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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 천안함 특종 기자의 3년에 걸친 추적 다큐
김문경 지음 / 올(사피엔스21)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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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요즘 차를 몰고 거리를 다니다 보면, "천안함 용사들,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같은 문구가 아로새겨진 현수막을 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오 늘의 한국은 모든 문제와 이슈가 정치적 스탠스에 따라 파당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이다. 이른바 '진영논리'라고 하는 건데, 개별 이슈의 독립성과 특수성에 상관없이, 자신이 소속되거나 지지하는 정파의 주견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정해 버리고, 반대편의 논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다. 거기까지는 또 그러려니 하겠는데, 남의 불륜은 그저 불륜이요 제가 하는 일은 로맨스라는 식으로, 자신의 '꽉 막힘'은 이념적 일관성과 지조로 강변하고, 남의 논리는 그저 '말이 안 통함'으로 매도하는 경향이다. 이런 사회라면 그 존립의 기반이 붕괴하는 걸 피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소속한 거대 집단 혹은 진영의 기계적 논지에 무조건 세뇌될 것이 아니라, 개별 사안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 혹은 진실에 가장 접근하는지 구체적인 인지와 포섭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제의 중요성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직종은 어느 누구보다도 언론분야, 즉 기자들의 직업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말미에도 나오지만, 제아무리 전문성과 직업적 특수 지식으로 무장했다 한들, 특정 정치 세력과 가까워진다는 그 한 가지 평판만으로, 전체의 신뢰성을 송두리째 상실하고 마는 게 현실이다. 기자들은 다양한 현장을 취재하며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정치적 중립성과 '오로지 사건의 진실'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축만 무너져도, 기자라는 직업인로서 디딜 발판이 사라지고 만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김문경 씨는 YTN 기자다. 기자라는 직업은, 과장 하나도 보태지 않고 "특종에 살고 특종에 죽는' 직종이다. 기자 생활 전 커리어를 통해 특종 하나를 건지는 것은, 단순화하자면 심마니가 '심봤다'를 외치는 바로 그 운명의 순간에나 비길 만큼 절박한 과제이다. 이 책에서도 저자 김문경은, 자신을 캐릭터화한 '오기자'를 통해(나는 처음에, 저자 김기자와 친한, 직장의 다른 동료가 따로 있어 그를 지칭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내 지인 중 하나가 YTN에 근무하는, 오씨 성을 가진 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는 이 저자분에 비해 연하지만), 특종의 발견이 기자로서 얼마나 절박하면서도 말단의 신경까지 흥분하게 하는 일인지 실감나게 적고 있다. 이 책의 내용과 직접 상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 본문 중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 '옷 로비 사건'의 경우도 역시 기자가 터뜨려 장장 일년 동안 전국을 달구게 한 대특종이었는데, 파장과 범위를 생각할 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이 천안함 특종을 터뜨린 기자라면 그 성취감이 처음에 어느 정도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 사안이 워낙 중대하다 보니 기쁨은 간 데 없고, 처음 세상에 대사건을 알린 책임감이 그 희열을 대체하다가, 나중에는 회한과 부담만이 커리어를 압도하는 느낌까지 털어놓고 있다.

이 책은 실명 노출, 전형적 르포 형식으로 서술해 나갔어도 충분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저자는 바로 특종을 터뜨린 그 수훈자이기에 그런 정면 돌파식 진술 양식을 택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김문경 기자 본인이 아니라면, 이전 혹은 이후 누가 그런 작업을 감행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다분히 겸손하게도(?), 이런 소설체의 형식을 빌어 픽션처럼 그 중차대했던, 지금도 여전히 한반도 전역을 정치 이상의 무게로 짓누르는 그 사건을 묘파하고 있다. 이는 일단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논쟁의 중심에 섣부른 자극을 주어, 비생산적인 대립으로 분위기가 악화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라든가, 정치적 중립성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은 기자로서의 소명 의식이 다분히 작용했을 줄 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도대체 이 작은 땅덩어리(정확하게는 발생 장소야 바다 속이었지만)에서, 뭐가 이리도 복잡한 진상을 지닌 미스테리적 사건이 이처럼이나 미묘한 시기에 터질 수 있는지, 특종을 한 기자 자신도 대담한 접근이 꺼려질 만큼, 그 실상의 인식이 부담스럽게 다가온 이유도 있을 것이다.

