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다음 30년 - 중국의 씽크탱크와 각 분야 세계 최고 전문가가 전하는 미래 중국의 비전
로버트 포겔 외 지음, 김영경 옮김 / 비즈니스맵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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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거 20개의 세기(世紀) 중, 중국이 세계 제일의 풍요를 누렸던 기간이 18개 세기에 달한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이며, 새삼스러울 게 없습니다. 이 전제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는가 하는 건, 개인의 세계관과 성향에 따라 다를 뿐, 정답이 따로 정해진 바는 없습니다. 정답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그것부터가 벌써 전체주의적 불길함을 풍기는 언사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중국미래 30년>으로, 우리말 번역본의 저 제목은 원제의 느낌을 잘 살려 옮겨졌다는 생각입니다. 말이란 게 언제나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어서, 주어진 선택지 위에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도 있기 마련입니다. 막상 일을 해 보면, 의도에 부합하고 많은 이의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멋진 안이 도출되기가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덩샤오핑이 지명한 장쩌민이, 1999년 일본을 방문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와세다대 학생들의 송곳 같은 질문에 답하느라 곤욕을 치르던 걸 본 기억이 납니다. 불쌍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모습도 다 "도광양회"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싶기까지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늘날의 중국을 만들어 낸 가장 직접적 기여자이자,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실세 장쩌민은, 거의 신화적 존재로 회고되고 평가되는 중이라서입니다. 진정 이런 걸 두고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을 써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든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이 어엿한 모습을 형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뭔가 어설프고 마뜩지 않습니다. 다 자라서 세상에 제 활개를 펴는 모습을 볼 때면 그제서야 소급 재평가가 내려지며 "아 본래 될성부른 싹이었어." 같은 아부, 찬양이 이어지는 거죠. 하지만 중국은,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지 국가, 야만인들"의 평가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18세기가 어쨌다구요? 대륙의 제국은 소수 지배층의 소유였을 뿐, 절대 다수 인민은 그저 농노의 신세를 못 면하는 비참한 반 짐승의 처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여튼 중요한 건 현재입니다. 로버트 포겔은 앞으로 10년 후, 중국의 국내 총생산은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 예측합니다(이 책은 2011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포겔의 해당 논문은 앞뒤 내용으로 짐작건대 2008년경에 쓰여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구매력 기준 GDP가 미국을 능가했다는 발표가 나온 건, 이 서평을 쓰는 시점 기준으로 바로 그제입니다. 책을 읽는 분들은 참고하십시오). 포겔의 논문은 사실 이 책에 왜 끼었는지 좀 의문입니다. 나머지 글들과 성격도 맞지 않고, 심지어 평소 쓰곤 하는 그의 글들과 비교해서도 스타일이 좀 튀는 편입니다.

 

필자들의 붓 놀리는 모양새란 도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자랑스레 여기는 공맹의 도, 군자의 마음가짐이란 간데 없고(공산 중국의 기초를 놓은 이가, 바로 문화대혁명을 주도하기도 한 마오라고 하죠? 공자고 뭐가 다 때려 없애라고 했던?풋), 그 예전, 조공국에 와서 경복궁을 보고 "삼각산 아래 일개 기와집이구나!"하며 조롱했던 자의 오만함이 가득 배어납니다.

 

민주주의가 아닌 민본이랍니다. 이 민본은 서구에서 배워 온 게 아니라, (편리할 때만 또 등장하는) 맹자의 가르침이 그 연원이라는 거죠(그렇게 민본을 잘 베풀어서 수천 년 동안 농민반란이 쉴 틈도 없이 일어났었는지). 다수결의 원리는 이익 집단의 권력 투쟁 유발 원인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진정한 공동체의 조화는, 지금 공산당이 행하는 것처럼 "집정 집단"에 의한 과두적 통치가 바람직하다는 거죠. 분권 역시 엘리트 지배의 기만적 담보 장치에 지나지 않으므로, 권력이 집중되되 소관 업무가 나뉠 뿐인 "분권"이 바람직하답니다.

 

현재 중국이 고전 중이면 씨도 안 먹힐 선전인데, 잘나가고 있는 중이니 이런 말도 태연하게 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의 수준을 고려할 때, (대만처럼) 소모적 정쟁에 빠져들기라도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정치적 논쟁에는 가급적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자국 인민의 성숙함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믿지 않는다는 뜻이며, 국호인 "인민공화국"이 무색한 자가당착의 결론입니다.  손문(쑨원) 선생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과연 뭐라고 했을까요?

