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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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리처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라고 하네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과연 명불허전, 다들 리처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위인들입니다. 일기당천, 역전의 용사들입니다.


그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예전 찬란했던 그 팀 중 절반밖에 남지 않은 인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잭과 그 친구들은, 지금 매우 화가 나 있습니다........

 

 

우리의 잭 리처는 잘 알려진 대로, 엄청난 덩치를 한 거한입니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그 큰 체격에 걸맞은 엄청난 완력을 지닌 위인입니다. 덩치가 크다고 꼭 힘이 센  건 아니지만(즉, 피워가 보장되는 건 아니지만), 체격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더 강한 파괴력(주먹이든, 발길질이든, 혹은 그의 필살기인 박치기로든....)을 가질 가능성은 큽니다. 잭은 그러한 정상 범주(?)의 편차에 드는 사람입니다.

 

잭은  덩치가 크고, 완력이 초인적일 뿐 아니라, 위에 설명한 물리적, 수학적, 통계적 인과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꼭 자신과 관계된 사항이 아니라도), 사물의 질서, 그 중에서도 특히 물리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감각적인 이해 능력을 지녔고, 그런 운동에 대해 특별한 용어를 쓰지 않고도 남에게 이해를 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리학자는 아닙니다. 학자는커녕, 변변한 배움의 과정을 채 밟았지도 않아 보이는 인상입니다(실상은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엘리트 장교라죠). 설사 그의 인상이 서류상의 커리어와 일치한다 해도, 그에게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지구 끝에다 갖다 놓아도 살아올 만큼 생존력과 근성,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와 함께 놓인 다른 생물, 그리고 지구 끝에서 극한의 조건을 자랑하는 그 환경의 장래를 걱정하는 게 차라리 옳습니다.

 

그를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 일 없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못한 자들의 운명에 대해 괘념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를 귀찮게 했다면...? 답은 이 한 마디로 족합니다.

"그에게는 자비가 없다."

 

아무리 지상 최강의 용사였더라도, 전쟁과 트러블이 없이 제 나름의 질서에 의해 잘 돌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는 맥을 못 추릴 수 있습니다. 잭 리처가 딱 그 처지입니다. 소령 계급으로 군 복무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한 후 전역한 그는, 그 행색이나 눈빛(이건 원래부터 그랬을까요?)이나 심적 태도나 옷 차림새나 통장 잔고로 보나, 완전한 거지, 부랑자입니다. 사회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군에서조차 계급 무관하게 대장질만 하던 처지이니(이러니,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윗사람들이 곱게 보겠습니까?), 이윤 추구와 합리성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시계태엽장치과도 같은 사회에서 그가 설 땅은 입추의 공간도 마련되지 않습니다. 현재 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거지"입니다.

 

우리의 잭은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남(그게 아무리, 잭 자신의 가치에 비해 피라미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또 그게 얼마만큼의 근거를 가 지고나 있는지에 대해, 때로는 관찰자가 민망할 만큼 냉정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인격 수양이 되었다거나 남다른 교양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1%의 오차도 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객관을 스캔하여 정확한 결론을 도출하는, 기계에 가까운 두뇌,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 거울에 비춰진 자기 모습으로부터라도 달리 허튼, 혹은 편향된 결론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이 덩치는 물리적 조건만 좋은 게 아닙니다. 연산 능력과 판단력이 차라리 그 신체 능력의 상대 레벨을 상회한다고 봐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전의 용사들, 쟁쟁한 에이전트들 사이에서조차 그가 대장이었던 이유였습니다. 팀원들은, 국적, 인종, 성격, 피부색, 계급에 무관하게, 그를 존경하고, 마음으로부터 보스로 인정했습니다. 아 마 그가 도움을 요청했다면, 지구 끝에서라도 지구의 거죽을 마구 훼손해 가며 달려 왔을 그들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명제도 참값을 가집니다. 그와 생사 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 부하들을, 물정 모르는 어느 자가 감히 모욕했다? 그 자는 오늘부로, 외부 세계의 모든 소유물, 내적인 자부심, 그 외에 남은 무엇이 있다면 기꺼이 손에서 털어 내고, 지구의 다른 끝으로 도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 해도, 과연 그에게 남은 희망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팀에 있었던 여성 대원 두 명(그러니 이 여성들은 대체 어떤 능력의 소유자겠습니까?) 중 한 명이, 이런 잭에게 긴급한 호출 메시지를, 그와 그녀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보내 왔습니다. 잭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다운 정확한 상황 파악 능력으로, 바로 발신자가 누구인지, 나아가 지금 어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 냅니다. 전역한 후 의지할 데 없는 떠돌이가 된 지 오래지만, 그리고 예전같지 않은 육체적 능력, 그 감퇴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감지되는 그라지만(이것도 주관적 엄살입니다. 잭의 유일한 약점은 이처럼 엄살과 자기 연민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익숙하고도 심각한 상황의 예후는 누구보다 정확히 짚어낼 줄 압니다.

 

오랜 동료에게 들은 소식은에 그는 기가 막힙니다. 대원 절반이, 정체 모를 자에 의해 사냥 당하는 중이며,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된 채 발견되거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도 분노지만, 그 팀원들 중 한 사람에게도 아니고, 이처럼 모두를 향해 마수를 뻗을 수 있다니 대체 그 자의 정체가 무엇이며, 어떤 수완으로, 또 무슨 동기에서, 감행하는 일일까요? 

