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싱 1 오싱 1
하시다 스가코 지음, 김균 옮김 / 청조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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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싱>은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시점,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거의 같은 주파수와 진폭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전합니다. 저 멀리 미국이나 유럽에도 소개되었고, 그곳의 독자(讀者)들 역시 한 여인의 삶으로 알레고리된, 일본이라는 사회 자체의 가난과 무지, 봉건 잔재의 혁파 과정을 장대한 서사시로 다룬 이 작품의 독자(獨自)적 가치에 큰 갈채를 보냈다고 하죠? 하지만 이는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건조한 정보에 지나지 않고, 20101년대인 바로 지금을 거대한 불확실성 속에 맹렬한 경제활동으로 겪어 내고 있는 세대가 자신의 영혼과 감성, 혹은 이성으로 수용하는 이미지는 아니겠습니다. 최근 스크린으로 다시 옮겨지기까지 한 <오싱>. 왜 30여년이 흐른 지금 와서 다시 <오싱>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이 현대판 "고전"의 텍스트와 행간을, 첨단의 문명과 트렌드의 세례,그리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시대정신의 촉각을 예민하게 발동시킨 후에야 그 진정성 있는 내용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처음에 이 책을 펼쳤을 때, 그저 읽는 이의 눈물만 짜내는 신파류의 애담(哀談)이 전개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영어로 흔히 tearjerker라고 하는). 우리가 부모님 세대로부터 전해 들은 바도 그렇고, 오싱은 그저 어린 여자 주인공이 가난에 찌들고 멸시 받고, 온갖 고생만 하다가 마침내 세속적 부(富)라는 보상을 받는 결말로 끝나는, 상투적인 입지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오싱이 결국은 악몽과도 같았던 가난이 저주를 이기고 거부(巨富)를 쌓는다는 결말입니다. 이는 그 동시대인들에게는 합당한 정의의 회복 같이 다가왔겠으나, 시대를 격한 현대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로 신파입니다. 차라리 모진 고생 끝에 여전한 빈곤에 파묻힌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이는 냉연한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모던함이라도 있습니다(신파성의 역설적 완화). 그런데 그 모진 시련을 딛고 결국엔 보란 듯이 자수성가의 봉우리에 올라 수난의 보상을 받는다? 당대 대중(한국과 일본 기준)의 정의감과 문화적 성숙도에 비추어 이는 결국 신파입니다. 가난을 극복하러 일에 중독되다시피 피땀을 흘린 그 노고도 사실이요, 노력이 그 땀의 결실을 어느 정도는 정직하게 돌려 주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결말도 과장은 아니지만, 오싱처럼이나 모진 시련을 한 몸으로 겪어낸 이는 극히 드물었겠고, 그녀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성공의 정점에 오른 인생은 더욱 드물다는 점에서이죠. accentuate the positive, eliminate the negative! 신파의 생명은 바로 장점의 부각, 단점의 희석이라는 과장법에 본질이 있습니다.


만약 이 <오싱>이 그런 변종 신파, 철저히 당대에만 효용, 호소력을 가졌던 신파에 불과했다면,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화려하게 살아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퇴장했던 <오싱>이 다시 현대인의 커튼 콜을 받은 배경에는, 무언가 지금에 와서 다시 들여다 봐도 영감을 주고 활기를 생산하는,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여전히 그 안에 있는 덕분이었을 겁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다 알 것 같은, 읽지 않아도 다 읽은 것만 같은 착각을 편하게 부르는(고전이 보통 이렇습니다만) <오싱>을, 지금 이 시점에서 직접 읽어봐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이 1권을 읽고 느낀 점을 간략히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이 소설은 시간순서대로 따분하게 사건 배열을 하지 않고, 80고개를 넘은 노인이 된 오싱을 둘러싼 풍경과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오싱의 시선과 회고가 내러티브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핏줄도 아닌 양손자 격 게이의 눈을 통해 주로 그녀의 생각과 행동이 독자에게 전해집니다. 이 게이는 갓 스물을 넘긴 대학생 정도의 나이이며, 이전 세대의 선입견이나 속물 근성을 아직은 물려 받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싱 노인과 이 청년 게이 사이에는 어떤 혈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오싱 노파는 이 청년을 친손주 이상으로 사랑합니다만, 우리는 소설을 읽어 가면서 그 배경과 깊은 곡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이의 눈을 통해 초반의 액자가 형성되면서, 우리는 이 소설의 공명대가 무한히 유효한 젊은 세대 시선의 성격을 유지한다는 점에 공감하며 서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만약 시종일관 노인의 1인칭으로 흘러갔으면 우리는 이 장편의 구경꾼으로만 남았을 것이며, 지난 시대의 객담은 그 자체로 소설의 낡은 페이지 안에서 고립되었을 겁니다.


2) 오싱은 물론 운명처럼 어떤 이끌림에 의해 자신의 고향, 그 신산과 고생에 녹아든 고장으로 단신 이동을 감행했지만, 그 심리적 배경에는 가족과 사업체에 대한 불만이 깃들어 있었을 겁니다(자신은 애써 부인하죠). 아들과 운영진에 대한 생각은 불만과 노함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에는 우려가 더 갚은 차원에 깃들어 있습니다. "이로 가서는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파국에 도달한다." 사업의 영속성에도 걱정이 미치거니와, 그 사업이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에까지 노인의 사려는 범위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웃들 사이에서 인심을 잃고서 어찌 이윤을 계속 낳을 수 있겠으며, 설사 장사가 잘 된들 주변을 궁핍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면 이것은 이기적인 죄업에 다를 바 아닙니다. 오싱 할머니는 가문의 장래와 공동체의 미래까지 동시에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어. 이대로는 안된다." 바로 이 점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경영학 이론을 배운 바 없는 그녀지만, 삶의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통해 살아 있는 지혜를 터득한 위상인지라 한숨 하나에도 백명 천명 분의 생령과 고뇌를 담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불길한 예언이라도 되듯, 오늘날 성장이 정체되고 전통 가치가 송두리째 변질 붕괴된 일본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고전과 한시절 유행물의 차이는 이처럼, 그 교훈과 유용성이 현재에까지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서 차이가 납니다.


