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현실적이고 다분히 이상적인 저널리즘/리얼리즘 - 진짜 세상을 마주하는 저널리즘의 첫발, 20여 년 기자 경력의 현직 사회부장이 들려주는 저널리즘의 생생한 속사정
김정훈 지음 / 광문각출판미디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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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권위 있는 일간지, 주간 매체 등에 소속된 언론인들의 글은 일단 신뢰하고 읽으며 수용했던 것 같습니다. 황색 저널리즘이라 비판받던 스포츠신문이라고 해도 일단 그 지면에 실린 스포츠 선수들의 동향, 연예인들에 대한 가십은 뭔가 근거가 있어서 저런 기사가 실렸겠거니 일단은 믿었던 듯합니다. 지금은 신문 한두 곳에서 내는 뉴스로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고, 설령 여러 곳에서 같은 보도를 해도 평소에 내가 즐겨 보던 곳에서 뉴스를 내 주지 않으면 일단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자, 대중도 문제가 있지만 언론인들의 권위, 자질, 책임감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CBS 기독교방송은 1980년대에도 보도기능 일부를 유지하며 그 서슬퍼렇던 시대에 과감하게 정권을 비판하던, 월간 잡지 <말>을 제외하면 가장 진보성향의 매체였습니다. <김현정의 뉴스쇼>의 아주 먼 전신은 <시사자키>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방송은 저러다가 진행자까지 모두 잡혀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 비판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저자 김정훈 부장은 현재 이 기독교방송 보도국에 계신 분으로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저널리즘 자체의 위기가 운위되는 현실을 진단합니다.

과거에는 캐서린 그레이엄(1917~2001) WP 사주 같은 사람이 방한하면 큰 뉴스가 될 만큼, 언론 기관이나 그 종사자, 오너들의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지금은 대신문, 지상파 방송국이 소셜미디어나 대형 포털에 쩔쩔 매는 상황이며, 광고주들과의 관계 또한 예전 같지 않습니다. 저자는 권력과 자본 앞에 당당한 언론인이기 위해 기독교방송 입사를 택했다고 하며(p29), CBS가 단순한 종교방송이 아니라 연혁상으로 그런 전통이 있었음은 이 서평 앞부분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이 처음 창간될 때에는 영국의 인디펜던트紙를 참조한 면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 지금 그 신문을 보면 독립언론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알 수 있습니다.

뉴스의 현저성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p62에 저자의 도식화가 나옵니다. 제아무리 뉴스 가치가 높고 충격적인 아이템이라고 해도 플랫폼이 없다면 대중의 주목을 애초에 못 받습니다. 여기에 시의성이라는 층(layer)가 하나 추가되고, 맨 위에 임팩트라는 단계가 놓임으로써 뉴스란 비로소 대중의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무런 알맹이 없는 짜깁기 뉴스가 왜 만들어지는가? 플랫폼을 갖지 못했고 취재력이 떨어져 임팩트 있는 뉴스를 못 만들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 뒤 p228에 양심없는 짜깁기 뉴스에 대한 비판이 또 나옵니다.

"기상천외한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야 한다(p96)." 이번 계엄 사태를 두고 저자가 하는 말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는 검은 까마귀 셋을 봤다고 모든 까마귀의 색을 단정할 수 없다고 하고, 그전에 더 유명한 예로 귀납법의 한계를 밝히는 "검은 백조의 발견"이 있기도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내게 모이를 줬던 고마운 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그 손이 닭의 목을 비튼다는 유명한 비유도 있습니다. 아무리 현장에서 취재를 오래했다고 해도 여태 경험으로 익힌 그 모든 지식, 지혜가 언제나 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널리즘도 산업인 만큼 내 매체를 구독해 주는(구독이라는 단어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독자들에게 고마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내 독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가 터졌을 때 언론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저자는 p134에서 오히려 "위안-동조 저널리즘의 위험한 유혹"에 대해 경계합니다. 언론이란, 본연의 사명과 기능에 충실해야지 독자에게 감정적이고 값싼 영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이겠는데, 실제로는 대단히 판단이 어려운 문제이겠습니다.

