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평민열전 -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또다른 조선
허경진 지음 / 알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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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명의는 허경진 교수의 "편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열전" 은 일차 사료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사관의 직접 취재가 개입해야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기록자의 시대가 피(被)기술의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문헌 고증이라는 간접적 방법론조차 통용의 한계가 있습니다. 허 교수님은 주로 <연려실기술>등 사인의 기록을 통해 이 책을 편집하였으므로, 제목에 쓰인 "열전"은 가장 넉넉한 의미로 새기는 게 나을 것입니다.


사마천의 <열전>도 언제나 개인 중심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영행열전>, <자객열전>, <골계열전> 등 테마 위주의 편집을 택한 게 제법 되며, (그들 입장에서) 이민족의 내력과 최근의 동향을 다룬 <흉노열전>, <조선열전> 같은 것도 있습니다. 저자 허 교수님도 말씀하시듯, 어떤 가치 판단과 사상의 체계에 맞춰, 개인사는 하나의 도구적 방편으로 차용했을 뿐인 게 동양의 역사 기술 그 기본적 태도입니다.


따 라서 이 책이, "평민 열전"이라는 제목을 취한 건, <연려실기술>등의 문헌(혹은 그 저자)이, 자신이 속한 시대 정신 그 변화를 예리하게도 포착하여, 태생의 신분이 아닌 그 개인의 능력에 의해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대담한 시도들이, (유감스럽게도) 여러 문헌에 산재하여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채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처럼 책 한 권에 묶어 그 이상형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19세기에 이 이름을 달고 대로를 뢀보하며 낙양의 지가를 올렸어야 마땅했던 그 내러티브들이,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이제서야 뜻이 통하고 배가 맞는 동무들끼리 한데 엮인 것으로 봐야겠죠. (저자는 자신의 전작 제목을, <조선위항문학사>로 하여 내었을 때의 아쉬움을 이제서야 해소했다는 취지의 소회를 밝히기도 합니다)


대상이 양반 신분인 경우에도, 사실 친우나 후손에 의해 문집 편찬이나 기록이 이뤄진 경우 그 객관성에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면천(免賤)에 갓 이르렀을 뿐인 한미한 출신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명이 이뤄졌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시문에 능하고 즉흥의 서술에 달통하거나 동서고금의 사항에 대한 박학한 이의 재주를 워낙 쳐 주는 시대였다 보니, 비록 신분이 버젓하지 못할 뿐 자유자재로 문자를 구사하는 은사(隱士)에 대한 찬탄이, 보는 이 누구에서건 정직하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출신 성분에서나 스스로 성취한 문재의 수준에서나 타에 꿀릴 것 없는 이들로부터라야 정직한 칭찬이 나왔을 것이고(예를 들면 이 책의 전거를 이루는 이긍익 같은 이들), 그렇지 못한 채 타인의 성취를 시기 질투하기에 바쁜 속물들은 그저 남을 까내리기 바빳으리라 예상됩니다.


열전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단명하거나, 무고한 옥사를 치르거나, 괜한 모함을 당한 이가 유독 많습니다. 재주는 빼어난 데 비해 신분이 받쳐 주질 못하니, 그들이 헤치고 나가야 할 풍파의 험난함이 그만큼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악한 여건 속에서 제 재주를 갈고 닦은 사연이 있어서인지, 후학을 돕고 곤궁한 동기, 친족을 보살피는 대인의 도량 역시 더 빛나더라는 게 공통되는 점이었습니다. 시대가 많이 앞선(심지어 종계 변무가 아닌 임란 청병의 공을 그에게 돌리는 version이 다 있을 정도니) 역관 홍순언의 사연을 다룬 것도 있고, 경종 때 노론 4대신 중 김창집, 그의 동생 김창흡 등이 보조 역할로 나오는 일화, 그리고 19세기까지 내려와 이건방 등이 등장하는 사연도 실려 있습니다.