3) 오싱이 모진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물론 두뇌의 총명함에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태생의 밝은 성격, 정의감, 좁은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환경의 요구와 압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줄 아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이런 성격상의 매력은, 인간이 그 깊은 마음에서부터 언제나 동경하고 수렴하려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녀의 주변에는, 인간의 탈을 쓴 악종 말종도 있었지만, 약속이나 한 듯 뜻하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 은인과 조력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인류 보편의 희망을 상징하는 성화 봉송 주자가 그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듯, 릴레이식으로 출현하는 은인, 의인들은 오싱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휴머니티의 약한 맥이 마침내 그 결을 맺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면면히도 그 줄을 이어갑니다. 이 중에는 마치 반군국주의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 동사 직전의 오싱을 자기 체온으로 살리는 탈영병 쥰사쿠도 끼어 있습니다. 그는 오싱에게 문자를 가르쳐서, 보다 넓고 열린 세상으로 인도하는 한 줄기 등잔의 구실을 합니다.


4) 오싱의 역경 극복 과정이 자연스럽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나카가와 목재상에 더부살이로 팔려가 특히 스네라는악질 관리역의 모진 학대에 시달리는데, 결국 은 50전 절도의 누명을 쓰고 "직장"에서 반타의로 이탈하고는, 끝내 목귀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만약, 나카가와家로 복귀하여 그 악한들 앞에서 명예 회복을 하고 그들을 설복하는 식으로, "작은 단계"에서의 승리까지 다 챙기게 하는 구성이었다면 현실감이 매우 덜했을 겁니다. 그러나 오싱은 일단 이 단계에서 역량 부족으로 좌절을 맛봅니다. 그리고 쥰사쿠 일가로부터 생명력을 충전받은 다음, 본가로 귀환하여 극한 상황에서 일단 생존을 도모할 방도가 무엇인지 자각합니다, 고용 계약이 성립하기도 전에 신나는 모습으로 더부살이길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연민의 대상이라기보다 "마땅히 저래야지!"라는 동감과 응원의 표적이 됩니다. 가가야 쌀 도매상에 당도해서도, 그 악몽 같았을 나카가와 목재상에서의 경험을, 커리어나 이력처럼 내세우는 그녀의 강인한,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시대를 초월한 회복 탄력성 그 미덕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같은 점들이, 오늘에 와서 다시 오싱을 읽어야 할 그 보편적인 매력과 감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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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을 사로잡을 12가지 트렌드 - ‘로봇 식당’에서 ‘배보다 배꼽 마케팅’까지
KOTRA(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 엮음 / 알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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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트렌드"란 과연 무엇인가. 이 책에서도 잘 정의하고 있지만, "트렌드"와 단순한 "유행"은 일견 비슷하면서도 본질적이다 싶게 다른 면이 있습니다. 다소 시니컬하게도 들리지만, "트렌드"는 일시적인 게 아니라 (그 설명자의 그럴싸해 보이는 내러티브에 힘입어) 뭔가 문화적, 산업적, 나아가 인문적 맥락이 담겨진(혹은 그렇게 우리에게 제시된) 거대, 혹은 마이크로 동향을 의미합니다. 책에서 내세우는 절실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물리적 본질은 유행과 트렌드가 서로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를 두고 있음에 불과합니다. 특히나 소비 부문 트렌드(라고 저술가들 애널리스트들이 내 놓은 것)을 보면,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모를 만큼 모호하면서도 수긍이 안 가지는 않는, 정체불명의 녀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싣고 있으니 친근하면서도, 전체로서는 거대한 실체가 따로 있어 분석가들의 필터와 준거틀이 따로 소모된다고 하니, 알면서도 모를 존재가 바로 이 트렌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제는 캘린더나 다이어리만큼 연말 연시 필수 검토 아이템이 되어 버린) 이 트렌드 분석서를 접하면서도, 소비쪽 부문에서는 뭔가 가벼움, 한 단계 낮춰 보는 듯한 우월감, 흡사 장르문학을 대하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반면 이 책과 같은 생산 부분 리포트를 두고는 옷깃을 여미는 다소의 삼감을 마음에 장착하기도 하는 거죠. 알고 보면 이 또한 착시 현상이거나 속물 근성일 뿐입니다. 트렌드가 트렌드지 그럼 뭐겠습니까?


그래서 해외의 동향으로부터 가까운 장래의 우리 트렌드를 추정해 내는 건, 간단하면서도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아직 외국 현지에서 "트렌드성"이 채 형성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우리 땅에서 나비 효과처럼 폭풍과 같은 거대 트렌드를 형성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곳에서 거주민들, 소비자들을 다 빨아삼킬 듯 강력히 형성된 트렌드도 정작 물 건너 이 땅에 상륙하면 일개 미풍으로 소멸하는 것들도 있을 터입니다. 사실 어떤 특정의 해외 트렌드가 국내에서 의미있는 경제적 효과를 일으킬지의 여부는, 과거의 사례, 즉 외국 조류와 한국에서의 여파가 어떤 함수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한, 회고적 함수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고작 트렌드의 분석에 소요되는 사전 작업치고는 너무도 많은 비용이 드는 과제이기에, 우리는 이처럼 현지 무역관들의 인상비평적, 휴리스틱한 르포로 그 역할을 대신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트렌드가 무엇인지, 무엇일지 정확히 포착해 냈다 쳐도, 그 역시 구체적인 생산 라인과 마케팅 프로세스의 확정이 아닌, 그저 모종의 영감 원천으로 기능하는 데에 그치는 까닭입니다.


