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천리안 - 정경부인 장님 고성이씨
성지혜 지음 / 문이당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로부터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고 자녀 교육을 훌륭히 시켜서 국가를 영도할 동량지재로 만드는 거록한 어머니들은 우리 역사에 아주 드물지는 않게 계셔 왔습니다. 한국 특유의, 교육을 중시하는 풍조라는 게,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면면히 이어져 왔고, 이것이 종종 기적을 일궈 냈던 것입니다. 실제로 명문가에서는 이런 훌륭한 부인들을 두고 그 일생을 현창하는 행장 같은 기록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현재 가세가 크게 번창한 어느 달성 서씨 가문을, 결정적인 순간에 크게 일으킨 정경부인 고성 이씨를 주인공으로 삼은, 일종의 논픽션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의 추천사를 쓰신 서지문 고대 명예교수의 경우 바로 주인공인 고성 이씨 부인의 후손이며, 집안에서 이 여걸의 노고와 활약 덕분에 후손들의 이런 빛나는 현재가 있음을 누누이 교육 받고 자라나셨다고 회고합니다. 정경부인은 과거에 여성분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사실 "중시조"라는 건 한 성씨의 시조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에게 부여되는, 후손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극상 단계의 숭앙 형태인데, 여성을 두고는 중시조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해당 대구 서씨 가문에서 이 부인의 위상이야말로 중시조의 그것에 버금가지 않을까 감히 가늠해 볼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고성 부인의 엄청난 활약과 덕망은, 제3자의 눈으로도 탁월하였습니다. 경남 고성은 타 지역 분들에게는 이름이 낯설 수 있으나 인구 대비 명문대 합격률이 엄청나게 높은, 수재의 본향으로 유명합니다. 고성 이씨 자체도 명문가로서의 족적이 고려시대까지 거술러올라가는 평판 높은 집안입니다. 이런 집안에서는 혼사를 올릴 때도 가격(家格)이 맞는 상대끼리 사돈 관계를 맺지 않겠습니까. 

제비집이 약초로 쓰이는 이유를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잘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로 여러 경우에 특효를 낸다고 들어서 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p75에 보면 이 제비집의 경우 특별한 귀품이며 황제에게도 바친 진상품이라는 서술이 있습니다. 지금 이 대목에서 아가씨 경이 눈이 안 보여 고생하는 대목은, 아직 이분이 어린 나이이기에 (이후 성장하여 어떤 위인이 되시고 안 되시고에 무관하게) 독자로부터 큰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의원의 말씀 중에 소심 공포증이라는 진단이 있는데 요즘은 이 말을 쓰는 분이 좀 드물어진 듯도 합니다. 확실히 어휘라는 게 특정 세대 특정 지역에서 유독 선호되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앞에서 명나라 황제가 언급이 되었는데 명종 연간에 경술년이라고 하면 1550년입니다. 이때 재위한 명의 황제가 경태제(景泰帝)이며 묘호가 세종(世宗)입니다. 그러니 p90에서 작가님이 세종이라고 하신 게 정확하며 이처럼 디테일에서까지 정확하기 때문에 제가 논픽션에 가깝다고 한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이고는 벗 이황(경칭은 생략하겠습니다)을 찾아나서는데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아는 퇴계 이황(당시 풍기 군수)입니다. 여기서 퇴계께서 하시는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부부란, 서로의 장점은 북돋우고 단점은 채우며..."   

신랑이신 서해님의 마음씀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신부 이경이 앞을 못 본다는 것을 알고도 저처럼 의연히 신부로 맞아들이며, 형 서엄의 분노까지 진정시킵니다. 자태도 아름답거니와 천품이 뛰어난 신부에게 이미 무한 신뢰를 보내는 건데 의젓하고 훤칠한 용모에 과연 그에 어울리는 인격까지 갖춘 젊은이입니다. "심지가 굳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 낼 수 있습니다." 소실을 들일 생각도 없다 하시는데, 이미 가친께서 색을 찾으셨던 통에 가족들이 혼이 난 적 있어서라고 합니다. 