각기 시대의 편차는 크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간 재사들의 분투기는 언제나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바 있습니다. 또, 평소에는 주연급으로 등장했던 명문 거족의 명사들이, 이 책에서는 "평민 주연"을 빛내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이런 위대한 평민들에게, 근대화나 개방의 물결에서 더 큰 역할이 주 어졌다면 국권의 침탈이 그리 쉬이 이뤄지지는 않았을 텐데, 저 현해탄건너 열도에서, 정치적 소외 세력이었던 사쓰마 -조슈 번의 지사들이 막부의 동요를 틈타 거침 없이 발흥했던 사실과 크게 대조되는 바 있어 읽는 이의 깊은 탄식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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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라시 쿄우헤이 지음, 김해용 옮김 / 여운(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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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대한의사협회에서, 인간의 사망 판정 기준을 "뇌사"로 정하자고 공식적 입장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주요 일간지에서도 이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한 이유에서였는지, 이 발표를 1면 톱으로 비중 있게 다루었고, 그 중 한겨레신문의 만평에선 어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이가 "뇌 사려!"를 외치며 돌아다니는 컷을 담기도 했죠.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히, 사법부의 공식 입장은 "심장사"로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편의"보다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헌법상, 그리고 실정법상의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데에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사법부의 단호한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 국민, 시민들의 마음을 크게 안도하게 만드는 하나의 보루, 방벽으로 여전히 기능합니다.

 

2000년,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초안"이 비교적 치밀한 모습으로 완성되었음을, 기자 회견을 통해 전 세계에 공포했습니다. 이때와 인접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복제 동물에 관한 성과가 줄을 이어 발표되었고, 줄기 세포 연구를 통한 장기 대체, 난치병 치유의 가능성이 금방이라도 눈 앞에 현실화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죠. 그 무렵으로부터 대략 15년이 지났지만, 이런 연구가 갖은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당장의 희망을 줄 것 같은 성과가 딱히 보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유전자 해독에 퍼 부은 그 숱한 인적, 물적 노력이 다 헛된 것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몇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고, 바로 그 내용이 이 책 중에 나옵니다(에이즈와 천식의 치료). 인간 유전자의 97%, 아니 그 이상이 해독되었다면서, 고작 그 정도 성과가 난 것은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 그 해답도 이 책 안에 있습니다. 이 책은, 로버트 쿡-디간이 쓴 <인간 게놈 프로젝트>라는 책에 대한, 20년 후의 속편, 혹은 화답을, 눈물 겹도록 인간적이고 대책 없으리만큼 물욕 없는 어느 일본 저널리스트, 방송인이, 우리 같은 일반인을 위해 써 낸 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97%, 아니 그 이상이 해독되었다면서 왜 이렇게 난치병 치유가 더딘 것일까요? 생각 같아선 벌써 4, 5년 전에, 암, 에이즈, 신장병, 심장병, 요즘 떠들썩한 루게릭 병 등 거의 모든 치명적인 질병, 신체 질환에 대한, 완벽하지는 않아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처방이 나왔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게, 일반인, 문외한의 기대입니다. 실제로, 이 책의 1장과 2장은 에이즈와 천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흔히 동성애자들에게 직격탄이다 싶은, 그들 특유의 성생활 방식 때문에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병이 에이즈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문란한 관계를 가지면, 이 병은 이성애자 동성애자를 가리지 않고 면역 체계를 파괴하죠. 심지어 수혈을 통해서도, 그리고 임신 중의 태아에게도 수직적 감염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특히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게 이 병입니다.

 

헌데, 주변의 파트너들은 이 무서운 병에 걸려 특수한 관리를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 유독 자신만은 이 무서운 HIV 바이러스로부터 완벽한 무풍지대로 남았던 이가 있습니다. 뉴욕 주민인 화가 스티브 크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책에 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으나, 결국 이분도 동성애자였다는 말입니다). 이분은, 주위의 동료들이 다 이 병마의 겨냥을 피하지 못해 무서운 고통과 스트레스,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만은 가벼운 증상조차 경험하지 않고 있는 점에 의아해했습니다.

 

그는 연구소에 자원하여 찾아가 실험 대상이 되길 원했습니다. (책에는 "어느 연구소"라고만 나와 있는데, 이 연구소는 역시 뉴욕에 소재한 Aaron Diamond AIDS Research(http://www.adarc.org)입니다. 1996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데이비드 호 박사가 바로 이 연구소의 창립자죠) 그가 제공한 유전자는 이후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인격적 존엄과 가치가 달린 이 유전자 정보가, 이후 여러 연구소들에 의해, 상업적 특허를 내는 데에 무차별적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유전자 정보를 이용하여 약품을 개발한 연구소, 제약회사는 특허를 등록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고, 이 책에서 주된 비판 대상 중 하나인 벨기에의 "유로스크린" 연구소 역시, 이 유전자(CCR5)를 이용해 파생적 특허를 독자 출원하였습니다.