 

이 작은 잭 리처(그리고 그의 창조주 작가 리 차일드)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최상의 수준까지 만족시켜 주는 퍼펙트 액션 스릴러입니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인 리처는, 그의 장기인 수학적 감각을 십분 발휘하여, 사태의 진행 흔적 곳곳에 남아 있는 암호를 풀어 나갑니다. 그의 추론 능력은 대개 정확한 궤적을 그릴 뿐 아니라, "81은 자릿수를 더해도 여전히 제곱수" 같은, 그에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미신적 감각이나 집착마저 내비치는 컬러를 띱니다. 그는 제 주변의 사람들 성향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고 섬세합니다. "그는 숫자 지향이 아니라 문자 지향이지. 마일즈 데이비스와 쿠팩스를 좋아한 인간이었지." 그런데도 그가 시도하는 암호 입력은 다 틀립니다. 낭은 기회는 한 번이고, 이 시도가 실패하면 파일은 자동으로 파괴될 뿐 아니라, 그 작성자인 전우가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비밀을 영원한 암흑 속에 가두는 셈입니다. 과연 무슨 암호였을까요?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이후에 나온 BBC드라마 <셜록>이, 이 작품의 영향을 아주 깊이 받은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어요(어느 에피소드에서 USB 메모리 암호를 푸는 장면이 나오죠?).

 

스케일은 상당히 큽니다. 리처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애국심도 투철한 마초지만, 워싱턴의 책상물림들과 영혼 없는 정치인들을 누구보다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를 낀 사기 사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부를 만큼 무지하게 덩치가 큰 사연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최고 중의 최고들로만 뽑힌 팀 반이 죽어나간 것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소설은 여기서 액션 스릴러의 정해진 궤도를 넘어, 소위 POLITICAL EDGE라는 요소까지 포함하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운전을 잘은 못한다는 잭이지만, 그에게 실수가 있을 리 없고, 우리는 이 정신없는 롤러코스터의 궤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잭은 소설에서 세 번(마지막의 결정적 한 번은 스포일러 요소이니 제외합니다), 상대의 거짓말을 간파해 냅니다. 프란츠의 아내가 보인 사소한 행동(낯선 이들을 집에 들이며, 어린 아들을 시켰다)의 이상함에서 그 숨겨진 속내를 알아차리고, 방산업체 뉴에이지의 "교과서 여인"이 어느 대목에서 허위 진술을 늘어 놓았는지에 대해 정확히 그 허점을 짚으며, 다이애나 본드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들 때 도통 쉴 틈을 주지 않으며 논리적 FLAW를 잡고 몰아붙입니다. 세 번 다 그의 완승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잭 리처라고 해도, 등 뒤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리법칙이 확고히 지배하는 현실을 전혀 초월하지 않으면서도(혹은, 못하면서도) 전혀 의외의 결과를 결국은 (이 작에서 세 번이나) 빚어 냅니다. 逆轉의 용사이기도 한 셈이죠. 리 차일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런 순식간에 벌어지는 잭 리처의 육체적 동작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정확하게, 마치 슬로 모션으로 잡아 내듯 특유의 스타일로 독자에게 캐스트하고, 컬러 코멘테이트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한국 관련 코드가 세 번 나옵니다. 자수성가한 한국인 세탁소 주인(스테레오타입 인종 차별이란 오해를 막기 위해 짧지만 세심하게 뭔가로 배려하고 있습니다), 샘소나이트 가방(아마 이게 한국제인 줄 몰랐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대우(과거 한국의 방산 업체를 거느리기도 했었죠. 대재벌이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메이커의 권총이 그것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순간 놀라기도 하고, 뭔가 반갑기도 한 장치입니다.  

 

원제는 <Bad Luck and Trouble>입니다. 미국에서는 2007년에 발표되었고,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번역된 건 이처럼 다소 늦었습니다. 번 역자의 솜씨가 아주 매끄럽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아니, 어느 액션 영화가 이처럼 재미있게 제 스텝을 거침 없이 밟아 나갈 수 있었나요? 개인적으로 미스캐스팅이라고 여기는 2012년작 탐 크루즈 주연의 <잭 리처>는 이 서평에서 언급하지 않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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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을 보다 - 그리스.로마 신화보다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 성경을 보다
찰스 F. 켄트 지음, 장병걸 옮김, 우수호 감수 / 리베르스쿨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이 <신약성경을 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사실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일반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도 대단히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글자 한 자 한 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해석을 통해야 하는지가 너무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예 를 들면, 너무나도 쉽고 친절하게 쓰여진 이 책에서도,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표현을 두고 저자분이 고민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학교에서 지리, 과학 시간에 "지구가 둥글다"는 걸 배우는 어린 학생들은, "둥근 지구에 끝이 어디 있을까?'로 고민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교양과 신앙의 인식 사이에서 어린 독자들이 고민하지 않게, 이 책 p253에서 합리적이고 공평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무수히 많은 교파가 나뉘어 실재하는 것도, 이 해석을 놓고 어느 쪽을 따를 것이냐로 입장이 서로 다른 이유가 크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설사, 같은 입장을 유지하는 교파 안에서라고 해도, 구체적인 구절을 두고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의견이 일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독자(신도이든 아니든)들은, 성경도 텍스트인 이상 스스로 지니고 있는 내러티브, 스토리가 대체 뭔지 대강이라도 파악해야 하는데, 원전은 그런 접근조차 쉽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죠.


저자 찰스 켄트 박사의 백 년 전 고민은 두 가지였습니다. 1) 모근 기독교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 격 스토리라인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2) 그것을 어떻게, 어린 독자에게 쉽게 전달할 것인가.


