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같은 소리 하네 - 과학의 탈을 쓴 정치인들의 헛소리와 거짓말
데이브 레비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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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학을 비판하는 내용이 아니라, 자격도 능력도 없으면서 과학을 잘못 입에 올리고 엉큼한 잇속을 챙기려 드는 못된 정치인들을 꼬집습니다. 즉 정치 비판 서적입니다. "과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신이 과학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니저러니 함부로 떠들어?" 저자는 과학 저널리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런저런 정치인들의 과학 관련 발언이 과연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하는 사이트도 운영하는 활동가입니다. 

과학에 대해 정확히 모르면서 경솔히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교묘히 사실과 허위를 섞어 대중을 호도하고 의도적, 계획적으로 선동을 일삼는 행태입니다. 미국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오류와 우행을 저질렀는지 이 책을 통해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과연 시사 이슈들에 대해 얼마나 팩트에 기반하여 정확히들 알고 있는지 자체 점검도 해 볼 기회가 되겠습니다. 

"아첨과 깎아내리기 전략"이라는 게 있습니다(p67). 이걸 영어 원 표현으로는 "butter-up and undercut"이라고 하더군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가 기관 중 하나인 NASA를 테드 크루즈 텍사스 주 상원의원(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도, 지금 시점에서도)이 어떻게 길들이려 했는지입니다. 처음부터 NASA의 특정 프로젝트를 깎아내리면 대중에게 신뢰를 못 얻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열렬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알아차린 듯, 아니 우리의 나사가 왜 이런 일까지 하려들지?라며 그때부터 비판을 시작합니다. 처음에 호의적이었던 저 사람마저 태도가 바뀐 걸 보고 대중도 서서히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나사가 우주 탐사 같은 핵심 임무(core mission)에만 집중해야지, 왜 기후 변화 같은 데 역량을 낭비하려 드나?" 테드 크루즈 의원이 이처럼 교묘하게 해당 프로젝트를 방해했다는 건데, ㅎㅎ 다만 이는 이 책 저자의 관점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미국 국민 사이에서는 또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백신 반대 운동도 아주 긴 시간 동안 반지성주의, 반과학주의와 엮여 자주 거론됩니다. p84에는 그 결과로 한때나마 홍역(완전 퇴치된 듯 여겨진)이 퍼져 사회를 당혹하게 했던 현상이 지적되네요. 저자는 모 브룩스의 반 이민자 캠페인을 비판하는데, 장내바이러스 D68이 이민자를 통해 미국에 전파되어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는 그의 주장이 과학적 근거를 결여했거나, 교묘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 모 브룩스는 저 당시 미 연방하원의원(앨라배마 주 대표)이었습니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는 언제나 어디서나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 자유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 정도까지 문명화하고 정의로운 사회와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었죠. 발언권, 비판권을 언론기관에 독점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이 제각각의 주장을 힘 닿는 데까지 퍼뜨리고 그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건 인터넷의 힘이 큽니다. 그러나 대신 가짜뉴스, 선동, 여론조작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게 큰데, 책에서는 게리 파머 하원의원(이 사람도 앨러배마 주 대표이며 현역입니다)의 예를 듭니다. 

이 사람은 정부(당시 오바마 행정부)가 자료를 조작하여 기후변화 정책을 밀어붙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근거라고 인용한 건 "보도"가 아니라 어느 블로거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언론사, 출판사나 작가 중에도 때로는 일개 블로거만도 못한 저질, 무자격자, 광신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추가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publish되는 개인 블로그 아티클이란 건, 책임 있는 정치인이 함부로 의지할 건 못 되죠. 키가 190cm이 넘는 거한 릭 샌토럼의 실수도 p107에서 거론됩니다. 이 사람은당시(2017)에도 "전(前)" 상원의원이었네요. 