 

패권국이란 타의 모범이 될 장점을 많이 갖추어야 합니다. 막고, 가리고, 가두고, 조작하고, 억누르는 정치 체제가 아무리 국부를 많이 축적한다 한들, 그로부터 이웃 나라가 뭘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30년은 그들이 말하는 한 갑자(甲子)의 절반인데, 수천 년이 지나도 미신적 수비(數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합니다. 하긴 남을 탓할 때가 아니죠. 지금 우리의 모습은? 솔직히, 30년은커녕 당장 3년 뒤 어떤 꼴이 되어 있을지가 아찔할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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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신장섭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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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경제인(사업가)란 언제나 악마적 공생 관계를 이룹니다. 중국도 고대 이래 언제나 상(商)인은 권귀(權貴)에 편의를 제공하면서, 많은 화폐적 혜택을 입어 왔습니다(화폐의 발행이 지배 세력의 독점 권한이었으므로). 권력은 또한 무력과 권위로서,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고, 이런 기회를 두고, 자신이 애호하는 상인에게 미리 중요 정보를 귀띰하거나, 혹은 칙령, 사실상 압력에 의해 독점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습니다. 사업가는 그래서 언제나 권력자의 주변에서 그 비위를 맞추어야 했고, 권력자는 다양한 편의와 사치를 제공 받아 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등을 거쳐 현재 자본주의에까지 이행해 오면서도, 이 패턴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렴 결백한 관료의 미덕이란 교과서나 유교 사서를 벗어나면 현실에서 찾아 볼 길이 거의 없습니다. 최고 권력자는 그 임기가 몇 년이든 간에 언제나 부패했고, 제 분야에서 제 할 일만 성실히 수행하는 사업가란 (어찌 보면) 책에서조차 찾기 힘듭니다. 정(政)과 경(經)은 거의 언제나 유착 관계에 있었으며, 이 책의 주인공인 김우중 창업주의 경우,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정부 초기에 이르기까지 한 차례도 남한 수뇌부와 모종의 연이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여기까지는 다들 아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시사에 둔감한 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 책이 가르쳐 주는 내용 중 좀 충격적이다 싶은 건 다음의 두 가지일 것입니다.
1. 김우중 회장은 이미 전두환 정부 후기 무렵부터 북 정권과 매우 긴밀한 연락과 친분을 유지했다.
2. 김 회장이 성취하고 잘 홍보했던 업적 중 소위 "세계 경영"이라는 것의 실체가, 생각보다 규모가 큰 것이었다.