부대끼며 사는 동시대인들의 사연과 갈등이 너무도 꼬이고 꼬여, 사고가 터져도 대체 그 발생 주체, 책임 소재가 누구인지도 모를 만한 사고만 터지는 것일까? 대참사의 원인을 구명하기에 앞서, 먼저 비틀리고 왜곡된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오염시켜 온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하늘의 경고이기라도 한 것일까? 섬뜩한 진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추악한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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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공부 -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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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는 하나, 엄연히 별개로 존재하는 다른 개념을 서로 같은 것이라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우 리, 그리고 우리 앞 세대들, 이후 우리를 대신할 세대들은, 인생을 미리 포기한 처지가 아니고서야,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 성인이 되어 행하는 작업을 '공부'라고 부르기가 다소 민망하다면, 이를 '자기계발'이라고 불러도 좋다. 아무튼, 우리는 왜 평생을 공부에 몰두하는 것일까? 사회가 점점 지식기반으로 변화함에 따라 정신적 동력과 자산을 보충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치에서조차 도태되고 마는 물리적, 실체적 이유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인간은 어떤 환경과 위상에서건 무엇인가를 끊임 없이 확인하고, 확장하며, 확증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그 본질상 지니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존재의 외적, 내적 동력이 되는 이 학습의 욕구와, 실제 우리가 이 시대 이 장소에서 '공부의 주류 양식'으로 자리잡은 그것과는, 서로 과연 밀접한 함수 관계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미 우리는 이 답을 알고 있다. 즉, 그런 '공부 방법'은, 그저 몸만 축나고 어쩌면 정신에까지도 무익한 에너지 소모 기제 이상이 아닌, 기이한 자기 학대나 퇴화에의 트레이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는 이 책에서 이미, 서두의 추천사에서도 잘 밝혀 놓고 있다. 우리가 흔히 도서관이나 학습실, 개인 서재에서 행하는 그 이상한, 어쩌면 '학습된 무기력의 드릴링'에 가까운 그 '동작'은, 이미 참된 의미에서의 '공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 는 여태, 지성의 전당이라 일컫는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익한 노력, 즉 시험에 출제되기로 예정, 기대되어 있는 복잡다기한 암기사항을 요약적으로 적어 두고 유독 시험 기간을 앞두고만 널리 애독(?)되는 그 resume, 속칭 '족보'와 무용성과, 이를 통해 그 학생의 일생을 통해 '능력 증명서'처럼 따라다니는 성적표의 효용에 대해, 깊은 강도로 회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국 출장길에 들른 현지 대학의 실태 조사와 전문을 통해, 그런 무익한 암기, 반복, 벼락치기 서술 작업이 단지 우리만의 사정이 아닌, 세계의 중심이자 거의 모든 인재의 집결 장소인 미국의 대학에서라고 그다지 크게 다른 형편이 아님을 새삼 깨달은 적이 있다. 한국이 딱히 교육 현실이 열악하다거나 후진적이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그곳이라고 해서 유달리 선진적인 학습 평가 기법을 도입한 게 아님은 마찬가지였던 것! 그럼, 일견 무기력을 학습한 노예의 퇴행적 행동 패턴으로 보이는 이런 이상한 단순 반복-평가-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과의 악순환은, 별개의 존재 이유가 있기에 이토록 글로벌하게 행해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여 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른 이야기를 좀 하기로 하자.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책을 읽을 때에는 제목과 목차를 통해 나름 내용을 예측하고(A), 해당 부문에서 내가 여태 구축하고 있던 지식의 체계는 어떤 것이었는지 반추하며(B), A와 B를 종합(Synthese)하여 이 새로운 독서의 보람을 찾는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와이즈베리의 이 책은, 실망과 기대 충족을 동시에 안겨 준 경우였다.


