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 그리움 많은 아들과 소박한 아버지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박동규.박목월 지음 / 강이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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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님은 올해로 여든에 가까우신 나이입니다. 장성한, 그리고 어느 정도 사회에서 기반을 다진 아들은 물론, 귀여운 손자의 재롱도 구경하고도 남을 연세이시죠. 이 책은, 이런 교수님이, 당신의 부친 박목월 시인을 애틋이 그리는 정 가득 담아 빚으신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내 인격, 내 성취, 이 모든 것을 짜 주고 갈무리해 주신 분이 바로 아버지"라는, 노교수님의 담담한 술회를 듣고 있자니, 독자인 저도 존경하는 부친을 둔 한 사람의 아들로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뭉클한 마음이 전해져 왔습니다.


박목월 시인은 일제가 이 땅의 각종 물적, 인적 자원의 착취에 혈안이 되었던 1930년대 후반, 다른 두 분과 함께 세칭 "청록파"로 혜성처럼 등단하신 분이었습니다. 다른 두 분이, 모순 가득한 현실에 비판의 칼을 비교적 날카롭게 세워 만만치 않은 저항의 빛깔을 시 세계에 투영하였다면, 목월은 전통 애상과 시정(詩情) 가득한 순수 서정시의 창작에 보다 주력하였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속세의 풍진 가득한 삶을 초월하여, 우리들 일상의 범인과는 멀리 떨어진 경지에서 초초히 신선 같은 생을 살고 계신 분이라고 막연히 여겨 왔습니다.


박동규 교수님이 이 책에서 잔뜩, 그리고 조용히 풀어 주고 계신 회고담은, 그러나 시인 목월도 한 사람의 인간이요, 부정 가득하고 자식 걱정에 여념이 없는 책임감 가득한 가장이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새삼 깨닫게 했습니다. 요즘 아빠들이 "프렌디"라 흔히 블리는 친근한 아빠,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아빠, 다정하고 착한 아빠라면, 박목월 시인 세대의 아버님들은 엄하고 무서우면서도 염치를 알게 아는 가정 교육에 주력하는 분들이었다고 하죠.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드러나는 시인 목월은, 그 두 가지 모습을 다 갖추신, 아버지로서 전인(全人)에 가까운 분이셨습니다.


아 침이면 장남(박동규 교수님)을 비롯하여, 어머니와 모든 아이들은 한 아침 식탁에 둘러 앉아야 합니다. 잠 온다고, 입맛 없다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눈꼽을 눈에 덜렁덜렁 붙인 채로, 또 내복도 채 갈아 입지 않은 채로, 아버지의 한 말씀 들어가며 아침을 같이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단히 상징적입니다. 하후의 일과를 가장이 주도하는 아침 식사와 함께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는 전통적 가부장 상(像) 그대로이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다 일어난, 격의 없고 천진한 모습이 또 그대로입니다. 바깥 세상에 나가서 남들에게 욕 안 먹고 사람 구실을 하려면 엄하게 키워야 하지만, 한편으로 넉넉지도 못한 시인의 살림에 많은 지원을 못 해주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도 그대로 실려 있지 않습니까. 엄함과 부성애가 절묘한 비율로 조화된 인격,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국민 시인으로 알고 있던 박목월의 참모습이었습니다. 문인으로서 그저 존경스러운 분인 줄만 알았는데, 가정의 돌봄도 엉망이고 자녀 교육에도 소홀한 일부 문인들의 행각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시인이 빚어낸 모든 작품들은, 자신의 고아한 인격 그대로의 투영이었습니다.


