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케네스 & 글로리아 코플랜드 지음 / 사랑의메세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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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두려움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만, 왜 사랑에 "두려움"이라는 개념이, 긍정적으로건 부정적으로건 연관을 맺어야만 하는지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 가운데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드라마에서의 "사랑"과, 이 책에서 저자가 사용하는 으의미의 "사랑"'입니다. 다소 투박하게 가르자면, 전자는 "에로스"에 가깝고, 후자는 "아가페"를 주로 의미하겠습니다만, 그런 이분법(내지는 삼분법) 자체가 큰 지혜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가소로운 이야기입니다. 철없는 10대의 사랑이라고 해서 언제나 눈총 받을 불장난이겠으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고 해서 육적인 면이 언제나 배제되는 성질이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섣부른 이분법은, 사랑과 신 앞에 동시에 오만해지는 첫걸음인지도 모릅니다.

저자 케네쓰 코플랜드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분이네요. 아무래도 여전히 미국 내에서 열악한 위치에 머물러 있을 체로키 인디언 혈통의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라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좋은 목소리 하나로 나이트클럽  직업 가수 생활도 하다가, 돌연 어느 순간 회심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도 예사 교인이 아니라, 대단히 독실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닌 그런 분입니다. 이분이 이런 회심의 계기를 가진 데에는, 부인 글로리아와의 만남이 결정적 역할을 했고, 따라서 이 책은 두 분 부부의 공동 명의로 된 저작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너희를 집어 삼킬 순간만을 노리고 있"으나, 저자는 일견 암흑이 빛을 내려 누를 것만 같은 세상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집어 삼키는 일은, 오로지 우리가 그것을 "허락"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 허락을 내리는 순간에는, "마치 홍수와 같이 우리 안으로 쳐들어 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야 그가 우리를 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고귀한 자유 의지를 주었으니, 믿음을 갖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요한 복음의 말대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에 거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다시 사탄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다면, 사탄에게 우리를 삼킬 것을 허용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험한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은, 결국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입니다.

