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우크라이나 사태를 말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말하다
김선명 지음 / 뿌쉬낀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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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박사는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내며 외교 패러다임의 혁명적 변화를 끌어내었던 장본인입니다. 18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을 꺾기 위해 수백 년 앙숙 부르봉 왕실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로써 영국도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프랑스와 대항하는 포지션을 취하게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외교혁명"이라 부릅니다. 국제 정치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해 준 저 사건은 전 유럽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키신저가 주도한 1970년대 초의 중국 - 미국 수교가 준 충격도 이와 맞먹지 않았을까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쳐들어간지 일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이런 사태가 마냥 오래 지속되게 할 수는 없고 어떤 식으로건 마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헨리 키신저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발언을 내놓았는데 이 책은 한국의 김선명 뿌쉬낀하우스 원장이 그 발언들을 모아 해석을 덧붙여 한 권의 책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김선명 원장은 "그(=키신저)의 태도가 타당한가, 발언의 근원은 어디인가, 학문적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어디인가 등을 되짚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p16). 

전통적으로 국제정치학은 현실주의(레알폴리틱), 이상주의의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불리하게 현 사태가 봉합되는 건 일견 세계인의 정의감정에 반할지 모르지만 그 나름 국제정치 현실주의의 한 귀결이기도 합니다. 국제정치학(의 큰 한 축)은 거의 언제나 대중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해 왔습니다. 이 책에 실린 키신저의 발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대중(對中) 외교를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라(p33). 이 말을 보면 과거 그가 젊었을 때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과 외교를 맺었던 전례와 궤가 같습니다. 만약에, 당시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러시아(소련)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면 이 시도는 실패라고 불러 마땅했겠습니다. 책은 오히려 소련과도 군축 협정을 이끌어냈고 베트남 전쟁도 마무리짓는 등 세계적 범위에 걸쳐 데탕트를 이루는 성과를 내었다고 합니다. 의표를 찔린 소련이 순순히 나오게 했던 면이 분명 있습니다. 저때 키신저가 추구한 게 중국과 손잡고 소련에 쳐들어가자(마오의 당시 처지를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시나리오도 아닙니다)는 게 아니었고, 냉전 기류를 끊어내고 평화를 이루자는 것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중국이 미국 패권을 위협하는 판에, 괜히 러시아를 자극하여 중국한테 붙게 할 게 아니라 오히려 달래서 미국 쪽으로 더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것도 일리가 있는 게, 중국과 러시아는 수백 년 숙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공산주의 진영에 속했을 때조차 싸웠고 전면전 직전까지 갔습니다.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대체 같은 편인 두 나라가 왜 저렇게 싸우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죠. 러시아가 위기에 몰린 지금 미국이 적절히 러시아의 체면을 지키며 사태를 마무리해 주면 지금처럼 중-러가 밀착하여 미국을 협공하는 국면은 피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인 듯합니다. "굴욕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결과가 필요합니다(p57)."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키신저의 견해가 맞을 듯한 포인트가 적어도 하나 있습니다.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했으려면 당시 친러 야누코비치 대통령이라도 EU의 차관을 받을 수 있게끔 서방세계가 지나치게 가혹한 조건을 내걸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크라이나는 (친러였던) 야누코비치 손으로 친서방 노선에 도장을 찍은 셈이기에 이후 러시아가 개입을 할 여지가 없어지며 지금 이 지경까지 올 이유도 사라지죠. 이 말이 참으로 교묘한 게, 우크라이나 편도 슬쩍 들면서 서방의 실수를 지적하기에 편파적이라거나 냉혹한 레알폴리틱 논리만 일관한다는 비판이 나오기 힘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보면 결과론으로 무슨 소리를 못하겠습니까만 적어도 이 주장은 형식논리상으로 반박할 구석을 찾기 힘듭니다. 