방송국이다 보니 기자가 따로 있고 또 PD라는 직분이 따로 있습니다. p151을 보면 기자는 새로운 무언가(something new)를 추구하고, PD는 흥미로운 무언가(something Interesting)를 추구한다고도 합니다. 다음 페이지에는 "PD는 기자를 향해 그들만의 이야기에만 빠져있다고, 기자는 PD를 향해 세상을 너무 각색하려 든다도 비판할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게 비단 언론사, 방송국만의 사정이 아니라, 세상의 어느 조직, 회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치입니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나처럼 저 사람도 자신의 일에 진심인지 아닌지가 비로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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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마음 교육 - 젊은 부모를 위한 장자 이야기
이성미 지음 / 인간사랑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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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순리(順理)에 따라 풀려가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순리란 어떤 폭력, 권위에의 굴종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라든가, 자연과 합일하려는 선한 마음 등을 뜻합니다. 춘추 시대 사상가였던 장자는 우리들에게 득어망전, 도중예미를 가르친 분인데, 이런 장자의 교훈을 젊은 부모들의 니즈에 접목한다면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올지, 이 책을 통해 전에는 미처 하지 못한 데에까지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p24에 나오듯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는 현대인에게 발칙하고 가증스러우며 종족 파괴적인 욕구가 있음을 간파하고 준열한 가르침을 내놓았습니다. 자기복제란, 비합리적이고 지극히 이기적인 시도인데, 무모하게도 어떤 이들은 물리적으로 유한한 생을 애써 허구로라도 연장하기 위해 변변치 않은 자아를 복제하여 세상에 퍼뜨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욕구가 발현되는 데 가장 위험한 경우가 바로, 부모가 자식을 향해 그 욕구를 실현시키려 드는 것이겠습니다. 자식은 여튼 스스로의 적성과 길을 찾아 나가야지, 부모의 어떤 복제품이 되어서는 곤란하죠. 저자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책에서 저 구절을 찾아내어 그걸 장자의 가르침과 연결시키려 드는 것입니다.

p50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몇 구절이 인용됩니다. 영혜가 스스로 장벽을 치고 채식주의자의 성에 고립되자 남편은 당황합니다. 저자는 야생의 꿩을 잡아와 닭으로 바꿔 가는 과정의 인류를 환기하며, 꿩이 산에서 제 능력으로 먹이를 사냥하던 시절과, 그의 후손인 닭이 인간으로부터 배급되는 사료에 만족하며 그 나름 편안한 삶을 살다 죽는 단계를 대조합니다. 재미있는 건 꿩만 순치되는 게 아니라, 예측 가능한 쪽으로 삶의 패턴을 바꿔 나가는 사람 역시 야생성을 잃어감을 지적하는 대목입니다. 닭을 키우(고 농사를 짓)기 전에는 인간 역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야생의 존재였으니 말입니다.

"거목은 목재가 되지 않았다(p58)". 영혜도 꿈 한 번 꾸고 나서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듯, 우리들 역시 호접지몽의 고사를 이야기하는 장자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비로소 자아의 불안정함, 비연속성 등을 한 번쯤이라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거목은 그저 도끼질만 당하지 않는 게 아니라, 무용지용은 고사하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늘의 제공, 사방으로 뻗어나간 뿌리를 통해 수분과 토양을 유지하는 등 궁극의 효용을 인간에게 선사합니다. 아이는 대체 부모에게 어떤 효용이어야 합니까?

p125를 보면 부모는 아이의 말을 들을 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지 말고, 聽之以氣, 즉 소리가 아닌 기(氣)로써 들으라고 했다고 하네요. 일반적인 사람 사이의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은 예의도 차려야 하고 말하는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이면 표현도 제대로 못합니다. 말하는 사람한테 마음을 열면 그 사람이 무슨 소리를 떠들건 간에 본심이 제대로 읽힙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아니고를 떠나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는 부모에게 온갖 힘을 다하여 뭔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못들으면 그건 부모의 잘못입니다.

p198 이하에는 齊物論에서 몇 구절이 인용됩니다. 세상 만사 이래서 이런 게 없고 이렇다고 해도 관점을 바꿔 보면 또 저렇지 않은 게 없다고 합니다. 옳다고 보면 옳다가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역지사지를 또한 이야기하는데, 장자의 가르침이야말로 나와 네가 따로 없다는 게 핵심이니 역지사지로 장자를 풀어감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장자는 워낙 포용성이 강해 뭘 키워드로 삼아도 그것으로 해설이 가능하기도 한 사상 체계입니다.

p209에서 저자는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을 논하며 미국의 프래그머티즘 교육학자 존 듀이를 인용합니다. 실용이란 본래 이도저도 아닌 잡탕을 뜻하는 게 아니라 어느 하나의 기조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상선약수의 정신으로 유연히 처세하는 걸 뜻합니다. 아이의 교육도 무릇 이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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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힘 -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는 비밀
박병학 지음 / 라온북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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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는 비밀: 버티는 힘