제가 책을 펼치면서부터 대번에 주목했던 것은, 터키, 러시아, 그리고 중앙아의 대표 주자로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사정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잘 잊곤 하는 중대 사정 중 하나가, 한국은 세계에 몇 되지 않는 테러 청정 지역이며, 방범과 치안의 유지도 대단히 이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단일민족국가이기에 소수민족의 존재가 부르는 분란의 리스크가 없다는 점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대단찮게 다가오는 터키 같은 나?顫?, 알고 보면 (과거 대제국의 영화에는 비길 바 못되나) 아직도 상당한 넓이의 영역을 점유하고 있고, 국민의 인종적 구성도 다양한데다, 기독교와 이슬람, 원리주의적 신정과 세속주의의 실용, 그리고 인종 도가니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복잡다단한 지역이죠, 이런 곳에서 개인의 신상 안전 이슈가 부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호신 물품과 CCTV등 방범 체계의 구축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러시아 역시 구 제국 시대 이래 다민족 국가였고, 소 연방의 붕괴로 자립했다고는 하나 소수 민족 문제로 영일이 없죠, 이와는 별개로 스킨 헤드족 문제로 야간의 치안이 불안합니다. 여기에, 이들 나라의 독특한 민족성과 열악한 교통 사정으로 모니터링 시스템의 도입이 국가적 과제라는 점을 해당 파트의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으며, 특히 생산재의 경우 실수요의 강력한 추동력은 어느 심리적 마케팅 팩터에 비길 바가 아님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대단히 "말랑말랑한" 소재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거대 유통업체 카르푸의, 파리에서의 사례를 소개한 대목인데요(김영호 무역관 서술 파트). 앞부분에 나온 프랑스인 A씨 운운은 사실 김영호씨 자신의 경험담이 아닌지, 현지인의 정서라기엔 너무 한국스러운 느낌이 강해서 살짝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적과 무관하게 "할인 구매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포인트 지급을 남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커피캡슐을 사게하고 일정 구매량 초과시 커피 머신을 제공한다는 이른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수법"은, 사실 유통과 마케팅 면에 있어 세계적 레벨에서도 귀신이 되다시피한 한국의 실정에서도 흔히 보는 양상입니다. "어차피 정상가에 구입할 뿐"이라는 비판자들의 지적이 타당하게, 애초에 높이 책정된 소비자가에서 할인 폭의 확대란,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니까요. 1990년대 중반 이미 한국의 대법원은 이런 케이스(이른바 사기세일 사건)에서 백화점측에 유죄 선고를 내린 적도 있습니다. 여튼 한국에서 이런 상술이란 너무도 진화한 형태로 만연하고 있어 새삼 트렌드라고 불러 줄 일도 아닙니다. 그 뒤에 나오는 잡지 부록 사례 역시, 한국에서는 아마 1970년대부터 만연한 판촉 행위였고, 제 개인적 기억으로도 2000년대 초반 잡지가보다 비싼 DVD 부록 끼워주기 행태가 떠오르는군요(이 역시 반짝 유행에 그쳤던 게, 이후 초고속 인터넷의 대중화 시대가 열리며 곧 불법 해적판 공유 파일이 밀려오는 바람에 DVD 시장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화장품 등을 여성지에 끼워 주던 모습도 대략 10년 전까지 보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보 소스의 일차적 중요성을 잡지, 신문이 상실한 지 오래라서, 이런 일본의 (몇 걸음 뒤처진) 모습이 큰 참고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찾아 보기 좀처럼 어렵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장래에 대두할 벤치마킹 대상으로 보기도 어려운 게 바로 네덜란드 KLM의 하위셔 세트 판촉입니다. 희소성과 개별 상품에 부여된 다차원의 소장 가치를 겸한 이 아이템은, 알고 보면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명품성"과, 해당 기업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이미 형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외산 물품(이를테면 아이폰)에 대한 마니아적 열풍이 다소 존재하는 정도고, 기본적으로 사회적 존경을 받는(부러움의 대상은 있습니다만) 기업이 없다는 게 문제죠. 여기에, 미술품, 공예품에 대해 특별한 안목과 존중을 국민적 전통으로 갖춘 네덜란드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서 이게 가능한 겁니다. 한국은 한때 세계적 품질의 도기와 자기를 생산하던 나라지만, 그 시절에조차 기능공과 예술품에 대한 존경이 없었습니다. 지금 부는 패션 명품 추종 현상은 심미적 능력에 기인한 게 아닙니다.


