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2 기황후 2
장영철.정경순 지음 / 마음의숲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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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후반부까지만 해도, 양이라는 캐릭터는 자신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깊은 통찰이 부족한 채, 그저 개인적 원한만을 생존의 동력으로 삼은 단순한 타입이었습니다. 여기에 약간의 민족의식, 그리고 이를 인격적으로 화체한 고귀한 후계자 충혜왕에 대한 연정이 가미되어, 악착스럽게 제 의지를 밀고 나가며 결과적으로 원 제국의 최고 실력자 연철목아(엘-테무르)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걸림돌 노릇을 하게 되죠(물론 양이에 감정 이입하는 우리 독자 입장에선 그 반대로 보입니다만).

충혜왕은 1권 끄트머리에서 연철목아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도성수비대장을 맡게 됩니다. 사실 아무리 왕족이라고는 하나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꺼려져야 할) 외국인이 국가 기무, 나아가 권신 개인의 명운을 좌우할 키 포스트에 등용된다는 건 좀 억지입니다만, 이런 건 개인의 능력과 매력으로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기마 전투 부족의 공통된 특징은, 혈연보다 능력을 우선시해서 양부자 관계가 꽤나 발달해 있다는 점인데, 연철목아 역시 고려의 충혜왕을 이런 시선으로 봤을 가능성이 큽니다(두 친아들이 성격만 급했을 뿐 대단히 무능했다는 설정이 매우 강조되고도 있죠). 문제는 그처럼 탁월한 자질과 숭고한 운명을 부여받아, 마땅히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부상했어야 할  충혜왕이, 후반으로 갈수록 주저앉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기황후가 이를 대체하여 강렬한 프로타고니스트로 부상하는 것도 아니구요. 그녀는 결국 충혜왕을 위해,아니면 (스포일러이므로 더 자세히 말은 못하지만) 그보다 더 유리한 위치의 고귀한 혈통을 지닌 그 누구를 위해, 조력자나 발판이 되겠다는 것 이상의 의지를 갖지는 못했습니다. (최소한 소설 속에서 그녀는 철저히 고려인이지, 대원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서 비전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결국 이 여인의 열렬한 연모, 모성애의 대상이 되었던 두 남성은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무력한 눈물만 보이며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철저히 들러리에 그친 또다른 비운의 남성 타환(원 순제)의 말로는, 대단히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행보를 보이지만, 그러기에 이야기의 맥락을 좇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는 합니다. 1권 처음만 해도, 이 타환은 일종의 온달형 캐릭터로, 현명하고 당찬 평강공주형 반려자 양이의 도움을 받아 뭔가 나중에 단단히 한몫을 해 줄것만 같았으나, 결국은 두 여인으로부터 모두 외면 받는 처지에다 정치적 실패자까지 겸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몰락합니다. 이 모든 게 결국 캐릭터들 사이의 엇갈린 사랑, 그 좌초와 부작용에서 비롯했다는 식의 설정도 뭔가 맥빠진 감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기황후의 대적(archenemy)이라면,  여자들이라기보다는 두 남성입니다. 타나실리나 이후의 백안홀도는 캐릭터의 밀도나 깊이가 약하죠. 1권과 2권 중반까지는 연철, 그 이후는 백안(바얀)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잘된 부분은 바로 이들과의 지략 싸움과 반전, 그리고 후반부에서 기황후의 정적인 백안의 전략과 태도가 어떤 사건등을 계기로 설득력 있게 변화해 가는지를 잘 이끌어나가는 대목입니다. 이상화한 주인공들보다는 악역 캐릭터의 행보에 더 필연성이 실리는데, 독자의 증오를 한몸에 사는 두 고려인 악당, 왕고(사실 그는 이렇게 시시한 악한이 아닌, 충혜왕의 부친 충숙왕과 헤게모니를 두고 일생 동안 자웅을 겨룬 왕족 출신 거물이었죠), 그리고 최악의 비열한 졸개형 임병수(미천한 출신으로 질기게도 양이를 따라다니며 악연을 이어가는) 등이 오래 기억에 남지 싶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기황후는 충혜왕과 동갑이며, 원 순제 토곤(타환)은 이들보다 5살 연하였습니다(그러니, TV극에서의 배우 주진모는 어느 기준에서도 좀 연로하다 싶은 배역이죠. 배우 개인의 실제 연령으로나, 드라마에서 하고 나오는 외양이나.... 하지원은 지창욱과 거진 10년 차이지만, 관리를 잘해서인지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나이로만 보았을 때 네 인물의 엇나간 구애의 chain이란 설정은, 상당한 공감을 유발할 수 있죠. 그 모든 장애와 역경을 딛고 마침내 부귀와 권세의 정점에 오른 기황후가, 정작 그간의 모든 포부를 이룰 수 있는 포스트에서 고작 "흉년, 기근"이라는 변수에 무릎을 꿇고 천하를 잃었다든가, 실제 역사에서 혈육(기씨 일족)을 도살한 공민왕의 최측근 최영과 손을 잡고 신흥 명을 협공할 계획(이 자체도 원이 아닌 고려의 천하를 위한 의도였다는군요!세상에) 같은 설정은, 그러나 그저 판타지물에서 흔히 보는 비약 정도로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잔재미가 드물지 않게 보이는 좋은 읽을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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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1 기황후 1
장영철.정경순 지음 / 마음의숲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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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딛고 거친 운명의 행로를 개척해 나가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꼭 외모의 아름다움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캐릭터 기승냥의 경우는 그 대범하면서도 충직하고, 나아가 우직하리만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그 성품상의 아름다움 외에, 겉모습도 대단히 고왔나 모양입니다. 성격도 곧고 착하며, 그 바른 내면을 반영이라도 하듯 아름답게 빚어진 얼굴선과 이목구비의 배치, 몸매의 고운 자태까지 갖춘 소녀, 여인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부당한 운명의 굴레 때문에 모진 수난을 겪는다면, 이를 지켜 보는 독자들의 마음은 큰 폭으로 교란당하거나, 상처를 입곤 하기까지 하죠.

