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소녀
미셸 뷔시 지음, 임명주 옮김 / 달콤한책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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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은 정말 진부한 소재입니다. 지금까지 이 흔한 소재를 두고서 너무도 많은 소설, 오페라, 영화, 그리고 막장드라마 들이 나왔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 이런 테마를 품었다면 그로부터는 아무것도 새로운 걸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결말까지 다 읽고 나면, 처에 막연히 가졌던 기대(그러나 이 기대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거나, 혹은 진상이 드러난다면 상당히 독자의 기분이 좋지 못할 그런 기대)가 다 배신당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최소한 세 번에 걸쳐 독자는 소위 "반전"을 구경하게 됩니다. 이런 미스터리물을 읽는 보람 중 상당한 비중은 그런 "반전"이 주는 쾌감을 맛보는 데에 있기 때문(최소한 저는요)에,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독자가, 그런 착각에 가까웠던, 그리고 불쾌했던, 기대를 형성했던 , 작가의 서술 트릭 때문이었습니다. 책에서 크레줄 탐정에게 접근해 와서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던 아마츄어 사기꾼(그러나 나중에 모두 진실을 말한 것으로 밝혀지는)의 손재주처럼, 다 알면서도 속아 주고, 다시 의외의 통쾌함을 맛보는 결말을 기대하는 게 우리 독자들이기에, 그러나 이런 트릭은 불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속아 줄 용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곱씹어 보면, 결국 작가가 불공평하게 차려 놓은 테이블을 두고 마지막에 자기가 엎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독자가 제 맘 편하게 정리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영어에서 "파멸"이라는 의미로 undoing이란 게 있습니다. 작가가 마지막에 마련해 놓고 있는 결말은, 결국 지금까지 픽션 안에 차려 놓았던 모든 설정과 (비도덕적) 발전을, 스스로 다 취소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일단 1) 그 영리한 솜씨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고 2) 그렇게 취소된 모든 전개가 빚어내는 그 모든 도덕적 마무리에 대해, 후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스테리의 정교한 창조에도 감탄하게 되지만, 사실 빼어난 점은 그뿐이 아닙니다. 작가는 은근 보편의 상식이나 도덕감정에 반하는(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불편한 진실로 판명되는) 단정을 소설 곳곳에서 늘어 놓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독자는, 쓴 입맛을 다시면서 그 당부를 판단하고, 다시 큰 불편을 느끼며 말없이 수긍하게 됩니다. ("어쩌겠어, 현실이 그러니....") 이처럼 어두워진 마음을, 충격적 반전(이는 기술적 빼어남입니다)과 함깨, 다시 도덕과 상식의 승리를 알려 주며, "병 주고 약 주는" 솜씨로 어루만지는 게 작가의 기특한 수습(이는 마음이 착해서입니다^)에 우리는 두 겹으로 쾌감을 얻게 됩니다.

 

비행기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고 알려진 아기를 놓고, 거의 빈민에 가까운 부부와, 유럽에서 첫손에 꼽히는 갑부- 귀족 집안의 부부가, 서로 조부모의 자격을 주장하며 데려가겼다고 법정 싸움을 벌입니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비행기 사고에서 아기가 살아 남은 것도 기적인데, 이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혈연이라며 다투는 가족들까지 등장했으니, 매스 미디어가 온 신경을 집중할 세기의 특종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한쪽은 유럽에서, 그 성취한 부(富)와 명성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냉혈한이자 사업가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능숙한 승부사라기보다, 자본주의(특히 언론 자본과 흡혈귀 변호사들)의 콜드 블러드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그리고 장난꾸러기 신의 농간 앞에 속수무책인 졸(卒)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이 책에는 공교롭게도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는 표현도 나오더군요).

