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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ㅣ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잭 리처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라고 하네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과연 명불허전, 다들 리처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위인들입니다. 일기당천, 역전의 용사들입니다.
그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예전 찬란했던 그 팀 중 절반밖에 남지 않은 인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잭과 그 친구들은, 지금 매우 화가 나 있습니다........
우리의 잭 리처는 잘 알려진 대로, 엄청난 덩치를 한 거한입니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그 큰 체격에 걸맞은 엄청난 완력을 지닌 위인입니다. 덩치가 크다고 꼭 힘이 센 건 아니지만(즉, 피워가 보장되는 건 아니지만), 체격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더 강한 파괴력(주먹이든, 발길질이든, 혹은 그의 필살기인 박치기로든....)을 가질 가능성은 큽니다. 잭은 그러한 정상 범주(?)의 편차에 드는 사람입니다.
잭은 덩치가 크고, 완력이 초인적일 뿐 아니라, 위에 설명한 물리적, 수학적, 통계적 인과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꼭 자신과 관계된 사항이 아니라도), 사물의 질서, 그 중에서도 특히 물리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감각적인 이해 능력을 지녔고, 그런 운동에 대해 특별한 용어를 쓰지 않고도 남에게 이해를 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리학자는 아닙니다. 학자는커녕, 변변한 배움의 과정을 채 밟았지도 않아 보이는 인상입니다(실상은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엘리트 장교라죠). 설사 그의 인상이 서류상의 커리어와 일치한다 해도, 그에게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지구 끝에다 갖다 놓아도 살아올 만큼 생존력과 근성,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와 함께 놓인 다른 생물, 그리고 지구 끝에서 극한의 조건을 자랑하는 그 환경의 장래를 걱정하는 게 차라리 옳습니다.
그를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 일 없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못한 자들의 운명에 대해 괘념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를 귀찮게 했다면...? 답은 이 한 마디로 족합니다.
"그에게는 자비가 없다."
아무리 지상 최강의 용사였더라도, 전쟁과 트러블이 없이 제 나름의 질서에 의해 잘 돌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는 맥을 못 추릴 수 있습니다. 잭 리처가 딱 그 처지입니다. 소령 계급으로 군 복무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한 후 전역한 그는, 그 행색이나 눈빛(이건 원래부터 그랬을까요?)이나 심적 태도나 옷 차림새나 통장 잔고로 보나, 완전한 거지, 부랑자입니다. 사회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군에서조차 계급 무관하게 대장질만 하던 처지이니(이러니,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윗사람들이 곱게 보겠습니까?), 이윤 추구와 합리성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시계태엽장치과도 같은 사회에서 그가 설 땅은 입추의 공간도 마련되지 않습니다. 현재 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거지"입니다.
우리의 잭은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남(그게 아무리, 잭 자신의 가치에 비해 피라미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또 그게 얼마만큼의 근거를 가 지고나 있는지에 대해, 때로는 관찰자가 민망할 만큼 냉정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인격 수양이 되었다거나 남다른 교양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1%의 오차도 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객관을 스캔하여 정확한 결론을 도출하는, 기계에 가까운 두뇌,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 거울에 비춰진 자기 모습으로부터라도 달리 허튼, 혹은 편향된 결론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이 덩치는 물리적 조건만 좋은 게 아닙니다. 연산 능력과 판단력이 차라리 그 신체 능력의 상대 레벨을 상회한다고 봐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전의 용사들, 쟁쟁한 에이전트들 사이에서조차 그가 대장이었던 이유였습니다. 팀원들은, 국적, 인종, 성격, 피부색, 계급에 무관하게, 그를 존경하고, 마음으로부터 보스로 인정했습니다. 아 마 그가 도움을 요청했다면, 지구 끝에서라도 지구의 거죽을 마구 훼손해 가며 달려 왔을 그들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명제도 참값을 가집니다. 그와 생사 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 부하들을, 물정 모르는 어느 자가 감히 모욕했다? 그 자는 오늘부로, 외부 세계의 모든 소유물, 내적인 자부심, 그 외에 남은 무엇이 있다면 기꺼이 손에서 털어 내고, 지구의 다른 끝으로 도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 해도, 과연 그에게 남은 희망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팀에 있었던 여성 대원 두 명(그러니 이 여성들은 대체 어떤 능력의 소유자겠습니까?) 중 한 명이, 이런 잭에게 긴급한 호출 메시지를, 그와 그녀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보내 왔습니다. 잭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다운 정확한 상황 파악 능력으로, 바로 발신자가 누구인지, 나아가 지금 어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 냅니다. 전역한 후 의지할 데 없는 떠돌이가 된 지 오래지만, 그리고 예전같지 않은 육체적 능력, 그 감퇴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감지되는 그라지만(이것도 주관적 엄살입니다. 잭의 유일한 약점은 이처럼 엄살과 자기 연민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익숙하고도 심각한 상황의 예후는 누구보다 정확히 짚어낼 줄 압니다.