켄트 박사의 접근은, 일단 "성경"이 아닌, "성경 이야기"를 아동 문학처럼 구성하여, 이야기로서의 "예수,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사연"을 구성해 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여기에다가, 중세 이후 유럽의 쟁쟁한 화가들이 남긴 불후의 걸작 중 신약 성경 관련 작품들을, 헤당되는 "장면"에 적절히 배치하여 이해를 돕는 것(그리고, 경우에 따라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것)을 그 편집 의도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고 그가 배출한 사도들이, 팩트상으로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에 대해 아주 쉽게 아웃라인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구요. 또.... 그런 목적이 꼭 아니라도, 이렇게나 유명한 화가들이 제작한 명작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습니다. 화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참 우리가 익히 아는 화가들이, 이런 그림도 남겼었구나 하는 걸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화가란 단지 붓과 물감, 캔버스를 다루는 테크닉이 대단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었어요. 종교를 떠나서, 이처럼 구상(具像)의 창조로 인간 영혼을 깨우고 감정의 가장 고상한 부분을 격동, 고양시키는 마법, 그것이 화가의 본분이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히로니뮈스 보스(히에로니무스 보슈)는 최근 우리 나라 독서인들에게 워낙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만 각인되어서(정통 미학서에서건 스릴러에서건), 지극히 평온하거나 그저 온건한 기적의 경이를 표현한 작품에서조차 뭔가 아주 살짝은 괴기스러움이 묻어 나옵니다. p43의 <가나의 혼인 잔치>를 보십시오. 한쪽 구석에서는 경사에 이은 기적(물이 포도주로 변함)을 맞이한 이 순간에서도, 뭔가 다음에 좌중을 어수선하게 할 트러블이 닥칠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지고, 다른 구석에서는 물동이에서 부대로 옮기는 남자의 표정이 그저 침착하기만 합니다. 세상은 본디 아우성과 정적이 공존하는 곳이고, 그 한가운데에 첫 기적을 행한 인자(人子)가 좌정(坐定)해 있습니다.




 

p145에 보스(보슈)의 그림이 또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입니다. 오른쪽 상단의 어느 구경꾼의 표정이란 너무도 사악하고 흉칙하여, 마치 이 순간 사탄이 그에게 들러 쓰이지 않았나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2003년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역시, 구경꾼 중에 자리한 악마의 얼굴을 장면에 꾸려 넣을 때, 이 보슈의 작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벌인 토론이 바로 그 천재성(?)을 잘 드러내는 일화죠. 성경 텍스트에는 한결같이 그 어린 지성(과 영성)의 완숙함에 감탄하는 모습이지만, 뭔가 불안한 이미지의 조성으로 어디 가서 안 뒤처지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속(이 책 p26)에서는, 어린 예수를 둘러싼 자들의 표정이 각양 각색입니다. 어떤 자는 경탄하고(영어 성경에 "marvel"이라는 표현으로 잘 나오는), 어떤 자는 시샘 가득한 표정의로 회의(懷疑)하며, 어떤 자는 이로부터 삼십 년 후 광장에서 소리 높여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를 외칠 준비라도 하듯 벌써부터 목청을 가다듬는 품이며, 어떤 자는 마치 광야에서 세 가지 질문으로 성자를 유혹하는 예행 연습이라도 하듯 그윽한(?) 표정을 곁에서 짓고 있습니다. 참고로 반 천 년 전의 이 작품 속에 나온 얼굴(아마 모델이 있었겠죠?)과 우리 동시대 모 배우의 모습이 서로 얼마나 닮았는지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는 주로 우화를 통해 대중을 깨우치려 했습니다. 그 중, 신의 공평하고 제한 없는 무조건의 사랑을 표현라는 에피소드로, "돌아온 탕아(Prodigal Son)"의 이야기가 있죠. 이 이야기는 단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배덕의 시절을 보낸, 그리고 염치 없게도 다시 돌아오기까지 한 아들을, 아무 책망도 없이 용서하고 안아 주는 아버지의 부성애만 표현한 게 아닙니다. "성실한 장자의 불평"이 곧이어 제기되고, 그런 큰아들에게 "나의 것은 이미 다 너의 것이거늘 무엇이 서운할 게 있겠느냐?"며 다독이는 아버지의 태도에서 한 번의 추가 감동을 더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 곱이 결국 완전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그 아버지 이삭은 기만을 당한 채 숨을 거둔 구약의 마무리와 비교하면, 이 신약은 확실히 포용적이고 건설적이며 보다 보편적인 지향점을 마련합니다. 책에는 렘브란트와 무리요의 그림이 나와 있으나(pp93~94), 저는 탕자가 보다 잘 놀고 보다 더 회개 안 하게 생긴 리오넬로 스파다의 그림을 여기 옮겨 보겠습니다. 



이 책은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 종족 안에서만의 편협한 율법과 선민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신의 고귀한 형상을 본받아 창조된 모든 인간에게 공히 희망과 죄사함을 약속하는 범인류적인 것이었음을 역설합니다. p273을 보면, 유대인 특유의 선민의식에서 벗어나, 이방인(Gentile)을 차별하 지 않고 널리 공동체에 맞이할 것을 권한 그의 정신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 2부 이하에서 나오는 사도들, 그 중에서도 바울의 행적, 지중해 동안과 로마를 왕복하며 "기쁜 소식"을 민족과 언어에 관계 없이 두루 전하는 그의 모습에서 잘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바로 이 바울이라고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는 지중해 세계에서,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도덕과 윤리, 내세에의 희망, 속죄와 거듭남의 비의를 민중에게 가르쳤습니다.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별을 좊아 그를 발견한 동방박사들의 각별한 축복과 경배가 있었고, 스스로 자처하여 십자가에 달려 폭압적 정치 권력과 잔혹한 무력 통치를 가장 초연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무력화한 그는, 그를 신으로 고백하는 이에게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건, 전 인류를 위한 영원한 슈퍼스타로 남을 것입니다. 꼭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츤데레한 신앙 고백 형식이 아니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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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꽃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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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더 믿어지지 않는 게 바로 현실이라고도 합니다.

