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강의 - 중국 최초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시황과 그의 제국 이야기
왕리췬 지음, 홍순도 외 옮김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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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평전"이 아니라 진시황 "강의"입니다. "평전"이리고 해도 진(秦)나라의 전사(全史 혹은 前史)가 포함될 필요는 있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는가, 그의 통일 이전에는 어떤 상태에 중원(넓은 의미에서의)이 놓여 있었는가, 이를 개략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위대성, 역사적 의의, 한계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총 6부, 43강 체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43장이 아니라 43강인 것은 이 책이 강의체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고, 그런 까닭에 각 강(講)의 내용은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다기보다, 전 강의 끝과 후 강의 시작이 맞물려 있습니다. 마치 일일연속극의 진행 기법, 궁금할 만한 대목에서 끊고 다음 회를 기다리게 하는 수법과 유사합니다.


왕리췬(王立群)의 강의를 케이블을 통해 자주 보는 편입니다. 꼬 장꼬장하니 곱씹는듯 말투에, 한번 터졌다 하면 그 기세로 달의 분화구라도 찌를 듯 열혈의 달변을 토해내는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죠. 그의 강의는 학자의 그것이라기보다 변사의 연기처럼, 아니면 明淸代 능란한 광대의 재주처럼, 이것일까 저것일까 확신이 잘 안 서는 대목에서 확실한 제스처로 자기편을 향해 확 잡아끄는 마력을 발산합니다. 유명한 정치인의 어록이나 연설 녹취록을 보면, (시쳇말로) 음성지원이 이뤄지는듯 박력 있는 템포와 흡인력으로, 청중이 아닌 (그저)독자를 매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제가 왕 교수(허난대학 문학원 소속입니다)의 실제 강의 솜씨를 보았던 경험에 기반한 후광효과일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을 보면 확실히 그는 글과 말의 어떤 매개로든 의사 소통 자체에 능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왕리췬의 이 책이 그 저 대중적 흥미만을 유발하는 얄팍한 2, 3차 편집문헌류가 아닐까 생각하는 분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왕리췬의 학문적 천착이 그리 진지하거나 폭이 넓지 않고, 대중과의 교감에 보다 치우친 편이라는 주장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최소한 제가 방송 강의를 듣고, 이제 진시황 편을 다룬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그리 쉽게 진단할 수 없는 만만찮은 내공, 단순히 특정 교수직에 오래 머무른 데서 오는 부대효과 이상의 학자적 자질을 갖춘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대중과의 소통에 능한 분이라 해도, 스스로 애호하는 정해진 내러티브(대체로 이런 것들은 대중, 아마츄어가 소화하기에 달콤합니다)의 우렁찬, 혹은 매력적인 낭송에 강할 뿐, 논리적 엄정성이나 과학적 신빙성은 다소 결여한 분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왕리췬은 이 "강의" 시리즈를 기획할 때, 명품 고전, 고급지식의 대중화"를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그의 말투, 또 대중(독자)의 반응을 미리 점치고 한 수 앞서 질러 주는 이야기의 가지치기 솜씨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또한 신중하기도 합니다. 이 책(강의)만 해도, 전국책, 사기(사기 중에서도 본기, 열전, 세가 등을 두루 오가며, 그의 이동[異同]을 모두 논하고 있습니다),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 회남자, 그리고 명대의 잡기, 청대의 고증학 문헌들을 모두 인용하고 있죠. 시원찮은 데마고그라면 책 한두 권의 논지를 그 빈약한 두뇌에 임시 이식하여, 다 닳고 해질 때까지 우려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류는 크로스레퍼런스의 필요함을 이해하고, 또 그 번거로운 작업의 정수를 자기 것으로 소화할 능력이 되죠. 왕리췬은 자기 주장을 어느 대목에서건 분명히 펴고 있지만, 일방적인 비약이나 돌출적인 강변이 아닌, 치밀한 논리와 검증을 토대로 설득력 있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학계의 의견이 갈리지 않는 부분에선, 기록들이 살짝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들을 대조 교차시켜, 교육적 관점에서 오늘날의 대중이 수용하기에 가장 무난한 견해를 잘 편집, 정리하여 알려 줍니다. 예컨대 합종책의 마스터마인드 소진의 일화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사기열전의 소진편과 전국책의 서로 미세하게 엇갈리는 부분을 교차 전재하며, 글 속에서 화석화한 캐릭터가 아닌, 생생히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일세의 모사꾼 소진의 진 면모를 전달합니다. 장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기 등 역사서의 기록만 보면, 장의를 발분시키기 위한 소진의 의도, 그리고 이를 이해하면서도 결국 秦의 천하를 위해 자신만의 그랜드플랜, 즉 연횡책을 추진했던 그의 비전과 심산이 잘 납득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시원시원한 왕리췬의 변설은, 이 모든 난점을 특유의 호쾌한 웅변을 통해 극복하게 도와 주더군요.


