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내가 궁금하다 - 권지안 에세이
권지안(솔비) 지음 / 열림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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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출간


저자 권지안은 대중이 "솔비"라는 예명으로 알고 있는 가수이자 화가입니다. 이 책은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려고 애썼던 시간의 기록(p13)"이라고 저자가 스스로 밝힙니다. 확실히, 열성 팬이 아닌 무심한 대중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그녀는 이런저런 다양한 과제에 참 자주 도전하며 매번 일정한 성취까지 이뤄내는 매력적인 공인인 듯합니다. 같은 페이지에서 그녀는 예술을 정의하길 "공감 공유 공헌"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때로 이해 불가인) 현대미술의 본질을 그 나름대로 잘 짚은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술 창작뿐 아니라 이를 매개로 그녀는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었다는데 남 보여주기 식인 봉사는 그 봉사를 받는 입장은 좀처럼 고려하지 않는 특징이 있죠. 그러나 저자는 p29에서 "첫 방문 때에는 긴장을 많이 했다"고 밝히는데 이런 솔직한 반응이 다 그녀의 진정성을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내 자신이 뭔가 나를 향해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그 좋은 기운이 계속 이어지질 않습니다. 저자는 어떤 경우든 나 자신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해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도 합니다.   

이분이 성공적으로 첫 전시회를 마쳤을 때 제 기억으로도 뉴스에 보도가 많이 되었습니다. 네티즌들의 생각 없는 악플뿐 아니라 미술계의 많은 인사들도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내었습니다. 저자는 공연히 남의 눈치를 보느라 망설이고 뒤로 뺄 게 아니라 일단 저질러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의 경우 "저지르기" 전에 이미 많은 준비가 되었던 분 같으며 다만 그 준비라는 게 제도권에서 이뤄진 게 아닐 뿐이겠습니다(이를테면 p60이하에 나오는 <공상> 창작 과정). 저지르기만 한다고 누구나 이렇게 성공하는 건 아니겠죠. 

"스스로 경계를 만들고 기준을 세우는 노력이 필요하다(p71)." 연예인, 공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들도 소셜 미디어에 요즘 과도한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또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통상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고 감정을 소모하며 때로는 관계의 파탄이 일어나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인스타나 페북을 아예 안 할 수도 없고... 그러니 너무 지나치지 않게 적정 선에서만 사이버 소통을 하게끔 스스로가 어떤 선을 만들고 이를 지켜야 하겠네요.  

"한 곡의 음악에는 그때 그시절의 내가 담겨 있다(p77)." 저자는 데뷔 무렵 많은 방송에 출연했는데 SBS R 남궁연씨 프로그램에 나와 그 달변가 앞에서 기 안 죽고 당당히 자기 말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보통 아니네"라며 고개를 흔들던 진행자 모습이 떠오르네요. 매 순간을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야 과거 어느 시점이든 자랑스럽게, 자신의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회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분이 부업이나 어떤 컨셉으로 예술을 하시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담뿍 담아서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므로 책 곳곳에는 그런 창작의 고통이 피력되고, 또 대중 상대로 하는 일이다 보니 반응에 상처를 크게 받기도 하는 듯합니다. 특히 p94 이하 같은 곳을 보면 문제가 때로 심각해지는 것 같아 독자 입장에서 긴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그래도 다 이게 창작 과정에서의 고통이려니 여기시고 아픈 만큼 성숙해지시길" 같은 한가한 덕담을 하기가 망설여지네요. 