소녀 기승냥은 어려서부터 남복이 입혀진 채 사내 아이로 자라납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즈음이 우리 민족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시련을 입던, 원(元) 제국 간섭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얼굴이 예쁘다 싶은 여성은, 마치 세금이나 진상품마냥, 종주권을 보유한 몽골 황실, 귀족들에게 공녀(貢女)로 끌려 가서, 전혀 원치 않던 비천한 노예의 삶을 타향 이국 만리에서 영위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소녀의 아버지 기자오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귀한 딸을 딸로 키우지 못하고, 남들 보는 눈이 무서워 선머슴으로 둔갑시켜 양육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딸 양이가 아직 어렸던 때, 바로 두 부녀의 눈 앞에서 그 생모가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한 악몽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도 한몫합니다. 양이는 제법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의 유품인 비녀를 손에 쥐고 나서야 아버지로부터 이 사실, 즉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죠. "출생의 비밀"은 또한,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양이가 제법 성장한 후(아직도 대외적 성별은 사내아이입니다), 기자오는 대단히 미묘한 정치적 성격을 띤 임무를 맡게 됩니다. 원 제국은 당시 정국이 대단히 불안했었는데, 연철이라는 권신이 황제의 폐립, 생사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하고, 마땅히 보위에 올라야 할 타환이라는 소년을, 이름만 그럴싸한 황태제 자리에 올려둔 채, 멀리 이 땅 고려에까지 귀양을 보냅니다. 연철은 대단히 간교한 책략을 구사하던 자라, 머나먼 이국에서 타환을 제거하고, 그 책임을 고려에게 돌려 오랜 숙원이던 입성(立省) 조치까지 완수할 작정이었습니다. 연철은 이를 두고 스스로 일석이조의 묘책으로 평가하는 중이네요.