 

저는 이 작품에서, 귀족의 피를 이어 받은, 진정 냉정한 사업가인 마틸다 노부인에게 가장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결국 적임자(아!)에게 일을 맡겨서, (비록 큰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여튼 사건의 진상만큼은 제대로 알아 내고 만 것입니다. 소설을 다 읽은 분은 알겠지만,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저지른 그 무수한 mess도 다 치우고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그녀 역시 완전히는 몰랐던 탓에, 젊은이(전적으로 무고한)에 게 마음의 상처를 좀 안기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인 능숙하고 현명한 처신 역시 감탄을 자아내게 하더군요. 거의 동년배인 니콜(출신은 천하나 결코 만만치 않는 depth를 지녔던)과 보이는 정신적 승부도 볼 만합니다. 반면 남편은, 그처럼이나 사업에서 놀라운 수완을 보였지만(아내 가문이 보유한 재산만으로는 그런 權貴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한번 마음이 흔들리자 걷잡을 수 없는 추락과 동요를 보이고,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게 바로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자와, 한순간에 벼락 출세한 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미스터리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캐릭터의 섬세한 설정이 빛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앞서 제가 1) 작가의 서술 트릭 2) 결말에서 스스로 차린 모든 상을 스스로 엎는 태도에 약간의 불만을 표현했지만, 지금 리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작가는 제법 "위험한 수준"의 힌트를 작품 중에서 이미 주고도 있었습니다(지금 생각이 나네요). 재미도 있으면서, 공정하면서, 도덕적 쾌감까지 안겨 주는 스릴러를 오랜만에 읽은 것 같습니다. 어 리고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다 파멸적인 파국으로 몇 발 디뎌 나가다 결국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되고, 사악한 탐욕의 손길과 시선이 그들을 뒤에서 엿보며, 그 뒤에는, 세상을 통째로 바꾸진 못하지만, 몇 사람의 인생은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무서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이야기, 이야기들, 아주 진부해서 뭐 하나 기대될 여지가 없을 만큼 통속적인데, 이처럼 새롭고 재미있는 사연을 큰 스케일로 꾸려낸 게 신기했습니다. 다만 예컨대 나짐의 애인이 터키 반체제 운동가의 딸(그래서 프랑스에 흘러들어옴)이라든가, 마르크의 고향을 "공산주의자의 도시"로 꾸려 놓은 건, 공연히 시대적 무게 같은 걸 소설에 덧입히려는 의도 외에 별 필연성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자면, 우리말 제목 번역이 기가 막히다는 점이어요. 원제와눈 전혀 무관한 표현인데, 오히려 작품의 가치와 함의, 분위기를 더 잘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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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국새를 삼켰는가 - 우리가 모르는 대한민국 4대 국새의 비밀
조정진 지음 / 글로세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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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착잡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국민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 기관인 사법부입니다.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은 그래서 헌법의 보장 사항이며, 재판에는 그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간여(干與)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건이 관심의 초점에 놓일 때는 반짝 열을 내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일도 있었나?"하며 까맣게 잊고 마는 게 우리 대중들의 큰 문제입니다. 저 역시, "국새 사기 사건"이라고 해서 한때 신문, 방송에서 크게 다뤘던 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범인"의 근황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주지 않았고, 따라서 아는 바도 거의 없다시피했습니다.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을 해 보니, 그런 저의 무지도 크게 책잡힐 일은 아니더군요. "범인으로 지목된" 민홍규씨가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만 언론이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게 2011년 말의 일입니다. 그 이후에는 언론이건 대중들이건 관심사에서 멀어진 게 이 사건입니다. 솔직히 저는, 사건 발생 당시에도 "그런가 보다"하는 정도로 넘어갔기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갖가지 팩트들(이 책에서 주장하기론 말이죠)이 아주 상세한 디테일을 적어 놓고 있어도, "아 내가 알던 것과 이렇게나 달랐구나."하는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죠.

 

