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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조장하는 위험들 - 위기에 내몰린 개인의 생존법은 무엇인가?
브래드 에반스.줄리언 리드 지음, 김승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평점 :
"지난 30년간 '사회적 국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저자들의 단호한, 그리고 우울한 진단입니다. 사회적 국가란 어떤 공동체적 관점을 우선하여, 재난이나 질병, 나아가 빈곤과 차별, 박해, 증오로부터의 피해까지 국가가 어느 정도 책임지고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개념이죠. 이런 이상은, 199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 일대를 휩쓴 신자유주의, 나아가 세계화의 바람 때문에 크게 훼손되었다는 게 저자들의 개탄입니다.
저자들은 과거 (국제)정치학이 크게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양대 진영만의 놀이터였던 양상이 현재 지양되는 중이며, 정치권력은 인간의 생명"만"을 주된 의제로 삼던 과거의 전략을 버리고 이제 생명체 전반으로까지 관리 대상을 확대해 간다고 파악합니다. 안전 거버넌스-경제개발-생명영역의 모든 생명, 이 세 가지 의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가는 게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전략이자 헤게모니 확대의 동력이라고 말합니다(p70). 미셸 푸코는 우리가 잘 알듯 근대가 되어서야 "주체"가 등장했다고 했는데, 이제 21세기 들어 생명권의 주체, 네트워크의 개념 등이 해체 후 다시 정립 중이라는 겁니다. 휴머니즘이 본연의 수명을 다한 후 이제 포스트휴먼이 새 연결망의 노드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계서 속이든 거대담론 소스이든 요즘은 리질리언스(resilience), 즉 (생명)회복력이란 덕목을 무척 강조합니다. 이런 논의 이면에는 개인이 겪는 불행이나 고통은 원칙적으로 그 개인의 책임이며 그 당사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인식이 자리합니다. "위험에 가장 잘 대처하는 방법은, 위험의 발생을,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네트워크 안에 내면화하는 것(p76)." 이런 믿음을, 신자유주의는 개개인에게 이식하고 세뇌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이 정도는, 이 험한 세상에서 한 번 정도는 겪는다고 각오하고서 살아야겠지?"라는, 꽤나 부담스러운 질문을 신자유주의가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던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작년 10월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있었는데, 이 책임 소재를 놓고 정치 진영 사이에 인식 차가 적잖게 있었던 양상은 이 관점대로라면 깔끔하게 설명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는 각양각색의 인재(人災)가 자연재해와 별개로, 혹은 결합하여 발생하는데, 이에 대처하거나 장기 비전을 제시하는 방법도 정치 진영 사이에 큰 차이가 (당연히) 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라면 이 책의 원제 <Resilient Life>는 강도 높은 풍자요 반어법입니다.
회복력 담론은 과거 제국주의의 의도와 그 근본이 같으면서도 지역 주민에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접근합니다. 반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진영은 "지략을 갖춘 사람들의 자율성(p129)"을 근본 전제로 삼고 모든 행동 전략과 지향점을 설정합니다. 정치적 주체성, 자기 통제 역량에 대해 신뢰를 갖는 것이 후자이며, 이에 대해 철저한 불신을 깔고 시작하는 게 신자유주의라는 말입니다. 사실 서브프라임 사태 말고도 조지 W 부시 정권은 공교롭게도 임기 말에 찾아온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이미 레임덕에 빠졌는데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애초에 정권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재난에 능동적,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겠다는 이해도 논리적으로 가능합니다.
르상티망, 분노, 허무... 니체가 선구적으로 너무나도 명징하게 추출해 낸 이런 개념들은 자유주의적 생명관리정치에 오히려 핵심적인 도구였으며 가장 강력한 표현이었다(p167)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개인은 각종 재난 앞에 무력감을 느끼면서 존재의 하찮음에 분노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개인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재난, 불행에 대해 "적응"할 것을 요구 받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게 인간의 의무고 숙명입니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적응이 성숙한 어른의 태도이므로 체제를 변혁하자는 각성이 일어날 수 없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사실 니체의 사상을 자체 논리에 따라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내재화하여 잘 써 먹은 게 역사의 팩트입니다.
재앙(카타스트로프), 종말을 거치고 나서 살아남거나 그 속에서 적응하는 게 가능한가?(p215) 재미있게도 니체는 이 문제에 대해서조차 이미 자기만의 답을 내어놓고 있었네요. 지구온난화나 핵전쟁 공멸의 위험은 20세기 후반에나 들어서 비로소 대두했는데도 말입니다. 저자들의 결론은, 이미 판이 짜여져 있고 끝도 없이 적응만 하다가 끝날 뿐이라는 바로 그 생각과 그 생각의 강요, 주입에 저항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응과 번식에만 최적화한 적자(適者)가 아니라, 그 이상의 아름답고 이상적인 무엇을 응시할 특권을 지닌 존재입니다. 무한한 잠재력은 그저 생존과 적응만에 소진될 게 아니라 더 높은 이상향을 꿈꾸는 데에 쓰여야 합니다. 테크네보다는 포이에시스가 더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인간다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