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므랑 이영민
배상국 지음 / 도모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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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여쪽의 분량입니다. 옆에서 딱 놓고 봐도, 학부 과정 교과서 정도나 되는 듯 두껍습니다. 활자 크기가 작은데도 이 정도 두께이니, 어느 기준에서도 장편 소설이겠습니다. 실존 인물이기도 하고(그 정도가 아니라, 당대, 즉 일제 강점기를 사신 분들께는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있나." 하실 만큼 유명인사였겠습니다만), 이 소설의 주인공인 故 이영민 선생이 워낙에 거한이기도 했기에, 그분을 다룬 소설이니 책이 이 정도 볼륨은 되어 줘야 하지 않겠나 싶기도 하더군요.

 

실제로 이런 소설이 흔히 그런 모습을 보이듯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만을 집중 조명하고 느닷 끝나는 구성이 아니었습니다. 탄생과 성장기가 비교적 간략하게 처리되었을 뿐, 중노년에 접어들어 야구 협회 부회장을 맡아 일하던 중 불미스러운 사고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시점까지, 위인이자 호걸,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이영민의 전(全)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야구를 보아 왔고, 열혈 야구팬이 보통 그러하듯 각종 통계(흔히 "스탯"이라 말하는)를 다 챙겨 가면서 보아 온 편이었습니다. 지금도 누가 물어 보면, 프로야구 출범 이래 몇몇 슈퍼스타들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특정 연도의 스탯을 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수치까지는 몰라도, 프로에서 주전으로 뛴 웬만한 선수들에 대해서는, 대략 몇 년도가 커리어 하이였고, 통산 성적 기준으로 역대 몇 위 정도라는 건 맞힐 수준이 됩니다.

 

야구가 팀 스포츠이긴 하지만, 개개인을 대상으로 다차원 통계 분석을 할 수 있는 극히 드문 팀 스포츠이기에, 스탯에 밝은 건 바로 야구에 대한 정열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탯 뿐 아니라, 누가 몇 년도에 시즌 MVP였으며, 골든 글러브 수상자였다는 등의 "경력"에 대해서도 (박식 경쟁이 붙다 보면) 아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 이영민 선생에 대해서는, "젊은 타격 유망주에게 주는 영예로운,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어떤 상에 그 함자를 딴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뿐이지,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그가 식민지 조선에서 절대적인 지명도와 인기를 누리던 민족 스포츠 영웅이라는 점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요즘 같이 정보가 흔한 세상에선, 간단한 검색 몇 번으로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도, 굳이 찾아 보려는 수고를 하지 않은 건, 아마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의 장에서, 설사 그 중에서 특출했다 한들 별반 매력이 느껴지지 않을 법한 인물"에 대한 흥미가, 크게 동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 싶습니다.

 

장태영 선생, 남우식 선생 같은, 지난 시대의 레전드들은, 지역 명문고에 (공부 실력으로)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던 데다, 당대의 그라운드를 평정한 발군의 야구 기량까지 만인 앞에 증명해 보인, 요즘 시대에도 보기 힘든 불세출의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왠지, 우리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진 분들에 대해서는, 스포츠 스타로서의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고, 스포츠 저변 확대가 불비했던 시절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뜬 것 아니냐는, 아주 못된 생각마저 살짝 들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이영민 선생에 대해서도, 막연하나마 저분들 연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영민 선생이 어느 정도 까마득하니 예전 분인가 하면, 제가 앞에서 열거한 저 두 분 대원로의, 아버지 뻘입니다. 남 선생 같은 분은 근년까지 대구 경북 지역에서, 대기업의 중역으로 한창 활동하시다 은퇴하신 상태죠. 이런 분들에게 연배상으로 거의 부친 세대일 뿐 아니라, 이분들이 야구에의 꿈을 키우고 성장하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까지 했으니, 야구팬으로 이영민 선생에 대해 몰랐다는 게 부끄러울 뿐 아니라, 왠지 죄책감까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엄복동의 자전거, 안창남의 비행기" 이는 일제 시대 어린이, 혹은 일반 민중의 노랫가락으로도 익숙할 만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런 스포츠 영웅의 대열에, 이 이영민 선생은 결코 빠질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분입니다. 사실 다른 분들과 달리, 선생의 함자가 다소 "모던"한 이유 때문에, 그 정도로 옛날 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개인적) 이유도 있습니다(한자로는 榮敏이라고 쓰십니다. 이름과 그 실물의 생애가 서로 참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던"한 함자를 지닌 이 선생은, 그 이름으로부터 출신 성분의 짐작이 가능하다 할 만큼, 대구 경북 일대 큰 갑부, 대지주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려서는 공부도 잘했던 덕에, 부친은 아들이 공부로 대성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영민의 재능은 공부보다는 운동 쪽이었고, 야구를 비롯, 축구, 육상, 복싱 등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이 집안이, 그 본심은 어떻든 간에 자제들이 어른의 말에 잘 순종하지 않는 불운한 내력이라도 있는 탓인지(농담이 아니라, 이는 중대한 복선이 됩니다. 스포일러라서 더 이상은 말 못 하지만요), 영민은 중학생 시절 부친과 큰 불화를 겪고 지원을 중단 받습니다.

 

소설에서는 이 시절에 대해, 김윤희라는 이름의, 소작농의 딸과 소년 영민이 정분이 난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영민의 부친은 노발대발했고, 윤희의 아비를 불러 물고를 내고 소작 부쳐 주던 땅을 다 빼앗았다고 합니다(이 부분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설정이 그렇습니다). 소설에서는 "영민은 뒤늦게서야 이 사실을 알고, 수습에 나섰"다고 하지만, 성년에도 못 이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겠죠. 근데 사실이라면, 영민의 부친은 대단한 비위를 저지른 게 사실입니다. 또, 윤희가 비록 영민 오빠의 사정을 잘 이해할 만큼 철이 든 소녀였다고는 하나, 자신의 아버지와 집안이 풍비박산나다시피한 이 사건을 겪고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컸겠습니까?