 

장 퇼레의 이 신작은 나폴레옹의 제 1제정부터, (묘하게도) 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기만적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제 2 제정의 시기까지, 수 많은 사람(고용주, 고객, 이웃, 친구, 성직자, 심지어 제 부모를 포함)들 을 죽인 연쇄살인만 엘렌 제가르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아마 기록으로 남아 있는 중에는 최악,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될 만합니다. 이런 실제 역사를 두고, 남아 있는 기록을 철저히 연구하여, 요즘 그로테스크한 작풍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장 퇼레가 소설로 옮겼습니다.

 

사건의 스피디한 전개나 기상천외한 반전보다는 독특한 분위기의 형성에 장기를 가진 그 답게, 어찌 보면 실화가 아닌 우화나 판타지가 아닌가 싶게, 당장이라도 해협의 짠바람 냄새가 코 끝에 확 와 닿을 것 같은 분위기 묘사가 일품입니다. 살인마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다 알고 있으며, 그녀가 실제 어느 경로를 통해 움직이며 누구를 죽였는지는 우리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읽어가며 특별한 서스펜스가 자아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엘렌 제가르도(스스로를 켈트 죽음의 정령 "앙쿠"라고 생각하는)의 섬찟한 대사, 독살의 사냥감으로 점 찍은 이를 두고 조롱 섞인 예고를 하는 장면(그러니, 연쇄 살인마일 뿐 아니라 예고 살인마이기도 합니다)에선 독자의 머리칼이 쭈뼛 서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체 이 참극의 진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가?"를 두고 조마조마해진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요정으로 착각될 만큼 눈부신 미모를 지닌 엘렌은, 그 미모와 함께 받은 저주의 탓인지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그런데 이 살인 행각이, 그닥 넓지도 않은 브르타뉴 반도 안에서만(시대 상황 탓에 교통 발달이 이뤄지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이십 년 가까이 이어졌는데도, 왜 범인이 잡히지 않았을까요? 더군다나 살인의 현장마다 그녀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우선, 불우한 처지에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처연한 감정을 자아내는 엘렌 그녀의 미모를 들 수 있습니다. 인 간이란 어쩔 수 없이 감각의 속임수에 굴복하는 동물인지, 예쁘게 생긴 여인이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라 쉬이 여겨 버립니다. 범죄자로 지목하기는커녕, 모두가 죽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며, 오히려 성녀로 떠받들기까지 합니다. 그 런가 하면, 그런 극성을 부린 지 얼마 채 되지도 않은 똑같은 군중이, 이번에는 그 "성녀"를 마녀로 간주하며 린치를 가하려고도 합니다. 물증, 심증을 새삼 찾아서가 아니라, 미모에 시샘이 났기 때문입니다. 조기에 발견되어 처단 되었어야 할 범인이, 이 토록 오랜 동안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이런 대중의 무지몽매함과 광기 때문입니다. 지각 있는 이들은, "미개한 지역민들이 애꿎은 처녀에게 마녀 사냥을 하려 든다."며 일부 옹호하는 여론까지 형성하려 듭니다.

 

뻬어난 미모로 캐릭터를 꾸리기는 했지만, 장 퇼레는 자신의 이 작품에서 마냥 엘렌을 옹호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 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녀, 하층민, 힘 없는 생물에게 아주 잔인하게 구는 악동 도련님(왠지 홈즈 단편 <너도밤나무 집의 비밀>에서 슬리퍼로 바퀴벌레를 죽이는 루캐슬의 어린 아들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그렇다고 엘렌이 바이올렛 양과 비슷하다는 건 아니구요)을 독살하면서 "네가 꼴보기 싫은 모습이 아니었다고 해도, 착한 아이였다고 해도, 넌 어차피 죽었을 거야."라고 내뱉는 그녀에게, 우리는 일말의 동정도 가질 수 없습니다. 살의와 악의로만 무장한 괴물이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엘렌이 저 대사를 애써 뱉어내게 하지 않았어도, 우리 독자는 엘렌 머리 속에 그런 생각이 꽉 차 있음을 이미 짐작합니다. 혹시 엘렌에 대해 재고의 여지(악인만을 찾아 죽이는 나름 정의의 집행자)가 없을까 애써 선해하려는 독자에게, 퇼레는 쐐기를 박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없고요, 얜 그냥 괴물입니다. 딴 생각일랑 괜히 하지 마세요."


환속하여 놀랍게도 매춘 업소를 항구에 꾸린 어느 전직 신부를 찾아가, 엘렌은 자기를 써 달라고 합니다. 딱히 엘렌이 색정에 불탄다거나 한 성향도 아닙니다. 사람을 죽일 기회가 확보된다는 동기 뿐입니다. 이 수병들은 마침 한창 제국주의적 팽창욕에 달떠 있던 프랑스의 침략 도구로 쓰이는 병력입니다. 알제리 어느 구역으로 쳐들어가, 신나게 양민을 죽이고 왔다는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 놓은 군인들을, 엘렌은 15세 어린 병사까지 남김 없이 독살합니다. 생계가 어려워 입대했을 뿐인 소년병은 "어머니 저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 죽나 봐요."란 말을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어느덧 40을 넘겨 그런 아들을 봐도 자연스러운 나이의 엘렌은, 그러나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뜰에 쌓인 낙엽을 치워도 아마 그 이상의 회한은 남을 것입니다.

