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모범택시 2 (하) 모범택시 2 2
오상호 / 너와숲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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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 justice)의 정의(定義. definition)는 무엇인가?" 이 책 p4에 나오는 말입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아주 가벼운 죗값만을 치르고 사회로 복귀하여 여전히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을 보고 평범한 시민들이 느끼는 분노를 대변합니다. 영어로 justice는 대법관이란 뜻도 있고, 사법절차의 진행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판사들이 범죄자들에 대해 온당한 단죄도 하지 않고, 사법적 응징도 대단히 불완전하게 이뤄질 뿐이라면 과연 justice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무지개운수 대표님 이하 여러 직원들이 저처럼 열심히 제2의 사업에 몰두하는 동기는 여기에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9화에서도 여전히 하준이, 즉 온 기사는 도기한테 형님 형님 거리며 살살대는데 이제 이쯤 되면 시청자, 혹은 독자들이 그의 정체에 대해 눈치를 채는 단계라서 리뷰에서 더 이상 돌려말하지 않겠습니다. 인간 중에 가장 잘못된 인간이,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한테 악으로 갚는 유형(특히, p166, p271을 보십시오)인데, 성장 과정에서의 상처 때문에 저렇게 되어 버린 처지가 불쌍하기도 하지만 정말 혐오스럽습니다. 하준이 계속 친해지려 들지만 나이도 한참 위인 도기는 계속 온 기사에게 말을 높이며 그와 거리를 두려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은이는 (도기하고 나이 차는 있으나) 꼬박꼬박 성까지 붙여가며 "김도기기사님"이라고 드라마 끝까지 호칭하는데 물론 이건 전혀 다른 동기입니다.  

어떤 조직이건 "실세"라는 게 있는데, 최고 권력자가 조직 안에서 특정 구성원에게 얼마나 사적인 신뢰를 주느냐에 따라, 그 조직원의 공식 직함, (한국에서라면) 나이 등과 무관하게 높은 서열을 차지하는 분자를 말하며, 나이로 보나 사회적 직위로 보나 비교가 안 되는 박현조 총경이 "온 실장"에게 쩔쩔 매는 걸 보면 이 조직 내 권력 구도가 짐작이 됩니다. 이 박현조 총경은 11화 이후로 계속 주요 등장인물이며, 15화 이후에서 그 충격적인 과거가 드디어 밝혀집니다. p151 같은 데서, 서열이 깨지는 굴욕감을 참지 못한 박 총경이 계장에게 미친 듯 화내는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p219에 빅터가 박 "총"경에게 술 따라 주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그 유명한 경찰"총"장의 allusion이겠습니다. 

9화~10화의 메인 빌런은 안영숙 원장인데 개인적으로 모범택시 시즌 2에서 가장 잘 뽑힌 빌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상도 선하고 감정을 함부로 표현하지 않고 지능도 뛰어나며 사회적 지위도 확고한데다 지긋한 나이의 여성이기까지 합니다. 누구도 그 선의를 감히 의심할 포지션이 아니며 그렇기에 몇 배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배우는 이항나씨라고 나오는데 저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서 아니 이런 분이 여태 어디 숨어계셨나 싶었습니다(제 눈에). 미인이신데다 과장되지 않게 딱 이런 유형의 악한을 적합하게 연기하셔서 그 연기력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의사는 사회적으로 가장 높은 신뢰를 받는 직업군이기에, 이 에피소드의 충격도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각별히 클 듯합니다. 물론 이 드라마는 허구의 산물이지만, 드라마가 다분히 의도했듯 이 비슷한 쇼킹한 사건이 있었기에 대중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원작 웹툰부터 해서 소재로 삼은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에피소드 자체는 원작 웹툰에 없는, 오상호 작가의 창작이라고 합니다. 

이 드라마의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무리 심각한 사건을 해결하는 중이라도 무지개운수 직원들, 대표님이 큰 웃음을 선사하는 대목이 꼭 있다는 건데, 의료사고(다분히 고의적인) 와중에도 김도기가 이른바 "나이롱 환자"로 대놓고 행세하며 안 원장과 실랑이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만 딱 떼어놓고 보면 교양도 있고 노련하기까지 한 안 원장이 사회의 쓰레기인 김도기를 능숙하게 컨트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장면에서의 긴장감과 해학은 5~6화에서 사기분양업자 강필승이가 가짜 부부 도기-고은을 예리하게 분석하던 대목과 맞먹습니다.  물론 안 원장이 강필승보다는 레벨이 높은 악당이지만. 

p74에서 "불법건조물침입"이라는 죄명은 없습니다. 물론 건조물침입이 불법이 될 경우가 많겠지만 저런 명칭은 없다는 것입니다. 대본집이나 드라마나 똑같이 처리되었네요. 

