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마켓코드 - 하나의 나라, 천개의 시장
박영만 지음 / 미래의창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중 국에 진출하시려는 분들이나, 혹은 이미 쓴 잔을 마시고 돌아온 분들 중 일부와 이야기를 하면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이전에는 누구나 호기와 장미빛 전망에 들떠 있었죠. 중국 이야기만 하는 걸로도 엔돌핀이 솟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호시절이 끝났다는 분들, 과연 10년 전에도 좋은 기회가 있기는 했었느냐는 근본적 회의,.. 이분들의 공통점은 현재 자신들이 전개하려는 사업 전망이 밝지 못하거나(스스로도 확신이 부족), 현지의 사정에 적응 못하고 실패했다는 사실이죠. 우리가 흔히 반면교사라는 성어를 씁니다만, 학습이나 연구에 투자하는 시간과 역량이 제한되어 있는 마당에, 무작정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듣고 소화할 수는 없습니다. 제한된 시간적, 지적 자원을 잘 활용하려면, 성공한 사람, 확실한 정보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제한된 분량에 꼭 필요한 정보만 담은 유익한 책입니다. 저자는 롯데그룹의 유통 부문을 맡아 중국 현지에서 신화적인 성공을 이뤄 낸 분으로, 현재는 KOTRA 등 민간 차원에서 중국 현지 유통망 공략에 최대한 공적 지원을 할 수 있는 분야에는 거의 다 손을 뻗고 있는 분입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영업인답게 구체적인 방법론에 능통하고, 전통적인 인문, 역사적 코드에까지 인식의 지평을 넓혀 시장 흐름의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인과 관계까지 시원한 해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책의 포맷으로 일반 독자에게 소개되는 건 이 책이 처음이라 대중들은 낯설어할 수 있지만, 업계에서는 이 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죠. 특강 형식으로 접한 것 외에 책으로 정리된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미래의창 출판사에서 이 책이 나와 반가웠습니다.


저자는 우선 마케팅과 영업의 근본을 지적합니다. "시장에 대해서 잘 알고 상품을 팔려 들어야 한다."


시 장의 규모 면에서 중국은 여타의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책의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화남과 화북의 풍토는 확연히 다릅니다. 사람들의 기질이 마치 다른 민족들의 그것처럼 차이가 나니, 이를 단일 시장의 경우처럼 접근하다가는 큰 낭패를 본다는 거죠. 그래서 "같은 나라지만 한 나라라고 보기 어렵고, 한 나라라고 해도 시장의 층위와 속성은 여러 갈래"라는 명제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단일 품목 하나로 벼락부자가 되겠거니 하는 어설픈 기대는 바로 사업을 망치는 지름길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사실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아이템이라도, 시 간이 지나거나 공략 지역을 바꾸면 의외의 대박이 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아무리 히트를 쳤던 상품이라고 해도 트렌드가 바뀌면 결국 시장에서 자리를 내 주게 되는데, 이때 광활한 대륙의 다른 한 켠으로 시선을 돌리면 ware의 재활용도 역시 가능하다는 거죠. 한류 열풍에 관해서라면, 특정 드라마나 가요가 북경권에서는 인기가 시들해지더라도, 강남이나 내륙에서는 순차적으로 인기몰이를 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는 게 이를 입증합니다. 결국 영리하게 시장의 속성을 파악하고, 기회다 싶을 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면 성공이 요원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시 장의 속성은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확실히 파악하는 게 선행 작업입니다. 프라이팬의 예를 저자는 들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가정에서 쓰는 팬을, "한국 특별전" 컨셉으로 현지에서 대거 전시해 두었더니, 중국인들 대부분은 고개를 젓더라는 거에요. "우리가 즐기는 요리는 이렇게 깊이가 얕은 기구로는 조리가 안 된다." "기껏해야 달걀 프라이를 해 먹을 이런 제한된 조리기는 그저 사치품일 뿐이다." 재미있는 건 중국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더라는 건데요. 영화에서나 볼 크고 깊은 프라이팬을 들고 와서 위와 비슷한 특별전에 내놓으니, 한국의 일반 소비자가 눈을 줄 리 없죠. 시장의 코드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까닭인데, 귀국할 때까지 중국 상인들은 도통 이해를 못 하더랍니다. "왜 이런, 더 나은 상품에 관심을 안 기울이느냐?" 이런 우를 우리도 범해선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지적입니다.