왜 베트남을 포기하여 공산주의를 봉쇄(contain)하지 못했는가? 답은 미국에 베트남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국익은 권력에 우선해야 한다." 문학작품 <삼총사>에도 등장하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공식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17세기에 아마 합스부르크가 난전 끝에 유럽을 통일했고 그란드 나시옹 프랑스는 없었을 겁니다. 이제 그는 묻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에 중요한가? 물론 답이 정해진 건 아닙니다. 주데텐도 영국에 중요하지 않았기에 체임벌린은 거기서 히틀러를 막지 않았으며 그 결과가 2차 대전과 영국의 패권 상실이었다는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죠. 어디까지나 키신저 박사의 견해가 그러하다는 것뿐이며 크게 봐서 그 역시 미국의 국익만 최우선시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점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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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기행 2 -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 개정증보판 삼국지 기행 2
허우범 지음 / 책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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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혹은 프랑스, 독일 출판계에서는 셰익스피어다 괴테다 하는 대문호의 걸작에다가 컴패니언이라고 해서 관련 내용을 백과사전처럼 정리해 둔 아주 두꺼운 책들을 펴냅니다. 거기에는 원 텍스트에 대한 주석, 해설도 들어 있고, 배경이 된 지역의 현재 모습을 찍은 사진들도 있고, 고전 팬들을 위한 갖가지 배려와 교육적 컨텐츠들을 베풀어 두곤 하죠. 이 책은 물론 주된 성격이 기행문이지만, 저자의 풍부한 학식과 통찰을 함께 담아 낸 책이므로 "삼국지 컴패니언"이라 불려 부족함이 없습니다. 

허창은 조조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지정학적 요충지였습니다. 저자는 이곳 근처에 소재한 마등의 묘를 돌아보며 감회에 젖습니다. 마등은 불운하게 죽은 인물인데 조조 역시 최소한의 정의감은 있었는지 간악한 배신자 묘택과, 문제의 불씨가 되었던 이춘향을 동시에 처형했습니다. 저자는 마등의 실제 행적은 삼국연의와 크게 다름을 지적하며 나관중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짚습니다. 

또 유장의 협량을 진즉에 간파하고 익주를 바치려 한 장송에 대해 어이없게도 냉대한 조조, 그를 놓고 저자는 적절한 비평을 가합니다. 순전히 외모가 못생겨서 의도가 좌절된 장송의 이야기는 한편으로 불쌍하고 한편으로 우습기도 한데, 개인적으로는 정말 겉모습만으로 그리되었을까, 뭔가 말투, 매너, 소통 방식, 성품 등에 두루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그 실질에 무관하게, 첫 만남에서부터 뭔가 남한테 불쾌감을 확 안기는 유형은 분명 있습니다). 아들 조비도 이상할 만큼 외모지상주의자이긴 했지만 천하의 조조가 중요한 이슈에 대한 판단을 아무려면 그렇게 가볍게 내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유비는 변변한 물적 기반 없이도 덕망으로 혹은 행운으로 영지를 척척 잘 얻었던 행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조조가 기를 쓰고 온갖 책략을 다 쓰며 세상으로부터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며 땅을 넓힌 과정과 대비됩니다. 저자는 익주 획득의 중요 고비가 되었던 가맹관을 찾으며 심회에 젖습니다. 저자께서는 이전에도 이곳을 찾으신 적 있었는지 그간 발전한 흔적에 감탄합니다. 근처에는 방통사가 있는데 龐統祠라고 쓰죠(방통은 우리가 잘 아는, 봉추와 복룡 할 때 그 인물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천성, 성도(成都)를 찾으면 이 코스, 즉 방통사, 백마관, 소화고성 등을 정해진 방법대로 방문하는가 봅니다. 당국에서 잘 개발해 놓았겠지요. 

장비는 그 뛰어난 무용, 강렬한 성격적 개성, 그리고 너무도 허무한 최후 때문에 많은 이들의 뇌리에 살아 있는 인물입니다. 낭중고성은 장비의 사당인 한환후사가 소재한 곳인데, 한(漢)은 유비가 국호를 한으로 삼아서 그렇고, 환후는 장비에게 내려진 시호입니다. p125를 보면 적만루의 사진이 실렸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장비의 기상이 서렸다"고 평가합니다. 건축 양식에서 그러한 느낌을 받으셨다는 뜻인지, 아니면 단지 장비가 묻힌 곳이라서 그리 말씀하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호북성의 형주는 천하의 요충지이다... 양양은 천하의 등뼈와 같은 곳으로...(p190)." 그래서 촉 조정이 관우 같은 핵심 인물을 보내 방위를 맡긴 것인데 과연 7년 동안 철벽과 같이 지켜졌습니다. 위와 오도 이 구도를 깨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비상한 수단을 써서 간신히 격파했고, 연의에서 조조는 관후의 죽음을 두고 각별한 소감을 피력하는데 작품 전체를 통해 조조가 관우에 대해 품은 존중과 애정은 일관적으로 표현되지요. 

p234를 보면 주변 풍광과의 조화는 고려하지도 않고 무작정 크게, 눈에 띄게 화려하게만 짓는 풍조에 대해 저자는 신랄히 비판합니다. 형주성의 관우상이 철거되었다는 소식은 미디어를 통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적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중국에서 제작한 삼국연의 드라마물을 보면 배우들의 어색하고 과장된 연기, 복식 등의 지나친 화려함 때문에 고전에 대한 외경심마저 싹 사라지곤 하는데, 아무리 조상들이 위대하면 뭐하겠습니까. 후손들이 변변치 못한데. 