차량에다 폭발물을 설치하는 방식의 살인은 미국 마피아 소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많이 나오는데 무지개운수가 이런 일(p155)을 겪고 보니 그 사고 자체의 충격파보다 배후 세력의 규모, 의도에 대한 걱정이 당사자들에게 더 컸으리라고 짐작이 되죠(사실은 시청자가 그렇다는). p199에서 C4라는 건 컴포지션4이겠는데 스릴러 소설이나 미드에 하도 많이 나와서 일반인도 원 모를 수가 없습니다. 

11화~14화의 "블랙썬게이트"는 4년 전 전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사건을 대놓고 allude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지금 11화의 도기처럼 피해를 봤던 김o교씨가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해당 인물에 대해 진정성 의심, 비판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그 피해만큼은 팩트였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공권력이 아예 작정을 하고 폭력조직, 업소 따위와 유착하면 서민들은 대체 어디에 기대야 하겠습니까. 물론 서민은 저런 클럽에 갈 일 자체가 없긴 하겠습니다만. 

p291에서 MD 윈디가 "갈수록 진상이야 쪼끄만 새끼가"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드라마에서도 그대로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아이돌 빅터의 키를 가리키는 건지 아니면 나이를 가리키는 건지였습니다. 사실 윈디는 이상하게도 도기가 좀 위기에 몰린다 싶으면 나타나서 결과적으로 그를 구해주는데(잘 지켜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혹시 얘가 무지개운수 비밀직원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제 짐작이지만 그렇게 하려고 복선을 심었다가 나중에 진행을 바꾼 것 같네요. 

p320을 비롯 여러 군데에 나오는, 비리의 온상 정삼경찰서는 (물론 가상의 지역명을 따서 그리 이름이 붙었겠으나) 저는 이게 역삼동의 패러디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버o썬이 역삼동에 소재했었고 정(正)과 역(逆. reverse)은 서로 반대말이니 말입니다. 물론 역삼동의 한자 표기는 驛三洞이지만. 

p300에 보면 홈런이 무슨 뜻인지 빅터에게 도기가 묻는 장면이 있는데(드라마도 당연히 같습니다), 빅터 답이, (p229의 이른바 "꽁치"라든가) 홈런의 뜻은 그게 맞겠습니다만 안타 뜻은 제가 알기로는 그게 아닌데... p233에서 "수영복 차림의 여성 종업원"은 이른바 "샴걸"이죠(그게 "수영복"은 아니지만 여튼). 이 시즌 2 전체에서 가장 큰 웃음이 나온 장면은 장 대표가 열심히 호루라기를 불며 인솔하는 일련의 등산동호회 노인들이 클럽에 들어와 난장판을 만드는 씬(p307)이었습니다. 쩜오모델급(p228) 아니면 입밴인 클럽이었는데... 그런데 쩜오면 쩜오지 쩜오모델은 또 뭔지 모르겠습니다. 쩜오가 뭐 대단하다고 모델급을 종업원으로 쓰나요?(아마 일반 시청자가 쩜오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까봐 배려한 것 같습니다) 여튼 여기(p309)에서 드라마는 최 주임이 DJ석에 가서 노래를 <내 나이가 어때서>로 바꾸는데 대본집을 보니 구체적인 곡명은 안 나와 있었네요. 

아... 드라마 시작할 때 극중에서 언급되는 종교, 시설, 직종 등에 대해 이는 허구이니 혹 불편해할 시청자들에게 미리 사과한다는 자막이 뜨는데, 이른바 금사회라는 비밀조직을 이끄는 "교구장님"을 보고 누구라도 대번에 천주교 사제를 떠올리겠기 때문입니다. p371을 보면 도미누스 보비스꿈, 데오 그라시아쓰 등 라틴어 경문을 (마치 구식 미사처럼) 사제와 신자들이 중얼거리는 장면 있고 드라마도 같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후 미사는 각국의 현지어로 진행될 뿐이며, 구식 liturgy를 고집하는 극우파를 이 드라마에서 암시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뭐 모를 일입니다. vobiscum은 with you("복수인 당신들"과 함께)인데 라틴어는 저렇게 독특하게 전치사 일부가 제 목적어 뒤로 가서 달라붙어버리는 어법이 있죠. 