창조 경제라는 컨셉이 요즘 어디에서나 이슈죠? 문제는 이를 구체화할 방법론입니다. 첫째 조건은 이 책이 표제로 잘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핵심 자산(비용이 아닌)임을 깨닫고, 이를 육성하고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역시 책에 나오듯이 규모의 경제, 혹은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이런 자원과 집단은 클러스터를 이뤄야 합니다. 고립된 자원은 결국 자신의 효용 하나마저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책에서도 제시하고 있지만) 엔젤 인베스터, 캐피탈을 제도화할 방안이 요구됩니다. 현재 클러스터화의 요구는 한국의 서울, 구로구나 충남 대덕 등지에서 국지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형편이지만, 진척도는 대단히 미흡합니다. 투자지원의 문제는 정책당국의 의지 결여, 사회적 신뢰의 결핍으로 여전히 요원한 형편입니다. 이런 판에 당장 2014의 트렌드랍시고 내세우기엔 신선함과 현실성 모두를 결한 게 사실이지만,"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처럼 우리는 이를 아젠다로, 내년에도 올해처럼 밀고나가야겠지요. 이는 이미 트렌드라기보다 맥박적럼 항구적인(혹은 그래야만 할) 명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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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카타르
지병림 지음 / 북치는마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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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책을 펼쳤을 때에는, 열사(熱沙)가 그 표면의 토양을 이루고 있는 토후국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는 책이겠거니 기대를 했습니다. 근래 도하가 세계 상업의 허브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고, 그곳의 부유층들이 소비하는 갖가지 트렌드가 어느 새 글로벌 스탠다드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기까지 하는 눈치기도 해서요.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가면서는,.. "아, 세상의 한 권의 책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책은 그것을 쓴 한 저자의 퍼스낼리티, 혹은 영혼의 미니어처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꼼꼼히 읽으면 물론 대략의 얼개, 부분적으로는 섬?한(아무리 아름다운 피사체라도 국지적으로는 어느 정도 이상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디테일에 놀랄 만큼, 그 카타르라는 나라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전체적으로 읽고 머리와 가슴에 남은 것은, 이 열정과 끼를 주체 못하는 여인, 저자 지병림이란 이러이러한 사람이며, 그녀는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감성, 자신의 생각, 자신의 열정, 자신의 자취 같은 것을 이런 모습으로 전파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승무원이자 문인인 저자가 캐치하지 않았으면, 특히나 한국에 사는 여러 독자들이 결코 일생을 통해서 깨닫지 못할 카타르의 한 컷을, 철저히 그녀의 버전으로 알려주는 미디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산물의 생산성이나 효용성, 혹은 공감대의 폭은,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다가오겠습니다만, 여튼 이 책은 상당히 주관화한, 그래서 개성 있게 포착된, "지병림판 카타르"를 잔뜩 담은 책이라고 저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좋습니다. 사실 석유가 갑자기 가져다 준 주체 못 할 부(富)의 유효기간이 어디까지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저자는 그 검은 황금의 충만을 두고 "알라신의 축복"이라고까지 말하죠. 물론 현지에서도 그렇게들 광범위하게 공감하고 있을 겁니다). 하루 아침에 사정이 바뀌지는 않겠으나, 최근 셰일가스 등 대체 수단으로서의 자원 개발 탐색 노력이 활발하고(이것 자체가 투기 거품이라는 말도 있지만요), 인류는 궁극적으로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을 끊어야 그 생존의 전망이 보이는 형편이므로, 시대의 생산 구조가 개편되면 카타르는 다시 가난과 무지, 차별이 지배했던 암흑기로 침잠할지 모릅니다(과거 이슬람 제국의 황금기에도 그들은 낙후한 변방에 머물렀을 뿐 세계로부터 각광을 받은 역사가 없습니다). 그 좋은 조건을 두고 겨우 지금에서야 개발 붐이 이는 것도 그들의 둔감성을 증명하죠. 긴 역사를 두고 봤을 때 참 묘하고 드문 시점에,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난 격정과 시정(詩心)을 동시에 갖춘 여인의 찾고 부대낀 땅의 인상기이기에, 이 책은 대단히 유니크한 존재 의의를 지닙니다. 기대와 달리 카타르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됩니다. 한 개성 있는 여인의 내러티브를 듣고 그 내재한 표현욕을 엿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겸사겸사하여 이국의 진기한 풍습과 갖가지 군상들의 사연을 청취하는 일도 그 나름 뜻깊은 일입니다.