"클래스. 하이클래스(p108)." 다분히 속물적으로 들리기도 하면서 역시 예술가에게는 또 영원한 과제 같은 걸 던지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이 키워드가 영감처럼 다가온 건 로마 여행에서였다고 합니다. 역시 여행이란 그저 외적인 자극이나 체험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장소를 옮겨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되는 근본의 재구성 과정입니다. 하이퍼리즘 레드, 블루 등 연작을 만들며 저자는 인간의 본질, 가치에 대해서까지 보다 성숙한 통찰을 하게 됩니다(p113).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시작된 것(p137)"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은 사랑을 모르겠다고도 합니다(같은 페이지). <하이퍼리즘 바이올렛> 작업을 마치고 그녀가 찾은 곳은 파리였는데 사실 그녀는 본래 k-pop 가수였으니 이 파리지앵들과 더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었겠습니다. 이 책에는 그녀의 여러 작품들이 컬러로 실려 있어서, 그녀가 여러 감정(예: 허무함. p186)을 토로할 때 그게 어떤 색깔인지 조금이나마 독자가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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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그리고 리더십 - 개인과 조직을 이끄는 균형의 힘
김윤태 지음 / 성안당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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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윤태 대표는 이 책에서 조선 시대의 여러 왕들을 살펴 보고 그들의 리더십이 무엇일지를 분석합니다. 조선은 당시 그 생명력을 다해가던 고려 왕조를 대신하여 들어선, 그 나름 시대정신을 집약하여 탄생한 혁신 체제였기 때문에 그 군주들의 풍모와 비전에도 범상치 않은 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태조 이성계에 대해 저자는 "대업을 이뤘으나 불행했던 왕"으로 규정합니다. 저자는 그가 인정에만 치우칠 게 아니라 "그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숨죽이던" 고려 잔존 세력들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강한 세자(후계자)를 세웠어야 했다고 비판합니다. 사실 그는 무공도 초인적이었고 인격도 훌륭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개국 초기에는 하루빨리 강한 리더십이 자리를 잡는 게 개혁주도세력, 나아가 모든 백성을 위해 좋은 결과였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정도전만을 개혁가라 여기지만 실제 백성들의 삶을 위해 진짜 큰 업적을 남긴 이는 태종 이방원이었습니다. 물론 명나라에 신종한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가뜩이나 왜구와 홍건적 때문에 큰 곤란을 겪는 백성들을 다시 북벌에 동원할 수 없었음을 감안하면 이 역시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아마 건국 초기의 혼란상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돈과 장인 집안에 가혹하게 한 것도 그 사람들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거기에 빌붙거나 부추기는 세력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겠습니다.  

본인도 능력 하나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던 만큼 세자가 기대에 못 미치자 바로 셋째 충녕으로의 교체를 검토한 것도 역시 태종의 과단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우의정 남재의 발언에 대해 관대히 넘어간 사실을 사료로부터 지적하는데, 이것만 봐도 그가 의심병 환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불온하게 해석될 수 있는 언행에 대해 일일이 과민반응하지 않은 게 벌써 대국을 통찰하는 지혜로움의 증명입니다. 

한때 세조는 어린 군주(그의 조카) 밑에서 일어났던 정국 운영의 혼란상을 극복하고 당대에 필요한 개혁을 완수한 능력자로 재평가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시 평가가 안 좋아지는 추세입니다. 이유는 유교 윤리 뭐 이런 걸 떠나서도, 오로지 권력욕에 의해 움직였고 밑에 거느렸던 인물들도 대부분 부패성향이 짙었던, 수준 미달의 리더였음이 드러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p155를 보면 신숙주의 부인 윤씨가 변절한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자진한 야사가 소개되었는데 물론 저자께서도 지적하는 대로 이는 사료에 드러난 바와 맞지 않는 민간의 창작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저자의 평가대로, 당대 민심의 심판이 이 이야기 속에 드러났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전쟁에는 경제적 동기가 개재하며 그 주체들이 선전해 댄 바와 달리 중세 십자군 원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에서 적절히 지적하듯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당대 국제 화폐였던 은(銀)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게 맞아 보입니다. 우리가 마음 편할 대로 왜곡하듯 사실 정명가도가 아니라 저쪽에서 들고나온 말은 정명향도라는, 충격적으로 모욕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선조는 쉽게 서울을 포기하였고 신립을 지나치게 믿어 전략을 그르쳤으며 이순신에 대해 끝까지 신뢰를 유지하지 못하는 협량을 노출했고 무엇보다 원칙이라는 게 없이 이중적이었다고 저자는 비판합니다.  