15화, 16화는 반전(twisting)이 정말 심합니다. 이렇게 진행되겠지 짐작하면 바로 방향을 드라마가 틀어 버리는 통에 머리가 다 아팠는데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보면 편합니다. 자세한 건 스포일러라서 이 리뷰에서 밝힐 수 없고, 아무튼 저 무지개기사 1호(김소연), 오미서 중위 등이 나올지 모르는 시즌 3가 빨리 제작되었으면 좋겠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종이책은 하권을 따로 판매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e-book 상품 페이지에 이 리뷰를 작성합니다. 상권 리뷰는 세트상품 페이지에 등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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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2 상·하 세트 - 전2권 - 오상호 극본
오상호 지음 / 너와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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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시즌 2가 방영 시작했을 때 처음부터 제 주변에서는 다들 재미있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즌 2의 첫 몇 에피소드에서, 빌런들이 생각보다 좀 약하거나 시시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물론 지독하게 악하고 치가 떨리도록 미운 건 사실인데, 정의구현하는 우리 무지개운수 어벤져스에 비해 실력(...)이 너무 떨어진다고 할까요. 그런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악당들의 실력이 늘더니 11화(하권 분량)부터는, 아 이래서 비질란티, 자경단이 있어야 하나 보다, 이런 생각이 잠시 들기까지 했습니다. 엄청난 몰입감이었고, 아직도 감동이 가시지 않습니다. 물론 드라마 중에 나오는 대로, 목적이 옳아도 그 방법이 그르면 곤란하며 범죄의 사적 구제는 문명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ㅎㅎ 그렇지만 이 대본집 p5(기획의도)에서는 역시, 결이 다른 말이 나옵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말이 인용되는데, "정의는 완전무결할 때에만 옳다"입니다. 즉, 불완전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뜻인데, 형식적 법치주의를 내세워 증거불충분으로 피의자를 풀어 주거나, 확정 판결을 받고도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거나, 아주 불충분한 죗값만을 치르고도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버젓이 사회를 활보한다거나 하는 악당들을 볼 때, 과연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드는지를 묻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장 대표님은 이 부분에 대해 큰 회의를 갖고, 시즌 1 결말이나 이 드라마 초반부 회상 씬에서 "정 뗀다. 다시는 이런 일 없어야 한다. 모두 내 책임이다" 같은 말을 합니다. 

책 맨처음에는 등장인물 소개가 나옵니다. 이 책이 SBS 오센틱이기도 하고, 인터넷 다른 곳에 정신없이, 혹은 부정확하게 나온 정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김도기, 장 대표님, 안고은, 최 주임(산발), 박 주임(호섭이머리), 온하준 등이 소개되는데, 이 중 가장 의미심장한 캐릭터는 온하준이죠. 그 이유는 하권 리뷰에서 말하겠지만 드라마를 이미 다 본 시청자들은 다 아는 바이겠습니다. 

p35를 보면... 역시 SBS 드라마 대본은 지문(地文)이 액티브합니다. "구석에 있던 '2년 전(이라는)' 자막이 커지며 슬금슬금 중앙으로 온다. '2년 전'에서 '1년 전'으로 '떵' 바뀌는 자막." 저는 이 설명이 너무 재미있어서 VOD 이 부분을 과연 그랬는지 일부러 다시 찾아봤습니다. p43을 보면 최 주임이 회상 들어가는 대목에서 "플래시 인서트"라고 나오는데 이처럼 SBS 대본집은 대본 본연의 여러 공식을 충분히 정격으로 지킵니다(여기뿐 아니라 여러 군데에 그렇게 나옵니다). 여태 <치얼업>, <법쩐> 등을 리뷰하며 계속 느꼈던 바입니다. p25에는 "풀무더기 두 개가 '스윽' 움직인다"는 지문이 있는데 드라마에선 가오갤의 그루트처럼 나옵니다. 

p21을 보면 "비로소, 헝클어진 머리에 깎지 않은 수염의 (김)도기가 보인다"라는 지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대본집과 드라마가 좀 차이가 큽니다. 2하6-5238 죄수는 눈을 덮은 장발이지만 수염은 전혀 없어서 처음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 "비로소 도기(이제훈 扮)가 보인다"는 좀 이해가 안 되었네요. 물론 드라마상의 표현이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5238이라는 넘버는 이 드라마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점 시청자들은 다 알 것입니다. 

