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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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특히 한국인이 사랑하는 author입니다. 그의 초기작 <개미>부터 해서 <타나토노트> 등등 프랑스 문단이 널리 알아보기 이전부터 우리 한국 독자들은 그의 작품 세계를 사랑해 왔습니다. 번역이라는 과정을 한 번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은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며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신선한 영감을 선사했었습니다. 타고난 재능의 몫이 크겠으나, 과연 그는 어떤 소재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으며, 유려한 문장은 어떻게 생산해 내는지 우리 평범한 독자들도 궁금합니다. 그가 자신의 글쓰기 비법(?)에 대해 처음으로 한 꺼풀 열어 보인 이 에세이집은 자전적 스토리도 담겼기에 더 궁금했었고, 다 읽고 나서는 그의 정신 세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궁금함이 풀려서 좋았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항상 민머리에 호기심 가득한 젊은 얼굴이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되어서, 예를 들어 이 책 p104에 나오듯 "1979년에 법학 과목을 재수강..." 같은 말을 읽으면 '엥? 그때 대학을 다녔다고?' 같은 놀라움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개미> 같은 게 얼마나 오래된 작품이고 또 바로 이 출판사 열린책들 초창기에 나온 줄 잘 알면서도 그가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분이라는 게 새삼 놀라웠습니다. 우리 나라 정치인 주류는 1980년대 학번인 점을 같이 떠올려 보십시오. 아무튼 이 대목에서 베르베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극우 대학생들의 등쌀에 시달린 기억"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도(더군다나 1970년대에) 대학가에 원 극우가 다 있었나 싶었습니다(지금이면 그러려니 합니다). 참고로 1968년 5월에 "그 일"이 있었고, 1980년대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처음으로 사회당 출신으로 대통령으로 재임한 시기라서 북한과 수교를 하니 마니 말이 나왔었습니다(장마리 르펜은 아직 존재가 미미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그런 나라지요. 

베르베르의 문학 세계와 법학이라니 일견 잘 연결이 안 되는 듯도 하지만 그의 논리적이고 치밀한 문장 구조와 체계를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다만 법 과목의 특성상 암기가 많고, 베르나르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이에 거부감이 들었으리라 짐작이 쉬이 되며, 그가 주력을 둔 분야는 범죄 수사 쪽이었다고 합니다. 은근히 미스테리 한 자락을 깔다가 나중에 "진상"을 밝히기도 하는 그의 스타일이 아마 이시기에 배양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수님 말씀이 걸작입니다. "우리의 분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게, 허점이 많아서 검거된 자들만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정말 연구 대상인 자들은 지금도 대로를 활보하고 있죠." 과연 그렇긴 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나르 작가의 못말리는 호기심은 사진 한 장을 찍으려고 개미굴에 들어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p142)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만약 이때 사고가 나기라도 했다면, 아마 세월이 흘러도 비슷한 직품이 나오기 어려웠을 <개미>라는 걸작은 우리가 접하지 못했겠죠. 또 개미들도 인간 사이에 많은 친구들을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그 명작이 얼마나, 우리 인간과 개미를 친하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사람과 (개미 같은) 동물 사이가 종전보다 더 친해질 수는 있어도 사람 사는 사회에서 정치적 진영 간의 대립은 영원히 해소되기 어려운 듯합니다. 이 책을 보면 베르베르가 지역 신문 기자로 근무할 때 취재한 참사 하나가, 지역 정계에서 대립상을 보이던 정파 간 비협조 끝에 벌어진 일종의 인재(人災)였다는 점이 술회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사실 우리 나라에서도 벌어지기 힘든 성격인데,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는 습관"을 아쉬워하는 인용구가 눈에 띕니다. 길을 건널 때에야 조심하는 습관이 바람직하지만, 모두의 이익을 위한 정책의 방향에 대해서는 "좌고우면" 성향이 아주 해롭기 때문이죠.  

