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인 Lean In - 200만이 열광한 TED강연! 페이스북 성공 아이콘의 특별한 조언
셰릴 샌드버그 지음, 안기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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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커버그가 곧 내한해서 한국의 여러 요인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합니다. SNS의 상업적 확산과 그 성공은 이미 한국의 경우 '싸이월드' 등을 통해 일찌감치 그 가능성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만, 정작 시기 면에서 더 일렀던 우리가 글로벌 플랫폼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죠. 저커버그가 만든 페이스북의 경우 트위터보다 싸이월드 시스템에 더 근접하는 포맷이었고, 또 (아직도 나이가 젊은) 저커버그 자신의 드라마틱한 성공담이 비하인드 스토리로 기업 사례 연구에 부록처럼 결부되는 바람에, 사실 사업체 자체에 대한 냉정한 통찰과 전망과는 별개 문제로, 페이스북은 언론과 대중의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셰릴 샌드버그는 페 이스북의 드라마틱한 부상 과정 외의 면에서도, 이미 디즈니나 구글, GOSO 같은 유수의 대기업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바 있어서 이코노미스트나 FT에서 자주 본 이름입니다. 우리 나라의 모 정치인도 (현재의) 실물보다 과도하게 예뻐진(보정된?) 커버 이미지로 화제가 된 일이 있지만, 샌드버그 여사(그녀는 이미 40 중반에 접어든 중년이고, 힘차고 맹렬하게 살아 온 커리어를 반영하듯 약간은 나이의 흔적이 짙게 드러나는 외모입니다)의 이 책 사진은 마치 영원한 꿈과 희망의 포도주통에 자신을 바닥까지 담글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는 소녀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런 유순하고 평온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녀는 (젊다못해)어린 시절부터 매킨지 앤 컴퍼니,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의 비서관 등의 직책으로 화려한 경력을 수놓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입니다.


이 런 그녀가 새파란 나이의 저커버그 아래에 들어가, 2인자라고는 하나 어쨌건 아직 경력이야 일천한 청년 사업가의 휘하에서 다소 의외의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녀의 지난 발자취가 언제나 일반의 예상 범주에 드는 것들만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런 다소 독특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녀의 퍼스낼리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과연 페이스북과 SNS 엔터프라이즈는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성장이 기대되는 중인지, 그들의 사업은 과연 viable한지, 이를 분명히 통찰하기 위해서는 공시된 표피적 기업 사정 외에도, 기업 의사 결정의 최상층부를 이루는 인사들의 컬러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한 여성의 출세담과 감동적인 석세스 스토리라는 점 외에도, 기본적으로 이런 두 가지 점에서 투자자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물론 특히 젊은 여성들은, 이번에 내한하는 셰릴의 이렇게나 화려한 성공 사연을 읽고 좋은 동기 부여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겠죠. 허나 저는 좀 더 냉혹한 시선(?)으로, 과연 그녀가 현재 2인자로 몸담은 페이스북의 성장 전망이 얼마나 될지, 셰릴 자신의 그닥 짧지만은 않은 인생을 담은 자서전격인 이 책에서 정보를 적지 않게 얻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의 서문에도 나와 있지만, 이런 성공한 여성들의 스토리란 어느 정도 스테레오타입적인 면이 강합니다. 시고니위버의 <워킹걸>, 샌드라 불럭의 <프러포즈>에서 묘사된 그대로의 모습은, 어찌 보면 '진짜 워킹걸'인 셰릴 같은 이의 고독과 고충을 외부인이 제대로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셰릴이 미처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것만 같은(셰릴은 대단히 진솔한 타입이라고 하니, 이건 그저 평범한 우리들의 선입견일지 모르죠) 사적(私的)인 사연까지 이 책에서 털어 놓고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녀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처음엔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으며, 다른 빼어난 학생들은 호메로스(호머)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원문-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어 보기도 했으나(비율은 1/3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었다는 말, 나중에 교수진에 물어 보니 "넌 성적이 아닌 개성 덕에 입학이 허가된 거야."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셰릴의 감정적 정리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위안이 되었다고 합니다(원서에는 짧게 'comforting'이라고 한 문장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쿨한 그녀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책 의 처음 못지 않게 중간 이후에도, 아마 영어로 sibling rivalry라고 표현되는, 그녀의 남동생과의 묘한 심리 관계가 자주 등장합니다. 분명 객관적으로 남동생보다 훨씬 성공한 삶을 살아 왔을 그녀이지만, 그녀의 부친(당연히 남동생의 부친이기도 한 분)을 롤 모델로 삼고 성장했다는 그 남동생의 개성에 대해, 생의 결정적인 순간 많은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죠. 남동생의 경우, 데이트가 성공적이지 못하면 "걘 오늘 멋도 모르고 킹카를 찬 거야!"같은 호기를 부리는 자신감이 언제나 충만했다는 건데, 셰릴은 그렇게까지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던 게 대부분이었다고 술회합니다. 그녀가 곤경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자신에 내재한 심리적 추락 충동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그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식으로는 "나의 라이벌은 언제나 내 자신이었을 뿐이다."정도겠죠. 그런데 이런 자세를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으로부터 배웠다는 겁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미국에서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그녀가, 성장 과정에 딱히 제약이나 걸림돌이 없이 평탄한 과정을 밟아만 온 그녀가, 이중의 질곡에 시달릴 숱한 평범한 여성들에 대해 쓴 충고를 할 자격이 있는지를 반문하곤 합니다. 그런데, 앞서도 적은 바와 같이, 그녀는 딱히 빼어난 성적만으로 최고 명문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평범한 여성들이 겪는 고난을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섬세하고 상처 받기 쉬운 내면의 여러 걸림돌로부터 그땓그때 슬럼프를 탈출하고, 공고한 남성 위주의 비즈니스판에서 최고의 임원으로, 그리고 범상한 자질의 보유자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최고 공직의 주변까지 두루 거친 지위에 오르려면, 그게 타고난 조건만 좋아서야 어림 없는 일이라 생각되네요.