어리고 여린 소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이런 거대하고 추악한 음모의 중심부에, 어느 새 제 의지로 어쩔 수 없는 단계까지 말려드고 마는 모습은, 한편으로 그녀의 천성인 곧은 의지와 진한 혈육애, 다른 한편으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애국심과 민족애에 기인하기에, 독자는 일단 무조건의 동조와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세계 최대의 제국 몽골의 정사를 전횡하는 세력의 무시무시한 괴수인 연철을 한 축에 놓고, 다른 한 편에 여리고 가냘픈 식민지의 소녀 하나를 배치하여, 도저히 가망 없어 보이는 싸움을 전개하게 했다는 것이죠. 물론 둘은 처음부터 미스매치인 상대이고(비록 양이가, 유배 온 타환에게 무술을 개인 레슨할 만큼 잘 단련된 신체를 지녔다고는 하나, 설사 초절정의 무예를 보유했다 한들 제국의 시스템에 대적할 수는 없죠.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강인한 신체는 대청도에서 일단 몸을 피신했다가 다시 개경에 잠입할 때에만 제 몫을 발휘하고, 이후에는 별 요긴히 쓰이질 못합니다. 물론 중국에서 갖은 시련을 용케도 이겨 내는 모습이 2권에 나오지만, 그게 어린 시절부터의 무술 실력에 기댄 바 크다고는 여겨지지 않아요), 이 가망 없어 보이는 대결이 균형이라도 어느 정도 맞추거나, 우리 독자가 은근 원하는 바대로 프로타고니스트 양이의 승리로 끝나려면, 다른 인적(人的) 변수가 도중에 여럿 개입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충혜왕(드라마에선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이 호칭을 피하고 있는데, 어차피 시호는 죽은 뒤에 붙여지는 것으므로 오히려 TV 극(劇)의 태도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를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백안, 탈탈, 방신우, 고용보, 독만 들입니다. 이의 반대편에 서는 인물들, 즉 가뜩이나 어려운 양이의 처지를 몇 배나 힘들게 하는 장치로는, 왕고, 임병수, 타나실리 등이 있겠습니다.

여기서 모호한 위치는 바로 충혜왕입니다. 그는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고려 뿐 아니라 원 제국의 (드러난 부분에서, 혹은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 모두) 운명을 좌우하는, 실로 고귀한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고, 개인적 자질이나 (성적) 매력도 탁월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역사의 진로를 바꿀 결정적 순간에서 언제나 수동적이고(성격은 그렇지 않고 정반대의 과격한 스타일입니다만), 고작 한 개인으로서의 정서와 감정에 매몰되어 주저않고 맙니다. 2권에서 기황후가 되는 양이, 그를 일생의 연적으로 간주하는 타환(원 순제), 정부인 타나실리 황후까지 모두 이 충혜왕의 구심적 자장에서 벗어날 줄 모를 정도로 그는 강렬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이지만, 단 한 번도 사태의 중심에 서질 못합니다. 모습만 번드르르하고 능력과 의지가 결핍되었냐면 그것도 전혀 아니라서 기이한 인상까지 줍니다.