저는 몰랐는데, 저자는 <서른 살 승무원>같은 저서를 전에 펴낸 적이 있고, 이미 십 년 전에 정식 등단 절차를 거쳐 문협 정회원이기도 한 신분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쯤만 해도 참 이채로운 경력인데, 전작이 잘 소개하고 있듯 다소 늦었다고들 인식하는 나이(어차피 승무원은 희소한 특수 자질, 조건이 요구되는 자리이므로 나이가 문제는 아니겠죠)에 승무원 커리어를 시작한, 대단히 의지와 주관이 강한 분으로도 보입니다. 신장도 크고 외국어 실력도 탁월하실 테므로 어차피 별 문제는 안 되지만, 주위의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기란 특히 한국인으로서는 쉽지가 않다는 점에서요. 게다가, 승무원 업무가 대단히 고되다(육체노동에 감정노동까지 겸한)는 점에서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전혀 몰랐던 일인데) 국제선 타시는 분들이 이 지병림씨처럼 현지에서 그렇게 숙소를 잡고 적응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국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인데, 성격이 잘 안 맞는데다 후진국 여성 특유의 노예적인 사고 방식, 같은 여성을 더 깔보고 같은 노예식 사고에 동화하려는 이웃의 시도를 접할 때 받는 스트레스, 참 그렇게 개성 강한 분이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이 사연이란, 저자의 주관적 인상으로 어느 정도 과장된, 혹은 유리하게 꾸며진 내러티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다시 읽어 보기도 했지만, 팩트만 추려서 재구성해 봐도 역시 그 현지 여성들의 한심한 의식구조가 빚은 문제가 더 우선이더군요. 한때 우리 한국의 여성들도 저런 불건전한 의존적, 예속적 의식에 찌들어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세계적 계몽 조류를 잘도 수용하여 "세상의 반쪽" 없이는 사회가 굴러가지 못하게끔 그 위상과 비중을 늘린 한국의 여성들이 정말 위대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정말, "매혹의 카타르"는 고사하고, 역겨운 타르 냄새나 대하듯 그 이국에 대해 만정이 떨어졌을 만도 한데,  이 저자는 오히려 정을 붙이고 이해의 노력을 시도한다는 게 또 놀라웠습니다(혹시 책 한 권 쓰려고 거짓 감성에 자신을 던진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읽으면서 기가 찼던 장면이 한둘이 아닌데, 그 흔한 구두수선공 하나가 없어서, 대기시간 10분을 한 시간으로 만들면서 결국 구두 여럿을 결딴내놓은 사연이라든가, 엉터리 치과 치료(여성에게 치아가 얼마나 소중한 신체의 부분인데, 과감하게 현지 덴티스트에게 맡긴 그 태도는 참, 순진한 신뢰라고 해야할지 무신경이라고 해야 할지)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 "이 저자분 정말 특이한 분이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한때의 충동 같은 것이었겠지만, 저자는 이슬람으로의 개종("개종"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이, 아마도 본디 가콜릭신자이셨던 걸로 보이니까요)까지도 생각한 바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만큼이나 카타르에 정이 들었다는 반증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만, 읽으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자 자신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특히 여성으로서 무슬림이 된다는 건 종래의 나를 얼마나 많이 포기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이란 대목이 나오더군요. 거기까지 이를 일도 애초에 아니죠. 한 문화권에서 철저히 사회화한 개인이 이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  지독한 "의식(儀式) 종교"를 한때나마 수용할 생각이 들다니요. 어지간히 "매혹당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지더군요. 물론 일개 독자 입장에서이긴 하지만요. 책에도 나오지만 원시적 애니미즘도 아니고 동물로서의 돼지, 음식으로서의 돼지고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게 야만인 아니고 뭐겠습니까. "어려운 시절에 한국인에게 영양 보급원으로 큰 구실을 해?던 삼겹살.. " 같은 말도 필요 없습니다. 즐겨 먹는 음식에 대해 무슨 변호와 논거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자연히 존재하는 것에 부자연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부정과 저주를 생산하는 그 자체가 벌써 무지와 미신의 소산인데 문명인이 거기에 왜 일일이 대응을 하겠습니까.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자연을 왜곡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을 낳고 두 발을 디디며 호흡하게 해 주는 매혹의 대지를 모독하는 자들은 비단 카타르에만 있는 게 아니죠. 저자에게 "공저"를 제안하며 "글은 내가 다 쓸테니 스튜어디스 100인만 섭외해 오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자계서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타르의 옆방녀가 그저 후진 문화의 환경적 희생양이었다면, 이런 사람은 자기가 소속한 문화권과 공동체를 더럽히는 분자임이 분명합니다(제가 자계서를 좀 읽는 편이지만 누구신지는 전혀 모르겠네요). 이 책에 나온 진상 리스트 중 옆방녀, 옆방녀 약혼자, 기내에서 추태떠는 남자 등을 제치고 단연 1위에 꼽힐 만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오롯이 간직하며 비행(非行) 아닌 비행(飛行)으로 그 나래를 펴려는 의지와 감성 앞에, 장애로 다가오는 건 중력의 법칙이나 달갑지 않은 암초, 역풍이 아닌,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과 자연, 대지와 창공의 원색을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인과 그 감흥을 공유하려는 순결한 영혼들이 있어, 이 가이아의 지표가 매혹으로 빛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마지막 장을 넘기며 해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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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파더 - 아이와 엄마를 품에 안은 아빠의 행동하는 교육법
안드레아 미쿠스, 우베 볼만 지음, 김하락 옮김 / 니들북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은 <슈퍼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이란, 요즘 같은 세상에 아빠 노릇 제대로 하려면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 정도는 기본으로 해 줘야 한다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 는 아직 미혼이지만 언젠가는 자녀를 낳아 기를 테고, 그때쯤이면 파더들에게 요구되는 기본 사양이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더 완화되지는 않으리라는 점도 분명하기 때문이죠. 이 내용들을 다 실천에 옮기면 자격 있고 칭찬 받아 마땅한 "슈퍼 파더"가 된다기보다, 아버지의 위상과 역할, 자격 요건이 변화 중인 과도기를 살며 이것저것 몸소 행동에 옮기고 실적도 내어야 하며 피드백도 받아야 하는 일을 직장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겪어야 하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에 대한 다소의 연민을 담아, "노력이 가상하다"는 의미에서의 "슈퍼"가 아닐까 생각해요.

저자의 면면을 잠시 살피면, 안드레아 미쿠스라는 저널리스트, 우베 볼만이라는 아동심리학자, 이 두 분의 공동 저술로 되어 있습니다. 두 분 저자 모두 여성입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때로는 동정적으로, 때로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이 시대의 아버지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차분하고 치밀하면서도 건전한 열정을 담아 논하고 있습니다.

왼쪽: 안드레아 미쿠스,

가운데: 독일어 원서 표지(<강한 아빠들, 강한 아이들>),

오른쪽: 우베 볼만

이제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저 자들은 독일권 저술에서 흔히 볼 수 있듯, 논의의 대상에 대한 역사적이고 중층적인 고찰부터 먼저 시도합니다. 육아가 어머니의 전권 재량이고 전업적 의무였던 종래의 현실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보다 길고 깊은 차원에서 검토하면 어떨까요? 아버지의 역할이란 우리의 예상과는 다소 벗어나게도,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 여러 번의 변전을 겪은 개념이라고 합니다. 로마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가장(家長. pater familias)은 가족 구성원은 물론 가노(家奴)들에게까지 롤 모델(role model)이 되는 존재였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이 역할은 중세,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는데요. 이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농경이 중심이었던 생산 구조에서는 여전히 각 가정에 상시 거주하며, 경제 제사(諸事)와 결정권을 가진 존경과 권위의 원천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거죠. 독일 기준으로 불과 19세기까지만 해도 인구의 2/3비도시거주민이었는데, 1차 대전이 끝나고서는 반대로 2/3가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한 소득원을 책임진 아버지라는 존재는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도시에서의 생활 영위에 적합 수단 마련을 위해, 현대적이고 조직화된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합니다. 자연히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게 되고, 더 이상 그는 아이들에게 "존경의 대상"이나 "롤 모델"이 아닌 위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 해도 1950년대까지는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좀엄과 경외가 바쳐졌는데요, 예를 들어 아래 사진의 (1955년 <하우스키핑>이라는 월간지에 실렸다는)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한 지침"을 보십시오.

