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 묵시록
최희원 지음 / 청조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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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 현대사 IT, 사회 분야에 인상 깊게 남은 사건 중 하나가 있습니다. 1994년 청와대를 사칭한 어느 해커의 대규모 사취 사건이었는데요, 그 컴퓨터 작동 실력을 높이 평가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이례적으로 그를 그룹에 특채하기도 했습니다. 해커라는 단어가 일반인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계기라면 아마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세월이 그 이후로 흘렀습니다. 아마 사건의 화제가 되었던 그 정상급의 해커까지는 몰라도, 당시의 그저그런 수준의 해커라면, 요즘의 일반인보다 시스템의 이해가 뒤처질지 모릅니다. 세상은 그간 단순히 양적으로만 팽창한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상이 환히 열어젖혀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질적으로 진화했습니다. 요즘 세상에 해커라고 하면 아마 두 부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간의 모든 테크닉을 그저 평범한 걸음마 수준으로 낮춰 버리는 초 사이언 급 해커이든지, 아니면 시중에 흔하게 널린 매뉴얼 몇 권만 읽고 어설픈 영웅심리에 젖어 겁도 없이 범법을 저지르는 철부지든지.

이 책은 가공할 만한 스케일의 배경을 바탕으로, 현시대 최첨단의 전술 구사 수단이 된 각종의 전산 테크닉을 몸에 익힌 천재들, 그들 중 일부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인재를 이용하려는 파렴치한 부패 정치인과 악당들, 그리고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기술 체계와 세상의 발전상을 재해석하여, 적그리스도에 준하는 사악함으로 세상을 망치려 드는 세력을 저지하는 어느 양심적인 과학자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적혀 있습니다.


리 뷰가 스포일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제가 신나게 읽은 소설의 독후감을 후기로 적을 때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집니다. 이 책 역시, 초반에 전개되는 살인사건들과 의문투성이의 사고가, 정확한 배경이 미궁에 싸여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재밌어지고 독자의 궁금증이 커집니다. 소설의 빼어난 점은, 우리가 미처 상상도 못할 엄청난 테크놀로지의 집적이 특정 세력의 영구 집권 음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해 주는 것입니다. 생체칩이란 개념은 이미 사고나 생래적인 원인으로 몸이 부자연스러운 이들의 치료, 재활 수단으로 그 길이 열려 있고, 이의 활용 가능성은 어느 정도 보편적 상식이 되어 있죠. 웨어러블 컴퓨터도 최소 십 년 내에는 상용화의 단계에 진입할 것이고, 구글 글래스(안경+스마트폰)의 등장은 얼마 전 큰 뉴스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피사체가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교묘히 숨겨지는 도청 장치는 이미 우리 생활에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적발해 낼 것인가를 두고 경찰이 크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뉴스에 낫었구요. 이처럼,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각종 피처들은 그리 새롭거나 놀라운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을 소설 하나에 잘 버무려낸 것은 작가의 솜씨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지고 익숙한 사실들이지만, 그것이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처럼) 사악한 손에 한꺼번에 장악되기라도 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또 이 소설처럼 기발한 가상 공간, 내러티브가 창조될 수도 있는 거겠죠.


역시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젊고, 잘생기고,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정의감으로 가득한 젊은 층입니다. 한편으로 기독교 신자가 주를 이루기도 하는데, 이는 이 소설과 소재인 게임이 <요한계시록>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인 때문도 있습니다. 이는 아마,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신원이나 주변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제 추측입니다. 작가는 각별하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실제와 무관한 가상의 엔트리일 뿐이라고 밝혀 놓았습니다만, 저는 읽으면서 최소한 그 지명들은 실제의 어느어느 곳들을 연상하게 되더군요. 이 소설은 현대 한국의 수도 서울을 빼놓고는 그 묘한 분위기의 창출이 어려울 만큼, '서울스러운' 아우라가 지배하는 스토리였습니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국제 무대를 넓게도 활용하는 글로벌 배경의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소설에 나온 대로, 아마존은 세계에서 가장 긴 (혹은 2위라고도 하지만) 강이니만큼, 남미대륙 중에서도 대서양 아닌 태평양에 면한 페루까지 그 유역이 미치는 대단한 범위입니다. 이 아마존의 오지 중에서도 가장 오지인 곳이 바로 강 목사가 선교지로 삼은 소설 속 그곳이죠. 작가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다면 등장시키기 힘들지 않았을까 추측해 봤습니다.