연방상원의원(켄터키 주)랜드 폴은 내과의사이기도 한 정치인입니다. 이런 분이 스콧 플레처 교수가 주도한 초파리(드로소필라) 연구를 국가 예산 낭비라며 맹비난했을 때 아무래도 일단은 신뢰성이 (그저 일개 정치인이 제기했을 때보다야) 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걸 저자는 조롱과 묵살(p130) 전략이라 부르는데 원어로는 ridicule and dismiss라고 합니다. 얼핏 보아 우스꽝스럽지만 초파리 연구는 인류 문명의 진보에 지대한 공헌을 해 왔습니다. 이걸 그렇게 가볍게 다뤘다는 건 해당 정치인이 호된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때로는 철지난 정보를 들먹이며 사태를 왜곡하기도 합니다. 이걸 원어로는 blind eye to follow-up이라고 하는군요(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는 눈 질끈 감기). 도대체 정치인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그저 무지해서일까요, 아님 가공할 만한 음침한 의도를 갖고 치밀한 계획 하에 뭔가를 저지르는 걸까요? 중요한 건 우리 시민들이 두 눈 부릅뜨고 팩트체크를 해서 누군가의 얄팍한 술수에 쉽게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근거나 의제가 과학 관련일 경우에는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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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 From Paris 피에스 프롬 파리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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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바턴이라는 미국 작가와 미아 그린버그라는 영국 배우 사이의, 믿어지지 않는(p96) 로맨스와, 후반부의 놀라운 반전이 매력 포인트인 소설입니다. p389의 역자 후기에도 나오지만 약간 식상할 수도 있었던 로맨틱 코미디가 후반에 들어 그야말로 예측 불능으로 치닫는 게... 참고로 저는 폴과 미아 사이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으며 작품 곳곳에 스민 프렌치 무드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읽었습니다. 

미아는 반려자였던 다비드 밥킨스와 아주 좋지 않게 헤어지고 뭔가 힐링이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데이팅 사이트에 가입해서 누굴 찾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친구 다이지의 부추김이 크게 작용했는데, 한편 미아가 누군지 전혀 몰랐던(연예인한테도 관심 없던) 작가 폴은 친구 아서와 로렌의 장난으로(라기보다 차라리 운명의 장난으로) 멋진 레스트랑에서 미아와 만나게 됩니다. 

폴은 고국인 미국에서도 성공하지는 못했고 재능 있는 출판업자인 크리스토넬리를 만나 간신히 프랑스에서 데뷔하는데 이 역시 엉뚱하게도 지구반대편인 한국에서만 히트를 칩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꿈에 부풀어 있는데 한국 시장에서 일단 성공하면 중, 일, 나아가 유럽과 미국에서도 주목 받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폴은 한국인 번역가 "경"을 알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독자는 잘 이해가 가진 않았습니다. 여튼 이 "경"의 존재(p42, p176)가, 폴이 미아하고 바로 잘 풀리는 데에 긴장, 방해 요인으로 계속 남습니다. 

이 소설엔 유난히 코리안 코드가 자주 나오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에서처럼 처음에는 그냥 한국 독자들을 의식한 양념이나 유머인 줄 알았습니다. p98의 서울국제도서전 언급(p184에서도)은 큰 비중이 없는, 지나가는 소리 같았는데 후반에 진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p197에서 "다음 책은 정찬부와 계약" 운운이라든가(정찬부는 ㅎㅎ 어디서 딴 이름인지), p35의  사이먼앤슈스터 언급(한국인들도 대학교재 원서 때문에 잘 아는 이름), p185의 "출판계에서 악수는 계약이나 다름없다" 같은 말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무슨 프랭크 시나트라의 악수도 아니고. 

p302에서 조선일보, KBS, 한겨레신문 등이 언급되고 특히 한겨레의 대북 스탠스 같은 게 설명될 때만 해도 이 프랑스 작가님(폴 바턴 말고 마르크 레비)이 한국에 대해 참 많이 안다 싶기만 했는데... 더 이상은 스포일러이므로 생략하겠습니다. p232, p316에선 일본인보다 한국인들이 더 사랑하는 것 같은 작가 하루키도 언급됩니다. 