영조의 국정철학은 균공애민(均貢愛民), 절용축력(節用蓄力)이라는 문구에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균역법도 실시하고 혹형도 폐지하는 등 업적이 적지 않습니다. 책에 축 자는 한자가 오타인데 畜이 아니라 蓄입니다. 물론 가축의 힘도 아껴쓰면 좋긴 합니다. 세심하게 백성의 삶을 살핀 건 확실히 그가 국량이 뛰어나고 시야가 넓은 인물이었음을 증명합니다. 박지원이 등과한 것도 영조 대의 일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즉 지도층이 솔선수범하여 나라를 이끌고 자기를 희생하는 면모를 보였다면 아래에서도 호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등장했을 시 조선은 민심이 하나되어 번영했으며 그렇지 않고 혼군이 나라를 망치면 반드시 퇴보했습니다. 이런 이치는 현대 대한민국의 상황에 대입한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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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조장하는 위험들 - 위기에 내몰린 개인의 생존법은 무엇인가?
브래드 에반스.줄리언 리드 지음, 김승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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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 '사회적 국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저자들의 단호한, 그리고 우울한 진단입니다. 사회적 국가란 어떤 공동체적 관점을 우선하여, 재난이나 질병, 나아가 빈곤과 차별, 박해, 증오로부터의 피해까지 국가가 어느 정도 책임지고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개념이죠. 이런 이상은, 199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 일대를 휩쓴 신자유주의, 나아가 세계화의 바람 때문에 크게 훼손되었다는 게 저자들의 개탄입니다. 

저자들은 과거 (국제)정치학이 크게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양대 진영만의 놀이터였던 양상이 현재 지양되는 중이며, 정치권력은 인간의 생명"만"을 주된 의제로 삼던 과거의 전략을 버리고 이제 생명체 전반으로까지 관리 대상을 확대해 간다고 파악합니다. 안전 거버넌스-경제개발-생명영역의 모든 생명, 이 세 가지 의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가는 게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전략이자 헤게모니 확대의 동력이라고 말합니다(p70). 미셸 푸코는 우리가 잘 알듯 근대가 되어서야 "주체"가 등장했다고 했는데, 이제 21세기 들어 생명권의 주체, 네트워크의 개념 등이 해체 후 다시 정립 중이라는 겁니다. 휴머니즘이 본연의 수명을 다한 후 이제 포스트휴먼이 새 연결망의 노드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계서 속이든 거대담론 소스이든 요즘은 리질리언스(resilience), 즉 (생명)회복력이란 덕목을 무척 강조합니다. 이런 논의 이면에는 개인이 겪는 불행이나 고통은 원칙적으로 그 개인의 책임이며 그 당사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인식이 자리합니다. "위험에 가장 잘 대처하는 방법은, 위험의 발생을,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네트워크 안에 내면화하는 것(p76)." 이런 믿음을, 신자유주의는 개개인에게 이식하고 세뇌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이 정도는, 이 험한 세상에서 한 번 정도는 겪는다고 각오하고서 살아야겠지?"라는, 꽤나 부담스러운 질문을 신자유주의가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던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작년 10월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있었는데, 이 책임 소재를 놓고 정치 진영 사이에 인식 차가 적잖게 있었던 양상은 이 관점대로라면 깔끔하게 설명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는 각양각색의 인재(人災)가 자연재해와 별개로, 혹은 결합하여 발생하는데, 이에 대처하거나 장기 비전을 제시하는 방법도 정치 진영 사이에 큰 차이가 (당연히) 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라면 이 책의 원제 <Resilient Life>는 강도 높은 풍자요 반어법입니다. 