p25쯤에 김도기 특유의 짓궂은 이중부정 표현 "(니들) 안 다치진 않았지?(다쳤길 바라기라도 한다는 뉘앙스)"가 대사로 나와야 하는데 없습니다. 이건 드라마에만 나온다는 뜻입니다.  

p57 이후부터 베트남의 "코타야"라는 지명이 나오고, 이 대본집에는 한글로 표기되지만 드라마에서는 Kotaya라고 로마자로 쓰여서 차량이라든가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실존 지명은 아닙니다. p41에서 연구진이 최 주임에게 삐삐(=호출기)를 꺼내들며 "이거 돼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마지막 16화에서 1호 기사(김소연 扮)의 일식집 장면과 비슷한 것도 하나의 숨은 재미입니다. 꼭 찾아 보십시오. 

1화는 제 개인적 느낌으로, 이 상권이 커버하는 셈인 1화~8화 중에서 가장 구성이 좋았고 빌런(들)의 비중도 묵직했습니다. 현직 ooo이 범인이라는 점도 충격이지만 일단 에피소드 초반부에 한 번 얼굴을 비춘 사람이 나중에 빌런으로 밝혀지는 점도 반전의 묘미를 더합니다. 또 이 에피소드는 절박한 청년들(특히 p113 참조)을 상대로 한 범죄라는 점에서 더욱 가증스럽고 시청자, 독자의 분노를 촉발합니다. 망할 자식들이, 사람 일을 시켰으면 돈을 줘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그 정도가 아니라 더 끔찍한 범죄지만) 이런 나쁜 놈들은 베트남 현지에서 악어 밥으로 던져 줘야 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시멘트로 그냥...(p147 참조) 

고은이가 어렵게 공무원 공부해서 경찰이 되는데 어떻게 무지개운수 전산직(...)하고 투잡을 뛰나 했는데 1화 끝에서 그만두는군요(p159). 씁쓸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는 과연 어디란 말인가! 1화 마지막(p161)에 반장이 죽고 나서 "저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겠다"는 수수께끼의 목소리(드라마에서는 기계음 변조)가 나오는데 나중에 보면 이것도 복선입니다. 알아보겠다고 하고서(?) 바로 2화에 등장하니 말입니다(물론 얼굴은 모르지만). 

사실 3화 볼 때는 존재감이 없어서 누군지도(누구일지도) 몰랐는데 대본집 p175 같은 데를 보니 제법 비중이 컸었네요. 스포일러라서 이 리뷰에서는 이렇게만 쓰겠습니다. 

p247을 보면 김도기 등장 장면에서 MBC 예전드라마 전원일기 테마곡이 나와서 드라마 시청 할 때 웃었습니다. 배우 이제훈의 이미지는 이런 것과는 극과 극이라서 더했습니다. 그런데 대본집에서도 MBC라고 경쟁 방송사 명칭이 그대로 인쇄되어 나온 게 흥미로웠습니다. 이제훈씨의 이른바 촌닭 연기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p167에 군인승객을 김도기가 특전사까지 태워주는(따라서 군 후배) 장면은 16화 마지막에서 시즌3을 암시하는 장면과 연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김도기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어렸을 때 엄마가 죽던 일을 트라우마처럼 떠올리는데 16화에서 "교구장님"이 도기를 무력화하는 장면과 관계 있습니다. 

3, 4화는 악당들이 너무 저질인데다 수법이 한심해서 범죄소탕극으로서는 재미가 덜했으나 김의성씨의 장노인 연기가 코믹하고 재미있습니다. 안경을 벗고 나와서 처음에는 누군가 싶죠. 피해자 이임순 할머니에게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동네 주민들이 유상기 일당 못지 않게 나쁜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p270에 안고은이 무대로 올라가 노래 목로주점을 부르는 장면은 하권 16화 분량에서 명품 칠갑하고 대부업체에 들러 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 시키는 씬과 함께 명장면입니다. 

p303에 호o원 PPL이 대본에서도 명시적으로 상품명이 나와서 좀 놀랐습니다. 호o원은 이 프로젝트에 협찬을 아주 세게 했는지(?) 아주 자주 나오는데 16화 마지막에도 강하게 부각됩니다.   

p327에 온하준 기사가 고아 아닌 고아 서연이에게 "옷은 깨끗하게 입어야 누가 안 괴롭힌다"는 말을 (드라마에서) 아주 다정하게 건네는데 이게 생각보다 큰 복선이었네요. 드라마에서는 5화 맨처음에 온기사가 김도기에게 형님 여기 사셨냐며 알랑거리는 장면이 있는데 대본집에서는 이게 4화 말미에만 나옵니다. 5화 6화에서 사기건축업자 강필승이는 제법 지능범이라서 긴장감이 높아졌고, 김도기와 고은이가 가짜 부부 행세하는 장면이 우스우면서도 서스펜스 있었습니다. 