폴은 앞에서 말했듯 미국인인데 프랑스에서 성공하고 싶어하는 작가입니다. p101에서 능글맞은 크리스토넬리가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 받지 못한다" 같은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 무척 우스웠습니다. p195에서도 "나는 프랑스 거류 외국인입니다"라고 할 때 폴의 어정쩡한 주변인 처지가 또 드러납니다. 여튼p140에서 미아더러 "배우이신가요? 말할 때 표정이 풍성해요."라고 할 때 그의 센스는 돋보입니다. 미아가 p159에서 "유명세라는 게 별건줄 알아요? 다음날 그 신문지는 피쉬앤칩스를 싸는 데 쓰일 뿐이에요."라고 할 때 그녀는 배우로서의 자신 위상과 영국식 맛 없는 요리를 동시에 냉소하며 자학개그를 합니다. 

p164에서 "그 여자 감싸는 거 보니 마음에 들었네"라고 할 때 아서는 저 미아 친구 다이지만큼이나 눈치가 빠릅니다. 다이지는 p86에서, 또 p167에서 케이트 블란쳇을 언급하는데 폴의 핸드폰 벨소리인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를 갖고 드립을 치는 장면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p40, p168, p259에서 비스트로가, p104에서 사부아 산 치즈가,  p56에서 브라스리가 언급되는데 브라스리에 대해선 모르는 독자가 있을까봐 역자가 각주도 달아 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곳곳에서 브라스리와 비스트로 사이의 차이가 여전히 애매합니다. p189의 팔레 가르니에 대모험(?)도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부분인데 중이층(中二層)은 entresol이죠. 미국에서는 저걸 메자닌 석이라고 부릅니다. p239의 un ange passe 같은 표현은 상식으로라도 알아 놓으면 좋겠습니다. p65의 루 드 카스티글리온 언급도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이 소설 제목이 P.S. from Paris인데 p116, p183, p346 등에서 ps라는 단어는 세 번 등장합니다. p121에 한국어 추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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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기본소득 - 자유로운 사회, 합리적인 경제를 향한 거대한 전환
필리프 판 파레이스.야니크 판데르보흐트 지음, 홍기빈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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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유력 정치인이 의제화한 후 일반에 널리 알려지고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된 기본소득. 그러나 정작 그 정확한 의미는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진영 안에서도 완전히 합의된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혹 한국 사회에 전면적으로, 전향적으로 이 제도가 도입된다 해도 어떤 모습으로 시행될지는 정해진 바가 없고, 각자가 각자의 생각과 기대대로 여러 가지 논변을 펼 뿐입니다. 지금 이 책도 두 분 벨기에 학자의 주장을 주로 담은 내용이지만(그 중에서도 판 파레이스 박사), 한국에 출간된 책들 중에서는 아직까지도 가장 포괄적으로 여러 입장들을 두루 소개하고 분석하며, 기본소득의 여러 얼굴과 미래상, 다양한 가능성을 대중에게 소개한 책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640여 페이지로 그 분량도 무척 많습니다. 

p30을 보면 브라질의 기본소득 운동가 에두아르도 수플리시의 말이 인용됩니다.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는 문으로 나가면 된다." 이 말은, 한 국가의 빈곤이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회가 미래에 번영하고 안하고는 그 젊은 세대의 잠재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달렸겠는데, 사회의 질 높은 일자리가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젊은 자원에게 돌아가야지, 그렇지 않고 그저 그 부모가 부유해서 지원을 많이 해 준 이들이 차지할 뿐이라면 그 사회는 발전 가능성이 서서히 닫혀 간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 점까지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엇인가에 특화한 2년제 전문대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지원이 이뤄지고, 학교를 나와서 바로 사회에 투입되는 인력이 더 큰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여성의 경우 비교적 쉽게 준비할 수 있는 간호조무사직, 미용직, 경리직 등도 사회에서 지금처럼 비하, 조롱, 폄하하는 분위기가 해소되어야 합니다. 이게 안 나아지면 결국은 젊은 여성들이 다들 얼굴 꾸미고 술 따르는 일에나 몰려들 것이며 뭐 실제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른바 3D 업종을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결국 동남아시아인, 중국인들에 의해 일자리가 채워지는 건데, 젊은이들도 보수가 조금만 향상되고 작업 여건만 개선된다면 배달보다야 그 일을 하려고 들 것입니다. 하다못해 사회적 편견이라도 개선되면 좋을 텐데 그게 제일 힘들죠. 이 작은 나라에서 대체 왜 그렇게들 위아래를 나누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마약 연예인, 혹은 국제대회에 나갔다 하면 광탈하여 나라 망신시키는 한심한 직업운동선수 따위보다 사회에 훨씬 더 필요한 일들인데도 말입니다. 