 

소설은 제법 절묘하게, 이것을 훗날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김윤희가 본격 민족 해방 투쟁에 나서고, 동시에 좌경 사상을 갖게 되어 해방 후 월북까지 한다는 식으로 인물의 행적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영민의 마음 속에 아주 뿌리깊은 죄의식까지 심어 주어, 그에게 완벽한 배필(외모, 지성, 같은 스포츠 선수라는 배경, 어마어마한 재력가 집안 등 모든 조건이 부합)이었던 이보패와, 끝까지 화합을 이루지 못한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에 책장을 넘길 때는 소설의 뽄새가 (솔직히) 좀 허술해 보였는데, 읽어갈수록 빠져 드는 게 이런 의외의 치밀한 구성 덕이었습니다(물론 이마저도, 왠지 어렸을 적 읽던 스포츠 만화책에서 흔히 접하던 패턴이라고 누가 말하면, 별로 대꾸해 줄 말이 없긴 합니다만).

 

제가 좀 이해가 안 된 건.... 김윤희가 바로 일경에 적발되어 구타 등 모진 고문까지 당하고 난 후라면, 3년 형을 살고 나온 후 대구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냐는 의문이었습니다(전과자, 더군다나 "후데이센진"이 교원이 될 수 있을까요?). 소설에서는 백기주와 이영민, 김윤희 3자 간의 관계도 다루고 있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 온 백기주와 영민의 조우가 이런 에피소드를 빚어야 이야기가 풀렸겠다 하는 정도로 넘어갔지만요.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아무래도 비열한 성격에다가 사사건건 영민의 진로를 훼방 놓던 마쓰모토를, 인격적으로도 한 수 위였던(과연?) 이영민이 "인간 말종 하나 사람 만들어 놓는 장면" 아닐까 싶습니다. 역시 구체적인 건 스포일러이므로 말 못 하구요. 알고 보니 이 마쓰모토란 녀석, 그런 사연이 있었더군요! 어려서부터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우리의 영민 사마와 비교가 될 수 없죠! 마쓰모토 역시, 머리 돌아가는 수준에서나 현실의 권력에서나 단지 먹은 나이에서나 비교가 되지 않는 스즈키 상의 졸(卒)에 불과했습니다만, 이 가공할 악마 스즈키조차(그는 요미우리 신문 사주의 하수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호프 이영민 선생의 그 순일한 투혼(일본 애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단어 "투혼"!)이라든가 인격적 깊이라든가 모든 면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저는 그 일본인 경찰 서장이라는 자가, 이보패 여사한테 "조건"을 다는 장면에서, 혹시 무슨 추악한 요구라도 하는 것 아닌가 해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아마 작가도 그걸 노리고 잠시 장면을 분할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 <300>에서도 그런 비슷한 설정이 있었으니, 귀부인이라 해도 식민지 피지배민족에게야 무슨 짓인들 못할까 싶어서였죠.

 

이 소설은 스포츠 이야기만 다룬 게 아닙니다. 작가는 별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표현 몇 구절 만으로, 읽는 독자에게 "이런 개만도 못한 쪽xx들!" 같은  격분을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더군요. 소설 읽으면서 스스로 민족 감정 고취할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읽으면서 이렇게 자주 열이 받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 소설의 부제를 보면 "조선의 베이브 루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영민이 실제로 자기 시대에 얻었던 별명일 뿐 아니라, 그의 생애를 놓고 봤을 때 참 어울리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 베이브 루스는 당대의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괴물급 히어로"였을 뿐 아니라, 너무도 결함이 많은 영웅이기도 했습니다. 이영민 역시 소설의 몇몇 장면에서 뭇 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장면 속에서 독자를 사정 없이 실망시키는 나약하고 허점 많은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합니다. 이 소설 말미에 귀한 자료로 나와 있지만, 그는 실제로 1920년대에 전미 올스타 팀 일원으로 일본 투어 경기를 할 시절 이 베이브 루스와 조우했고, 사진에도 나오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이영민 한 사람만을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그의 "연인"으로 당대 경성과 평양을 들었다 놨다 했던 숱한 기생들, 여배우들, 그의 "친구"로 당대 스포츠 스타였던 함용화(정확히는 형뻘), 백기주(유격수에 주로 3번을 치는 교타자, 준족이었다고 하니 홈런 타자보다 팀에서는 더 요긴한 선수겠죠. 예나 지금이나요),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나운규, 기자이자 시인, 소설가였던 심훈(심대섭), 이영민에게 선배였던 복싱의 레전드 성의경 등 당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저명인사들이, 이영민을 중심축으로 하여 등장합니다.