확실히 과거에는 남성의 문란한 생활 때문에 온 가족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잦았나 봅니다. p142를 보면 고성 이씨 가문 어느 분 때문에 집안 전체가 망신을 당하고, 이경은 시각장애인인 것 외에도 정말로 앞이 캄캄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p147에 보면 당대 일류 선비들이 성리학의 주제를 두고 고담준론을 펼치는 장면이 있는데 학봉 김성일, 내암 정인홍 같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 와중에도 서해와 이경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가이없습니다. 이경은 장애인이라서 힘들겠으나 비유적 의미에서 거안제미의 고사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물태위선, 적덕지가필유여경(p231), 이런 말을 몸소 실천하여 지아비와 후손 모두를 입신양명의 길로 등어서게 도운 분이 바로 정경부인 이경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남은 페이지가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곁다리로 전개되는 기오랑과 동이의 사연도 재미있었습니다. 성지혜 작가님의 전작 <향수병에는 향수가 없다(단편집)>, <사랑의 묘약> 등은 아주 모던한 분위기였는데 이 장편은 갑자기 배경이 조선 중기라서 약간 당황했었으나 나중에는 빨려들어가듯 읽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원스쿨 토플 액츄얼 테스트 Siwonschool TOEFL Actual Tests - 시험 직전 최종 점검 실전 모의고사 시원스쿨 토플 TOEFL
시원스쿨 어학연구소 지음 / 시원스쿨LAB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3년 토플 시험이 개정되면서 교재들 역시 그 사항을 반영하고, 최신 트렌드까지 잘 녹여 낸 문항과 템플릿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교재들도 제가  공부하고 리뷰해 보았는데, 확실히 토플 역시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기존의 시험 요령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생겼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럴수록 기본 원칙에 충실하게 편집, 고안된 교재를 골라 성실하게 공부하는 게 고득점을 달성할 수 있는 royal road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교재의 형식은 봉투모의고사입니다만 봉투에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봉투보다 더 튼튼한 종이 파일에 내용물을 담았습니다. 내용물은 실전모의고사(리딩, 리스닝, 스피킹, 라이팅 등 전 영역) 3회분(3책), 해설과 스크립트 1책 등 모두 4책입니다. 각 책은 스테이플러로 편철되었습니다. 

1회 실전모의고사에서 리딩 영역은 제 주관적인 느낌으로 확실히 예전보다 어려워졌다는 느낌입니다. 첫 지문은 나일 강 유역의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쓰인 어휘도 수준이 높고, 본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오답 선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기 쉽겠다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미국 대학 신입생 수학능력 검증 기준이다 보니 상식선에서 쉽게 풀리는 문항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p4의 question 1은, (c)와 (d)가 결코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두 선지는 이집트 문명과 대비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설명임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토플 시험이 언제나 그렇지만 동의어 고르는 문제는 그 단어와 완벽하게 호환되는 항목을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너무 쉬워질 뿐 아니라 지문을 읽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두 단어의 뜻이 같다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이 지문 안에서의 문맥상에서 서로 뜻이 같아지는 단어가 무엇이겠냐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이는 작문에서 paraphrasing의 원리와도 닮은 데가 있으므로 writing 시간에 배운 지식들을 떠올려야지 thesaurus에 의존할 일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p10의 question 12 같은 게 그러합니다. 

1회의 리스닝 영역으로 넘어와서, 6~11번 문제들을 풀기 위한 지문은, 물론 토플 시험에서 항상 포함되는 대화형 포맷입니다만 내용이 참 어렵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주제가 영화라고 해도, 보통 잘 알려진 극영화의 거장이라든가 촬영 기법에 대해 토의(혹은 질의 응답)가 이어지는 게 보통이었는데, 다큐멘터리가 주된 화제여서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단 대화의 요지만 잘 이해하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풀렸습니다. 

모의고사 2회 리딩 영역에서 11번~20번 문제들을 풀기 위한 지문 역시 주제가 영화입니다. 초기의 영화관들에서 쓰인 영사 기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술적인 설명이 많으므로 내용을 차분히 따라가며 이해해야 답을 정확하게 고를 수 있습니다. 리스닝 영역에서 6~11번을 위한 지문은 지구과학 중 사막 지형과 기후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런 건 한국어로 출제되어도 정신을 바짝 집중해야 하겠다 싶었습니다. 대화형은 아니고 (역시 토플에서 자주 취하는 형식으로) 일방적인 강연형입니다.  

3회 모의고사에서 스피킹 영역은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일부 학생들을 염두에 둔 과외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을 말하게 합니다. 이 모고 교재뿐 아니라, 시원스쿨의 영어 교재는 이런 스피킹 파트에 있어서 딱 최적화한 템플릿이 잘 제공되어 수험생 입장에서는 참 만족스럽습니다. 심지어 타 외국어의 어학시험에서도 그러했습니다. 

3회분 분량이지만 다 공부하고 나서 진이 빠질 정도로, 실전을 방불케하는 고난도 문제가 많아 여튼 수험생 입장에서는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종전의 뻔한 패턴에서 벗어나 최신 경향을 언제나 정확히 캐치하여 컨텐츠화하는 시원스쿨이라서 믿음이 가네요. 