소 설의 결론은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악당이야 제 갈 길(?)을 가고 맙니다만, 결국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파멸로 몰아 넣고 말 뿐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과학기술을 적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와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튼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이 왠지 뇌과학 쪽에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과연 이대로 기술을 분별 없이 발전시키기만 해도 되는 건지.... 어떤 의미에서 1990년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테러리스트 유나바머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느낌도 살짝 받았구요.


읽으면서 불편했던 건 오타의 잦은 등장이었어요.

108 고생은 세팅하느라 선배님이... → '고생은' 다음에 마침표가 찍혀야 의미가 전달됩니다. 안 그러면 선배가 고생을 세팅했다는 뜻이 되죠.
117 태호가 알려준데로 → 대로
146 일년인 된거야 → 일년이
150 매쾌한 → 매캐한
175 33을 앞뒤로 놓고 사선이라고 한 건 죽을 고비지만 → '놓고' 다음에 쉼표가 안 찍히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179 주검 → 여기서는 '시체'가 아니므로, '죽음'이 문맥상 맞다고 보입니다.
187 뭐 길래 → 띄어쓰기를 하면 안 되죠.
197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을 →선마이크로시스템즈를. (저도 이 글자를 치면서 '을'로 순간 오타가 났지만요)
198 소설에 → 소설의
249 운영체재 → 운영체제


이 외에도 많이 있었지만 이 정도만 적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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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컨피덴셜 - 전략전술의 귀재들이 전하는 비즈니스 성공술
피터 어니스트 & 메리앤 커린치 지음, 박웅희 옮김 / 들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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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비즈니스 컨피덴셜>로 되어 있어서, 요즘 흔히 나오는 자기계발서류로 오인했습니다. 사실 그런 용도로 이 책을 골라 집어 드신 분이라면, 그런 방향으로 독해하셔도 얻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러나 이 책은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006년도에 로버트 데 니로가 감독을 한 영화 <굿 셰퍼드>가 있었는데요, 이 영화는 스파이 세계의 비정함을 냉소적인 필치로 그려 낸 대단한 수작이었습니다. 전직 CIA 요원이 어떤 과정으로 정보기관에 입문하여, 자신의 청춘과 정력, 영혼까지 다 바쳐 봉사한 기관으로부터 어떤 배신을 당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영화였습니다.

이 책은 물론 조직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줄거리는 아닙니다. 배신은커녕, 가장 성공적인 요원이 어떻게 해서 그간 조직에서 터득한 원칙과 행동원리의 비결을, 민간 영리 조직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가득 담긴 컨텐츠였습니다. 읽는 이는 당연히 깊은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요.


먼저 이 책은, 12부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목차를 간단히 인용해 보겠습니다.

권하는 글 - 경영 혁신을 이끈 피터의 출간을 축하하며 │ 전 CIA, FBI 국장 윌리엄 H. 웹스터
서문-어디까지가 비즈니스고 어디까지가 정보활동인가? │ 메리앤 커린치
한국어판 서문-한국 경영인들의 비즈니스 성공 전략을 위하여 │ 피터 어니스트
SECTION 1 목적이 있는 사람들: 성공의 핵심
CHAPTER ONE 정보활동과 비즈니스의 조우


CHAPTER TWO 적합한 자질은 무엇인가?