즉, "대체 왜, 대학에서의 학업 성취도 평가가 보다 과학적이거나 실용적으로 개선될 기미가, 이토록이나 보편적으로, 혹은 글로벌하게도, 도통 보이지 않는가?"라는 보다 근본적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 책을 통해 전혀 얻질 못했다. 이 책은 이 사항에 대해서는, 대단히 피상적으로 인상 평가를 하는 데에 그치고 있는데, 그 요지는 '물리학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실제 물리계에서 벌어지는 운동 현상에 대해 (실제 감각적인)이해가 증진된 바 거의 없음이 실증되듯, 클래스에서 높은 학점을 받은 학생이 진정으로 그 과목에 대한 뛰어난 이해를 했다거나, 혹은 그 지식을 내적으로 체화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상식의 확인에 그치고 있다. 이런 점은 책을 읽지 않아도 이미 동시대인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바이며, 어찌 보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 지적 능력의 평가 순위에서 상향을 이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열등생들의 좋은 핑계로 애용, '악용'될 소지마저 있는 '도매금 진단'으로 빠질 위험까지 있다. 그런 건 생산적 독서를 기대하고 읽은 독자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밀도가 부족한 현상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참된 공부, (혹은 우리말 제목으로 저리 달려 있듯) 최고의 공부란 대체 무엇인가?"리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이 책은 실망스러운 현상 진단만 잔뜩 늘어놓고 있는 중인가? 이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런 질문이 현생 인류의 얕은 지혜로 그 완전한 해명이 나올 성질이 애초에 아님을 이해한다는 전제 하에, 이 책은 아쉬운 대로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나름의 성실한 태도로 그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영미권 저자들의 서술 미덕 중 하나는, 추상적이고 고답적인 선언적 언표에 그 결론이 머물지 않고, 실제의 적용 사례를 최대한 다양히 들어가며 귀납(프랜시스 베이컨 이래 그들 지성계의 확고한 공감 기저이기도 하다)의 성실한 행보를 지속한다는 점이다. 이 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니, 최고의 공부가 무엇인지를 논한다면서, 최고의 인생, 나아가 최고의 '도'를 논할 셈인가?" 이런 생각이 가끔 떠오를 만큼, '공부'에 포커스를 맞춘 책치고는 너무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다는 지적을 하는 이도 내 주변에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어차피 한두 마디로 답이 안 나올 질문이니만치, 상정 가능한 최대의 범위에서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저자의 고육책이 아닐까 싶었다.

오타가 여럿 있던데, 예를 들어 이 페이지 '모델'은 '모텔'아 맞을 것 같다.

' 최고의 공부'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 평범한 독자(라고는 하나 직장과 일상에서 사력을 다해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있는, 만만치 않은 엑스퍼트급 일상인들임이 분명하다)가 갖고 있는 수준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미리 감지하고 있는 해답을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 실천에 옮기는가 하는, 그 정도와 방법에 있을지 모른다. 이 책에서 들고 있는 풍부한 사례는, 최소한 그 실천화의 좋은 자극이 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최고의 공부'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최고의 공부'에 대한 못말릴 강박에 찌든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볼 메타적 여유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최소한의 의의'를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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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크리처스 - 그린브라이어의 연인,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1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
캐미 가르시아.마거릿 스톨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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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뱀파이어들의 이야기가, 영원히 그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고만 싶을 틴에이저들을 겨냥한 판타지물의 주제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철없는 젊은이들은 저희들의 청춘이 마냥 영원할 것이라고만 착각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본능적 영악함은 그 터질 듯한 꽃봉오리의 선도가 어느 한 순간 낙화의 처연함을 맛볼 것이라는 점도 잘 안다. 잔인하고 철두철미한 시장의 계산은 이들의 환상과 집착을 정조준함이 당연했고, 여기에 <나이의 초월과 망각>을 새 화두로 내세운 시대의 한 트렌드, <어모털리티>의 의식 조작적 선동도 한 몫 한 바 있다.


여기에 기묘함(queerness)를 더하는 건 두 공동저자의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 커리어다. 한 저자인 캐미 가르시아는, 작중 애마 트루도를 대변하듯 아직도 남부 고유의 자부심과 설욕 의식이 에고 한 구석을 떠나지 않은 정통 남부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생업의 대종을 10대 청소년을 상대하고 교육하는 일로 이어가는 중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기막힌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한 이 <남부>와 <틴에이저> 키워드 둘의 조합은, 끝없이 이어져 식상하다 싶은 에버그린 흡혈귀 스토리에 새로운 활력과 호기심 요소를 충전한다. 한편 다른 한 사람의 공저자인 마가렛 스톨은, 역시 영화와 소설 분야 모두에서 그 뱀파이어 피처의 열기와 활력이 식지 않고 있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 받은 하이브리드성의 교육 배경을 지닌 신인 작가다. 그녀의 교육 자산 역시 정통 영문학의 영역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 발은 첨단의 성장 산업인 비디오 게임 제작에 들여 놓은, 고전과 모던의 혼성 크리에이티브를 요하는 이력을 완성해 나가는 중이다.