예수는 피의 희생물일 뿐 아니라, 아버지가 인간을 사랑해서 우리에게 그 대표로 파견한 중보자(mediator)라고 합니다(이 책 p52). 삼위일체의 교리란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롭죠. 우리를 사랑해서 지상에 파견한 그 아드님이, 바로 아버지이기도 하고, 또 우리 곁에 오셨을 때엔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파도 있지만, 기독교의 주류는 아무래도 이를 인정하는 쪽이죠.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를 한없이 아끼고 자애하는 모습입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실수를 연발로 저질"렀다고 해도, 우리를 바로 엄히 벌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다독이는 게 아버지의 태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들도, 바로 하늘에서 떨어진 천벌을 받지 않고 저리 활개를 펴고 지상을 돌아다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요한 건 대관용,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외투 안에 몰아 넣고 관조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은 오로지 사랑 속에서만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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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종합연구소 2014 한국 경제 대예측 - 일본 최고 민간경제연구소의 한국 경제 전망
노무라종합연구소 엮음 / 청림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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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나와 있는 "대예측"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범위도 넓고 폭도 깊은 분석을 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보통 한 해를 마무리할 시점에 이런 책들이 나오긴 하지만, 특히나 이 책처럼 매년 정기적이라 할 만큼 고정된 독자들의 수요에 맞춰 내는 류라면, 집필측이 참 애로를 겪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이크로트렌드만 다루는 입장이라면 크게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이 책처럼, 깊이와 폭을 동시에 노리는 책이, 그 스탠스를 잡기가 난감한 거죠. 거시적 상황이나 여건이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크게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업데이트되었다는 인상을 뚜렷이 남기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서인데요. 제가 매년 이 책을 보고 있지만, 볼 때마다 놀라는 건, 2014년판이면 정말 그 출판시점에서의 적실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구색만 갖추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스타일, 테마를 바꾸는 식이 아니라, 정말 진지한 고민, 정확한 데이타에 기초하고 이루는 분석, 집필이라야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폭"을 갖추었다고 하면, 이 책이 다루는 범위가 그만큼 넓다는 뜻입니다. "깊이"가 느껴진다는 말은, 단기 트렌드의 정보 전달에 치우치는 게 아니라,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새 독자 혼자 힘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다음 기간에 대한 분석을 해 줄 수 있게 하는 프레임을 키워 주는 교육적 컨텐츠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근래 좋은 경제경영서가 많이 나오지만, "싱싱한 물고기"를 잔뜩 담고 있음에도 정작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은 보기 드물었습니다. 헌데, 이 책은 "고기를 낚는 방법", "여기 말고 다른 장소에서도 싱싱한 녀석을 건질 수 있는 방법"까지 두루 가르쳐 주는 책이었다고나 할까요. 정보도 좋지만, 그 정보 이면에 숨은 거대한 체계와 논리를 배우는 독서가 즐거웠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한국경제" 대예측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책은 1부와 2부로 나뉩니다. 1부는 세계 경제 대전망입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아 1부까지는 각국 시리즈에 공통 module이고, 2부부터 특화된 각론이 전개되는구나. 약았는걸?" 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잘 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게 놀라웠습니다(정성을 많이 들인 기획, 집필이라는 말입니다). 3장의 내용이, 뚜렷하게 "한국과 일본"에 포커스를 두고 집중적인 조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내용이 절대 그 제목을 배신하지 않는, 성실한 편제였다고나 할까요.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워낙 큰 충격을 몰고 왔으므로, 다소 식상하지만 이 책도 그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1부 1장의 제목은 "세계 경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입니다. 아 마 우리가 10년쯤으로 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고 하면, 미래에 나온 책의 한 챕터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게 다소 의아할 텝니다. "무슨 새삼스러운..?" 그런데 그 미묘한 10년기 동안, 세계는 미국의 패권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고, 중국의 잽싼 부상이 세상의 모습을 통째로 바꿔 놓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직도 미국 타령을 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취급을 받기가 일쑤였죠. 격하고 다이내믹한 풍랑을 겪고 난 후에야 냉정을 되찾은 세계는, "여전히 미국이 문제(중립적인 의미에서)"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초미의 관심사는 양적 완화 정책의 변화 기조입니다. 이미 미 연준은 긴축 기조로 돌아설 것임을 천명했고,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상한 내용이라는 듯, 뉴스 인용에 그치지 않고 상세한 분석과 전망를 풀어 놓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정식으로 취임한 재닛 옐런의 성향도 본문 중에 잠시 언급합니다. 아무래도 일본측의 시야에서 바라보는 만큼, 2001년 당시의 "일본은행"이 취한 긴축 정책과의 비교가 이뤄지고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상황이 크게 차이가 나는 만큼 불필요한 시도가 아니었나 보여집니다. 여튼 결론은, 당시의 일본은 단기국채 위주의 회수 정책이었고, 미국의 지금 그것은 중장기 maturity 를 대상으로 한 만큼, 그 결과를 두고 섣부른 유추는 금물이라는 게 포인트입니다. 긴축의 속도가 완만할 것인가 그 반대이겠는가에 대해서는, 이 노무라 시리즈가 언제나 그래왔듯, "유보"적인 결론입니다. 노무라 시리즈가 믿음이 가는 건, 어차피 변수가 다양하게 개입하는 경제현황의 전망에 있어서, 무리한 확단은 언제나 패착으로 향하며, 설사 점친 방향이 맞았다 한들 행운의 소산 이상이 아니라는 점을, 독자에게까지 상기시켜 준다는 점입니다. 판단은, 마지막 순간까지 흘러나오는 정보를 모두 취합한 후 우리 스스로에게 남겨진 몫이라고나 할까요.


그 다음은 미국의 정치상황을 잠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잘 알듯 지금은 공화 민주 양당의 정책 이격도가, 유사 이래 최대라고 할 만큼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정치는 경제사회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종속변수이니만큼, 미국 경제가 안고 있는 양극화 추세가 문제이지 정치인의 무능을 탓할 건 아니죠. 하지만 정치인들이, 가뜩이나 어려운 문제를 사후적으로 더 어렵게 만들 능력은 충분히 있습니다(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경제 분석서에서 정치 이야기가 많이 개입하면 산만해지는 단점이 있는데, 이 책은 딱 적절할 만큼만 짚어 주고 있습니다. 노무라 시리즈가 이래서 좋다는 겁니다.


" 미국의 세계 맹주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이 챕터는 사실 그 다루는 주제가, 이 정도 분량에서 소화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겠으므로, 시간 없는 분들은 패스해도 좋을듯합니다. 누구에게나 재미 있을 토픽이지만, 또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을 법한 내용입니다. 일본이 언제나 군침을 다시는 동남아의 볼륨 존에 대해서도, 그 성장세는 그리 낙관할 형편이 아니며, 결국은 중국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까지 아주 조금 흘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까지 볼 일이 아니지만, 역시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는 노무라 시리즈에서 취하리라 충분히 기대되는 스탠스네요.