저자는 충남 태안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p23) 열심히 노력하는 삶의 가치를 심어 주신 부모님의 소중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10대 청소년, 20대 청년들을 카운슬링하면서 저자는 이 시대에 젊은 세대가 입신양명하여 버젓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어떻게 해야 대입이나 취업이라는 험난한 관문을 뚫고 자아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해 줍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자는 다양한 내담자들과 소통하며 도움을 준 분인데, 그 중에는 워킹맘들도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육아의 몫을 전적으로 여성에게만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때문에 가뜩이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아기 엄마들이 더욱 힘들어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 중 하나는, 내 일과 내 삶이 힘들다고 느낄 때 그저 운명이라고 체념할 게 아니라, 이처럼 전문가들의 상담을 받고 인생을 리모델링해 볼 생각도 과감히 가져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도 그런 말씀을 하는데, 내 감정이 나를 집어삼킬 듯 나를 압도하면 그냥 가만히 있지 말고, 종이나 메모장 프로그램을 꺼내 이를 적어 보라는 충고를 저자도 하시네요(p70). 저자께서는 개인적 경험을 들려 주는데, 운전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하십니다. 운전 공포증은 여러 이유에서 생길 수 있는데 여튼 중요한 건 이걸 가능하면 빨리, 또 확실하게 극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익숙한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러 동작을 이어붙이지만 초보자는 하나하나가 힘듭니다. 저자는 마치 아이들이 자전거를 배우듯, 처음에 보조 바퀴를 달고 조심스럽게 발을 떼다가 나중에는 두 바퀴만으로 잘 달리게 되는 과정에 비유합니다.

다들 운동에 열심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운동에 관심 없던 사람은 더욱 위축되고, 겉보기에 자신이 없어지는 건 물론 건강마저 위태로워지는 것 아닌가 겁이 덜컥 나기도 합니다. p100을 보면 저자께서 운동 동영상(알고리즘이 추천해준)을 보고 정말 간단한 것부터 따라해봤는데, 이게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이면 자신에게는 성취감도 크게 느껴지고 전에 없던 자신감도 쌓이더라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일단 실천에 옮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성장시키고 종전보다는 업그레이드된 인간으로 키우는 건 무엇인가? p126 이하를 보면 저자의 견해가 나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련을 극복하고 그로부터 오히려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다, 어려운 시기에도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점을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털어놓는다고 하며, 저자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주환 저 <회복탄력성>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네요.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뜻깊은 일이 이뤄지려면 하나의 방향에서 하나의 힘만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미가 밖에서 쪼고 알 안에서 새끼도 쪼아줘야 껍질을 째고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p156에서 저자는 큰 방향(10배 목표)과 작은 루틴(플래너 작성)이 합쳐져야, 원대한 목표도 일상의 작은 계획도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립감을 동반하는 실패(p168)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한 감정정리의 시간(이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저자가 언급했습니다)을 가지라고도 조언합니다.

저자 자신이 직접 겪어낸 고난의 시간, 그를 통한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치열한 과정이 나와서 큰 도움이 된 책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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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판소리 - 조선의 오페라로 빠져드는 소리여행 방구석 시리즈 3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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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11월에 이서희 저자의 <방구석 오페라>를 리뷰했었습니다. 이 신간은 조선의 오페라라고 할 판소리가 그 주제입니다. 몇 달 전 정년이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새롭게 판소리에 관심 갖게 된 독자들도 있겠지만, 막상 접해 보면 어렵지도 않고 한국 사람이라서인지 쉽게 공감, 몰입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감정 이입, 그러면서도 직관적이고 열정적인 해설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책은 모두 다섯 파트로 나뉩니다. 1장은 현재 대본 전체가 온전히 내려오는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다섯 마당을 다뤘습니다. "조선의 오페라"라는 말처럼 대본이 온전해야 그걸 판소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판소리는 본래 열두 마당인데, 나머지 일곱 마당은 아예 실전되었거나 일부만 전하는데, 일부라도 그나마 전하는 네 마당을 이 책의 제2장에서 다룹니다. 저자께서는 제2장 제목을 "잃어버린 조선의 아리아들"이라 붙였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죠.