그 녀가 구글을 떠났을 때, 그녀를 따라 페이스북으로 옮겨 온 일단의 인재 그룹을 놓고 보면, 비율상으로 오히려 여성이 더 적었다고 합니다. 인상도 그렇고 이 책에서도 온화한 톤으로 무난한 이야기만을 말하고 있는 듯한 그녀지만, 위험 회피(경제학용어죠. risk averse)적 태도는 험난한 사회에서 생존과 승진을 도모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라고 매섭게 몰아붙입니다. 이 책이 그저 달콤한 성공 사연을, 어린 여성들에게 솔깃한 어조로 좋게 포장해서 들려주는 내용이라고 여긴다면 아마 큰 착각일 겁니다. 점잖은 표현 속에, 성장과 성공을 위한 쓰디쓴 각성제가 잘 녹아 있는 멋진 작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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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수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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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를 훨씬 넘기는 방대한 분량이었습니다. 술술 풀리는 이야기 중심이었다기보다는, 작가가 평소에 겨레의 역사와 올바른 지향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절절히 털어 놓은 에세이격 장편 서사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 참, <묘청의 난>은, 그 사건을 <난(亂)>으로 본, 그리고 이 소설에서 역사 왜곡과 모화 사상에 빠진 정파의 괴수 격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김부식의 시각에서나 가능한 용어겠습니다. 요즘은 교과서에서도 <서경 천도 운동>으로 칭하는 걸로 압니다. 그게 타당한 명명(命名)이겠고요.