 

스포츠 소설, 영화에 언제나 감초처럼 등장하는, 날카롭고 삐딱한 기자 한 사람도등장합니다. 실존 인물 이길용이 바로 그입니다. 사실 그가 실존 인물이긴 하나, 마치 영화 <내츄럴>에서 로버트 듀발이 맡았던 맥스 머시 역처럼, 그런 스테레오타입의 인물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큰 걸 노리다 보니 헤드업이 되면서 어깨가 열리고.. "고 같은 말은, 현대 야구에서나 하는 말 아닐까요? 그나마 강타자가 좀 부진하다 싶으면 너무 흔하게 갖다 붙이는 "진단 아닌 돌팔이 진단"이기도 하고요. "종속이 좋다. 볼끝이 묵직하다"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처음과 끝은 이용훈 옹이라는, 작가의 외조부되는 분이 등장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용훈 선생은, 그 모친이 일본에서 허드렛일로 모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소년이었던 그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준 청년 이영민에 대한 기억으로 맺어진 걸로 나옵니다(이 설정은, 반은 픽션이라고 작가 스스로가 밝힙니다). 이용훈 옹은 아흔의 연세에, LG- 두산의 2014년 한국 시리즈 시구를 맡는 걸로 나옵니다. 한 2,3 년 뒤로 잡아도 될 것을, 곧 다가올 미래로 이렇게나 앞당겼으니, 작가분이 얼마나 열렬한 두산 팬인지 짐작도 됩니다. 두산은 사실 세기가 바뀌고 나서 누구도 부인 못할 강팀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인데, 굳이 "좀 강해진" LG를 불러 잠실에서 자웅을 겨루는 걸로 무대를 꾸밈은, 이 작가분이 청년기를 보낸 1990년대에 "강팀 엘지- 약팀 OB" 구도에서 얼마나 맺힌 한이 컸는지를 짐작게 합니다.

 

이용훈 선생을 인터뷰하는 기자는, 야구팬이면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모를 수가 없는) 그 유명한 박동희 씨로 설정됩니다. 아마 작가분과 박 기자도 비슷한 연배겠죠? 일제 시대에 이길용이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다소 평이 갈리긴 하나) 바로 박식하고 날카로운, 현장 중심의 취재에 강한 민완 기자로서 바로 박동희가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이처럼, 실존 인물을 자기 작품에 갖다 쓰는 데에거침이 없고, 그만큼 재미도 있습니다.

 

호므랑 이영민, 물론 동대문구장(지금은 철거되었고, 구 "서울운동장야구장"이었습니다)에서 조선인 1호 홈런을 날린 그였기에 이런 제목이 가능했겠지만, 그는 걸출한 능력, 파란 많은 인생, 주변을 휘어잡는 강한 개성과 카리스마로, 인간 자체가 "홈런"인 존재였습니다. 이 소설에 잘 나오지만, 그는 비단 야구 한 종목에만 강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 아니 일류 스포츠 선수 몇 명 역할을 혼자 도맡아 할 만큼 "원 맨 특수부대" 같은 영웅이었지만, 그의 인생에는 기쁨과 행운 못지 않게 짙은 그늘도 적지 않았죠. 투수의 공을 받아 쳐 담장을 넘기고 천천히 그라운드를 도는 홈런 타자가 결국 돌아오는 곳은 담장 너머가 아닌 홈 플레이트이듯, 우리네 인생도 결국 잘난 이 못난 이 할 것 없이 귀착하는 지점은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덧없음도 깨닫게 해 주는 소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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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이란 무엇인가?
제프리 베네트 지음, 이유경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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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이란 무엇인가? 과거에는 이 이론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 사람이  전 지구를 통틀어 세 사람밖에 없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물체의 좌표와 위치, 운동의 방향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정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리학의 대전제로서는 일반 대중에게 아주 익숙한 편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좋은 예로, "정말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는, 내가 움직이는 것인지 창 밖 풍경이 뒤로 가는 것인지 느끼지 못한다." 같은 게 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아이들은, "그저 느끼지만 못한다는 것 뿐, 현실은 분명, 나와 내가 탄 기차가 앞으로 가는 것이며, 저 큰 건물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뒤로 빠지고 있는 게 아님"을 잘 압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성 이론이란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잘 분별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혼란을 끼치는 셈입니다. A와 B가 비슷해 보여도, 특정 기준을 적용하면 서로 다른 것임을 가르치는 게 교육인데, 반대로 진즉부터 구별이 되던 것도 "본질적으로 같다"고 해 버리는 셈이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현실에서는 엄격한 의미의 등가속도 운동(등속도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이 존재하지 않으니, 아주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내가 움직이는지 나를 둘러싼 환경이 움직이는지 분간 못하기야 할까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만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면, 이 이론은 별 쓸모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쓸모가 없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요? 지금으로부터 다섯 세기 전에 정립된 뉴턴의 고전 역학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절대 진리의 지위를 누려 왔던 것은, 그만큼 이 이론 체계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완벽하게 설명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도 설명되고 있는 것처럼, 뉴턴 역학은 몇 가지 역설(예: 어떻게 해서 중력은, 그처럼 빠르게 다른 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지구나 다른 물체에 중력을 감지하는 센서가 달려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이나 미심쩍은 점만 제외하면, 모순도 없고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정리된 체계였습니다. 기존의 이론이 수많은 모순과 역설에 직면하여, 쓸모 없는 누더기가 된 후에 나온 게 아니라, 아직 완벽에 가까운 효용을 자랑할 때 나온 게 상대성이론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기존 뉴턴 역학이 자기 방식대로 설명하던 모든 현상을, 빠짐 없이 커버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이론이 설명 가능한 바를 빼 먹고 설명 못 하는 바가 있다면, 그 새로운 이론은 그리 빼어난 것이 못 됩니다. 상대성 이론은 그렇지 않고, 고전 역학의 장점을 모두 대체하여, 그 중 어떤 현상에 대해서건 빠짐 없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새 이론은, 뉴턴의 기존 체계가 엄두도 내지 못하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앛으로 벌어질 천문 현상을 예측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도 우리가 뉴턴 역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눈 앞에 벌어지는 모든 물리적 현상을, 뉴턴 역학처럼 매끄럽게, 또 흠결 없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성 이론을 써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은 케이크 커팅에 소 도살용 칼을 들이대는 격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을 설명할 때에는, 뉴턴 역학을 쓰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용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들(예컨대 스페이스 셔틀 안에서의 체험)을 두고, 사고 실험을 통해 상대성 이론의 관점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로 쓰여졌습니다. 일단, 상대성 이론만이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자세히 풀어 주고, 이렇게 해서 익숙해진 이론적 틀을 이번에는 일상적 현상에도 적용시켜 보는 겁니다. "뉴턴 역학으로 요러요러하게 설명되던 것이, 상대성 이론으로는 이렇게 설명 가능하다." 어느 하나가 맞고 어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론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단수가 아닌 복수로 존재함은 당연합니다. 다만 지구에서 벗어나 거대 우주나 극소 물리계를 다룰 때, 뉴턴 역학이 통하지 않음은 명백합니다. 그런 현상을 다루려고 나온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책(<우주의 구조>)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상대성 이론이 던져다 준 가장 큰 충격은, 중력이란 걸 전자기력 따위의 "힘"으로 꼭 파악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력이 작용해서 물체가 특정 방향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공간이 굽어졌기에, 물체의 질량 때문에 공간이 곧지 않고 휘어져 있기에, 물체가 그런 경로로 이동할 뿐입니다. 이런 관점을 취하면,  저 위에 적은 "왜 중력은 무엇의 매개 없이도 곧바로 전달되는가? 중력은 어떻게 빛의 속도로 물체에 감지(?)되는가?"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왜 호주에 사는 사람들은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가? 이 문제 역시, 뉴턴 역학 체계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절대적인 북쪽 남쪽이 방위로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 발 밑으로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이 아래요, 그 반대가 "위'인 것입니다. 호주쳐럼 우리에게 멀리 떨어진 예를 들 것도 없습니다. 거대한 빌딩 외벽을 거꾸로 오르는 개미 따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더 압도적인 방향으로 인력을 미치는 쪽이, 그에게는 바른 방향이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우주선을 타고 있는 두 사람이, 이제 어느 한쪽만 (일부러 조정하여) 중력 가속도와 같은 크기로 엔진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하죠. 그러면, 가속을 시킨 쪽이 움직이고, 그렇지 않은 쪽이 정지한 게 분명하지 않은가? 이렇다면, 모든 운동과 위치가 상대적이란 말도 틀린 게 되지 않은가? 설득력 강한 질문이지만, 엔진 가속 없는 우주선이 "자유낙하"하고 있다고 쳐 버리면, 깔끔한 해결이 됩니다. 가속 있는 우주선은 정지하고 있고, 가속 없는 우주선은 자유낙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결론을 우리는 애써 머리를 굴려, "사고 실험"을 통해 알아 내었습니다만,  만약 정말로 우리가 개인용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유영 중이라면, 굳이 번잡한 노력 없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뻔히 그렇게 보일" 테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제 눈에 보이는 대로, 가장 편한 설명을 찾게 마련이니까요.