저자는 부유층 자제의 경우 이미 그 부모로부터 "기본소득"을 받고 있기에 자신을계발할 기회가 생기니, 그렇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도 기본소득을 주자고 합니다. 이 역시 두루 동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장 한국의 보수 단체장 하에서도 청년 지원 방안은 실행이 현재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서울시).  

다음으로, 저자는 장년층 이상의 경우에도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그 사람이 현재의 직장 업무에만 매몰되다 일정 연령이 지난 후 퇴물로 폐기되는 일을 막고 꾸준히 자신의 적성을 계발하여 노년에까지 일정 쓰임새를 갖는 사회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장년기부터 남는 시간에 자신의 다른 재능을 계발할 수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이상적 상황만을 가정한 결론이 아닐까 싶네요. 아무튼 바람직하게 제도 보완만 이뤄진다면, 혹 (기본소득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장려되어야 할 방향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공리주의의 근대적 종합자, 제창자로 알고 있는 제레미 벤담의 경우 "소유가 없는 개인들은 스스로를 자기 노동으로 부양하는 계급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부양 받는 계급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태라는 건, 현재는 유한 계급에 국한된 풍조지만, 금세 다른 계급으로까지 확산되어마침내 타인을 위해 노동할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는 상태까지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p150)고 합니다. 이 책은 비록 대중서에 가깝지만 현재 기본소득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학자의 저작답게 방대한 주석들이 달려 있어서 추가 독서를 원하는 이들에게 편리합니다(이 부분 출전은 본문에도 있고, p170의 챕터 후주에도 다시 나옵니다). 여튼 이 대목을 읽으면 후기 조선 사화가 왜 그토록 비생산적이고 무기력했는지와 연결되는 상념이 생기네요. 

당시 벤담은 빈곤층에게 기초 생활 물자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의 자녀들이 강제로 끌려나와 대가를 노역으로 갚을 수 있는 industry houses의 설치를 제안했다고도 합니다. ㅎㅎ 물론 옛날 이야기이며, 이 책 p66에 나오듯 기본소득의 본질 중 하나는 "무조건성"입니다. 다만 어떤 경제사상이든 간에 평지돌출은 없으며 이러이러한 변형, 발전 과정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 벤담 개인뿐 아니라 당시 잉글랜드의 사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사실 21세기인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은연중에 지지를 보낼 만한 제안이며, 남은 죽자살자 일하는데 누구는 놀고먹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발은 그것대로 충분히 수긍이 됩니다. 

프랑스는 두 차례의 혁명, 즉 부르주아의 왕정 폐지와 도버 해협 건너로부터 밀려온 산업 혁명을 겪으며 사회 구조적 모순이 유발한 빈곤 이슈를 맞닥뜨립니다. 그전에는 귀족의 자선과, 방대한 자산을 지녔던 교회(구교)의 본연 기능에 의존했었는데 이제 그 둘이 모두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이 영향으로 새로운 유형의 사조가 대두했는데 이후 칼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라 비판한 생시몽, 푸리에, 오웬이 그들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푸리에의 아이디어 일부를 받아들여 기본소득 사상의 원형이 될 만한 논의를 내놓았는데 이 역시 현대적 시선으로 재고찰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논자들은 기본소득제에 필연적으로 마이너스 소득세 개념이 들어가는 줄로만 알지만 이 책 p34에 나오듯이 반드시 그런 건 아닙니다. 부(負)의 소득세 아이디어는 미시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잘 알려졌지만(특히 이준구 著 등) 이처럼 세련되게, 또 치밀하게 다듬어진 건 이 책 p202에 나오듯이 밀턴 프리드먼의 공입니다. 이분은 주지하는 대로 시카고 보이즈이니 말입니다^^ 뛰어난 인사이트를 지닌 천재는 반대진영에 미리, 선제적으로 무거운 짐을 두고두고 지우는 재능을 뽐냅니다. 

무상급여는 논리적으로 노동 공급 부족을 야기합니다. 이는, 그 정도와 범위에서 차이가 있을 뿐 주장 자체는 누구로부터도 수긍되는 것입니다. 당장 코로나19 사태 때에도 미국에서 2000달러씩 보편 지급이 이뤄지자 트럭 운전수들이 일선에 나오지 않아 물류비용이 수직상승, 물류 자체가 스톱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또 현재 우리가 겪는 고금리, 물가상승의 고역도 상당 부분이 그 부작용입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응당 예상되는 이 주장에 대해 재원 마련 등 치밀한 반론 체계,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 책에서 가장 볼만한 파트가 이 대목입니다. 특히 저자들은 계량경제학적 논거(반론 포함)도 여럿 제시합니다. 