박동규 교수님은 우리가 알듯 서울대 국문과로 학부 졸업을 하신 분이죠, 그런데 이분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도, 요즘 만큼은 아니지만 상닫히 험난한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연대 상학과(요즘 편제로 경제학+경영학)에서 "특차" 입학 제의가 들어왔을 때(요즘의 수시모집에 해당), 소년 박동규는 마음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모친께서도, 낙방 등의 위험이 없는 안전한 길을 권유했고, 어려운 가정 형편상 부친과는 정반대라 할 "실리, 이문 추구의 길"을 걸어 보려 하는 마음도 적지 않았습니다(전 이 대목에서, 과연 그것이 정직한 마음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들었습니다. 상황이 힘들다 보면 적당한 합리화를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하루를 꼬박 생각하고, 소년 박동규는 아버지께, 밤새 굳힌 마음을 알려 드립니다. "서울대 국문과나 영문과를 가겠습니다." 부자 사이에 이미 이심전심으로 통한 바라, 새삼 말로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버지 역시 이제서야 차마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본심을 말합니다. "아버지로서 내가 도와 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분야라야 더 낫지 않겠느냐?" 자식 장래를 마음대로 하려는 아버지의 욕심이 아닙니다. 아들이 보다 완성되고 쓸모 있는 성원으로 자라려면, 아버지의 책무가 다해져야 한다는 지극히 숭고한 의무감이자 부성애의 발로입니다.


그 는 유능하고 자상한 첨삭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졸업 논문을 제출하기에 앞서 먼저 부친께 보여드리자, 다음 날 그의 작품에는 빼곡히 밑줄이 쳐져 돌아?다고 합니다. 주술 관계가 부자연스러운 곳, 아는 것을 과시하려고 불필요하게 힘줘 쓴 문장, 과장되고 어색한 표현...  청년 박동규는 감격의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운문의 대가가 되려면 먼저 산문에 통달해야 하는구나, 시정과 영감만으로 시인이 되는 게 아니라, 뼈를 깎는 기술적 훈련을 거쳐야 시인 한 분이 완성되는구나 하는 점을 새삼 느꼈어요. 요즘 "복사*붙여넣기"식의 레디메이드, 지극히 경박한 날림형 문장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버지로서의 엄한 규준,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도, 직업인으로서의 장인 정신, 이 모든 면에서 그저 부족하고 천박하기만 요즘 세대를 보며, 아버지가 바로 서지 못하니 아들들이 이처럼 부족하구나, 왜 엄격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가 하 가정과 사회에 그토록 중추적인 존재인지를, 거듭거듭 반추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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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미의 일본 가정식 요리 - 단순함, 간소함, 우아함 Everyday Harumi
구리하라 하루미 지음, 최경남 옮김 / 시그마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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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출장길이라면 정말 몸소 느끼게 되 는 일인데요. 서양인들은 진심으로 대접하고 싶은 손님을, 꼭 집 안으로 모셔서 자신의 솜씨로 빚은 식사로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이런 문화가 많이 미비합니다. 그들의 이런 심리는, 우리가 마치 갓 친해지기 시작한 친구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앨범을 보여 주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이것이 나였고, 지금의 나를 만든 자취였어." 이렇게, 나에 대한 은밀한 구석까지 열어 보이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친교의 시작이니까 말입니다.


"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라는 말이 있죠. 그런데, 여기서 "먹는 것"을 꼭 음식에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평소에 뭘 입고 다니는가, 집은 어떻게 해 놓고 사는가 같은, 당신의 스타일 그 총체가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와는 달리, 서양인들은 대체로 농사를 지어도, 집단 노동(부락 단위의 품앗이라든지)에 의지하지 않고 개인(과 그의 식솔) 단위의 노고에 의지했습니다. 자연히, 음식 하나를 해먹어도 개인이나 집안 단위의 레시피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고유의 장맛이다 김치맛이다를 논하면, 어지간히 큰 규모의 부농, 양반가 출신이 아니고선 좀처럼 힘든 것과는 많이 대조되는 사실입니다.


요리하는 저자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 구리하라 여사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요리작가라고 합니다. 유명한 요리사라고 하면 그만의 뼈어난 조리법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거나, 이름난 곳에서 커리어를 많이 쌓았다거나 하는 과정을 통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리 작가"가 되는 일은, "책" 안에 그만의 철학과 관점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비법을 많이 지니고 솜씨가 뛰어난 것만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점에 주목했습니다. 하 나는, 구리하라 하루미 씨가, 자신의 모친으로부터 전수 받은 요리법을 매우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남성이 요리에 몰두하기가 어려우니, 요리를 배운다면 양친 중에 아버지 아닌 어머니로부터가 자연스럽겠습니다. 나 자신의 존재 그 정체성이, 나 1대에서 평지돌출한 게 아니라, 연원이 있고 내력이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참된 자긍, 자기 존중감 형성에 큰 도움이 됩니다. 어머니(설사 아버지라고 해도)에게 배운 요리법이 있고, 주관적으로건 객관적으로건 세상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비법이라면, 이것을 현재 시행하고, 앞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맛잇는 요리를 타인에게 제공하는 건 분명 "베풂"입니다) 주는 일은, 내가 세상에 무엇인가 긍정적인 걸 만들어 공헌한다는 점에서, 정말 뿌듯한 일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어머니(그 어머니 역시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배웠을)에게서 배워 만들 줄 안다는, 그 사실로부터 비롯한 자신감은 누구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갑니다.