이 책에는 제라르 암잘라그, 즉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형(책에는 형이라고 나오는데 제가 알기로는 동생입니다)이 자주 언급되네요. 이분도 유명한 생물학자이며 프랑스 학계에서 권위자로 통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오래전 생물학자 라마르크(역시 프랑스 사람이었습니다)의 용불용설을 지지하는 특이한 스탠스인데 책에도 잘 나오지만 용불용설은 당시에도 최근에도 비웃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한국의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서도 "잘못된 학설"의 대표적 예로 실릴 정도죠. 그런데 의외로, 중학교 생물 선생님들 중 깊이 있게 공부를 하신 분들은 (입시 경향과는 무관하게) 이 학설을 마냥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획득 형질은 근래 제한적으로나마 유전에 관여된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도 했고, 방향이 좀 다르긴 하나 후성유전학이라는 분야도 최근에 주목받고 있죠. 언젠가는 멋진 역전 홈런이 터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자연과학이라고 해서 "절대"란 건 없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스스로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p371)" 작가뿐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짜깁기가 아닌) 무엇인가를 만드는 예술가들은 모두가 작은 신들이며 그들에게 부여된 군주의 기상(헤겔의 표현입니다)은 모두 창조주만이 느끼고 누리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신들은 각기 자신만의 아쉬움이나 애로사항이 있었습니다. 그 난관을 딛고 일어서며 오히려 자신만의 강점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베르베르는 이 점을 특히 강조합니다. 한 분야에서 대성하려면, 확실히 껍질이 째지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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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만에 끝내는 해커스 OPIc 오픽 (Advanced 공략) - 한 권으로 오픽 IH/AL 달성, 최신 오픽 서베이 항목 반영! [무료 온라인 실전모의고사 + 교재 MP3 + 주제별 답변 아이디어&표현 사전]
해커스 오픽연구소 지음 / (주)해커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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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오픽은 타 언어 말하기 시험과 난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돌발질문 출제 빈도에서도 그렇고, 레귤러한 정형 질문들에 대한 답들도 워낙 다른 수험생들이 잘들 하기 때문에 IH, AL 따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말하기 시험, 혹은 그 어떤 공인어학시험이라도 마찬가지지만, 평소의 자연스럽고 빼어난 실력으로 응시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워낙 경쟁이 치열하고 시험 고수들이 많기 때문에, 자연 고수들이라고 해도 시험장에 일단 가면 시험의 달인들에게 기가 눌립니다. 따라서 너무 자기 실력만 믿지 말고 정평이 난 교재를 따로 공부하여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직 실력이 일천한 수험생이라면 더더군다나 이렇게 콕 짚어주는 교재를 갖고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레귤러하게 출제되는 주제는 크게 일곱 파트로 나뉘어 정리되었습니다. 학생, 직장인, 거주지, 여가 활동, 취미나 관심사, 운동, 휴가(출장) 등인데, 역시 최근 오픽 출제 경향에 맞춰 깔끔하게, 빠짐 없이 잘 뽑힌 템플릿 모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출제되었기에 많은 수험생들이 잘 준비되었다고 여기기 쉽지만, 제가 책을 보니 현장에서 이런 질문이 불쑥 던져지면 당황할 만한 문제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이런 통상적인 출제 주제들도, 따지고 보면 그리 통상적이지 않고 돌발성을 제법 띤다는 뜻입니다. 최근 오픽이 그만큼 새롭고 수험생의 의표를 찌르게끔 출제된다는 뜻입니다. 

취미나 관심사 파트를 보면 이 역시도 영화 관람, 공원 가기, 해변/캠핑 가기, 스포츠 관람, 쇼핑하기, 리얼리티쇼 시청하기, 커피전문점 가기, 소셜미디어에 글 올리기 등 여덟 가지 주제로 다시 나누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파트가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최신 출제 경향을 잘 반영했을 뿐 아니라 "이런 주제도 오픽에 나올 수 있구나" 싶은 참신한 대화 패턴, 템플릿들이 많았습니다. 너무도 판에 박힌 시험용 기계적인 질문과 대답이 아니라, 대화하는 이들에게서 그 삶의 여유가 느껴지는 근사한 표현들도 보여서 공인어학시험이 이처럼이나 수준이 높아졌구나 싶었네요. 또, 이제는 이런 표현을 써야 점수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p101을 보면 응시자의 나라에서 어떤 스포츠를 좋아하는지, 관전은 TV 시청과 직관(watch in person) 중 어느 것을 선호하는지 등을 묻습니다. 모범 답변이 밑에 나오는데, 아무래도 주제가 캐주얼하다 보니 이런 주제에 잘 어울리는 답변 표현, It goes without saying 같은 어구를 넣어 줘서 잘 어울리는 문장(답변)이라는 취지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표현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지만 뭔가 대화를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 효과가 분명 있습니다. 