역사에 잘 나오듯 충혜왕은 그리 긍정적인 인물이 실제로는 못 되었습니다. 사료에 기억된 대목만으로도, 충혜왕은 누구에게나 비난 받아 마땅한 행적을 남긴 자입니다. 하지만 이런 반(半)  판타지물에서는, 얼마든지 대체 역사가 전개 가능하다고 보고, 필경 미남자에다 총명한 두뇌를 지녔음에 틀림 없는 그(조선조 폭군 연산군도 남자로서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매혹적인 스타일이었죠)를 두고 기록 역사의 희생물 정도로 격상, 미화하는 작업도 분명 재미있는 일이긴 합니다. 타환은 원 순제, 혜종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실존 인물인데, 결과적으로 망국 군주라는 점에서, 이 소설이 묘사하고 있듯 어딘가 좀 부족한 인물됨의 설정이 그 실상에서 크게는 벗어나지 않는 듯도 합니다. 타환은 한자 음차를 우리식으로 읽은 거라 몽골어 원음과 큰 차이가 납니다. "토곤"이 실제 발음에 가깝습니다. 연철은 얼른 들어도 이름으로 받아들이기 이상한데, 이는 한자로 표기하면 燕鐵木兒(연철목아)입니다. 그런데, "철목아(테무르)"까지가 몽골인 이름에 흔히 쓰이는 단위이므로, 굳이 저 이름을 형태별로 나누자면 "연-철목아(엘-테무르)"가 되겠죠. 따라서 이 캐릭터의 이름을 "연철"이라고 정한 건 오류에 가깝습니다(아무리 한국식 독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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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어록 - 전 인류의 스승, 넬슨 만델라 최초의 공인 어록
넬슨 만델라 지음, 윤길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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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가 27년여의 기나긴 세월 동안 영어의 몸이 되어 모진 수난을 겪었다는 사실은 우리 누구나 압니다. 바로 비교의 대상으로 삼기엔 무리지만, 아야툴라 호메이니도 고국 이란에서 추방되었던 시절,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가 국내에 유통되면서 이슬람 혁명의 촉매제가 역사도 있죠. 자유를 박탈당한 혁명가의 영혼은, 그를 추종하는 대중과 직접 대면할 없기에, "" "" 간접소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신, 육성 녹음, 녹취록 등이 매개체가 되는데요. 한편 유통 과정(circulation)에서의 본의 아닌 왜곡 때문에 위인의 말은 당초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와전되기도 합니다. 년도 아닌 27 동안이나 간접적인 수단으로만 대중과 소통해야 했던 그였기에, 남긴 말은 무척 많지만 과연 어떤 것이 진짜 그의 육성인지는 그간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책은 만델라가 서신, 메모, 일기 등을 통해 남긴 다양한 소스의 기록에서 뽑은 명언, 잠언들을, 권위 있는 전문가의 손을 거쳐 권으로 묶은 것입니다. 이런 책이 나올 있었던 배경에는, 만델라 자신이, 기록광이라고 불릴 만큼 정리 수집벽을 지니고 있었던 덕이 크고, 다음으로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깊고도 폭이 넓은 도덕철학의 담지자이기도 했던 까닭에, 참으로 다양한 주제를 놓고 심오한 통찰이 배어나는 잠언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 자리합니다. 책은 실제로, 키워드별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상황별로 적합한 말을 참조할 있게 키워드 편집을 놓은 소스라면, 성경 정도는 되어야 그를 두고 이차 편집이 가능합니다. 단일 위인의 어록이 단순한 시대순이 아닌 주제어별 재분류가 가능하다는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만델라라는 인물의 크기와 비중을 반증하는 저작이 아닐 없네요.

 

책은 키워드의 선정도 진부하지 않고, ( 무엄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히 재기발랄합니다. 중에는, "남탓"이라는 키워드도 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그가 흑인들이나 특정 부족의 대변자를 넘어, 보편적 인류의 대의의 챔피언인지를 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같은 악종의 정책에 대해, 모든 실패와 부작용을 전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손쉬운 핑곗거리를 찾고, 자신을 향한 성찰을 게을리한다면, 또한 용납받지 못할 불성실, 직무유기임을 그는 분명히 지적합니다.

 

같은 페이지에는 그가 초등학교에서 행한 연설의 토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그의 모교이기도 한데, 그는 여타의 위인들처럼 대단히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어떤 심리적 배경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이해하려면, 자매서인 < 자신과의 대화> 다시 읽어 필요가 있습니다. 책의 p34 보면, 우리가 알던 기존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 실리지 않았던 원고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대목들이 삭제되었는지, 혹은 미발표되었는지 우리는 없지만, 내용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주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고하는 내용인데, 자연과 대지를 벗삼아 또래 친구들("식객"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족장의 핏줄이었으므로 이런 군식구를 집에 두는 일도 가능했을 테죠) 마음껏 뛰어 놀며, 세상에 대한 이치와, 보다 근본적인 지식을 깨치던 시간들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제도권의 학교 교육이란, 나라는 작은 단위를 넘어 보다 차원의 자아를 형성하는 부족, 공동체의 아이덴티티, 영혼을 심어 주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는 그의 결론입니다. 한국의 당국자들도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만델라는 또한 그 책의 p76에서, 자신을 포함한 사회 운동가들의 태도에 대한 겸허한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부인 위니 만델라에게 보낸 서신 중에서, 그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 < As You Like It > 구절을 인용하면서, "역경" 비록 마주 대하기에는 고통스럽고 마뜩찮지만, 역경이 인간에게 안기는 과실은 매우 이로운 것임을 역설합니다.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지난 역정을 돌이켜 보며, 책을 읽고 소화되지도 않은 머리 안을 떠다니는 섣부른 지식이라는 짐을 덜어내기 위해, 대중 앞에서 자못 열띤 어조로 강론하지만, 그것은 청중의 감동을 유발하기 위한 수단일 , 자신은 전혀 진정한 이해에 도달해 있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군요. 겸손한 모습입니다.