*시원스쿨에서 제공한 교재를 공부하고 나서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의 책 - 희망의 사도가 전하는 끝나지 않는 메시지
제인 구달.더글러스 에이브럼스.게일 허드슨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인 구달은 세계적인 생물학자이자,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감동적으로 설파한 행동가이자 사상가입니다. 제인 구달이라는 이름은 그 힘있고 명료한 문장과 메시지 덕분에 국내에서도 폭 넓은 지지자와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이 책은 더글러스 에이브럼스 대표와 작가 게일 허드슨이 합류하여 집필했습니다. 모두 지구의 미래와 인류의 각성, 화합을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애 써 온 분들입니다.  

다소 마음 아픈 말이지만 많은 경우 "희망"은 불행한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 수단이나 자체 환각 기제의 발동일 수 있습니다. 현재 멸종 동물이 점점 늘어나고 지구 온난화를 넘어 열대화가 유엔에서 선언되는 등 환경 문제도 날로 악화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희망을 마음에서 손에서 놓아 버릴 수 없으며, 바로 이 책의 제목도 <희망의 책>입니다. 제인 구달 여사 역시도 인류와 지구의 미래에 큰 희망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그 명저들을 계속 써 왔으며, 지금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1인칭 화자로 더글러스 에이브럼스 대표가 오랜 지인이기도 한 제인 구달 박사를 인터뷰하는 형식입니다. 무엇이 (참된) 희망이고, 낙관주의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비록 인터뷰가 메인이기는 하나 에이브럼스 대표는 이 분야 운동에 오래 종사해 온 자신의 소회와 불안, 전망을 곳곳에서 표현하며 독자를 공감의 식탁으로 계속 이끕니다. 중세 이탈리아의 성자, 비둘기 등 동물과도 소통했다고 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에이브럼스 대표는 그 성인에다 제인 구달 박사를 비유(p26)합니다.  

개체 레벨을 떠나 유전자가 과연 독자 의지(?)를 가졌는지의 논의는 그전부터 많은 흥미를 끌며 화제를 모아 왔습니다. "가족을 돕다가 죽는 경우, 여튼 유전자는 보존 가능성이 높아지니 개체의 이타주의는 유전자 전체를 위해 매우 유익하다(p88)." 같은... 에이브럼스 대표는 이미 1970년대부터 구달 박사가 저런 식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냐며 박사의 회고를 이끌어냅니다. 구달 박사도 동의허는데 그 연구 자체가 곤충을 대상으로 제한적 검증만을 거친 연구이며, 인간은 개체 유전자 보존 목적 범위를 훨씬 벗어나 이타적(순수한 의미의)인 행동을 때때로 벌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모든 희망의 근원이자 바탕이 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와 희망이 피력되는 것입니다. reciprocal altruism(호혜적 이타주의)에 대한 그녀의 간명하고 심오한 견해를 들을 수 있습니다. 

책 2부에서 제인 구달 여사의 희망 그 네 가지 이유(근거)가 하나하나 설명됩니다. 첫째로 여사가 거론하는 건 인간의 놀라운 지능입니다. 이는 고립적 개체의 이익만 폐쇄적, 근시안적으로 고려하는 영악함이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 구성원의 반응과 속내를 미리 읽고 모두가 윈윈하는 전략을 취할 줄 아는 인간의 고차원적 지능을 가리킵니다. 이른바 "통수질"이라고 하는 배신의 경우 평판의 악화라든가 피해자의 복수 같은 후과를 예상치 않는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패착인데, 관계가 고도화한 사회일수록 구성원들이 알아서 이런 행동을 회피하죠. 

다음으로 구달 여사는 자연의 회복탄력성을 듭니다. 인간은 자연을 일방적으로 파괴, 수탈해서는 안 되며 이런 행태가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자연의 회복탄력성은 물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이 우리 인간을 언제나 배려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 파트(혹은, 이 책의 다른 여러 대목)에서 에이브럼스 대표와 구달 여사는 탄자니아 공화국에서의 여러 추억과 성과를 되새기며, 특히 줄리어스 니에레레 당시 대통령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도 흥미롭게 읽힙니다. 세번째로 그녀가 희망을 품는 근거는 젊은이들의 힘찬 기상과 도덕성인데, 이는 근원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과 "회복 탄력성"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세대가 혹여 타락하고 과오를 부끄럽게 저질렀어도 그다음 세대는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양심과 결의를 발동하려 든다는 것, 퇴행과 수구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게 젊은이들이라는 점에 여사의 마음은 희망으로 부풉니다.   

