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 제너레이션 - 스마트 세대와 창조 지능
하워드 가드너 & 케이티 데이비스 지음, 이수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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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바일 시대입니다. 거리의 광고판이 제 효용을 잃을 만큼, 사람들은 길을 걸으면서도 작은 디바이스의 화면에 눈을 집중시킵니다. 이렇게 작은 세계에 주의를 집중하면, 사람들과는 점점 더 소외되어 자아의 고립을 촉진할 것 같은데, 꼭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SNS는 웹 시절부터 있던 것이지만, 모바일 시대를 맞이하여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 화면에 고개를 묻고 지내는 세대는, 이전 세대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던 의미에서 "소셜"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나이든 이들은 과연 이것이 "소셜"인지 아닌지도 의아해합니다. 분명한 건 이 트렌드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고, 이 트렌드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버드 대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는 이런 "또하나의 신세대"를 가리켜 "앱 제너레이션"이라고 명명합니다. 어느 데케이드의 10대들도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지 않고 자라는 일이 없으니,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변화가 빠르긴 한가 봅니다. 어느 미래 세대도, 그 앞 세대를 닮지 않고, 새로운 개성을 키워 나간다는 점은, 좀 과장하자면 진화를 촉진하는 건전한 움직임입니다. 뿌듯한 일이고 장려할 만한 현상입니다. 지금까지의 무슨무슨 세대에 대해서는, 다소의 (부작용처럼 언제나 끼어 들기는 했으나) 우려를 깨끗이 불식할 만큼, 찬양과 기대가 주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새로이 "발견"한, 이 "앱 제너레이션'은, 그런 장밋빛 전망과는 상당히 큰 폭의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단 이런 추세가 아무 제동 장치 없이 전행되는 사태에 대해, 적신호를 울리고 있습니다. 사실, 앱(여기에는 물론 SNS 미디어 뿐 아니라 게임 등 모든 애플리케이션 환경이 다 포함됩니다)의 매커니즘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학부모들과 전문가들이 일찍부터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가드너 교수의 주장이 갖는 차별점이라면, 이런 모바일 중독을 전체 세대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 포괄적, 사회학적 접근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이겠습니다.

 

앱은 TV의 부작용과는 또 다릅니다. TV가 투영하는 세상은, 실제의 세계와 아주 차별화한 별천지만은 아닙니다(그런 것도 일부 있지만요). 시청자가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어느 정도 잘 기능하는 필터를 통해 자신에 해롭지 않은 부지런한 해석을 거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반면 모바일의 앱은 개인과 완전히 밀착한 소통 방식입니다. 어느 것이 자아이고 외계이며, 진정한 실재와 모바일이 구현한 버츄얼이 무엇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앱의 논리는 현실과 대단히 동떨어져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SNS에는 아이가 만나고 접촉하며 때로 적대하는 실재 인물들이 다 구현되고 활동하고도 있기 때문에, "이것이 현실이 아니며 왜곡과 오해가 끼어 들 수 있다"는 최소한의 경계심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성질 때문에, 가드너 교수는 "앱이 아이들 창의력을 망칠 수 있다"며 강력히 경고합니다. 이것은 인터넷이나 게임이 끼친다고 경고받던 여러 위험과는 또 차원을 달리하는 경지입니다. 앱은 모바일 디바이스를 통해, 아직 인격과 성숙한 감성이 채 형성되지 않은 아이에게 총체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동할 때도 언제나 몸에 휴대하는 기기가 지속적으로 발휘하는 여러 압력이란, 이전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가드너 교수는 과거로의 회귀만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도 이 트렌드가,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흐름임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앱 제너레이션, 앱 에이지의 밝고 희망찬 면도 넉넉히 지적할 줄 압니다. 도구가 늘어나면, 같은 창의성도 움츠려듦 없이 더 마음껏 나래를 펴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구글이라는 놀라운 검색 엔진이 제공하는 무한에 가까운 리소스는, 기존의 창의성을 다른 레벨로 도약시켜 줄 수 있습니다. 이는 이전 그 어떤 천재도 누리지 못 했던, 앱 세대만의 특권이자 비장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온라인은 집단 따돌림, bullying도 존재하지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광폭의 소통과 실시간의 동시간 의사 교환이 가능합니다. 이는 도전인 동시에 기회의 새로운 창출입니다.