 

흑인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백인들까지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아파르트헤이트야말로, 우리 국민들을 향한 가장 폭력의 근원입니다. (p86)

 

말은 남아공 대통령 보타에게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각주에 보면 보타 대통령은, 남아공 역사상 집행권을 가졌던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타 대통령은 만델라의 오랜 정적이었습니다. 마치 김대중과 박정희의 관계와도 유사했다고나 할까요. 최초의 집행권이라는 말은, 남아공 헌정은 헌법상 총리에게 집행의 실무를 맡기는 구조인데, 권한까지 대통령에게 부여한 헌법 개정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외교, 군사는 물론 내치와 경찰력까지 손에 쥐게 대통령은 사실상 그가 유일했습니다. 만델라는 571페이지의 복수, 허세라는 키워드에 나오듯, 그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잔혹한 위해를 가한 적수도 용서했습니다.

 

그는 문학적 소양도 풍부한 인물입니다. 186페이지의 "민주주의" 키워드에 보면,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의 시를 인용한 대목이 있습니다. 역사와 희망은 대체로 불일치를 이루지만, 때로는 간절한 열망과 정의가 만나 드문 일치를 이룰 때도 있다는 거죠. 명언을 남기려면 거짓 없는 영혼의 진지한 사색과 수련 외에, 풍부한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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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전략을 파괴하라 - 초경쟁 시대 비즈니스 리더를 위한 최고의 전략 강의
신시아 A. 몽고메리 외 지음,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엮음 / 레인메이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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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의 중요성 이슈는 이제 경영학 전반을 총괄하는 데까지 그 중요도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신시아 몽고메리 교수도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지만, 이미 경영학계는 최전방의 야전을 고독하게, 무한책임의 비장한 각오로 주시하는 CEO의 자질을 다각도에서 탐구하고 있는데, 이 CEO 리더십 이슈와 파괴적 혁신의 테마가 만나 접점을 이루는 분야가 바로 "전략"입니다. 종래, 전략에 대한 논의는, 국지적인 최적화 방법론의 수립 분야에서 간헐적으로 이워졌을 뿐이며, 근래의 양상처럼 초점이 맞춰졌던 적은 없습니다. 헌데 지금은 대중서 섹터에서조차 "전략"을 제목의 일부로 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이 봇물을 이룹니다. 이 책은 분량이 두텁지는 않으나, 대신 다양한 저자들의 캐주얼한 논의를, 개별 부품도에서 시작하여 한 가지 주제를 향해 치밀한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식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보 통 대담 형식의 서술에서는, 대립하는 두 화자의 의견 교환을 통해 논점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나고, 독자 역시 주제에 대해 더 치열한 방식으로 숙고,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반면 결론이 정리가 안 되고, 요령 없는 대화자 간의 논전 속에 핵심을 놓치고 말 수도 있다는 게 단점이겠습니다. 1인 저자의 논문형 서술이라면 장단점은 그 반대로 바뀌겠죠. 이 책은, 많은 저자의 에세이를 실어 "전략"이라는 주제에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지루함을 피하게 하며, 간간이 대담 포맷을 삽입하여 독자의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이해까지 돕고 있습니다. 종래의 전략 관련 대중서와는 이 점이 차이입니다.