우리가 기본소득 하면 대번에 떠올리는 게 핀란드입니다. 중국이 한반도 정치 단위에 대해 "핀란드화"를 대놓고 제안한 적도 있었지만, 우리는 왜 겨울전쟁 같은 영웅적 항쟁을 벌인 핀란드인들이 전후 "중성화 조치"를 그렇게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가끔 의문이 듭니다. 하나의 답은 p434 이하에 잘 나오듯 그 나름 뿌리가 깊은 핀란드의 진보 정치 진영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결국 세계에서 가장 앞선 템포로 기본소득제 역시도 수용, 집행, 전파하는 것입니다. 결국 핀란드인들은 그들의 지정학적 위치,산업여건 등을 감안하여 생존의 지혜를 발휘, 우리처럼 분단을 겪지 않고 단합을 유지했던 거죠. 이게 반드시 옳다는 게 아니라, 그건 그것대로 그들이 찾은 답이란 뜻입니다. 

한 나라에서 기본소득제를 전면실시하면 두뇌 유출과 (거꾸로)빈민 유입, 즉 선택적 이민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p513). 이 책은 그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합니다. 책을 읽으며 여태 이처럼 많은 논의가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이 들었으며 특히 피에터 쿠이스트라라는 20세기 어느 예술가의 삶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건 가외의 소득입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 역자 홍기빈 소장의 저술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으며 이 책이 관련 주제 웬만한 세미나에서 교재로 쓰이기 좋게 만들어 준 데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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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싱가포르 - 최고의 싱가포르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해외여행 가이드북, ’23~’24 최신판 프렌즈 Friends
박진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서는 역시 프렌즈 시리즈가 최고인 것 같습니다. 개정판도 꾸준히 나오는데다 그 개정사항이 독자 눈에도 분명히 보일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게 좀 아쉽다" 싶으면 다음 개정판에는 얼추 그게 반영이 되어 있어서 마음을 들킨 느낌이랄지. 요즘 정보는 인터넷에 얼마든지 있는데 뭐하러 책을 보냐는 사람도 있는데, 여행 계획 체계적으로 세우는 사람은 대충 인터넷 보고 플랜을 짜지 않습니다. 잘된 여행서는 알찬 여행의 핵심, 뼈대가 될 만한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죠. 

수학 문제도, 아무리 천재라도 일단은 개념서를 보고 개념을 먼저 잡아야 문제를 풉니다. 물론 진짜 천재는 문제 몇 개 풀어 보고 자기가 공통 원리를 추출해 내겠지만 이런 사람은 극히 드물죠. 여행도 일단 자기가 몇 번 가 보고 시행 착오 거친 후에 프로 여행러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돈도 손해 보고, 더 신날 수 있었던 추억을 그저그런 상태로만 만족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래서 후회를 안 남기려면 책 한 권을 보고 모범 코스를 그대로 따라하거나, 일단 바른 개념을 잡은 후에 나만의 살과 장식을 붙이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싱가폴처럼 이런저런 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를 찾는다고 해도 어디서나 와이파이가 잘 터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통신 두절 상태를 대비해서 오프라인 레퍼런스 한 권 정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 잘 쓰인 여행서는 한 권의 인문서와도 같으므로(여행 자체가 몸으로 배우는 인문 코스입니다) 이런 책은 여행 떠나기 전 예습하는 용도로 꼼꼼히 읽어 두면 더 좋습니다. 지식은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참조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의 내면에 아예 굳은 자리를 마련케 하는 편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싱가포르 자체가 목적지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p32에 나오는 대로 몰디브, 발리 등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로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몰디브와 발리는 싱가포르에서 보면 서로 정반대 방향이죠. 이런 스톱오버 케이스를 위해 책에서는 1박 2일 코스를 짜서 독자들에게 추천합니다. 이 코스는 과거 김정은이 택했던 그 코스 같기도 한데 여튼 당시에 그 사람도 싱가포르 고관들에게 극진히 대접받았던 사례이므로 이대로 따라하면 알짜만 골라서 즐길 수 있을 듯합니다. p23을 보면 바로 붙어 있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점프할 때 필요할 팁도 나옵니다. 발리도 인도네시아이지만 발리는 자바 섬 최동단이므로 거리가 멀고 저기서 말하는 인도네시아는 주로 수마트라 섬 서부입니다. p346 이하에 빈탄 등 자세한 명소가 나옵니다. 