 

고등학교 때 물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독자는,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하는 "무중력= 자유낙하"가 무슨 말인가 할 것입니다. 자유낙하만큼 중력의 영향이 강하게 초래될 운동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일정 시간 경과 후 지면에 추락하여 벌어질 그 끔찍한 결과는 잠시 잊고라도, 최소한 공중을 자유 낙하 중일 때엔, 이른바 중력의 힘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무중력 상태라 부르는 것입니다.

 

왜 빛의 속도를 능가하는 물체, 운동이 없는가? 빛은 질량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체는 최단 거리의 이동 경로를 찾아 움직이게 마련이지만, 빛은 더군다나 자체 중량이 없기 때문에, 물리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죠. 아인슈타인은 이를 바탕으로 갖가지 사고 실험을 전개했고, 이로부터 타임 머신 등 우리가 아는 모든 역설이 새롭게 등장했습니다.

 

이 책에서 하나 아쉬운 점은,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물체를 끌어당길 수는 이유에 대해, 그리 시원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또, 왜 공간과 시간이 별개 좌표가 아닌, "시공간(영어로는 spacetime)"으로 파악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직관적인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독자가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건, 모든 이론은 언젠가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즉 절대 진리란 존재하기 힘들다는 그런 의미에서도, "상대성"은 타당성을 갖는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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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선교 - 영광스러운 복음, 효과적인 전달
손창남 지음 / 죠이선교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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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남 선교사님의 세번째 책을 읽습니다.

 