인간의 정신력은 불굴입니다. 전염병이나 재난을 그렇게 거치고도 해결책과 돌파구를 반드시 찾아왔으며 생활 수준의 향상과 형이상학적 목표, 욕구까지 기어이 달성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전진과 발전이 계속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지금의 자연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욕망을 자제하고 숭고한 연대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왕자에게 말을 걸다 - 행복을 그린다면 무슨 색깔일까?
강석태 지음, 강석태 외 그림 / 비비투(VIVI2)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 예쁘고 아늑한 책입니다. 강석태 박사님과 그 배우자인 이은경 작가님, 따님인 강하린 어린이 등 일가족 세 분이 함께 만든 책인데, 생떽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삼고 행복의 의미를 탐구하는 내용입니다. 강 박사님은 어려서부터 <어린 왕자>에 깊이 몰두했었고 관련 작품도 다수 창작해 오셨다고 나옵니다. 어쩌면, 사람에게는 정말로 환생 같은 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한 사람이 특정 주제, 캐릭터에 이처럼 거의 일생을 두고 꽂힐 수 있을까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비단 강 박사님뿐 아니라 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딱히 어떤 큰 계기도 없었는데 그 생각(사람마다 제각각으로)이, 그에 대한 애정과 동경이 마음 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만의 소소한, 그러나 대체 불가능한 행복이 작게나마 실현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제주도는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난 곳이고, 30여년 전 미국 대통령과 구 소련 서기장이 회동도 가진 후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이곳 지자체에서 작가분들을 지원하는 저런 프로젝트(p19)를 추진한다는 건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도 되고, 배금주의 물신주의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각박하게 사는 한국인들에게 두루 간접적인 혜택도 베푼다는 점에서 참으로 뜻깊은 사업 같습니다. p25를 보면 강 박사님의 <언제나 내 곁에>라는 작품이 나오는데 따뜻한 색감 속에 뭔가 꽉 찬 행복감이 표현되는 멋진 작품입니다. 초록색 별 안에 푸른 머플러를 두른 어린왕자가 약간 멀리 보이고, 건물 위에는 초승달을 배경으로 노란 여우가 반가운 표정을 짓습니다. 

요즘 말로 롱디 연애를 한 강 박사님 이 작가님 부부는 교통비 통신비를 많이 쓰시면서(p31) 비싼 연애를 하셨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7만원 이상 요금제를 쓰면 무제한 통화가 가능하지만(대략 십 년 전부터), 저 당시에는 연인 간에 조금만 오래 대화를 나눠도 다음 달에 요금 폭탄을 맞곤 했죠. 신혼 여행도 제주도로 가셨다고 하니 제주도라는 곳이 두 분께 각별한 의미를 갖는 듯합니다. 베토벤도 청각, 귀로 행하는 작업이 가장 중요한 직분이었는데 예술가들에게는 이상하게도 특정 감각 기관의 이상이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p39에 돌하르방을 주제로 한 이은경 작가님의 작품이 나옵니다. 

"내 귀는 하나의 소라 껍데기/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여(장 콕토)" 우리가 여름 해변가에 놀러갔다 오면 조개나 소라 껍데기를 기념으로 간직하기도 하는데, 정말로 이걸 귀에 갖다대면 어떤 소리가 들리나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들 해서 어렸을 때도 따라해 봤는데 한 번도 그 비슷한 체험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하린 어린이는 감수성이 남달라서인지 이게 되나 봅니다. 저는 회백색 소라 말고는 본 적이 없는데, p52을 보면 빨강 보라 파랑 등 온갖 색이 다 보여서 원래 이런 거였나 하고 놀랐네요. 본문 을 읽어 보니 세 예술가들께서 채색을 한 작품인 듯합니다.     

p88을 보면 미래에 다시 이 카페를 찾을 우리들(작가님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건 제주도의 특정 명소에서만 가능한 건 아니고 당장 서울 어느 핫플이나 노포, 혹은 대학교 근처의 어느 소소한 가게에서도 가족과 연인이 시도해 보곤 했던 행동입니다. 연인의 경우 끝까지 잘되질 못하면 다신 그곳을 못 찾게도 되지만 말입니다. 제주 카o리아힐(p85)을 저는 몰랐는데 제가 지금 이 독후감을 쓰면서 자동완성이 되는 걸 보니(키보드 추천단어에 들어 있다는 뜻) 꽤 유명한 곳인가 봅니다. p115의 사진을 보면 어느 올레길에서 토끼와 강하린 어린이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뭐라고 하는 중일까요.   