 

책에서는, 이 크론 씨가 분노를 표현했다고 적고 있습니다(저자는 NHK 프로듀서이며, <인체 특허>라는 제목의 다큐를 제작하여 당시 전혀 낯설었던 이 분야의 현황에 대해 대중의 경각을 일깨운 바 있습니다. 크론 씨는 당시 다큐에 출현하여,  이 같은 자신의 태도를 밝힌 것입니다). 그분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전자는 인류 모두의 자산이다. 그런데 왜, 특허를 얻어 낸 일부 기관만 독점적으로 그 혜택을 누려야 하는가?"

 

저자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허라고 하면 대뜸 발명 비슷한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어째서 법 제도가, 인간의 유전자까지 특허 대상으로 하여, 일반의 접근을 가로막게 돕고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문제는, 특허 제도, 나아가 지적재산권 제도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성질이기도 합니다. 어떤 혁신적인 지식, 발명  따위가 공개되면, 누구나 그의 혜택을 보게 하는 것이 문화와 경제의 발달에 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애써 처음 세상에 내 놓은 것이, "무임승차자"들에 의해 제한 없이 이용된다면, 그건 결국 "노력한 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죠.

 

그래서 각국의 특허 제도는, 1) 일단 최초 고안자에게 독점적 혜택을 주되, 2) 그 시한을 일정 기간까지만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애써 노력한 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없다면, 이제 아무도 혁신과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사회는 뚜렷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전망도 타당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의 이기심에 기대어 여기까지 놀라운 발전을 이루고, 물질적 풍요를 이뤄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 법원은, 자국의 오노약품이라는 제약회사와, 특정 유전자 관련 이미 특허를 취득하여 일본에서까지 인정 받은 (위의) 유로스크린 간의 소송을 취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판결은, 오노 연구소의 손을 일부 들어 주었습니다. 판결 이유는, 특허를 위한 세 요건, 즉 산업성, 신규성, 진보성 중, 신규성 요건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유로스크린의 특허는 무효라는 것이었습니다. 신규성 요건이 결여된 건, 일본 내에서 이미 이 사항에 대한 더 앞선 시기의 공표(모 연구소의)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판결 역시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유인즉, "인간 존엄을 해치는, 유전자에 대한 특허 출원 자체를 부인해야 마땅함에도, 고작 신규성 요건 하나의 결여를 이유로 유로스크린의 청구를 기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도 어느 일본 연구소가 일찌감치 이 발표를 하지 않았더라면, 유로스크린의 특허는 인용되었을 테고, 그것은 인간 존엄을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이 해로운 제도의 존속을 인정함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는 실용적 관점에서도, 유전자에 대한 특허를 부인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느 대학이나 민간 연구소가, 순전히 공익적인 목적으로 이 유전자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해도, 특정 기관이나 제약회사가 소유한 특허라는 이유로 이것이 불허된다면, 수많은 난치병 환자가 고통을 받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른 딜레마에 봉착합니다. 난치병 치유를 위한 신약은, 이를 개발한 회사에게 무제한의 이익을 주는 식으로 다루어져도 될까요? 이익이 없으면 연구 개발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처방이, 고가의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환자들에게만 제공된다면, 이는 너무도 비인도적인 처사입니다.

유전자 특허 역시 같은 영역이죠. 특정 질병 치유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한 회사가, 유전자에 대해 특허를 얻고 이제 사운을 건 채 신약 개발에 나섭니다. 만약 신약 개발로 인한 막대한 이익이 기대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대규모 자본 투입을 통해 이런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회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능을 순전히 정부의 공공재 생산 영역에 맡기거나, 뜻있는 민간 연구소의 재량에만 의존한다면, 난치병의 치유는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더 요원해질 수도 있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인격적 존엄을 담고 있는 유전자를 기꺼이 연구소나 제약 회사에 공여한 개인에 대해, "유전자는 인류 공용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합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역시 인권의 침해로 다루져야 한다는 거죠. "모두의 재산은 누구의 재산도 아니다"라는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셈인데, 적절한 이기심의 자극과, 인간 존엄의 수호 요지라는 상충하는 두 가치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느냐는 게 결국 관건이겠습니다.

