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근대적 통치성 다층적 통치성 총서 2
이동수 엮음 / 인간사랑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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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 통치성 총서 두번째권입니다. 근대와 전근대의 개념 구획은 물론 서양의 것이 원류이므로 근대성에 대한 고찰 역시 서양 역사를 통해 수행하는 게 원칙이겠습니다. 또 "통치성(governmentality)" 역시 20세기 후반 미셸 푸코가 정립한 담론을, 이 책에 정선되어 실린 논문들에서도 유효하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3권(<동양의 근대적 통치성>) 제2장을 차지하는 "개화파의 세계관"을 저술한 김충열 교수도 한국 격동기 한복판을 지나며 변혁의 한 주역으로 활동했던 유길준의 논설 여러 대목을 인용하며 저 시기 조선 지식인들이 바라보던 근대의 초점이 무엇이었을지를 궁구합니다. 이 2권의 제2장을 점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민주공화주의의 친화성"의 필자 채진원 교수도 p79에서 유길준을 거명합니다. 유길준이 새삼 소환된 이유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그가 받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며, 지금 이 논문은 영국(GB) 전체의 산업혁명과 근대화에 있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기여를 분석하는 게 주된 목적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막스 베버가 그의 탁월한 저작 <프로테스탄트와...>에서 양 이념의 관계를 처음으로 주창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책은 베버 이전의 시대부터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이미 컨센서스를 형성한 바에 대해 사회과학적인 검증을 시도한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논문은, 이어서 조선 지식인이 왕조 지속 기간 내내 확고히 받들었던 성리학과 서양의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얼마나 큰 유사성이 있는지 톺아봅니다. 채 교수는 나아가 한국의 586 운동권이 공유한 세계관에 대해서도 일별하는데 얼핏 보아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념과 진영 사이에도 커다란 상사성이 존재함을 확인하는 과정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FIFA 월드컵에서도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격돌이라도 하면 둘 다 축구 강국이라는 점 외에도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항쟁이 종종 회고되어 경기외적 흥미까지를 북돋웁니다. p144 이하를 보면 오란예 공 빌렘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여 저항 운동을 이끈 역사를 분석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건 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는 게 그저 종교적 대립이 아니라 지역의 경제 구조와 산업 역학 관계를 둘러싸고 누가 주도권을 갖느냐를 결판내는 일대 승부였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경제적 계급적 이해가 일치하는 네덜란드 신교도들의 항쟁에, 엉뚱하게도(?) 가톨릭 교도까지가 합세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저지대에 대한 종주권을 부정하려 든 것이죠. 

독일의 헌법학자 스멘트는 국가 어젠다 중 하나로 "동화적 통합"을 논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어떤 코어나 지향성이 형성된 후의 "통합의 동학(動學)"을 강조하며, 이것이 분절과 통일 사이의 그 어느 지점에서 국가의 생산적 전진을 주도한다고 정리합니다. 또 이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논한 사회통합과도 구별된다고 하는데 이는 이상적 발화 상황, 소통의 평등이라는 두 가지 유명한 전제조건을 꼭 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현실적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북한과의 통일을 언제나 국가 과제로 삼아 온 우리로서는 참고해야 할 바가 많은 이론입니다. 

영국 공화정은 절대 왕정 후에 이어진 왕의 실패한 폭주, 그로 인한 무력 공화 혁명과 왕정 단절, 왕정 복고와 명예혁명으로 이어지는 대단히 모범적인 궤철이 있기에 특히 근대성과 통치성 고찰에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책에서는 특히 공화정을 품은 왕정, 제한된 왕정 등 영국사에 실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통치 구조로부터 "정규(성)"을 추출합니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혁명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자 모범이었기에 통치성을 고찰할 때 메인 필드가 되어 마땅합니다. 미셸 푸코 역시 통치성 담론의 원 무대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집중 조명한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통치성에는 프랑스식 자유주의가 개입하는데 이 자유주의도 경쟁적 자유주의, 복지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스펙트럼을 갖습니다. 농민 참여 형태도 프랑스식 소농 주도가 있는가 하면 프로이센식의 융커 주도형이 있는데 이 둘의 차이가 이후 각국의 역사 전개 양상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를 살피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죠. 