판소리가 본래 신명 나는 놀이와 표현의 장(場)이지만, 특히 이 책에서 저자의 해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일 만큼 흥겹고 독창적입니다. 심청가는 우리가 효녀 이야기로만 알고 밋밋한 이야기려니 생각하는데 무대가 중국 송나라까지 확대되는 등 스케일도 넓고 신분 상승의 정도도 훨씬 큽니다. 하필 송나라가 배경일까 생각도 저 개인적으로 해 봤는데, 당나라 때는 귀족 사회여서 사회적 수직 이동이 쉽지 않았습니다. 여진, 몽고 등이 쳐내려와도 사대부들이 송조에 충성하며 끝까지 저항한 건, 이 나라가 그만큼 사대부를 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p35에는 심청의 효가 오늘날에 어떤 의의를 갖는지 저자의 힘찬 서술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엄마의 미모를 닮아 예쁘기로 소문났던 춘향은 마침 이 고장 남원 부사로 내려와 있던 이한림 사또의 아들 이몽룡과 우연히 만나 연을 맺게 됩니다. 롱디 연애 중이면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어야 했는데 무심한 몽룡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20세기 초 김영랑 시인이 말했듯 잔인하기까지 한 모습이 보이는 것도 솔직히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 여자들 같았으면 이런 타입은 변학도보다 더한 놈이라고 맞아죽을지도 모릅니다. p60에 점고라는 뜻이 나오는데 원래 지방관이 새로 부임하면 인력과 물자가 장부상의 수치와 일치하는지 점검하게 마련이죠. 기생 점고라는 말은 듣도보도 못한 말인데 이 춘향가 때문에 현대인들은 점고를 기생 점고라고만 알게 되었습니다. 19세기 관객들은 변학도 대사로 "기생 점고"라는 말이 나왔을 때 얼마나 손뼉을 치고 크게 웃었겠습니까.

<삼국지연의>가 조선 후기에 어지간히 인기가 있었는지 <흥보가>에도 장비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고 현전 다섯 마당 중에 아예 <적벽가>(p86 이하)가 있기까지 합니다. 저자는 이 작품을 가리켜 "바람과 불의 교향곡"이라고 합니다. 공명이 간절히 동남풍을 청하고 악의 화신(적벽가 안에서는) 조조의 진영, 이미 연환계에 넘어가 모든 전선(戰船)이 묶인 상태여서 한번 불화살이 날아오자 생지옥으로 화하는 묘사가 박진감 넘칩니다. 저자의 평가대로, 지배층의 야욕에만 기인한 동원, 착취에 신음하는 기층민중의 원한과 풍자가 곳곳에 표현되었기도 합니다.

노래와 세부 표현은 없어졌지만 줄거리라도 일부 전해오는 네 마당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하네요. 숙영낭자타렁의 줄거리가 p154 이하에 저자의 맛깔난 설명으로 이어지는데... 백선군에게 몸을 허락할지 안할지를 놓고 망설이던 숙영은 결국 그와의 사이에 동춘, 춘앵이라는 아이들까지 둡니다. 숙영 낭자 같은 훌륭한 야인에게는 비틀어진 영혼을 지닌 매월 같은 쓰레기가 옆에 들러붙어 해코지를 하려 들기 마련인데, 현실에도 나잇값도 못하는 이런 인간이 꼭 있습니다. 백공 부부도 참으로 잘못하는 게, 숙영의 죽음 경위를 저렇게 잘못 전하면 망인을 두 번 욕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미에 저자는 바리데기 설화와 이 숙영낭자타령을 대조하면서 현대에 재조명될 여지가 훨씬 큰 게 후자라고 강조합니다.

책의 3, 4, 5장은 향가(鄕歌), (후대의) 고전시가(시조, 한시, 그 외 이야기), 고전소설 등에 할애되었습니다. 역시 독창적인 시각으로, 의외로 현대인들이 잘 모르는 고전에 대해서도 그 의의를 잘 짚어 주시는데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이 읽어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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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책 인문학 세계 고전
사사키 다케시 외 83명 지음, 윤철규 옮김 / 이다미디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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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은 우리의 독서 의욕을 북돋웁니다. 인문이란, 사람의 본성과 사회의 작동 원리, 감정과 이성의 핵심을 통찰하여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일깨웁니다. 그래서 기술 서적, 공학 서적처럼 직접적인 효용을 전달하지 않아도 수백 수천 년 동안 읽히는 게 고전입니다.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5 이하에는 고(故) 송자(宋梓) 교육부 장관의 추천사가 나옵니다. 책에는 직함이 연세대 총장(前)이라고만 나오지만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 명지대 총장도 지내신 분입니다. 활동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연대 총장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분입니다. 6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특강 오셨을 때 접한 그 맑고 깊은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들리는 듯합니다. "누군가가 나더러 이 책과 고전 한 권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의 완성도가 높다는 뜻인데, 집필진 중 사사키 다케시[佐佐木毅] 전 도쿄대 총장도 포함되어 있고, 압축된 문장 안에 깊이 있는 통찰과 해설이 담겨, 이 책이 단순한 요약서가 아니며 문사철(文史哲)의 참된 경지로 독자를 이끄는 가이드라는 평가가 암시됩니다.