좀 부수적이다 싶은 내용 중에서 약간의 놀라움을 안겨 주는 건 "노무현 대통령과 김 회장 간의 관계가 생각보다 돈독했다"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많 은 이들은 대북 사업에서 가장 앞서 갔던 기업으로, 1989년 방북해서 김일성을 만났던 사실 때문에 아마 고 정주영 창업주의 현대를 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도 인용되어 있듯, 이건희 회장은 1994년 당시 "매출액에서는 현대에 뒤지고, 가전에서는 엘지에 뒤지고, 대북 사업에서는 대우에 뒤진다"며 임직원을 질책한 적이 있죠. 이 책에서 저자 신 교수에게 자랑스럽게 털어 놓듯, 그 경색된 상황에서도 결국 최고지도자를 끼고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던 이는 김 회장이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김 회장 자신이 강조하는 건 "직언"입니다. 최고 권력자, 특히 독재자 주위에는 직언자가 드문 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입니다. 아무리 영리하고 냉철한 인간이라도, 측근자는 언제나 도전자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몇 전 직언을 용납하다 보면 권위의 실추를 겪게 되고,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정치의 문제로서 이런 측근을 경계해야만 하죠. 김일성, 김정일 뿐 아니라 리비아의 카다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김 회장은 최고 지도자의 은전에 목을 매어야 하는 처지가 아니므로, 독재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판단을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서 제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일단 실용적인 정보와 조언부터가 아무나 제공할 수 없는 희귀한 자원이지만, 김 회장의 경우 그를 넘어 최고 지도자들의 기분과 눈치를 잘 파악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 김 회장은 아무 언급이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사업가의 밑천이자 승승장구의 비결이요, 어쩌면 자신의 치부와 직결되어 있는 사항인데, 하물며 책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 공개할 리가 만무합니다. 여튼 책을 통해 김 회장이 계속 강조하는 비결은, "눈치 보지 않는 직언"입니다. 이것만으로 독재자로부터 그만큼이나 큰 환심을 샀다는 뜻입니다. 읽는 이들은 고성능 필터를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도 아닙니다. 여튼 그는 갓 개방이 시작될 무렵의 동유럽에서, "대우"라는 브랜드를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익숙한 브랜드로 만들었습니다. 기업의 마케팅 역량이 전례 없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그 광대한 미개척의 시장, 언어와 인종, 문화가 판이하게 다른 시장에서 그만한 성과를 냈다는 건, 거의 경이에 가깝습니다. 초인이라야 해 낼 수 있는 성과를 그는 그토록 광범위하게 이뤄 내었던 거죠. 지금도 최소한 이머징 마켓 중 베트남에서 이뤄 낸 업적은 저 과거의 성취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사업이란 어느 정도의 성과가 나오면, 주주와 투자자에게 공정히 배분하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성과란, 가시적이고 손에 쥘 수 있는 달러 뭉텅이가 일단 사업가 본인의 손에 들어 오고, 그 다음으로 돈을 댄 물주들에게 서운치 않은 나눔이 이뤄져야 하죠. 김 회장의 경우, 그가 이룬 놀라운 성과와 빼어난 수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성과가 끊임 없는 외적 팽창에 투입되기만 했을 뿐, 그가 빌려 간 그 막대한 자본이 원 주인에게 회수되는 일이 매우, 매우 드물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선단식 경영, 차입 경영은 대우만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대우의 경우는 대체 무엇을 위한 세계 경영이었는지가 의심될 만큼, 내실과 중간 정산을 외면한 사업 확장에 집착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미 대우는 1991년에 조선發 부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전혀 사업의 방향을 전환하지 않은 채 기존의 패턴만 일관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황제식 경영의 폐단은 대우에서 아주 집약적으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는 자신의 장점에만 나르시스적으로 빠져 있을 뿐, 일단 큰 문제를 일으킨 단점에 대해 전혀 돌아보지를 않았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또 나오는 그의 말은 "GM이니 뭐니 하는 미국 굴지의 대기업도, 실제 경영하는 모습을 보면 허술한 구석이 많이 보였다."입니다. 그런데, 시스템에만 의존하는 행태도 물론 문제지만, 대우처럼 한 천재적 개인이 전사적으로 간여하고, 회장 한 사람이 빠지면 되는 일이 없는 기업도 문제입니다. 둘 중 굳이 택일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안정적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쪽을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일성 부자와의 에피소드도, 그처럼 잦은 방북(정주영 씨의 경우, 국가 보안법 위반 여부가 문제되자- 당시에는 아직 교류 기본법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정부에서는 "통치행위"라는 궁색한 구실을 내걸기도 했습니다)이 있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 소개된 건 딱 하나입니다. "김 회장이 체제 상호 보장을 거론하자, 김정일이 '남쪽의 보장이 없으면 우리가 존속할 수 없기라도 하단 말인가'며 고성을 내었다. 밖에서 듣던 이들은 '이제 김우중은 남으로 귀환 못한다'며 술렁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김 회장 자신은 결코 저자세로 대북 사업에 임하지 않았고, 당당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메시지를 애써 전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요? 진실은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나 알 수 있겠죠.

이 책의 핵심은 아무래도 외환위기 당시 "대우 자산의 헐값 매각"과 "정치적 외압    " 여부입니다. 그럭저럭 잘 굴러갈 수 있는 기업집단을 공중 분해시켜, 국부의 유출과 손실을 공연히 입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점에 대해 저자 신 교수는, 이헌재 전 부총리의 주장과 김 전 회장의 주장이 어디서 어디가 다른지를, 상세한 표와 함께 정리하여 책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사건 당사자의 일방적 주장 정도를 넘어서는 건 이 점에서 분명합니다.