 

중요한 건 부모의 올바른 양식과 사회의 건전한 관심입니다. 앱은 사실 위협이나 도전이라기보다, 이전 그 어느 부모나 자식 세대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도래입니다. 이런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고, 그 응전을 효과적으로 이뤄 왔기에 오늘의 번영하는 인류가 생존해 있는 것입니다. 가드너 교수가 주장하는 건, "이대로는 아이들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창의적인 기업이 미증유의 환경을 조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다면, 일찍이 없던 정신과 영혼의 성장과 진화, 그리고 소통과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이 "앱 제너레이션" 앞에 제시된 분명한 옵션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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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주고 슈퍼팬에게 팔아라 - 열성팬을 만드는 프리 마케팅 전략
니콜라스 로벨 지음, 권오열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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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건을 그냥 주라는 게 무슨 말일까요? 경제활동은 거저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설사 내가 길에서 주은 물건이라고 해도, 얼굴도 모르는 남에게 그냥 주라면 마음이 내키지 않겠습니다. 애써 내 노력을 투입해서 만든 물건을 일단 공짜로 주고 시작하라? 무리입니다. 잉여의 자원과 노동만 소비한 산물이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반대합니다.

 

저는 이 저자 로벨의 주장을, 다른 매체에서 전에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가 하는 말 중에 특색 있는 논거 몇만 추리고, 나머지는 귓등으로 흘렸던 기억입니다. 이번에 그의 주장이 이처럼 강력하게 보강되고, 불륨도 늘려서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것을 보고, "대체 이렇게 대담한 주장을 하는 배경이 뭘까? 내가 채 깨닫지 못한 무엇이 확실히 더 있었단 말인가?"하는 의문을 품고 책을 사서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가격이란 합리성을 본질로 합니다. 독과점 시장이 아니라 (우리 자본주의의 영원한 샹그릴라인) 완전경쟁시장이라면, 이에서 형성된 가격은 누구에게도 치우친 이익을 주지 않는 공평한 배분 기제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두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는데, 이에는 "신의 섭리" 같은 걸 상정하고 표현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가격은 누구보다 공정한 심판이며,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무익하고 반사회적입니다. 아니, 이런 전지전능한 신, "가격"의 존재를, 처음부터 무시하고, 시장에 공짜로 나눠 주라니, 이는 부질없는 자살행위인데다, 신성 모독까지 겸한 패착이 아닐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출발점은 이렇습니다. "소비자, 대중이 합리적이지 않다. 최소한, 합리적인 인간이 소비자 대중의 다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판매자, 공급자, 기억 역시, 그에 대한 대응을 해야 한다." 로벨은 예의 그 충격적인 해법을 또다시 내어 놓습니다. "다양한 가격의 상품을 제시하라. 일부는 공짜로 줘 버려라."

 

경제학 이론의 기본은, "독점적 경쟁 시장에서 공급자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프라이스 세팅의 자유가 있다"는 거죠. 이를 위해서는 일단 어느 정도의 제품 차별화가 필요합니다. 제품이 만약 차별화되지 않았다면, 마케팅을 통한 브랜드 이미지의 차별화라도 필요합니다. 어느 쪽이건, 일단 생산자는 그런 바람직한 결과물 형성에 정직하고 가치 있는 노력과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어떤 차원에서건 최소한의 정당성은 확보됩니다.

 

다시 경제학 교과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시장의 신은 가격입니다.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량은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진리입니다. 그런데, 조지 오웰의 어느 명언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한 법이죠. 수요곡선은 어느 국면에서나 우하향하지만, 국면에 따라 더 가파르게 우하향하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를 치고 들어가라는 게 로벨의 주장입니다.

 

어느 구석이 그처럼이나 "불공평하게" 가파른 우하향일까요? 1원에서 0원으로 넘어가는 문턱, threshold입니다. 이 경계선은, 이 공간과 저 공간의 질(質)을 가르는 파티션입니다. 1원까지만 해도 무덤덤하던 이들이, 0원이란 표식을 보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듭니다. 이 상품은 이제 모색, "간보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손에 잡아 채어야 하는 쟁취의 타깃입니다. 왜? 공짜니까요. 내가 아무런 예산 제약 걱정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고, 그를 획득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 지 머리를 굴릴 필요와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공짜는 이처럼, 비이성적인 열광의 대상입니다.