"전략가는 의미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 명제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왜 당신의 기업이 존재해야 하는가. 당신의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 없이는 시장의 완결성에 큰 흠집이 생기기라도 하는가. 당신이 빠져 나간 후에 그 자리를 메울 대안은 어느 정도로 이른 시기에 마련되는가. 흔히 기업에도 영혼이 있어야 하고, 이는 CSR이나 도의성과는 별개 차원의 팩터라고 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일 잘 하고 성과가 빼어나도 그저 효율의 기계로 비치는 사람이 결국 임원 자리까지 못 오르듯, 자기만의 기능적 특장점 외에, 전체 요소를 아우르는 스토리적 일관성이 있어야 동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죠. 요즘 소비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경영학계 전반의 핫 이슈로 떠오르는 이케아의 성공 비결은, 이 책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케아 얘기 말고는 할 게 없나 싶을 정도인데, 그들은 과연 빼어난 디자인, 혁신적인 포장 방법, 무엇을 과감히 살리고 버려야 하는지 분명한 결단을 내린 공정 등 동종업계에서 따라하기 힘든 노하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대단한 실력파들이죠. 하지만 그런 기능적인 메리트들은, 벤치 마킹 과정을 통해 다른 기업도 따라는 할 수 있습니다. 이케아의 소비자들이 그 회사에 충성하는 이유는, 그 일련의 성장 과정을 통해 이케아가 기술적 성취와 숙련에 머무르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영혼 있는 실체가 일관성 있게 지어나가는 스토리로 완성했기 때문이죠. 이게 바로 "의미의 창출"이며, 장기 비전이고, 단순히 템플릿을 채우는 싸구려가 아닌 진정한 "전략"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컨셉트를 다 끌어담았다고 좋은 전략이 되는 건 물론 아닙니다. 공저자 중 한 분인 루멜트 교수(정말 너무 유명한 분들이 책 한 권에 다 모셔져 있더군요)는 이런 전략을 두고, 전략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잡동사니이며, 엔트로피 덩어리라고 혹평합니다. 소비자를 향한 허풍과 사기라고까지 말합니다. 전략가(따라서 리더, CEO)는 추상적인 과제와 목표 중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분명히 아랫사람에게 정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일례로 "달착륙"이 미션으로 떨어졌을 때, 그 달의 표면이 부드러운지(혜성의 오랜 세월 동안 충돌 때문에 토양은 매끄럽게 빻아졌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황무지처럼 거칠지, 뾰족한 가시밭 같을지, 가능성은 여럿으로 존재합니다. 전략가는 이 모든 시나리오를 동등하게 유효한 취급을 하며, 하위 엔지니어들에게 실천적 세부 계힉을 완성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가능한 시나리오가 셋이라면, 그 양립할 수 없는 나머지 둘은 버리고, 하나만을 골라 프로젝트를 짜야 합니다. 나머지 둘이 현실의 가능성으로 드러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책임은 CEO가 지는 겁니다. 엔지니어들은 전략가가 큰 그림으로 정해 준 시나리오 하에, 세부 작업에만 몰두하게 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게 지도자의 결단이라고 할 수도 있죠.


논 쟁적인 이슈도 많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다베니 교수 같은 이는 문휘창 교수와의 대담에서, 마이클 포터가 종래 문제삼은 "가격-품질"의 선택적 딜레마는, 현재의 환경, 혁신 아니면 죽음을 강요당하는 기업의 상황에서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가격과 품질이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가 희생되어야 하는 관계가 아니며, 혁신의 차원에서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라는 거죠. 일본 역시 종래의 도그마에 집착하다오늘날의 곤경을 맞이했고, 어제까지 유효한 전략이 오늘 낡은 것으로 추락하는 일은 흔히 보는 현상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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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 박태준 - 쇳물보다 더 뜨거운 열정
신중선 지음 / 문이당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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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난 시대 한국의 급속한 개발 독재 시기에 대해서는 찬반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그 와중에서 어느 시각으로부터건 일관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는 (딩연하게도) 참 드문데요. 그 중에 단연 첫손에 꼽히는 이라면 바로 박태준 초대 포철(현 포스코) 회장입니다. 그가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군 장교 시절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 왔으며, 군사정변 이후에는 (바로 이 책의 주제가 되고 있는 내용에서 보듯) 철 강 산업은 물론 소규모 영세 공장 하나 변변한 꼴이 없었던 한국에, 국가 기간 산업이자 경제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거대 종합 제철소를 처음으로 건설하고,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영리적, 산업적 성취를 이뤄 낸 기적의 주역으로, 거의 이견이 없이 국민 모두의 가슴과 뇌리에 새겨져 있습니다.