 

일본이나 우리 법제와, 미국의 법제가 보호 범위 면에서 서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이번 애플과 삼성 간의 소송에서도 드러났지만, 미국은 그 보호 범위가 비교적 넓습니다. 이 책에서도 나와 있듯, 의료상의 특정 치료 기술마저도 미국은 보호대상으로 잡는 반면, 우리와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전자가 어떻게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가치 판단상 간단히 다뤄질 성격이 아닙니다.

 

스티브 크론 씨는 작년 이맘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나이 66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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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MBA - 비즈니스 성공의 불변법칙, 경영의 멘탈모델을 배운다!
조쉬 카우프만 지음, 이상호.박상진 옮김 / 진성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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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이니 의학이니 하는 건 제대로 된 교수진과 빼어난 시설에서 배워야만 훌륭한 인력이 양성될 수 있죠. 하지만 경영학도 과연 그럴까요? 명문대에 설치된 소위 "최고경영자 과정"을 보면, 어떤 교육이나 연구가 이뤄진다기보다는 사교(social)나 인맥 형성이 주된 목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경영학이란 샤프한 두뇌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학문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빼어난 창업자나 CEO가 되는 건 아닙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거의 대부분이 법률가 출신인데, 오직 조지 W 부시만은 MBA가 최종 학위죠. 한국에서는 MBA에 대한 상당한 거품이 형성되어 있어 이 이름에서 괜한 선망과 권위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본토에서의 평판은 별 것 없습니다, 한국인들 중 학력 콤플렉스가 강한 이들의 공연한 호들갑이 빚은 해롭고 비생산적인 거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퍼스널 LAWYER"라든가, "퍼스널 닥터"라는 책이 그것도 한 권 분량으로 나온다면, 그것은 식자층의 비웃음을 사기에나 딱 좋을 것입니다. 한 권으로는 죽어도 마스터할 수 없는 게 그 코스들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퍼스널 MBA"라면, 이것은 잘만 편집하면, 스타트업, 기업 실무자 등이 두루 참고할 수 있는 좋은 핸드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경영학이라는 게 본디 심오한 학문이 아니라는 점, 사업에서 정말 성공하고 싶다면 굳이 경영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점, 두 가지 이유에서 타당합니다.

 

이 책은 한 권 분량으로는 상당히 두꺼운 편이지만, 경영학이 커버하는 영역이 매우 방대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자들로선 불평을 가지기보단 "이 한 권으로서 퍼스널하게나마 뭔가를 뗄 수 있구나."하는 안도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내용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의 제목은 "가치 창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업가, 기업의 소명은 무엇인가. 단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익의 창출"이지만, 그 수익이란 타인에게 모종의 가치를 제공해야 창출이 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이 챕터는 경영학의 본질과 기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 "가치 전달"의 내용은, 1장 가치 창조와 함께 설명되기 쉽습니다. 다만 2장 마케팅, 3장 영업 의 뒤에 배치된 건, 비즈니스의 실제 활동이 이뤄지는 순으로 고찰하다 보니 그리 되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사실, 현장에서 갈고 닦은 감, 소위 "촉"을 자랑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가르침"이 별반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도 어느 자리에서 보다 고상한 표현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런 교과서에서 다루는 용어를 사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현장에서 이를 실적을 젊은 나이에 다 이룬 이들에게도, 이런 부분이 부족해서 언제나 높은 이들과의 만남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5장은 재무와 회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부분이 가장 난감합니다. 나름 이쪽에 적성이 있어서 그리 큰 힘 들이지 않고 테크닉을 일찍 깨친 입장에선,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다" 같은 말이 가능하고, 따라서 그 방대한 지식이 한 권도 아닌 한 권의 한 챕터(채 100페이지도 되지 않습니다)로 마무리된 모습을 봐도, "그럴 수도 있겠거니" 넘깁니다. 하지만 고생고생해서 회계학을 배운 이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면, 바로 코웃음을 치거나, 심지어 분노에 가까운 태도를 보입니다(과민반응에 불과합니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이 책이 한 챕터 분량으로 처리하고 말면 본래 그런 것인가 보다 하며 장님 코끼리 더듬는 반응, 저자의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기대는 태도를 보입니다. 아슬아슬하죠.