아배노믹스의 성패를 두고는 대체로 두 가지 점을 분명히합니다. 하나는, 우리 한국에서의 불편한 분위기와는 달리, 여전히 이 정권에 대한 일본 국민의 지지, 최소한 기대치가 높다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두번째로, 이 정권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소비세율 인상 조치의 결과를 두고, 당국은 경기 실속(失速)을 막기 위해 갖은 궁리를 다 짜내고 있다는 점이죠. 책 전체에 걸쳐 되풀이되는 사항인데, "결국 5~10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은 일본의 전철을 밟기 십상이다."는 관점이 일단 기본으로 깔려 있긴 합니다. 그러나 두 나라의 형편이 디테일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노정함도 집필진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저성장시대에의 건강한 적응, 혹은 표면적 탈출을 위해(더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우울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국 정부가 어떤 기조 하에서 정책을 펴고 있으며, 대체로 효과를 보는 편인지에 대한 촌평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2부가 볼만합니다. 본디 거시 분석은 누가 해도 비슷한 말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그 말하는 사람의 역량이나 내공이 드러나게 되어 있죠. 이 후반부서는 전기전자, 자동차, IT, 부동산, 금융, 그리고 유통 분야를 논급하고 있습니다.


전기전자의 장이 그나마 가장 "식상한(?)" 편이었고, 나머지 분석은 정말 읽는 순간 눈 앞에 새로운 경지가 보일 만큼 신선했습니다. 특 히 한국 가전 업체들의 미국 시장 대약진을 집중 거론하고, 일본 업체들의 초라한 패퇴(흑색 가전) 속의 권토 중래(백색 가전) 분위기를 언급하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월폴은 현재 덩핌 혐의로 한국 2社를 자국 법원에 제소한 상태인데, 이는 미국 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자체 위기를 절감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의 반격 태세가 만만치 않다는 점도 상기하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아직 "종래의 거인들"은, 과거의 영화가 주는 달콤한 기억에 빠져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 못하는 분위기라는 것도 살짝 암시합니다. 자동차의 경우, 친환경 컨셉은 더 이상 시장 선도의 소재가 아니라, 기업이 이 판에서 살아 남느냐의 문제라고 아주 단언하고 있습니다. 신흥국 시장에서 자동차 메이저들은 승부를 봐야 할 단계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며, 그 중에서도 닛산의 도약세가 현재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아주 볼만한 파트가 IT입니다. 우리는 누구가, 잡스의 애플이 지난 10년기 중에 자리잡아 놓은 스마트폰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체감하지만, 정작 그 본질적인 경제사적, 문명사적, 혹은 인문적 의의가 무엇인지 표현해 보라고 하면 미디어에서 쉽게 들어오던 상투어 몇 마디를 풀어 보는 데 그치는 게 고작이죠. 그런데 이 책은 아주 짧은 분량 안에, 왜 스마트 혁명이 그토록 지대한 의의를 지니는지 아주 핵심만 찔러서 품격 있게 표현해 주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경제 분석서에 추상어구, 역사적 의의 타령이 들어가면, 외관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몰입도와 효율이 떨어집니다. 노무라 시리즈는 정반대로, 문제를 근본 차원에서 이해를 돕는다는 확실한 메리트를 이 대목에서도 보여 줍니다. 거의 감동 수준이었습니다.


유통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컨버전스"입니다. 사실 유통에서의 혁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한국에서조차 이미 1990년대애 가격 파괴니 뭐니 해서 치열한 경쟁의 바람이 일었다는 걸 우리 대부분이 기억합니다. 어찌 보면 재래시장과 대형 마트의 충돌도, 시장의 강자-약자 간 불공정경쟁의 갑을 이슈가 아닌, 혁신과 정체 사이의 치열한 각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혁신의 키를 강자 쪽에서 쥐고 판을 끌어간다는 데 있을 뿐이죠. 이 장에서 초점을 대담하게 옮기는 분야는, "PB"입니다. 왜 저기 우리도 GS나 CU 같은 데서, 자체 브랜드를 붙여 파는 우유나 스낵을 보곤 하죠(제법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제품들은 대체로 저가인 편인데,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이뤄집니다.