그렇게 불통하는 구석뿐이냐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통보다는 공감의 여지가 더 많은 게 한국과 중국입니다. 특히 밀보다 쌀을 주식으로 하고, 기쁠 때 노래를 부르고 슬플 때 술을 마시는 성향의 화남인들이 우리와 코드가 많이 통한다고 합니다(화북인들은 정반대라네요. 밀이 주식이고 슬플 때 노래, 기쁠 때 술을 즐긴답니다). 화남 화북을 통틀어 중국인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통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반일감정입니다. 남경 대학살이 있었던 그 날이 오면, 우리가 현충일에 그러듯 현지에선 특정 시각에 싸이렌이 울린다고 합니다. 9.18 로 잘 알려진 만주사변일에는, 다시는 영토 피탈의 국치를 겪지 말자는 다짐과 결의가 중국 전역을 휩쌉니다. 이러니 일본 기업이, 현지에서 변변한 영업의 엄두를 내겠냐는 거죠.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이런 핸디캡을 안고 출발하는데, 한국 기업은 오히려 같은 피해자로서 일정 정서를 공유하기까지 하니, 이게 기회가 아니면 뭐겠냐는 주장입니다.


여 기저기서 성장의 한계를 논하는데, 과연 시진핑 체제의 신리더십으로 돌입하여 차이나 3.0을 논하는 현 시점에서 엄연한 타국인일 뿐인 우리에게 기회가 남아 있는지의 질문도 던지고 있습니다. 저자의 자답은, 아주 분명한 어조로 "긍정"입니다. 그 단서는 우리가 입버릇처럼 떠올리는 "중국은 시스템이 아직 멀었어."에 있습니다. 저 자는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만약 시스템이 성숙해서 아무 불편이 느껴지지 않는 선진사회라면, 과연 우리가 치고들어갈 틈이 있겠냐."는 거죠. 짜증을 낼 게 아니라 고마움을 느껴야 옳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중국은 여전히 일부 공급상(수입 오퍼상)들이 수입을 전담하는 체제입니다. 그러니 상하이나 베이징 같은, 소비 수준과 구매력이 높은 도시에서 공급이 원활할 리가 없습니다. 홍콩의 명품샵, 우리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은 데서 "날을 잡아" 시장을 싹슬이하는 큰손의 행태는 다 여기서 기인합니다. 저자의 단언으로는, "아직 20%의 시장은 여전히 미개척으로 남아 있다."입니다. 어떤 중국 지도자는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 1인당 국민 소득이 몇 만 불로, 중국보다 여전히 부유한 국가라고는 하나, 우리 중국의 그 수준 이상 소득자만 꼽아도 한국의 전 인구보다 아마 많을 것이다." 엄청난 이야기죠. Size does matter라는 말이 새삼 실감납니다.


마 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조언은, 중국은 여전히, 명목상으로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정부가 결정하는 정책이 시장의 근본 흐름을 좌우하는 나라라는 겁니다. 수요 진작을 위해 구제품을 신제품으로 교환할 시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세계 제일의 검색 서비스를 자랑하는 구글이 결국 현지 정부 정책에 적응하지 못해 쫓겨간 나라가 중국이죠. 4P 외에 또다른 P, 바로 정치(politics)가 있음을 사업가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충언입니다. 소설처럼 술술 읽히고, 재미도 있고, 실전에 써먹을 실용적인 팁으로 가득하다는 게 이 책의 최고 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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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사랑·행복·자신감·인간관계…

“원하는 것이 있다면 거짓말을 해라!”

 

거짓말이 주는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 훌륭한 거짓말쟁이로 살아가는 법

모든 진실은 항상 통한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거짓말은 항상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이제까지 당신이 믿었던 진실과 거짓말에 대한 생각은 틀렸다. 때로는 진실보다 거짓말이 더 진실하다. 독일 최고의 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저자는 심리학적 이론과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거짓말은 나쁘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거짓말의 유용성을 파고들며 거짓말의 놀라운 힘을 전한다.

당 신이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상태라면? 만취한 친구가 자동차 열쇠를 찾는다면? 고칠 수 없는 상대의 단점이 눈에 띈다면? 당신은 자신과 상대에게 솔직해야 할까? 거짓말을 해야 할까? 이미 수많은 심리학 실험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 자존감과 행복감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왔으며, 거짓말이 인간관계에 필수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단언컨대, 거짓말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고,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없애며, 사회적 성공을 돕고 더 나은 행복을 선사한다. 이 책은 거짓말에 대한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 거짓말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과 거짓말을 쉽게 알아채는 방법을 알려주며 당신이 훌륭한 거짓말쟁이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 차례

 

1 거짓말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

진실을 고집하지 마라

솔직하다는 것은 경솔하다는 것

거짓말은 관계를 지킨다

변하지 않는 진실은 없다

 

2장 거짓말이 행복을 준다

나를 속이면 행복해진다

거짓말이 건강을 살린다

거짓말은 능력이다

진실보다 침묵, 침묵보다 거짓말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3장 사랑에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거짓말 없이는 사랑도 없다