 

제가 느낀 점은, "최고 경영자인데, 회계에 대해 샅샅이 알 필요까지는 없고, 실무자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감독은 가능한 정도의 개념 잡기"까지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중에 나온 스타트업 참고 서적을 보면, 제법 상세한 회계 실무 지식을 가르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분량의 한계가 있는지라, 그 책만 봐서는 기법을 마스터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건, 당신이 만약 누군가의 밑에서 회계-재무 실무를 담당하는 위치라면, 이 책 한 권(의 챕터 하나)으로 "퍼스널"하게 때우려는 기대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직한 말로, 여기 실린 내용은 정말로 "회계와 재무의 개념이 무엇인지" 정도까지만 배울 수 있는 수준입니다.

 

인사관리 이론의 테마와 관련하여 비교적 무난하게 읽읗 수 있는 포맷으로 6, 7, 8과가 이어집니다. 아마 이 파트를 읽으신 분 중 좀 정직한 분이라면, "웬 자기관리 레퍼토리?"하는 의문이 들만도 합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이 세 챕터는 자기관리 서적에서 줄창 다루는 오랜 소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지적되듯, 같은 물을 마셔도 "암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며, 독사가 마시면.... "인 법입니다. 규모가 착건 크건 경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지는 데에, 아무리 뻔한 소리라도 그게 뻔한 소리로만은 다가오지 않게 마련이죠.

 

9, 10, 11과는 조직론, 생산관리 테마입니다. 사실 이 영역은, 각론에 너무 치중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기 십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최소한 저는요). 이 조쉬 카우프만이라는 저자에 대해 저는 처음 들어 봤습니다만, 이 마지막 3 챕터를 읽는 것만으로도 독서의 보람이 있다 할 만했어요.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를 해도, 그 강조의 포인트가 다르고 쌓인 내공의 깊이가 다르면, 듣는 청중의 감동도 달라지게 마련이며, 독자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는 MBA 학위가 없는 분이지만(사실 MBA 코스에서 가르치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지금 귀국해서 아까운 학위 썩히며 놀고 있는 이가 한둘이 아니죠. 그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자신만의 깨우침, 귀한 각성을 책 한 권에 녹여 놓고 있기에, "그 요약하는 방식이 예사 내공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읽으면서 계속 들더군요. 이 책의 효용은, "경영에서 진정한 배움은 책 한 권으로도 가능하며, 과시용, 세탁용 학위가 꼭 필요한 게 아니다"는 점을 가르쳐 주는 데에도 있습니다. 책 한 권이 (퍼스널이라는 수식어를 달고는 있으나) 엠비에이 전 코스 대체를 자처할 정도면, 그 허울 좋은 MBA라는 것에 대해서도 대략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p431 맨 처음에 헨리 포드의 말이 인용됩니다. "내가 일손을 원할 때 왜 머리 좋은 놈이 항상 따라붙는 것일까?"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 되실까요? 이 말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Why is it every time I ask for a pair of hands, they come with a brain attached?
이 말의 뜻은
"나는 그저 손 두 개만 원했는데(단순 반복 노동력), 왜 맨날 그 손에 머리가 딸려 오는 거지?" 입니다. 포드 같은 구시대적 CEO는, 노동자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고용주가 시키는 일만 하기를 원합니다. 책의 이 부분은, 단순 반복형 노동을 시키는 데에도, 그게 기계가 아닌 사람인 이상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기란 그만큼 어려움을 뜻합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반 휴머니즘적 발상이지만, 지금 여기는 경영학 논의의 장이니 잠시 사회학적 시선은 접어 두고 하는 말입니다.

W. Edwards Deming의 말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 이름이 잘못 적혀져 있습니다. Deming이 옳으며, Edming이라고 적힌 이 책의 표기는 틀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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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사랑 - 순수함을 열망한 문학적 천재의 이면
베르벨 레츠 지음, 김이섭 옮김 / 자음과모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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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대중 사회에서는 생각하기 힘들지만, 20세기 초엽만 해도 세상은 귀족, 상류층, 자산가 계층의 호흡과 관심사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문인들, 그리고 고급 기예를 몸에 익힌 예술인들이,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대중 사회에서 연예인들이 누리던 위치를 대신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세의 여성 편력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눈에 띄게 드러나지만 않을 뿐 자의식 강한 문인들이 한 반려자를 그리 오래 곁에 두지 않는 경향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특히 달라진 게 아닙니다. 이는 바람기라든가, 성실성의 결핍 등과는 또 다른 정신적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헤세는 "배고픈 시기를 오래 거친 후" 비로소 세간의 관심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 일찌감치, 스타 연예인처럼 문단과 독서인의 주목을 끈, 젊은 나이(20대 중반)에 데뷔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를 괴롭힌 건 물질적 곤궁이 아니라, 내면에서 휘몰아치던 격정과 불안, 균형의 파괴 같은 것 뿐이었습니다.