요즘 선대인씨 덕분에 부동산 시장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부쩍 높아졌죠? 선대인씨 책을 읽고 기본 프레임을 잡은 독자라면, 이 책의 부동산 파트를 읽으시고 보다 시장 중심적인 처방과 타개책이 무엇인지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대인씨의 최근 베스트셀러가, "이 정부에서 폭탄 돌리기를 바로 끝내 버려야 한다."는 거시 정책 위주의 내용이었다면, 이 책의 해당 파트는 시장이 언제나 직면하게 마련인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곤경을, 어떻게 선진 시스템과 기법을 도입, 혹은 창안하여 극복해 내는지에 대한 놀랄 만한 청사진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 새로운 트렌드가, 일본에서 처음 시도된 것인지 그들도 구미의 것을 연구하여 자국 실정에 맞게 변형한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건,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순히 1인 가구의 증가나, 소유에서 사용향유 위주의 패턴으로 바뀐다는 피상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회사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대중은 그 기업의 경영 과실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주식회사 제도입니다. 부동산 개발 역시, "공모"를 통해서, 혹은 그 단계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공신력을 충분히 확보한 민간 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개인이 투자의 애로를 벗어날 방법은 있다는 것입니다. 작 금의 부동산 난국은 비단 세입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집주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고충이 (어차피 한계가 분명한) 정부의 개입으로 뭐가 나아질 수는 없고, 시장의 성숙과 선진화라는 민간 차원에서 접근해야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긴, 어찌 그 이치가 비단 부동산 섹터에 한정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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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에 대한 명상 문학의전당 시인선 168
권순자 지음 / 문학의전당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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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란 그저 자연과학적 관점에서라면 개 체 번식을 위한 생화학 작용 끝의 (다소 요란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미학적 객체로까지 위상을 높이고, 문예의 인기 소재로 삼고, 경우에 따라 존재를 걸듯 탐미의 대상으로 삼는 게 인간입니다. 시인 김춘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것"에 의미를 꽉꽉 채워 넣은 감성과 인식의 결정체를 상정하고, 단 한 마디로 "곷"이라 명명했습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인간 영혼과 감성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꽃"은 영원히 신비적 매력으로 인류의 곁에, 아니 위에, 남아서 끊임 없는 각성의 원천으로 기능하지 싶습니다.



어찌 보면 꽃을 꽃으로 알아보는 것도 우리 인간이라야 가능함니다. 꽃과 더 오랜 시간을 같은 주파수의 공감대로 딩굴 만한 짐승(초식이건 육식이건)이라 해도, 우리 인간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무심히 소, 양, 사슴 등이 지표에 돋은 각종의 엽록소 용기(容器)를 텁텁한 입으로 뜯는 모습을 보면, 꽃의 성스러움을 그대로 알아 봐주거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포장해 주는 편도 오직 우리 인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간혹 제 동족 중 가장 이쁜 것을 "꽃"에 비기면서도, 일시의 격정을 건사 못 해 잔인하게 목숨을 앗는 종(種) 역시 인간뿐입니다. 이래저래 꽃은 자신의 화사한 모습을 통해 타 종의 존재 본질 통찰을 돕는 성스러운 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권순자 시인의 이 시편들은,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모순과 추함이 생의 자취 곳곳에 업보처럼 얼룩진, 있는 그대로의 사람살이를 미화 없이, 때로는 날카로운 과장을 통해 독자에게 심상으로 제시합니다."꽃"을 매체로 삼아 전개되는 "명상"이라니, 그 언어의 울림만 눈을 감고 짚어도 안온한 피안으로 쉬이 인도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꽃이 입은 빛깔 중에서도 어쩜 가장 흔한 편인 "붉음"에 내재한 또다른 환기의 연속에 기인한 걸까요. 사람 사는 이 세상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 보기 좋고 미쁜 덩이로만 공간이 체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못난 것, 추한 것, 더러운 것이 더 가득 공간에 배어 질서를 흔들고 엔트로피를 증강합니다. "명상"이 "아픔"으로, 나아가 근원적 고뇌로 이어진다니 이보다 더한 역설이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촘촘히 보람으로 채우지 못한 채, 듬성듬성 공허한 쾌락과 우두망찰 방관, 나태로 물들임은 "죄"입니다. 마땅한 상대를 찾아 사랑의 결실을 맺지 않은 채, 허랑한 자아만 위무한 보편적 방종인을 두고 권 시인은 "삼촌"이라는 익명을 부여하여 준엄히 심판하고 있습니다(p34).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한 인생은, 저 멀리 인간 존재의 불의와 모순이 뿔 끝의 첨점에 달려 금세라도 비등점 너머로 폭발할 것 같은 소말리아(p96)로 보내 버려야 제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다. 거기서도 "나"를 만날 길 없으면, 표류하는 새가 되어 구천을 떠돌면 해법이 보일 지도 모릅니다(p85). 돌다돌다 지친 존재는, 어느 새 그 모든 번민을 한 줌의 재로 화하게 한, 싸늘히 그 붉은 빛을 뿜는 한 떨기 꽃을 만나 돈오의 희열을 느낄 지 모릅니다.(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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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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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역시 데니스 루헤인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해도, 대중에게 잘 먹히는 스타일 하나만 개발해서 몇 번이고 우리고 재탕하는 이들도 있지만, 데니스 루헤인은 언제나 다양한 시도를 벌이고, 그 때마다 독자에게 신선한 방식으로 흥미를 주며, 어 떻게 된 일인지 완독 후에는 마음 한 구석이 아려 오는 듯 감동까지 선사합니다. 매번 참신한 형식으로, 자신의 재능이 빚는 소산에 식상함이란 메뉴는 첨가되지 않음을 강조라도 하듯, 같은 작가의 솜씨가 맞나 싶게 변신을 꾀하지만, 언제나 그의 문장은 - 예컨대 이 작품처럼 수식과 내면 묘사가 최소한으로 절제된. 페이지터너를 의도한 철저한 스토리텔링에 치중한 작품 속에서도- 인생과 인간성의 본질을 꿰뚫는 "한 방의 문장"들이 촘촘히 막간을 수놓습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죽을 수는 있지만, 명분 없이 살인을 할 수는 없다."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게 운이며, 운이 곧 삶이다."