다 른 하나는, 어머니에게 배우거나, 스스로 개발. 발전시킨 요리법이, 내가 속한 문화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음식을 이런 식으로 해 먹고 산다는 게, 그 문화권의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지에 대해, 구리하라 하루미 씨는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고 토로한 점입니다. 그녀는 외국에 나가서, 그 다채롭고 진기한 각종 요리법을 접하고 나서야, 자신이 지닌 요리법의 문화적 의의를 깨달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일본인들은 이런 걸 재료로 써서, 이런 방식으로 해먹고 산다." 를, 그녀는 귀국한 뒤에도 줄곧 곱씹게 되더라는 거죠. 요리는 이런 의미에서.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했나 봅니다. 일본의 먹거리 문화와 우리의 그것은, 물론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만 비슷한 점도 아주 많습니다. 구리하라 하루미 씨는 "다양한 식자재를 상비하고, 한 가지 주제로 식단을 다 채우지 않는 다양성"을 일본적 특징의 하나로 꼽고 있는데, 이 점 만큼은 우리도 상당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역시 장류, 김치류, 젓갈류를 상비하면서, 한 끼니에 정말 많은 반찬을 제공하는 게 기본입니다. 


이 책의 장점은, 큰 판형에 선명한 사진, 그리고 모두 67종의 독립 아이템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책 후 반에 나온 토마토, 양배추 파트 중 몇 가지 역시 "그것만으로 메뉴가 된다"는 점에서 저는 67종에 세어 넣었고, 다만 책 맨 앞에 나온 7종은 소스와 드레싱이라는 점에서 계산에서는 제외했습니다(그러나 소스와 드레싱의 레시피는 다른 독립 요리에의 기여, 완성에 엄청 중요하다는 점이야 강조할 필요도 없겠죠). 요리 하나당 보통 크고 선명한 사진이 일일이 첨부되어 있고, 레시피가 그리 길지도 않아서 저 같은 초보자가 따라하는 데에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치킨 가라아게

월드컵 시즌이다 보니 (예전 같지는 않아도) 밤 늦게 치킨 같은 걸 시켜 먹기도 하는 요즘이죠. 닭고기를 튀겨 먹는 건 다 거기서 거기지 싶어도, 일본식은 간장, 마늘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서양식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 방법을 채용하여 개발한 메뉴가 모 프랜차이즈에서 큰 인기를 끈 것도 유명하죠. 제가 튀김 요리를 해 볼때마다 느끼는 건데, 튀김의 성패는 정말 기름의 어느 온도에서 담그어, 어느 시점에서 빼느냐입니다. 구리하라 하루미 씨는 이 메뉴의 경우 180℃를 제시합니다. 마요네즈와 함께 하루미 씨가 권유하는 건 시치미 도가라시입니다. 우리는 임시방편으로 고춧가루 같은 걸로 대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두부 스테이크

저자가 이 책에서 한 챕터에 걸쳐 소개하는 요리 중에, 두부를 이용한 코스가 많습니다. 저자는 "외국에 가 가 봐도, 일본인처럼 두부를 즐겨 먹는 민족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만, 아마 저자는 한국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은 듯합니다. 한국인처럼 두부를 즐겨 먹는 이들도 없는데 말이죠. 이 요리는 간장 소스를 어떻게 잘 만드느냐가 중요하더군요. 특히, 불을 다 끈 후에 다시마를 넣어야 하고, 이걸 냉장고에 다시 넣어 보관을 한 뒤에 적용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습니다(그러나 맛을 내기 위해서라면...) 이건 물론 드레싱이고, 이 요리의 본체는 "두부를 팬에 구운 것"입니다. 이 요리 뿐 아니라, 아주 자주 쓰이는 게 "미린"입니다. pp19~39에서 소개된 다양한 재료를 어느 정도 미리 다 갖추어야만, 개별 메뉴를 따라해 보는 데에 무리가 안 생깁니다.