유전자가 우리를 사랑하게 한다 

사랑에 빠지면 거짓말쟁이가 된다

남자의 거짓말, 여자의 거짓말

섬세한 거짓말이 사랑을 지킨다

 

4장 훌륭한 거짓말쟁이로 살아가기

단 하나의 진실은 없다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이유

초보자를 위한 거짓말 사용법

거짓말은 잘 들키지 않는다

거짓말은 훌륭한 사람을 만든다

 

5장 거짓말을 알아야 거짓말을 알아챈다

우리의 뇌는 잘 속는다

 

6장 나를 속이는 즐거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나의 속임수

 

 

◈ 포인트

○ 독일 아마존 105주 연속 1위, 100만 베스트셀러 작가 ‘우테 에어하르트’의 신작

○ 독일 최고의 긍정심리학자로 불리는 저자의 전문성과 대중성이 살아 있는 글

○ ‘거짓말은 나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자존감, 인간관계, 행복’이라는 키워드와 연관 지어 새로운 해석 제시

○ 거짓말의 긍정성을 설득력 있는 심리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다양한 사례로 보여줌

○ ‘거짓말’ 관련 주제에 대한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

 

◈ 저자 소개

 

<우테 에어하르트Ute Ehrhardt>

독 일의 대표적인 긍정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작가. 1985년 경제심리학 상담연구소를 설립하여 심리치료사, 강사, 컨설턴트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전작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는 독일 아마존 105주 연속 1위, 독일어권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우리나라를 포함, 전 세계 35개국에 번역·출간되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담긴 이 책은 다양한 심리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거짓말은 나쁘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거짓말의 유용성을 전한다.

거짓말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고의 지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빌헬름 요넨wilhelm Johnen>

아내인 우테 에어하르트와 함께 경제심리학 상담연구소를 설립하여 긍정심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저서로는 ≪왜 남성들은 강한 여성을 두려워할까?≫ 등이 있다.

 

 

 

 

 

★서평 이벤트 일정 안내★


● 도서명 : <거짓말의 힘> 

● 출판사: 청림출판

● 서평이벤트 기간 : ~ 11/10(일)

● 서평이벤트 발표 : 11월 10일 늦은 저녁
● 모집인원 : 10명
● 당첨자 정보 취합 : 11/10 - 11/12 까지 당첨자 배송쪽지 발송
● 도서수령시점 : 11월 13일 중 예정 / 출판사 직접배송 (배송사정으로 늦어질 경우 서평기간도 늘어남)
● 서평 완료 : 2013년 11월 30일 예정

* 서평등록

- 1) 개인블로그와 온라인 서점 (교보문고/예스24/인터파크/알라딘) 4곳 중 2곳에 서평 등록 후

- 2) 문충 서평리뷰 후기방에 리뷰등록 (1)개인블로그, 2)온라인서점 (2곳)


 

 

 

 

▶ 신청전 필독 사항

1. 서평이벤트는 도서를 무료로 받아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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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적용 - 2개월+신입등급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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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정보 쪽지 접수기간)을 지키지 못하면 당첨은 취소되고 대기자에게 양도됩니다.

4. 지역에 따라 배송기간에 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5. 이벤트 불참으로 페널티 적용중인 회원과 중복 이벤트 신청은 불가합니다.

6. 서평 작성조건으로 무료 제공받은 도서를 유료판매하는 행위를 엄금합니다.

(적발시 활동정지나 강퇴조치합니다)

▶문의 : 문화충전 스탭 기럭지 : 010-8856-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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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등대 - 공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우리에게 빛이 된 23인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1. 자크 아탈리(1943~ 현재)에 대해


자크 아탈리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현시대 프랑스 지성의 상징적 인물, 대표자 같은 타이틀이 항상 따라붙습니다. 프랑스를 넘어, 세계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죠. 이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1) 프랑스 지성인들과 유럽 거장의 유산, 영향을 한 몸에 다 받고 소화시킨, 박학하고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입니다.


2) 프랑스어로건 영어로건, 언제나 최상의 표현적 아름다움과 정확성을 잃지 않는 언명이 가능한 철학자이자 문인입니다.


3) 그의 지성과 철학은 언제나 소외되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향한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습니다.

따스한 미소와 원만한 인품이 드러나는 표정은, 마치 재기 넘치는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를 살짝 연상시킵니다. (사진출처: 그의 블로그)


4) 단지 저술 활동에 한정되지 않고, 정치, 관료, 금융인으로서 폭 넓은 활동을 벌여 왔고, 몸 담은 분야에서마다 뚜렷한 성공을 거둔, 실천적 지성인이자 전문가로서 빛나는 인물입니다.