과연 대우는 당시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기업이었나. 대우만큼 오너 한 사람의 역량에 많은 걸 기대는 기업이 없었으므로, 기업의 역량 평가는 이 경우 결국 김우중이 과연 빚을 갚을 만한 사람이었냐로 바꿔 물을 수 있습니다. 빚을 갚을 능력이 되는데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당시의 정부가 중대한 판단 착오 혹은 부조리를 저지른 것으로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대우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점부터, 유동성 경색의 위기에 몰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특혜 시비를 유발했고, 청구 유예는 물론 추가 자금 지원까지 챙기곤 했죠. 1999년에도 같은 방법으로 당시 정부가 대처했다면, 아마 엄청난 정경 의혹 유착이 일었을 겁니다. 당시의 취약한 기반으로는, 정권이 그 의심의 식선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으라는 것도 짐작이 됩니다. 책에서도 김 전 회장의 "투정"은 주로 이헌재 등 실무자 선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독자가 기대한 건, 당시 정부에 뭔가 밉뵈어 (예컨대 전두환 시절의 국제그룹처럼) 부당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뭔가 한 방" 같은 거였겠지만, 그런 건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김 회장은 막판까지 승지원에서 이건희 회장과 소위 "빅딜"을 두고 심야 담판을 시도하는 등 필사적이었습니다(대우의 가전을 주고 대신 삼성자동차를 받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이 협상은 무산되었고(일부 신문에서는 일이 성사된 것처럼 오보를 내기도 했죠), 그 결과는 대우의 공중분해였습니다. 증권 등 일부 업종에서 여전히 대우라는 브랜드가 시장 인지도면에서 퇴색하지 않는 걸 보면, 김 전 회장이 이뤄 놓은 업적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공은 공대로 인정하면서도, 이미 한계 상황에 달했던 부실 경영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군 이래 추징금 규모로 능가할 자가 없는 특등 경제사범이 된 김 회장은, "중복 계산에 징벌적 의도로 이처럼 고액이 매겨진 건 부당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저자 신 교수가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하게) 법리적 관점에서 이를 다시 가다듬어 주고 있습니다.

확실히, 벌금도 아니고 추징금에서 "징벌적" 추산을 행한 건, 영미법이 아닌 독법계를 따르는 우리 법제상 무리한 처사입니다. 아마도 저는, 형벌인 "벌금"으로 처리할 경우 "사면"의 형식으로 유야무야될 수 있기에, 부가형인 추징금으로 이의 감면을 어렵게 한 숙려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법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떨까요? 이에 대한 판단 역시 독자가 해야 할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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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을 지휘하라 - 지속 가능한 창조와 혁신을 이끄는 힘
에드 캣멀.에이미 월러스 지음, 윤태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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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뿌듯한 보람이 느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책이라면 누구한테 권해 줘도 욕 안 먹겠다 싶었고, 만약 만족 못 하는 이가 있다면 찾아가서 제가 욕을 해 주고 싶을 만큼요^^ 책을 잡고 보통 하루면 끝을 냅니다만, 이 책은 지난 9월 말에 사서 지금까지 읽었습니다.

일단 자계서 같은 책 제목도 그렇고, 첫 1장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권두에 "스티브 잡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같은 말이 뜬금 없이 붙어 있는 것도 그렇구요. 잡스 책은 그간 너무 많이 읽어서 좀 지겨웠고, 에드 캣멀의 첫 저서라고 해서 샀는데 잡스 이야기가 나오면(이 사람 이야기가 일단 나왔다 하면, 어디 적당히 나오고 마는 수준이겠습니까?) 에드 캣멀에 대해서 좀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품었던 기대가 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 캣멀 단독 명의가 아닌, 에이미 월러스라는 (제게는) 낯선 이름의 공저자가 같이 붙어 있는 것도 일단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썼다고 해도 대필인 경우가 많은 세상이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다시 제목을 보니, 더더욱 자계서처럼 보였습니다. 자계서라고 해도 진정 자기 발전을 위한 의욕으로 가득한 독자에게는, 설사 흔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다 성장을 위한 자양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히 기업가의 책이라면 정말 그 기업가 본인의 육성을 듣고 싶은 게 독자의 바람입니다. 명언 인용은 이제 좀 지겹다고나 할까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최소한 제게는 "이 책은 에드 캣멀 본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고, 할 수 없는 말이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어느 책이든 그렇듯, 책 처음(혹은 뒤표지)에는 각계 인사들의 다양한 추천사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을 보면, "..... 인 작품"이란 말이 나와 있더군요. "작품"이라... 유명 인사의 회고록, 혹은 어떤 형식의 테마북이라고 해도, 그걸 "작품"이라고까지 불러 주는 건 그리 흔치는 않습니다(아니면 단순한 오용이던지). 그 말을 읽고 나서 다시 책 표지를 보았더랬습니다. 라틴어로 "작품"이라고 하면 opus, 그 복수 형태는 opera죠. 벌건 배경에 실루엣으로 표현된 어느 지휘자가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지휘자이니, 그 지휘자가 내 놓은 책이라 '작품'인가?" 처음 책 읽기 싫을 때는 이처럼 온갖 잡생각이 꼬리를 무는 게 제 버릇이어서요.