박태준 씨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정치계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자당(自黨)의 대톨령 후보로 선출된 김영삼과 사사건건 충돌하였고, 김의 대통령 당선 후에는 정계 은퇴는 물론 도일(渡日)까지 감행했습니다. 김영삼 정권은 그의 비리를 조사한답시고 갖은 수모를 주고 곤욕을 치르게 했으며, 그는 이 때문에 모친상도 치르지 못한 채 이국에서 처량한 시절을 보내야 했었죠. 그가 공적(公的) 커리어에 있어 재 기의 기회를 맞은 건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였습니다. 이때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선거를 앞두고 대연합 전선을 결성하여 그 찰떡 공조를 과시하고 있을 시절이었습니다. 만약 대구, 경북 지방을 대표할 만한 인사 한 명이 추가로 합류한다면 대세를 확정지을 수 있는 분위기였죠. 박 전 회장은 흔쾌히 김대중 후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칭 DJT 연대의 결성에 한몫을 하게 됩니다. 새 정부에서 그는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퇴임한 후에는 북한 경제특구에 파견되어 황무지에 가까운 척박한 현황을 극적으로 타개하는 대역사에 관여할 것을 희망하지만 결국 좌절한 경험도 있습니다. 이후 그는 건강악화와 노환으로 타계하지만, 만약 이때 박 회장이 북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아무도 장담 못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은, 그의 인생 최절정기인 대한중석 회장, 포철 창업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던 바로 그 시절입니다. 성공한 인물에 대해서는, 흔히 과장되고 불필요하거나 부당한 포폄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벌써 당시만 해도, "박정희가 그처럼 감싸고 돌며 특혜를 주는 사업이라면 누가 못 하겠는가? 땅짚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며, 개인 착복이나 없는지 조사해 봐야 한다."는 말이 수 없이 나왔다고 합니다. 오히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야, 이 위인은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개발독재 시절의 사업 추진에 대해서는, 은행 돈을 사금고처럼 쓰며 파렴치한 운용이 당연시되던 암흑시절로 간주되곤 합니다만, 최근의 저축 은행 비리나 국민은행 사태에서 보듯 오히려 지금보다 당시가 더 깨끗한 일면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보면,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라고 이 책에서 내내 약칭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컨소시엄 같습니다) 프로젝트를 당시 정부에서 간신히 마련하여, 장기영 부총리(한국일보사의 오너이고 당시 정계의 거물입니다)의 지휘 하에, 박태준을 실무 총책으로 하여 진행되게 합니다. 문제는, 내자건 외자건 말은 여기저기서 (대의에는 공감한다며) 흔히 나오지만, 아무도 선뜻 실물의 자금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더라는 거죠. 박정희가 싸인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보증하는 사업이었건만, 외국은 물론 국내은행조차 선뜻 돈을 내놓으려고(융자) 하지 않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이때, 한일은행측에서, 아무 담보물도 없는 박태준에게 "당신의 열의를 담보로 하겠다."며 선뜻 투자에 나섰으니, 만약 이 손길이 아니었으면 한국 제철 산업 뿐 아니라 전체 경제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을 터입니다. 5공 시절만 해도 재벌들은 정계 수뇌부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탈법적 수단으로 은행 돈을 끌어다 썼는데, 그 검은 커넥션에 관여한 대표적 인물이 이원조 같은 사람이 죠. 이첧희, 장영자 등이 저지른 부정으로 대형 시중 은행 하나가 치명타를 입기도 했고(조흥은행), 제일은행은 바로 대우조선 부실을 떠맡느라 은행으로서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면, 금융계의 풍조라는 게 세상이 투명해지고 발전하는 추세에 오히려 역행해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박 회장이 고작(?) 은행 융자 하나를 받는 데 그런 고생을 했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박 회장이 모셔야 했던 상전은 박정희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장기영 부촐리는, 이 KISA와 계약을 대단히 부실하게 체결했었는데, 일이 도중에 잘못되어도 채권단에 약속 이행을 전혀 강조할 수 없는 허술한 구조였음을 박태준은 알게 됩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추진한 사업이 부실덩어리가 되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그는, 제철소 기공식에 불참을 통보합니다. 당연히 정부에서는 발끈하고 나섰으며, 박정희에게 보고가 들어가서 그는 청와대로부터 긴급한 소환을 당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진상을 차분히 털어 놓고, 낯빛이 변한 박정희는 바로 다음 날 장기영 경제 부총리를 해임하게 되었다는군요. 이런 사실 역시 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참고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행사가 지금까지도 한국일보 주관이며, 지금도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백상예술대상은 바로 이 장기영씨의 아호에서 그 이름을 딴 것입니다. 당시 이 인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고 이 대목을 읽으면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참 고로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백상 장기영이 자신의 해임 통보를 받고 나서도 행사자에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축사 등의 진행을 맡아 치르더란 사실까지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거구의 사업가가 어느 정도 배포가 크고 걸물급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박 회장은 그 이후에도 까다롭고 권위적인 관료들을 상대하느라 곤욕을 치릅니다. 해외의 투자자들을 상대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는데, 비록 박 회장이 일본통이었다고는 하나 입맛 까다로운 일인 돈줄을 컨트롤하기란 거의 곡예에 가까웠다는 회고입니다. 기껏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의 싸인을 받으려 하니, 그 고압적인 태도로 유명한 김학렬 부총리(장기영씨의 후임은 박충훈씨였고, 이분은 그 다음을 이었습니다. 박충훈씨는 1026 직후 잠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기도 합니다)는 여러 번에 걸쳐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때 박 회장은 정말 설움이 북받쳤다고 하는군요. 참고로 김학렬 부총리 역시 대한민국 경제 기획 콘트롤 타워로서 혁혁한 공적을 남긴 분이니 독자들이 너무 나쁘게 볼 건 아닙니다. 그분 역시 반 세기에 한번 날까 말까한 천재형 관료였습니다.