 

소설 마지막에는 드디어, 비소라는 독극물의 존재를 명 확히 인지한 당국의 노력으로 엘렌이 검거됩니다. 엘렌 같은 무학 빈곤의 떠돌이가 그런 정제된 독극물을 갖고 있으리라곤 짐작이 어려웠고, 비소는 여러 추리물에서 흔히 나오듯(특히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들, 그리고 [다소 의외지만]올더스 헉슬리의 어느 단편에도, 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독극물은 단골 출현 손님입니다), 일개 연대 병력을 몰살시킬 가공할 만한 물질이기(아주 상투적 표현이죠, 이 소설에서는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때문에, 엘렌은 비로소 끈질긴 추격자들의 노력, 그리고 살찌고 시들어 버린 미모 때문에 드디어 꼬리가 밣힌 것입니다.

 

변호사는 책임 무능력을 이유로, 현란한 말솜씨를 더해 엘렌을 감쌉니다. 하지만 정신 이상 항변은 예나 지금이나 먹히지 잘 먹히지 않습니다(이 시대라면 아직 책임무능력 이론이 정립되기 전이므로, 약간 아나크로니즘이긴 합니다). 엘렌은 기이하게도, 판결 확정 후 사형 집행 며칠 전에야, "나는 내 부모가 주입시킨(그리고 아마 브르타뉴의 미신적 환경이 가르쳐 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공포를 잊기 위해, 내 자신이 공포가 되었다."고 털어 놓습니다. 주위에선 "왜 그 얘기를 법정에서 하지 않았어요?'라고 하지만, 특별히 정상 참작이 될 사유는 못 됩니다. 정말로 처형 직전 밤, 그녀는 잠자리에 오줌을 쌉니다. 그녀는 악령 앙쿠에 사로잡혀 삼십 년을 보냈고, 이제 쓸모를 다해 마수에서 풀려 나는 순간, 비로소 어린 10대 소녀의 마음이 아주 잠깐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 직전까지 그녀는, 이미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듯 "앙쿠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려 합니다. "기요틴에 잘려 나간 내 머리를 볼 수 있게 거울 하나를 비치해 주세요."

 

유럽 전역에 가장 먼저 고유의 문화와 습속을 형성하며 정착한 켈트인이지만, 로마인, 게르만인, 앵글로 색슨인에 의해 거의 전 지역에서 정복되고, 정복자의 풍속과 사고, 종교를 강요 받고, 서글픈 한을 뼈 속 깊이 간직한 게 켈트인입니다. 브르타뉴 반도는 프랑스에 의해 완전히 중앙집권화 되기 전, 영국 왕실의 영지, 재산으로 남았던 곳입니다. 소설에서 잘 드러나듯, 켈트인들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이중으로 침탈되고, 멸시와 경계를 받던 가난한 민중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밀려 사멸해 가는 개성 강한 영 혼의 몸부림에 대해, 그러나 퇼레는 그저 연민과 동정만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미개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때로는 허황된 자존감으로 자기 기만에 빠져 있습니다(엘렌은 아버지 장을 향해 "아빠는 남의 도움으로 먹고 살면서 어떻게 그 빌어먹을 왕당파에 동조할 수 있죠?"라고 비웃습니다. 사실 장은 스스로 귀족의 후예라 믿고 있기도 합니다. 브르타뉴 반도는 본디 이민족 도래 귀족이 토착민을 지배하던 곳이니, 자신은 최하층민이면서 정반대의 환상에 사로잡힌 셈이죠). 그들은 그들대로 멸종의 운명을 맞이할 이유가 있지만,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그 오기도 우리에게는 인상적입니다(특히 선돌로 빚은 성수대에 칼을 갈며 행운을 기원한다든가, 성수에 구토를 하며 죽어가는 장면 등은 그로테스크 상징의 극치를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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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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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읽으면, 삼라 만상을 규격화한 틀에 짜 맞추어 욱여넣되 그 미니멀리즘의 미학 추구에서 최상의 쾌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일본인 본연의 습성에 대해 논급한 부분이 나오죠. 서양인들은 특히 19세기 이후 자발적으로 개항하여 세계를 향해 마음의, 그리고 시스템의 문을 열어 젖힌 일본을 "발견'하면서, 이 미니멀리즘의 집약적 성취인 "하이쿠"라는 시문학 장르에도 관심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는 오늘날에 보듯, 하이쿠 문학의 세계적 인지도 달성입니다. 아직 시문학 분야에서의 성취만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일본인은 나오지 않았고, 노벨 문학상의 성격상 하미쿠 전문 시인이 이 상을 받기도 힘들겠지만, 여 튼 하이쿠는 이제 일본인만의 문학이 아닙니다. 세계인이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직접 창작하기도 하며, 문학을 넘어 타 예술 장르에서도 그 영향을 스스로 입는 일이 흔합니다. 이 책에서도 류 시인이 언급하지만, 레마르크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그 엔딩 씬을, 바로 하이쿠 시인 부손(蕪村, 무촌)의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


를 염두에 두고 구성한 것입니다.