서울도 번화한 도시답게 야경이 멋있지만 싱가포르는 게다가 천혜의 조건까지 더하여 야경의 운치가 기가 먹히며 이런 시티뷰가 잘 나오는 장소들을 책 p78 이하에서 여섯 군데가 추천됩니다. 이 중에 제가 실제로 가 본 곳은 멀라이언 파크 옆입니다. 나머지 다섯 군데도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지네요. 보통 한국인끼리는 머라이언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발음 촌스럽지 않게 이런 것도 멀라이언이라고 표기하네요.  

p91에 잘 나오듯 싱가포르는 $100이상의 쇼핑을 할 때 부가세를 환급해 주는 샵들이 많습니다. 환급 절차가 그리 어렵지 않으므로 책을 보고 따라하거나, 정 이해가 안 되면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으므로 미리 캡처해 놓으면 좋습니다. 일일이 현지에서 데이터를 쓸 게 아니라 빤하게 거쳐야 한다 싶은 장소들은 미리 집에서 폰으로 지도를 캡처해 놓는 게 돈도 아끼고 현지에서 우왕좌왕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또 2023년부터 싱가포르 부가세율이 7%에서 8%로 올랐으므로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p398 이하의 정보도 면세점 관련이므로 참고하면 좋겠네요. 

p122에는 싱가포르의 명물 오차드 로드가 소개됩니다. 오차드는 말 그대로 과수원인데 이게 그냥 작은 과수원이 아니라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말레이시아의 일부) 플랜테이션이 있었던 자리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 남동부에 있는 건 오차드 "스트리트"이므로 헷갈리지 말아야겠죠. 

다 영국 식민지 출신이라서인지 홍콩과 여기가 닮은 점이 꽤 있는데 구도심과 신도심이 별개로 발달한 특징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p158 이하에 구도심(Old City)에 대한 설명이 자세합니다. 책에 나오듯이 구도심은 콜로니얼 스타일의 건물이 즐비하여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국부 이광요(리콴유) 수상은 딱히 종교가 없었지만 구도심에는 "성당"이 많다고 책에 나오는데 이게 구도심이므로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에피스코펄 예배를 드리던 흔적이니 이럴 수밖에 없죠. 

싱가포르 강은 한강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작으므로 사실 강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데 여튼 리버뷰가 뽑히므로 이 일대에 유흥가가 널리 분포합니다. 리버사이드(지구)의 명물은 책에 나오는 대로 클락 키, 보트 키, 로버슨 키 등이 3대 키(quay)입니다. 로버슨 키에는 명물인 인터콘티넨탈 싱가포르가 있는데 숙소로 관심 있으면 이 책 p368을 보면 됩니다. 마리나 베이에 흘러들어오는 강이 두 개인데 하나는 좀 미미한 싱가포르 강이고, 다른 하나는 길고 뚜렷하게 뻗은 칼랑 강입니다. 마리나 베이에 대해서는 p14, p202에 설명이 나옵니다. 여기가 참 볼만한데 책에 다양한 각도로 분석한 지도가 여러 개 나오므로 꼭! 참고하고 여행 계획을 짜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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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비
청예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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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게도 인간은 지구를 자신들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파멸적인 수단인 핵무기를 발명하여 70년 넘게 머리에 인 채 살고 있습니다. 인류가 멸종한 후에도 지구는 그 표면에 다른 생명체를 번성시킨 채 여전히 태양 둘레를 공전하겠지만 인간이 수만 년 동안 분투한 성과는 형해화할 것입니다. 

소설은 인간이 다섯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고 크게 훼손된 환경에서 여전히 살아가는데, 방사능으로 가득찬 사탕비라는 게 하늘에서 내려 이걸 맞으면 죽는 극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저 사탕으로부터 네 가지 성분과 물을 추출해 낼 수 있는데, 빨, 주, 노, 초, 보 각각의 성분(p23)은 인간을 불로장생할 수 있게 돕습니다. 그러니 이 사탕비라는 게 재앙인지 축복인지 모를 판인데, 다만 사탕비는 지면에 닿자마자 녹으므로 누군가가 짧은 시간 동안 받아와야 하며 그 일을 기계인 캔디인간, 휴머노이드가 맡아 하게 개발되었습니다. 