제가 저자님의 전작들을 읽고 느낀 바는,

1) 참 진솔한 이야기를 쓰십니다. 선교사님 정도의 위치에 계신 분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막상 털어 놓으려면 참 민망하겠다 싶은 사연들도, 전혀 거리낌 없이 독자들과 공유하시겠다는 듯 다 이야기해 주십니다. 전작에서는 "그저 선교사님 개인의 스타일이려니" 하고 가볍게 받아들였는데, 이번 책을 읽어 보니 이것은 그 차원을 넘어 "선교의 철학, 신앙상의 원칙"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2)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결론은 언제나 보편의 원칙,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명제로 이끌고 가십니다. 이는, 듣거나 읽는 이의 신앙 문제를 초월해서의 일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그저 자신만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을, 모든 이가 동의해야만 하는 양 강경하고 편협한 어조로 몰고 가는 저자를 흔히 봅니다. 책은 물론 저자 자신의 의견을 내어 놓는 장이지만, 그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은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야만 합니다. 손창남 선교사님은, 정확하고 반듯한 문장(언제나 느끼는 바입니다)을 구사하시면서, 내용 역시 신앙인, 비신앙인을 떠나 누구나 공감할 주제로 거부감 없이 이끌고 가시는 게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3) 참 겸손하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강연을 들은 적도 없고(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출강도 하셨으니 예전에 제가 살던 곳과 가까운 편이었는데도요) 사진으로나마 접한 적도 없지만, 글만 읽어도 얼마나 겸손한 분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선교사의 직분에 어울리시게 엄청난 수양이 쌓인 분이실 것 같지만, 어떤 겸손한 행동을 하실 때, "누가 나를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볼 것 같아 자제했다."라고만 말씀하실 만큼 솔직하고 겸손하십니다. 수양과 내공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남 보는 시선 때문에 참았다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읽는 독자로서 부끄러워진 적이 많았습니다. 나에게 어떤 행동 중 100 중 99가 나쁜 동기이고 단 1만 착한 뜻이었다고 해도 그 1 쪽으로 합리화를 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손창남 선교사님은 100 중 99가 올바른 동기이신 것 같은데도 굳이 부끄러운 1로 돌리고 마십니다.  진정한 인격자는 이런 점에서도 남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문화와 선교>입니다. 말 그대로, 외국에서, 그것도 기독교라는 정신 체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에서, 어떤 데에 유의하고 조심해야 할지, 그리고 그런 실용적 팁을 떠나서, 선교사로서 근본적인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저는, 선교나 신앙 문제를 떠나서, 나와 다른 문화권에 속한 의식을 가진 분들을 상대할 때, 어떤 점을 조심하고 어떤 점에 신경 써야 하는지, 그 원칙을 가르쳐 주는 책으로도 읽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문화 상대주의"라는 개념을 배웁니다. 내가 옳다고 믿은 것이, 예의에 바르다고 믿은 것이, 다른 문화권에 가면 전혀 반대의 의미로 통할 수있다는 내용입니다. 그 "문화상대주의"의 생생한 모습에 대해, 이 책처럼 재미있게 가르쳐 주는 책을 여태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1) 손창남 저자께서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며 책을 쓰셨고(독자 입장에서 전달이 잘됨) 2) 저자의 진솔한 체험이 그대로 적혀 있기 때문에, 이해가 빠르고 공감이 잘됩니다. 적당히 가공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슬쩍 고친 책은, 이런 감동을 전달할 수 없죠.

 

손창남 선교사님의 전작을 읽은 독자는 다 알지만, 저자께서는 주로 인도네시아에서 선교를 해 오신 분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엄청나게 인구가 많은 곳이고, 프로테스탄트 국가라고는 하나 매우 세속적인 경향의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므로, 이웃 필리핀에 비해 기독교 신봉 인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죠. 이런 곳에서 오랜 기간, 교육(회계학 교수님입니다)과 선교를 동시에 진행한 분이라, 신앙 외적 측면에서도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생생하고 진솔한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고 계십니다.

 

이번 책에서는, 우리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인도네시아는 고맥락 문화"의 사회라는 점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고 계시더군요. 예를 들어 가사도우미를 해고할 때(이유는 절도 등입니다), 인사를 안 받아 준다든가, 평소에 베풀던 대접을 안 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눈치를 줍니다. 그러면 도우미는 무슨 뜻인지를 알고 제 발로 나갑니다. 이렇게 해야만, 해고 당한 이가 원한을 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고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체면을 지켜 준 것으므로, 마음이 찜찜한 바가 적습니다.

우리는 아주 다르죠. 그 당사자가 평생에 잊지 못할 만큼 혼쭐을 냅니다. 사안이 중대하면 공권력에 호소하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한국은 이후 고용 계약상의 시비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사안을 분명히 정리하는 게 나으므로, 이런 저맥락적 문화가 발달한 것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당장 내가 분한 건 무조건 그 자리에서 표현을 해야 내 직성이 풀리는" 미숙한 심성의 탓이 더 큽니다. 이 경우, 남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진국 미개인으로만 알아 왔던 인도네시아인보다 훨씬 못한 면을, 이 책에서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손 선교사님은 물론 "우리가 이런 점은 그들보다 못하니, 그들에게서 배우자."라고 말씀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저자는 그저,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가치가 통용된다"는 점만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예전 양반 문화, (좋은 의미에서의) 체면 문화가 통할 때는 얼마든지 이런 아름다운 풍속이 사회를 지배할 때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업화가 무리하게 진행되면서, 물론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는 되었지만,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는 풍습이 간데 없이 사라지고, 웬 나쁜 악다구니만 남아서 민족성인 양 탈바꿈한 현실이 개탄스러웠다고나 할까요.


손창남 저자께서 회계학을 가르칠 때, 부정행위를 한 학생에게 공개 주의를 준 것도, 그런 의미에서 현지에선 크게 꺼려지는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조용히 경고를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인도네시아에서만 통하는 방법이겠습니까? 또 하나, 서울에서 유학을 할 수 있게 선발된 어느 여학생이, 살짝 손 선교사님을 찾아 와 "사정이 있어 못 갈 수 있는데, 다른 학생을 보내 주셨으면" 하고 부탁을 해 왔답니다. 저자는 당연히 양해하고 다른 학생에게 기회를 주었지요. 그런데 이는, 처음 선발된 그 학생이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일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지레 겸양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사양했는데, 선교사님이 가라고 하시지 뭐야?"