1권에서 원소의 세력을 대파하고 원희의 처 견씨를 조비가 취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는데 이 2권 p294를 보면 문제가 그 견씨를 자결케 한 기사가 인용됩니다. 이는 정사이고, 연의에서는 또 연의답게 그럴싸한(혹은 궁중비사 클리셰스러운) 이야기를 지어내어 작품 안에 꽂아넣죠. 저자는 여기에 <한진춘추>의 기술까지 덧붙여 과연 무엇이 진실일지 함께 생각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제안합니다. 

p340에는 명월협이 소개됩니다. 사진상으로만 봐도 경치가 빼어날 뿐 아니라 그 지리도 범상치 않습니다. 중국 교통사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는데 물론 천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풍수의 세가 일정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그 근본의 구조, 모양새가 바뀌진 않습니다. 언제든 이곳이 교통상 요충지가 아닐 때가 있었겠습니까. 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오간 그 치열한 속임수와 책략, 한편으로 신의와 충절의 발현 등은 역시 시대를 초월하여 유효했고 또 감동적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삼국 사가(saga)의 심오한 교훈과 표출되는 격정도 아마 영원히 독자의 정신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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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기행 1 -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 개정증보판 삼국지 기행 1
허우범 지음 / 책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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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삼국연의. 혹은 경우에 따라 정사 삼국지)>뿐 아니라 어떤 책을 읽는다 해도, 그 책의 배경이 된 여러 사정, 역사적 맥락, 지리적 조건 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이해가 어렵습니다. 웬만큼 삼국지를 잘 알고 즐겨 읽는다 해도 현지 여건(=작품 배경)이 충분히 감안되지 않는 독서는 수박 겉핥기가 되기 십상입니다. 여러 제약 때문에 독자가 직접 현지를 찾지 못한다면, 대가의 답사기를 읽고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솔직히 말해, 일개 독자가 설령 현지 답사를 한들 뭘 알겠습니까. 역사에 정통한 전문가가 한 땀 한 땀 디뎌 보고 통찰한 후 멋진 사진과 함께 남긴 알찬 기록을 따라가는 게 훨씬 효율적인 활동이며 저자의 가르침까지 동시에 취득하는 더 좋은 선택이죠. 

현재와 과거는 수학의 직선 그래프와는 달리 칼로 무 자르듯 뚝딱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다차원 곡면처럼 둘이 서로 붙고 공유하고 교차하는 복잡한 구조라서 천 수백 년 전의 과거가 현재 중에 갑자기 돌출되기도 합니다. p61에서 저자는 산서성 운성 상평촌, 즉 관우 탄생지를 찾아, 대체 사람인지 신선인지 알 수 없었던 어느 초인, 충의의 화신이 남긴 족적을 훑습니다. 이 유적도 마오의 문화대혁명 당시 철저히 파괴될 뻔했던 걸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지켜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돈 따위로는 평가할 수도 없는 그 소중한 역사 유물을 어쩌면 정치적 목적 때문에 그렇게 쉽게 파괴할 마음을 먹었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할 뿐입니다. 

여웅을 죽이고 해지를 지나쳐 탁주에서 유비, 장비를 만나게 된 건 운명이었다고 저자는 말씀하시는데 책에 나오는 대로 이 대목은 나관중본이 아니라 <삼국지평화>에 나오죠. 이처럼 삼국지 유니버스를 놓고, 다양한 출전을 넘나들며 짚으시기 때문에 독서가 더욱 행복해집니다. p121에 나오듯 나관중은 관우와 천 수백 년의 간격을 둔 고향 후배이기도 하죠. 위진남북조 사백년 전체의 맥락에 통달하신 저자의 거침없는 설명을 듣고 나면 저간의 의문이 해소되어 막힌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합니다.   