책을 제가 너무 쉽게 넘기는 것 같아서, 긴장감을 주려고 인터넷에서 수시로 기사를 검색했습니다. 당시 신문, 방송에서 보도된 내용을 대충 읽어 보니, 이슈는 크게 네 가지더군요. 1) 민씨가 금을 횡령했다. 2) 이 국새제작단 단장으로 선임되기 전에, 정계에 로비를 했다(자신이 만든 금 도장을 뿌리고 다님) 3) 민씨는 전통 국새 제작 기법을 지니고 있지 못한 무자격자다. 4) 국새에 자기 이름을 슬쩍 새겨 넣었다. 여기에, "국민 앞에 사죄한다."는 본인 자신의 기자 회견 내용까지 크게, 그의 사진과 함께 기사화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평균적인 한국인으로서 뭐 주저 없이 사람 하나 매장시키는 대열에 동참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좀 사전 지식을 갖추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까, 내용이 머리에 더 잘 들어오더군요. 올바르고 그르고를 판단하는데, 지식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 물론이죠. 오히려 그게 이런 책의 취지이기도 합니다. 저자들이 재판부와 검찰, 경찰을 비판하는 이유는, 민씨를 유죄로 보기 힘든 강력한 반증, 정황들이 여럿 존재했고, 변호인들이 증거로 제출하기까지 했는데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묵살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또, 검찰 측의 증거, 증인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애써서 믿고 또 믿어 준 끝에 민씨를 유죄로 몰아갔다는 그 점을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연 민홍규씨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이를 판단함에 있어 사실 문제, 객관적 팩트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습니다. 판사를 비판하려면, 우리 독자들은 그 판사보다 더 객관적이고 더 공정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책 한 권 읽고 한쪽 말만 듣는 사람은, 나중에 읽은 다른 책(혹은 시청한 방송)이 다른 말을 하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 금방 입장을 바꿀 것입니다.

 

1) 금 횡령에 대해서는,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검찰 공소장에서 모두 빠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책이 한쪽 입장만을 대변한다고 해도, 이런 기초적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 판결문을 찾아 보지는 못했지만, 일단 책의 내용만으로도 금 횡령 건은 사실 무근에 가까운 것 같더군요. 책은 오히려 민씨가 사비(私費)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 부분 횡령죄가 기소 대상이되었으면, 당연히 재판 과정에서 배척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혐의의 인정에까지 간접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갸륵한 일이겠습니까.

 

2)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하면, 실제로 몇몇 정치인들이 민씨로부터 도장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이 정도면 게임 끝으로 판단합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이 스스로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발뺌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책의 내용은 다릅니다. 정동영 씨 등이 "도장을 받았으나, 대금으로 50만원을 주었다."고 말한 게 정확한 내용이랍니다. 이건 완전히 다른 뉘앙스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두고 "도장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신문 기사를 읽을 때 참 조심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극과 극으로 차이 나는 결과입니다. 여기에 대해, 최소한 신문 기사 수준에서는 재반박의 내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3) 민씨는 과연 자격이 있는 장인인가? 신문 기사들은 석불 정기호 선생의 장남의 말을 인용하여, "민씨는 선친의 집에 두어 차례 방문했을 뿐이다. 최소 6년은 숙식을 같이하며 배워야 하는데, 집에 오래 머물지도 않은 이가 수제자는커녕 어떻게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선친이 말년에 노망기가 있어서, 민씨에게 착오로 증명서 같은 걸 써 주었을 수 있다."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명장의 친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데, 대중은 그저 믿을 수밖에요. 그러나 책은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을 가합니다. "정 선생의 집은 타인이 묵고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버스나 다른 차로 선생을 방문하여 배우러 가곤 했다."는 다른 증언을 소개합니다. 그 외에, 정 선생과 민씨가 인적 연계를 맺었다는 다양한 방증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민씨가 명문가의 후손이고, 어려서부터 각종 대회에 입상하는 등 자질을 입증해 보였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습니다.

명장의 수제자다 아니다를 떠나, 과연 전통 기법을 현재 보유한 인물인지 여부가 더 중요합니다.

 

앞의 1) 2)는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이 확정 판결을 내릴 때도 이유의 핵심은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다고 해 놓고, 막상 적용한 건 현대식 기법이었다."였습니다. 그래서 사기라는 거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은, "과연 공인된 전통 기법이란 게 존재하는가?"였습니다. 전통 기법을 보유한 사람이 명장인 거냐, 아니면 명장이라는 이가 보유한 그게 바로 전통 기법이냐. 재판부와 수사 당국은 민씨를 처음부터 명장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통 기법을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로 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하려 했고, 그 결과는 "아니다"였습니다. 그럼 전통 기법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아니, 전통 기법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마다 입장이 다 다릅니다. 여튼 수사 당국은 민씨의 제조 방법은 "아닌 것"으로 보았고, 그게 바로 민씨가 유죄 판결을 받은 유일한 근거입니다.