 

비이성적인 열광은 이 공짜 진영의 반대편에 또 하나가 그 방향만 달리하여 자리합니다. 바로 "팬'입니다. 이들은 그저 브랜드와 제품에 충성도가 강한 이들이 아닙니다. 그 브랜드를 지지하는 "슈퍼팬"입니다. 이들은 해당 제품을 향해 자신의 그 무엇이라도 던질 용의가 있습니다. 로벨의 주장은, 비이성이라는 전략적 공백이 자리하는 그 지점을 향해, 기업들과 생산자는 전력 투구를 해야 한다는 요지입니다. 지금은 기업들이 머리를 짜내고 짜내어, 창조적 혁신을 넘어 파괴적 혁신까지 그 아이템과 ㄹ리스트가 소진되다시피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경제학 이론에 사실 다 나온 진리, 그의 배리에이션을 전제로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시장이 분리되어 있으면, 가격은 얼마든지 차별적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해 팬이냐 아니냐로 애티튜드가 나뉘는 것은, 단기간 안에 쉬이 변할 성질이 아니기도 합니다. 슈퍼팬 시장은 가격을 높이 책정하고, 레드 오션의 무차별한 지옥에서는 그대로 던져 주는 편이, 장기적 전략에서 유리할 수 있다,. 점유율은 그 자체로 강력한 기업 자산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는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이에는, 종전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강력한 외부 환경이 또 하나 존재합니다. 바로 3D 프린터의 등장입니다. 우리는 만인이 셀러가 되는 시대를 넘어, 이제 만인이 메이커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런 경쟁의 풍토 속에, 기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쉐어는 거의 0에 수렴합니다. 이 판국에, 점유율이 단 0.01%라도 상승한다면, 그건 거의 기적 같은 그린 라이트가 아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다만 경제 외적인 이슈, 도의적인 갈등이 남아 있긴 합니다. 그저 낮은 가격, 높은 효용만을 위해 들개처럼 달려가는 대중에게는 공짜라는 선물을 안겨 주고, 나에게 가장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슈퍼팬에게 대가를 챙기는 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아니냐는 지극히 인간적인 회오가 한 줌 밀려오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책에 실린 레이디가가의 전략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점유율을 높이고 돌고 돌아 내 주머니에 들어 온 수익은, 결국 슈퍼팬의 충성도에 대한 대가로, 다른 데서 결코 구할 수 없는 혜택을 그 슈퍼팬들에게 대폭으로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슈퍼팬이라고 바보가 아닌데, "호갱 노릇"을 하려 들겠습니까? 결국 로벤의 세계에서, 생산자와 대중, 슈퍼팬은 모두가 win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종래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복하는 듯하지만, 알고 보니 우리 상식에서 벗어나는 바 하나도 없었다는 묘한 역설이 이뤄지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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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열한 가지 고독
리처드 예이츠 지음, 윤미성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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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이 잡식성이란 말은, 완전한 군집 생활도 독거 생활도 누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타당합니다. 인간은 타 생명체는 물론, 동족의 접근도 일정 거리를 넘어서면 불쾌해거나 불안해합니다. 도시는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다양한 출신 배경을 뒤로 하고, 보다 큰 사냥감을 노리고 보다 풍족한 생활을 위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사는 집에서 두 발짝만 나가도 서로 어깨가 맞부딪힙니다. 우연히 마주치는 적대어린 시선은 많지만, 다사롭고 공감을 담은 눈길은 적습니다. 인간이 흔하기에 자연이 더 그립고, 사람이 지겹기에 고독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고독도 지나치면, 바로 그 자신의 영혼을 좀먹습니다.

 

이 책에 실린 리처드 예이츠의 열 한 단편은, 사실 주제와 소재, 분위기 면에서 서로 닮은 면이 거의 없습니다. R. 예이츠의 꼼꼼하고 정확한 문장, 유머러스하면서도 우수가 가득 어린 어투, 그리고 정면으로 비추었건 측면으로 살짝만 갖다 대었건 배경으로서의 뉴욕이 여튼 나오긴 한다는 점에서 아슬아슬한 공약수를 가지고 있긴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열 한 편의 구슬을 하나로 꿰어주는 실이라면, 바로 "고독"이라는 키워드를 피하고서야 도무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고독"은 이 작품들의 최대공약수이자 궁극의 수렴점이기도 합니다.

 

 