회복력 담론은 과거 제국주의의 의도와 그 근본이 같으면서도 지역 주민에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접근합니다. 반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진영은 "지략을 갖춘 사람들의 자율성(p129)"을 근본 전제로 삼고 모든 행동 전략과 지향점을 설정합니다. 정치적 주체성, 자기 통제 역량에 대해 신뢰를 갖는 것이 후자이며, 이에 대해 철저한 불신을 깔고 시작하는 게 신자유주의라는 말입니다. 사실 서브프라임 사태 말고도 조지 W 부시 정권은 공교롭게도 임기 말에 찾아온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이미 레임덕에 빠졌는데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애초에 정권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재난에 능동적,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겠다는 이해도 논리적으로 가능합니다. 

르상티망, 분노, 허무... 니체가 선구적으로 너무나도 명징하게 추출해 낸 이런 개념들은 자유주의적 생명관리정치에 오히려 핵심적인 도구였으며 가장 강력한 표현이었다(p167)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개인은 각종 재난 앞에 무력감을 느끼면서 존재의 하찮음에 분노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개인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재난, 불행에 대해 "적응"할 것을 요구 받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게 인간의 의무고 숙명입니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적응이 성숙한 어른의 태도이므로 체제를 변혁하자는 각성이 일어날 수 없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사실 니체의 사상을 자체 논리에 따라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내재화하여 잘 써 먹은 게 역사의 팩트입니다. 

재앙(카타스트로프), 종말을 거치고 나서 살아남거나 그 속에서 적응하는 게 가능한가?(p215) 재미있게도 니체는 이 문제에 대해서조차 이미 자기만의 답을 내어놓고 있었네요. 지구온난화나 핵전쟁 공멸의 위험은 20세기 후반에나 들어서 비로소 대두했는데도 말입니다. 저자들의 결론은, 이미 판이 짜여져 있고 끝도 없이 적응만 하다가 끝날 뿐이라는 바로 그 생각과 그 생각의 강요, 주입에 저항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응과 번식에만 최적화한 적자(適者)가 아니라, 그 이상의 아름답고 이상적인 무엇을 응시할 특권을 지닌 존재입니다. 무한한 잠재력은 그저 생존과 적응만에 소진될 게 아니라 더 높은 이상향을 꿈꾸는 데에 쓰여야 합니다. 테크네보다는 포이에시스가 더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인간다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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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 : 쿠쉬룩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1
서윤빈 외 지음, 전청림 해설 / 열림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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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중요한 건 사람들의 규범에 대한 합의입니다. <마음에 날개 따윈 없어서>를 읽어 보면, 이건 SF가 아니라 1년 뒤라도 바로 겪을 수 있는 리얼리티입니다. 현재도 자율주행은 기술적 난관의 상당수가 해결이 되었고 그 일부는 도로에서 시행중입니다. 2차전지 전고체는 앞으로 한참을 더 기다리거나 아마도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하겠지만 자율주행은 기술적으로 진척이 크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해 당사자들의 충돌을 법적으로 조정해야 하기 때문에 과연 언제 전면 시행이 가능할지가 오리무중이죠. 인격 AI 책임 소재를 하청사(협력 업체)에 돌리기 위해 그런 방식을 쓴다는 이야기가, 현재 국교부나 국회 입법 전문가들이 토의 중이어야 할 사항이며 작가의 머리 속에 머문다면 납세자로서 상당히 갑갑해지는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수시를 다 없애고 정시로만 간결하게 뽑았으면 하는 생각인데, 이 소설 <이십 프로>를 읽으면서 대체 "사통"이 뭔지 몰라서 검색을 해 봤습니다(괜히 한 게, 바로 다음 페이지 p78에 뜻이 나오네요). 이렇게 들어가 봐야 또하나의 낙인("솎아낼 애[p75, p86])만 생길 뿐이며 또하나의 불평등에 지나지 않습니다(누군 공부해서 들어오고 누군 환경 나빠서 그냥 들어오고). 혹 당사자가 잠재력이 충분하다면, 이건 그런 아이한테 유인을 박탈할 뿐이라서 모두가 손해 보는 결과입니다. 과연 이런 제도 하에서 지금처럼 반도체, 전자 제품 등을 개발할 인재가 배출이 되겠습니까?..라고 생각하는 인간들 보라고, 대오각성하라고 전직 특목고 교사이셨던 작가님이 최나정을 페르소나 삼아 이런 소설도 쓰셨겠지만 저는 작중에 나오는 악마 같은 학부형이나 교감, 경쟁상대 솎아낼 생각에만 눈이 벌건 학생들한테 더 공감이 가는 게 솔직한 느낌입니다. 죄송합니다. 

