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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공부 -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어쩌면 우리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는 하나, 엄연히 별개로 존재하는 다른 개념을 서로 같은 것이라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우 리, 그리고 우리 앞 세대들, 이후 우리를 대신할 세대들은, 인생을 미리 포기한 처지가 아니고서야,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 성인이 되어 행하는 작업을 '공부'라고 부르기가 다소 민망하다면, 이를 '자기계발'이라고 불러도 좋다. 아무튼, 우리는 왜 평생을 공부에 몰두하는 것일까? 사회가 점점 지식기반으로 변화함에 따라 정신적 동력과 자산을 보충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치에서조차 도태되고 마는 물리적, 실체적 이유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인간은 어떤 환경과 위상에서건 무엇인가를 끊임 없이 확인하고, 확장하며, 확증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그 본질상 지니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존재의 외적, 내적 동력이 되는 이 학습의 욕구와, 실제 우리가 이 시대 이 장소에서 '공부의 주류 양식'으로 자리잡은 그것과는, 서로 과연 밀접한 함수 관계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미 우리는 이 답을 알고 있다. 즉, 그런 '공부 방법'은, 그저 몸만 축나고 어쩌면 정신에까지도 무익한 에너지 소모 기제 이상이 아닌, 기이한 자기 학대나 퇴화에의 트레이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는 이 책에서 이미, 서두의 추천사에서도 잘 밝혀 놓고 있다. 우리가 흔히 도서관이나 학습실, 개인 서재에서 행하는 그 이상한, 어쩌면 '학습된 무기력의 드릴링'에 가까운 그 '동작'은, 이미 참된 의미에서의 '공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 는 여태, 지성의 전당이라 일컫는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익한 노력, 즉 시험에 출제되기로 예정, 기대되어 있는 복잡다기한 암기사항을 요약적으로 적어 두고 유독 시험 기간을 앞두고만 널리 애독(?)되는 그 resume, 속칭 '족보'와 무용성과, 이를 통해 그 학생의 일생을 통해 '능력 증명서'처럼 따라다니는 성적표의 효용에 대해, 깊은 강도로 회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국 출장길에 들른 현지 대학의 실태 조사와 전문을 통해, 그런 무익한 암기, 반복, 벼락치기 서술 작업이 단지 우리만의 사정이 아닌, 세계의 중심이자 거의 모든 인재의 집결 장소인 미국의 대학에서라고 그다지 크게 다른 형편이 아님을 새삼 깨달은 적이 있다. 한국이 딱히 교육 현실이 열악하다거나 후진적이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그곳이라고 해서 유달리 선진적인 학습 평가 기법을 도입한 게 아님은 마찬가지였던 것! 그럼, 일견 무기력을 학습한 노예의 퇴행적 행동 패턴으로 보이는 이런 이상한 단순 반복-평가-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과의 악순환은, 별개의 존재 이유가 있기에 이토록 글로벌하게 행해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여 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른 이야기를 좀 하기로 하자.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책을 읽을 때에는 제목과 목차를 통해 나름 내용을 예측하고(A), 해당 부문에서 내가 여태 구축하고 있던 지식의 체계는 어떤 것이었는지 반추하며(B), A와 B를 종합(Synthese)하여 이 새로운 독서의 보람을 찾는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와이즈베리의 이 책은, 실망과 기대 충족을 동시에 안겨 준 경우였다.
즉, "대체 왜, 대학에서의 학업 성취도 평가가 보다 과학적이거나 실용적으로 개선될 기미가, 이토록이나 보편적으로, 혹은 글로벌하게도, 도통 보이지 않는가?"라는 보다 근본적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 책을 통해 전혀 얻질 못했다. 이 책은 이 사항에 대해서는, 대단히 피상적으로 인상 평가를 하는 데에 그치고 있는데, 그 요지는 '물리학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실제 물리계에서 벌어지는 운동 현상에 대해 (실제 감각적인)이해가 증진된 바 거의 없음이 실증되듯, 클래스에서 높은 학점을 받은 학생이 진정으로 그 과목에 대한 뛰어난 이해를 했다거나, 혹은 그 지식을 내적으로 체화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상식의 확인에 그치고 있다. 이런 점은 책을 읽지 않아도 이미 동시대인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바이며, 어찌 보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 지적 능력의 평가 순위에서 상향을 이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열등생들의 좋은 핑계로 애용, '악용'될 소지마저 있는 '도매금 진단'으로 빠질 위험까지 있다. 그런 건 생산적 독서를 기대하고 읽은 독자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밀도가 부족한 현상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참된 공부, (혹은 우리말 제목으로 저리 달려 있듯) 최고의 공부란 대체 무엇인가?"리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이 책은 실망스러운 현상 진단만 잔뜩 늘어놓고 있는 중인가? 이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런 질문이 현생 인류의 얕은 지혜로 그 완전한 해명이 나올 성질이 애초에 아님을 이해한다는 전제 하에, 이 책은 아쉬운 대로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나름의 성실한 태도로 그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영미권 저자들의 서술 미덕 중 하나는, 추상적이고 고답적인 선언적 언표에 그 결론이 머물지 않고, 실제의 적용 사례를 최대한 다양히 들어가며 귀납(프랜시스 베이컨 이래 그들 지성계의 확고한 공감 기저이기도 하다)의 성실한 행보를 지속한다는 점이다. 이 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니, 최고의 공부가 무엇인지를 논한다면서, 최고의 인생, 나아가 최고의 '도'를 논할 셈인가?" 이런 생각이 가끔 떠오를 만큼, '공부'에 포커스를 맞춘 책치고는 너무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다는 지적을 하는 이도 내 주변에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어차피 한두 마디로 답이 안 나올 질문이니만치, 상정 가능한 최대의 범위에서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저자의 고육책이 아닐까 싶었다.

오타가 여럿 있던데, 예를 들어 이 페이지 '모델'은 '모텔'아 맞을 것 같다.
' 최고의 공부'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 평범한 독자(라고는 하나 직장과 일상에서 사력을 다해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있는, 만만치 않은 엑스퍼트급 일상인들임이 분명하다)가 갖고 있는 수준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미리 감지하고 있는 해답을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 실천에 옮기는가 하는, 그 정도와 방법에 있을지 모른다. 이 책에서 들고 있는 풍부한 사례는, 최소한 그 실천화의 좋은 자극이 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최고의 공부'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최고의 공부'에 대한 못말릴 강박에 찌든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볼 메타적 여유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최소한의 의의'를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