잭-오-랜턴-박사

학교는 그저그런 출신 집안 애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한눈에 봐도 웬 불량스럽고 떠돌이 냄새 물씬 나는 애가 어느 날 전학을 옵니다. 구미의 배경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사범대 4년의 교육이 인간을 저렇게 바꿀 수 있을까 싶은 모범적인 교사(아니면 그저 천성일지도), 천사 같은 매너, 그리고 외모도 아름다울(?) 프라이스 선생은, 왕따 신세를 예약한 빈센트를 처음부터 배려하고 감싸려 듭니다. 그저 직업 정신의 발로일까요, 아님 타고난 영혼의 결이 그런 모습인 걸까요? 빈스는 그러나 성인인 프라이스 선생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보다는, 또래로부터의 시선에 더 큰 신경을 씁니다. 그는 최소한 동급생들만큼은 무결격의 자질을 갖추었기에, 프라이스 선생의 동정(그게 동정 이상이라고는 빈스 자신도 기대하지 않습니다)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권력자로부터 핍박 받는 동료들의 일원이자, 더 강한 정도로 억눌리는 그들의 영웅입니다. 아니면 그렇게 조작해 내어야 합니다. "선생의 자는 아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걸?" "오, 정말?" 찌질이에서 그는 순식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바로 하필 그 순간 전학생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한 결과(?)를 우연히 보게된 선생은, 빈스의 이 모든 연극을 바로 망쳐 버립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빈스의 위신은 바로 땅에 떨어지고, 소년은, 선생에 대한 나름의 관심 표현과, 또래 집단 내 신분 상승의 욕구 충족을, 더 대담한 "테러"를 통해 동시에 기도합니다. 결말은 나와 있지 않으나. 그는 짧은 순간의 영광과, 해당 시설로부터의 축출을 거의 같이 맛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여러 학교를 전전해 왔던 이유겠고, 이 작품의 속편(그런 게 있다면)은 전편의 무한 반복이 될 것입니다.

 

 

처벌광

도시인 대다수는 루저입니다. 다들 한껏 치장하고, 기 안 죽으려는 듯 대로를 활보하지만, 통장의 잔고와 암담한 내일의 전망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남기지 않고, 그 진실은 최소한 자신만은 알고 있습니다. 루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승부의 패배자라는 뜻입니다. 정해진 루저는 따라서 이번 승부의 결과 역시 전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점, 계산으로나 육감으로나 분명히 깨닫고 있습니다. 기왕 패배하는 것, 남보기에 구질구질하지 않게나 보이면 그나마 나은 선택이 아닐까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쿨하게 패배하는 사람이다!" 월터는 어려서부터 가장 멋지게 쓰러지는(죽는) 연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루저의 제왕입니다. 승리자보다 그는 빛나는, 장엄한, 쿨한 모습으로 죽고 패배할 줄 압니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잡고서도, 업무 능력은 거기서 거기지만 퇴직 시에 가장 태연하고 품위를 지킬 줄 아는 해고의 순간을 연출하는 것만큼은 이력이 났습니다. 그는 해고를 알리는 고용주 크로웰의 마음을 아주 가볍게 만들어 줄 줄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월터의 무능에 신물이 난 그가 재고용을 할 기대 따위는 객관적으로 전혀 가질 수 없고, 월터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동료들의 감탄을 받으며 그는 책상을 빼지만, 앞으로의 준비나 비전이란 전무합니다. 그의 마지막 명연기는 단 한 명 남은 팬 앞에서 우아하게 이뤄집니다. 이 작품에서 골계미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첫째 번역 과정에서의 스타일 휘발이고, 둘째로 약자(월터)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최대한 절제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어와 씨름하는 남자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생물이 있다. 상어, 그리고 상어에 먹히는 것들.

나는 다만 상어와 미친 듯 씨름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스스로 상어라고 생각할 만큼 과대망상자는 아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마다고 굳이 이곳저곳을, 더 낮아지는 대우를 감수해 가며 떠도는 이가 있습니다. 학력도 충분히 갖추지 못했는데, 내 이름이 나오는 기명 칼럼을 쓸 수 있어야 한다며 스타일도 기이한 문장을 써서 여기저기 "들이대는" 사람입니다. 딱히 불성실하고 무능한 위인도 아니라서, 그냥 배치받은 대로 하던 일만 잘 하면 대우도 곧잘 받을 터입니다. 다만 그는 스스로 평가하는 가치를 동료 뿐 아니라 상사까지도 고스란히 인정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에게는 돈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미혼이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독신이라면 무책임이 어느 정도 용인되지만, 기혼자라면 상당히 곤란한 태도입니다. "부인이 가만 계세요?" "아닌게아니라 나더러 미친..."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또다시 해직된 그에게 혹시 쓸모 있을까 해서, 좀 위신이 떨어지는 자리지만 소개를 해 주려 집에 전화를 겁니다. 그러나 돌아 온 답은....!

세상에는 상어와 씨름하는 남자 외에도, 그 남자를 계속해서....하는 제 4의 생물이 있었다죠.

 

 

B.A.R.맨

태어나서 군대처럼 체질에 맞고 안락한 곳은 겪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거기서 말뚝을 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히틀러처럼 세상을 지옥으로 몰아넣거나, 아니면 이 작품의 주인공 팰런처럼 될 것입니다.