p388을 보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사기꾼 강필승이만 나쁜 놈이 아니라, 집 욕심에 눈이 멀어 부정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선택하는 서연의 가짜 부모들도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나쁜 사람들입니다. 3화~4화에서 이임순 노인에게 배상하라며 생떼를 쓰는 주민들과도 같습니다. 사기꾼들에게 붙어서 떡고물이라도 챙기려고 방조범 노릇하는 소시민들이 다 이와 같습니다. 

한국은 유독 갖가지 사이비 종교 비리가 판을 치는 것도 좀 특이한 나라죠. 7~8화에서 순백을 강조하는 옥주만과 그의 배필, 사업 파트너인 간증녀 두 사람이 빌런인데 김도기가 법사님으로 가장하여 한 수 위의 사이비 놀음으로 이들을 응징하는 게 약간 억지스러우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사이비와 달리 옥주만은 그래도 순정이나 효심이 있는지 간증녀 한 여자만 챙기고(보통 교주들은 여러 여자를 건드리죠), 나중에는 죽은 어머니 코드에 무너지는 모습이 좀 불쌍하기도 했네요.  

책 맨 뒤에 주연배우들 싸인 있습니다. 책 디자인은 예쁘지만 <치얼업>이나 <법쩐>에 비해 드라마 스틸사진이 부족한 게 조금은 아쉬웠어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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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이미 지난세기 말부터 반도체로 먹고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선견지명(이 책 p128) 덕에 비단 일 가문이나 특정 기업집단뿐 아니라 전국민이 수혜를 보는 지경입니다. 그런데 삼성그룹이나 협력업체 직원이 꼭 아니라 해도 반도체 호황(그 사이클에 접어든 경우라면)의 혜택을 더 크게 입기 위해서는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반도체 산업의 구조와 업황에 밝으면 비단 삼전 관련주가 아니라 해도 하이닉스나 관련 소부장 주식의 등락 과정에서 수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엔지니어나 업체 직원이 꼭 아니라도 우리 일반인들이 반도체 관련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십 년 전 스마트폰이 급속히 대중화할 때 곧 PC(특히 랩탑류)가 사라진다는 말까지 있었지만 아직도 PC를 완전 대체하려면 멀었고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말은 스마트폰뿐 아니라 PC향 반도체 공급라인 필요성도 여전하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랩탑을 고를 때 휴대성이나 디자인만 볼 게 아니라, CPU나 램 사양 등도 필수로 따져봐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사실 이런 사항은 20년 전에도 컴퓨터 잡지, 아니 그냥 일반적인 매체 등에서 노트북 관련하여 입버릇처럼 하던 말인데, 요즘 세대는 워낙 모바일에만 의존하다 보니 컴 다루는 실력이나 관련 지식이 오히려 앞선 세대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입니다(안 그런 사람들도 많겠지만). 저자는 이어서 CPU나 램 사양 보는 법, 각 부품이 컴퓨터에서 하는 일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PC에서 DDR(double data rate)이 하는 일을 모바일에서는 LPDDR이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주식에 관심있는 이들은 GPU 하면 바로 엔비디아(이 책 p155 이하 참조)를 떠올릴 텐데 책에서는 p80 이하에서 이 GPU에 대해 "요즘 핫한 녀석"이라면서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20대를 컴퓨터에 푹 파묻혀 보낸 세대도 GPU에는 상대적으로 덜 익숙할 수 있으나 게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최신사양으로 조립할 때 이것저것 견적하면서 알아들 봤을 것입니다. 저자는 최근에 Chat GPT가 뜨면서 다시금 GPU가 주목받는다고 알려 줍니다. 올드한 세대는 아직도 자료저장할 때 하드디스크를 찾곤 하는데 사실 (이른바) 외장하드로서 저장 수단의 기능도 USB한테 밀린지 오래입니다. USB가 최근 2테라까지 용량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PC에서 운영체제를 깔고 최초 구동하는 기반 디바이스로서는 이 책 p92에 나오듯 SSD가 또 HDD를 십 년 전부터 대체했습니다. TV처럼 빨리 켜지는(부팅되는) 컴퓨터가 당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2년 전 o비oo텍이란 종목이 관심을 크게 받았는데 이 업체가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하면서도 구사양 품목이라서 타 업체가 이미 라인을 폐쇄한지 오래였기에 뜻하지 않게 독과점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2011년경 태국에 홍수가 나서 세계 HDD 가격이 엄청나게 뛴 적이 있었죠. 그래도 타 국가에서(심지어 중국도) 새로 하드디스크 생산라인을 구축한다거나 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일시 가격이 올라도 제품이 곧 대체상품(SSD)에 밀려 퇴출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2020년 특정 파운드리가 갑자기 품귀현상이 있었는데도 바로 공급량이 증가하지 않고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장경제 원리가 작동하지 않은 게 다 이런 이유입니다. 구형 말고 차량용반도체의 미래에 대해서는 이 책 p99 이하를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이미지센서, PMIC에 대한 설명도 쉽고 명쾌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책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기업 소개인 3부입니다. 삼전과 하이닉스도 알아봐야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TSMC 부분을 우리 한국 독자들도 주의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중국이 해협을 넘어 대만에 쳐들어간다는 것이며 미국 등이 발을 동동 구르는 거죠. 전쟁이다 뭐다 해서 혼란이 이어지는 동안 한국 대기업들이 과감한 투자를 통해 저 업체의 기술력을 넘설 생각을 해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4부 p213에도 나오듯 아직 한국 업체들이 많이 부족합니다. 