5) 그 자신도 뛰어난 지성을 보유한 존재지만, 다른 위대한 인물을 면밀히 관찰하여,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평전 저술에 빼어난 재능까지 보였다는 점이 놀랍죠. 식민지 출신 답게 좌파적 스탠스를 잃지 않은 그에게 뚜렷한 지향점이 되어 준 K.Marx, 그리고 정치적으로 그의 버팀목, "주군"이 되어 주었던 프랑소아 미테랑의 평전 저술에서 이런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결같은 지지와 높은 평판을 유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동양과 유럽 정신사를 수 놓은 거장과 천재, 스승들을 바라본 사색과 평가를 이 책 하나에 다 담았다고 하니, 이 책 한 권으로 이 시대 인문정신과 지식의 정수를 요약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등대란 무엇인가?

"등대지기"라는 제목의 동요도 있지만, 음지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묵묵히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등대라는 존재는, 주연 아닌 조연으로 세상의 소금 같은 역할을 하는 고마운 이웃입니다.

자크 아탈리가 이 책에서 등대들(phares)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의 인생에 어느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지 않고, 먼발치에서 앞길을 비춰 주는 조언자이자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의미하는 바였겠습니다.

등 대는 좌표의 역할을 할지언정, 목표 지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배는 본디 자기 기항지, 목적지로 정해진 항구를 향해 나아가야 하며, 항해에 지쳤다고 해서 등대를 향해 돌진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큰 사고를 당하기 쉽죠. 위대한 정신적 스승의 삶과 가르침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참고와 지침으로만 삼아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3, 자크 아탈리가 짚은 23인의 등대들

자크 아탈리는 프랑스가 낳은 현 시대 최고의 석학이자 실무가죠. 최상의 인문 교육과 성공한 금융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한 그가 지목한 23인이므로, 대단히 의미 있는 컬렉션이고, 또 몇몇 인물들끼리는 공통점도 있을 겁니다.

1) 우선 11장의 압델 카데르를 보십시오. 이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입니다. 19세기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마그레브(대체로 현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지화를 반대하여, 조직화한 무력 항쟁을 주도한 사람이죠. 압델 카데르가 아탈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아탈리 자신이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까닭에, 자신은 백인이었으나 흑인 프란츠 파농을 선배로 대접하고, 깊은 지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23인 중에는 이 분 외에도, 우리가 잘 아는 22장의 호치민(베트남의 국부), 13장에 나오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끼어 있습니다. 아탈리는 평소에 체 게바라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했으나, 지역과 시대 안배상 이 책에서는 제외된 것 같습니다.

왼쪽부터 압델 카데르, 호치민, 시몬 볼리바르


2) 사상의 스승들도 있습니다. 2장에 서술된 아리스토텔레스, 8장 토마스 아퀴나스, 6장의 이븐 루슈드( ابن رشد    프랑스어 원서에는 당시에 유럽에 알려졌던 통칭대로 아베로에스라고 적혀 있습니다. 청림출판에서 아랍인 인명 표기 원칙에 맞게, 현지어를 존중하여 바로잡은 것 같아요) 등이 나와 있습니다. 이븐 루슈드의 공헌은 지대하다고 평가 받습니다. 고대 철학과 일신교를 통합, 절충했다는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역할에 비견됩니다(시대적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직전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죠).

이븐 루슈드(왼쪽), 모세 마이모니데스(오른쪽)

7 장에는 모세 마이모니데스가 나오죠? 이 사람은 명료성의 가치를 일깨운, 유태 신비주의 철학자입니다. 자크 아탈리는 이 책 뿐 아니라, 유태인들의 습성과 문화, 그리고 유태인 출신이면서 걸출한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에리히 프롬도 깊은 관심을 쏟은 이 신비주의자에 대해, 아탈리가 간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과연 그의 해석으로 어떤 인물평이 전개될지 기대되는군요. 이 사람의 영향이 5장의 힐데가르트 폰 빙엔(마이모니데스보다 나이는 많지만, 동시대인입니다), 그리고 9장의 조르다노 브루노에게까지 계보를 이어나갑니다. 브루노는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경원시되던 인물이라, 위의 그룹의 혁명가들과도 일맥상통하는 코드입니다. 화가 카라바조(10장) 역시, 시대의 주류에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은 반골이었고, 이런 rebel의 계보는 시대를 멀리 뛰어 넘어 찰스 다윈에까지 이어지죠. 