오랜 동료에게 들은 소식은에 그는 기가 막힙니다. 대원 절반이, 정체 모를 자에 의해 사냥 당하는 중이며,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된 채 발견되거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도 분노지만, 그 팀원들 중 한 사람에게도 아니고, 이처럼 모두를 향해 마수를 뻗을 수 있다니 대체 그 자의 정체가 무엇이며, 어떤 수완으로, 또 무슨 동기에서, 감행하는 일일까요?
이 작은 잭 리처(그리고 그의 창조주 작가 리 차일드)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최상의 수준까지 만족시켜 주는 퍼펙트 액션 스릴러입니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인 리처는, 그의 장기인 수학적 감각을 십분 발휘하여, 사태의 진행 흔적 곳곳에 남아 있는 암호를 풀어 나갑니다. 그의 추론 능력은 대개 정확한 궤적을 그릴 뿐 아니라, "81은 자릿수를 더해도 여전히 제곱수" 같은, 그에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미신적 감각이나 집착마저 내비치는 컬러를 띱니다. 그는 제 주변의 사람들 성향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고 섬세합니다. "그는 숫자 지향이 아니라 문자 지향이지. 마일즈 데이비스와 쿠팩스를 좋아한 인간이었지." 그런데도 그가 시도하는 암호 입력은 다 틀립니다. 낭은 기회는 한 번이고, 이 시도가 실패하면 파일은 자동으로 파괴될 뿐 아니라, 그 작성자인 전우가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비밀을 영원한 암흑 속에 가두는 셈입니다. 과연 무슨 암호였을까요?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이후에 나온 BBC드라마 <셜록>이, 이 작품의 영향을 아주 깊이 받은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어요(어느 에피소드에서 USB 메모리 암호를 푸는 장면이 나오죠?).
스케일은 상당히 큽니다. 리처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애국심도 투철한 마초지만, 워싱턴의 책상물림들과 영혼 없는 정치인들을 누구보다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를 낀 사기 사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부를 만큼 무지하게 덩치가 큰 사연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최고 중의 최고들로만 뽑힌 팀 반이 죽어나간 것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소설은 여기서 액션 스릴러의 정해진 궤도를 넘어, 소위 POLITICAL EDGE라는 요소까지 포함하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운전을 잘은 못한다는 잭이지만, 그에게 실수가 있을 리 없고, 우리는 이 정신없는 롤러코스터의 궤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잭은 소설에서 세 번(마지막의 결정적 한 번은 스포일러 요소이니 제외합니다), 상대의 거짓말을 간파해 냅니다. 프란츠의 아내가 보인 사소한 행동(낯선 이들을 집에 들이며, 어린 아들을 시켰다)의 이상함에서 그 숨겨진 속내를 알아차리고, 방산업체 뉴에이지의 "교과서 여인"이 어느 대목에서 허위 진술을 늘어 놓았는지에 대해 정확히 그 허점을 짚으며, 다이애나 본드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들 때 도통 쉴 틈을 주지 않으며 논리적 FLAW를 잡고 몰아붙입니다. 세 번 다 그의 완승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잭 리처라고 해도, 등 뒤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리법칙이 확고히 지배하는 현실을 전혀 초월하지 않으면서도(혹은, 못하면서도) 전혀 의외의 결과를 결국은 (이 작에서 세 번이나) 빚어 냅니다. 歴戦의 용사일 뿐 아니라. 逆轉의 용사이기도 한 셈이죠. 리 차일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런 순식간에 벌어지는 잭 리처의 육체적 동작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정확하게, 마치 슬로 모션으로 잡아 내듯 특유의 스타일로 독자에게 캐스트하고, 컬러 코멘테이트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한국 관련 코드가 세 번 나옵니다. 자수성가한 한국인 세탁소 주인(스테레오타입 인종 차별이란 오해를 막기 위해 짧지만 세심하게 뭔가로 배려하고 있습니다), 샘소나이트 가방(아마 이게 한국제인 줄 몰랐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대우(과거 한국의 방산 업체를 거느리기도 했었죠. 대재벌이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메이커의 권총이 그것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순간 놀라기도 하고, 뭔가 반갑기도 한 장치입니다.
원제는 <Bad Luck and Trouble>입니다. 미국에서는 2007년에 발표되었고,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번역된 건 이처럼 다소 늦었습니다. 번 역자의 솜씨가 아주 매끄럽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아니, 어느 액션 영화가 이처럼 재미있게 제 스텝을 거침 없이 밟아 나갈 수 있었나요? 개인적으로 미스캐스팅이라고 여기는 2012년작 탐 크루즈 주연의 <잭 리처>는 이 서평에서 언급하지 않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