진시황 이야기를 하는 중에 왜 이렇게 서론이 긴 걸까요? 장양왕(자초), 여불위나 조비, 노애의 이야기라 해도, 본격적인 시황의 스토리에서는 다 서곡일 뿐입니다. 만약 이게 "평전"의 포맷이라면, 아마 예사의 플로팅과 확고한 지식 코르푸스의 뒷받침이 없는 상태로 변죽만 울리다가 주저앉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러나 이 책의 포맷은 앞서 지적한 대로 "강의"입니다. 학술적 정보만 정연히 전달하는 문헌과는 달리, "강의"는 듣는 청중의 입체적, 싫용적 이해를 주된 목적으로 합니다. 왜 시황의 통일이 그토록 중대한 의미를 지녔는가? 서북 변방에 자리한 秦의 통일이 그토록 의의를 지니는 이유를 정확히 알려면, 앞선 시대(소위 先秦期)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강의의 빼어난 점은, 진시황의 출생의 비밀을 단지 통속적 흥미의 차원으로 격하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의 통일은, 나머지 육국의 아픔과 눈물을 그 밑거름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영정(시황)이 조나라 장사치 여불위의 아들이었다면, 진은 통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조정, 혹은 여정!)의 즉위로 망국을 맞이했다는 소립니다. 대단한 반전이 아닐까요?


이 책의 첫 강 제목을 보십시오. "진시황 암살 프로젝트"입니다. 마치 TV 사극에서, 시간적 순서를 다소 셔플링하여, 가장 극적인 이벤트를 맨 앞에 대뜸 배치하는 파격 수법과도 유사합니다. 암살이라는 그 소재도 충격이지만,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자객들이 그처럼이나 끊임 없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몰려들었다는 그 사실도 놀랍습니다. 시황 정은 비록 본인의 암살은 면했지만, (책의 이후 파트에서 보듯) 환관 조고(하필 조씨일까요?)의 전횡, 미숙한 후계자들의 파국적 시정 등으로 그 잔혹한 대가를 대신 치르게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그처럼이나 힘들여 세운 제국의 창업이, 그처럼 짧은 시간에 붕괴할 수 있었을까요? 왕리친은 이 현상을 패자부활의 신원으로 해석합니다. 그가 이른바 출생의 비밀, 또 연이은 암살 시도("프로젝트"라 불릴 만했습니다)에 대해 긴 분량을 할애하는 이유는, 강압과 무력으로 이룬 통일 제국에 대한 불승복의 한을 표출하는 패잔 육국의 원혼을 달래며, 진정한 중화 제국의 내이션 빌딩이 한 단계 후 한 고조 유방의 대업에서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그는 이 과정에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아, 영정은 분명 영정일 뿐 여정이 아님을 확언하고 있습니다).