 

in dubio pro reo.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형사사법의 대전제입니다. 실제로 민성재 사건이나 낙지 살인 사건 등에서도 우리가 본 것처럼, 어지간한 심증이 가는 경우에도, 반대의 정황이 얼마라도 존재하면 무죄 판결이 내려지곤 하는 게 우리 사법부의 태도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를 두고, 너무도 쉽게 유죄 판결이, 형식적 증거 조사 과정만을 거쳐 내려진 게 아닌지 충분히 아쉬움이 느껴질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자의 주장처럼 "배후에 정치 권력이 숨어 있다"까지 비약할 필연성은 부족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4)에 대해서도 이 책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장인이 자신의 작품에 "싸인"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겁니다. 3대 국새를 제작한 장인 역시,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참, 똑같은 사실을 두고서도, 앞뒤에 어떤 배경을 배치했느냐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걸 보고, 사람이란 정말 간사하고 못 믿을 존재구나 싶었습니다. 신문 기사를 보았을 때는 "민씨가 잘못했네!"라는 판단이 바로 내려졌는데, 이 책의 내용을 보니 또 그게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현재로서는 이 이슈에 한해서는, 책의 내용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결국 남은 건 3)뿐입니다. 민씨가 전통적 방법으로 국새를 만들었는가 아니었는가! 이는 사실 재판부가 쉽사리 판정을 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론에 맡길 일도 아닙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섰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몸을 사리거나,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건 서로 의견이 판이하게 갈리니, 결국 증명 불능의 상태로 남은 셈입니다. 다시 떠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in dubio pro reo의 원칙을요.

 

책의 내용에 다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의문의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 하셨다고 하지만, 그게 꼭 정치권력이나 반대편 세력의 사주로 인한 것인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또, 결국 재판을 확정한 건 대법원 해당 재판부입니다. 아무리 최종심이 법룰심이라고는 하나, 결국 오심(만약 오심이라면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대법관들입니다. 책은 1심 재판부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하고 있으나, 대법관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않고 있습니다. 형량을 다 채우고 출소했다는 사실의 진술에서, "아 이 사건이 이미 대법원에서 확정되었구나"하는 생각이 겨우 들었을 뿐입니다. 독자로서는, "대법관들도 결국 그런 판결을 내렸다면, 이 책에서 말하지 않은 뭔가 다른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이래서 배심 재판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다. 언론이 그렇게나 효과적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난 후였는데, 배심원인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자분은 동료 언론인들의 자질과 진정성을 문제 삼으셨어야 순서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 에필로그는 모두 거물 법조인이 담당하여 집필하였습니다. 두 분은 민홍규씨의 사정이 억울하다고 판단하여, 무료 변론을 맡은 소송대리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거물들이 사건을 맡아 대법원까지 간 사건인데도 결국 유죄 판결이 났다면, 사건의 진상은 보다 복잡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책은 나와야 합니다. 오심의 가능성은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며, 무작정 억울하다는 식이 아니라 이처럼 치밀하고 자세한 팩트에 근거한 반론이라면, 마땅히 공론의 장에 나와 여론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사법부가 이미 판결 확정이 끝난 사건에 대해 일일이 답할 책무는 없더라도, 최소한 설득력 있는 항변에 대해 뭔가 입장 표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는 하지만, 형식보다 중요한 건 국민의 인권이고 정의의 실현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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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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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가 "통(通)"함은 예[古]와 지금[今]이 다르지 않다.

이 얼마나 호쾌하고 희망 가득한 말입니까? 만약 세상이 폭력과 사술만 판치는 곳이고, 우매한 대중을 기만하는 정상배와, 아집 가득한 폭군이 두려움 없이 전횡할 뿐이라면,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정의를 세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고"와 "금"을 통하는 "의"인지는, 보다 나아간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덕일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취한 단문 논평 여럿을 통해, 본인과 독자 모두에게 '의"가 과연 무엇인지 귀납적 탐구의 과제를 던지는 듯합니다. 그는 힘 있는 필치의 장문 논설에 능한 저술가이지만, 모 일간지에 장기간 칼럼을 연재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촌철살인의 단문에서도 그만의 컬러와 기량을 과시할 수 있는 재사입니다.