소 설의 전반부에서는 이자겸의 난을 재미있게, 그리고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생생하고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극의 몰입도가 높았던 부분이, 바로 이 전반부였습니다. 학교 교과서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7대 80년 간 국구(國舅)로서 국사를 전단해 온 이자겸이, 금(金) 제국에 치욕적인 사대(事大) 정책으로 치닫고 급기야 옥좌까지 찬탈하려 든 혼란상으로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대단했던 실력자가 어떻게 해서 몰락하고, 왕씨 가문 중심의 정계 재편이 이루어졌는지, 또 그 후 불과 10년도 안 되어 서경 천도세력이 새로 부상, 기존의 집권 귀족 세력(이 소설에서 말하는 경주 중심 호족)을 위협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거의 알 수 없었어요. 요즘 한국을 일러 <다이나믹 코리아>라고도 부르지만, 지금으로부터 근 900년 전 반도의 시스템과 분위기 역시 상당히 다이내믹했나보다, 이런 씁쓸한 웃음만 떠올렸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구나."하는, 사건의 앞뒤 정리가 말끔히 이뤄진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제 동생과 자식을 인종 친위 세력의 손에 잃은 척준경이, 무슨 이유로 그리 쉽게 인종의 친서 한 장에 쉽게 반(反) 이자겸으로 돌아설 수 있었는지, 이 소설의 서술만으론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습니다. 물론 자겸의 노비와 자신의 가노 사이에 붙은 시비가 발단이 되었다고 언급은 하는 중이지만, 대화 속의 설명만으로 그친 게 소설적 균형을 좀 무너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극이 중대한 전환을 보이는 흐름에서는, 단순한 간접 인용이 아닌 직접적 드라마화가, 별개 씬을 통해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괴력을 지닌 척준경의 사연과 행적에 대해, 책을 덮은 후에도 도저히 잊을 수 없게 자세한 묘사가 이뤄진 데 대해서는, 작가의 빼어난 솜씨 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에 한 줄로 간단히 언급되고 만 인물, 사건에 대해 잘 정리된 게 못내 뿌듯한 느낌입니다.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을 한 고리로 엮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정지상입니다. 만약 이 고리가 빠졌다면, 소설은 중간에서 어색하게 반토막이 나는 구조였을 겁니다. 김부식이 소년 왕 인종 앞에서 과감하게, 이자겸의 전횡과 실정을 탄핵하는 장면에서, 젊은 좌정언직의 정지상은 그 주장의 무리함을 지적하다 오히려 이자겸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 주장의 참신함이 눈에 띄어, 인종의 곁에서 평소의 지론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우리 고유의 풍류도와 단군 천제 사상, 고대 전 동아시아에서 화하족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자랑스러운 역사를 설파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작가는 이후 정지상의 입을 빌어 수시로, 사대주의 세력에 의해 말살된 배달 겨레의 웅혼을 일깨워 천하를 경영하는 제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지론을 계속 상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젊은 벼슬아치이자 지사인 정지상이 군주 개인에게 간하는 메시지에 그치지 않고, 작가 본인이 현대 한국을 살고 있는 우리 독자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민족 정기를 바로잡자는 제안을 하는 셈입니다. 소설에서 이 메시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제법 커서, 전반적으로 소설이 어떤 역사의 스토리를 극화했다기보다는, 재야사학계가 주장해 온 대(大)배달, 온 가우리 사상의 경전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작 가가 펼쳐 놓고 있는 생각은 이분만의 순수 독자적인 창안은 아니어서, 인터넷 곳곳을 '환(한)단고기' 같은 검색어로 둘러 보면 그닥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특유의 논리적이고 단정한 문장으로, 그런 주장들의 일견 거칠어 보이는 외피를 잘 다듬어 소설 속에서 매끄럽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환웅-환인-단군의 세 존재를 기독교의 3위일체와 비교한 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투르키스탄의 유목민과 중동 원주민, 유태인을 싸잡아 색목인으로 칭하면서(실제 역사에서도 그러했긴 합니다만), 그 먼 옛날 우리 동이족이 그들에게 끼친 아련한 영향의 흔적이거나, 최소한 그들과 우리가 공유했었으나 화하족의 음모로 이산가족처럼 서로 떨어지고 만 고리처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대의 수재였던 정지상의 입을 빌어 도도히 펼쳐집니다. 하지만, 천제 사상이 서양의 왕권 신수설과 연결되는 부분은 약간 실소를 자아냅니다. 알다시피 보댕이 왕권신수설을 정립한 시점은,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시대보다 사벽 년은 뒤떨어진 일입니다. 유럽은 이 때 봉건 제후의 전성기였고, 왕이란 건 허울뿐이거나 아예 자리잡지조차 못한 시대였는데, 세련된 중앙집권화를 상당히 진척한 우리 고려나, 일찌감치 대 영역에 걸친 제국을 확립한 화하족의 사정과 비교할 게 못 되죠. <다윗의 별>까지만 해도 뭐 그러려니 합니다만.