이 책은 400년에 걸친 일본 하이쿠 문학의 최고 정수만을 뽑 아(선집이기는 하나 양이 방대합니다), 우리말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류시화 시인이 달아 놓은 내용입니다. 해설은 장르 전반에 대한 게 아니라 개별 작품론이지만, 개별 작품론이 워낙 충실하고 시인의 정열과 애정이 담겨 있다 보니, 각론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총론이 습득되는 매력과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이쿠의 문학적 개성과 매력, 역사, 전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라도, 아름다운 각각의 명편 명구 절창을 감상하며, 자연스럽게 하이쿠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시란 느끼고 몸에 배게 하는 것이지, 공부해서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니까 말이죠. 



알 다시피 하이쿠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입니다, 길이가 그냥 짧은 것도 아니고 17음으로 정해진 틀에서 가장 짧다는 건, 이 시가 자유시 아닌 정형시라는 걸 이미 전제로 합니다. 사실, "가장 짧은 시"가 정해져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어느 시인이 짧은 한 마디 감탄사를 내뱉으면, 그게 바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는 단가(短歌)이지 뭐겠습니까? 그러므로 하이쿠는, 창작 과정에서의 기술적 난이도 외에도, 이미 정형시라는 전근대성을 핸디캡으로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런 여러 한계(그것도 전근대적인)를 안고 있는 하이쿠 장르지만, 세계인들이 오히려 20세기 들어서, 그리고 그 이후에까지도 계속 관심과 애정을 보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컨텐츠가 안고 있는 모던함 덕분입니다. 하이쿠는 예를 들어,


무덤도 움직여라

나의 울음소리는 

가을 바람


-바쇼(이 책 p59)


처럼 처연한 감상을 상당히 노출하는 것도 있고,


벼룩 네게도

분명 밤은 길겠지

외로울 거야


-잇사(p21)


처럼 해학과 자조를 동시에 드러낸 작품도 있지만, 이런 것은 예외이며, 대부분은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 스타일입니다. 최근 왜 저기 그 ... "생각하면(이해하면) 무서운 이야기" 따위가, 일본 것들이 소개되어 들어 와 우리 네티즌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필요 최소한의 진숢만 하되, 남은 의미의 여운과 해석은 독자(청중)에게 맡김으로써 더 큰 공감과 소통 효과를 낳는, 이러한 절제, 자제의 미학이야말로, 현대에 들어서도 이 장르가 큰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은 네 명의 대가, 즉 바쇼, 부손, 잇사, 시키의 작품들이 주로 돌아가면서 소개되고, 그 사이사이에 다른 작가들의 대표작이 소개되는 형식입니다.  이 4인의, 장르에 대한 역사적 공헌이 지대하니 그게 자연스럽고, 한 권이 책이 지녀야 할 스토리, 레퍼토리의 통일성을 고려할 때, 시대를 넘어 서로 긴밀한 영향을 받았거나 바로 시적 적통(適通)을 이어받은 당사자들의 작품이 소개되는 편이, 초심자인 독자가 이해하고 접근하기에 편리합니다.



류시화 시인은 장르에 대해 정확한 구조적 해설을 베풀고 있을 뿐 아니라 개별 시에 대한 감상도 아주 몰입적으로 이뤄 주고 있습니다(물론 자신의 평가 뿐 아니라, 평단에서 이뤄진 정평 있는 코멘트를 소개도 하고 있지만요). 예를 들면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바쇼


같은 것은,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청각적으로 정적과 그의 깨뜨림 등 대비되는 심상을 교묘히 압축해 놓았다고 해설합니다. 저는 그저 흔하면서도 유쾌한 찰나의 포착이라고 전에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 해설을 듣고 나서 완전히 달리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동일 영혼의 전생 후생을 두 사람으로 보고, 그 간생(間生)의 잠깐만의 매개가 벚꽃이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시인의 배경적 해설을 듣고 보니 지인과의 조우가 그 창작 동기더군요. 두 사람은 동일 공간에서의 별개 존재인데, 다만 벚꽃이 중재하는 공감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이쿠란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도, 장르적 완성을 이룬 이도 시키(子規. 자규)입니다. 이 시키는 물론 명치 유신 이후의 근대인이며, 그의 삶과 다양한 일화에 대해서는 예컨대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 같은 장편 소설에 잘 나와 있습니다.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20대 초반에 폐결핵에 걸렸으면 그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그대로 죽는 것인데요. 용케 30대까지 살아남아 현대인들에게 이런 선물을 많이 남겼죠. 저 "자규"만 해도, 우리 고려 시대의 이조년이 남긴 시조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만은,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 들어 하노라"에 나오는 바로 그 소쩍새를 가리킵니다. 예명이고 필명입니다. 이 자규는 두보 이래 임을 그리는 여인, 돌아오지 않는 벗을 사모하는 시정의 전통적인 상징이죠.


살짝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절제미가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3434 3434 3543의 멋들어진. 시조라는  장르 단가가 따로 존재하는데 말이죠. 우리의 근대사가 쇄국 정책 등에 의해 움츠려들고 국세를 펴 나가지 못한 질곡이 있었기에, 마땅히 조명 받을 가치가 있었던 문학적 유산이, 이웃 나라의 그에 비해 너무 묻혀 버렸다는 안타까움 말이죠. 더 안타까운 건, 우리 시조 문학은 우리 국내에서 애독되기에 적합한 예쁜 책도, 이처럼 좋은 모습으로 출간된 예가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괜히 일본 것이다 뭐다 하며 꺼리는 심리에, 그동안 참 아름다운 예술의 감상을 스스로 차단했다는 아쉬움이 크게 들었습니다. 장르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 깊은 경지의 완상(玩賞)을 도와 준, 오로지 류시화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해설 역시 큰 축복을 접한 듯했습니다. 무엇보다, 책이 참 예쁩니다. 하이쿠를 담기에 최적의 "그릇"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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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즐거움 주식회사에 다닌다 - 즐거움이 곧 성과다
리차드 셰리단 지음, 강찬구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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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좀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직장에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습니다.