1990년대 중반 PSC가 한국에 크게 보급되면서 폰 뒷부분을 보면 퀄컴 로고가 찍힌 걸(삼성, 모토롤라, 현대, 한화 등 어떤 폰이라도) 봤을 겁니다.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을 CDMA라고 하는데 이게 세계 최초격으로 당시 한국에서 성공하여 퀄컴과 이동통신사들 모두 대박을 쳤었습니다. 

마지막 4부는 향후 반도체 시장과 산업 현황에 대한 내용입니다. 시스템반도체 시장은 팬데믹 이후로 확 클 것이라 예상되었으나 현재 그렇지 못하고 책에서는 p207에서 비록 둔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상승추세라고 짚습니다. 이제는 메모리가 아니라 시스템반도체 위주로 시장이 재편될 전망이므로(p221) 플레이어인 기업들이 대비를 해야 함은 물론 정부와 국민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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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션 - 발명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다!
바츨라프 스밀 지음, 조남욱 옮김 / 처음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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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은 우리 인류가 문명 생활을 누리고 그 수준을 높이며 보다 편하고 부유하게 사는 데에 꼭 필요한, 혁신 경제 활동의 일환입니다. 발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대단히 가난하고, 불편한 삶만을 영위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 18세기에 가장 이르게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도, 일찍부터 발명가가 자신의 업적에 대한 보상을 정당하게 받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특허 제도를 정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에서 발명에 전념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데, 생업으로 이를 영위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발명에 대한 별의별 희한한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예를 들어 p20에는 관(coffin. burial case)에 사다리를 달아서 혹시 매장자가 의식이 회복되었을 경우를 대비한다거나, 사람 얼굴에 보조개를 만들어 주는 장치 같은 게 언급됩니다. 빌 게이츠가 사랑했다는 이 책 저자 바츨라프 스밀은 이런 발명들을 두고 실용성이 의심되는 경우라고 말하지만, 독자로서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도 않았습니다. 우선 앞의 사다리 관 같은 것은, 그게 정말로 망자의 부활(?)을 대비했다기보다, 그렇게 해서라도 혹시 죽은 이가 가족들에게 돌아왔으면 하는,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죠. 화장품이나 가벼운 성형 시술도 물리적으로 확실한 효과가 나서라기보다 사용하는 이의 심리적 안정, 만족감 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 더 크듯이 말입니다. 특허가 난 발명이라면 적어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뭐라도 효용이 있어서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p28에는 퇴출된 발명의 예도 나옵니다. 유연(有鉛) 휘발유는 "내연 기관의 부드러운 운행"을 위해 발명되었으나, 인체에 해롭다는 게 알려지면서 퇴출되었다고 책에 서술됩니다. 유연이라는 말 뜻이 납을 함유했다는 건데, 납이 사람 몸에 얼마나 해롭겠습니까. 단순히 가솔린이 배출하는 매연만으로도 악영향이 심각한데, 그 안에 납까지 들어 있었다니... 사실 지금은 탄소연료로 작동하는 모든 자동차가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 할 가솔린 자동차 자체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는 건, 발명의 시대적 의의라는 게 생각외로 무상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줍니다. p33에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CEO의 핸드폰이라고까지 불렸던 블루베리가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도 나옵니다. 