하여튼 이런 설명에서, 흔한 와사비 하나도 그냥 볼 게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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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패키지 - 성공의 세 가지 유전자
에이미 추아.제드 러벤펠드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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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 구나 한 번 사는 세상에서 남 보란 듯이 거두고 싶은 것이 성공이지만, 막상 현실이라는 게임의 복잡한 룰 앞에 서면 어디서부터 수(手)를 두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지름길만 찾아 가는 방법을 부모님한테서 전수받기라도 했는지, 남들이 몇 번 겪는 시행착오도 겪지 않은 채 낙하 물체가 중력의 법칙을 따르듯 고비고비 잘만 최단거리를 골라 잡습니다. 과연 성공의 유전자나, 그 특별한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것의 주체가 "개인"으로 설정되어 있는 이상, 아마 근미래에는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런데, 기준이 되는 카테고리를 특정 인종, 특정 문화가 지배하는 그룹으로 잡았을 때, 유난히 성공자의 비율이 더 놓게 나타나는 결과를 목격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룹은 본디 주류 집단, 지배 계층으로부터 천시되던 이들이기도 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먼 중세부터 유럽 도시 공동체에서 활동하기 위해 신체에 특별한 표징을 패용하고 다녀야 했고, 중국인 이민자들이 골드 러시를 계기로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 왔을 때 그들에게 주어졌던 일감이란 쿨리[苦力]의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조지프 스미스가 선지자의 계명을 받았다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다녔을 때, 그에게 돌아온 대접은 타르와 깃털을 알몸에 바르고 조리돌림당하는 극한의 치욕과 고통, 그리고 이은 죽음 뿐이었죠.

남 들보다 나은 위치에서 출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핸디캡을 안고 레이스를 맞이해야 한다면, 게임은 시작하기도 전에 그 결과가 반 이상 결정되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목격하듯이, 이들 마이너리티 클래스에서 도리어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성공자 표본 비율이 발견됩니다. 상식이 예견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이 결과를 보고 질려 버린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은 성공을 위한 특별한 유전자를 물려 받기라도 하기에, 불리한 상황을 딛고 저처럼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펼칠 수 있나 보다."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나 같으면 도저히 저렇게 못하겠다 싶으니, 어떤 결정론적 인자가 인과 과정에 개입하기라도 하는 양 결론을 내리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죠.

이런 논의는 일단 수면 위로 구체적인 논박이 오갈수록 분위기가 나빠집니다. 어떤 사람, 혹은 민족, 종교집단의 정신적 자질이, 나를 포함한 평균보다 특별히 낫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대단히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맨 위에 적은 대로, 그냥 어떤 집안이나 특정한 개인이, 머리가 대단히 좋고 정신적 자질(근면성, 인내심)이 뛰어난가 보다 여기는 건 차라리 거부감이 덜합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천대받던 집단에, 알고 보니 우월 요소가 몰려 있더라는 결론은, 진정 집단 분노를 유발하기에나 딱 좋은 "떡밥"입니다. 이런 "인지 부조화"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요? 누구누구들이 잘 나간다는 건 이미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이니 말이죠.


셀 러브리티 커플로 유명한 제드 러벤펠드(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하시겠지만, 실존 인물 융을 빗대어 캐릭터 영거를 등장시킨,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프로이트 박사가 나오던 미스테리 팩션물 <살인의 해석>을 지은 바로 그 사람입니다)와 에이미 추아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서 광범위한 실증적 분석을 행하고 이번에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그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이네들이 성공하는 건 과연 특별한 무엇인가가 개입해서였을까?"