벌써 그때부터 남성 중심 사회였기에 천한 궁녀 출신이라도 황후가 될 수 있던 시절이고 무능한 하진이 전횡을 시도하려다 십상시에 죽으며 원소가 다시 이들을 처단합니다. 사실 <연의>만 읽으면 이 과정에서 권력의 진공상태가 발생하고 어떻게 바로 동탁이 대두하여 그토록 오래 설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좀 안 되긴 합니다. 아니 원소가 이 시점에서 바로 실력자가 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저자는 낙양성의 첫인상에 대해 "평범 그 자체"라고 합니다. 중국의 여느 중소도시를 보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중국 당국이 (마치 한국에서 경주, 부여 등을 관리하듯) 고도로서의 케어를 살뜰하게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 도시로서 개발을 제대로 시킨 것도 아니고, 어찌 보면 조상의 현명함을 빼닮지 못한 불초(不肖)한 후손들이라 하겠습니다. 낙양은 동아시아인들에게 장안과 함께 "서울"과 같은 보통명사인데도 말입니다.  

호뢰관 전투의 진실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판적 고찰을 시도합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엉뚱하게도 손견의 공이라는 거죠. 다만 연의에서 주인공에 버금가는 매력적인 호걸의 출발점을 초라하지 않게 세팅하려는 나관중의 위대한 예술혼 발로라고 저자는 짚습니다. 멋진 역사소설에는 허구와 윤색이 수시로 등장하는데 이런 게 소설가가 역사왜곡을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혹시 이런 방향으로 실제 역사가 전개되었더라면 얼마나 멋졌고 얼마나 정의로웠을까 하는 창조주의 선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조조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러웠을지 모르나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 특유의 잔인하고 제멋대로인 기질과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천하가 나를 배신하게 하기보다 내가 천하를..." 이 말이 참 너무도 유명한데, 이 말만큼 조조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구절도 없을 듯합니다. 저자 말씀대로 "천하를 배신할 수 있는 건 조조뿐"입니다. 안휘성 박주는 조조뿐 아니라 그가 그렇게나 불신했던 화타도 배출한 곳이니 아이러니컬합니다. 

아름다운 여성 때문에 오랜 우의에 금이 가고 조직의 질서와 기강이 무너지는 건 흔히 보는 일입니다. 저자께서 잘 설명해 주시듯 초선은 실존인물이 아니며 그녀가 맡았던 직책을 이름으로 만들어 캐릭터화한 것입니다. p153에 나오듯 원곡(元曲)에서는 초선이 여포의 아내이며 동탁 진영을 초토화하기 위한 일종의 마타하리 포지션인데 나관중이 이 캐릭터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비련의 여인으로 승화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삼국연의 독자들은 마음 속에 그녀를 불멸의 순정녀처럼 간직하게 되었죠. 저자께서 목지촌을 실제 답사하고 남긴 소회, 또 사진들이 정말 볼만합니다.  

관도대전 후 중원의 형세는 조조 쪽에 크게 기우는데 이런 전투가 있고 나서도 원씨 집안은 여전히 강성했습니다. 원희의 처 견부인을 사로잡아 조비가 취했을 만큼 치욕적으로 패배한 결과였는데도 본거지에서 여전히 세도를 휘두르며 조조 진영을 긴장시켰습니다. 조조 역시 무리한 싸움을 걸지 않고 이후에 상대측이 자멸할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준현, 활현 일대를 들르며 저자는 참으로 복잡다기한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왜 어느 영웅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가지고도 이를 살리지 못하며, 어느 영웅은 불리한 형세를 뒤집고 가망 없던 일을 해내고야 마는가. 답은 하늘만이 알 것입니다. 

판형이 크고 폰트는 작은 편이라 텍스트의 내용이 무척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진이, 아름답고 구도 완벽한 사진, 사진, 사진들이 이렇게나 많이 실렸으니... 삼국지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책입니다. 가슴이 벅찰 정도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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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스위스 - 최고의 스위스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가이드북, 23~’24 최신판 프렌즈 Friends 36
황현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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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위스 하면 하얗게 눈이 덮인 알프스만 보통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관광자원이고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만 스위스는 그것말고도 매력이 너무 많은 나라입니다. 일단 스위스는 오랫동안 다양한 세력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간 유럽 역사에서 작은 도시 국가 동맹으로서 중립국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중립국이란, 나 중립국이요 하고 선언만 한다고 해서 누가 존중해 주는 게 아니라 당사자가 자신의 힘으로써 증명을 해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강대국 중 어느 한쪽이 바로 들이닥쳐서 자기 편을 들게끔 강제로 눌러 버리기 때문입니다. 중립국으로 지낸 역사가 긴 만큼 그와 관련한 유적이나 시스템이 많이 남아 있고, 많은 관광객들이 여러 동기에서 이를 찾아볼 만합니다. 