3) 다소 의외인 점은 19장에 토마스 에디슨이 실려 있다는 건데요. 아탈리는 이 발명왕에게서도, 시대의 정해진 룰과 틀을 거부하는 반항아로서의 면모를 높이 샀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바이마르 체제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라테나우(18장)가 수록된 점도 의외지만, 이 사람이 양극단의 대립을 중재하려 애쓴 경력, 탁월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인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유태인(反 시온주의자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목을 사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물론 극적인 최후(암살)도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죠.


4) 음악가로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나옵니다. 평소에 베토벤과 구노를 즐겨 듣는 걸로 알려진 아탈리의 선택으로서는 의외인데요. 이 점은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어요. 여성으로는 스탈 부인, 그리고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이 분은 러시아 혁명 당시 백군 편을 들었다는 점에서 역시 아탈리의 선택으로는 의외의 인물입니다), 아프리카인으로는 함파테 바, 인도인으로서 아소카 왕(불교 군주), 라즈찬드라(간디의 정신적 스승)이 ?曹? 있습니다.

왼쪽부터 스탈 부인, 함파테 바, 마리나 츠베타예바


5) 우리는 이 책의 제 1장에 공자가 실려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근세 이후 계몽사상가들이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들였죠(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도 노자의 영향이죠. 나폴레옹 역시 관료제의 능력주의 인사 원칙을, 중국의 과거제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반(反) 중국 분위기가 강합니다. 아프리카 각지에서 영향권역을 두고 충돌이 빚어지고 있으며, 국제 무역 시장에서도 이해관계의 상충이 빈번히 빚어지기 때문입니다. 동시대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 같은 이는, 한국과 일본이, 중국에 맞선 동맹을 맺는 일까지 제안한 적 있죠. 자크 아탈리의 스탠스도 이에서 크게 동떨어지진 않습니다. 좀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이 책의 프랑스어 원서에는, 본디 24인의 명단이 실려져 있었습니다(2010년 초판 기준). 그럼, 빠진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가? 연호를 명치(明治), 메이지로 쓰는, 목인(睦仁. 무쓰히토)이라는 이름의 일왕(日王)입니다. 이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으므로, "등대들"의 리스트에서 제외된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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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권에서 그 실험 과정의 세세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한 채, 베르베르는 다비드-오로르-나탈리아 들의 이후 성공담으로 시원스레 치닫습니다. 한 세기(아니, 두 세기인가요?) 전 자기 나라가 배출한 세계적 지성 쥘 베른이 강박적으로 디테일에 집착한 걸 고려하면(어찌나 그 정도가 심했는지, 베른의 세부 묘사의 대부분은 160여년 지난 지금도 거뜬히 타당성을 유지할 만큼이죠), 이 재기넘치는 프랑스인은 미션의 자체완결성보다는, 그를 접하는 대중의 엔터테인먼트적 효용을 더 중시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서 어찌 보면 이 책이 주장하는 초시대적 가이아의 항존성과는 묘한 역설적 대비를 보이구요. 만약 오로르들이 그처럼 "대충대충"의 직업 마인드를 지녔다면, 아마 대단히 운이 좋거나 초월적 존재의 개입(deus ex machina)이 없는 이상에는 그런 기막힌 업적("제3인류의 창조")를 이루기가 어렵겠다는 점 말씀 드리고 싶네요. 하찮은 실험이라도 목숨을 걸다시피한 집요함과 정밀성이 결여되면, 백이면 백 실패하는 게 냉정한 현실입니다.