히틀러도 그랬었고 이 팰런도 사회 부적응자입니다(게다가 성적[性的]인 좌절자이기도 하죠). 수입은 변변찮고, 동료들과의 호흡도 원만히 이루지 못합니다. 아내는 타자 능력이 뛰어나 다행히 남편보다 수입이 좋지만, 아내의 그런 점도 차라리 불만이고, 처녀 시절부터 삐쩍 곯아 내 스타일 아니다 싶었던 이 여자는 요즘 들어 부쩍 늙어 보이는데다 나쁜 자세로 인해 아직도 아이를 못 가집니다. 금요일은 친구, 토요일은 가족, 일요일은 휴시, 이런 패턴을 언제나 유지하던 팰런은, 아내가 금요일도 자신에게 할애하라며 바가지를 긁자 드디어 참고 참아 왓던 그 모든 불만과 좌절이 폭발해 버립니다. 이번 금요일에 그가 찾은 곳은 매번 들르건 동료들과의 그 주점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진짜 내 스타일인 여성"을 찾아 팔자에 없는 헌팅을 하러 나섭니다. R. 예이츠의 정치적 성향이 잘 드러나며, 그가 극우분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가 아주 해학적으로 표현된 작품입니다.

 

정말 좋은 재즈 피아노

카슨과 켄은 단짝 친구지만, 켄은 정확히 말해 친구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카슨은 가문, 외모, 지능, 교양, 취미의 세련도, 재산, 모든 면에서 켄을 능가합니다. 켄은 성격조차도 소심하며, 같은 명문대 출신이지만 공부건 사교건 모든 면에서 카슨에게 일일이 배우고 의존해야 했습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번엔 웬걸, 카슨 없이 프랑스 칸느에 홀로 남겨진 켄은 느닷 국제 전화를 걸어, 바에서 평소처럼 멋지게 한 잔 걸치고 있는 카슨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뭔가를 전합니다. 카슨은 프랑스로 날아오고, 평소의 켄 답지 않게 낥카로운 안목으로 발굴한 재즈 피아니스트 시드를 소개 받습니다. 재능이 재능이니만치 재력 있는 후원자를 빨리도 만난 시드, 역시 빠른 속도로 출세를 위해 자신의 예술 스타일과 자존심을 버린 시드를 두고, 카슨은 가장 쿨한 방법으로 좌중 앞에서 그를 모욕합니다(더불어 유력자로부터의 후원 전망도 어두워집니다). 켄 역시 시드의 "타락(매춘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영어의 prostitution 은 꼭 성매매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서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에 혐오감과 실망을 느꼈지만, 재능 있는 뮤지션의 활로를 잔인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막아버리는 카슨의 방식에는 격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R. 예이츠는, 이제 모파상, 체홉의 계승자가 더 이상 유럽 대륙이 아닌 북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타가 공인하게 만든 거장입니다. 작가로서 이처럼 다양한 시선과 소재를 통해, 도시인의 고독과 페이소스를 참신한 방법으로 독자에게 형상화한 예가 드뭅니다. 우리가 단편에서 얻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그는 선배들이 이뤄 놓은 그 모든 장점은 장점대로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과 천재성은 그것대로 뽐내고 있습니다. 그 "뽐냄"은 그러나 R. 예이츠 자신, 그리고 우리 도시인들의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사제 없는 고해성사이며 정직한 제 영혼과의 직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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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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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잡지에서 그런 연구 결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혹은 타인의 것이라도)를 들은 사람은, 보다 더 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험군과 대조군을 놓고 연구를 행한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실험 주제가 된 행위는, 담배 꽁초 함부로 버리지 않기, 교통 법규 잘 지키기 같은 것이었습니다만, 범위와 난이도를 확대해서 폭력, 낙태, 절도, 저작권 위반 같은 행위에 적용시켜도 왠지 같은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할까 악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쉬운 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현명하고, 때로는 가장 도덕적이기까지 했던 철학자들도 답을 내지 못했기에, 아마 후세에 들어서도 이 모호한 인식적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도 악한 행동, 혹은 예전의 실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결코 선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사실. 반대로, 생명의 근본이자 존재의 연원인 저 아득한 리듬에 새삼 접하게 된 후, 엄마 품에 안겨 자신의 (아직은 미약한) 생명력을 키워 나가던 그 시절을 희미하게나마 상기하는 사람이라면, 일시적으로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곧 본연의 좋은 마음을 회복하리라는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소설과 우연히 같이 읽게 된 다른 작품(<이웃의 아이를 죽이고...>)에도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영혼과 영혼은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때가 온다. 둘이 같은 출발에서 나왔다는 걸. 둘이 서로 너무도 닮아 있으며, 서로가 상대의 부족한 점을 완벽히 채워 주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인과 연이 서로 얽혀 현재의 모습,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현세의 형편과 신분, 겉모습과는 무관하게, 저 먼 피안이나 전생에서 틀림 없이 어떤 각별한 사이로 엮였었기에, 광막한 하늘 아래 천행으로 이처럼 둘이 만나, 아웅다웅 알콩달콩 귀한 시간을 특유의 교감으로 물들여가는 관계가 되었다는 걸, 막연하게마나 느낍니다. 때로는 이런 단편적인 느낌이 모이고 모여, 종교적인 교의를 생성하기도 합니다.