 

무엇이 과연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의(義)"인지를 구명(究明)하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소견이나 퍼뜩 떠오른 영감에만 의지하지 않고, 옛 문헌을 비교 검증하는 데에서 화제의 단초를 찾습니다. 그런 작은 발단에서, 어느 새 이런 거대한 결론과 박력 있는 비전이 도출 가능한가 싶게, 마주보는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칼럼은 어느 새 대용량 저서 한 권의 무게를 우리 독자의 정신에 올려 놓습니다. 이 비결은, 옛 문헌의 뜻[義]을 정확히 풀어 주는[解] 그의 능력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도 판사, 검사의 과도한 권력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하는 어느 책을 읽은 바 있지만, 저자는 조선 시대 법제에서 이 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바대로, 율(律)학은 무과보다도 품계가 낮은 잡과에 속했습니다. 품계가 낮은 하급 관리가 행하는 직분이니, 자의(恣意)가 개입하지 않고, 기계적 법 적용이 가능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법조의 적용이 개인적 세계관이나 취향, 경향에 영향을 받기보다, 천편일률로 행해지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그의 생각에 한편으로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과연 다른 부작용은 없을지 잠시 생각하게 되었네요.

 

이념이 난무하면 국력이 쇠한다. 효종의 죽음이 뭔가 의문스러운 사연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나올 만한 결론입니다. 필자는 북벌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고 여기고 있으며, 특히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이, 조선 측에서 동병(動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특히 현 중국 당국이 주도하고 있는 동북 공정이, 벌써 이 청대부터의 침략적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 보고, 강한 민족주의적 각성으로 이에 대처해야 한다고 책의 여러 파트에서 반복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은 동북아 일대에 널리 뻗쳐 있었던 대제국의 흔적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같은 형식의 고인돌이 일정 강역에 분포하면, 동일 정치 체제의 통치 시스템 존재의 증거라고 보는 게 상식인데,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의 판도가 한정되었다고 보는 고정관념(저자의 입장대로라면, 이는 식민 강단 사학의 잔재지요) 때문에 뻔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입장이라면 대동강 일대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두고서조차 논리적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특히 저는 후자의 모순을 지적하는 저자의 입장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는 기록자의 왜곡과 정치적 입장이 언제나 개입한다는 씁쓸한 확인이, 송첸캄포를 다룬 <唐史>에도 나온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실제의 팩트는 토번의 승승장구와 이세민의 비굴한 회유에 불과한데, 사서의 기록은 정반대로 열심히 중화의 영예와 승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서남 공정"이라는 중국 측의 부단하고 집요한 정책으로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동북 공정"으로 동병 상련을 겪고 있는 우리가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그는 비장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진보적 스탠스를 유지하는 논객답게, 아마 남녀 평등을 주창하는 인사들과 잦은 교류가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도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상당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이들이 지닌 명함을 보면 다성(多姓) 표기가 많죠. 모계 쪽 성(姓)을 병기하는 이런 관행은 그러나 큰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말입니다. 왜냐 하면, 모친의 성 역시 부계 혈통의 대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운동의 본의마저 오히려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저자는 은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칼럼에서 저자는 오히려 다른 쪽의 결론으로 내딛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남녀 평등의 관념을 강하게 유지하여 왔으며, 모여성의 성이 결혼 후에도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남편을 따르지 않고 제 부친의 것을 유지한 본의는, 양 집안의 대등한 결합 사실을 강력하게 상징하려는 데 있었다고까지 합니다. 양반 가에서 정실 부인은, 언제나 남편에 대해 당당하고 강한 어조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성(多姓) 표기는 이런 관점에서라면 그 타당성 여부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간회 초대 책임자를 지낸 이상재 선생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 여럿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높고 굳건한 지조를 지녔다고 해도,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월남 선생이 택한 방법은 해학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몇몇 일화는 그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는 너무도 잘 대비되는 익살이라 재미있고, 한편으로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시대 배경을 감안하고 다시 읽으면 눈물이 고이는 비애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놓고 모인 단문이니 지루할 틈이 없고, 짧은 분량 속에서 할 말은 다 해 놓고 토픽의 완결성도 잃지 않는 그의 솜씨에 경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형식적 치장에 구애 받음 없이 본연의 주제의식과 명분은 언제나 찔러 두고 가는 그이기에, 독자는 편안함과 도덕적 만족을 동시에 맛보게 됩니다. 이런 칼럼이 역사라는 큰 줄기에서 언제나 일정 거리 밖으로 논점을 이탈하지 않는 것도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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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5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엮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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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참 이름만으로도 괴기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먼 동양 땅에 살고 있는 독자라고 해도, 드라큘라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까지도 이 이름은 익숙합니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뱀파이어"처럼 보통명사로 받아들여지곤 하죠. 창백한 얼굴, 날카로운 송곳니, 커다란 망토에 붉은 칼라 따위의 이미지는, 루마니아나 (브램 스토커의 고향인) 영국, (장르 영화와 고전물의 본산인) 미국 외에서도, 맥도널드 햄버거나 코카 콜라 이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 통용되는 "언어, 기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전이 보통 겪는 운명처럼, 잘 알고 있고 벌써 여러 차례 읽어 내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진상을 알고 보면 거의 바른 지식이 없고, 책을 들춰 보면 처음 대하는텍스트나 마찬가지란 거죠. 이 작품처럼 확고한 고전의 위치를 점함과 동시에, 그 모든 장르 소설의 부모격이자 타 장르 예술의 영감 원천이 된 경우라면, 그 뜻밖의 생경함이 더합니다. "이게 이런 소설이었어?"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그 많은 상징과 상상력의 원천이 이미 그 오랜 텍스트 안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는 놀라움을, 이후에 나온 그 무수한 아류작의 모태가 다 마련되어 있었다는 경이감을, 독자에게 아낌 없이 선사한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류작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이 오리지널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카피캣이었음을 깨닫는 충격도, 오로지 고전만이 선사할 수 있는 근사한 각성입니다.