"사람이란 끊임 없이 변하는 존재 같지만, 오히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게 인간인 법이다."


이 런 잠언에 가까운 멋진 명제들이, 딱 적소 적시에 등장하여 플롯의 밀도를 배가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성취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이나 다양하게 스타일 변신을 꾀하면서도, 1/3 읽다 보면, 이름을 가려 놓은 채로도, "데니스 루헤인이군!"하며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다 읽고 나면 "역시, 이 작가의 솜씨에선 뭘 건져도 건지는 게 있군!" 하며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정독을 하려니 마음을 정리하게 됩니다. 제가 언제나 그의 작품이, 그저 장르물에 그치지 않고 본격 문학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며 고개를 주억이게 되는 게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금 주법 시대 깡패들의 활극을 소재로, 또 뭘 짜내고 음유할 여지가 남아 있을까요? 이런 닳고닳은 테마를 고른 이상, 제아무리 날고 기는 루헤인이라고 해도, 이번에야말로 구태의연이라는 익숙하고 강력한 늪에 드디어 날렵한 다리를 떨구고야 말 공산이 컸습니다. 소설이 그 배경으로 삼은 미 동부의 번화한 거리는 "빠른 자(the quick)"와 "죽은 자(the dead)"로 그 신분과 운명이 나뉠 뿐이라는 점에서, 지난 세기 개척 시대의 와일드 웨스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총집에서 총을 꺼내는 그 팔동작의 민첩도만이 "빠름"을 판단하는 잣대였던 시절과는 달리, 20세기 초반의 뉴욕, 보스턴, 그리고 그의 지배를 받는 하부 구조의 거리들(예컨대 먼 남쪽의, 쿠바, 푸에르토리코와 가깝고, 가까운 만큼 그 범죄적 운명과도 친근한, 플로리다의 템파 같은 곳)에서는, 머리의 회전도와 판단의 정확성이 더 핵심적인 중요도를 차지한다는 점 정도겠습니다.