3권도 인도의 재정경제 제도 조명을 통해 통치성의 실체를 분석했는데 이 2권에서도 이른바 재정국가로서의 프랑스를 해부함으로써 대체 푸코적 통치성의 본령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유감없이 교육합니다. 시민과 국가 사이의 영원한 긴장 관계를 가장 총체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통치성"에 대해 깊이 살필 수 있었던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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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여는 창 조영식 코드 - 문명전환의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
홍기준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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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그래도 몇 손 안에 꼽는 명문대들 중 한 곳이 바로 경희대입니다. 연대, 고대, 이대, 성균관대(사립대학으로서의), 중앙대 등은 그 설립자가 누구인지 비교적 잘 알려진 편인데, 경희대만큼은 건학이념이라든가 창설의 은인에 대해 비교적 인지도가 낮지 않나 싶습니다. 

저자 홍기준 교수는 경희대 평화대학원에서 석사를 했고 벨기에 루뱅대에서 박사를 딴 분입니다. 이 책을 읽고 미원(美源) 조영식이 어떤 의도에서 학교를 만들었는지, 생전에 학교를 이끌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의 사상은 어떠한 궤도를 틀어 현재에까지 이르렀는지 아주 자세히 살필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이 책 중에서 조영식은 그의 아호 미원으로 내내 호칭됩니다. p65를 보면 이 아호의 뜻이 진리와 미의 궁극적 일치를 추구한다는 취지라고 합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 소외 현상이 벌어지거나 지나친 물질만능으로 분위기가 경도되는 부작용이 벌어졌습니다. p44를 보면 미원은 밝은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이미 1970년대부터 구상했다고 나옵니다. 구체적으로는 1974년 미 애틀랜타에서 열린 세계인류학대회에 참여하여 인류사회의 신 선언을 발표했는데 선의, 협동, 봉사/기여를 3대 정신으로 표방했다고 나오네요. 

미원의 삶은 간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950년에 동란이 터지고 부산으로 옮긴 교육 당국이 전시연합대학을 운영하던 시절부터의 이야기도 자세히 나오는데, 미원은 당시 신흥초급대학을 이끌었으며 이 2년제 대학이 이후 경희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당시라면 사학 운영이 돈이 되기는커녕 빚만 잔뜩 떠안고 벌이는 모험이었기에 이 점에 특히 주목이 됩니다. 

1970년 윤보선은 미원에게 박정희에 대항하여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권하는데 그 배경에 대해 저자 홍 교수의 재미있는 분석이 나옵니다. 또 육영수 당시 영부인이 경희대를 자주 찾아 격려했다고 책에 나오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애증의 관계라고 성격 규정을 하네요. 요 대목에서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당시 경희대 교수 김동진 작곡의 <목련화>가 이 무렵에 탄생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작시(作詩)는 미원이 직접 했다고 나오는데, 한양대 창립자인 김연준도 요 조금 뒤에 옥중에서 <청산에 살리라>를 만든 줄로 알고 있기에 특히 흥미가 생기는 대목이었습니다. 미원은 아마 작곡 실력만은 그리 빼어나지 않았나 봅니다. 1980년 신군부의 등장에 맞춰 미원은 총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기도 합니다. 