 

그가 언제나 갈구했던 건, 따라서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아늑한 자궁과도 같은 여인의 진정어린 배려였습니다. 또한, 문인의 숙명으로 타고 난 노스탤지어의 추구를 도와 줄 영감의 제공이었습니다. 우리 평범한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소명이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외피를 하고 태어난 이상 그 성취는 영원히 불가능할 이같은 미션을 그는 영혼 한켠에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지닐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따라서 그는 요즘 용어로는 "리셋 증후군" 같은 고약한 근성을, 스스로 지녔던 도덕 관념(그가 적잖게 의존했던 프로이트식 프레임으로는 "슈퍼에고"라 할 만한)이 지독히도 혐오했을 만큼, 자신의 연약하고 선병질적인(막내 동생 뿐 아니라 이런 성향은 그 자신 역시 부친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정신의 한 특성으로 내내 유지했던 것이겠습니다.

 

연예인이라면 우리 평범한 대중의 시선 앞에 무시로 노출되는 게 그들의 비즈니스입니다. 따라서 세련된 행동과 외양의 꾸밈에 그들은 자신의 모든 자원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시절, 헤세 같은 문인의 경우(연주자나 작곡가, 화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부르주아지가 몸소 나서지 못하는 영적 여행의 대행을 그들 셀러브리티는 제 일생을 걸고 해 내어야만 했겠죠. 특히 헤세처럼 가풍 자체에서 유래한 고립자적 기질을 물려 받은 이는, 행동거지나 말투, 처신의 면에서 "은둔자적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누구의 눈에도 뚜렷해 보였겠습니다. 오늘날의 연예인과는 이 점에서, 외견상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특징을 가졌다고도 하겠습니다.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성공적인 데뷔를 이룬 그 가능성과, 샘솟듯 표현되는 영감과 상상력을 지녔던 청년은, 그 쟁쟁한 베르누이 가문 안에서, 아마도 "재능 콤플렉스"에 내내 시달렸을 만한 여성, 더군다나 전성기를 막 지나려고 하는 노처녀에게 큰 매력을 지닌 남성으로 느껴졌을 만합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나 신분적 우월감이 아니었다 해도, 베르누이 씨는 이 괴퍅하고 매력 없는 외모를 한 청년을 제 가문의 일원으로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만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그 정신적 지향이 각각 향하던 "과학과 종교 사이의 심연"을 극복하기 난감해서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여성으로부터 필요한 자양분만 취하고 냉혹하게 버리기를 반복한 이기적인 남성상은, 우리가 위인이라고 본 여러 서양인들에게서 아주 드물게 보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중에는, 극단적 페미니스트 관점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빚어진 터무니없는 사실 왜곡도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부인 밀레바를 이용만 하고 그녀 곁을 떠난 아인슈타인" 같은, 논거와 개연성을 결여한 "악의적 신화"가 그것입니다. 비단 비뚤어진 세계관을 지닌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잘난 수컷"을 애써 폄하하려 하는 일부 낙오자형 남성 사이에서도 이는 인기 있는 레퍼토리이자 과장된 피해의식, 공정하지 못한 비열하고 미숙한 이중잣대입니다. 둘 다 겉으로야 비슷한 품의 "성장 거부 몸짓"으로 보이지만, 헤세의 경우와는 달리 후자의 경우 자기 합리화와 타자에 대한강박적 폄하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에서 극과 극의 대조를 보입니다.

 

이기심과 약탈자적 근성이기는커녕, 헤세가 남긴 흔적을 보면 오히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질곡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질적인 배경을 지녔다고 는 하나, 그 역시 게르만 족속의 일원이었기에, 특히 니논 돌빈과의 관계는 일종의 대속자적 행로라는 느낌마저 줍니다. 단 한 명의 여인마저 넉넉히 곁에 둘 능력이 없는 이들의 눈에 엽색 행각으로 비칠 수 있는 이 같은 그의 갈짓자 걸음은, 알고 보면 그러나 제 영혼의 순수성을 지키고 사명감을 고결한 형태로 간직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셈입니다.