이 부부의 저작이라고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부인 추아 여사(그녀도 남편처럼, 본디 저술가로 시작한 경력이 아니라 예일에서 교육 받은 법학자죠)의 내러티브가 더 강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렇다고 레벤펠드의 기여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부인이 중국계이고, 자신은 폴란드계 이민자의 후손이며, 학창 시절부터 주변으로부터의 왕따 취급을 감수하고 무진장 노력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이런 책을 한번은 저술하고 싶은 충동이 평생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나올 책이 나오고야 말았다."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사 실 이런 책은 내용의 결론만 요약하는 일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과연 그럴 만한 결론이 적정한 노력과 연구, 검증을 거쳐 도출되었는지, 꼼꼼한 독자는 저자가 펼친 모든 논의 과정을 다 검토한 후에 그 저자가 내린 결론의 당부를 판단해야 하죠. 하지만 이 책은, 그 살벌한 경쟁의 파고를 뚫고 - 더군다나 소수인종, 소수파 출신이라는 불리한 초기조건까지 딛고 - 성공을 이뤄 낸 이들의 사연이, 제법 두툼한 볼륨 가득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더군다나 Heroic Horatio 같은 가공의 스토리가 아닌, 실제 이야기가 뿜어 내는 감동이 있기 때문에), 과연 나올 만한 결론이 나왔는지 눈에 불을 켜고 꼬투리를 잡는 피곤함이 없더군요.


과정을 훑는 일도 재미있었지만, 이 커플이 내놓은 결론이 더 그럴싸합니다. 이 책 제목을 보십시오. <트리플 패키지>... 솔직히, 딱 봤을 때 하나도 진지한 기대가 안 되었습니다. 저런 속되고 경박한 제목에 무슨 진리가 숨어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과정도 진지하고 밀도 높았지만, 이런 결론을 용케 추려 내는 것도 쉽지 않았겠구나 싶더군요. 굳이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SUPERIORITY COMPLEX

긴 설명이 필요 없죠. 주의해야 할 건, "컴플렉스"란 여기서 (우리가 흔히 착각하듯) 열등감만으로 이뤄진 심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이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열등감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우월감만으로 가득하다면, 그 역시 노력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내면에서 길항 작용을 이루며 결합하고 있어야, 본연의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죠.


INSECURITY

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기보다, "잘해야 하는데.. 뭔가 보여줘야 하는데..." 같은 긴장감과 비슷한 함미입니다. 이런 심리적 요소가 없으면, 그 사람은 발전에의 유인을 찾지 못하고, 일상에서 성공을 위한 바른 습관을 들일 수가 없습니다.


IMPULSE CONTROL

이런 복합적인 충동은 물론 성공을 위한 좋은 추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그 사람의 내면에 불안 요소만 남기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충동의 조절이 필요하고, 이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절제와 균형감각과도 상통하는 문제입니다.


소수 인종, 마이너리티가 출세했다는 공통점을 가지면서, 이 저자들이 다루지 않은 예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 지금까지도 소수 종파로 많은 불이익을 당하는 시크 교도라든가, 반대로 소수파의 불리함을 딛고 부단한 노력 끝에 이제는 엄연히 사회의 지배 엘리트로 자리잡은 자이나 교 신자들이라거나 하는 예가 그것입니다. 이 러벤펠드, 추아 커플이 제시한 사례와 그 결론의 프레임을 거기에도 대입해 보면, 고스란히 잘 들어맞는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저자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적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교훈을 도출하기까지 합니다. 바,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 "트리플 패키지"를 동력으로 삼아 오늘날 세계 패권국의 자리에 섰다는 명제입니다.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원주민의 희생, 집단 살상, 그를 바탕으로 한 자원의 착취 등에 기반한 면 크기 때문에, 이런 결론까지를 아무 무리 없이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예컨대 manifest destiny 같은 제국주의 정당화 논리를 펴는 게 아니라, 그 중에 내포된 겸손, 근면, 자기 절제, 초심으로 돌아가기 같은 미덕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굳이 거부감을 느낄 것까지는 없겠습니다. 간만에 좋은 책 한 권 잘 읽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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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는 집은 아빠가 다르다 - 대한민국 30만 부모들이 열광한 구근회의 아빠 바로세우기 프로젝트
구근회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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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선수범이라는 말이 있죠.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뜻인 줄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격언이나 가르침도 그렇지만, 말은 쉬운데 행동이 어렵습니다. 아빠 노릇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할지 막막해하는 분들이 많죠. 그렇다면, 자녀 교육이나 자신의 인생이나 타에 모범이 될 만한 분이 펴는 주장과 설득이라야 큰 감흥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구근회 선생은 "공교육 전도사"로 유명합니다. 교육이 이 나라를 망치는 제 일순위 주범이 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자격도 없는 자가, 세금 한 푼 안 내고 달콤한 말로 아이들과 부모들을 현혹하지만, 머리에 든 지식이나 소양, 인품은 0점에 가까운 모습을 흔히 봅니다. 자신이 모범이 되어야 남을 이끌 자격이 생길 텐데, 아무 요건을 갖추지 못한 자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드니 그 배운 제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 선생은, 입시 교육에 대한 제도적 비판 외에도 이 점을 강조하며 그간 소신을 펼친 바 있는 존경스러운 분이죠. 그 자신 역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삶으로 옮긴 분이니까요.