사치스러운 해외 여행이 어렵던 시절 미원은 이란의 샤(나중에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팔레비 2세)로부터 초청을 받아 테헤란을 찾는데 이 도중에 인도 부다가야를 거쳐 불타의 큰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나오네요. 역시 경희대 동문인 영부인 김정숙 여사도 인도 타지마할 등지를 방문하신 적 있기에 묘한 기시감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사상은 이후 어빈 라슬로라든가 임어당을 만나 더욱 성숙해집니다. 개인 숭배로 일관하는 북녘의 실상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파지기도 합니다.  

p178 이하에서 저자는, 비록 미원이 직접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사상에는 시종일관하여 창발(emergence)의 모티브가 깃든다고 분석합니다. 창발은 가장 간단하게 요약하면 1+1이 2에서 그치지 않고 3이 되는 상승과 융합의 이치를 뜻합니다. 이로부터 저자는 양자역학이라든가 동아시아 전통 성리학의 정수에까지 미원의 족적이 두루 미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마치 어느 음식에 있어서도 빠지지 않는 감미료처럼, 미원의 심원한 마음씀은 현재 극심한 대립으로 고통받는 한국의 현실에 참고되는 바가 아주 크지 않나 사료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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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발협력과 SDGs - SDGs 프레임워크의 북한 개발협력 적용 방안 모색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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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Gs라 함은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즉 지속가능발전목표(들)을 뜻합니다(p29). 이는 대북(對北) 관계에 고유한 의미를 따로 갖는 용어는 원래 아니며 UN 등 국제기구에서 지구촌 빈곤 문제와 사회 이슈에 관해 설정한 보편적 어젠다입니다. 처음에는 MDGs로 명명되었으나 이후 개별 국가들의 특수성 고려, 질적 지표와 도덕적 가치의 보강, 개발도상국의 주인의식 함양 등을 더 강조하며 SDGs로 확대 개편 제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SDGs는 각 나라의 질적, 도덕적, 공감가치적 발전을 궁극적 목표로 삼으므로, UN 창설 당시부터 절대지상 목표 중 하나였던 인권 가치와도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p40의 표를 보면 SDGs와 인권 사이의 입체적, 유기적 관계가 잘 도시되었으니 독자들이 두고두고 참조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북한과 SDGs 사이의 어떤 접점이 처음으로 발견됩니다. p41을 보면 2016년에 북한은 유엔전략계획 2017-21에 서명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핵심 컨텐트 중 하나가 바로 SDGs라서입니다. 이게 왜 의미심장하냐면, (앞서 언급했듯이) SDGs의 핵심을 구성하는 개념 중 하나가 "인권"이니, 새 버전의 유엔전략계획에 서명했다는 건 북한 역시 보편적 의의를 갖는 인권 가치의 수용에 동의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이라는 말만 나와도 국제회의장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오던 그전의 태도를 상기하면 더욱 그렇죠. 

반 세기 전 우리 나라도 큰 신세를 졌던 UNDP라는 곳이 있습니다. 한국처럼 모범적으로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한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지금도 이 기관은 여전히 개발도상국들의 에로사항 해결을 위해 열심히 다양한 실천적 과제를 상정하고 그의 효율적 집행에 주력합니다. 이곳에서는 RBM, 혹은 MfDR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자신이 수행하는 여러 계획과 정책에 대한 효과적인 평가를 시도하는데 이 역시 다른 분야에의 적용이 (당연히) 가능하므로 보편적 방법론으로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p87을 보면 OECD DAC라는 게 나오는데 OECD 산하의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를 가리킵니다. 역시 권위 있는 기관 답게 일목요연한 프레임워크 지표, 차트가 나오는데 해당 방법론의 구조와 내용, 특장점이 한눈에 파악되기에, 행정학이나 조직론에서 해당 개념을 연구할 때도 아주 요긴하게 쓰일 만한 자료라고 생각되었네요. 