예 전, 수학자 겸 철학자인 레이먼드 스멀리언은 그의 저서 <이 책의 제목은 무엇인가>에서, 책 말미에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퍼즐 형식으로 간단하게 소개하며, "그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 세계가 멸망하는 그런 여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명제의 진위를 논리학적으로 검증한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게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1998년 프랑스의 영화 감독 뤽 베송은 역시, 그녀(과연 성별상 '그녀'의 카테고리였을까?)가 그 미션에 실패할 경우, 지구는 물론 전 우주가 파국의 운명을 맞을 수 있는, 궁극의 에너지원 '제 5원소'를 체화한 어느 소녀의 어드벤처를 영상으로 옮긴 바 있다. 삼라만상은 정해진 섭리에 의해 탄생하고(만약 그 시작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운행을 그 고유의 항상성 원리에 의해 지속하며, 주어진 엔트로피의 탄성이 교란 한계점을 맞이하면 소멸하게 된다. 허나, 그 코스모스에 갇힌 피조물(크리처)들은, 이 분명하고도 불가역한 페이트에 맞서 절망적이고도 영웅적인 저항을 지속하는데, 그것 또한 소립자들의 입자 가속기 속 격렬한 운동이나 마찬가지로 물리계의 법칙 준수 양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분명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그러나 그 파국은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그 결말을 회피하려 든다. 여기에 개입하여 운명의 분수령을 변환하려 드는 건 아직은 약하고 미성숙하게만 보이는 제 5 원소의 잔다르크적 출정(出征)이다.


4 월 18일 제법 그 면면이 흥미로운 진용까지 갖춰 화려한 스크린으로까지 옮겨져 우리에게 전면적으로 다시 선뵈는 이 이색적인 판타지물은, 이러한 오랜 문학적-신화적-종교적 전통의 외피와 얼개 위에다, 미국 고유의 흑역사적 상처까지 접합하여 기묘한 템포와 색채로 전개해 나가는 <뜻하지 않은 여정의 시작>이다. 리나(Lena)와 이선(Ethan)은 과연 이 은하계적 변곡점의 중력 교차의 난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타개, 탈출, 최종적 조율 작업을 행할 것인지? 한 개인의 성숙과 통과의례가 전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기막힌 미시와 거시의 상호 얽힘은 알고 보면 소설 속에서의 허구만은 아니다. <체인지메이커>라고 했던가. 결국 보잘것없어 보이는 개인의 실천과 인연이 씨줄, 날줄로 얽혀, 거대한 흐름의 근본 흐름을 바꾸는 건 우리 인류가 익히 접해 왔던 우주의 섭리에 가깝다. 청소년 판타지에서 오랜 진리와 교조를 확인하는 뜻밖의 소득은 깨어 있는 독자에게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며, 하물며 수업시대를 견실한 인문학적 소양으로 수놓고 담금질한 능력 있는 저자들의 손을 통해서라면 당연 기대함직한 멋진 체험이다. 소설과 영화는 알고 보면 상호 대체 관계가 아닌, 입체적 인식의 개안을 돕는 다용도 키트를 구성하는 쌍둥이 형제이니, 이 변덕스러우나 설레는 기후의 4월에 우리를 저 흥겨운 놀이동산으로 신나게 띄워줄 청룡열차라 안심하고 의지해도 좋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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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와의 대화 -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입각한 강력한 리더십의 정체를 묻다 아시아의 거인들 1
리콴유 & 톰 플레이트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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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다 읽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대담 형식의 책이 성공하려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상호 철저한 이해를 그 대화의 바탕으로 하거나, 아미면 둘 사이에 어떤 수준의 공감이 미리 두텁게 형성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아니면 예전 호메이니를 인터뷰한 마 이크 월리스처럼, 공감은커녕 상호 교차점이나 공감사항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인터뷰라야 최소한 보는 재미라도 생기는 것 아닐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처럼 서로를 전혀 모른다고도 할 수 없고, 처한 위치와 성장 배경, 개인적인 성향 따위가 워낙 다르기에 그렇다고 가뜩이나 사소한 공감대가 더 성장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 실로 미묘한 관계에 놓인 두 사람이, 하나는 인터뷰어로, 다른 상대는 그 질문을 받는 사람의 위치에서 진행하는 인터뷰가 과연 큰 과실을 거둘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이 런 느낌이 책을 읽기 전이 아닌, 책을 다 읽은 후에 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이 그러했다면, 그 독서는 거의 실패에 가까운 것 아닐까? 그런데, 정직하게 느낌을 다시 한 번 resume해도, 그렇게까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런 복합적이고도 미묘한 독서 후 느낌은 그 정체가 무엇일까?