대체로, 오픽에서 질문 자체를 못 알아듣는 어려운 문장은 없습니다(장래에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분명한 발음으로, 적절한 어휘와 구절을 써서, 답변 취지에 맞는 답변을 내놓아야 하는 게 포인트입니다. 커피 전문점에 가면 어떤 메뉴를 주로 즐기느냐,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행위에 대해 내가 부여하는 의의는 무엇이냐, 이런 답까지도 자유자재로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빈출 주제 학습 파트는 페이지 페이지가 참 빼곡하게 채워졌습니다. 그만큼 수험생 입장에서 공부해야 할 내용이 많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mp3 음원은 해커스인강 사이트에 가서, 회원가입 후 토스/오픽 코너에 가서 클라라쌤 이름으로 필터링한 후 나오는 "10일만에 끝내는~" 컨텐츠를 다운받아야 하는데, 폰 환경이라면 전용 앱을 따로 깔아야 합니다. 해커스는 이게 좀 불편하다면 불편한 점입니다. 음원 다운 받은 후에 이걸 듣기평가처럼 활용해서는 안 되며, 말하기 시험 준비인 만큼 따라서 계속 말해 보고 크게 소리내어 반복하되 생각도 적극적으로 템플릿의 흐름을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교재는 또 돌발질문 코너가 잘 정리되었는데 말 그대로 돌발인 만큼 이 교재만 공부한다고 대비가 100% 되는 건 아니지만 감각을 익히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어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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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말 - 작고 - 외롭고 - 빛나는
박애희 지음 / 열림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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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워즈워스의 말이, 이 책을 읽고서 새삼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도 "어린이들은 알까. 자신들을 때때로 어른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이런 행동, 저런 말들이 때때로, 아니 매우 자주, 어른들에게 큰 가르침이 되고 귀감이 된다는 점을 이 책을 읽고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햇빛과 자유, 좋아하는 꽃 한 송이는 있어야 한다.(p37)" 이 말은 안데르센이 했다고 하는데, 마음 속에 큰 화원을 가꾸며 살았던 그에게뿐 아니라 우리들의 인생에도 고루 적용되는 훌륭한 격언입니다. 저자는 이 말로부터 중요한 이치 하나를 이끌어내는데 바로 "자신과 잘 놀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 전에 이 방법을 잊었는데,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고, 혹은 아이들이 무엇에 몰입하는 방식에 참여하며, 그 잊었던 무엇을 다시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아이들은 다시 어른들의 스승이 됩니다.  

삐삐를 부르는 산울림 소리~♬ 삐삐를 부르는 화난 목소리~ 저자께서는 잉거 닐슨이라는 배우에 대해 삐삐 캐릭터와 찰떡이었다고 평가하시는데, 이후에도 여러 번 다르게 실사화되긴 했으나 당시만 해도 그 버전 외에 다른 해석을 보지 못한 이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원작 소설을 다시 읽어 볼 때 더 눈에 잘 들어왔던 대목이, 삐삐가 "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바로 지금!" 이라고 말할 때라고 합니다(어렸을 때는 재력과 다른 능력들을 발휘해서 갖은 난감한 상황을 극복하는 대목). 삐삐는 아마 백 살이 되어도 저 말을 할 것이라는 게 저자의 말인데 그만큼 이 캐릭터가 저자님한테 끼친 영향이 커서인 듯합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입니다. 그때 아이들이 지닌 무기가 바로 상상력의 발휘입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빨간머리앤을 인용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사실 해당 작품을 읽은지가 너무 오래되어 구체적으로 어떤 포인트를 말씀하시는지가 바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여튼 빨간머리앤도 그렇고 삐삐도 그렇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엄두도 못 낼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곤 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내게 주어진 물리적 수단만으로는 극복 못 할 어려움 투성이입니다. 상상력, 혹은 던져진 차원 그 뒤에 숨겨진 갖가지 돌파구를 찾아내려면 우리는 상상력에 기대어야만 합니다. 어른에게 주어진 난제를 푸는 방법도 결국은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use your imagination! 