아 마 웃음을 참지 못할 분들이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여권 신장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아버지란 존재는 이제 더없이 움츠려든, 가정에서 소외되고 직장에서 burn-out되는 처량한 신세로 바뀝니다. 여기까지의 서술만 읽어 보면, 이것이 독일이라는 멀리 떨어진 나라의 사정 정도로 이해되시나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집안에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던 아버지가, 어느 새 아이들한테나 아내에게 "돈벌어 오는 기계"쯤으로 인식될 뿐이라는 탄식과 개탄이 유행어처럼 번지던 얼마 전 우리네 사정을 그대로 연상케 합니다. 


저자들이 "슈퍼파더"라고 새로이 규정하는 "아버지상"은, 여기까지에서 보듯 시대에 따라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었다가, 이제 도로 제 자리를 찾아오는 변덕스러운 "유행 복귀 지점"도 아니고, 복고풍 가부장 이념의 시대착오적 회귀도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일찍이 없었던 민주적이고 입체적이며 철저히 개방적인, 그러면서도 versatile한 만능성을 요구하는, 미증유의 유능한 양친 역할의 전면적 혁신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원천이랄까 지침의 거울에는, 엉뚱하게도(?) "아이들"이라는 존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근대의 시기, 고작 "아버지를 따라 배우기만 의무로 강요당했던" 자식이라는 위상은, 이제 그들의 요구에 따라 아버지들이 스스로의 기능과 의무를 재점검, 재정형해야 하는 방향으로까지 바뀐 것입니다. 다시 저 위의 사진에서, 이 책 독일어 원서의 제목을 보십시오. "강한 아버지들, 강한 아이들"입니다. 이 책은 그래서, 아이들을 바로 자라게 하는 그 중추적 지점에 아버지가 자리하고, 아버지는 육아를 위해 거듭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열망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봐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뀐 세상에서 아빠는 아이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롤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그러면 이 결론은 로마 시대, 가장이 가족성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때와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롤 모델이 되긴 하되, 구시대의 폐습인 독재, 폭력, 강압, 일방적 지시 따위를 일삼고, 어울리지도 않는 억지 춘향식 영웅 역할을 떠맡는 게 아니라, 아이가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관과 기준에 맞는 사회 성원이 되는 데에 일차적 조력자로서, 막중한 의무감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전근대에는 광활한 농촌에서 각자 고립된 지역에서만 거주하였기에, 아이들이란 더 넓은 세상에서 어떤 표준과 가치관이 지배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커뮤니티의 원칙에만 충실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되었듯) 인구의 2/3가 도시에 거주하게 된 현실에서는, 아이들이라고 해도 그 보고 배우는 바가 이미 아버지의 그것을 유월할 만큼 폭과 깊이가 넓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이 모든 배움과 습득의 원천을 무리 없이 조화로운 인격 속에 담고 자랄 수 있게, 최선의 노력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롤 모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게, 이 책에서의 "슈퍼파더"입니다.