 

어리석은 속물주의를 끊임 없이 경계하고 경멸하는 그의 목소리는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세계를 바꿔 보려고 애쓰던 그 미친 광대 같은 독재자들이 급작스럽게 몰락한 후, 이제 대중은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다." 파시즘의 특성은 대중의 광기를 기반으로 탄생하고, 그 대중이 광기를 각성한 후 포말처럼 사라지는 게 있음을 그는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가 개탄했던 건 차라리 "두루미의 도래를 갈구했던 개구리떼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히틀러가 한 줌의 재로 화하고 무솔리니가 제 정부들과 창틀에 거꾸로 매달려 치욕스러운 죽음을 한 후, 어제 그에게 열광을 보냈던 대중은 오늘 격렬한 책임전가로 여념이 없거나, 파렴치한 무관심을 가장합니다. 무고한 희생자들만 여전한 궁지에 몰려 있을 뿐.

 

헤세에게 있어 여성은 "재생"의 원천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감당할 수 없었던 건 영혼의 타락이었습니다. 게르만인이었음에도 그의 정신 깊은 곳에서는 라틴적, 가톨릭적 "성모 마리아"를 간절히, 끊임 없이 원했으며,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이런 그의 자아 한 면을 선명히 대변하는 아바타였습니다. 그는 타락한 대중으로부터의 오염이라는 공포에 일생 내내 시달렸고, 그가 이를 피해 "은둔"하려 했던 곳은 어머니의 자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 나름으로 수행했던 "사랑"이요 일반인의 눈으로 기이하게 보였던 "애정 편력"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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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옥과 함께하는 클래식 산책 - 영혼을 울리는 클래식 명작, 그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
최영옥 지음 / 다연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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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말하기를, 서양인들이 빚어 낸 가장 멋진 발명품이 바로 그들의 고전음악이라고 합니다. "정격(正格)"이란 의미에서의 고전, 클래식은 특정 문화권의 전유물이 아니므로, 우리에게도 우리 나름의 "고전 음악"은 어엿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속물 근성이나 사대주의의 발로가 아닌, 솔직하고 냉철한 접근을 통해서도 저들의 음악에는 뭔가 모호함을 걷어낸, "논리"와 정교함, 명징한 의식의 계획적 활약 같은 요소가, 우리 동양의 음악보다 더 많이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음악 뿐 아니라 저들의 모든 문화가 그러하지만, 그것을 만든 이에게 정당한 크레딧을 부여해 주는, 건전하고 깔끔한 개인주의 문화가 위대한 성취를 조장하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무엇을 한다 한들, 그 공이 어느 위대한 분(군주나 세력가)의 몫으로 돌려진다면, 기술적인 의욕이 생기지도 않을 뿐더러,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이란 숭고한 내적 동기가 십분 발휘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윗분 마음에 드는 선에서 적당히 하고 그만두는 분위기와, "내 작품은 위로는 신(神)이 보고, 아래로는 후대인이 두고두고 가치를 평가할 것이다" 같은 생각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예술가 중, 누가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남길 수 있을까요.

 