강의의 포맷이라는 점 감안하더라도, 예컨대 대기(大期)의 자구를 해석하는 중 10개월설과 12개월설을 논하는 부분은 다소 난잡했습니다. 더 간이한 설명으로 전달이 가능했으리라 봅니다(12개월설은 차라리 여불위부친설의 입장을 반박하는 쪽인데, 왜 그런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제가 알기로 秦의 객경을 지낸 범저는, 이름을 范睢(범수)로 쓰는 게 더 정통입니다. 다만 이 글자가 현재 중국에서는 물수리 저(雎)로 아주 바뀌어 버렸습니다. 쓰기는 물수리 저로 쓰는데(눈목目 변이냐, 버금 차且변이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읽기로는 격식상 sui, 즉 우리식으로 말하면 물이름 수로 읽는 것으로 압니다(단, 네이버 중국어 사전을 찾아 보면 "범저"에 가깝["판-치에"]다고는 하나, 제가 알기로 이는 대중의 오독이고, 학술적 입장에서는 sui로 발음하는 게 통례입니다). 이런 입장을 떠나서, 한국의 고전 애호가들에 더 익숙한 "범수"라는 독음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장양왕의 초명을 "이인"이라고 하는데, 한자가 전혀 나와 있지 않아 혼란을 준 점도 다소 눈살이 찌푸려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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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 정본에 충실한 복원
범립본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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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에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이토록 대중적인 고전이 아직도 그 저자 확정의 문제, 혹은 비평적 본문 정렬의 문제에서조차 많은 의심과 동요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당혹감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안과 불건전의 파동은, 단단하고 명확한 어떤 박학다식한 전문가의 시원시원한 분석과 개설을 통해 반작용마냥 탄력을 받아 상쾌히 해소되 는 것만 같았습니다. 왜 고전은 권위자의 손을 거친 저서로 읽어야 하는가, 텍스트의 기초적 확정 작업이 그리고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고전의 해의(解義)에는 어째서 그 몇 배 분량의 서브텍스트, 혹은 하이퍼텍스트적 배경 지식이 소요되는가, 이런 여러 질문들이 책 한 권의 독해를 통해, 모두 쓸려나가듯 해소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시 중에 명심보감은 여러 권의 번역서, 해석서가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학덕 높은 대권위자, 노장 교수님의 엄정한 필치로 고풍스러운 주석과 훈계가 가득 담긴 것들도 있고, 반면 그야말로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쉽고 캐주얼한 소프트 리더에 가까운 책도 여럿 나와 있습니다. 바로 이 신간이 나올 무렵, 다른 출판사에서도 휴대에 편한 버전으로 아주 작은 책을 시중에 내어 놓기도 했습니다. 요즘 같은 패스트푸드의 범람, 할로윈의 광란, 생각없는 원나잇의 불장난이 젊은 세대의 일상적 코드로 자리잡은 시대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고전 텍스트, 수신의 경전이 이처럼 출간 붐을 이루는 모습은 일견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한편으로, 사회의 한 축이 극단적 퇴폐와 향락의 폭주로 다음 세대의 정신과 영혼이 퇴폐 몰락하는 결과를 막기 위해 이처럼 애를 쓰는 모습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가 되기도 합니다.

책 한 권에 원문, 해석, 본문비평,

심지어 타 고전의 인용과 해설까지 다 들어 있는 백화점격 해설서입니다.


이 제, 그 많은 명심보감 중에 왜 신동준의 책이어야 하는지를 좀 언급하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명심보감은 그 내용 해설에 있어 엄숙주의를 고집하다면 한계도 없을 만큼 경직된 텍스트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가 주돈이, 양정(정이 정호), 그리고 주희의 강직하고 교의적인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기란 무리입니다. 신동준의 해설은,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일상과 도덕률에 적용하기에 조금도 무리가 없을 만큼, 완화하고 현대화하며 본의를 훼손하지 않는 의미에서 절충화한 흔적이 뚜렷한, 실제 처세에 적용 가능한 시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엄정한 지식 체계라고 하나, 실제 생활에 써먹지를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의가 있겠습니까? 신동준의 시야와 세계관은, 그의 기업인으로서의 이력과 체험이 충분히 반영된 덕에, 문자 속에서 죽지 않은 생활인과 치세경영자의 시각과 애티튜드가 잘 녹아  있다는 장점이뚜렷합니다.


다 음으로, 실용의 미덕으로 텍스트 해석의 엄정성을 타협,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에 이 책의 탁월함이 있습니다. 수신의 교과서를 읽고 바르게 사는 법만 배우면 되지, 자구의 정확을 미주알고주알 따져서 뭐하느냐는 항변도 상상 가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천만에요! 공자는 물경 2400년 전에 생몰을 거친 위인인데,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텍스트의 정확성을 보증할 개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두고 그의 말로 착각하거나, 그의 본의를 두고 시대의 변천과 풍화작용 탓에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한다면, 그런 공부는 차라리 안하느니만도 못하죠. 위인의 말과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숱한 기록 중에 무엇이 그의 말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는 일이 더 선행되어야 할 작업입니다.