조지프 커글린은 고위 경찰 간부의 귀한 막내아들로 자라났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았고, 이는 그의 손위 두 형도 마찬가지였죠. 비록 키가 작긴 해도, 잘생긴 얼굴에 배짱도 좋고, 두뇌 회전도 비상했던 데다 본디 심성도 착한 아이였습니다. 이런 아이가 왜 범죄자의 운명,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강도질이나 하는 신세로 떨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루헤인은 언제나 그러했듯 이 의문을 푸는 숙제를 독자에게 맡기지만, 힌트는 아주 공정하게 주고 있습니다. 얼핏 보아 부모의 불화라든가(양친은,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자 모두 알 수 있듯,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쳤으면 지나쳤지 모자랄 게 조금도 없는 유형이죠), 어린 눈에도 포찰될 수 있었던 직권 남용, 부패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서라든가 하는 피상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아버지 토마스는, "나는 문명인들과만 거래한다."며, 별 힘도 들지 않을 것 같은 이탈리안 마피아의 지시 청탁을 단호히 거부하는, 건강한 영혼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흔히 범죄를 소재로 다루는 문예물에서 저지르곤 하는 과오가, 바로 범죄를 미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유명한 <대부> 시지를 감독한 코폴라도, 연작 2편에서 공연히 피델 카스트로라는 코드를 슬쩍 끌어들임으로써 터무니없이 조직 범죄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패착을 저질렀지만(이 루헤인의 작품에서도 아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듯,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은 오히려 미국발 조직범죄를 그 섬에서 일소하려는 흐름에 강한 민중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기에 성공 가능했죠. 스페인의 봉건적 압제로부터 미국이 전재을 통해 카리브 해 일대를 해방한 건, 바로 이처럼 장애 없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였고, 이는 대부분 폭력 조직의 힘을 빌려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루 헤인은 느와르를 연출하면서도 그 주역을 맡은 캐릭터들의 배후에, 죄의식, 양심, 영혼이라는 견제자, 최후의 심판자를 고안, 삽입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본-말, 주-객의 원위치가 무엇인지, 극의 재미와 역의 매력에 홀려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베풉니다.


이 소설에는 명언이 참 많이 나오는데요. 커글린은 그의 출신 배경에 어울리게 가장 고급의 아일랜드식 교육을 받습니다만, 그 중에는 카톨릭 신앙이라는 배경이 빠지질 않습니다. 아버지 토 마스 재비어 경정은 그 살아온 깊은 고뇌의 흔적을 길지도 않은 말 몇 마디로, 비극성과 장려함을 가득 담아, 아들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 독자들을 향해 간증하듯, 유언하듯, 존재를 털어 내듯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은 불의의 순간 선의의 경찰처럼 현장에 개입하여 잔손을 쓰지도 않고, 악의의 경찰처럼 뇌물을 받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단지 죄인의 가슴 속에 영혼이라는 형틀을 주조하여 장착한 후, 그 자가 일생을 두고 회한과 모멸감. 영혼의 잠식과 함께 살아가도록 형벌을 내린다." 읽다 보면, "아, 그런 거였구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부당한 고통을 겪는 현실로, 바로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손쉬운 억단은 삼가야 하겠구나." 같은 (뜬금 없는) 깨달음이 밀려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일말의 죄의식도 없고, 오히려 동물적인 본능이 빚은 못난 감정에의 매몰을 무기로 터무니없는 무고를 하려 든다면? 그때는 이 소설에 나오는 몇몇 묘사처럼. 개처럼 두들겨 맞고 형체도 못 알아 보게 만든 채 차디찬 대양의 심저에 가라앉게 하는 수밖에 없겠죠.


주 인공이, 신분 태생상의 유리점이야 어찌 되었든 초심자의 위태위태한 지점에 세워져서, 도무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한 복판, 생사의 기로에 서서 꼼짝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천성의 재치와 배짱으로 타개하여 도리어 정상으로 향하는 발판으로 삼는 멋진 곡예의 모습은, 성공하는 스릴러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의 장치입니다. 루헤인은 스릴러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요 양념을 독창적으로 고안하여 독자가 주인공의 거듭된 전락과 파멸 수렴 행보에 서서히 피로감을 느껴갈 즈음에 적실히 삽입, 소설의 "흥행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인지(적 착각)"과 "사물의 진상" 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넘나들며 스토리텔링을 하느냐도 오락적 성패를 가름하는 요소인데, 과연 에마가 그토록 매력적인, 멋진 사내놈 하나의 인생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여자였는지에 대한 해답 역시, 주인공 조 커글린의 시점과 (당연히 우리 독자로는 편향되어 보이는) 아버지 토마스의 시점, 그리고 중반 이후에 재등장하는 디온 바르톨로의 시점을 통해 각각 달리 전달함으로써, 독자에게 정확한 실상을 자체 추론을 통해 재구성하는 쾌감까지 주고 있습니다.