이 기계가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본연의 임무를 거부하고 인간 사이에 숨어들었으며 외견상 구별할 수 없으므로 투표를 통해 의심되는 자를 뽑아 사탕비가 내릴 때 밖에 내보내 사탕을 받아오게 합니다. 기계가 맞으면 계속 일을 시킬 수 있으며 아니라고 해도 그 사람의 몸에 박힌 사탕을 비가 그친 후 거두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마시안은 이 상황이 대단히 부조리하다고 여기며, 동갑인 시온과 함께 누가 휴머노이드인지 색출(p60, p99, p163)하려고 마음 먹습니다. 무고하게 죽어간(죽어갈)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사람 사이에 숨어든 기계에 대한 증오심 등이 그 동기입니다. 그런데 기계와 인간 사이에 정말 공존은 불가능할까요? 이 당연한 의문은 p190까지 가서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런 극한상황에서도 사치를 부리려 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사탕 정제인인 솔라는 시안에게 특별한 선심을 쓰며 민트색 사탕을 건네는데 앞에 나온 다섯 가지 성분과는 다릅니다(p35).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꼭 포만감이 느껴질 필요는 없기에 이것이 쓰인다고 하네요. 이 시대에도 이른바 헬창이란 부류가 있으며 테라가 그에 해당하는데 자신을 슈퍼맨(p96)이라고 칭하는 걸로 보아 자의식 과잉이며 "꽃 대신 널 꺾어도 되"냐고 묻는 걸로 봐서 정말 느끼한 스타일입니다. 그렇다고 그게 죄까지는 아닙니다. 

"쫄보들뿐이고만?(p64)" 주인공들은 기계와 인간이 구별되는 지점이, 용기(p45)가 있고 없고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사람다움의 공식(p44)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나눕니다. 이 와중 6614호에 사는 수수께끼의 발명가는 놀라운 재주를 선보이며 시안을 놀라게 하지만 어떤 특별한 단서까지는 내놓지 않습니다. 여전히 시안들은 오리무중에 빠졌고, 억울하게 남편을 잃었던 리카 할머니의 절규도 들어야 합니다. 구별하는 법을 안다는 리카 할머니는 5층에 사는데 건물의 층고에 따라 거주자의 신분이 갈리는 건 2015년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 영화 <하이-라이즈>의 설정과도 닮았습니다. 

인간다움의 조건과 반대로 기계의 본성은 가소성(p139, p202)에 있다고 합니다. 이게 "자가회복을 기반으로 한 관성으로 살아가는" 인간과 근본적으로 저 캔디인간이 다른 점이라서, 한번 시스템이 뒤틀리면 뒤틀린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기이합니다. 그래서 "가장 인간을 치열하게 모방하는 자(p142)"가 바로 캔디인간, 휴머노이드, 기계라고 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알고보니 인간들이란 제각각의 이유로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며(p245), 가소성이란 관성보다 더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p203). p267에서는 결국 둘(가소성, 용기)은 하나였음이 드러납니다. 

"인간을 이토록 미워하는 그녀(정제인 솔라)가 인간일 리 없어. 죽여야 해!(p80)" 그런데 결국 그녀의 결백도 드러나고, 사람(타인)을 미워하는 데 구태여 휴머노이드 캔디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점만 역설적으로 확인됩니다. 사람을 죽일 정도로 미워하고, 남들의 불행에 아랑곳않는(p213) 건 알고보니 사람이 더합니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시안의 경솔하고 무책임한 언행도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p172)이나 무고한 사람을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결말이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oo이라든가, oooo 머리를 한 oo를 의심했었으나 진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는... 이 소설은 SF의 외피를 썼지만 추리소설처럼 전개되며, 아마도 본격 추리 장르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그 누군가를 범인으로 숨겨 놓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지적인 구조이지만 동시에 많이 슬픕니다. 음... oo의 슬픔이 종이 너머까지 전해 오는 듯합니다. 또다른 나들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장면에서 1998년작 <에일리언 레저렉션>이 떠오르기도 했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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