신 동준은 문헌의 고증학적 확정 작업에 대단히 능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어느 판본을 두고 이러이러한 표현이 나왔으며, 다른 판본에서는 文言이 이만큼이나 차이난다며 대조를 거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추리소설만큼 흥미롭더군요. 인문 공부의 본체가 여기 있지 않나 생각될 만큼요. 물론 그 과정을 거쳐 도출된 도덕적 명제의 전개와 해설 역시 깊이가 넘칩니다. 논증과 분석을 위해 도덕 강의를 희생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마 지막으로 이 책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왜냐구요? 명심보감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다른 경사자집 수십 권을 읽는 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행렬이 너무도 유쾌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죠. 읽으면서 느끼는 지적 쾌강은, 아라비안 나이트나 돈 키호테의 피카레스크 내러티브를 좇는 듯 흥겹고 풍성했습니다. 제가 말한 이 세 가지의 장점은, 시중에 나온 다른 명심보감 판본이 쉽게 따라하지 못할 이 책만의 장점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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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 - 라캉과 함께 한 헤겔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형일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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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선 출판사 인간사랑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인기 있는, 더군다나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유독 특수에 가까운 주목과 경탄의 대상이 되며, 철학자라기보다 록스타의 광휘에 값하는 시장가치를 향유하는 지젝이라고는 하나, 그 생산하는 글의 소화가 프링글스의 섭취나 코크의 음용처럼 간이한 작업일 수는 없고, 더군다나 그의 "리즈 시절" 풋풋함과 생경함, "덜 익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박사 학위 논문의 출간이란, 여간 큰 마음을 먹지 않고는 감행할 수 없는 작업일 텝니다. 지젝의 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현대 철학의 이단적 기린아 그 미미한(?) 시작이 어떠하였는지를 구경할 수 있는 좋은 문헌을, 이처럼 한국어판으로 읽을 수 있게 됨은 차라리 특권에 가깝습니다.


지 젝의 리즈 시절 그 족적을 엿볼수 있는 이 책은, 젊은 시절에도 뚜렷이 드러났던 그 특유의 독설, 비유, (간간히 드러나는) 독선과 과장, 재치, 그러나 이 모두를 관통하는 일관된 풍의 사항 장악 능력, 메타적 총괄과 비틀기, 낯설게하기의 현란한 테크닉, 전혀 다른 두 현상의 귀결적 일치, 일견 얼척없어 보이는 퓨전과 수렴의 레시피 시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엄하고 숭고한 위상과 아우라의 그 거인("유럽 철학이 그라는 샘물로 모여 들고, 이후의 모든 흐름이 그로부터 발원한")과, 무의식과 언어의 미심쩍은 중매인, 나쁘게 말해 포스트모던의 도살자인 자크 라캉과의 전혀 내키지 않을(헤겔 입장에서 그럴다는 거죠. 라캉은 아마 대환영이었을 겁니다. 프로이트에게마저 희극배우의 코스츔을 입힌 게 그이니까요) 앙상블, 랑데뷰를 논문 한 편, 아니 이정도로 두툼한 책 한 권에서 "주선"하고 있는 게 그입니다. 라캉이 생전에 이 재간꾼을 보았으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요(헤겔의 if 대입은 아예 상상하지 말기로 합시다. 국가를 이성의 최고 발현채(소위 "인륜")로 삼은 그 엄숙주의자에게 걸렸으면 지젝은 아마 아드리아의 검푸른 심연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밥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지젝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훤히 밝은 박식형 지성입니다. 이 내용을 한번 보세요.


지 젝은 정말 발칙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근본 없는 풍기 문란, 반달리즘의 폭거가 아닌, "알 거 다 아는 처지에서의 짐짓 광대짓"이므로, 도통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아닌 말로, 한다하는 포스트모던 진영의 논객들도 이 지젝에 대한 호불호가 극으로 갈립니다. 진영에 따라 깨가루가 되게 까이는 게 이 지젝입니다. 그런데, 그 각처의 백화제방식 입장, 입장 입장, 혹은 담론, 담론, 담론들도, 결국은 헤겔로 표상되는 이 이성지상주의, 엄숙주의, 관념론의 래디컬, 교조적 교주를, 유효하고 인문적인(?) 방법으로 전복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으니, 요런 지젝의 발칙하고 눈에 거슬리나, 결론과 파장 면에서 "이쁜 짓"이 되고 마는 이런 발랄한 개그를 용인하고, 나아가 동경할 수밖에 없는 거죠. 사실 지젝의 장난은 정말 재능이 뚝뚝 넘쳐 흐르는, 재롱이 예술로 승화한 케이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quid pro quo를 두고 "오인"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좀 아리송했는데, 바로 다음의 역주(왼쪽 페이지 아래를 보세요)에서, 그 상세한 해설이 이뤄집니다.

