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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등대 - 공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우리에게 빛이 된 23인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1. 자크 아탈리(1943~ 현재)에 대해
자크 아탈리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현시대 프랑스 지성의 상징적 인물, 대표자 같은 타이틀이 항상 따라붙습니다. 프랑스를 넘어, 세계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죠. 이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1) 프랑스 지성인들과 유럽 거장의 유산, 영향을 한 몸에 다 받고 소화시킨, 박학하고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입니다.
2) 프랑스어로건 영어로건, 언제나 최상의 표현적 아름다움과 정확성을 잃지 않는 언명이 가능한 철학자이자 문인입니다.
3) 그의 지성과 철학은 언제나 소외되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향한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습니다.

따스한 미소와 원만한 인품이 드러나는 표정은, 마치 재기 넘치는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를 살짝 연상시킵니다. (사진출처: 그의 블로그)
4) 단지 저술 활동에 한정되지 않고, 정치, 관료, 금융인으로서 폭 넓은 활동을 벌여 왔고, 몸 담은 분야에서마다 뚜렷한 성공을 거둔, 실천적 지성인이자 전문가로서 빛나는 인물입니다.
5) 그 자신도 뛰어난 지성을 보유한 존재지만, 다른 위대한 인물을 면밀히 관찰하여,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평전 저술에 빼어난 재능까지 보였다는 점이 놀랍죠. 식민지 출신 답게 좌파적 스탠스를 잃지 않은 그에게 뚜렷한 지향점이 되어 준 K.Marx, 그리고 정치적으로 그의 버팀목, "주군"이 되어 주었던 프랑소아 미테랑의 평전 저술에서 이런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결같은 지지와 높은 평판을 유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동양과 유럽 정신사를 수 놓은 거장과 천재, 스승들을 바라본 사색과 평가를 이 책 하나에 다 담았다고 하니, 이 책 한 권으로 이 시대 인문정신과 지식의 정수를 요약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등대란 무엇인가?
"등대지기"라는 제목의 동요도 있지만, 음지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묵묵히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등대라는 존재는, 주연 아닌 조연으로 세상의 소금 같은 역할을 하는 고마운 이웃입니다.
자크 아탈리가 이 책에서 등대들(phares)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의 인생에 어느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지 않고, 먼발치에서 앞길을 비춰 주는 조언자이자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의미하는 바였겠습니다.
등 대는 좌표의 역할을 할지언정, 목표 지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배는 본디 자기 기항지, 목적지로 정해진 항구를 향해 나아가야 하며, 항해에 지쳤다고 해서 등대를 향해 돌진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큰 사고를 당하기 쉽죠. 위대한 정신적 스승의 삶과 가르침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참고와 지침으로만 삼아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3, 자크 아탈리가 짚은 23인의 등대들
자크 아탈리는 프랑스가 낳은 현 시대 최고의 석학이자 실무가죠. 최상의 인문 교육과 성공한 금융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한 그가 지목한 23인이므로, 대단히 의미 있는 컬렉션이고, 또 몇몇 인물들끼리는 공통점도 있을 겁니다.
1) 우선 11장의 압델 카데르를 보십시오. 이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입니다. 19세기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마그레브(대체로 현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지화를 반대하여, 조직화한 무력 항쟁을 주도한 사람이죠. 압델 카데르가 아탈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아탈리 자신이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까닭에, 자신은 백인이었으나 흑인 프란츠 파농을 선배로 대접하고, 깊은 지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23인 중에는 이 분 외에도, 우리가 잘 아는 22장의 호치민(베트남의 국부), 13장에 나오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끼어 있습니다. 아탈리는 평소에 체 게바라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했으나, 지역과 시대 안배상 이 책에서는 제외된 것 같습니다.