바뀐 시대에서 아버지는 그저 이런 힘든 의무만을 짊어질 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러시아 속담을 인용하며, 이런 멋진 경구를 독자에게 소개해 주고 있네요. "아버지가 되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인간답게 죽을 수도 없다." 실제로 많은 아버지들은(어머니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갓 태어난 아이들, 아무런 보호막 없이 태어나 만약 방치라도 되면 그대로 생명의 불꽃이 꺼질 것 같은 연약한 존재를 보면서, 현재의 자신보다 더 나은 인격자가 될 것을 다짐하게, 자신의 분신인 아이를 양욱하며 무한한 희열과 긍지를 느끼며 또 도덕적 결의를 다집니다. 이처럼 아이란, 활력이 소진되어 가는 아버지에게 새로운 생명력의 원천이며, 워즈워드의 유명한 시구에서처럼 "어른의 아버지" 구실을 하는 법이죠(A child is the father of man). 이 시구를 다소 바꾸어 응용하면, "아이야말로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아버지들은, "아이를 키움으로 인해 나는 종전의 나보다 개선된 존재가 되어 행복하다."는 고백을 연달아 털어 놓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여성이지만, 급진적인 흐름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사실 이 지점이 바로 이런 저서의 집필 출발점이자, 독자들에게 전달할 유니크한 메시지의 시초입니다). 어떤 아이에게건, 아버지는 필요하다는 겁니다. 보 통 급진적인 여권론자들은, 아버지 없어도 엄마 혼자서 아이를 훌륭히 키울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저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결국 범죄자, 반사회성향자, 폭력적 기질의 소유자 중 상당 비율이, 바로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존재임을 통계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거죠. 아이가 바로 자라는 과정에 있어서, 아버지는 필수의 존재이며, 그런 아버지의 상을 바로 (이 책이 말하는) 슈퍼파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가령 이혼 가정에 있어 "잃어버린 아빠, 거부당한 아빠"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까요? 한번 파판이 났으니, 더 이상 그런 편모 슬하의 아이들에게는 바르게 자랄 희망이 없기라도 하다는 말일까요? 그럴 리가요. 이 책의 장점은 공연한 이상론만 되뇌는 게 아니라, 이처럼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한 이들에게 어떤 실용적인 해답을 내려 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이 책은, 이혼 가정의 아이들이 왜 대체로 엄마 편을 들고, 이혼한 아빠를 배척하면서 만나지도 않으려 하는지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구체적인 내용은 스포일러가 되겠으므로 이 리뷰에서는 생략합니다만).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템테이션>에도 이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죠. 여튼 이런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서, 독일 법원의 대부분은 엄마에게 양육권을 인정할 뿐 아니라, 접견권(우리 법률용어로는 면접 교섭권이라고 합니다)마 저 제한합니다. 그뿐입니까? 아이의 양육비만은 또 아버지에게 칼같이 부담시키고 있는 관행을 유지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혼한 아버지쪽이 입는 상처도 아주 크다고 합니다(이혼했다고 해서 전부가 다 문제가 있는 아버지이거나 유책배우자는 아닐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가, 전 배우자와 재결합은 못 하더라도, 자신의 피붙이들과 진정한 화해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는 그럼 어떤 게 있을까요?(앞서서 소개한 전제 사항처럼, 화해는 아버지 일방만을 위한 게 아니라, 아이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건입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지침도 책에 잘 나와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몇 페이지에 나와 있는지도 안 가르쳐 드립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엄마가 부적격자라서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이 책의 매력이랄까, 진정한 인간미는, 바로 이런 "특이 가정의 아빠"들을 위한 배려도 충분히 내용적으로 베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상적인 패턴의 성원들이 남에게서 딱히 도움을 받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느 한 요소에 결핍이 있는 분들이라야 남의 도움이 진정 절실하고, 말 못 할 고민에 대한 답을 책에서 구하려 드는 게 보통이니까요. 이 런 "싱글 대디"들은, 아이에게 엄마가 베풀어 줄 수 있는 다양한 수단과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 자괴감, 자책감이 매우 크고, 실제로 도움을 받을 네트워크가 불충분하며(그러나 요즘처럼 가상공간에서의 소통이 활발한 시대라면 곧 사정이 달라지지 않을까 짐작해요) 동료 남성들로부터 괴물 취급 당하며 소외당하는 등 삼중고에 시달리는 게 보통이라는 군요. 이 책에서는 개인 차원에서 시도할 수 있는 여러 대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제 생각에는 이 문제 역시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의 대응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편모 가정에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물적 배려와 따뜻한 시선이 주어지지만, 편부 가정이라고 하면 왠지 희화화된 시선으로 보는 게 보통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제 다시 평균적인 아버지의 역할과 의무, 노력 사항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슈퍼파더"는, 주로 그 자녀들과의 이상적인 관계, 릴레이션십을 염두에 두고 동원되는 개념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저자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p81)

1. 시간을 제대로 홣용하라.

2.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배우라.

3. 감정이입을 훈련하라.

4. 칭찬을 자주 하라.

5. 갈등에 대처하라.

6. 동기유발을 강화하라.

이와 같은 행동지침은 아이를 행복하게도 만들고, 또 강하게도 만들 것이라는 게 저자즐의 주장입니다. 다시 한 번 여기서 저 위 사진의 원서 제목을 보십시오. <강한 아빠 강한 아이>입니다. 저자들은 독일 문화권 특유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사람이 그의 인생을 사는 목표가 그저 행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음을 이미 통찰하고 있습니다. "행복함" 못지 않게 "강함"의 미덕도 중요합니다. "강함"은 행복을 지켜 내는 수단이기도 하고,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고 유지하는 데에 필수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아이가 아빠와의 약속을 어겼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이 소통이라는 덕목에 있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가 봅니다. 아이에게는 물론 "약속 위반"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그의 행동에 대해, 일종의 교정과 제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무 작정 야단을 치면, 이는 아이에게 "모욕감"과 상처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존감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기는 모욕감은 극히 회피해야 할 결과라고 합니다.그리고 이런 중요한 "약속"을 맺을 때에는,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일방적으로 정할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함께 내용을 형성해갈 것을 권장합니다. 약속은 자발적인 약속이고, 두 당사자의 진정한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거죠.


"감정이입을 훈련하라"는 장은,  물론 아빠가 아이들의 감정 상태에 즉각 반응하고 아이의 상태에 적응해 보라는 조언입니다. 아 이들은 아직 감정이 성숙한 상태가 아니므로,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 빠진다고 해도 자신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아빠는 재빨리 개입하여, 그 감정이 어떤 것이며 앞으로 자주 찾아올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가장 현명한지, "롤 모델"로서 가르쳐 줘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칭찬도 자주 해 줘야 한다는군요. 그 칭찬이, 그저 아이를 즐겁게 해 줄 뿐 아니라, 아이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여러 차례 되풀이하지만, 저자들은 이 "강함"이라는 미덕에 대해 특별한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동기유발을 위해서는 특히, 아이 자신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분명한 이해를 도와 주고, 이 장점에서부터 모든 "자발적인" 동기가 샘솟게 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강화하고 또 강화하며("강화[enforcement]의 정의에 대해서는 심리학 사전이나 교과서를 참조하십시오), 칭찬하고 또 칭찬해야 합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에게는 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양친과의 갈등이 빚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때에는 어떤 내용이라도 격의 없이 오갈 수 있는,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원탁 회의가 열려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야단도 치고, 비판도 해야 하지만, 반드시 대안 제시와 합리적 논거 부연을 잊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버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화풀이성 요소"가 조금도 곁들여져서는 안된다고 당부합니다.


