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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치료세계를 아십니까? -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23년 1월
평점 :
"우월한 자아는 계급적인 권력의 힘으로 얻어진 투쟁의 결과이며, 그 결과 억압의 힘은 잠들지 않고 더 증가하기 때문이다.(p51)" 프로이트가 개창한 이래 정신분석 일반이 대개 그렇지만 우리네 이성은 생각만큼 그리 견고하지 못하며 어찌보면 주인 행세를 하는 가오마담이지 실세가 아닙니다. 끈을 쥐고 위에서(아니, 밑에서) 조종하는 건 끈적끈적한 무의식입니다. 무의식, 충동이 진짜이며 "자아"라는 건 생각보다 허구적입니다. 라캉은 아예 충동을 주체로 삼습니다.
그래서 남들 보기에 의젓하고 존경스러운, 성공한 부친(혹은 부모님) 밑에서, 완전히 다른 개성의 자녀들이 나오기도 하나 봅니다. 이때 다르다는 건 유전적 특질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대체로 이런 아버지들은 성공적으로 충동, 무의식을 억누른 자아를 보유했기에, 이미 패배한(그렇게 보이는) 끈끈한 야만이 다시 살아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 싹은, 아직 바로 성장하기 전 과거의 자신으로 보이는 자녀에게서 다시 어슴프레하게 관측됩니다. 아버지(혹은 어머니)는 가차없이 이 무질서, 악을 억누르고, 자녀는 영문을 모른 채 원한을 품으니 아버지를 닮을 자아가 아예 그 안에서 성장을 못합니다. 전혀 납득이 안 되는 패륜이 곧잘 등장하는 건, 이처럼 억눌린 충동이 아들 대에서 다시금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딱한 일입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보다 왜 더 불안한가?(p56) 사실 과연 그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죠. 사자도 의외의 불안에 시달릴 수 있고, 연약한 사슴도 생각보다 자신의 생존 확률이 높음을 알고 태평할 수 있습니다. 여튼 절대적으로 인간이 꽤 불안한 정신 상태에 놓인 건 사실이며 사회적 일탈자, 정신병자 등이 왜 이리 많이 출현하는지도 따지고 보면 불안해서입니다. 저자는 그 원인을 일단 "말하는 나와 (그) 말 안의 (진짜) 나는 서로 다르기에 갈등이 생기고 불안이 누적된다"고 규정합니다.
주체인 척 하지만 사실은 객체이고(p46), 애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시시때때로 생성될 뿐인 게 주체이니(라캉의 입장. p47 등) 이 긴장과 불안은 영원히 해소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왜 속이 후련한가? 불편한 자아를 객체의 지위로 (바르게, 자연스럽게)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주인 아닌 것이 여태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하다 내려왔으니 자아(있지도 않지만) 제놈도 안도가 될 테고, 무의식과 충동은 비로소 주인 자리(제 자리)를 찾았으니 또 저들대로 후련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저자는 p76에서 노래 가사 하나를 인용합니다. 검색을 해 보니 조경수라는 분이 1978년에 발표한 히트곡이라고 나옵니다. 목소리도 그윽하고 가사도 곡조와 잘 매칭되는 명곡입니다. 그건 그렇고, 아니, 행복이 무엇인지 왜 알 수가 없습니까? 알 수도 있을 듯하거니와 뭘 정확히 알아야 더 행복해질 수도 있을 테고 말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착각, 오해입니다. 이런 행복은 사실 만족에 가까운 것으로,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타울적으로 작동하며 계산적이고 약탈적입니다. 사자가 배가 고파 가젤을 사냥하고 물어뜯어 배를 채우면 그건 행복입니다. 그게 아니라, 혹 사자가 정글에서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확인하거나 과시하기 위해 가젤의 등뼈를 꺾었다면 그건 만족입니다. 이런 만족은 사실 타율적이기에 결코 충족되지 않고(insatiable) 자아를 결국 지옥으로 이끕니다. 무의식과 충동은 공연히, 모진 놈 옆에 섰다가 함께 벼락을 맞습니다.
의식(남의 눈이건, 허구의 자아이건)을 하고서 이래야지 하고 노려서 만족하는 건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그저 철없는 어린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배시시 웃고 천진하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p77에는 참으로 멋진 말이 나오는데요. "행복은 서로의 고통을 알기에 살아내는 과정에서 서로가 지니는 자연스러운 공감이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은, 정략 결혼 같은 거 하지 말고, 조건 따지지 말고 너 그냥 나하고 같이 살자, 응? 하며 조르는 천진난만한 처녀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p104 이하에 잘 나오듯 프로이트 체계에 대하여 라캉만이 행한 독자적 기여는 바로 언어 체계에 대한 해석을 전면 도입해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고 작동 범위를 훨씬 넓힌 것입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등의 개념이 엮어내는 담론이 워낙 정치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작가들이 자주도 인용하며, 따라서 요즘 독자들은 체계적 공부 없이 웬만한 자계서만 이것저것 읽어도 어지간히 익숙해질 지경입니다. 조금 앞선 시기 드 소쉬르가 정비한 언어학 체계로부터도 크게 도움을 받았고 말입니다. "나"보다 중요한 건 인간이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원초적 생명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만든다(p122)." 저자는 육체의 몸과 신체의 몸을 준별하며, 후자는 말초 감각이 받아들인 자극을 신호로 변환하여 대뇌에 전달하고, 대뇌는 다시 신체 각 부위의 세포에 그 해석한 바대로 공유하고 명령을 내리는 체계로서, 전자가 그저 살, 피 등으로만 존재하는 것과 구별됩니다. 저자는 "말하는 주체"의 중요성에 주목하며, 물질대사뿐 아니라 정신의 대사도 중요하다고 지적하는데, p65의 배설의 섹스와 쾌락의 섹스 구별론을 전제로 삼아 도출되는 논의입니다. 저자의 의학적 소양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해진 결론이기도 하겠네요.
근대는 인본주의를 토대로 삼아 탄생했습니다. 이때 중요한 건 "인간의 생명"입니다. 저자는 현대에 들어 더 중요한 건 "생명의 인간(p168)"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더이상 금지와 명령에 짓눌리지도 말며, 그로 인해 상실과 결핍감에 시달리는 신경증 환자가 되지도 말자고 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이 뭔지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