쓸쓸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져 오는 느낌을 <영의 존재>를 읽고 받았습니다. 특히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인생 어느 단계에서 남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꽃피고 싶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남들 눈에 띄지 않는 미미한 인생이고, 잠시나마 같이 지내던 친구 역시 그렇다면, 슬프기까지는 않더라도 쓸쓸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나와 관계 없는 분들 상황을 뜻하지 않게 엿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사실 공영(空零은 아니겠지만)이라는 이름은 (그 보유자의 개성과 무관하게) 거꾸로 왠지 쿨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이선주란 이름은 정말로 흑백으로만 보입니다. 유년이건 청년이건 정말로 아름다웠다고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 같습니다. 

<돌아오지 않는다>의 주제는 "엄마의 세상은 불변한다"이겠습니다. 사실 청성교, 제프 씨 같은 사람들이 어떤 시커먼 속셈으로 사람을 속이려 들었든 간에,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보고자 하면 그건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머무는 것이며 그렇게 보고자 하는 사람의 착한 시선을 탓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이비 종교의 악마 같은 매력이 여기에 있겠으며 용케도 착한 사람들의 약한 구석을 그런 식으로 찌르고 들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누구나 머리 위에,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한 은하수를 이고 다닐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은 비밀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란 간데없이 사라지고 남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여자건 남자건 간에 별 차이도 없고 누군가는 여자가 여자한테 더 잔인하다고도 하지만 그건 처음에 기대치가 높아서일 뿐이고 결국은 내 이해와 쟤 것이 충돌할 때 가차없이 갈라서는 잔인함 그 강도는 남녀가 아무 차이 없습니다. 지안의 아주 한심한 삼촌(끔찍한 범죄자죠) 이야기는 과연 진짜였을까요 아니면 혹 아이들이 지어낸 환상은 아니었을까요. 물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저는 잠시, 영악한 최연이가 두 아이를 가스라이팅한 결과는 아니었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아이들 나이때 둘도 없이 친하고 없으면 죽을것같아도 사실은 속으로 서열을 재고 따질 걸 다 따집니다. 어디 아이들 뿐이겠습니까? 화자 조윤영 엄마가 하는 행동을 보십시오. 한국 중년 여성 서열은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자녀의 학교 등수가 결정합니다. 하나가 삐끗하면 그 사모님은 밤에 잠을 못 잡니다. 