독일어권의 저서에서는 추상적이고 엄정한 체계가 돋보이기는 해도, 구체적인 사례 제시가 다소 부족하다는 게 보통의 경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마지막 제 5장, 전체 분량의 1/3 가량을 CASE STUDY의 소개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사례 연구에 나오는 가정과 아빠, 아이들의 일화는 너무도 흥미롭고 전형적이어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한 훌륭한 복습, 응용의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아직 부모의 처지에 놓여 있지 않은 저 같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몰입, 때로는 진지한 성찰과 예비적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사회의 건전한 발전 그 토대는 결국 행복한 가정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아버지상을 정립해 줄 수 있는 좋은 교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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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중소기업 성공전략 - 인맥의 달인 김기남 경영에세이
김기남 지음 / 비움과소통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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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비움과 소통에서 출간한, 인맥의 달인 김기남 (주)씨엔플러스 대표의 저술처럼, 실무 감각 양성과 알짜 핵심 지식 습득에 도움을 주는 책은 처음 만나보는 것 같습니다. 김기남 사장은 태광에로이카의 신화를 이룬 입지전적 인물로 유명합니다. 요즘은 태광에로이카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 많지만, 지난 1970,80년대 웬만한 중산층 가정에서는 "전축" 한 대 정도 안 들여놓은 집안이 없었죠. 그 중 상당수가 이 태광전자의 "에로이카" 브랜드였습니다. 기술력도 일천하고 관련 노하우도 부족해서 일제 라이벌제품에 (수입 규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다 잠식당해야 마땅했으나, 마치 1990년대의 삼성 마이마이 신화처럼, 이 에로이카 시리즈만은 소비자들에게 유독 사랑을 받았는데요. 그 이면에는 외국의 기술과 국내 인력을 최적 비율로 배합하여 국산화에 성공한 김 대표의 놀라운 수완과 판단력이 있었다는 거죠. 시장의 기호를 정확히 읽고(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마당에도 유행가 등은 유독 곁에 끼고 살고 싶어했던 한국인의 니즈를 정확히 찔러 대량 생산 라인 구축을 감행. 물론 에로이카 브랜드라고 해서 서양 클래식 음반만 틀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역시 배짱 좋게 황무지나 다름 없던 시장에 공격적 마케팅을 감행하여 튼튼한 지반을 다진 일화는 유명합니다. 중소기업을 대기업 못지 않은 윅상으로 올려 놓았고, 지금도 갖가지 업종과 분야에서 "중소기업식" 성공을 거두고 있는 영업과 제조, 그리고 인맥의 달인이 풀어 놓는 놀라운 팁과 원칙, 금언이 가득한 책이었습니다. 읽어 본 중 최고라고 할 만합니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을 할 수 없는, 절실한 현장의 목소리로 가득한 멋진 핸드북이었습니다. 


한 국에서 중소기업이 살아남는 길은, 결국 "강소기업"이 되는 길 하나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중소기업이란 자금력도 조직력도 인력도 대기업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대기업의 길과 같은 쪽으로 승부를 내기란 불가능한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면 강소기업이 될 것인가? 작고 강한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작고 강한 조직이란, 성원 간의 인화가 찰떡 같이 이뤄져서,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타 기업보다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그런 효율적 조직을 일컫습니다. 잘 풀리지 않은 기업은, 직원들이 일시적으로 거쳐가는(4대 보험이나 채우고 최소한의 경력 관리나 하다 가는) 중간지점으로밖에 여기지 않죠. 보수도 열악하고, 일하는 분위기도 어둡습니다. 이런 조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조직이나 회사는 없느니만도 못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결국은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창의와 인격, 자율성을 존중하고, 급여가 부족할망정 성의를 다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직장이 되어야 한다는 골자입니다. 반대로, 기껏 아까운 부장감 하나 키워 놓았더니 다른 데로 가더라는 식이 안 되게, 사명감과 소속감이 절로 드는 일터를 조성해야 한다는 소중한 가르침도 있네요. 


중소기업의 시작은 혁신적인 원가 절감에서 비롯합니다. "저의 회사의 부품을 채택해 주십시오. 업계 타 회사보다 20%이상 낮은 가격입니다!" 시작은 다들 이렇고, 이런 혁신으로 대형 계약을 따내는 게 보통이지만, 어느 새 타성에 젖게되고 "하던 일만 계속 잘하게" 됩니다. 이런 사이에 다른 참여자가 "20% 낮은 단가"를 또 들고 나오고, 그러다 보면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는 데에 성공한다 쳐도, 여유와 타성에 젖으면 어느 새 주위로부터 이런 말이 나옵니다. " 저 회사 처음에는 안 그러더니 이제 배가 불렀구먼!" 중소기업의 입장이란 이래서 어려운 거겠죠.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철저한 품질관리와 원가 절감입니다. 그래야 신뢰를 쌓고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특히 원가 절감이란, 어떤 쪽에서 생각해도 절감의 요소가 생깁니다. 현장을 끊임 없이 살피고 조사하면, 어디서 아껴도 아낄 거리가 생긴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최고경영자는 품질팀장이 되어야 한다! 저자의 핵심을 찌르는 명제네요.


거래처와의 관계 형성은 결국 CEO의 재능과 매력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학식이 반드시 뛰어나지 않아도, 어느 화제가 나오건 받아 넘길 수 있는 소양과 상식, 그리고 세련된 화?이 필요합니다. ?프나 볼링, 테니스 등 스포츠에까지 능하면 금상첨화입니다. 이런 매력과 솜씨는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니고, CEO 자신이 꾸준한 노력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죠. 이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라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회사란, 강소기업이란 이런 피나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의 공덕 축적 발원이나 마찬가지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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