기왕에 정지상을 화자, 주인공으로 설정했으면, 역사상으로도 말살되지 않고 잘 드러나 있는 그의 멋진 연시(戀詩)들 을 작품 속에 삽입했으면 어땠을까요? 아닌게아니라 조휘 같은 여진족 처녀의 등장은 이 소설을, 건조한 사상의 나열이 아닌 매혹적인 로맨스의 세계로까지 완성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특히 지상과 조휘의 사랑을 묘사한 부분은, 외설적이거나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청춘의 고혹적인 결합을 품격 있는 문장으로 그리고 있어서, 작가의 필력과 격을 증명하는 대목이었습니다(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너무 맘에 들어, 머리 속에 특별히 메모리를 해 두었어요^^). 그런데 왜, 정지상의 절대 걸작이자 중국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던 <송인(送人)>을, 예를 들면 조휘가 왜국으로 떠나가는 대목에서 멋지게 인용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저 절창의 배경이 아직 확연히 드러난 바도 없는데,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번참에 멋진 정당화의 근거를, 소설의 자유를 빌어 하나 마련했다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김부식이 지상을 못내 처형하고 만 건 정치나 사상의 스탠스 차이도 있지만, 바로 이처럼 자신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운문 창작 능력을 보유한 천재였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임을 감안하면요. 제 생각에 작가는, 학창 시절 배운 국사 지식은 소설 창작에 백분 활용하면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살짝 웃음이 나왔습니다. " 아, 이분, 고딩시절에 진짜 열심히 책을 판 모범생이었겠다." 그거 시험에 문장째 잘 나오는 부분이거든요), 국문학사적 지식은 별반 소설에 크게 녹여낸 것 같지 않습니다.


저 는 광주민중항쟁을 살짝 서경천도운동과 연결시킨 대목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시에 의문을 가집니다. 낭도 세력은 그럼 이 서경 세력이 대변하고 있었다는 건데, 김부식은 경주 중심의 전통 기득권층이면서 왜 이들을 적대했는가? 아시다시피 낭도 하면 화랑이 그 대표격이고, 이 소설에서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 화랑 세력이 신라 건국의 주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민족혼 투철한 낭도들이, 왜 그 역사의 결정적 시점에서 동족을 적대하고, 화하족의 당 제국에 붙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 소설에서 주장하는 바와 모순됩니다. 당장 여기서도 사대주의= 구신라 출신-누대를 이어온 기득권의 상징 김부식의 존재가 매끄럽게 해명되지 않는 걸로 그 모순의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정지상은 극중에서 진시황의 분서 갱유를 두고, 실상은 동이족의 찬란한 역사를 말살한 만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시황 정(政)이야말로,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 출신으로, 화하족의 패권 정립을 막기 위한 동이족의 후예였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실제로 중국인의 체질에 맞지 않았던 법가를 배격하고 유가를 다시 전면에 내세운 한(漢) 제국이 진(秦)을 극복하고 이후 수백 년간 그들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이 주장 역시 근거가 빈약할 뿐 아니라 오히려 단군 사상에 자충수를 두는 면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론적인 면을 떠나 소설만 놓고 봐도, 왠지 서경천도 운동, 700여일 간 장엄하게 전개되었던 그 비장한 이벤트가, 또 소설의 중심 테마로 이미 설정된 그 사건이, 소설 초두에 다소 몽환적으로 제시된 걸 제외하면, 이 대단원에서 다소 피상적으로 그려지고 말았다는 게 크게 아쉬운 점입니다. 최근에 저는 김형오 전 국회읩장이 쓴 <술탄과 황제>를 읽었습니다만, 작가의 기획 의도에 따르자면, 소설 속에서 이 서경 농성 장면이,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그 순간만큼이나 상세하고 생동감 있게 처리되었어야 옳지 않았나, 너무 간략하게, 서둘러 마무리된 것 아닌가, 그런 아쉬움을 떠올립니다.