 

 

애정 깊은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건강한 아이가, 현세의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어떤 법칙, 섭리, 운명에 의해 한 순간 눈이 멀게 된다는 건, 정말 세상에 천도가 있는지 극히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하게도 합니다. 아무 죄 없는 아이가 극악의 불행에 빠지고, 불패천 불외지의 일탈자는 아무 탈 없이 한 세상 유복하게 마친다는 사실은, 얼핏 보아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게 다 공염불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저 죽으면 끝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람을 몰아 넣습니다. 인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자연계와 물리 현상, 각종의 환경 변수가 사람을 장난 하듯 몰아넣다 어느 순간 무작위로 나오는 랜덤의 노름패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눈이 먼 소년이, 아름답고 지체 높은(그러나 걸을 수가 없는)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심안으로 그녀의 존재와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는 그는, 우리가 보기에 불가능한, 그리고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에 눈에 멀다"는 표현을 흔히 씁니다만, 마음의 눈이 멀지 않았던 소년은 소녀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나와 상대, 그 존재의 꽃을 활짝 피웁니다. 저주로부터 가장 숭고한 축복이 나온 셈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다 알 길이 없지만, 뭔가 악한 자, 저열한 영혼의 상식과 구미에 맞지 않다 싶은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그를 원위치로 돌려 놓으려는 훼방꾼이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업보를 갚는 게 그리도 좋으면 제 자신이 제 신체를 훼손해서 갚든지 하면 될 것을, 굳이 눈먼 조카에게 강요하는 고모부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이 자의 책동으로 인해, 둘은 헤어지고, 소년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장에서 멀리 떨어진, 그 겨레가 사는 곳 중 가장 번성한 도시인 랭군(양곤- 역자가 일일이 원 텍스트를 교정해 놓았습니다- 안 해도 되는 걸)으로 옮아가게 됩니다.

 

 

도시란 전통적으로 악, 타락, 음행이 집결한 장소를 상징합니다. 우 소는 여기서 외세와 결탁하여 큰 부를 모은 걸로 소문이 파다합니다. 눈먼 소년은 막연하나마 불길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하고, 미밍과의 이별이라는 결과가 이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는 눈을 뜨게 되지만, 영혼의 반쪽과 헤어진 그의 운명은 더욱 큰 번뇌에 가득하게 됩니다. 수도원에 있을 무렵 스님이 들려 주신 말이 생각납니다.
"육안의 밝음은 진리와 실체를 꿰뚫어 보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인내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영혼의 깨침에서 비롯한 인내는, 시간 뿐 아니라 결국 공간까지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딸 줄리아는 이런 아버지, 어느 순간 갑자기 곁에서 사라진 아버지를 좇아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와서는, 현인 우 바와 어느 커피숍에서 "말도 안 되는" 전설을 듣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떨어지고, 아름다운 그녀는 자신의 초롱초롱한 두 눈이 미처 보지 못한던 것을 보게 됩니다. 산 속에서 사슴과 새를 맞이하는 옹달샘의 맑음처럼, 그저 착하고 선한 심삼만 가득한 이 장편을 읽으면서, 우리 역시 깨끗하고 티 없었던 초심을 회복하며, 괜히 눈 한번 비비고 감다 떠 보기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는 귀기울입니다. 나의 심장, 나의 가슴이 전하는 소리에. 우리가 그토록 오래 잊고 있었지만, 우리가 꿈 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엄마, 고향, 자연, 우주, 섭리의 부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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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림빌더로 거듭나라 - 꿈을 이루는 프로젝트
서상우 지음 / 가나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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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진짜 자계서는 우리의 이웃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그러나 그리 쉽게는 찾아지지 않는, 매 순간의 삶을 신나고 진지하며 열성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분이 써야, 평범한 독자(즉 우리들)에게 더 도움이 되고 공감을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 서상우님은, 중견 기업을 맨손으로 일으켰다든가, 고아나 마찬가지인 불우한 처지에서 그 모든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했다든가 하는 그런 자계서 저자가 아닙니다(저는 여태 자계서 여럿을 읽으면서 그런 저자의 책들도 꽤 많이 접했죠). 그런데, 다 읽고 나서 머리에 남는 생생한 이미지, 교훈, 그리고 나에 대한 실질적 자극, 동기부여로 따지자면, 이 책의 그것을 능가했던 경험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저자의 경력이란, 따지고 보면 PC방 사장, 길지 않은 음악감독 생활이 거의 전부입니다. 현재는 동기부여 강사, 그리고 이 책을 비롯 앞으로도 여러 권 쓰여질 책들의 저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들의 눈을 잡아채는 강렬함이 부족합니다. 분명히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고 나니. 분발해야겠다, 더 힘을 내어 매사에 임해야겠다, 같은 생각이 마구마구 납니다. 저자의 기(氣) 비슷한 것이 그처럼 강렬했나 봅니다.