이 책에서 여러 번 소개된, 블랜차드 박사의 미국 소재 연구소 모습입니다,



이번에 그가 내놓은 책은, 말하자면 "바른 아빠되기"를 설파하는 내용입니다. "아빠는 누구나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노릇하기란 창으로 어렵다."가 그 핵심입니다. 아이에게는 물론,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적으로 돌보고 보호하는 어머니의 역할이 가장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딸마저도, 바른 자존감을 갖고 절제하는 행동 원칙으로, 자기 주도적 삶(꼭 공부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인생 전반에 두루 통하는 것입니다)을 살아가는 당당한 성인이 되려면,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과 거에는 농경 사회가 가정의 기본적 패턴을 결정하는 구조라서,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 증조부, 그리고 백숙부까지 한 지붕에서 사는 일이 많았다고 하죠. 이런 환경에서는, 원칙적으로 아이는 아버지의 모범과 본을 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겠죠. 물론 가부장적인 낡은 봉건 이데올로기, 성차별적 행태 강요 등은 폐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벗어 나 2차 집단에 속해서도, 리더십을 보이고 주변을 챙기며 어른스러운 행동으로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버지, 할아버지에게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이들이 많더군요. 아버지의 결핍을 느끼고 자란 이나, 아버지와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자란사람은, 회사나 학교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꼭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람들도, 엄마의 사랑만큼은 넉넉히 받고 자란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사랑이 부족하면, 그 사람은 "큰 그릇"이 되기에는 뭔가 결여된 기량이 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을 주고 가까이 곁에 있어 주는 아버지가 될까? 요즘 세계적으로 단연 화두가 되는 게 바로 friendy입니다.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 주는 아빠! 사실 요즘 아이들은, 엄하고 어려운 아버지를, 지난 세대에서조차 구경할 일이 없기 때문에, "프렌디 스타일"을 과연 고마워할지 의문입니다만, 여튼 대세는 그것이라고 하네요. 우리 나라에서는, "프렌디'라고만 하면 "프렌드"와 바로 식별이 안 되어서, "프랜대디"라고 말을 좀 더 붙여 부르는 모습도 자주 봅니다. 사실, "프렌디 스타일"은 이미 한국 사회(특히 도시라면)에서는, 이미 자리잡은 지 오래입니다. 어느 아빠가 요즘 아이를 엄하게 가르치고 매를 들겠습니까. 어떤 때 보면 엄마보다 더 싸고도는 게 한국의 아빠들입니다. 프렌디 지향으로 아빠 할 일을 다한다면, 한국의 아빠들은 걱정 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교육학 서적에서 블랜차드와 빌러의 논문은 매우 인용이 잦습니다. (예시)