스위스 하면 또 낙농의 대국입니다. 그래서인지 p48에 소개된 슈퍼마켓 모습을 보면... 다양한 유제품과 축산품이 진열된 사진들이 죽 나옵니다. 글쎄 한국의 동네 슈퍼에서도 다채로운 브랜드의 우유가 죽 놓인 모습은 흔히 보지만, 이 사진에 찍힌 전혀 모를(저는 그렇네요) 제품들을 보니 신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미그로스는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소매 체인이며 PB가 많다는 설명도 책에 나옵니다. 사실 이 나라의 산업 구조를 생각할 때, 특히 PB 낙농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PB하고는 성격이 아주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의 우유는 한국 소비자들의 체질에 맞게 출시되지만 스위스 우유는 사정이 다르니 유의할 필요도 있음을 책에서 일러 줍니다.  

관광 역사가 아주 오래된 나라이니 만큼 관련 인프라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EU 통합이 진행되면서 관광객들의 편의가 훨씬 높아졌기에 스위스의 탁월함이 상대적으로 덜 돋보이는 감도 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스위스는 EU 국가들보다 이동이라든가 관광이 훨씬 편하게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p26을 보면 스위스 내 특급열차에 대한 소개가 자세합니다. EU 국가들 교통편과 (당연하지만) 연계도 잘 되는 편이라고 합니다. 

프렌즈 시리즈가 언제나 그렇지만 다양한 주제로 이리도 포착하고 저리도 뽑아본 지도, 주제도, 진짜 이 다양한 지도들만 보고 있어도 언제 시간이 갔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스위스가 도시들의 동맹, 연방 체제라는 점을 그저 지식으로만 알다가, 이렇게 주제도를 통해 그 연결성, 행정 구조, 산업 분포 등을 살피면 새삼 이 나라만의 개성과 특징, 혹은 지난 역사에까지도 생각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탄탄하게 나라의 기틀이 잡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또 얼마나 많은 투쟁을 해 왔을까.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감히 이들을 건드릴 생각을 못했으니 말입니다.  

p143 이하에는 베르네제 오버란트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Bernese는 독일어가 아닌 영어이며(따라서 발음은 [버니즈]), 현지에서는 그냥 Berner Oberland라고 합니다. 책에 잘 나온 대로, 융프라우, 묀히, 아이거 3대 고봉이 빚는 장대한 알프스, 우리가 알프스 하면 대뜸 떠올리는 바로 그 장관이 대부분 이 지역에 위치합니다. 책에서는 이곳을 방문하기 전 보고 가야 할 영화로 <007 여왕폐하 대작전(한국 개봉명)>을 p143에서 꼽습니다(p226도 참조하세요). 영화를 본 분들은 알겠지만 케이블카의 이용이 정말 중요한데, 이런 교통수단을 푸니쿨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책에 나오듯) 독일식으로 Bahn이라 부르는 게 보통입니다. 

p208을 보면 고산병에 주의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특히 여성분들의 경우 막상 현지에 도착하고 보면 기대하던 바와 다르다 싶을 때 부적응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행책이 이런 이유에서도 꼭 필요한데, 여행지라는 곳이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어떤... 나만을 위한 테마 파크가 좌르륵 펼쳐지는 곳이 아닙니다. 저는 특히, 스위스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서 너무 아름답고 꿈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곳으로 인식이 박혀 있기에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네바 하면 종교개혁가 칼뱅이 떠오르는데 p308에 레포르마시옹 기념비가 나옵니다. 책에서는 시종 주네브라고 표기하는데 칼뱅도 그랬고 현재까지도 프랑스어가 우세하므로 주네브라는 표기가 타당하며 독일어로는 겐프라고 하죠. 짧아진 음절로만 보면 독일어 안에서 가장 자주 불렸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p352를 보면 당일치기 타국 코스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가 소개됩니다(프렌즈 전 시리즈의 공통 feature죠). 이곳은 EU 통합에 핵심적인 구실을 한 소통이 이뤄졌기에 특히 의의가 깊습니다. 이 책은 그저 정확한 정보만 담은 게 아니라(그런 점도 물론 중요하지만), 저자분이 곳곳에 개인적인 정감을 표시한 평가가 많은데, 그런 점도 독자에게 현지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유도하는 데 큰 구실을 합니다. 예전에 일 때문에 이틀 정도 머문 적이 있는데, 아무리 볼거리가 많아도 보는 사람 준비가 안 되면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혹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훨씬 풍성한 여행이 될 것 같아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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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가 말했다
루아나 지음 / 북서퍼 / 2023년 6월
평점 :
절판