미 궁에 빠진, 혹은 흑막에 가려 있던 진실을 캐치하는 작업은 우리의 주인공 조도 열심히 액자 안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그는 과연 누가, 앨버트 화이트에게 자신을 팔았는지 알아 내어, "빚을 갚을" 필요가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의 수완과 배짱, 영혼 안에서 들끓는 열정을 제대로 알아 본 대부 토마스 페스카토레는, "조가 가장 믿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배신자로 가장 바짝 염두에 두고 있는" 디온을 멀리 몬트리올에서 플로리다까지 빼 내어, 조의 영혼 그 작은 교란을 해소하게 돕습니다. 첫눈에 만난 옛 친구는,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로 조를 맞는데, 이어 저녁 무렵에 긴 침묵을 거치고 나온 고백은 "그래, 내가 배신자였어."라는 침통한 한 마디죠. 하지만 진짜 반전은 지금부터인데요. 사태의 정리를 친구의 해석으로 정리하고 돌아온 조는, 대부와의 통화에서 정반대의 결론으로 낙착을 봅니다. 이는 마치, 영화 <대부 1>에서 돈 코를레오네가 뉴욕의 5대 패밀리와 간만의 회동을 마치고, "범인은 (그간 알려져 있던 바, 혹은 장본인들이 공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바르시티였다."며 충격적인 선포를 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모르긴 해도 루헤인 역시 이 멋진 플롯을 짜내며 그 고전 영화의 명장면에 크게 영향 받았으리라 저는 짐작하고 있어요.


루헤인이 이처럼 플롯의 트위스팅에 능한 줄도 처음 알았습니다. 처음에 아버지 토마스가 시계 하나를 초라하게 구겨진 아들에게 건 네 줄 때, "대체 뭔 속셈인가?" 하고 궁금했습니다. 대부는 바로 그 물품의 가치를 알아 보죠. "내 집 한 채보다 가격이 비싼 아이템이군." 주머니에 챙겨 넣은 후 페스카토레는 세상 누구도 그 눈빛 하나에 다 녹여 낼 것 같은 다정한 분위기로 조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한테 아들 셋이 있다는 걸 알고 있냐?" "네.""그런 나인데, 네 아버지가 이걸 나한테 건네라며 너를 바라보았을 그 순간의 애틋함, 부정을 어찌 내가 모를까? 자식을 키워 봐야 그 마음을 아는 법니다." 아마 여기까지에서 우리 독자뿐 아니라 조 역시, "이젠 살았구나."하는 안도가 온 몸을 감싸고 돌았을 텝니다. 그러나 심해의 포식자처럼 냉혹하고 가차없었기에 그 바닥에서 그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페스카토레는, 결국 이 말 한 마디로 그 모든 가련한 기대를 뒤집는군요. "네 아버지한테, 까불지 말고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해라, 응?" 이쯤 되면 시드니 셀던이 아마 무덤 안에서 전율할 만도 한 수완 아닐까 싶더군요. 우리의 루헤인은 정말 못하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잔재미로 소설이 끝나냐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장르 소설이란 설사 한 순간을 진하게 즐겼다고 해도, 마치 작렬하는 햇살 안에 혼을 던져 버리듯 재밌게 즐긴 바다의 한 구석에, 이제는 은밀히 내다 버린 나의 배설물도 그 본체의 성분을 이루고 있겠거니 하는 꺼림칙함으로 두번 몸을 담그고는 싶지 않은 느낌과도 흡사합니다. 그런데 루헤인의 작품들은, 마치 러시아의 고전명작을 대할 때만큼이나, 쉽게 읽고 서재 한 구석에 처박아 두는 불경을 피하고 싶은, 모종의 존숭감이 들게 하는 마력을 공톨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그의 작품 세부 장치나 개별 문장이 담고 있는, 만만찮은 무게감과 내공이 그 큰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인간 쓰레기들의 불꽃 같은 처절한 생존 경쟁의 뒤안에는, 우리 모두가 그 업보처럼 공유하는 죄의식과 영혼 구원의 문제가, 불길한 탄트라의 자수처럼 수놓아져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루헤인은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고, 우리에게 "인간 근원"의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할 시간을, "스릴러를 통해" 마련해 주었습니다. 남들이 뭐라건, 저는 이 볼륨을 그런 용도로 사용할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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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의병장의 꿈 -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30년, 제2판 나남신서 1450
조상호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남출판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상호 회장님의 이 자서전을 읽고서, 전에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네요.