어쩌면 이는, 단지 문화의 차이에만 기인한 게 아니라, 진정으로 현지인의 마음에 접근하려는 시도 없이, 그저 피상적인 소통에 머무르려 한 자신의 잘못일 수 있다고 저자는 토로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사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 상대의 영혼을 일깨우는 선교가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음은 덥썩 받고만 싶지만, 예의상 명분상 일단 몇 번 사양하는 아름다운 문화가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 좋은 미풍양속이, 저 먼 열대의 인도네시아도 같은 동양권으로서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데, 우리만 어딘지도 모르게 내동댕이치고 만 것이죠. 읽으면서 거듭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선교를 한다면서, 본국에 보고(報告) 편지를 쓸 때마다 한국 험담을 후렴처럼 쓰곤 하는 영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손창남 저자께서는 이를 볼 때마다 극히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때마다 자제하셨다고 합니다. 어느날 기회가 생겨 이를 지적하자, 그 선교사는 "내가 그러고 있는 줄 몰랐다."며 사과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 선교사님이 이끌어 낸 결론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인도네시아의 형제들을 우습게 보는 행동을 하고 있었을 지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시네요.

 

일단 저는, 선교사라는 분이 현지인을 우습게 하는 행동과 말을 그처럼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는 자체가, 소명 의식이 결여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진료하는 환자, 의뢰를 맡은 고객, 가르치는 학생의 험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모두가 다 기본이 되어 먹지 않은 이들입니다. 하물며 선교사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저자는 "나 역시 그러고 있었을지 모른다"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동양적 의미의 "군자적 인격, 태도"가 보이는 처신입니다. 가장 안 그러실 것 같은 인격자가 오히려 자신을 탓하고, 가장 천박한 인격자가 허위로 남을 고발하는 법입니다. 선교의 기본, 아니 더 나아가 외지인을 대하는 기본 자세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 보는 겸허한 자세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서양 선교사의 행태에 분개하기보다, 저자의 겸손한 자세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저자가 그저 양순하신 성품인가 하면, 한국인들이 예의가 바르다는 주장에 대해, "일본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은 영향이다."를 가당치도 않게 들고 나오는 어느 일본인의 주장에 대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끼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 자리에서 시정이 되고 사과를 받은 건 말할 것도 없구요.

 

저자는 인도네시아어를 상당히 잘 구사하시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현지인이 아니기에, 틀린 어법 구사로 학생들에게 웃음을 사고(아무래도 대학 과정 강의이므로 그럴 수밖에요). 소통이 안 되다 보니 조교가 대신 시험 출제를 하겠다는 제의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그는 "앞으로 내가 틀린 표현을 하면, 적어서 제출해 주는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겠다."는 방침을 정해서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러니 괜한 웃음으로 수업 분위기가 나빠지고, 권위가 실추되는 일도 줄어 들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내리는 결론이 일품입니다. "나 자신을 낮추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그들 사이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방법도 좋지만 그 바탕에 깔린 철학이 더 멋집니다.

 

어느 가톨릭 신부와 이런 대화를 나누신 경험도 들려 주고 있습니다.
"신부님,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불을 붙이려 하지 말고, 부채질만 하십시오. 불은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드신 인간인데, 이미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는 그 척박한 영혼 안에 다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미 싹이 튼 자리를 마다하고 엉뚱한 지점애서 새 불을 만들려 하면, 기존에 자라던 심성마저 망칠 수 있습니다. 이미 자라고 있는 그 불씨를 찾아, 요령껏 부채질을 해야 합니다. 그 요령을 알려면, 그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선교에 국한한 이치겠습니까? 인간 사는 세상, 소통이 이뤄지는 근본의 철칙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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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디자인하라 -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으로 이끄는 20가지 전략
러스 웅거 & 댄 윌리스 & 브래드 넌널리 지음, 추미란 옮김 / 정보문화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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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영어 단어 "디자인"에는, "기획하다, 설계하다"의 뜻이 더 우선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국인들이 대뜸 이 단어에서 "미술적 아름다움"만을 떠올리는 건, 우리만의 오해요 원칙에서도 벗어난 일이라 하겠습니다. 최근에 들어 소위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애플의 성과와 평판 때문에, "이제는 기능 뿐 아니라 겉모습도 상당히 중요하게 되었나 봐."처럼 생각하는 건, 그런 의미에서 좀 오해에 가깝습니다. 잡스나 조니 아이버의 생각이나 의도는 "올바른 모양에서 최선의 기능이 나온다"는 원칙론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화의 기획, 설계" 역시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저자(들)의 의도 역시 그런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그 생각이, 생각을 짜낸 이의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이상, 그 사람의 외계를 향해 어떤 유익한 결과를 빚어내지 못함은 당연합니다. 생각이 성과를 내려면, 외부와의 유의미하고 효과적인 소통을 거쳐야 합니다. 효과적인 소통을 거쳤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라는 법은 없지만, 목적지에 가려면 일단 다리를 놀리고 걸어야 하듯이, 올바르게 걸음을 걷는 방법을 몸에 익히는 건, 그 사람의 가진 체력(때로는 의지 포함)을 최대한 활용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 디자인에서 바른 기능이 나오고, 바른 (운동) 자세에서 최대한의 효과와 파워가 발휘되며, 대화를 하는 시스템과 관습, 룰이 올바로 잡혀 있을 때 모임의 성과가 극대화되는 건, 다 같은 이치의 결과입니다. 이 책은, 요즘 많이 출판되는, "어떻게 하면 획사에서 열리는 그 많은 회의를, 무용지물 아닌 성과의 장으로 바꿀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나온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회의 많이 하는 직장치고 제대로 된 곳 없다. 회의를 다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분도 "소통의 중요성"은 강조를 합니다. 회사가 조직인 이상 회의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회의가 문제가 아니라, "소통이 안 되는 잘못된 회의"가 문제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대화하는 교육, 토의하는 버릇"을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자기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줄을 모르고, 남의 의견에 일단 귀 기울인 후 그 장점, 단점을 정리해서 전체 분위기를 생산적으로 바꾸는 데에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결국 몇몇 소수끼리 뭉쳐 "뒷담화까는" 자리가 가장 신나는 자리이며, 아예 중상 모략의 장으로 회사를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안 되는 조직은 이래서 안 되는 거지, 회의가 많아서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책은 일단 "촉진의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즘 대세가 또, 이 "촉진"의 방법을 일러 주는 책들의 기획이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앞에서 제가 적은 대로, 말은 많은데 전부 각개약진입니다. 오히려 독재자(즉 사장)가 이끌고 가는 것만도 못한 결과가 나오며, 실제로 그 많은 회의가 다 무용지물이며 결정은 다 사장이 합니다. 그런데 이 결과는 사원 모두가 꺼리는 상황이며, 실제로 사장 역시 이 분위기를 마냥 즐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머리를 여럿 맞대게 헸으면, 그 머릿수만큼의 성과가 나오는 게, 사장 입장에서도 월급이 아깝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촉진"이란 무엇이냐. "일을 술술 풀리게 하는 것"입니다. 1) 일단 대화가 잘 풀려야 합니다. 사원들이 각각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습니다. 잘만 뭉치게 하면 작품 하나 나옵니다. 그런데 서로 오해, 감정 싸움 때문에 말이 얽히고 꼬이며, 이 때문에 그 좋았던 아이디어가 다 묻히고 맙니다. 2) 일단 대화가 잘 풀렸다면, 전체 기획안의 성사를 위해 이 대화의 성과가 최대한 반영되게 "촉진"해야 합니다. 촉진(퍼실리테이팅)은 바로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은 1)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2)는 주로 경영자가 조직 구조 개편 과정에서 고민해야 할 분야이니까요.