CHAPTER THREE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채용

CHAPTER FOUR 헌신적인 핵심인력의 구축

SECTION 2 정보 사이클
CHAPTER FIVE 수집 - 여러 장애요소와 수집 기법

CHAPTER SIX 수집 - 인간관계 기술

CHAPTER SEVEN 분석

CHAPTER EIGHT 전파

SECTION 3 조직 개선
CHAPTER NINE 공적 이미지


CHAPTER TEN 성공 추정

CHAPTER ELEVEN 정보로 변화에 대처하기

CHAPTER TWELVE 피해 사정



이 분야 관련 자기계발서깨나 읽은 분은 아시겠지만, 목차를 이런 식으로 구성하는 책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 비슷비슷한 항목을 나열하고 항상 옳은 것으로 이미 검증된 세부 설명을 자세히 푸는 패턴이죠. 그런데 이 책은 전혀 다른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7,8,9과를 보면, 수집-전파- 분석의 순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소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독자들을 배려하느라, 저자는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미국과 대치하던 중 정보전의 사례를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것은 정보전에서 패착을 둔 요인이 크다며, 그 단순한 마인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반에 널리 퍼진 신화와는 달리, 이 책을 보면 일본군 역시 만만찮은 첩보, 역첩보 공작을 펼치곤 했다는 사실이 증거로 뒷받침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얻는 결론은, 그런 치밀한 대응과 선제 공세를 펼쳤던 일본에게 완승을 거둔 미국은,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했겠냐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지구촌 곳곳에서 살인적인 경쟁, 아니 전쟁을 벌이고 있는 기업들의 사정은 어떠할까요? 2차 대전 당시 생사를 걸고 싸운 국가들의 긴장과 두뇌 회전 따위보다, 몇 십 배는 진화된 무기와 전술로 임하는 실정입니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사실 묘사의 키워드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 보기관의 첩보 수집 활동과 비즈니스가 무슨 관계가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으시면 생각이 많이 달라질 듯도 합니다. 단 한 마디로 요약하겠습니다. 지금 경영은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전쟁을 이기기 위한 핵심 부서였던 정보기관의 <컨피덴셜>을 참고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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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소통의 기술 -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조너선 헤링 지음, 서종기 옮김 / 북허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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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소통의 시대입니다. 아무리 빼어난 능력과 기술의 보유자라고 해도, 그 컨텐츠를 소통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도 있지만, 이 구슬을 설사 금색 찬란한 줄에 꿰어 장신구로 가꿔 낸다 해도 이를 장롱 속에 감춰 둔 채라면 아무 가치도 발하지 못합니다. 소통은 묵혀진 가치를 비로소 유툥, 교환의 상품으로 만드는 마지막 손길입니다.
그런데, 그 소통의 기술로 남을 내 편으로 포섭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오랜 적까지 감복시켜 나의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는 손자가 그의 병법서에서 말한, "싸우지 않고 전쟁에서 이기는 상지상책"이라고 평가할 만도 합니다.
적을 내 편으로 만든다, 어찌 보면 막연한 말입니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적대하던 상대라야, 능숙한 소통으로 내 편을 만들 수 있을까요? 조너선 헤링은 그 비결을 다음과 같이 공개합니다.
첫째, 소통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얼핏 듣기에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하지만 그 표현의 진의는 다음 문장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레이건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라는 평을 들었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테플론 대통령이라는 칭송과 함께 높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장관들의 이름도 채 기억하지 못하는 업무 소외자였다."
이 진단은, 우리가 흔히 고민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모든 것을 환원할 수는 없다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능력은 있으나 타인과의 소통 능력이 떨어져서 결국 무능력자 취급을 받는 것도 억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소통에만 능숙한 것도 결국엔 문제를 야기하게 마련이라는 거죠. 궁극적으로는 제 포스트에서 바른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정도라는 설명입니다.
다음으로,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에 대한 유용한 원칙을 자세히 풀어 주고 있습니다. 그 중  제 눈에 띈 건 입증 책임의 원리입니다.
입 증 책임은, burden of proof라고 하죠. 법학 전공자들은 학부 시절에 한두 번 들어 보았을 용어입니다. 내가 A라는 주장을 했을 때, 그 A라는 주장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떠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은 그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이 일단 진다는 거죠. 주장만 하고, 그것이 왜 옳으냐는 의문에 대해 묵묵부답이라면, 그건 주장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결과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직장이나 일상에서(치열한 논쟁은 어쩌다 시비가 붙은 사람과 벌어질 수도 있죠) 말다툼이 곧잘 일어납니다만, 우리 나라의 경우 먼저 크게 소리만 지르고 뒷감당은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기 말만 우기는 사람이 그냥 이기는 걸로 되는 일이 있습니다. 토론의 규칙이 사회의 컨센서스로 자리잡은 외국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죠. 그래서 그네들은 법적 소송을 벌여도 추태나 꼼수가 난무하는 일이 없고, 대체로 결과에 잘 승복하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인들은 그저 주관적으로 억울함이 크다고 느껴서,. 큰 소리로 우기면 다라고 생각하는 탓에, 이런 제대로된 규칙에 따른 논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 책에서는 토론에 이기는 비책을 가르쳐 주고 있다기보다, 토론에 이기는 정석을 교과서적으로 차분히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상당 부분은 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원칙과 세부 지침을 일상에 적용해서 알기 쉽게 풀어주는 형식입니다. 하지만 이 책들의 소중한 교훈이 실제에서 힘을 발휘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교육 환경이 크게 바뀌어서 정당한 승자가 승리를 거두는 풍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한국은 룰이 부재한 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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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쇼크 - 위대한 석학 25인이 말하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2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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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다 아실 만합니다. 그렇죠. 이 책은 '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밈'이란 개념의 창안, 혹은 발견이 누구의 공인지는 다소 모호한 점이 있긴 합니다. 물론 대체로 리처드 도킨스 옹을 떠올리기는 하고, 실제로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장엄하고도 친절한 밀도와 어조와 유감 없이 그 해제가 드러나 있기도 하죠.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책의 첫머리에서 '저자(혹은 저자 집단)이 누구인지 살펴 봅시다. '엣지파운데이션'입니다(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 편 에세이의 집필자일 뿐이고, 나머지 눈부신 다른 필진은 모두 재레드 다이아몬드, 그리고 리처드 도킨스-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요-, 또 이 책에는 편자로 제시되어 있는 존 브록만 같은 재사, 현자, 예언자[?]들이 모두 소속되어 있는 그 집단입니다).