제가 학교 다닐 때의 나남출판사에 대한 인상이라면 "책이 비싸다."는 게 일단 맨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대학교재 제작을 많이 하는 출판사라는 이미지였지, 이 책에서 대단히 강조되고 있는 사항처럼 "사회과학 전문", "좌파 서적" 이라는 생각은 못 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 세대라면 아마 이런 인식에 혀를 찰지도 모르겠지만요("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나남하면 바로 불온서적이야!"), 최소한 저는 하 모 교수님의 <국제정치학 개론>, 2001년에 간행된 박명림 교수님의 <한국전쟁의 원인> 등의 책들 때문에, 좌파는 고사하고 그 정반대의 경향을 띤 출판사인 줄 알았습니다. 공교럽게도 저는 작년 이맘때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그 책 역시 좌우로 굳이 나누자면 우파 쪽이라서, 이런 잘못된 선입견이 더욱 굳었네요.

아닌게아니라 바로 이 책 중에서도, 박명림 교수의 출판에 대한 이면의 사연이 비교적 자세히 나옵니다. 하긴 그 책의 서문을, 바로 다름 아닌 최장집 교수님이 (지도교수의 자격으로) 썼으니 그때 바로 알아봤어야 할 일입니다. 학술서에 대고 그 성향의 좌우를 가를 게 애초에 아닙니다만, 종래 국내외를 막론하고 학계의 지배적 이론은 브루스 커밍스의 이른바 수정주의 경향이 크게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 교수의 이 최신 성과가 그 중 상당수의 이론 기반을 허물어뜨린 셈이니, 좌파 성향의 독자라면 그리 정서적으로 환영할 책은 아니었다고 봐야겠죠. 어찌 보면 아끼는 제자의 연구 진로에 있어, 당신과는 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방향을 전환함을 독려하기까지 한 최 교수의 아량과 덕망에 박수를 보낼 일입니다.

아무튼 같은 논리가 이 저자, 조상호 사장에게도 적용됩니다. 좌파 성향을 출판인이 지니고 있다 해서, 그 간행하는 출판물 모두가 좌파 성향이어야 할 이유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거겠죠. 이 책 말미에 보면, 조선일보 문갑식 기자와의 공격적(조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곤욕을 치르는 듯한)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내가 경북 영양 출신의 조지훈 시인을 기린 문학상도 수여하고 있고, 젊어서부터 시인을 사무치게 흠모해 왔거늘 호남 편향이라니 말이 안 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책을 (최근 기준으로) 출판한 곳은 우리 회사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조지훈 시인에 대한 열정과 존경의 진정성은 누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보수 언론과의 대담을 수세적 입장에서 내내 치러 낸 것도, "의병장"을 자처하는 그의 언사적 공격성과는 달리, 유순하시고 포용적인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책에서 대단히 큰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는 분은 고 김준엽 고대 총장입니다. 요즘은 공격적 CEO 타입이 주로 그 자리에 오르지만, 전통적으로 이 학교는 점잖은 학자풍의 귀골이 총장직에 자주 올랐던 편이죠. 뭐 김준엽 선생에 대해서는 소개가 필요 없는, 학계의 거목이자 존경 받은 재야인사, 소시적의 독립 운동 경력까지 해서(이 대목에서 고 장준하 선생과 연결되죠) 너무도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조상호 회장이 바로, 이 김준엽 선생과 거의 평생에 걸쳐 사제지간, 출판 편집계의 대선배와 직원의 인연으로 이어진 분임을 저는 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의 거의 1/3 은 김준엽 선생과의 인연에 얽힌 사연입니다.

책 제목에 "언론"이 들어가 있는데, 조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지사형 언론인 김중배 선생과도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월간지 <신동아>는 군사 정권 당시에도 이미 비판적인 논조로 유명했죠. 조 선생의 동아일보 쪽 인맥은 이렇게 열려 있었던 줄 처음 알았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에 얽힌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저 역시, 옛 삼성출판사에서 솔 출판사, 그리고 지금의 나남에 이르기까지 그 판권이 옮아간 경위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요,  출판계의 산 증인이신 필자를 통해 이 점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네요.


이 책에는 조 회장이, 오타가 난 책을 일일이 수거한 후, 바로잡혀진 책을 서점가에 재배포했다는 감동적인 실화도 실려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은 개정판인데도, 여전히 오타가 바로잡혀져 있지 않은 모습이 몇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p164: 5에서 "장학금은 → 장학금을"으로 바로잡혀야 합니다. 보조사의 운용은 대체로 너그럽게 봐 넘길 수 있지만, 책에 나온 대로라면 그 의미가 심히 교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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