자 그런데 구 소장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요. 전 이 점에서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아빠와 아버지는 다르다"는 말에서 벌써 눈치가 오기도 했지만, 구 소장은 "프렌디 만으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독자에 경종을 울리고 있네요. 대세에 어긋난다는 게 말은 쉬워도, 이를 주변에 설파한다는 건 예사 각오로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구 소장은. 과감하게도 (어떤 면에서는) 다소 전통적인, 절제 있는 엄한 아버지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 그의 지난 행보를 보면 새삼스러운 말은 아닙니다. <십대의 반란, 가정교육이 답이다>에서 이미 그는 엄격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인생의 좌표가 되어 주는 아버지상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구 소장 본인은 그럼 자신의 가정에서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뭐랄까 상궤를 다소 벗어나는 그 예화에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TV 보는 시간을 줄이고 운동에 전념하게 한다는가 하는 모습은, 그렇게 드물지는 않습니다. <부모 vs 학부모>에도, 그저 축구 하는 시간을 확 늘려 준 (대신 TV는 못 보게 한) 어느 가정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아이는 보란 듯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죠. 운동이 학생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우리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건 어느 정도 공감대가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서 구 소장님의 파격적인 행보는 그에 그치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안 사주는 부모는 거의 없는데, 구 소장은 사용요금을 (이제 중학생인) 아이게 스스로 낼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별 망설임 없이, "지불하는 돈에 비해 효용이 크지 않고, 꾀하려는 효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거둘 수 있다."고 대답했다는군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그냥 애늙은이 같은 소리가 아니라, 자기 인생은 자기 스스로 세부적인 데까지 설계해 간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아빠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효용-비용을 따져 보니, 스마트폰 그거 별 쓸모 없다는 이성적 결론에 스 스로 도달한 거죠. 이런 아이가, "지금 학업에 몰두하면 나의 장래에 매우 유리하겠군." 같은 결론이라고 스스로 내리지 말라는 법 있겠습니까? 내가 필요해서 내가 하겠다는 데, 그걸 누가 말리겠으며, 타인의 보조와 부추김을 받아 하는 공부보다 얼마나 큰 탄력을 받겠습니까? 세상에 자기 주도만큼 생산 효율을 내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엄격하기만 한 게 "구근회식 아버지 되기"가 아닙니다, 그는 베갯머리에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어 주는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이 처럼, 어느 경우에 자상하고 어느 경우에 얼음처럼 냉정하며, 어느 경우에 불같이 단호해야 하는지 준별하는 게, 자기 주도로 제 인생을 이끌어나가는 아이를 키우는 첫걸음입니다. 특히 저는. 자기 전에 책을 같이 읽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독서가 무엇입니까. 아이에게, 생선을 먹여 주는 게 아니라 생선을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첫걸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가장 중요한 정신 성장의 발판을, 아빠가 직접 놓아 주는 아이, 그 아이는 사회에 나와서도, 타인에게 의지가 되고 가이드가 되는 리더 노릇을 하게 됩니다. 참 좋은 선배다, 상사다 싶은 분은, 가정을 방문해 보면 그런 느낌이 확연히 들더군요.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은, 결국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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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아마 기독교 신자라면 "열심당원"이라는 말에 익숙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서에서 "열심당원"이라면 12사도 중 한 명인 시몬을 이야기합니다. 이 "열심당원'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면 다소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열심당"이라는 단체는, (이 책에 잘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의 사후 몇 십 년 후에 비로소 생긴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살아 생전에 예수를 따르고 모신 제자가, 예수 사후에 생긴 단체의 구성원일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공식적인 단체 결성 이전에도, 그런 이념을 막연하게나마 공유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피 끓는 열정으로 의기투합했던 무리들은 아마 있었을 겁니다. 비단 고대의 팔레스타인이 아니라도, 역사의 격변기, 시대의 모순이 극에 달한 혼란스러운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면, 동과 서를 떠나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있는 것이, 젊은 혁명가들의 결사입니다. 이런 결사가 반드시 공식적인 절차를 밟기 전이라도, 문자 그대로의 동지(同志)란 보편적인 실체, 현상입니다. 따라서 "열심당원"이란 고유명사일 뿐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명사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글자 그대로 읽고 이해한다면, 구태여 시몬 한 명에게만 붙여진 칭호가, 그렇지 않은 나머지 11인의 사도에도 해당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열심당원이라면 이 "시몬" 한 사람에게 고유한 신분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의적 시각"입니다. "교의적 시각"에 의해 바라본 예수가 바로 "교의적 예수"입니다.


반면, 성경이라는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성경 외 다른 기록의 정확성, 신빙성에 의해 교차 검토를 행하거나, 보편 역사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기준을 적용하여, "비판적으로. 과학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을 "역사적 시각"이라고 하며,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를 "역사적 예수"라고 부릅니다. "교의적 예수"가 교파의 관점에 따라 다른 내용과 색채, 함의를 지니듯, "역사적 예수" 역시 논자에 따라 천차만별의 스토리를 지닙니다.