수시로 잘도 결정적 국면에 끼어들며, (스포일러라서 말할 수는 없으나) 중반부에서 반칙성 무대 출연을 하기에 이르는 가이아의 경우, 대단히 특이한 개성을 지닌 의식체입니다. 가이아가 신이 아님은 이미 제가 앞 리뷰에서 언급한 바 있고, 자신도 거의 투정 어린 한 대사에서 이를 분명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귀를 열고 뇌를 작동시키면서도 듣지 못해.." 어쩌구) 신은 아니지만 그 엄청난 사이즈 때문에 타 생명체에 끼칠 영향 범위가 지대한 그녀(일단 여성이라고 하죠. 가이아는 본디 신화 체계에서  gender가 여성인 신이었고, 이 책에서도 그 주제가 인류의 살 길이 여성성의 증가에 있다는데 말입니다)는, 눈과 귀와 (결정적으로 중요한) 손과 팔이 없는 불구의(?) 존재지만, 신체 세부 부위에 대해 대단히 미세한 범위로 튜닝 조작이 가능한가 봅니다. 그녀가 소설 곳곳에서 일으키는 자연재해(의 응보)야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남극 특정 지점에서 특정 대상(그녀가 "미니 인류"라고 부르는 우리 종의 몇몇 인사)를 향해 정확한 크레바스를 유발할 수 있을까요? (역자 이세옥 선생은 "동티"라고 표현합니다) 예컨대 우리 인류 중 누구라도, 간질간질 괴롭히는 모기 한 마리의 뺨을 향해, 정확히 터럭 한 올만 곤두세워서 그 싸대기를 후려 칠 능력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소설에서 가이아가 여러 번 선뵈는 묘기는 딱 그 수준입니다. 그런 서커스 자질의 보유자이긴 하나, 그렇다고 신은 아닙니다. 신은 고사하고, "저들 인간이 설마 나에게 모종의 복수심에서 저런 짓(석유 시추를 위한 굴착, 지하 핵실험)을 할까?" 하는 소심함마저 내비치는 게 가이아입니다. 우리하고는 세계와 자연을 바라보는 스케일부터가 다르므로, 가령 종의 개체 중 20%를 그저 경고 차원에서 쓸어버리고도 별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구약성서의 신은 그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 2권의 초반부에서 가장 시니컬하니 멋진 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굴바하르 모카담 장군입니다. 그의 손윗누이는 의사를 꿈꾸던 재원이었으나, "차도르를 입지 못하게 하는" 샤 팔라비("팔레비"가 정확하겠습니다만)의 압제에 맞서 저항의 선두에 나섭니다. 모크 장군은 (자신의 말에 따르면), 고작 "늙은이들에게 어린 신붓감을 대어 주는 행위의 합리화나, 술이나 배꼽춤을 단속하여 줄이는 일에 정력을 쏟는 신세"로 자신을 희화화합니다. 모크 장군의 말을 빌리면, "누님은 이제 그 쓴 차도를 벗을 자유가 없게 된 채, 일개 부엌데기 신세로 전락하여 매형과 매일 부부싸움이나 하는 처지"로 떨어졌죠.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샤 팔레비를 축출할 무렵 대학생이었다면 지금 이 여성이 몇 살이란 뜻입니까? 아무리 상대적 시간의 배경이라고는 하나 구체적 타당성이 결여된 창작의 방종이라는 비판을 들어 마땅합니다. 여튼 페미니즘과 정치적 진보 사조의 모순적 충돌은, 이 책 1권에서도 오로르의 모친과 한 모슬렘 여성 사이의 난투극으로 우스꽝스럽게 드러난 바 있죠.


베르베르는 소설 곳곳에서, 이른바 진보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서슴지 않고 드러냅니다. 미 제국주의의 착취와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대대적 환영을 안고 등장한 이란 이슬람 혁명이지만(호메이니는 바로 프랑스 정부가 마련해 준 망명처에서 고국의 혁명을 원격 지원했습니다. 프랑스의 톨레랑스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죠), 그 혁명의 과실은 가장 날카롭고 위협적인 비수로 바뀌어 오늘날의 서구 문명 일반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 현실은 이 2권에서 "800여기의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기지"로 묘사되어, 이슬람 근본주의의 villain적 스탠스를 의심 없이 분명히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악마의 시":를 쓴 살만 루시디처럼 베르베르도 아야툴라의 심판 대상이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살만 루시디는 "예언자"에 대한 직접 모독의 서술을 썼고, 인종적 배경상 미움을 살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으며, 이슬람 율법의 사형 선고가 그리 단순한 절차에 따라 집행, 적용이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1권에서 신종 독감 백신 구입을 위한 예산의 방만한 적용으로 고위 공직자들이 탄핵 대상이 되는 대목이 잠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대목은, 바로 이 2권에서의 전폭적 장면 전환을 위한 복선이었던 셈입니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재앙적 전염병이 전 지구를 휩쓸었다고 해도, 어찌 그리 단시일에 글로벌한 무정부상태가 빚어질 수 있을까, 또 그 은폐된 과학 기지에서, 다비드 들이 그처럼 쉽게 인간적 품위와 절제를 잃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 에일리언 2편에서, 리플리의 무리가 여아, 고양이,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려드는 그 씬을 연상케 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설에서 악력이 센 나탈리아는 영화 X-men 2(2003)에서 레이디 데쓰스트라이크(켈리 후 분)를 떠올리는 바 강합니다(신장은 비록 큰 차이가 나지만).


테헤란발 핵무기의 궁극적 겨냥이 이스라엘이 아닌, 바로 수니파 총본산인 리야드를 겨냥하고 있다는 말은 근거 없는 억측이 아닙니다. 시야가 좁은 근본주의자들은, 궁극의 적이 아닌 눈 앞의 원수를 더 못견뎌하는 법이니까요. 그런 통찰은 옳습니다만, 그렇다고 이슬람을 싸잡아 테러러스트, 세계 평화의 적으로 몰고, 반대로 서구 민주주의, 반전체주의의 협력 대상으로 유태인을 설정함은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UN 사무총장이 지나치게 정치적 비중이 커진 점도 현실감이 떨어지고, EU라는 국제 정치 단위는 실종되어 보이질 않으며, 러시아와 중국을 그저 이슬람 후원 세력으로 묘사하는 점도 타당성이 결여되었습니다. 설사 "외계인 시나리오"가 사기로 드러나더라도, 국제 정치계나 대중의 여론이 그런 방향으로 선회하진 않을 것입니다. 다만 독감에 걸려 몰살하는 아야툴라 페라지 들의 운명이 대단히 코믹했던 건 분명합니다.