분 명히 말하지만, 인터뷰어인 톰 플레이트가 분명 인간 리콴유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우선 리 전 수상과 상당한 나이 차가 나는데, 이는 그가 성장할 당시에 겪고 그의 성장 토양이 되어 주었을 문화적 배경이 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 다름 아니다. 그 는 또한, 식민지로서 민감한 태도로 대할 수밖에 없는 영국에서 젊은 시절 유학을 마친 리를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그저 뼈속까지 뉴요커인 리버럴에 불과하다. 결정적으로, 그는 백인종이고, 인터뷰 대상인 리는 중국계의 피가 흐르는 동양인이다. 체형만 봐도 그는 통통한데다 느긋한 낙관주의자이고, 리는 깡마른 원칙주의자요 남이나 자신이나 흐트러진 구석을 참고 보지 못하는 규율의 사나이로 일생을 살아왔다.


이 런 두 사람이 만나서, 비록 이전부터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고는 하나 과연 얼마나 생산적인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나의 이런 불안감은, 사실 플레이트가 <고슴도치와 여우론>을 대화의 화제 중 하나로 삼는 대목을 읽으면서 거의 극에 달했다. 리 처럼 자신을 세상에 둘도 없는 유니크한 존재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사람에게, 둘 중 어느 유형에 속하겠냐는 진부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무리한 시도일 거라는 짐작에서였다.  당연히, 리는 이 질문에 당혹스러움과 어이없음의 심경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플레이트 자신의 주관적인 묘사 중에서도 그런 점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게 드러나고 있다. 더군다나 자신을 여우도 아닌 고슴도치로 규정하려 드는 플레이트의 태도에서, 리는 거의 열등 분자를 대하는 태도까지 암시한다. 내심 "녀석하곤, 쯧쯧... 살이나 빼야 머리가 돌아가려나.."하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이런 불협화음 중에 분명히 드러나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과 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의 차이이며, 다른 한 편으로 서로가 너무나 다름을 민감히 인식하면서도, 어떻게든 상호 공존을 모색하려는 나름의 진지한 노력이다. 이 책은 물론, 인터뷰어 톰 플레이트가 주인공이 아닌, 대담 대상자 리콴유가 주인공인 책이다. 하지만 인터뷰어 역시 나름 거물급 언론인, 혹은 독자에게 스타급으로 인식된 그(우리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도 그의 이름은 자동 완성 대상인 검색어이며, 최근에는 반기문 사무총장과의 인터뷰로 더 관심을 받기도 했다)이기에, 그 의 개성은 리콴유의 그것 못지 않게 이 책의 재미 핵심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골수에 유교정신과 효율성 추구, 혹은 엘리트정신이 흐르는 독재자 리콴유의 내심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다소 미흡했을지 모르나, 대신 호기심어린 눈으로 동양을 주시하는 서양의 평범한 시민의 시선이 극동의 영혼과 만났을 때, 어떤 파장과 주파수의 불꽃이 튀는지 정도는 재미있게 보여준 책 아니었나 싶다. 결론은, <재미있는 책>이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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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비사 - 은이 지배한 동서양 화폐전쟁의 역사
융이 지음, 류방승 옮김, 박한진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이어령은 얼마 전에, '역전 앞' 같은 중복잉여 표현을 두고, 반드시 문법적 오류로 볼 필요 없고, 민족 정서의 일부가 반영된 수사로 파악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언어의 규범적 고찰을 두고 반드시 권위자의 언술을 인용할 필연적 이유는 없고, 건전한 어문학적 감각과 지식을 갖춘 이가 편견 없이 숙고하는 결과로 그 당부는 얼마든지 평가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은'은 그 속성이 본디 흰 것인데, 이를 두고 앞에 다시 '휠 백'이라는 한정어를 붙임은 문법적으로 타당한가? 아니라면, 더 널리 쓰이는 '황금'의 예는 어떠한가? 물론 금에는 '백금'이라는 다른 예가 존재하니 이와 나란히 둘 일만은 아니지만, 언어의 usage를 두고 정오를 가르는 일은, 바로 언어학의 기본 명제가 언어의 기능 중 하나로 '감성의 전달'을 꼽고 있기에, 도무지 그 언중의 감성적 코드와 분할해서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실로 어려운 작업이다.