주형일 박사님의 명쾌한 해설이 아니었으면 책 독해도 어려웠고,

소중한 지식을 얻을 기회도 놓쳤을 겁니다.


저 는 책 제목만을 보고 과연 무엇이 전개될지 책을 받아볼때까지 예측을 전혀 못했습니다. 잘 디자인된 표지를 보고, 그제서야 아하! 했습니다(인간사랑 출판사의 창의인가요, 아님 원서가 저리 되어 있었나요? ).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는게, 히스테리 환자가 숭고한 거여, 이게 아니라, 역대 존재했던 그 많은 환자들 중에, 가장 숭고한 자("le plus sublime des hysteriques")가 바로 그 헤겔 대왕님이다. 저자는 이 소릴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숭엄한 철학의 大帝를 고작 히스테리 환자로 끌어 내리는 데에, 우리의 자끄 라캉이 도구로 활용되고 있구요. 참 민망한 일입니다.


그 간 지젝의 담론을 익히 읽고 친숙해진 독자라면, 이 까마득한 시초의 저작을 읽고서 이후의 과정과 발전을 역으로 더듬어 보세요. "아하, 이 사람의 재롱도 시기에 따라 이런 이런 변천을 거쳐 커가는 거였구나." 싶을 겁니다. 저는 또, 이 책을 헤겔 연구가들에게 권해 주고 싶습니다. 사실 그는 너무도 어렵고, 때로는 히스테리컬 마인드의 집요함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담론의 장벽으로 꽁꽁 무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마치 피카소가 12세 때 렘브란트처럼 붓을 놀릴 수 있었다고 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 헤겔에 대해 알 것 다 아는 자가 풀어주는 한마당 아니리입니다. 때로는 패러디를 통해, 정전의 진의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진지한 연구에 지치고 때로는 장벽을 절감하던 이에게, 에너지 음료처럼 청량감을 제공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단, 그런 분이라면 과용 과음은 금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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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북한사회 신체왜소의 정치경제학
김영희 지음 / 인간사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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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람이 성장기에 적정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적정한 골격을 못 갖추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우월한 유전자의 현저한 발현이 작용하는 경우는, 그 결과에 큰 차이가 발생하겠으나, 이는 극히 예외일 뿐이죠. 그래서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저처럼 왜소하고 빈약한 체구를 하고 있는 곡절도, 그저 못 먹고 자란 탓이겠거니 하며 예사로 넘깁니다. 우리 남한 사람들도, 1970년대 이전 빈곤의 문제가 해결을 보지 못 했을 시절에는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특히 나이 든 세대는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통일 후, 혹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영양이 충분히 그곳 주민들에게 공급된다 해도, 이미 자라야 할 때 자라지 못한 체격이 정상으로 복원되지는 않겠습니다만, 사람의 가치가 그 인격에 주안이 놓여 있지 외형, 외모의 문제가 본질은 아니라는 점 우리가 내심으로는 인정하기에, 혹은 그저 곭치 아픈 불우이웃의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에서, 우리는 이 "체격왜소화" 문제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런데 저자 김영희 선생의 입장은 크게 다릅니다. 최소한, 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원칙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며, 사실 작고 왜소한 체격은 현실적으로 사소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현상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과 타고난 존엄을 모독하는 독재 권력 고유의 폭력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의 체격 왜소화는 그 파멸적 모순으로 가득한 체제 자체의 병증을 폭로하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저 못 먹고 굶주려서 몸이 저 모양이 된 게 아니라, 시스템 차원에서 끊임 없이 인민을 억압하고 순응화하며 "개조"하는 폭압적 장치가 너무도 성공적으로 작동한 결과라는 겁니다.


저 자 김영희 선생은 다양한 사례와 통계를 인용합니다. 식량 공급의 병목 현상, 혹은 일시적 기근은 구(舊) 동구권에서 공통적으로 겪은 체험입니다. 실제로 옛 동독 지역의 거주민의 경우, 서독 주민에 비해 신장의 열등성이 두드러졌음은 통계로도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면밀한 조사와 검증에 의하면, 비록 여러 차례의 정책 실패로 인해 식량과 영양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사실은 있으나, 일정 기간 단위의 칼로리 공급 누적량은 극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도 왜 신장과 체중의 차이가 현격하였는가. 또 통일 이후 거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왜 유독 "여성"에 한해서 신장 차이가 쉽게 해소되고 있지 않은가(다만 어떤 통계의 해석으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는군요)의 의문은 용이하게 해결되지 못한다는 거죠.