박 회장 하면 우리는 "쪼인트까기" 같은, 군대식으로 돌아가는 강철 같은(?) 강압적 경영자로만 인상을 갖기 쉽습니다. 군대식으로 밀어붙이면 뭘 못하겠느냐는 쉬운 선입견도 여전히 두텁죠. 그런데 이 책을 보시면, 1968년 당시에 박 회장은 직원들(임원이 아니라 평직원입니다)을 위해, 당시 한국으로서는 상상이 안 될 만큼 깨끗하고 쾌적한 사원 주거 단지를 건설한, 사원 복지제도의 선구자였습니다. 재벌들도 본격적인 복지 시스템을 갖춘 건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이 당시 새로 건축된 사원용 거주단지를 보고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 세계 경제 대국 반열에 든 한국의 대기업 처우와 비교할 건 아니죠. 당시에는 이런 게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직원들이 자기 일에 신나게 몰입할 수 있어야 좋은 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한 판단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이처럼,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 스타일은커녕,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여우처럼 읽을 줄 아는 대인 전술의 귀재이기도 했던 거죠. 이런 수완은 일본인 은행가들을 상대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가망이 없던 투자 계획을 오로지 현장에서의 멋진 접대로 성사시킨 일이 꽤 된다고 합니다. 정말 배워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네요.


분량은 그리 두텁지 않은데, 다룬 내용이 압축적이고 필치가 박력있어서 책을 덮고 뿌듯한 보람이 밀려 왔습니다. 10년 전에 이 책보다 훨씬 두꺼운 전기가 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그 책은 작가의 주관이 좀 많이 개입한 픽션에 가까워서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이 책은 선택과 집중 면에서 현명한 태도를 취한, 근래 나온 중에서 가장 내실 있는 박태준 관련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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