소 설은 그렇지만 많은 매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역사적 기록들을 폭 넓게 참조하고 이를 소설 소5에 녹여 낸 점이 탁월합니다. 소식 소철 형제의 이름을 따 그들 형제가 개명까지 했다는 사실 같은 건 참 재미있는 정보 아니겠습니까? 이 소설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소동파는 중국 역사에서도 노골적인, (요즘 일본 말로 하면) 혐한의 대표 주자였다는 걸 상기하면 더군다나 흥미를 끕니다. 소설의 마무리는, 부식의 아들 김돈중이가 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태운 충격적 사건을 살짝 언급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여력이 미친다면, 이 무신 정변에까지 소설화를 시도하여 속편을 내놓으면 어떨지 제안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p294 밑에서 8째줄, '김부식라고' '김부식이라고' 오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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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의 거듭제곱 - 존경받는 기업을 만드는 새로운 비즈니스 패러다임
고구레 마사히사 지음, 이지현 옮김 / 토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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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음에 책을 접했을 때, 무슨 뜻인지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두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아, win-win이라고 할 때의 그 의미구나."라는 점을 깨달았죠. 거래 상대방이 zero-sum game을 펼치지 않고, 서로 기분 좋게 이익을 얻은 채로 마무리를 지을 때, 우리는 그런 걸 가리켜 win-win이라고 하죠. 이 고구레 마사히사 씨는, NPO인 TFT를 이끄는 사회사업가입니다. 저자인 이 분이 주장하는 바는, "편협하게 양 당사자만 WIN-WIN하고 말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 그리고 얼굴도 모를 다른 어느 인류 구성원에까지 그 혜택을 확장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익의 연쇄를 이루자. Win-Win 아닌, Win-Win-Win-Win을 이루자는 주장입니다. Win-Win이 Win의 제곱이라면, 이 저자분이 이야기하는 바는 Win의 n제곱인 셈이죠. n제곱은 우리 수학계의 확립된 용어로 <거듭제곱>이라고 하니까요.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일까요? 그러기 전에 먼저 저자의 약력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은 1972년생이니 40을 조금 넘긴 중년입니다. 다양한 사회 체험을 거쳐 현재는 非이익단체인 TFT를 이끌고 있습니다. 일본 유수의 기업이라고 해도 한국의 우리가 그 이름을 잘 모를텐데, 저런 회사라고 하면 아마 저뿐아니라 많은 분들이 생소해하실 줄 압니다. 이 TFT는 Table for Two입니다. 두 사람을 위한 <상차림>이란 의미인데요. 우리가 흔히 식사를 위한 상이라면, 그건 한 사람만을 위한 상일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정말로 머릿수로 한 사람인 경우보다야, 한 가족을 이루는 서너 명이나, 함께 다니는 친구 일행이나, 회사 동료들이 모두 모이는 회식인 경우가 많지만, 이는 모두 같은 목적으로 한 자리에 모인 <동일 당사자 집단>이라는 게 공통이죠. 그런 <상>은 그들만을 위한 한 번의 용도로 끝입니다. 그런데 고구레 씨가 제안하는 상은, 한 번의 상을 차려 두 단위의 당사자 집단을 만족시키자는 뜻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예를 들어 저칼로리 식단으로 구성된 메뉴를 TFT에서 구입한 사람은, 동시에 그 식대의 일부를 아프리카나 기타 오지의 결식 아동 지원에 기부하게 되는 시스템입니다. 이러니, 한 번 차린 상으로 두 당사자에 서브한다는 말이 타당성을 갖게 되는 거죠.


자 선 사업의 방식으로는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고구레 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기업에 이 Win-Win-Win의 무한 연쇄 고리를 확장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신은 지금 자선 사업에 한정된 어떤 기법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기업이 수용하고 응용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제안한다는 뜻이죠. 제한된 소비자 집단을 대상으로, 탐욕적으로 시장을 개척하려고 들어, 결국 모든 영역을 레드 오션으로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방식이었다면, 모두가 승자가 되는 새로운 접근 방법은 이미 적조화가 한참 진행된 분야도 다시 블루 오션으로 돌릴 수 있는, 환경친화적이자 인간성 회복에의 첩경이 될 수 있는 신경영기법이라는 겁니다.


그 는 책의 말미를 이런 일화로 장식합니다. 어렸을 때 몸이 약해 오츠카 사 개발의 <포카리스웨트>라는 이온 음료를 자주 사 먹었던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뎅기열 등 풍토병 예방과, 복잡한 이슬람 예식에서 수분 섭취 관련 까다로운 제한을 극복할 수 있는 이 음료의 현지 판매가 대성공을 거두었음을 무척 자랑스럽게 토로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보던 상품 하나가, 다른 땅에서는 대단한 구원의 복음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음이 무척 놀랍다는 거죠. 하긴 우리의 경우도, 북한이나 러시아에서 유독 인기 있다는 <초코파이>의 예가 있고, 문화상품이긴 하지만 드 라마 <대장금>이 이란 같은 나라에서 크게 히트를 치지 않았습니까? 영국에서 흔한 고양이가 터키에 수입되어, 쥐떼의 행패로 고생하던 술탄의 근심을 덜었다는 우화도 있고 보면, 우리의 사소한 실천이 몇 만 배의 파장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음이 놀랍기도 합니다. 이제 SCR은 기업의 사치가 아닌, 필수 실천 덕목이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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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하라 - 존중받는 직원이 일을 즐긴다
폴 마르시아노 지음, 이세현 옮김 / 처음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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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영학은 모든 학문으로부터 자양과 지류를 흡수하는 강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경영학이 모든 학문의 궁극적 귀결이라든가, 최종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아직도 많은 非경영학도들은 경영학을 두고 "받기만 하지 주지를 않는 학문"이라고 비웃기도 하죠. 여기서 주지 않는다는 건, 경영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저 다른 학문이 <경영학>이라는 셈물에서 직접 길어 올릴 것이 부족하다는 뜻일 뿐이겠죠.