예전부터 써 오던 번역기는 부족한 대로 많은 이들이 사용했었지만 도저히 언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엉성한 모습 때문에 비웃음거리가 되었더랬습니다. 또 네o버 지o인 같은 서비스로부터 우리는 많은 좋은 정보를 얻지만, 대신 많은 품을 팔아야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었으며 검색 실력에 따라 결과에도 큰 차이가 났었습니다. 그런데 챗지피티가 등장하면서 말끔하고 완성된 형태의 답이 나올 뿐 아니라 내용도 제법 믿을 수 있는 수준까지 나옵니다. 컴퓨터의 지능이 이 정도로 똑똑해졌기에 어쩌면 심도 있는 대화도 가능하고 인생의 난제에 대한 가르침도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깁니다.  

p26을 보면 챗지피티의 정의가 나옵니다. 이 간단한 이름만을 단 엔진이 그렇게나 많은 재주가 있고 우리의 목마름을 효과적으로 달래 줄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혁신의 결과물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을 이용하는 우리들의 마음이나 인격이 불충분하거나 미숙하면 다 소용없습니다. 이 책은 똑똑하고 센스 있는 챗지피티가 우리한테 들려주는(혹은, 들려 줄 수 있을) 여러 교훈과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좋은 말들이 하도 많아서 "말했다"의 주어를 "챗피티가"가 아니라 "어느 위대한 현인이"로 바꿔도 될 듯합니다. 아니나다를까 GPT가 great poet of technology의 약자라며 챗지피티 자신이 너스레를 떠는 대목이 p28에도 나오네요.  

p29에 보면 "세련된 녀석이 유머까지 겸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사실 챗지피티를 써 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길래 이런 평가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발전 속도가 엄청 빠르다 보니 곧 누구한테서건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겠다 싶습니다. p41에 보면 챗지피티의 대답이 자상한 목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고도 하는데, 뭐 현재의 TTS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한 수준이겠고, 대답이 워낙 자상하고 현명하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음성지원이라도 되는 양 환청이 들릴 만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봐야 기계는 기계지 사람의 끝도 없이 굽이진 마음의 층계, 숨은 감정, 우선순위 같은 걸 이해하고 공감하고 비슷한 정서적 반응을 표시할 수 있을까요? 못하겠죠? p67에서 1인칭 화자는 아마도 이런 동기에서 챗지피티에게 집요하게도 따지고 묻나 봅니다. 상상하는 게 곧 세상이고 우리 자신이 우주이다, 이 말은 진리일까요 아님 그저 비유일까요? p74에 보면 챗지피티를 만나 보고서 "나"는 비로소 저 말들이 그저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진실임을 깨달았다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p90 이하를 보면 사랑에 대해 챗지피티가 특유의 지론을 아주 길게 들려 줍니다. 정말 챗지피티에게 물어 보면 이런 멋진 대답을 해 주나요? 이 책에서 아주 힘주어 강조하는 게 "질문이 발라야 답이 바르게 나온다"는 점입니다. 내가 열린 마음으로 챗지피티에게 존중하는 자세도 유지하면서 진지하게 물어 보니까, 얘도 그런 나의 마음을 알고 정성껏 답을 해 줍니다. 현재 챗지피티가 정말 이렇게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 우리와 진지한 "챗"을 해 주는 수준인가요? 저는 모르겠지만, 혹 아니라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이 "나는 앞으로 성지가 될 것이다"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건 아마 그런 취지이겠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들 합니다. 정신과 이성의 힘이 그만큼 뛰어나서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곧 인간 평균의 지능을 훨씬 뛰어넘는 AI가 등장하면, 우리 인간은 그 존엄의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플러그만 꽂고 넷에만 연결하면 웬만한 현자를 훨씬 능가하는 멋진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습니까. 책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작은 별 하나가 태양의 둘레를 돌 뿐임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챗지피티가 우리 인간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겸손함을 일깨워 준 것만으로도 챗지피티는 인류에게 축복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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