이 책은 1부의 마무리라고 합니다. 아직 완결된 소설이 아니므로, 제 2부(한국판으로는 3권, 4권)의 속간을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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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제3"이란, 보통은, 미지의, "너"와 "나"가 아닌 낯선 존재를 지칭합니다. 아직 그를 향한 구체적인 관계맺음이 이뤄지지 않은, 그 타인성조차도 정도가 불확실한 대상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제목에서의 "제3"이란 수식어는,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주인공들(다비드, 오로르, 그리고 프랑스 제 5공화국 대통령, 심지어 이란 대통령 자파르 등)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에게는, 이 제3인류는 말그대로 "당혹스러운 제 3자성"을 지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인공들의 시선으로 작품을 여행하는 것이므로, 에마슈라는 "미래의 희망(2권 이후에서는 그 반전이 암시됩니다만)"이 제 3자일 수 없습니다. 이 선량하고 유능한 미니어처들에 대해 마치 자식과 같은 따뜻한 시선을 보내게 되고, 때로는 그 창조주들의 이상하리만치 무심한 처신들을 향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낼 정도로 정을 갖게 되는 건 저만의 경험이 아니지 싶습니다.


작디작은 모습으로 미래의 지구 운명을 책임지게 되는 "제3인류"가 한쪽 지점에 놓인 반면, 저 멀리 심층의 구석에는 거대한 사이즈를 한 또다른 인격체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종래 일종의 신으로 착각(....)해 왔던 가이아가 그것입니다. 베르베르가 상정한 가이아는, 종래 일부 과학저술가들이 즐겨 논하던 바로 그 인격체적 사고와 감정, 호흡 특성을 지닌, 대단히 "인간적인" 가이아의 모습을 그대로 따 왔습니다. 가이아는 분명 인간(이른바 "제1인류")의 창조주이기는 하나, 원초의 생명을 빚은 신적 존재는 아닙니다. 그 역시 우연의 물리 작용으로 자신의 형체를 갖게 되었고, 어떤 까닭인지는 모르나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이 가이아는 지난 내력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며, 아픔을 느끼고 자기 보존의 본능이 있으나, 시각과 청각을 지니지 못합니다. 반면, 하찮은 미물인 우리 인류[제2인류]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존재 근원의 의문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형태로 떠올리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 거죽에 기생하는 뭇 생명체를 두고는 냉소와 자비의 심기를 동시에 띨 줄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존재적 의문을 갖지 않는 모습도 특이한데요, 이로써 우리는 그가 신이 아님을 확인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what I am의 근원적 속성을 지님을 추론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전자 쪽의 결론이 합당한 듯합니다).


총명하고 창의적이나, 튀는 개성과 독특한 기질로 무난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두 젊은 지성이 있는데, 다비드와 오로르가 그들입니다. 이 중 다비드는, 놀랍게도, 한 세대 전(이라고는 하나,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에서의 시간 진행은 "상대적"입니다),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의 저자 에드몽 웰즈[헉!]의 증손자입니다(이러니 벌써 물리적으로는 앞뒤가 안 맞는 설정이죠. 하지만 넘어가겠습니다). 그의 부친은 용감하게도 남극의 극한 지점을 찾던 중, 뜻밖의 과학적 발견(이런 발견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그건 이미 "과학적" 발견에 국한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변의 우려처럼, 학계와 미디어, 이 개명한 시대의 검증력은, 엄연한 진실과 실증을 두고 무지와 편견, 혹은 교활한 이해관계의 변수에 압도될 만만한 수준이 결코 아니구요[뒤에 나오는 "더 결정적인 증거"의 발굴 아닌, 최초의 그 발견만으로도 쓰나미와 같은 파장을 몰고 올 것입니다]. 베르베르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세계관을 이 대목에서 노출하는데, 단언하지만 이는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책에는 억울하게 사기꾼으로 몰린 과학자의 사례로 파울 캄메러(오로르 캐머러의 증조부라고 합니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건 맞습니다만, 그의 주장이 명백한 진리였음에도 모종의 음모에 의해 오명, 누명을 쓰고 죽은 건 아닙니다. 베르베르의 이 부분 서술은, 어느 정도 토마스 쿤의 이른바 "패러다임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획득형질(라마르크의)론이 시대의 더께를 떨고 다시 이론의 중심으로 부상하려면, 아직 먼 세월과 검증의 지원을 기다려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이미 라마르크의 오류의 낙인을, 다윈의 입장에 진리의 공증을 해 준 셈이나 마찬가지인데, 일부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가까운 장래에 극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고 하는군요. 이 책에서는 상어 따위의 단성 생식 사례 등 충격적인 팩트를, <상대적이고...>로부터의 재인용 형식을 통해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베스트셀러가 많은 작가, 상상력과 지식이 풍부한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흐뭇한 특권이라 하겠습니다. 저도 간만에 열린책들에서 번역되어 나온 그 두툼한 책을 곁에 끌어다 놓고, 이 책 저 책 왔다갔다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죠.