일개 단어, 기계적으로 거대 시스템 안의 한 부속으로 제 기능만 잘 수행하면 그만인 듯한 일개 단어의 경우에도, 그 작동의 바르고 그름을 가르는 일이 힘들다. 하물며, 정치-경제 복합체 내에서의 제도를 두고서 과연 그 최적 효율의 기준만으로 채택-폐기의 당-부당을 쉬이 결정하는 일은 어떠할까? 효율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건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지상과제'에 가까우니, 말하는 자가 정치적 스탠스의 어느 편에 서 있건 처음에 내세운 약속이나마 충실히 이행하면, 이를 두고 딱히 타매할 근거는 마련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건 조건들을 모조리 가장행위로 전락시키는, 속내 시커먼 은닉행위가 따로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효율을 빙자한 강자 이익만의 관철이라는 트로이의 목마는, 유사 이래 어느 집단, 어느 결제체제, 어느 생산 기제에서도 존재하는 게 보통이었으니, 최대 이익의 실현과 최고 수위의 거래 안전 도모라는 지극히 기계적인 미덕만 성취하면 그만일 것 같아도, 기실 그 내막에는 경제 패권과 동전의 앞뒤처럼 결부된 정치적 파워 게임의 복잡 다단한 사연이 숨어 있을 밖에.


은의 통화 지위는 생각 외로 공고하며, 깊기도 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건륭제 말기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유럽의 경제력, 생산 스톡의 토털은 중국 일권역의 그것에 비겨, 초라하다 할 만큼 미치지 못했다. 산업 혁명의 극성기를 상당 기간 경과한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대체 수천 년 동안 진정한 의미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완결적 경제 단위였던 중국과 유럽은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세계(정치/경제)사의 터닝 포인트이자 티핑 포인트였던 아편 전쟁을 거친 후라고 해도, 여전히 중국의 생산은 양적 질적으로 유럽에 떨어지는 바 크지 않았으니, 결국 중국의 정체와 몰락은 자체 모순의 누적과 병발이 아닌, 외부 무력의 강제에 기인했다는 분석이 자연스레 도출될 만하며, 이는 서양 제국주의의 폭력적 성격을 고발하는 면마저 겸한다. 대포와 폭약을 통한 침략, 살상 이후에야 양 진영의 우열이 역전되었으니, 로마 시절까지 소급해 가는 양 세계의 경제력 우열 비교란 새삼스러울 뿐이며, 그 장구한 기간의 대부분을 결제 수단으로 '우월한 세계에서' 사랑 받아온 은이, 다시금 세계 무역의 중심 수단으로 부활한다 한들 이상할 구석이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이 책의 논지는 이 점을 납득시키는 데에 방점이 놓인다.


중국의 처절한 몰락 과정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기보다, 그 유리한 초기 조건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채 나태와 방종, 무기력으로 일관하다 후발 주자에 추월당한 어리석음의 표본으로 인식되는 면이 강했었다. 정치사와 경제사를 분리 불가능한 일체로 파악할 때, 은의 경제사는 곧 세계무역사요, 한정수식어를 불요하는 world history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장구하고 사연 많은 역사에서, '중국'이란 주어를 '은'으로 바꾸기만 해도 이처럼이나 많은 분량이 효과적으로 전달, 이해되니 대체 인간이란 그 심성과 영혼의 어느 정도를 '경제'에 빛지고 있는 걸까? 과연 그 존재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단일어 외 어떤 형용도 잉여로 돌릴 만한 타산적 존재일까? 은이 그 임잣말의 지위를 회복한 크로니클에서 이처럼이나 절실한 공감을 이끌어낸다면, '칙칙한 중국'의 테마가 여태 우리에 빚은 경멸감은 그저 근거 없는 승자편승, 비겁한 세컨 게스가 아니었던가! 은의 '복위'는 시대착오적인, 패권 찬탈의 거지떼가 음흉히 꾸미는 가망 없는 역적모의가 아닌, 그 오랜 상속권과 전통을 비로소 회복하려는 정당한 권리자의 침착한 소송 노력 이상이 아니었던 걸까? 빛나는 은의 리사이틀은 그저 금붙이 은의 초라한 넋두리가 아니라, 한 맺힌 중국 민족의 장엄한 공소장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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