 

고전이 고전인 또하나의 이유는, 그 창조해낸 세계의 완벽하다 할 자체 완결성입니다.  이 1권을 보십시오. 흡혈귀 드라큘라라는 캐릭터를 소개하고 사건만 재미있게 전달하면 될 것을(현대의 2류 장르물은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굳이 번잡한 디테일을 빈틈없이 마련해서 자격 없는 독자를 다소 피곤하게 만듭니다. 영국의 특정 지방(영지)이 "카트르 파스(처음에 저는 赦免 같은 걸 떠올렸는데, 불어 단어 원형이 뭘까 곰곰 생각하니 四面이더군요. Quatre Face)"인지 뭔지, 그저 장르물에 길들여진 독자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브램 스토커는 꼼꼼하고 자상하며, 때로는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필치로, 텍스트 안에서 빠져 나갈 구멍 없는 완벽한 별세계를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장르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대개 평면적인 성격입니다. 하지만 이 고전(그리고 그 모든 판타지, 괴기물의 원조)에 등장하는 이들의 성격상 평면성은 그리 역겹거나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플롯과 분위기, 스타일, 주제의 핵심을 이루는 드라큘라의 개성(과 매력)이 워낙에 강렬하기에, 반 헬싱, 조나선 하커, 미나 등의 전사(戰士)들도, 다른 데 눈을 주지 않는 성실성과 일관됨으로 무장해야만 할 필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고아한 인격과, 어디 한 구석 빠질 데 없는 건전한 시민성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런 비현실적 도덕성이야말로 모든 악의 화신인 백작과 맞서 싸울 유일한 무기요 자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납득할 만한 이유 때문에 공권력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데, 이런 대목 역시 이후 무수히 쏟아져 나온 후배 장르물이 모조리 따르다시피 하는 공식이죠. "지구는 그들 소수의 선량한 시민이 지켜 내었다!"