다른 말로 하면, 경영학을 공부하면 많은 다른 학문(꼭 인접 분야도 아닙니다)에 대해서도 유식해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심리학, 사회학, 수학, 통계학, .... 특히 요즘 각광 받는 인적자원관리(HR-예전에는 인사관리라고 불렀죠)는, 직접적으로 심리학과 통계학의 영향, 수혜를 입은 학문입니다. 이 분야를 공부하다 보면, 심리학의 여러 이론에 대해 제법 밝아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아주 심층적인 최신 성과는 아직 반영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만. 어쨌든 요즘 <통섭>이다 뭐다 해서 새로운 학제간 연구, 융합의 바람이 불고 있는 현실이지만요, 경영학은 처음부터 복합 과학의 성격이 컸던 덕에 통섭 이전부터 통섭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 책은 인간관계론에서 그간 초미의 관심사였던 인센티브를 통한 동기부여 이론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론을 전개한 책입니다. 제목만 보면 무슨 인상을 받으시나요? "직원들을 당신의 가족처럼 여기고, 사랑하고, 감싸 줘라. 그럼 그들이 성과로 보답할 것이다." 물론 그런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5장부터 11장까지는 그런 추상적이면서도 듣기만 해도 가슴 뿌듯해지는 화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지막 12장은 이 모든 덕목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까 하는 내용이구요.


이 책은 이론과 실천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 저 이론 면에서는, 앞서 적은 대로 종래의 인센티브 체계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매우 과감하고 대안적인 주장을 폅니다. 그가 들고 있는 비유는 이렇습니다. "며칠까지 마감을 준수하면 인센티브를 부여하겠다는 회사가 있다. 직원들은 이 인센티 브를 얻기 위해 열심히 작업한다. 그런데 갑자기 마감기한을 준수하지 못할 사고가 생겼다. 이 때 a그룹은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자>였고, b그룹은 <그래도 가능한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데까지 해 보자>였다. 전자는 단지 동기부여만 되어 있었고, 후자는 몰입도가 높은 그룹이다. 동기는 일시적이고 변덕스럽지만, 몰입은 지속적이고 충성스럽다."


어떻습니까? 기존의 이론에 부분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분명 이 대목은 읽다 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과연 맞는 말 아닐까요? 아름답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논리 전개입니다.


저 자는 이런 말도 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소위 <몰입도의 전도사>라고 할 만해서, 각지에 이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다닙니다. 한 청중이 그의 강연을 듣고 나서, "와ㅡ 그거 좋네요! 우리 직원들한테도 몰입 좀 하라구 말해주세요!" 저자는 이 일을 소개한 후, "이런 식으로 직원을 몰입하게 할 수는 없다."며 불쾌한 듯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에요. 저 청중은 과연 저자의 열심 강연을 듣고도, 이해도가 떨어져서 그런 리액션을 보였을까요? 그보다는 "말은 좋다!" 같은, 일종의 비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죠. 동기부여는 일시적일 뿐입니다. 단물을 다 빼고 나면, 그 다음은 과감히 회사를 등질지 모릅니다. 반면 회사에 충성하는 직원은 거리에 휴지 하나 떨어진 걸 보지 못하고 자진하여 처리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찌 보면 기술적인 실천 사항이 아닌, 도덕심 함양이나 제고의 차원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는 경영 기법으로 다루기에는 조금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회사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의 방법이 요구될 테니까요. 반면 인센티브란 회사의 여건 불문 어느 정도 공통적입니다.


몰 입도 증진의 방법도 그렇습니다. 애사심을 갖는다. 인정한다, 칭찬해 준다. 다 좋죠. 하지만 이런 방법이 어디까지 효과를 유지할까요? "회장님, 말만 하지 마시고 돈을 주세요!" 나중에는 이런 직원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몰입 경향이 낮지만 능력은 빼어난 직원이라면, 몰입 교육을 아무리 시켜 봐야 하는 척만 하고 말지 모릅니다. 이런 직원에게는 종래의 인센티브 제도를 유지하는 게 더 나을지 모릅니다.