미국은 1776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에 유례가 없던 공화정을 꾸려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민주정, 공화정은 천 수백 년 전 그리스, 로마에도 있었지만 성문 헌법을 따로 만들고 삼권을 분립하며 대통령도 권한 행사를 이성적으로 자제하는 풍조는 여태 인류사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사람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 신생국의 훌륭한 정치를 잘 분석했을 뿐 아니라, p110을 보면 현대 대중 사회의 모습을 예견이라도 한 듯, 중산 계급이 주동이 되어 무난하게 중지(衆智)를 모아 가는 모범적인 정치를 차분하게 서술하는 놀라운 대목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사회계약론이라 해도 홉스, 푸펜도르프 등은 복종 계약을 전제로 논의를 편 반면, 장 자크 루소는 "주권자인 국민의 형성 행위(p45)"가 담론의 중핵이 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본능에서 정의로, 충동에서 의무로, 욕망에서 가치로"라는 루소의 논의는 사실상 현대 민주주의, 주권재민 사상, 자유와 다양성의 존중 등 핵심 가치의 창안지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 계약 하에서 사람들은 종래의 불안정하고 들쭉날쭉한 자연인들이 아니라 일반 의지(volonte generale)의 영도 하에 새로운 법인격을 부여받는다는 그의 서술은 언제 읽어도 박력이 넘치고 심오한 울림을 유지합니다.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는 애덤 스미스, 이를 발전시키고 내용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 이는 데이비드 리카도입니다. 리카도는 오늘날 세계인 모두가 추구하려 노력하는 자유무역의 효용과 비교우위론을 정초한 천재였습니다. p171을 보면 J S 밀(Mill)이 논의되는데 그는 천재였던 아버지 제임스 밀로부터 광범위한 지식을 교육받았고, 근대 사회를 이끌어갈 대원칙, 철학적 원리를 다듬는 데에 독자적인 기여를 남겼습니다. 재미있는 건 선배 격인 스미스나 리카도는 "가치론"을 중시했는데, 밀은 특유의 통찰력으로 가격 이론이라는 도구가 앞으로 가치론을 대체한다고 내다봤던 것입니다.

사자의 강한 이빨과 턱, 악어의 재생력 강한 껍질이 없었으나 인간은 생각하는 힘 하나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p330 이하에 나오는 <팡세>를 저술한 파스칼은 "한없이 연약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서 위대하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업적으로 유명한데, p337의 설명을 보면 "순수 이성이라고 할 때의 '순수'는 경험이 개재하지 않은, a priori(선험적인)한 상태"라는 그의 유명한 규정이 인용됩니다. "근대 과학의 대자화(對自化)를 표방하지만 지식만능주의는 아니"라는 책의 설명에서 엄청난 공력이 느껴집니다. 이런 시원시원하고 정확한 문장들 때문에 송자 교육부장관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나 봅니다.

이성만능의 차가운 근대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의 강력한 의지를 중시하는 니체 같은 철학자가 등장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시적(詩的)인 문장으로도 유명한데 "내 적들은 강력해졌고 내 가르침의 초상은 왜곡되어 버렸다(p377)"라며 산을 다시 내려가는 거인의 내러티브를 장엄하게 낭독하는 니체 영혼의 위엄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구태여 저자들이 이 대목을 인용한 건 나중에 히틀러 세력이 니체의 사상을 잘못 끌어대어 프로파간다에 활용한 사실을 환기하는 듯도 합니다. 

보통은 정치 사상, 철학의 조류 등을 요약 설명하는 데 그치지만 이 책은 마지막 5장에서 역사, 종교 분야애서의 명저까지 소개합니다. 에드워드 기번, 토인비, 알베르 마티에 등의 명저 소개는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대목만 읽어도 세계사 일부가 잘 요약되어 독자의 머리에 안착할 만큼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번역자 윤철규 대표가 권말에 쓴 후기는 "교양"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 혼란스럽고 천박한 21세기에 어떻게 변용, 승화, 재구축되어 독자와 마주할지에 대해 깊은 생각의 여지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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