 

대화를 두고 일정 룰과 틀을 만들어서 행하는 관습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도 있습니다. "그건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야지, 틀을 짜면 더 비효율적이야." 이 말도 일리가 있지만, 우리나라 회사처럼 중구난방, 아니면 정반대로 일방통행식 지시 하달인 환경에서는, 초보적 룰의 정립이 꼭 필요합니다. "를을 정립"한다고 하면 그런데 너무 경직화한, "초등학교 발표, 토의"처럼 수준이 떨어져 버릴 수 있으므로, 이 책(그리고 다른 논자와 주장들)은 한 발 물러서서 "원칙적으로 자유롭되, 대화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경우에 활용하는 '촉진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보통 대화 촉진 기법을 다룬 다른 책은, 단일 저자가 자신만의 체계를 세워서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이런 책은, 머리에 정리하기는 쉽지만 실제 응용을 해 보면 좀 힘든 수가 있었습니다. 1) 미리 상정한 경우의 수가 적다. 2) 이 체계에 대해 다른 성원이 거부감을 느끼면, 회의 전체에 적용하기 힘들다. 반대로 이 책은, 1) 다양한 저자들이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여 의견을 펴고 있다. 2) 하나가 안 되면 다른 방법을 꺼내 쓸 수 있다. 는 게 좋은 점이었죠.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독자가 기대한 건 대회 촉진술인데, 여기에 등장한 많은 분들은 명강사가 상당수입니다. 물론 우리는 PT 자리에서 많은 "청중"을 상대로 내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상황에서는, 회의 자리에서 중구난방이 되기 쉬운 의견을, 나라됴 나서서 정리하는 게 더 시급한 상황인데, 이 책에서 다룬 "촉진'은 포커스가 좀 분산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에, 한국과 미국이 서로 회사 소통 환경 면에서 크게 다르다는 점도, 책의 효용을 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하지 못하는 하나의 장벽이었고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주로 관리자, 경영자 입장에서 참고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번역이나 편집은 아주 깔끔합니다. 통독보다는 레퍼런스 용도로 더 탁월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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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란 무엇인가 - 세계 최고의 예술대학,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의 크리에이티브 명강의
로잔느 서머슨 & 마라 L. 허마노 지음, 김준.우진하 옮김 / 브레인스토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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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왜 도덕인가, 같은 질문과는 달리, 누가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면, 그건 그리 한가(?)하지 않고 꽤나 심각한 질문으로 여겨집니다. "정의"나 "도덕"이 사소한 이슈라는 게 아니고요. 무엇이 "창의성"인지를 알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건, 앞으로, 아니, 이미 진즉부터, 생존의 문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기존에 정립된 지식과 기능을 열심히 익히고, 스승이나 명인 못지 않게 발휘하도록 반복 연습하는 건, "도제식 교육"이다 뭐다 해서 저 예전 봉건사회, 아니면 그의 안티체제로 등장한 산업사회 시절에나 통하던 덕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남들이 아무도 생각지 않던 기발한 아이디어와 발상, 사물을 보는 눈을 갖춘 사람이라야 멋지고, 존경 받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다들 편하게 여기는 세상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이런 것이 사회적으로 새로운 가치, 지향성인 양 자리 잡은 줄로 다들 아는 탓에, 창의력 없이 창의력스럽게 보이게 꾸미기만 하는 허위가 판치는 모습 역시 간혹 보이기도 합니다. 남의 것을 훔쳐 와서 제 것처럼 꾸미는 얄팍한 사기인데, 이런 술책 역시 언젠가는 백일하에 드러나서 "무엇이 정의인지"가 판명되기도 하지 싶습니다.