 

저자 서상우님은 어려서 상당히 약골이셨나 봅니다. 그저 잔병치레가 많았다, 이 정도가 아니라, 손발이 곪아들어가고 몸의 운신을 전혀 할 수 없는, 생사의 기로에 선 중병 환자였다고 하네요. 성인이 되어서 그런 병마와 싸운다고 해도, 보통의 의지로 이겨내기가 상당히 곤란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강인한 의지와 꺾일 줄 모르는 낙관주의로, 거의 흔적도 없이 이 무서운 시련을 이겨 내었습니다.

 

저는 보통 자계서다, 수기,수필집이다 하는 책에서, 이런 난관을 극복하는 저자들(혹은 누구라도)이, 대체로 신앙의 힘을 빌려 이겨내었다는 식의 결론을 많이 접해 왔습니다. 그런 사연이라면 같은 신앙을 가진 독자에게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못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서상우님은, 그런 경우도 아니더군요. 이 책에서 팩트만 추려 보면, "나는 병상에서 꿈을 꿀 때 내가 완쾌되어 건강하게 뛰어 노는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내가 꿈을 깨고도, 그 꿈에서 받은 희망과 기운을 통해 완쾌에의 의지를 다졌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즉, 살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 마음 속에서 부정적인 연상, 기분을 철저히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 이 모두를 합쳐 그는 "꿈의 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를 생활화하여 일상과 직업 수행에서 철저히 관철해 나가는 실천적 노력가,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드림 빌더"입니다.

 

어찌 보면 세속적인 성취를 이루고, 돈을 벌고,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악화될 대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저자 역시 거의 죽을 뻔한 위독한 상태에서 살아남은 분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유독 말기암 따위의 불치병을 앓다 기적 같이 나은 분들의 사연이 많습니다. 한국인들이 그만큼 강인한 생존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겠으나, 암에 걸린(그리고 이분처럼 중병에 걸린) 한국인 환자들이 다 그렇게 살아남는 건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떼돈을 벌었다. 고위직에 올랐다 하는 분들보다, 이 저자처럼 (그것도 어린 나이에) 병 걸렸다가 나은 분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이런 기적 같은체험을 어린 나이에 겪었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무슨 일인들 못할까 하는 기대, 희망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죠.

 

거의 모든 자계서가 그렇지만, 일단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대전제로 삼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면 부정적인 것만 머리에 남고, 성과도 보잘것없는 것만 나올 뿐입니다. 저자는 거의 매 페이지, 매 장에서, "늘어지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기죽이는 말에 귀기울이지 말라."를 반복합니다. 자계서 저자, 동기부여 강사라면 으레 그래야 하겠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치 음성 지원이 되는 것처럼, 힘든 고비를 남다른 의지와 기백으로 넘긴 사람 특유의 강렬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다른 책에서 다 들은 이야기(저자는 출처와 인용 전거를 [각주 아닌] 본문에서 꼬박꼬박 밝히고 있습니다)인데, 참 진실하고 절실하게 들립니다.

 

10대 시절을 지독한 병마와 싸우느라 아깝게 허비한(물론 그의 영혼과 정신이 이를 통해 크게 배운 바 있기에, 헛되다고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만) 터라, 20대 시절의 그는 노느라 광란의 도가니에 빠진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여자친구도 여럿 갈아치우고, 폭주족마냥 과속하며 대로를 활보하고,... 그가 친구와 주고받았다는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마구 달리다 우리 죽으면 어떡하지?"

"그럼 우린 그것밖에 안 되는 녀석들인 게지 뭐."

마치 영화 <이지 라이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청춘은 본디 불꽃처럼 타오르다 한 순간에 꺼져도 후회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죠. 전쟁이 끝나고 절박한 위기가 종료되었을 때, 사람들은 격렬한 사랑의 행위에 몰두하는 것처럼, 저자 서상우씨는 그렇게 20대를 보냈나 봅니다.