존 증은 말만으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보상에는 여전히 금전이 결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직원 존중을 유도하고 생산성을 장려하다간, 직원이 아닌 거의 동업자 수준으로 대우를 향상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좋은 일이죠.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장님들이 이 방식에 선뜻 동의하고 나설까요?


저 자는 고학력자답게 언어 사용에 있어 상당히 까다롭고 신중합니다. 심리학 용어인 <긍정적 강화, 부정적 강화>를 많은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다고 합니다(예를 들어 84페이지, 현장에서 몰입 여건의 정의와 몰입 정의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불평). 그렇긴 합니다만, 본인이 예로 들고 있는 <엄마가 우는 아이를 안아 주는 일>이 과연 부정적 강화일까요? 안아 주는 일은 불쾌한 자극을 없앤다기 보다, 안아 준다는 유쾌한 자극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건 긍정적 강화지요.


engagement 가 이 책의 핵심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참여>라는 좋은 다른 뜻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 말하는 많은 경우 engagement는 <참여>의 뜻에 가깝습니다. <몰입>은 개인적인 열중만 말하는 것 같아서 부자연스럽습니다. <참여>라고 옮겼으면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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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속도 탐욕 - 당신은 새로운 혁신 세 가지를 갖고 있는가
비제이 바이테스워런 지음, 안진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제 목을 보았을 때 대체 무슨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책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필요, 속도, 탐욕이라... 어떤 연결 고리가 이 세 키워드를 이어 주는 걸까요? 영어 원서의 제목은 <Need, Speed, Greed> 더군요. 그제서야 "아, 라임을 맞추기 위한 의도가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의 내용은 과연 이 세 추상개념어의 기묘하고 정교한 삼위일체를 만족시키고 있었을까요? 다 읽고 난 후의 개인적 느낌을 말하라면, 고개를 가로젓고 싶네요. 제목은 그저 제목일 뿐, 내용과는 별 상관 없었다는 게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필요, 속도, 탐욕>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아마 저것과 정반대되는 내용, 예를 들어 월든 식의 "인간과 윤리를 소외시키는 혁신일랑 걷어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내용도 충분히 저술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설 사 그렇다고 결론을 내더라도, 책 내용은 단연 최고였습니다. 정말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크리스텐슨(혁신 전문가이자 전도사죠. 최근 건강이 안 좋다는)의 책도 읽었지만, 이 책은 보다 넓고 유연한 시야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 책 못지 않게 유익했습니다. <혁신>의 각론도 그 퀄리티에 관계 없이, 너무 깊이 파고들면 읽는 입장에서 좀 피곤합니다. 눈이 피로해지면 뒷산에 올라가서 먼 광경을 보는 게 좋듯, 공부와 일에 지친 머리는 이처럼 넓은 비전을 제시해 주는 책을 읽고 달래 주는 편이 좋습니다. 아카데미즘이 아닌 저널리즘 종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멋진 스타일로, 이 책은 혁신의 핵심 개념과 구조, 실례에 대해 잘 소개해 주고 있었습니다.