저 자는 이와 관련, 북한 주민들의 신체 왜소화는 단지 영양결핍이 원인이 유일한 작용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폭압과 이로 인한 주민의 자발적 체념이, 신체왜소화를 불가피한 추게로 고착시켰다는 주장입니다. 뭐랄까, 우리의 은근한 선입견, 혹은 상식 차원에서 앞뒤가 맞는 가설입니다. 꼭 영양의 문제가 아니라도, 집에서 너무 엄한 교육을 받아 기를 못 펴고 지내는 아이들의 경우 이상하게 움추려들고, 기를 못 펴고 지내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그런 애들은 심인성 요인으로 인해 키가 안 크는 경우도 흔하죠.

보시다시피 책의 태도는 다양한 출처로부터 통계자료를 정확히 인용하면서

치밀한 논지를 전개합니다.



하 지만 이는 실증적 증명이 어려운 인과관계입니다. 김영희 선생은 이의 타개 수단으로, 미셸 푸코의 유명한 권력 억압 기제 이론을 원용합니다. 사회과학의 한계를 메타적 인문 통찰로 뛰어넘어려는 영리한 시도입니다. 이미 미셸 푸코는, 권력의 개별 침투성이 단지 의식의 조작, 세뇌, 자발적인 체제 참여를 통한 환상의 창출, 자기 기만으로 이어지는 단계를 넘어, 그 구체적인 신체의 변형에까지 물리적 흔적, 위력의 발휘를 남긴다는 주장을 화려하고 치밀한 문장으로 세상에 전대한 바 있습니다. "몸"이 담론의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무렵도 그 즈음인데요. 통계 기초 자료의 수집 곤란성(그러나 이 책에는 기대 밖으로 다양한 자료와 소스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뿐 아니라 이런 데이타를 활용하여 모델링을 구축하는 방식 역시 체계적입니다)이라든가, 이론 자체의 형이상학성은 물론 구체적인 논증과 소통, 결과로서의 납득 과정에서 적잖은 난관이 존재하지만, 인문학과 철학이 주는 매혹으로 우리는 이를 상쇄하고 보상 받습니다.


북 한 사회의 인구학적, 사회적 곤경과, 진보 좌파적 스탠스를 언제나 견지했던 푸코의 논변이 이처럼 연결되는 건 다소 역설의 아우라가 풍깁니다. 저는 그러나 이 책이 문제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는 데에 방점을 두고 싶습니다. 이 논의는 이 챋으로 완결을 본 게 아니라 치밀한 논쟁과 재검토의 과정을 통한 재구축의 스텝을 예비합니다. 가능하면 저자분 스스로가, 이 책의 속편격으로 발전적인 신저 출간을 앞당겨 주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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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치 - 이정희 교수의 정치평론
이정희 지음 / 인간사랑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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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희 교수님은 한국 학계의 존경 받는 원로 중 한 분입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교단에 서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훈육했고, 다른 면에서는 신문, 잡지, 기타 종교 매체를 통해 기고, 파급하는 글을 통해, 정치인을 향해 그 다심하면서도 준엄한 충언을 보내었고, 시민들을 향해서는 순간의 격정과 분노, 혹은 좌절과 체념을 삭이고 지양하여 진정한 통합과 화해의 공동체 형성에 창발적 동참의 손길과 노고를 보탤 것을 주장해 온 지식인입니다.


이 정희 교수님의 강단 외 활동, 강연하시는 모습을 한 번도 못 접하신 분이라고 해도, 그분의 칼럼이나 시사 평론을 일간지에서 읽으신 분은 제법 많을 줄 압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정희 교수님이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의 중앙지에 기고를 시작하신 시점이 무려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의 일입니다. 교수님은 이 시기부터 무게 있는 기고 활동을 시작하셔서, (이 책에 실린 아티클 기준으로) 2011년 가을까지 집필을 이어가시고 있습니다. 2011년 가을이면, 오세훈 시장의 급작스러운 사퇴로 이른바 시민후보 박원순씨의 부상, 그리고 그 전부터 서서히 수면 위로 역량을 노출하던 안철수 원장의 대두가 가시화하던 무렵입니다. 과연 가장 최근의 칼럼을 보면, 다음 연도에 전개될 정치적 대격변의 파란을 예견이라도 하듯, 신중한 자세로 도도한 민심의 흐름을 정치인들이 직시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럼마다 당시의 시대 배경을 분명히 엿볼수 있어요.