 

타인과, 심지어 자신으로부터 그 남성성의 순도를 끊임 없이 의심 받았던 브램 스토커는, 과연 그런 시선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 소설의 아름답게 짜여진, 역대 최고라 부를 만한 서두에서 조나선 하커의 (기념비적) 감금 씬(!)을 펼쳐 냅니다. 조나선 하커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흠 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인물입니다. 감금을 당해도 이런 사람이 감금을 당해야, 독자나 관객이 짜릿짜릿한 흥분을 느끼죠. 늙은 백작은 어이 없는 노골성으로 그를 위협하며, 그 주변에는 치명적이고 불길한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또다른 정체 모를 여인들(...)이 배회합니다. 이 공포와 절망으로 지레 삶을 포기할 만한 상황에서, 젊은 변호사는 차라리 자기 자신(지레 포기하려는)과의 혈투에 진을 다 빼다, 모종의 결단을 암시만 한 채로 일기를 일단 마무리합니다. 과연 귀추가 어찌 번져 갔는지는 몇십 장을 한참 넘겨야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사건이 모두 등장인물 자신의 1인칭 시점으로 설명되고 있기에, 이 작품은 요즘 말하는 "모큐멘터리" 기법을 선구적으로 채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긴, 빅토리아 시대 책임 있는 작가가, 어찌 그윽하고 불순한 판타지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펼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무슨 의도였건 간에, 이 작품은 내용이나 형식 모두 현대의 관점에서조차 gorgeous합니다.

 

가장 착하고 상처에 취약할 것 같은 성격의 루시가, 이 가공할 에일리언에게 희생된 최초의 제물임이 밝혀지고, 정의롭고 선량한 주인공들이 당장 취해야 할 결단이 무엇인지도 곧바로 드러나자, 캐릭터들 못지 않게 독자 역시 경악하게 됩니다. 때묻지 않고 정직한 심성을 고스란히 가진 선남선녀, 그리고 이들을 리드하는 박식한 현자로 이뤄진 "팀 구성" 역시, 이 <드라큘라>가 거의 원조라 할 만큼 그 프로토타입을 제대로 다듬어 놓았습니다. 아주 적절한 대목에서 1부가 끊어지는 열린책들 편집진과 역자의 센스가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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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법 - 상 - 제6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대상 수상작
야마다 무네키 지음, 최고은 옮김 / 애플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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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신,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한 본질 중 하나는 욕구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 욕구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오래 살고 싶은 욕구, 불멸을 지향하는 욕구만 하겠습니까? 충족될 수 없는, 아니, 그래야 만 할, 갈망, 희구가 충족되는 그 순간, 인간은 바로 신(神)이 되거나, 아니면 바로 파멸할지 모릅니다. 인간의 정신은 불멸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의 불멸 뿐 아니라, 타자의 불멸, 혹은 추상으로서의 불멸도 감당할 수 없어 종교에 열광하는 게 인간입니다.  

 

단 한 명의 개체라도 불멸의 혜택을 입는 순간, 인간 사회가 애써 가꿔 왔던 윤리, 도덕, 예술적 가치, 정치 제도는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불멸을 관장하는 그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은 제 터전이 초토화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울 것입니다. 모두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는 바로 모두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 중에서 누군가는 영원히 살고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면, 그 선택된 자의 특권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모두가 같이 죽는 길을 걷자고 들 것입니다. 불멸은 바로 즉시 파멸을 부른다는 역설이 눈 앞에 뻔히 드러납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혁명적인 의학 기술이 고안되기보다, 차라리 그런 감당 못할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사회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더 시급하다는 사실(그리고 더 까다롭다는 사실)은, 이 인간 불멸의 시술(소설에서 HAVI라고 설정된)이란 게 까마아득한 공상의 세계에나 소속되어야 함을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과학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성숙 문제, 사회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HAVI의 본체는 사실 불멸불사의 레시피가 아니라, 불로(不老)의 시술입니다. 물론 후자가 더 좋은 것입니다(쭈그렁바가지로 천 년을 산들 그게 뭐가 부럽겠습니까). 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을 당하거나, 아니면 국가 기관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거나 해서, 인간들은 목숨을 "여전히" 잃을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가끔,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 정말로 끔찍해."라고 말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약간 일관성을 결여한 미장센이자 자리를 잘못 잡은 클리셰 같은 인상마저 줍니다. 그런 회오(悔悟)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 스탠 리(혹은 제임스 맨골드)의 "울버린"의 입에서 나오기에나 어울리죠. 