"아흔아홉가지 해야할 일을 제쳐두고 내가 좋아하는 일 한 가지에 목숨을 걸 줄 아는 아이(p218)." 어른이 되어서 만약 이런 선택을 한다면 그는 아마 실직하기나 딱 좋을, 생계에의 위험이 닥쳐오는 상황에 직면할 것입니다. 어린이에게니까 이런 낭만이 가능하겠는데, 사실 어른들도 가끔은 이런 탈출구가 필요합니다. 너무 정해진 틀과 궤도에서만 운행하면 사회의 모범생도 질식하여 탈선합니다. 반대로 상상력이라는 엔진오일을 가끔은 주입해 줘야 본연의 성능이 제대로 발동되는 법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기질을 타고 납니다. p245에서 저자는 조마구라는 캐릭터를 거론하는데 저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습니다. 어른한테 참 당돌하게도 말대꾸하는데 우리 어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아이들은 감성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독립된, 또 어른과 대등한 영혼들이라는 점입니다. 조마구는 되바라지거나 싸x지가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은 모든 어린이들이 저렇게 자라야 하며 우리들 어른들도 저런 과정을 거치는 게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못 해 봤다고 자라나는 세대들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못난 생각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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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4
소스타인 베블런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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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번역가 이종인 선생이 옮긴,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의 유명한 고전입니다. 경제학 분야에서의 고전이, 유머러스한 필치와 날카로운 풍자, 백여년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 진단 등의 덕분에 여전히 대중에게 널리 읽히며 사랑받는 예도 참 드물 것 같습니다. 

p42에도 나오지만 베블렌은 정작 유한계급에 대한 반감을 고취하거나 대대적인 사회 변혁을 시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역자 이종인 선생은 주석을 통해 "그런 언명이, 저자 자신의 비판적 태도를 모두 감추어 주는 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도 동의하지만, 사실 베블렌은 그 자신이 당대의 유한계급에 대해 딱히 적대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물론 상당수의 이름난 혁명가들이, 그 출신 성분상 혁명가가 될 이유가 없긴 했습니다만)이었고 실제 드러낸 행적도 그러했습니다. 언제나 시니컬하고 루크웜한 기질이었다고 하죠. 이 책도 마치 동물학자가 동물의 행태를 관철하듯, 냉정하고 중립적이며 메타적인 문체로 쓰였습니다.  

사실 invidious라는 단어에는 이 책에서처럼 "차별적인"이란 뜻도 있지만, 그 안에는 뭔가 "질투심에서 비롯한"의 뉘앙스가 깃들었습니다. 유한계급이 노동계급(혹은 그 외 취약 계층)을 차별적으로 볼 수는 있어도, 유한계급이 외부의 다른 누군가에 의해 차별적으로 파악된다는 건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p59에서 보듯 베블렌은 "노동 계급에 속하면서도 스스로를 유한계급 취미를 가진 (기만적 성향)자를 snob라 규정"하는 쪽에 속합니다. 막연한 선입견으로는 베블렌이 "충분한 교양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이를 가장하고 과시하는 졸부 출신 유한계급"을 비판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런 점만 봐도 베블렌은 확고한, 또 독립된 개인 스탠스에서 기이한 사회 현상을 분석했을 뿐 어떤 이념적 지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며칠 전 박범신 산문집을 리뷰했는데 그 책에서 작가는 과거 자신이 창작한 <소금>의 주인공을 예로 들며 개인에게 정신없이 지나친 소비 드라이브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탐욕적 자본주의를 비판한 적 있습니다. 황새의 소비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아파지는 뱁새의 처량한 처지는 이 책 p95에서도 지적됩니다. 사실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는 흔히 착각하듯 유한계급만의 행태가 아니며 중산층, 서민들 역시 복장이나 스타일, 차량 등으로 어느 정도 과시를 해 줘야 자신이 무시당할 만한 위치가 아님을 사회에 알릴 수 있습니다. 이걸 못 해 주면 자신의 카스트(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은 계급)에서 바로 축출된다고 베블렌은 서술합니다.  