대 체로 말하자면, '밈'의 창안에 있어 그 공은 도킨스 옹에게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력은 넘치지만 과학적으로 반드시 명쾌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던 그 개념이, 현재 여기까지만큼이나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게 된 것은, 도킨스 한 분의 업적만은 아닌, 그와 공감하고 또 인적으로 교류까지 했던 복수의 두뇌들이 모두 기억되어야 할 복합적인 공로였다고나 하겠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뭐냐고요?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을 보세요. 읽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거의 사십 년 전 지적인 충격(!)을 엄청난 파장으로 몰고 왔으나 동시에 논란도 많이 야기했던 그 개념이, 오늘날 이만큼이나 안정적이고 평온한 외연, 내포를 갖게 될 것이라고 과연 당시의 독자들이 예견할 수 있었겠냐는 거죠. 그것만으로도 어찌 보면, 한 개념 역시 다양한 변인과 환경적 영향을 거치면서, 나름의 진화, 혹은 '공진화'를 겪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이 멋진 책에 도킨스 옹- 그룹의 중요, 핵심 멤버이기도 한-의 글이 없는 것은 유감입니다. 심지어는, 언급이나 인용도 자주 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 세 번을 읽었는데,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표지 예쁩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ㅎㅎ

책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먼저 솔직히 말하면, 전 아직도 왜 이 책 이름이 '컬쳐 쇼크'라고 붙었는지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 ㅎㅎ 물론, 이 책은 '문화'이야기가 주 테마이고, 도킨스의 그 혁신적인 아이디어 '밈'을 보다 '문화' 쪽에 초점을 맞추어 화려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장쾌하면서도 낙관적인 비전을 곁들여 풀어 놓은 책이기는 합니다. ㅋ 그리고, 그 내용의 선진성? 혹은 파격성? 나아가 종래의 안이한 관념 구조를 뒤흔드는 듯한 파장과 깨우침에 충격을 받은 점 역시 매우매우 큽니다(제가 이 책을 1회독한 건 벌써 이 달 초의 일인데, 이제서야 리뷰를 쓰는 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저자(집단)이 자연과학의 논리를 빌어(사실 통섭의 입장에서는 이런 구분 짓기 자체가 무의미하겠죠?)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고, 어리석은 저 같은 독자는 '쇼크'를 받으니, 제목은 아주 적절하다고도 볼 수 있겠어요.^^ 그러나 이건 물론 농담이고, 영어 원서(이 한국어 번역본이 대단히 좋아서, 일부러 원서까지 주문해서 읽어 보았습니다)의 제목은 그저 '컬처'입니다. 아마 '쇼크'는 번역하신 분, 혹은 출판사의 고려가 개입된 산물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알 수는 없죠. 그러나 저 영어 원서 제목도 다소 당혹스럽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대체 어떤 책 이름이 아무 수식어도 없이 그저 '컬처'로만 붙을 수 있을까요? 책 내용이야 물론, 엄청난 생각거리와 각성의 계기, 유인을 젯공하고 있습니다만, '책 제목' 자체에 대해 이런 (어찌 보면 공연할)고민을 해 보는 건 또 드문 체험입니다. 이 점은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제 블로그에 다른 포스트를 통해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첫 장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짧은 에세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분이야 <총 균 쇠>로 워낙 세계적 히트를 치신 분이고, 국내에서도 모 대학도서관에서 대출 1위를 기록한 명저자이니 소개가 불필요하겠지만요, 이 책에서의 아티클을 읽고 느낀 점이란, 역시 못말리는 조심쟁이, 사고와 논리의 완벽, 정연함의 추구에서 언제나 소홀함이 없는 단정한 천생 학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 책의 전체계와는 다소 안 어울리는 주제입니다(원서를 보니 번역서의 세 번째 아티클인 대니얼 데닛의 글이 맨 처음으로 등재되었고, 다이아몬드의 글은 두번째로 실려 있더라구요). 그래서, 물론 존 브록만의 확실한 인트로가 있기는 하지만 서브-인트로의 구실을 다시 해 줬으면 하는 의미에서는 좀 부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고갱이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도킨스의 혁신적인 개념 창안 이래, 아직은 그저 약하기만 했던 미숙한 아이가 이만큼이나 잘 성장했나, 아니, 이 정도면 성장이 아니라 '진화'라고나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놀라움이 절로 일 만큼, 대단한 담론의 연속이 오페라처럼, 혹은 거대한 오마쥬처럼(KBS 불후의 명곡 같은 컨셉을 떠올리시면 되겠네요) 펼쳐집니다. 두 번째 아티클에서 데니스 더턴(국내에 그리 자주 소개되는 저자가 아니라서, 이런 합동 저작의 한 일원으로나 만나 보는 게 참 반갑네요)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을 '자발성, 보편성, 그리고 즐거움'을 찾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침팬지의 동작은 그저 기계적인 반사 작용의 일환일 뿐, 그게 인간만의 고유한 어떤 창조나 작업의 과정과는 다르다는 걸 명쾌히 지적합니다. 더턴은 다만, 쇤베르크의 도테카포니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고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저도 솔직히 공감하기 힘들어하는데, 이런 대학자이자 천재가 같은 느낌이라니 안심이 되어서요.