내 용 소개는 인터넷서점의 상품 설명란에 잘 제시되어 있을 테니, 저는 제 주관적인 느낌만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그 전에, 이 책의 저자 바이테스워런이 어느 쪽 출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바이테스워런이라는 이름만 보면 예전 얼 워런이라는 미국 대법원장(순도 100%의 와스프죠)이 생각나기도 하고, 덴마크나 스웨덴 쪽 인물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름 <비제이>가 심상치 않죠? 네, 이 사람은 인도 출신입니다. 이코노미스트를 죽 구독해서 읽으시는 분들도, 고정필자 바이테스워런이 인도 출신인 걸 모르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저렇게 한글로 <~워런>이라고 쓰면 더하죠. 로마자 표기는 waran이라고 해서 Warren 따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실제 발음도 <~와란>에 가깝습니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책의 논지와 경향은 그 사람의 출신지와 분리하여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는 인종적 편견이라기보다 오히려 엄연한 현실이며, 또 어떤 책의 논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필요한 선행 작업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혁신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은 상당수가 냉혹한 효율성의 관점에서 주장을 펴고, 또 그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리버럴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이테스워런은? 이코노미스트의 독자라면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보수 성향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출신지의 영혼을 진하게 감싸 안는 길을 선택한 그로서는(아닌 사람도 많습니다), 과격한 효율론(과 그 배후에 은근히 깔린 인종차별주의)을 무작정 옹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구의 혁신론자들에게 "아시아의 부상(浮上)이 반드시 서구의 손해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아시아의 독자인 우리도 이에 전혀 주저없이 동의하고, 동의 이전에 열렬한 옹호를 보내지요. 그렇지만 왠지 이 부분 주장에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근거(다양한 실례를 좀 들어줬었으면 좋았을 텐데요)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물론 우리야 처음부터 그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이니, 근거 따위는 제공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만, 항상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게 또 우리 동양 군자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책 내용은 정말 명쾌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을 메모해 가며 행동 원칙으로 삼을 만합니다. 경영자나 임원이 아니라도, 장차 그런 꿈을 꾸는 직원이라면 새기고 또 새겨야 할 좋은 말들로 가득합니다. 바이테스워런은 이 모든 내용을, 자신의 스타일로 잘 조립해서 독자에게 설명해 주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가 들어 주는 숱한 역사적 실례들은 꼭 경영학과 연결 짓지 않아도, 그 자체로 멋진 역사 뒷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 지만 몇몇 대목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는 "사업체 인가 하나를 내 주는 데 19일이 걸리는 독일"을 비판하며, 그나마 일본(23일)보다는 나은 수준이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례가 과연 관료주의, 레드탭, 혹은 만달리니즘의 폐해로 거론되어야 할 만큼 나쁜 예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이번 그리스 사태만 해도, 독일의 적절한 개입과 조치, 혹은 <튕김>이 없었다면, 사태가 어떻게 악화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번 그 급박한 국면에 처해서, 다른 나라들은 모두 손 놓고 독일이 과연 쌈지를 여는지 여부에만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심한 글로벌 경기 침체 와중에서도, 유독 독일만은 별다른 고생 없이 순항을 하고 있습니다. 혁신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만능의 미덕일까요? 물론 황골탈태의 관점만 중시한다면, 독일(그리고 일본)은 관전자로 하여금 큰 답답함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특히 독일의 경우 내부 구성원의 만족이나, 객관적 지표 어느 면에서도 여느 외국에 뒤처지거나 부족할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쁜 예를 들었으면, 그 나쁜 예가 어떤 나쁜 결과를 맞이했는지의 실증이 뒤따라야 하는데, 바에테스워런은 처음부터 잘못된(들지 말았어야 할) 예를 든 탓에, 책 서술에 있어 이런 구조의 허점을 드러내고 만 거죠.


117 쪽에 보면 스티븐 핑커를 재인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 그 피해인구(사상자)의 비율로 보면, 20세기는 그 어느 앞선 시대보다도 문명화, 인간화된 시기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그 결론에야 동의하지만, 주장의 근거가 잘못되었습니다. 어떻게, 20세기의 사상자가 총 인구 대비(무엇을 대비하건 간에)로 적은 수치일 수가 있나요? 분명 20세기는 여태의 그 어떤 재앙보다도 절대 수준으로나 인구비로나 많은 생명이 희생된 시기입니다. 이는 분명한 숫자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20세기가 문명화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이런 참혹한 결과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 전에는 사람을 죽이고도 종교, 도덕, 인종적 광신으로 이를 합리화했을 뿐 반성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기술이 부족해서 사람을 못 죽였다 뿐이지, 그 잔인한 심성에 만일 20세기의 첨단 기술을 쥐어 줬으면 벌써 인류는 절멸했을 것입니다.


여 튼 이런 점들은 이 멋지고 유익한 책에서 몇 안 되는 극히 사소한 단점에 불과합니다. 112페이지에는 할 배리언이라는 구글 수석 임원이 나오는데요, 이 사람은 미시경제학 교과서 저자로 세계적 명성을 날린 학자입니다(저는 학부 시절 이 사람 책으로 공부했기에 이름을 잊을 수가 없죠). 워낙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근거를 구하고 있는 저자라, 뜻하지 않게 유명인사의 근황까지 독자에게 알려 주고 있는 가외의 헤택을 베풀기까지 합니다.


이 책의 멋진 점은 안진환씨의 멋진 번역입니다. 106쪽에는  "...10년 단위의 기간 중 단 한 번의 10년을 제외하고는.." 이라는 매끄러운 문장이 있습니다. 보통 다른 번역자들은 영어의 decade를 문자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우리말에는 없는 이 '십년기'라는 단어를 그대로 방치하니 문장이 제대로 읽힐 리가 없죠. 이 외에도 안진환씨는 생소하다 싶은 개념에 일일이 역주를 달아, 그것만으로도 독자에게 공부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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