이 책에는 특히 조천읍이 자주 언급됩니다. 제주도 하면 워낙 관광지로 잘 개발된 곳이다 보니 읍 단위(사실 이런 곳도 꽤 큽니다) 행정구역이 없을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아직도 읍면 단위가 다수입니다. 제주도 일대가 의외로 역사에서 군사 요충지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벙커도 아직 남았다고 하는데 저자는 다크 투어리즘을 거론하셔서 마음이 어두워지네요. "혹시 저 산 안에도 코끼리가 살고 있을까?(p145)" 그 답은 마음의 눈으로 봐야 도출될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로 표현하면 모든 슬픔이 사라질 거야 - 나도 몰랐던 내면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언어의 심리학
가바사와 시온 지음, 이주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인의 특징 중 하나는 감정의 중시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두려움, 욕정, 분노 같은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 판단에만 충실한 게 최고의 덕목이라 보았습니다.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이른바 군자의 덕목이라는 게, 성(誠)을 실천하여 이(理)를 오롯이 구현하는 게 핵심이었고 이에 서투른 자는 여성을 닮았다거나 소인배라고 해서 질타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게 오히려 조직 내 동료들에게 안심을 주고 공감을 얻기에도 유리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처럼 많은 사람들과 예측을 벗어난 범위의 소통을 감수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수시로 적절히 감정을 배출해 주어야 하며 이를 꾹꾹 억누르기만 한다면 정신에 병이 들기에나 딱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에 읽은 어떤 자계서에서 "미래의 자신을 그리되 앞으로 이렇게이렇게 하겠다에 그치지 말고 지금 당장,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주장을 읽은 적 있습니다. 만약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면 이미 백만장자가 된 사람처럼 지금 굴라는 건데, 이게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분수에 넘는 소비를 하라거나 주변에 거드름을 피우고 다니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긍정 흉내만 내지 말고, 본인부터가 완전한 확신을 가지라는 주문이겠습니다. p62를 보면 예축(豫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역시 같은 취지입니다. 이미 이 일은 이뤄졌다! 이뤄지지 않고 배기겠냐! 같은 확신이 있어야, 축하를 미리 하려는 마음도 먹어지겠죠. 영어로 하면 premature congratulations이죠. 

상대방과 대화할 때, "그러나"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p72). 어차피 나의 주장은 어떻게든 전달이 되는 거고 보면, 구태여 상대에게 어떤 충격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책에서 제안하는 바는 "그건 그렇고"와 같은 화제 전환의 접속사입니다. 이 역시 대화 중에서 내 의사를 정보로서 그가 받아들이는 효과는 같으니 말입니다. 

요즘은 회복탄력성이란 말이 자주 쓰입니다.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고, 때로는 기가 푹 꺾이거나 의욕을 확 잃을 때도 있습니다. 이건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인데, 문제는 그 벙커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느냐입니다. 타격을 받을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반격을 가하는 권투 선수(극히 드물지만)를 보면 경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다소 다른 주장을 합니다. 타격을 받고 나서 그에 굴하지 않고 용수철처럼 일어날 게 아니라, (그런 건 힘드니까) 아예 처음부터 타격을 받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복싱에서도 요즘은 많이 맞는 인파이터 유형보다는 아웃복싱형을 많이 채택합니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아예 안 맞고 경기하는 선수가 결국은 가장 유리하다는 건데, 저자는 이를 두고 스루력(through力)이라 부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이리저리 힘든 건 잘 피해가며 목적만 달성하라는 겁니다.  

이런 스루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나에게 도발하려는 상대의 의도에 놀아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당신의 화나고 어쩔줄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뭐가 어째요?라고 반발하면, 전후 과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제3자)은 화를 내는 당신에게 잘못을 돌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것까지 그 사람은 계산에 다 넣고 일을 벌인 것입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책에서 권하는 반응은 이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까?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고 직장에서 돌파구가 안 찾아질 때, 나에게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을 때는 전문가를 과감하게 찾아가서 도움을 얻으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이럴 때 전문가를 찾지 않고 혼자서 끙끙댈까요? 자존심? 상담료 걱정? 이 정도는 나혼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쓸모없는 의무감? 책 p171을 보면 어느 고교 농구선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괜한 고민 하느라 정력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냥 과감히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하는 해결법은, 자꾸 글로 쓰고 말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이란 건 뭔가 모호하고 어렴풋한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느낌이라고 해서 내가 반드시 그에 대해 잘 아는 게 아닙니다. 글로 쓰고 말로 구체화해야 그게 뭔지 내가 비로소 알게 됩니다. 또 불필요한 고민을 일단 입 밖으로 내놓아 대상화시키면, 머리 자체가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정신의 큰 부담을 덜어주는 말하기, 글쓰기를 적극 활용해서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야 일이든 인간관계든 잘 진행될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