p99에 보면, 우리 현생 인류(이른바 제 2인류)의 그 모든 메저먼트 수치에 10을 곱한 수를 지닌 거인들(제 1인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런데, 과연 17m의 키를 가진, 우리 인류와 비슷한 신체 구조를 지닌 거인의 몸무게가, 우리 인류 성인의 평균 몸무게 70kg에 10을 곱한 수치, 0.7t밖에 나가지 않을까요? 책에도 나오듯, 17m면 건물 한 채의 높이입니다. 황소 한 마리 몸무게도 평균 500kg입니다. 구조가 닮음꼴이라는 가정 아래, 길이가 10배이면 넓이는 그의 제곱인 100배, 부피나 몸무게는 그의 세제곱으로 커지는 게 원칙이죠. 다만 유기체의 여러 특성상, 몸무게가 세제곱으로 불어나지는 않음을 감안하더라도, 700kg은 너무 작은 수치입니다. 추정하건대 티라노사우루스의 경우 10t을 보통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타 척추동물에 비해 그닥 날렵한 구조는 아니므로, 대략 7t 정도는 생각해야 얼추 균형이 맞겠습니다. 2권에 보면 13cm의 키를 가진 에마슈가 700g의 몸무게라고 하므로(베르베르도 스스로 모순을 인정한 셈입니다), 최소한 체중에 있어서는 100배수의 원칙이 적용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모럴로부터 자유로운 세계관을 지닌 여러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사실상 오로르의 경우는, 늙은 여교수 크리스틴과 일종의 "스폰싱" 관계를 맺은 셈인데, 독자로서 이런 주인공의 입장에 선뜻 제한적 동조라도 해 주기가 몹시 꺼려지더군요. 아직 소설이 미완결이니만큼, 이 캐릭터적 복선이 향후 어떤 구실을 할지는 지켜 봐야 할 일입니다. 실물의 신장이 프랑스인치고 평균에 결코 떨어지지 않을 베르베르가, 이처럼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단신의" 다비드라는 성격의 주인공을 빚어낸 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프랑스인 대통령 스타니슬라스 드루앵이 미 대통령 프랭크와의 통화에서 그의 과학적 지식이 결코 상대에 못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든가, 오로지 금기 위반에 대한 쾌감을 위해 불륜, 코카인 흡입, 난교에 탐닉하는 모습을 그린 점도 좋았습니다. 베르베르가 그처럼 故 미테랑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닌 줄은 이 작품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읽으면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더군요.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 풍자의 기능을 대단히 멋지게 해낸 우화임에 분명합니다.


아프리카의 피그미 부족과 서아시아의 쿠르드 족, 그 기구한 운명에 대해 <상대적...>의 어카운트를 통해 제법 상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잠비크의 독재자가 바추카포를 이용해 코끼리 사냥을 즐기는 행태, 서남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반인도적이라 할 만한 원목 남벌 행위, 이 모든 게 가이아론적 관점에서 성공적인 재해석이 이뤄짐은 이 소설의 분명한 성취 중 하나입니다. 소설은 재미 뿐 아니라 일정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음을 독자가 스스로 느껴야 그게 성공인 법인데, 이 점에서 베르베르는 지금껏 그래 왔듯 대단히 "잘하고" 있습니다.


p78 에 보면 PACS을 "시민연대협약"으로 옮기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번역용어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지만, 이미 국내 학계에서 이리 쓰는 걸로 굳어 버렸으므로 역자 이세욱 선생도 별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특히 짐 모리슨의 "디 엔드"가 배경에서 하는 기능을 상세한 역주로 해설 받을 수 있는 체험이란, 우리 독자가 다른 분에게서 쉽게 기대할 수 없는 보람이겠습니다.


p 356
체중 관리를 해도 → 해도

p427
찬찬이 → 찬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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