"찾아야 할 사람들이 있고 해야 할 임무가 있어(p175)." 근데 이게 이 행성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면 어떤 다른 세상에서 다른 방법으로 실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간 차원이 어디로 사라진, "진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짜라고도 할 수 없는(p182)" 하지만 언니, 엄마, 혹은 그 두 사람이 합쳐진 누군가가 남겨 놓은 메시지를 해독해야 그들과 합일할 수 있습니다. 해탈 혹은 천국에의 입장이 알고 보면 어떤 시스템에 업로드(동시에 이 행성으로부터는 증발)되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락 같은 건 사실 거들 뿐으로, 중요한 건 우리의 각성이지 어떤 주관자가 따로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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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우리 예배를 아니라고 하실까? - 호세아 요엘 아모스 소예언서 쉽게 읽기
정기원 지음 / 샘솟는기쁨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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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딴에는 정성스레 드리는 예배라고 해도 하나님 눈에는 미쁘지 않으신지, 예배 후에도 뭔가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가득하지 않은 듯하고 일상에서 응답을 못 받은 듯할 때도 있습니다. 예배가 합당한 예배였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교만하게 판단할 일이 아니고 오로지 그분께서 혜량하실 문제이지만, 우리가 구체적으로 또 겸허하게 우리 자신들에게 짚어 봐야 할 점들은 무엇이 있을지 이 책을 읽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정기원 목사님께서 소예언서 세 권에 대한 깊은 연구와 사색의 결과물을 담으신 내용이기 때문에, 성경의 해당 부분을 옆에 두고 읽어 나가면 더욱 좋겠습니다(마치 주석서처럼). 저도 재작년('21) 4월 경에 목사님의 책 <낭비하지 않는 기도>를 읽고 독후감을 올렸는데 그 책도 성도들의 영성 함양과 자기 성찰에 매우 유익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실제 이들이 찾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번영과 풍요, 안전이다(p51)." "그들이 양떼와 소떼를 이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구약 호세아 5:6)." 놀랍게도 구약의 예언자들은 기복신앙의 폐해를 이미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거짓으로 눈물을 짜내며 남들 보여주기 위해 요란하게 회개하(는 척하)는 자, 타인의 존경을 얻어내기 위해 가증스럽게 허례를 부리는 자... 하나님 눈에 이런 자들의 얕은 속셈이 보이지 않을 리 없습니다. 우리 역시 참된 순교자의 거룩한 삶을 본받을 생각보다, 이런 회칠한 무덤 짓거리를 오히려 더 따라하려는 경향이 있으니 부끄럽고 개탄스럽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셨을까?"를 무엇보다 염두에 두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지요. "헛바람 든 사람은 대책이 없다(p109)." 

야곱이 누구입니까. 그는 둘째로 태어난 자신의 불리한 숙명에 그저 굴복하지 않고 지혜를 부려 장자권을 어리석고 자격 부족한 형 에서에게서 뺏어내었으며,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겨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영웅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예레미야 31:20)." 에브라임 역시 운명의 장난으로 권리를 얻은 야곱의 손자이자 한때 으뜸갔던 지파의 이름시조(p117)입니다. 

그러나 정 목사님은 그런 야곱이 나중에 이룬 부(富)와 성취 역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뜩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웃을 속이고 바르지 못한 언행으로 내 것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온당치 못하게 내 수중에 넣은 결과가 어떻게 공의로운 재물이겠습니까? 그 부와 재산으로 잘 먹고 잘 산들 자손이 영영 복을 받고 탈 없는 삶을 누리겠습니까? 지금 화제가 되는 중인 전(全) 모의 손자가 벌이는 행각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날, 진노(p83, p116)의 날(dies irae). 정 목사님은 스바냐서의 주제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우리뜻대로 맘판 놀아난 주제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 머리 위에 떨어지게 될 응보, 환난, 고통의 날이라고 가르칩니다(p153). 이때서야 알곡과 가라지가 바르게 가려지며 누가 양떼이고 누가 염소인지, 누가 주님의 오른편에 앉고 누가 지옥 영겁의 유황불에서 활활 타게 될지가 가름될 것입니다. 

한때 그처럼 창성하고 번영한 것들이라도 이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창세기 1:4) 않은 것들은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고(마가 13:2) 무너질 것입니다. 하사엘의 집, 벤하닷의 궁(宮, p195), 다곤의 신전(사기 16:30) 등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흔적도 없이 파괴됩니다. 역사상 최고의 권세와 가멺을 자랑하던 제국과 도시의 운명들이 이러했거늘 항차 그들보다 훨씬 못한 우리의 교만과 단견은 어떻게 심판받겠습니까?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p139). 진노 안에는 또한 긍휼도 있으며(p103) 이를 얻고 못 얻고도 오로지 우리 하기 달렸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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