지 금의 환경을 바꾸어야 살아남는다며, 조직에 대거 혁신을 가하고, 비능률 요소에 메스를 들이대는 노력은 주로 관리자 쪽에서 시도하게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잘 돌아가는 조직은 보통 "이대로도 해피한데?"를 말하며 대폭적인 개선 노력에 미온적입니다. 잘 돌아가지 않는 조직도, 일단 자기 밥그릇 보전에 골몰하는 과정에서, 혁신을 거부하고 타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부하들은 대체로 혁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게 보통이고, 이런 반발이 있기 때문에 관리자 역시 그 효과가 확실하지도 않을 개조작업에 마냥 대담하게 나설 수도 없습니다.


리처드("리치") 셰리던은 사실, 엉망인 조직에 관리자로 취임하여 A부터 Z까지 모조리 바꿔 놓은 그런 혁신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몸담았던 회사는, 최상의 성과를 내는 업계 최강의 경쟁력을 갖춘 곳은 아니었어도, 나름 평균치는 해 주는 건실한 업체였죠(저자는 자기 기준에서 아주 불만족스러운 듯 이야기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그 회사는 큰 문제가 없는 곳입니다. 독자는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치는 좀 달랐습니다. 그는 이미 10대 시절에 자신의 적성을 일찍 깨닫고 프로그래머의 길을 걸은 사람이며, 학생 시절에도 동급생을 넉넉히 앞질러 가는 공부 외에, 사회 활동을 병행하며 벌어들이는 수입을 주체 못 하는, 최고로 잘나가는 이 분야 엘리트였습니다. 졸업 후 여러 회사를 거치며 그 나이 또래 중에서는 가는 데마다 최고 대우를 받았고, 젊은 나이에 임원 취임을 눈 앞에 둔, 실패를 모르고 달려 온 인생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주위와 호흡만 잘 맞추고, 40대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현업에서 다소 거리를 둔 채 넉넉하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급여를 수령하고, 기업 임원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위신을 마음껏 누리기만 하면 되는 위치였습니다.


good 과 great는 여기서 차이가 나는가 봅니다. 리치는 그 편한, 현명한 길을 굳이 거부하고, 주위와 많은 마찰을 빚는 선택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평소에, 자기가 몸 담았던 회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능률 요소,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 충족되지 않은 성과 따위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건 조직이 완전 단일 인격체가 아닌 이상에야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작용이고 삐걱거림입니다(최소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리치는, 평소부터 이런 게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의 주범이자 커다란 한이라도 되는 양, "일 못하고 성과 못 내는 조직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자!"며 일찍이 그 누구도 해 보지 못한 대수술을 조직을 향해 시도합니다.


대체 어떤 변화와 혁신을 조직에 적용하려 했는가? 사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리치 셰리던이 처음 창안한 건 아닙니다. 그는 단지, 평소 자기 조직에 "이대로는 안 된다"며 경 험에서 우러나온 많은 문제점을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대안을 조직화하여 떠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섬광처럼 영감을 얻은 출처는, 켄트 벡이라는 어느 이론가의 블로그에서 본 내용이었습니다. 이름하여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인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작업 공간 개방하기 : 어느 회사건 부서별로 사무실이 나뉘어져 있고(안 그러면 그게 공장이지 사무실일까요?), 그 사무실 내에서도 개인별로 파티션이 구별되는 공간입니다. 직원은 조용히, 자기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그게 회사가 베푸는 최소한의 배려가 됩니다.

켄트 벡은 이걸 다 없애라고 합니다. 회사가 도떼기 시장이 되어도 좋으니, 직원 간에 정직하고 효율적인 소통이 격의 없이 이뤄지는 게 더 우선이라는 취지입니다.


책의 중간 부분에 나오지만, 이 렇게 하면 업무 추진 과정에 문제가 발생했다. 혹은 누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싶으면, 큰 소리로 주의를 전체에 대해 환기합니다. 소통은 그 자리에서 이뤄지고, 전체의 의견 수렴을 거친 후, 다시 진행됩니다. 칸막이가 없으니, 문제의 발생이건 해소건 간에 즉시 전 직원 사이에 정보가 공유됩니다.


2) 종이 카드에 손으로 글씨를 써 가며 프로젝트 관리하기

모 든 조직은 정보와 보고가 이뤄지는 라인과 체계가 있습니다. 없으면 그건 조직이 아닙니다. 이게 우리의 확고한 선입견이고 통념으로 간직하는 상식인데, 이걸 다 없애 버리라는 겁니다. 누가 종이에 써서 상황판에 게시하면, 다들 그걸 보고서는 "아 이게 문제구나.","음 저런 게 들어가야겠네."라며 바로 자신의 프로세스에 반영합니다. 책임 소재도 명확해지고, 전체로서의 프로젝트는 유기적 통합성이 향상됩니다. 상사르 통해 윗선에 보고하고, 이걸 검토한 후 타 부서에 지시를 하달하고.. 벌써 늦습니다. 파편화된 부서는 제할 일만 하면 다른 동료에는 무관심이니, 같은 팀, 같은 회사라고 부르기조차 어색할 수 있는데,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서는 이게 다 해소됩니다.