 

아무튼, 학교란 본디 기존의 지식 체계를 교습, 전수하는 곳임을 감안하면, "창의력을 가르치는 학교"란 그 자체로 큰 모순, 역설을 안고 있는 개념처럼 보입니다. "배워서 습득될 수 있는 거라면 그게 과연 창의력일까요? 창의력은 설사, 좋은 스승을 만나 후천적으로 개량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타고난 바가 어느 정도 있어야 그게 창의력이라 불릴 수 있지, 어떤 시스템 아래에서 훈련을 받는 일만으로는 과연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의력이 길러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더랬습니다.

 

여기, 아이들을 창의력 만땅의 인재로 키워 주는 학교가 있습니다. "아이들'이라곤 했지만 "줄리어드 스쿨"처럼 대학교 학부 과정에 상당하는 학교입니다. 한국에서 특별한 지명도를 지닌 줄리어드가 음악 분야의 세계적 인재를 키워내는 산실이라면, 이 학교,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디자인 쪽의 적성을 적극 자극하여, 빼어난 미적 감각을 함양하고 실제로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에 그 교육 취지의 중점이 놓여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화가, 조각가, 의상 디자이너, 행위 예술가 정도로 진로가 정해지는가 보다." 같은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예 이 대학을 모르거나, 미대 진학을 염두에 둔 부모들 사이에서만 지명도가 있을 뿐이죠. 줄리어드 같은 곳은 음악과 전혀 연이 없는 이들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과 크게 대조된다고 할까요. 이곳은, 물론 졸업한 후에 가장 좁은 의미의 전공을 잘 살려, 훌륭한 예술가로 진로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좁은 문"을 애써 통과하지 않는 이가 더 많습니다.

 

이 학교의 졸업생 중엔 로스쿨을 진학하여 변호사가 되는 이들도 있고, 영화 제작 분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으며, 정치인이나 철학자가 되는 경우도 종종 나옵니다. 특히 변호사(그것도 성공적인 커리어의)가 된 이는, "내가 학생 때 이 학교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 방안을 설계할 것인지 착상하는 능력이었다"고도 술회합니다. 어떻게, "미대를 나온 아이(한국식 개념으로라면 그 이상이 아니죠)"가 변호사로, 그것도 간신히 로스쿨 졸업장만 딴 채 변변한 개업 활동도 못하는 잉여인력이 아닌, 의뢰 사건이 폭주하는 일류 변호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해답은 창의력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깔끔하고 단정한, 정형화된 사례와는 달리, 학교 밖으로 나와서 직면하게 되는 세상은 혼란과 모순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그 속에서 질서와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예술의 정의가 본디 그것입니다. "숨어 있는, 감추어진 진 선 미를 찾아서 눈 앞에 보여 주는 것". 변호사의 일 역시, 혼동과 다툼, 갈등 속에 파묻힌 정의와 진실을 법정 앞에서 재구성하는 것 아닐지요? 이런 의미에서 심미안과 창의력은 서로 밀접히 통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다시 바꾸어 놓는 과정에, 이 능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창의력을 "문제 해결 능력"으로 정의하는 앞의 저 말에 다시 주목해 주십시오.

 

"창의력은, 규칙과 상상력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저 제 멋대로 늘어 놓고 난잡한 자의적 진술, 표현을 하는 게 창의력의 소산이 아니라는 걸 이 말은 여실히 가르쳐 줍니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소재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고기의 육질이 좋다 한들, 사람이라면 생으로 그 피 뚝뚝 떨어지는 살점에 입을 대고 뜯어 먹을 수 없습니다. 규칙을 염두에 두고, 그것도 상당 부분 신경을 써서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든 후, 그에 대한 구속이 나의 프레임 일부를 형성함에 일종의 희열을 느끼는 정도가 되어야, 그 머리에서 나온 상상이 진정 가치 있는 질료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의력은, 방종과 태만의 아들이 아닙니다. 언제나 "긴장"된 삶을 살아가는, 질서라는 아버지의 잘 교육 받은 단정한 자제입니다. 어떤 학생은 그렇게 물었다고 하는군요. '미국 이민의 역사와, 내가 받으려는 미술 교육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아마도 이 질문에서, 이 학교의 커리가 대충 어떤 성격인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왜 이 학교에서, 정치인, 사회 운동가, 기업인, 법률가가 배출될 수 있었을까요? 답은, 미대에서 미술만 가르치지 않고, 인간 문명이 지금껏 일궈 온 그 모든 지혜와 요령, 기본 원리(이를 두고, 이 학교의 교수진은 "파운데이션"이라고 부른다 합니다)를 가르치며, 그를 바탕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창의성"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창의력은 자의(姿意)의 산물이 아닙니다. 가장 정직한 영혼이, 엄격한 규칙의 체스판 위에 정연히 펼치는 수(手)의 향연입니다. 저는 이 책의 교수진이 설명하는 "인재와 창의성"의 내용을 듣고(읽고), 마치 영화 <X-men>에서 (타고난) 초능력을 학생의 개성에 맞게 섬세히 전정(剪定)하는, 익재비어 교장 이래 그 빼어난, 마법의 교사, 교수의 강의처럼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의 명문대 열 곳이 덤벼들어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이 작은 미술 학교의 저력 그 원천이 어디인지 잘 알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는, 잘 아시다시피 미국 건국 선조들이 최초 정착한, 아주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그 이름도 "프로비던스", 신의 섭리와 통한 듯한 신성하고 경건한 느낌마저 주는 보통명사죠. 이런 곳에서, 세상의 어느 관습에도 속박되지 않을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 그 재기를 닦는다니, 참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학교의 저력은, 왜 합중국이 강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 중의 하나를 잘 지탱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미래는 인재의 힘에 달려 있으며, 그 인재의 힘을 구성하는 결정적 인자는 창의력입니다 어찌 미술에만 국한한 재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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