이제 이 책의 저자 레자 아슬란을 보십시오. "레자'란 이름은 페르시아계, 이란계에 흔합니다(우리는 지난 세기 팔레비 왕조의 이란에서 유독 레자라는 이름의 "샤"를 많이 접한 바도 있습니다). 그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이란 계 혈통이며, 몇 번의 개종을 거쳐 지금은 다시 무슬림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며, 다만 이란 이슬람 혁명의 기조와는 상충하는 가풍을 지닌 가문을 배경으로 둔 인사입니다. 학문적 커리어는 녹록지 않습니다. 자신이 학위를 마친 코스에서 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실력이며, 인문 분야의 여러 학위를 손에 넣고 있습니다. 재능도 열의도 비상한, 활기와 창의력으로 충만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정신적 배경을 가진 분이, 그리고 아직 학자로서는 다소 젊은 축으로 여겨지는 분이, 자신의 버전으로 "역사적 예수"를 논하겠다며 쓴 작품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슬람 신앙을 아직도 진지한 정신적 축으로 간직한 사람, 그리고 (비록 망명자의 혈통이지만) 현재 미국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적성 국가인 이란을 육적(肉的)인 조국으로 간직한 그가, 예수에 대해, 그것도 백인 기독교 신자들의 정통 주류와 크게 벗어나는 톤으로, "나만의 역사적 예수"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여기에 첨예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요. 특히 남부 보수 기독교 벨트를 애청자의 거대 셰어로 보유한 팍스 TV가, 이 분을 끌어들여 적대적이고 직설적인 인터뷰를 시도하고 그 결과가 전미(全美) 지역에 퍼져 나가자, 여론도 들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평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성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의 공격에 대응한 아슬란 박사의 손을 들어 주는 이가 많았습니다.

물론 그가 이 논쟁적인 책에서 펼친 역사적 예수론의 타당성은 또 별개의 논의를 거쳐야 합니다. 자, 여기까지 오도록 많은 우회적 논의를 거쳐야만 했지만, 다시 저 위에서 제가 말한 "열심당원"이란 개념을 떠올려 보죠. 열심당원이란, 기독교의 신조와 주의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폭력 혁명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행동파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당시 그런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하는 정도로 사도 시몬을 연상하는 정도지만, 이 저자 레자 아슬란은 그 단계를 훨씬 넘어, 12사도의 상당수, 나아가 예수 자신부터가 사실상의 젤롯, 열심당원이었다는 데까지 논의를 확장합니다! 그가 끌어 대는 논거도 다채롭습니다. 1세기 초 팔레스타인의 정세, 사회 분위기("변방의 구멍'이라는 멋진 표현을 보십시오),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숱한 기술들("성전 정화" 등)을, 대단히 설득력 있게, 소설식으로 재구성하면서, 그는 "불의를 보고 참지를 못하며" "뜻한 바는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열혈 혁명가 예수의 초상을 핍진하게 그려냅니다. 박력 있게 그려지는 건 예수 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 본문,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꾸려진 소설과 영화에서, 마치 무기력의 상징처럼 묘사되어 온 빌라도 총독까지, 저자 아슬란은 냉철하고 설득력 가득한 어조로 마치 새로운 사실주의 결정판 픽션을 하나 꾸려내듯, 1세기 초반의 근동 세계를 생생히 묘사합니다.

비판하는 이들은 단지 근본주의 진영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종래 "역사적 예수"를 그리느라 많은 수고와 열정을 바쳐 왔던 역사학자들도, 레자 아슬란의 시도에 대해 "학문적으로는 새로운 게 없음"을 지적합니다.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미덕이 있죠. 그것은, "읽다 보면 너무도 재미있고, 이 서사의 활력이 마치 역사적 신빙성을 대신이라도 하는 듯하다"는 공감입니다. 진실은 시간 여행의 기술이 발견되기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건, 예수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잡건 간에,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용납지 않은 그의 신념과 이상만은 불변이라는 점입니다. 이 결론은 어느 누구의 입과 귀를 통해서도, 이천 년이 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기적이라면, 신비라면, 바로 거기에 있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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