과연 무엇이 올바로 집행되었고, 효과적으로 수행된 계획일까? 이를 평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2005년 UN에서는 "인권기반 접근법"이라는 것을 새로 고안해 냈습니다. 또한 이 시점부터 인권에는 "발전권"(right to development)이라는 게 포함되었다고 하는군요. 어느 국가의 어느 국민, 개인이라 해도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통한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각성에서 착안된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대전제로 삼아 책의 chapter III 부터는 북한의 바람직한 개발과 발전에 대해 국제기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안과 비전이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논의됩니다. 크게 인도적 협력분야, 보건의료협력분야, 농업협력분야, 산림협력분야 등으로 나눠 상론, 각론이 이어지는데, 이를 일별하며 느낀 바는 국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긍인되는 개발, 발전의 프로세스라는 게 이처럼이나 가치적, 정성적으로 복잡하고도 난해한 성격을 띤다는 점이었습니다. 북한의 개발과 개방에 대해 우리는 미처 대내적으로도 컨센서스가 이뤄지지 못한 형편인데, 밖에서 수립한 로드맵의 개요부터가 우리 인식과는 이만큼이나 괴리를 보이니 앞으로의 전망이 얼마나 험난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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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미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학제간연구총서 3
유홍림 외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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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국의 경우 앞으로 인구가 급감할 전망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대학에 진학할 젊은이들의 숫자 자체가 줄어들죠. 과거 한 세대 70~80만 정도를 예상하고 마련된 입학정원도 자연 재고가 필요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회, 경제 구조가 급변함에 따라 산학 협동의 패턴도 바뀌고 있으니 대학이 종전 방식대로 운영을 고집한다면 이는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무엇보다 대학 당국부터가 미래의 생존 전략을 마련해야만 할 때입니다. 

미국의 경우 빌 클린턴 재임 당시 다소 정체가 의심스러운 부실 대학을 대거 인허하여 이후 큰 문제가 된 적 있습니다. 우리도 비슷한 시기, 즉 노태우~김영삼 시기에 신규 대학 설립이 크게 늘어났고 이 점이 도화선이 되어 대학 부실화 이슈가 이후 계속 불씨로 남아 폐교라든가 정원 대폭 축소 등 주기적으로 사회 문제가 일어나는 중이죠. 

p16에서 해당 논문(이 책의 프롤로그 구성)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여 대학의 위기가 초래된 때와, 온라인 네트워크가 발달하여 지식의 전파 공유가 가속화한 지금의 위기를 대조합니다. 이는 아주 시의적절한 비교이며, 일부 몰지각한 교수들 쪽에서 논문 열람을 제한해야 한다는 둥 퇴행적, 시대착오적이며 부패지향적인 의견이 있기는 하나 대학 외부의 사회에선 대환영일 격변(p19)이 유독 대학에서만 위기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식의 대학 독점"이 해제되는 게 공통이기 때문이죠. 이런 점을 대학 교수들이 선제적으로 인정하고 현실 진단에 나서는 자체가 긍정적이라 하겠습니다. 

대학 교육은 학생 교육, 엘리트 교육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밀착, 화합한 시민 교육도 담당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시민성에 대한 정의부터 명확히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 균형감각과 시민적 지혜에 대해 조명이 이뤄져야 하죠(p59). 정희성 시인이 관악캠퍼스 착공 당시 헌정했다는 유명한 시(詩)의 한 구절이 책 p65에 인용됩니다. "누가 조국의 가는 길을 묻거든..."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해야죠(여전히 앞이 흐리다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만). 

엘리트 교육은 과거처럼 입시 점수가 높은 학생들만 독점하여 졸업 도장만 찍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높은 IQ를 지닌 자원이라야 고된 지적 훈련을 감당할 수 있고, 끝에 가서 보면 결국 될 사람이 되고 마는 게 세상의 섭리이기도 하죠. 그러나 대학의 역할은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책에서는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리더로 일론 머스크라든가 마이클 블룸버그 같은 예를 듭니다. 시스템적 사고 능력의 함양을 통해 생애역량 자체를 강화하라는 게 해당 논문의 결론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본디 지성과 감성 두 영역이 고루 발달하고 제대로 조화롭게 작용해야 합니다. 책에서는 공감과 이성의 두 축을 고루 발전시키는 방법 중 하나로 "토론"을 듭니다. 논문에서는 올바른 토론 규칙을 가르칠 수 있는 프로세스 중 하나로 학부기초대학 설립과 운용을 들고 있습니다. 숨은 교육과정, 혹은 비공식적 교육과정이라고 불리는(p93) 학교의 분위기, 고유한 교풍 함양을 통해 대체 불가능한 인재 양성에 주력하는 것도 대학의 소명 중 하나입니다. 