그 다음 글이 대니얼 대닛의 논설, 혹은 에세이입니다(앞서 말했지만 원서에서는 이 글이 맨 앞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내러티브와 과학적 구조를 준별하여, 문화란 기본적으로 내러티브의 속성이지 어떤 완결적 체계나 구조가 아니므로, 진화론의 토픽이 되기 부적합하다는 반대편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일일이 논파하는데 중점을 두기보다, 그는 자신-그리고 동료 집단-의 관점이 고유하게 갖는 장점에 대해 더 주의해서 포커스를 둡니다. 예컨대, 밈은 마치 개미에 감염하는 기생충처럼 숙주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파고들어, 숙주의 이익과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떤 동작이나 결과를 낳기 위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제 서양 철학과 종교의 오랜 주제인 '자유 의지' 이슈가 빠질 수 없죠. 그런데 대닛은, 비록 정면으로 자유의지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지는 않아도, 설사 기생충,... 아니 진정한 주인인 밈이 시키는 대로의 수의(불수의?) 활동을 펼친다 해도, 그것이 딱히 우리의 존엄을 침해하는 결과가 되지는 않음을 유쾌히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그럼 의도적인 계획의 소산인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인가. 사실 대닛의 논지대로라면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실은 그 중간지대에 있을 테니까요. 이런 걸 요즘 유행어로 '골디락스'라고 불러 주면 되겠죠?