우리는 보통 자동차의 발명자를 다임러와 벤츠만으로 알고 있지만 자동차가 오늘날과 같은 꼴을 갖추기까지는 그들 외에 많은 발명가, 혁신가들의 기여와 품이 들었습니다. 요즘도 강가나 바다 같은 휴양지에서 작은 모터보트 시동을 처음 걸려면 손으로 막 잡아당기는 장치를 쓰기도 하는데 이걸 리코일 스타터라고 합니다. 그만큼 모든 vehicle은 초기 시동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큰 관건인데 p50에는 찰스 케터링이라는 사람이 만든, 손으로 크랭킹하는 방식을 개선한 최초 전기 스타터를 만들었다고 나옵니다. 차 시동 걸 때 마치 소형 모터보트처럼 손으로 운전자가 어떤 두껍게 감긴 코드를 막 잡아당겼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발명이란 이처럼 인간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 책 2장은 그 대부분이, 20세기 초 가솔린 자동차가 어떻게 안티노킹 이슈를 해결했는지에 할당됩니다.엔진 노킹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엔진을 얼마 쓰지 못하고 결국 자동차 값을 엄청 높이게 됩니다. 앞에 나왔던 찰스 케터링은 억지로 유연첨가제(TEL)를 에틸 가스라고 우겼다는 서술도 이 책에 나오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초기 자동차는 대중성과 실용성을 높여야만 했겠습니다. 물론 유연 배기물이 사람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는 새삼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이처럼이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는 데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기에 인체에 해로운 TEL을 써서라도 대중에게 자동차 소유의 장벽을 낮춘 것도 발명가이며, 마침내 납 성분을 퇴출한 것도 발명가들과 엔지니어들의 기여입니다.     

생전에 리콴유 싱가포르 수상은 "인류 최고의 발명은 바로 에어컨"이란 말을 남긴 적 있습니다.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조건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합니다만 에어컨이 큰 하자 없는 완결된 발명품에 이르기까지도 사실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지구온난화 이슈, 냉매로써 프레온 가스의 대체 등이 큰 문제로 대두했고, p109에도 나오듯 문제의 CFC를 완전히 몰아낼 천연냉매가 언제나 등장할지에 대해서도 발명가들의 역할이 기대됩니다. 

비행기가 지금처럼 실용화되기 전까지는 독일에서 만든 비행선이 미래의 교통 수단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우리도 영화나 다큐에서 간혹 보듯이 통통하고 귀여운 외관을 한 탈것이었죠. 안전성 면에서 낫지만 비용이 너무 비싸고 비행선에 보다 특화한 화물 운송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비행선은 이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발명가들은 가까운 미래에 마치 호화 여객선처럼 새로운 교통 수단으로 다시 등장할 비행선을 기대합니다. 

이 책에서는 그 외에도 핵융합을 통한 청정에너지 등 반드시 근미래에 이뤄졌으면 하는 발명 여럿을 설명합니다. 전기차 안전에 필수인 전고체 배터리 같은 것도 하루빨리 나와야 운전자들이 "결코 꺼지지 않는 화재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겠고, 이 모든 가능한 미래의 성과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혁신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는 발명가들의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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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에어포트
무라야마 사키 지음, 이소담 옮김 / 열림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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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화려한 터미널은 어른들의 세계였다.(p177)" 공항이든 기차역이든 터미널은 바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고, 많은 수의 역동적인 승객들이 드나든다는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정이나 관심을 잘 받지 못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터미널에 머무는 특이한 사람을 유의깊게 본다거나 시설 곳곳의 장식,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윽한 눈길로 주시한다든가, 연상되는 어떤 추억을 떠올린다든가 하는 일은 드물 것 같습니다. 그곳은 누구에게라도 어느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지점, 주소 이상이 되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공항은 마법의 공항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과거의 절친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5년 전에 이곳을 거쳐간 지인들이 남긴 흔적을 마주하기도 하고, 즐겨 읽던 만화의 작가를 영광스럽게 접견하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자주 거론하던 어떤 직업 마술사를 흘낏 보기도 하는데, 시설 자체가 워낙 큰 곳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하네다 공항 같으면 사실 가능도 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 모든 신비로운 우연을 합리화라도 하듯 마녀 같은 마술사가 현장을 들렀기에 더욱 신비한 느낌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연은 사실 숨은 필연들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료지는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거친 행운아였고 뚜렷한 재능을 지닌 기대주 예술가였습니다. 그러나 작품들이 크게 시운에 맞지는 못했고, 재능이 꽃을 피울 적기를 살짝 놓치고 의욕도 잃어가며 결국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가려고 지금 이 공항을 찾았습니다. 나가사키로 가는 국내선 항로도 하네다 공항(물론 이 소설에 하네다라고 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습니다만)에서 운영되니 말입니다. 게다가 료지 씨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 건 시오리와의 실연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보다는 살짝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해 왔던 절친 아키라가 원인이 되었으니... 