대학은 더 이상, 과거의 유물 같은 이들이 폐쇄적 특권이나 부정부패를 독식 향유하는 아지트가 아닙니다. 교육은 독점적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책무성(p157)을 지님을 당국자들은 맹성해야 합니다. IR을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지나친 데이터 기반 접근(data-driven approach)은 지양(止揚)되어야 한다는 점도 책의 결론 중 하나이더군요. 대학은 이제 사회로부터 고립된 섬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다리가 되어야 하는 네트워크의 필수 노드이자 지혜의 화수분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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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살자 쫌! - 당신이 옳다고 확신했던 것들은 다 틀렸다
이지오 지음 / 청년정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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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자들은 대체로 일상이나 일 관련 모든 절차를 자신의 장악, 통제 하에 두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 책 저자는 그런 지나친 집착이나 완벽주의를 고수해 봤자 우리에게 어떤 가시적 성과가 주어지는 건 아니며, 혹 그렇다 한들 치르는 비용에 비해 수익이 적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가성비가 떨어지는 공연한 헛수고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고 싶다면 다소의 블확실성이 남아 있어야 하며 이런 불확실성에 너무 여지를 주지 않으면 훨씬 삶이 각박해지고 피곤해진다는 주장인 듯합니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학교를 거쳐 직장을 다니는 중 줄곧 "무엇이 되길" 강요받아 왔습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건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면서부터 존귀한 존재이며 나이가 어리든 지위가 낮든 그 반대편의 사람들(사회적 위상이 높은 어른들)보다 인격적으로 못한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남들에게, 혹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 존중받을 이유가 충분한데 왜 그를 넘어 또다른 무엇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내가 더 나은 무엇으로 탈바꿈해야 하고 무엇을 성취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 자체가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첫번째 원인입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여성을 혐오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저자는 피그말리온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인물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혐오스러운 여성상을 만들어내고 그의 안티테제라 할 갈라테이아를 조각해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지적합니다. 사실 그 결과물에 대해 얼마나 주관적으로 뿌듯해하는지와 무관하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고통스러운 자기 부정(self-denial)을 거쳐야 했겠습니까. 저자는 애초부터 여성혐오라는 감옥 안에 피그말리온이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면 훨씬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라는 주장인 거죠. ㅎㅎ 대단히 흥미롭다고 생각했으며, 이 말이 아주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는 인생도 뭐 있긴 할 것입니다.     

"공감이 없는 착함은 공허하다." 그런데 이미 착함이라는 건, 어떤 가치에 대한 강한 공감을 내포한 개념이죠. 공감은 착함의 필요조건이며 착함은 공감의 충분조건입니다. 공감없는 착함은 착함이 아니라 기회를 보아 유리한 쪽에 붙겠다는 위선이며 공허한 레벨에만 그저 머무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의견의 갈림이 있을 수 있는 이슈에 대해 무조건 특정 방향으로만 공감을 강요한다면 이는 폭력에 가깝습니다. "고인에게 명복을 빕니다"보다 "I'm sorry for yoir loss."가 더 공감지향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날카롭습니다. 

요즘 중년남성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큰 인기를 모으는 <슬램덩크>에서 서태웅은 처음에 자기밖에 모르는 플레이어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농구는 개인 종목이 아니라 팀 플레이이기 때문이죠. 자신 외에 다른 팀 동료들도 배려하는 선수라야 진정한 최고가 될 수 있겠습니다. 샐러리캡 같은 제도가 있는 이유도 어쩌면 이쪽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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