 

그저 현생 인류가 지니고 있는 일상 수준의 주의력만 유지해도 영원한 청춘("청춘"이라는 단어도 이미 오래 전에 死語가 되었다는 재미있는 설정도 등장합니다)이 가능하다니, 그보다 훨씬 하잘것없는 가치를 놓고도 목숨을 거는 인류의 원시성에 비추어 보면, 고작 법안의 효력 발생 여부를 두고 "정상적인 수준의 여론 충돌"을 보인다거나, 지극히 국지적 수준에서 제도에 대한 개별적 도전을 보인다거나 하는 모습이 차라리 우습게 보입니다. 그 정도면 얌전한 것입니다. ID의 소비행위, 계좌 관리, 소속 직장 배당 등의 통제 장치가 있지 않느냐고요? 그 시스템은 누가 장악하고 있나요? 고위 정치인, 행정 관료의 권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양순한 일본인"들만 사는 사회라야 이 모든 상황이 최소한의 설득력을 지니고 다가옵니다. 

 

영원히 늙지 않고 20대의 미모를 유지하는 건 좋은데, 정신도 성숙하지 못한다는 게 큰 함정입니다(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의학적 미스테리라고 하네요). 해서, 가족이라는 게 또 의미를 못 가집니다. 영속적인 배우자 관계를 맺는다든가, 2세를 낳는다든가 하는 게, 알고 보면 다 "나"란 존재의 사멸을 가정하고 벌이는 일종의 안전 장치였으니(정말요?), 이제 영원한 청춘(낡은 유행어입니다)을 얻은 지금, 결혼과 이혼은 밥 먹듯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패밀리 리셋"이라는 제도적 장치도 등장하네요. 아직 그래도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책임은 있는지, 스무 살 정도까지만 같이 살다가 이후 헤어져서 수십 년 동안이나 생사도 모르고 지내기 일쑤입니다. 늙지 않는 양친과 같이 살면 서로의 자유로운 생활을 서로가 방해할 뿐 아니라, 여태 인류가 채 알지 못하던 다른 종류의 온갖 불편이 끼어들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성년기 이후 부모와 떨어져 소식이 뜸해진 채 살거나, 그 부모가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전혀 다른 생을 시작하거나 하는 모습은, 서구에서는 지금도 흔히 보는 일입니다. 개인주의적 삶을 보다 지향하거나, 자신의 잘 관리된 외모에 자신이 있다거나 하는 개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HAVI 따위의 도움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인간, 아니 괴물들(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엡실론 분자들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엡실론들은 늙습니다. 늙기도 하는 주제에 아무 불평 불만 없이 사회 최하층 노동 공급을 담당하며 말초적 쾌락에 탐닉한 채 소모품으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합니다)은, "유니온"이라는 시스템에 등록되어 실직에의 위험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3개월마다 한 번씩, 유니온의 지침에 따라 직장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러면 자생적 노조(레이버 유니온)의 결성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고, 생산 설비로부터 노동자를 철저히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더없이 좋은 통제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런 단조로운 삶, 아무 지향성이나 성취 가치 없는 삶이 환영을 받을 리 없지만, "영원한 청춘"이라는 닽콤한 당근이 그 모든 아쉬움을 잊게 해 줍니다. 결국, 피지배계층은 영원히 그 바닥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치가 생기는 셈입니다. 사실 저는 이 소설에서 불로의 시술보다, 이 사회제도적 장치에 대해 더 큰 관심이 가게 되더군요. 물론 HAVI라는 반대급부가 없으면 유지가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말이죠.  

 

똑같이 늙지 않는 인생이라고 해도, 상류층과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기존 가족 관계가 더욱 공고화됩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정략 결혼이 확고히 자리잡고, 장래 유권자 앞에 나서서 선택을 받아야 하는 정치인은 불로 시술을 비교적 늦게 받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관록이 잡힌 외모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네요. 위에서는 전통적 컨벤션이 완결성을 더해가며, 반대로 아래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감각적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회, 사실은 바로 지금 우리들이 수렴해 가고 있는 일종의 디스토피아로 봐도 되는 모습들입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 풍자 소설입니다. SF라기보다 말입니다.

 

하권 리뷰에서, 이 소설의 "백년법"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적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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