이 킬럼은 2002월드컵과 지방선거를 화제로 삼고 있네요.


잠 시, 책에 실린 칼럼의 시간적 범위를 살펴 보죠. 노태우 정부 중엽부터,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의 정부를 거쳐, (시쳇말로, 한국에 노씨가 몇 명이나 된다고 벌써 두번째의 노씨 대통령이 나오냐는 말까지 들었던) 참여 정부 노무현의 시대, 그리고 후반에 어지간한 레임덕에 시달렸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장장 5인의 대통령들을 다 지켜 보고 쓴소리와 충언을 아끼지 않은 기록입니다. 지식인의 고뇌와 사색, 충심어린 걱정이 녹아 있는 대 다큐멘터리입니다. 그 커버하는 세월의 범위가 무려 25년입니다. 25년이면 갓난아기가 장성하여 자기 핏줄을 생산하고 어엿한 경제 활동 인구로 탈바꿈하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그 세월 동안 이 학발동안(사실 머리도 여전히 검으신 편이지만요)의 노스승은 준엄히, 그러나 따뜻한 시선으로, 권력과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의 그 걸어가는 여정을 지켜 봐 왔습니다. 


이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랑의 정치>입니다. 정치 칼럼이므로 제목에 "정치"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정치라고요? (갑자기 어느 화제의 대형 교회 이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왠지 안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우리 나라처럼, 정치가 그 최소한의 생산 기능을 하기는커녕 정쟁과 이권 다툼만을 일삼고, 나아가 국민들을 사분오열시키는 정치의 예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죠. 그런데도 이 교수님은 그 온화한 표정과 인상에 걸맞게, 천연스레 "사랑의 정치"를 논하십니다.


이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 사랑의 정치" 컨셉이란 알고 보면 단순한 구조입니다. 상대르 인정하는 시선에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나의 생각이 소중하고 가치 있듯, 한 발만 물러서서 남의 입장을 바라보자는 겁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되는 가치는 대화와 타협입니다. 그런데, 기계적이고 마지못해 보이는 소통이 아니라, 진정을 담아서 행하는 한 발짝씩의 양보야말로, 이런 살벌한 시국(저 25년 동안 우리는 단 하루도 전쟁하듯 대치하는 여야의 대결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에서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의미에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그처럼이나 간단하고, 또 현실에서 그만큼 구체적인 성과도 도출할 수 있다니, 들어서 마음만 편한 게 아니라, 우리가 부대끼며 그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사회 전체를 살갑고 따뜻하게 만들어주기까지 합니다.


이 렇게 사랑을 자연스레 정치와 변증법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 교수님 개인이 지닌 신앙의 배경이 작용하는 바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는 평화신문 등 가톨릭 계열의 매체에 기고하신 글들의 분량이 제법 됩니다. 이 교수님은 그 다정하고 온화한 인상에서도 엿볼 수 있듯, 상생과 공존의 이념을 정신과 영혼 속에 가득 담은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런 실천의 경력에서, 이처럼 현실적이면서도 정의롭고 온건한 말들이 나올 수 있겠죠,


저 는 개인적으로 이 칼럼집을 역사책처럼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칼럼의 배경이 되는 갖가지 역사적 이벤트들이 빼곡히도 나열되고 있습니다. 제 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잡음, 노태우의 민자당 탈당, 김현철 사태, 한보 비리, 대통령 자식들의 스캔들, 고건 대행의 등장, 김석수 총리 지명 등등 칼럼을 읽으면 이 시대에 이런 일들이 다 있었나 하는 생각에 현대사 책 한 권 읽은 듯 노곤함이 밀려 옵니다. 그 갖가지 파란과 이벤트가 긍정적 성격보다는, 현대사의 치부와 모순을 노출하는 성격이라서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노지식인이 내놓으시는 처방은 한결 같습니다. "사랑의 정치!" 이 다섯 글자입니다. 간단한데도 간단하지만은 않은, 이 시대의 화두가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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