저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브라이언 이노의 글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사상가나 학자가 아닌 뮤지션입니다. 그런데 그의 장모 조앤 하비라는 분(누군지는 물론 모릅니다)이 지적했듯, "그런 일을 하기엔 머리가 너무 좋은 거 아님?' 같은 청천벽력 같은(?) 지적을 받고 다양한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진정한 통섭은 바로 이런 성격의 인재로부터 빚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그야말로 전혀 종래의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참신하고 논리적인 지적 기여를 해 낼 수 있는 이점이 있을 테니까요. 문화체험은 본질적으로 감상자의 참여를 통해 그 진정한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고, 뒤샹의 작품들은 모두 이런 관점에서라야 제대로 해석될 수 있으며, 모든 문화체험은 따라서 일종의 롤플레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은 참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책은 17편의 에세이, 그리고 대담 녹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의 결론적 요약을 크리스태키스의 짧으나 힘있는 단 한 마디에서 찾고 싶습니다. 인간은 고립된 섬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일원이자 구성 요소입니다. 네트워크는 그저 부분의 합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독자 의미를 지니는 유기체, 곧 슈퍼올가니즘으로 보아야 하며, 인간의 소통 방식이란 개별 행동의 확산을 넘어 규범의 확산에 가깝고, 행복이 네트워크를 타고(참 표현이 멋지죠?)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전파되는 건 이런 이치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올가니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난 세기의 그 음습한 전체주의를 떠올리기가 십상이겠지만, 크리스태키스는 이처럼 우리에게 그 익숙한 개념으로 즐거운 공명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립된 섬이 아닌, 원자화의 단계에서 즐거운 탈피를 맛보아야 할 우리 현대인의 미션입니다. 개별 의식의 중요함보다, 전체 네트워크의 조화로운 합창에 공감, 참여할 때 자아는 더 큰 차원에서 완성된다! 바로 이것이 제목에 붙은 '쇼크. 각성, 갈바나이징'의 진정한 의도 아닐까요? 인간은 연대를 통해 어쩌면 신으로 거듭날 지도 모른다는 유쾌한 상상@!(헉 그렇게 깊은 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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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인가, 세상인가 - 미처 몰랐던 내 안의 우상 버리기
피트 윌슨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드폰테스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피트 윌슨 목사의 담담하면서도 열정적인 목소리가 잘 담긴 책입니다. 기독교인의 영원한 고민거리는, 좋아하는 가치 중 서로 모순되는 둘을 동시에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독교 서적 중 하나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 는 찰스 셀던의 소설입니다. 좋은 기독교 서적, 혹은 신앙 서적의 조건이란, 원초적인 물음과 요구에 대해, 돌아가지 않고 정면으로 찛러 주는 대답을, 나 대신, 혹은 멀리 계신 신 대신에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그 셀던의 소설을 보면, 얼마나 명쾌한 질문을 던지고, 또 대답하고 있습니까? 신앙과 세상적 삶의 충돌 문제는 관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전쟁과 같은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막연하거나 정직하지 못한 둘러치기 해답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신 앙인은 사실 세상의 욕구와 룰에 맞춰 거침 없이 살기가 힘듭니다. 자신의 욕구인지 세상의 유혹인지 모를 어떤 일을 하고 나면, 그건 꼭 신의 명령에 거역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가 쉽죠. 나를 지옥의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보호막이지만, 동시에 그걸 해야 세상 살기가 편한 여러 가지 일들을 못하게, 혹은 삼가게 만드는 장벽이기도 합니다. 신앙과 세상의 요구는 서로 양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윌슨의 견해와 입장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그는 파워트위터리안이기도 하죠). 그 러나 최소한 이 책에서, 그는 여러 골치 아픈, 혹은 마음이 아플 수 있는 문제와 질문에 대해, 절대 돌아가거나 회피하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요구를 배신하는 답도 아니면서, 일상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 시원하게 찔러 주는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191쪽을 보면, 현대판 우상에 대해 윌슨은 멋진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순금으로 된 케이트 모스(슈퍼모델)의 모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어리석은 민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읽으며 혀를 차지만, 정작 부질없는 육체를 숭배하고 감탄하며 음욕을 품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현대의 금송아지가 바로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우리 시대의 상업주의와 퇴폐 문화임을 그는 시원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외모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의 괜한 상심을 그는 효과적으로 힐링하고 있습니다.


제 가 감탄하는 점은 바로 여깁니다. 신앙은 사실 일상의 삶에 많은 제약을 가합니다. 그런데, 윌슨의 논변은 분명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족쇄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시원하게 파쇄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외모라는 터무니없는 우상을 숭배하느라 신과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배반하며, 정작 중요한 영적 의무를 소홀히합니다. 우리는 남에게서 받는 <인정(認定)>의 달콤함에 구속되어, 우리 자신을 진정한 자아와 신으로부터 소외시킵니다. 이와 관련, 윌슨이 다른 분의 말씀을 재인용하여 우리에게 설파하는 가르침은 참으로 탁월합니다. "7년 동안 라헬을 얻으려는 일념으로 쉼 없이 일했는데, 하룻밤을 같이 지낸 후 깨어 보니 레아였다." 세속적 가치만 추구하다 결국 허망하게 끝나고 마는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우치는 구절이라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읽고 나서 과연 그렇다며 고개를 끄적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자 신이 속한 입장과 관계 없이, 신앙을 깊이 있게 고민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읽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심지어 불교의 가르침도 부분적으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유의 폭이 넓고, 열린 마인드를 가진 분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읽고 나서 많은 팩터들에 대한 생각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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