 그리 경험이 많지 못한 분 같습니다.
"경험이 많지 않은 소영은 쾌감보다는...(p207)" 이 소설에는 저렇게나 숫기 없는 소영이 대체 누구와 첫경험을 가졌는지가 안 나오는데 아마 사정이 있겠거니 짐작합니다(...). 앞에서 그 싸이코 같은 민이 "처음이 아니면 저 실망할 겁니다.(p147)"라고 했었는데, 까딱했으면 큰일날 뻔했네요. 남자들이 책임지겠다, 날 믿어라 어쩌구 하는 얘기는 아저씨건 또래건 애한테서건 절대 믿으면 안 됩니다. 아예 학교에서 정규 교과 시간에 가르쳐야 합니다. 8년을 누구와 동거했으면 이미 이건 이혼남이나 마찬가지인데 게다가 지 입으로 전 여친을 못 잊겠다고 했다? 맙소사. 이 여성분은 무슨 생각이란 게 있는 건지. 게다가 타투? 옛 성현들 가라사대 문신충은 무조건 거르라고 했죠. 소영은 게다가 꾸안꾸(p242)가 원래부터 잘 어울리는 여자이기도 하니.
(운명의 남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혁 다음에는 현이 나타났는데 뭐 둘 다 한국 남자 이름으로 흔하긴 합니다. 조건 좋은 남자는 여자한테 요구하는 게 많은데 상업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하는 소영이 과연... p267에 나오는 영화는 혹시 시고니 위버, 벤 킹슬리 주연의 <죽음과 소녀>아닐까요?(코믹은 아닌데) 역시 현은 져 준다는 게 없는 남자입니다(p294).
결말에 다시, 예전에 김밥 먹다가 같이 쫓겨났던 랑이가 다시 나와서 해답 비슷한 걸 들려 주는 게 좋았습니다. 이 소설은 랑이 이후 친구들은 모두 "친구"로만 소개되지 이름이 안 나옵니다. 애초에 김소영은 타인을 자기 바운더리에 잘 들이지 않는 유형 같습니다. 철없는 코흘리개 친구처럼 무람없이 교제한 마지막 벗이 랑이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공지영류의 고발물, 신경숙류의 신세한탄물과 달리 너무도 심심한 줄거리로 끝이 나서 차라리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아직도 어디선가 진행 중인 이야기 같아서 후편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달달하고 닳고닳은맛 커피믹스 아닌 밍밍한 보리차 같은 맛이랄까.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