3) 프로젝트는 기간별로 나눠 관리하기


4) 둘씩 짝을 이뤄 업무 진행하기 : 사실 충격적인 건 이 부분입니다. 요즘은 초등학교에서도 개인별 책상배정이 이뤄지며, 둘씩 고정된 자리에 짝을 지어 앉는 건 어색합니다. 개개인의 개성이 중시되어야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 아이디어가 도출되고, 사고의 조직적 계발이 이뤄진다는 전제에서 비롯한 건데, 이 확고한 상식을 뒤집어 버리자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회사 "멘로"는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입니다. 프로그래머, 개발자들은 남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며 일을 하기보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사고를 정리하는 게 보통입니다. 실제로 이 구상을 리치가 (부사장의 위치에서) 직원(잘 알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제안하자, "미친 소리", "리치, 그건 내 코드입니다. 모르시겠어요?" 같은 반발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보게, 우리는 공개된 주식회사고, 직원이 개발한 프로그램은 회사의 소유, 즉 주주의 소유라고 생각하는데?" "젠장, 이건 내 코드란 말입니다!"


아무튼 화사를 완전히 말아먹을 각오를 하고 이 시스템은 도입이 되었습니다(리치 셰리던은 둘째치고, 경영진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게 무슨 브라질이나 동남아도 아니고, 미국 실리콘 밸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1) 미국 내에서 성공 사례로 꼽혀, 회사는 자기 일을 할 뿐 아니라, 타 업체에서 견학 온 이들을 위해 일정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지경에 이릅니다.


2) 외국에서도 대학생 인턴을 받아 견습을 시킵니다.


3) 사실 켄트 벡의 초안이 아무리 구체적이었다고 해도, 모든 회사에 만능으로 적용 가능한 완성된 솔루션은 없습니다. 책 후반부에 나오지만, 저자 리치 셰리던 부사장은 그 구체적인 살붙이기 작업을 일일이 현장에서 상황에 맞게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특별한 난제가 아니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남의 생각"을 "내 조직"에 이식하는 작업이 아니라, 평소 그가 언제나 불만을 느껴 왔던 점을, 마침 좋은원군을 만나 초안 작성의 수고를 던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타인, 외부인에게서 영감을 받았지만, 일을 실천에 옮길 때는 완전히 자기 호흡과 리듬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4) 직원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월급을 받지 말아야겠어요.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인데 급여까지 받는다는 게 꺼려지네요."

입이 딱 벌어지는 반응입니다. 이제 회사 일은, CEO에서 말단 직원까지 동질화된 책임감으로 모두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이 책 제목 " 즐거움 주식회사"는 바로 여기서 연유합니다. 회사 일이 내 일이고, 업무의 성취가 나의 기쁨인데, 납기일이 늦어지고 품질이 떨어지고, 사고가 나면 책임 회피를 하기 급급하고... 이런 일은 이제 멘로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책 의 내용이 사실 모든 면에서 완벽히 검증된 진리는 아닙니다. 저자는 아무래도 자신의 소신을 걸고 이 조직 개편을 추진했고, 그래서 빚어진 부작용들은 책 내용에서 다소 그늘진 자리로 감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회사에서도, 성과를 못 내고 타 직원의 템포를 못 쫓아가는 직원은 밀려나는 게 당연합니다. 다만 재미있는 건, 짤린 직원도 이 멘로라는 회사의 분위기만은 정말 그리웠는지, "내 여길 향해서는 오줌도 어디 누나 봐라!"같은 원한이 아니라, 현재 직장의 상사를 모시고 와서 계약을 성사시키기까지 했다는 에피소드가 이 책에 나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 회사도 여기 멘로처럼 만들자구요, 네?" 같은 애교어린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봐야 하지 않을지요?


책 의 구성은 약간 두서없는 편입니다. 저 같으면, 차라리 심풀하게 시간적 순서를 따라 적어 가고, 마지막에 "무엇이 문제였는데, 이렇게 해결되었다"고 전체를 요약 정리하는 식으로 책을 적었을 겁니다. 하지만 워낙 책의 내용, 저자의 증언이 충격적이라 다른 생각 할 겨를 없이 책 내용을 따라가는 독서가 되었습니다.


리 치 셰리던은 제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문 프로그래머로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지 경영자가 아닙니다. 이 책은 지금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의 특성이나 현황에 대해 적은 책이 아니고, 일개 프로그래머 출신이 여태 어느 산업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조직 형태를, 그럭저럭 돌아가던 중견 업체에 적용해서 큰 성공을 거둔 경영 혁신 사례를 소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술 개발보다 더 어려운 게 조직 혁신입니다. 사람들의 타성이나 관행은, 물리적 한계보다 더 완강하게 현상을 유지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이노베이션은 확실히, 인적 자원의 자발적인 흥(興)을 돋우는 데서 이제는 그 원천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원들이 이처럼 "즐거움"이란 동기로 업무에 헌신하는 모습은 일종의 경이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책 후반부에 나오듯 리치 셰리던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회사 조직 개편의 세부적인 상황까지 손수 점검하고 기능적 개선을 이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 기업들이 시사받을 점이 혹 있다면, 역시 디테일은 각 회사의 형편에 맞게 새로 짜 나가야 한다는 점이겠습니다. 이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체제를 수용한다 해도, 멘로에서 쓰던 알고리즘을 그대로 이식하는 건 아마 큰 부작용이 따르를 것으로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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