사실 저는 소위 "잘못된 만남" 류의 비극, 즉 절친과 여친을 동시에 잃은 데서 온 배신감 때문에 료지 씨가 좌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료지 씨는 차라리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한 것입니다. 더 먼저, 더 오래 알아 온 시유리에 대해, 그녀의 정서적 갈증을 절친 아키라가 더 잘 알고 더 잘 채워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키라만큼 살갑지 못했던 자신이 못나 보였던 거죠. 이뿐이 아닙니다. 둘은 료지 씨를 떠나면서 료지가 상처를 그나마 최소한으로 받게 배려하는데, 이것마저도 그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게 된 거죠. 왜 나는 쿨하게 둘을 축복하며 떠나 보내지 못했던 걸까? 그들은 훨씬 더 행복해질 수도 있었던 걸, 나 때문에 찜찜해하고 죄의식을 느낀 만큼 덜 행복해진 것 아니었을까. 료지 씨는 공항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데 한 사람은 늙은 화가였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팬이었습니다. 노인에게서 그는 놀라운 사연을 듣게 되는데... 

한편 료지 씨의 팬을 칭한 젊은 서점 여직원은 유메코라는 이름입니다. 어려서부터 잘나고 예쁜 언니 때문에 약간은 위축되어 살았던 그녀는 어려서 할머니에게 "책에는 마법의 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은 공항 서점(이제는 퇴락한) 직원이며, 언니는 (독자의 예상과 달리 플라이트 어텐던트가 아니라) 조종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예쁘고 키 큰 여성만 보면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기는 유메코는 공항에서 나이 든 여성 두 사람을 우연히 보는데 한 사람은 배우, 한 사람은 작가였고 두 사람은 친구처럼 보였습니다.  

배우 마유리와 작가 메구미는 어려서부터 친구였습니다. 물론 미모, 인기, 집안 등 모든 면에서 마유리가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유리는 자신의 큰 키, 멋진 체형 모두에 대해 부담을 느꼈고 자그마한 메구미가 더 여성스럽다고 여겨 왔습니다. 어느날 메구미는 갈색 곱슬머리, 눈동자를 지닌 왕자님 같은 미소년(p214)에게 초콜릿을 주며 고백하려고 듭니다. 그런데 한 발 앞서 마유리가 나타나 그 기회를 뺏고 마는데... 이 일로 메구미는 마유리에게 원망을 품고 두 사람의 주변에서도 마유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만에 공항에서 그녀를 만난 메구미는 전혀 뜻밖의 이유가 그 사건에 깔렸었음을 마유리에게 듣고 비로소 알게 됩니다ㅠ 

소설의 마지막은 페리시아 사치코, 국제 셀럽이 장식합니다. 나이는 훨씬 많지만 마유리처럼 부유한 집안 출신이고(전쟁기에 다소 굴곡이 있었으나) 전생애를 화려하게 산 사치코. 이런 분들이 종종 젊은 시절에 겪곤 하는 문제가, 너무 많은 남자를 거친다는 점입니다. 그녀를 알아 본 호텔 프런트 직원을 대한 후 사치코 여사는 자신이 그 아빠도 누군지 모른 채 가졌던 아이를 떠올립니다. 저는 처음에 이분이 수수께끼의 노인 화가 그 부인인 줄 알았으나 ㅎㅎ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쇼와 시대에 심은 꽃이 레이와 시대에도 피어 있을까(p145). 일기일회(p101) 세상에는 단 한 번의 기회로 스쳐지나가듯 만나며 알고보니 그(그녀)야말로 진짜 인연이었을 수 있습니다. 짧은 생에 있어 만남과 소통이란 그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그 연을, 다른 데도 아니고 그 사람 붐비는 공항에서 만나다니... 인생은 이래서 평범한 게 하나도 없고 모든 순간이 기적이요 마법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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