왼쪽부터 압델 카데르, 호치민, 시몬 볼리바르
2) 사상의 스승들도 있습니다. 2장에 서술된 아리스토텔레스, 8장 토마스 아퀴나스, 6장의 이븐 루슈드( ابن رشد 프랑스어 원서에는 당시에 유럽에 알려졌던 통칭대로 아베로에스라고 적혀 있습니다. 청림출판에서 아랍인 인명 표기 원칙에 맞게, 현지어를 존중하여 바로잡은 것 같아요) 등이 나와 있습니다. 이븐 루슈드의 공헌은 지대하다고 평가 받습니다. 고대 철학과 일신교를 통합, 절충했다는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역할에 비견됩니다(시대적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직전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죠).

이븐 루슈드(왼쪽), 모세 마이모니데스(오른쪽)
7 장에는 모세 마이모니데스가 나오죠? 이 사람은 명료성의 가치를 일깨운, 유태 신비주의 철학자입니다. 자크 아탈리는 이 책 뿐 아니라, 유태인들의 습성과 문화, 그리고 유태인 출신이면서 걸출한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에리히 프롬도 깊은 관심을 쏟은 이 신비주의자에 대해, 아탈리가 간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과연 그의 해석으로 어떤 인물평이 전개될지 기대되는군요. 이 사람의 영향이 5장의 힐데가르트 폰 빙엔(마이모니데스보다 나이는 많지만, 동시대인입니다), 그리고 9장의 조르다노 브루노에게까지 계보를 이어나갑니다. 브루노는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경원시되던 인물이라, 위의 그룹의 혁명가들과도 일맥상통하는 코드입니다. 화가 카라바조(10장) 역시, 시대의 주류에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은 반골이었고, 이런 rebel의 계보는 시대를 멀리 뛰어 넘어 찰스 다윈에까지 이어지죠.
3) 다소 의외인 점은 19장에 토마스 에디슨이 실려 있다는 건데요. 아탈리는 이 발명왕에게서도, 시대의 정해진 룰과 틀을 거부하는 반항아로서의 면모를 높이 샀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바이마르 체제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라테나우(18장)가 수록된 점도 의외지만, 이 사람이 양극단의 대립을 중재하려 애쓴 경력, 탁월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인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유태인(反 시온주의자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목을 사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물론 극적인 최후(암살)도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죠.
4) 음악가로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나옵니다. 평소에 베토벤과 구노를 즐겨 듣는 걸로 알려진 아탈리의 선택으로서는 의외인데요. 이 점은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어요. 여성으로는 스탈 부인, 그리고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이 분은 러시아 혁명 당시 백군 편을 들었다는 점에서 역시 아탈리의 선택으로는 의외의 인물입니다), 아프리카인으로는 함파테 바, 인도인으로서 아소카 왕(불교 군주), 라즈찬드라(간디의 정신적 스승)이 ?曹? 있습니다.

왼쪽부터 스탈 부인, 함파테 바, 마리나 츠베타예바
5) 우리는 이 책의 제 1장에 공자가 실려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근세 이후 계몽사상가들이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들였죠(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도 노자의 영향이죠. 나폴레옹 역시 관료제의 능력주의 인사 원칙을, 중국의 과거제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반(反) 중국 분위기가 강합니다. 아프리카 각지에서 영향권역을 두고 충돌이 빚어지고 있으며, 국제 무역 시장에서도 이해관계의 상충이 빈번히 빚어지기 때문입니다. 동시대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 같은 이는, 한국과 일본이, 중국에 맞선 동맹을 맺는 일까지 제안한 적 있죠. 자크 아탈리의 스탠스도 이에서 크게 동떨어지진 않습니다. 좀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이 책의 프랑스어 원서에는, 본디 24인의 명단이 실려져 있었습니다(2010년 초판 기준). 그럼, 빠진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가? 연호를 명치(明治), 메이지로 쓰는, 목인(睦仁. 무쓰히토)이라는 이름의 일왕(日王)입니다. 이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으므로, "등대들"의 리스트에서 제외된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