미감(p134)이란 이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어떤 바보는 예쁘지 않은 얼굴도 성형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신이 나서 떠들었으나 한국에서 이만큼이나 기술이 발전하자 이미 빤히 패턴이 잡힌 성형은 대번에 성괴, 강남미인도라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했으며 심지어 술집에서조차 인기가 없습니다. 반려동물의 양육에도 이 기준이 큰 영향을 끼치는데 어떤 동물의 경우 "쓸모없음"조차 하나의 큰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과시적 소비의 핵심은 "나는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을 이처럼이나 소비한다"는 메시지의 전달에 있습니다. 

유한계급의 병적인 과시적 소비는 특히 19세기 미국에서 횡행했는데 JP 모건 주니어의 "요트 가격을 물어보는 자는 이미 그것을 살 자격이 없는 자"라는 말이라든지, 철도왕 코널리어스 밴더빌트가 "Public be damned.(와전이라는 설도 유력합니다)"라고 했다든지 하는 사례가 있죠. p194에 보면 특히 베블렌은 미국 주류 백인들의 야만적 사냥성향을 지적하며 북미 원주민들의 비참한 운명을 거론하는데 역자 이종인 선생은 여기서도 베블렌 특유의 비판정신이 드러난다고 분석합니다. p231에는 약탈적 야만인과 (이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평화로운 야만인의 구분도 있는데 이 역시 모두까기식 냉소입니다. 

유한계급을 무작정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유한취미를 이어가기 위해 기업 경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위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산업 발달에 이바지한다는 말도 p206에 나옵니다. 역자 이종인 선생은 이 역시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고 정리하는데 사실 이 문장은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전문경영인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있으므로 이른바 대리인의 딜레마가 생기는데 이 문제는 아직 이론상으로나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베블렌은 심지어 책 후반부에서 종교 담론까지 논의를 이어가는데 신인동형론적 종교가 약탈적 행태를 정당화하고 계급 서열의 항구화를 조장하며 적자 생존의 양상을 자연의 섭리로까지 끌어올리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 결론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의 인식과 문명의 발전은 자신과 동류집단의 행태를 그저 당연시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 객관화하는 노력 중에 이뤄진다는 점을 다시 새길 필요는 있습니다. 베블렌의 다분히 현학적이고 유머러스한 이 책에서 그 정도 교훈만 얻어도 충분히 문명인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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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 - 도가사상의 정수
열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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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는 노자의 손제자 격으로, 도가의 큰 맥을 이은 공적이 크며 동시에 그만의 독특한 사상 색채를 덧붙여 이 사상의 거대한 집에 풍성한 미를 가중한 인물입니다. 도가 사상을 논함에 있어 열자를 빼놓고서야 그 정확한 계보를 논할 수 없고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없습니다. 중국 학계의 최신 동향을 언제나 자신의 저서에 반영하여 한국 독자들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던 고 신동준 박사의 번역입니다. 신 박사의 번역서가 언제나 그렇듯 한자 원문이 함께 실렸습니다. 