이 책에 소개된 32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뚜렷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것이 개별 작품이건, 작곡가이건, 연주자이건, 대지휘자이건, 재능 있는 개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들의 역사부터가 개인 중심으로 무슨 스토리건 짜여지게 아예 판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반면, 종묘제례악은 누가 작곡했는지 모릅니다. 수백 년 간 개량을 거듭해 오다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이라 해도, 최초에 틀을 만든 이가 있을 테고, 완성된 꼴을 갖추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이가 분명 있었을 텐데, 왕실의 존엄과 엄숙한 공맹의 도를 강조해 왔을 뿐, 악곡을 빚은 개인의 공은 간 데가 없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예술 뿐 아니라 학문으로서 체계를 갖춘 과학 따위가 발전을 할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양 고전 음악은 그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저자분 같은 이가 이처럼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엮어 낼 수 있을 만큼(이 아니라 그 훨씬 이상이죠), 개인과 작품에 얽힌 사연이 무궁무진 이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음표와 귀에 익은 선율 뒤에 숨은, 인간과 인간의 사연, 감정과 의지의 충돌 등을, 시공을 초월하여 불멸의 독립적 자태로 남은 그 음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모른다고 해도 작품의 가치가 감소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어려서부터 자주 접하고 많이 듣는 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런 지식을 알고 곡(작품)을 들으면(감상하면) 서양 고전 음악에 평소 낯섦을 느껴 오던 이도 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이지만, 정말 그를 여성으로 착각한 사람이 있을까요? 저자분의 말씀에 의하면 엄청 많다고 합니다. 여성이 음악 창작에 종사할 수 없었던 그 오랜 차별적 풍토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착각을 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여튼 저는 처음부터 이 <Lascia ch'io pianga>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영화 <파리넬리>의 그 분칠한 천박함의 분위기와 어우러진 모습으로 감상한 후에는 더욱 멀리하게 된 곡입니다. 당시에 영화 제작진 측에서 "최첨단 과학으로 빚어낸 당대 카스트라토 음색의 완벽한 재현"이라고 요란하게 선전해 대었지만, 저자 최영옥 씨는 이에 대해선 "두 성악가(카운터테너와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디지털로 합성"한 것 정도로 담백하게 서술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저자 추천의) 유니버설에서 낸 두 음반 중의 해당 작품 연주는 누구에게도 권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전 예전에 저 제목에서 ch'io 같은 낯선 단어가 끼어 있길래, 이게 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이태리 어디 방언이기라도 한가 궁금해했었습니다. 이게 che io의 단축형입니다. io는 영어의 me겠구요. 이런 간투사가 붙으면 뉘앙스가 더 간곡해지고 더 우아한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겠지요.

 

저자는 프란츠 리스트에 대해 1장과 2장 두 꼭지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마 어느 전문가라도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생애를 다룬 영화도 있는데, 1960년작 미국 영화 <Song Without End>가 그것입니다. 리스트 역은 더그 보가트가 맡고 있는데, 그가 <베니스의 죽음>에서 (사실상) 구스타브 말러 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꽤나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언제나처럼 그의 연기는 최고입니다. 제목이 "나치에 유린된 참혹의 선율"인 이 장에서 저자가 추천한 음원 중 상위권 두 개가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그것입니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숭어"나 "송어"냐의 문제는 제기된 지 상당히 오래되었고, 정답도 일찌감치 나왔었습니다. 다만, 슈베르트의 시대라면, 오스트리아는 내륙국이 아니었죠. 합스부르크 황실은, (이 책 중 다른 장, <나부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파트에서 잠시 설명하는 것처럼) 왕년의 유럽 열강 베네치아를 조공국으로 거느린 대제국의 주인이었습니다. 펄떡거리는 숭어를 굳이 구경하고 싶다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텝니다. 그렇든 아니든 답이 "송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습니다만. 이 문제는 "왜 송어인 줄을 모르냐?"라기보다는, "틀린 줄 알면서도 다들 왜 아직까지 안 고치고 있는가?" 때문에 심각함을 더하는 이슈입니다.

 

<오 솔레 미오>는 제목부터가 시칠리아 방언이라는 설명은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줄 것입니다. 시칠리아는 사실 초기 역사에 그리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 방언의 형성 과정에서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았지요. rough breathing의 o가 그리스어에서는 ho에 가까운 발음이지만, 어두의 h가 탈락하며 남성형 주격 단수 정관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굳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일 미오 솔레"가 표준 이탈리아어라고 하시지만, 어순은 두 다이어렉트가 서로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일 솔레 미오"가 무난합니다.

 

서양 고전 음악을 다룬 책이지만, 한국인의 기여에 대해서도 적지만은 않은 비중이 주어지고 있네요. 신예 성악가 새뮤얼 윤(윤태현씨)는 두 장에 걸쳐 등장하고, 저자는 그의 기량과 장래성에 대해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명태>, <사월의 노래>, <보리밭>, <향수> 등의 네 곡에 대해선 독립된 장을 할애하여, 저자의 애정이 듬뿍 담긴 설명으로 독자의 가슴에 와 닿게 합니다. 나탈리 드세이(이름 철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유익했습니다. 전 몰랐던 내용인지라)가 프랑스 현지에서 "조수미의 라이벌"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니 뿌듯하기도 했구요.

오타가 좀 자주 보이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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