만약 그의 20대가 이런 향락과 한풀이(?)로만 점철되었다면, 주관적으로는 해피한 시간을 보냈어도(책 여러 군데에서 암시받기로, 아마 그의 가정은 한국 중산층 평균 이상의 형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자계서의 저자가 될 자격(객관적)이라든가, 자계서를 쓸 만한 엄두, 배짱(주관적)이 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친구들과 매순간 후회없는 유흥을 즐기면서도,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발전이 있고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문득 가졌다고 합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사실 우연이 아니라, 그가 지독한 병마와 싸우고 난 뒤 그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강한, 그리고 건전한 삶의 의지입니다.

 

이 때의 그의 모습을 두고 친구 중 한 사람은

"요즘 너를 보면 무섭고도 놀랍다. 다른 사람의 모든 장점을 다 빨아들이려는 스폰지 같아."

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결과가 나오건 말건 관계 없이, 바로 이런, 성공을 위해 남의 장점은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자기 것으로 흡수하고자 하는 열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작은 가게 하나를 해도 꼭 성공하는 사람이 있고, 카세일즈를 해도 남보다 실적을 많이 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뚱한 자세로 1950년대 자유당 시절 공무원처럼 자기 가게 손님을 맞는 늙은 멍청이도 있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자기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인간이, 구멍가게 하나인들 올바로 운영할 리가 없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20대 중반까지 고향인 포항에서 줄곧 시간을 보낸 사람입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야 한다. 자라고 발전하고 변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사는 형님을 찾아 상담을 청했다고 합니다. 어느 가게에서 그를 마주한 형님은, 그의 구구한 설명을 다 듣더니, 별 말 없이 "과연 정말 네가 하고 싶은 일인지 다시 생각해 봐라."면서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형님의 말을 듣고 다시 내려온 그는, 서울에서의 생활 자금 등을 마련하느라 온갖 일을 하며 바삐 시간을 보냈고, 몇 달 후 다시 상경한 그를 보더니(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형님은 쾌히 서울 체류를 허락했다고 하는군요.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어렵사리 시작한 서울 생활이었지만, 음악 감독 일, 그리고 PC방 창업 등 여러 도전이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특히 PC방의 실패는 그에게 정말 큰 타격이었나 봅니다. 책의 여러 군데에서, 그는 이때의 체험을 진짜 쓰라린 어조로 술회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책을 보면, 이미 몇 번을 두고 한 이야기라서 독자가 다 아는데도 마치 처음 소개하는 투로 다시 말을 꺼내는 표현이 보입니다. 아마 시차를 두고 여러 강연을 하면서 그때그때의 원고, 메모를 한 책에 편집하면서 그렇게 된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교우 관계에 있어서도, 좀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는 스스럼없이 꺼냅니다. 과거에 잘 어울리고 잘 놀던 친구라도, 소위 "파장"이 안 맞으면 자연스럽게 멀어진다는 거죠. 나는 지금 성공하고 싶고 공부하고 싶고 돈 벌고 싶은데, 예전의 그 기분만 생각해서 자꾸 놀자, 만나자고 하면, 그게 다 기분에 거슬리고 결국은 멀어진다는 겁니다. 이거 실감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친구를 멀리하고 싶은 사람은, 괜히 미안해할 것 없고, 반대로 어느 친구가 자꾸 자신을 멀리하면, 이걸 섭섭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그 친구 입장에서 이해를 해 보라는 겁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위 "라이프 리듬"을 잘 간직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두 시간 놀아서 한번 리듬이 망가지면, 날린 시간은 두 시간이 아니라 이십 시간, 이백 시간 치에 달할 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이런 말은 듣기에야 평범하게 들려도, 그걸 몸으로 느껴 본 사람 아니면 공감 못 하죠.

 

그의 좌우명은 "急變人死, 不變人死"라고 합니다. 그런 말이 있는 게 아니라 저자 자신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급히 변하면 죽는다. 그러나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도 이미 죽은 사람이다." 환경을 끊임 없이 살피고,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생존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이런 말도 하는군요. "친구가 둘 있는데, 한 친구는 끊임 없이 자기를 계발하고 노력하던 친구이며, 지금 그는 최고 수준의 교수 밑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한다. 경제적으로 윤택하기 이루말할 수 없다. 다른 친구는 매사에 부정적인데, 어쩌다 서울에 올라와서 웬일이냐고 했더니 파업차 상경했다고 한다."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런 저자의 책도 우리는 가끔 읽어서, 지금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커 가고 있는지 그 측면도의 한 구석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 들었어요. 근거 없는 자신감처럼 꼴불견도 없지만, 매 순간순간 어제의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이런 자세는 아름답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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