고서 중에는 과연 누구의 저작인지 명확지 않은 책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p74의 黃帝書의 경우 이름이 저렇게 되어 있으니 그 전설상의 황제가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실존성을 크게 믿을 수 없죠. 黃帝帛書, 黃帝四經(더 넓은 범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에 대해 청대 고증학자 惠棟은 그 저자가 老子라고 비정했습니다(같은 페이지 역주). 신 박사는 그 근거에 대해 예로부터 노자 사상의 동의어 중 하나가 "황로학"이었음을 듭니다. 다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저자 명의를 바로 추단하기란 좀 무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혜동은 황종희 고염무 등이 다진 고증학 초창기 2세대쯤 되는 학자입니다. 

노장사상 중 특히 열자의 학문만을 따로 떼어 열학(列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연, 이세민이 당 통일 제국을 만든 후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노자가 추숭되었는데, 열학도 따로 존중된 이유는 이분의 학문 세계가 특히 현실 정치에 응용될 여지가 많아서라고 합니다. 신 박사는 노장 사상이 내내 유학과 쌍벽을 이뤘으나 한번도 유가를 압도하지 못한 이유로 曺魏 시대의 왕필(王弼)이 지나치게 장학(莊學)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해석한 탓이라고 지적합니다. 왕필 이후로 도가 사상은 치평을 위한 면모는 사라지고 오로지 개인 양생(養生)을 위한 현실도피, 은둔자의 사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게 신 박사의 견해입니다. 다시 말해, 도가가 노장 사상이 아니라 노열 사상이 되었더라면 중국 역사는 유-도 양가의 팽팽한 긴장 하에 사상적으로 더욱 풍성한 기반을 갖고 다채롭게 발전했으리라는 결론도 도출 가능합니다. 

열자는 노자를 직접 사사하지 못했으니 과연 사상의 진수를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관윤자(關尹子. p108의 역주에 그 이름에 대한 자세한 설명 나옴)라고도 하고, 같은 鄭나라 사람인 호구자림(壺丘子林. 특히 이 책 p73 같은 곳. p105에만 호구자립이라고 오타 있음. p127도 참조)이라고도 합니다. 관윤자는 책 이름이기도 하고 저자인 윤희를 높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예 관윤자를 천 수백 년 후 오대 시절의 위서로 보는 입장까지 있지만 노자, 열자에 대해서는 그 실존성이 의심받지는 않는 게 보통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열자의 경우 생전 인정을 못 받고 거의 평생을 포의로 떠돌던 인물임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예전에 윤재근 한양대 교수가 쓴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가 큰 인기를 끈 적 있는데 <장자> 원전 자체가 재미있는 우화로 가득한 경전이기도 하지만 내용 중에 사정없이 공자를 조롱하는 대목들이 많아 아마 대중이 카타르시스를 느껴서인 이유도 있겠습니다. p85를 보면 신 박사는 "열자는 장자와 달리 공자를 희화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역시 현실정치를 고민했던 입장에서 마냥 유가에 경멸적 시선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이겠습니다. p126에서 신 박사는 "열자가 이 대목에서 사실상 공자를 도가의 인물로 보고 있다"고 단정합니다. 

p93에는 그 유명한 기우(杞憂)의 유래가 나오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바보스러움을 비웃고자 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황류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는지에 대해 명쾌한 논파를 열자가 결론부에서 가하고 있는 데에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신 박사는 나아가 과연 그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 근거 없는 걱정인지도 한번 현대물리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분석해 보자고 합니다. p124에는 우리가 어렸을 때 학습지에서 읽었던 해상지인과 갈매기의 이야기가 나오네요. p142에는 조삼모사의 고사가 등장하니 다른 건 몰라도 이 대목이 그 고사의 원전이라는 점 명심하여 읽어 볼 만합니다. 

주관적 관념론자 조지 버클리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의 논변으로 유명합니다. 이 책 p77을 보면 "성자(聲者)는 외물에 의해 소리를 내기에 귀에 들리지만 성성자(聲聲者)는 일찍이 소리를 낸 적이 없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한자는 아마도 虛일 것입니다. 이는 無와는 다르다고 역자 신 박사는 강조하며, 사물과 자연의 본성에 따라 억지스럽거나 무엇에 부딪힘 없이 일을 현실 속에서 무난히, 근본을 응시하며 추진해 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취지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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