읽어 보니, 이 책은 정말로 "창의성을 지휘하는" 내용이더라구요. 에드 캣멀은 다들 아는 것처럼, 그냥 팀이라고 해야 할지, 밴드라고 해야 할지, 정말 회사로 분류해야 할지 모를 어메이징한 집단 픽사의 설립자이자 CEO입니다. 다들 기억하는 것처럼 1990년대 초반은, 한때 활기를 완전히 잃었던 미국 애니메이션이 화려한 중흥을 맞이했던 시기입니다. 1990년부터 4년 연속으로 흥행 대박을 쳤던 디즈니의 성과는, 지금에 들어서야 분석가들의 평가 대상이 되고 어느 정도 고착된 어구로 자리매김된 게 아닙니다. 이미 그 당시에도 (심지어 한국 언론에서도) 대중 문화가 아닌 경영이론상의 관심사로 떠오른 바 있습니다.

캣멀은 제가 보기에 화려한 변설가는 못 되지 싶습니다. 그 예로, 과연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싶은 사람 입에서 나올 만한, 이거는 진짜 자기 표현 맞는가 보다 싶은 개념이 나옵니다. "아기 키우기"와 "짐승 먹이 주기"가 그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린가. 소규모 조직을 정성 들여 성장시키고, 본래의 목적에 맞게 매뉴얼한 주의를 매 단계마다 일일이 기울이는 건 "아기 키우기"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건, 엄마가 들인 노력에 꼭 양적으로 비례해서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양적으로 정성을 들여도, 자기가 원하는 보호를 못 받는다 싶으면 꼭 울고 보채고 하는 게 아기겠죠(모르긴 해도). 별 노력을 안 쏟는다 싶어도, 꼭 필요한 정성이 제공되면 바로 만족하고 해맑은 웃음을 띠는 게 아기겠죠. 이러다가도 언제 한 순간 돌변해서 자기 집은 물론 이웃들 잠까지 다 깨울 지도 모르는 게 아기입니다. 회사에서 분명, 이런 "아기 키우기"의 마인드로 임해야 하는 작업과 섹터가 따로 있다는 게 그의 의견입니다.




"짐승 먹이 주기"는 그 반대입니다. 짐승은 질보다 양입니다. 일단 외적 시설을 잘 갖추고, 먹이를 풍부히 공급하고, 치밀한 시스템적 관리에 소홀함이 없는 게 "사랑" 같은 비정형적 요소보다 더 우선입니다. 캣멀은 예컨대 GM이나 IBM 같은 대형 회사가 보다 더 의존하는 조직 패턴이 이것이라고 분류합니다. 반면 자기가 꾸려 온 픽사 같은 회사는 "아기 키우기"를 하는 조직이라는 거죠.

자, 그럼 "짐승 키우기"는 나쁘고, "아기 키우기"는 무조건 좋은 것인가? 그가 한때 상관으로 모시고, 지금도 여전히 숭배하는 스티브 잡스라면, 아마 "A는 좋고, B는 나쁘다"는 식으로, 명쾌한 도그마화를 시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저자 캣멀은 (이 책 곳곳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잡스와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유형"의 인간입니다. 그런 그가, "모든 회사는 아기 키우듯 키워야 한다"고 주장할 리 없습니다. 사실 캣멀 아니라 누구에게도, 회사를 "전사(全社)적으로" 아기 키우듯 키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요즘 구멍가게도 그런 식으로 운영되지는 못하지 싶습니다.

캣멀은 오히려 "짐승 먹이주기"는 어느 회사에 있어서든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하죠. 외연 확장에 무관심한 회사가, 어떻게 지속 가능한 성장은 고사하고 그저 현상 유지라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사실 디즈니가 1990년대 초 이래 계속 픽사와 외주의 형태로만 관계를 유지한 건, 캣멀이나 디즈니로나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때는 디즈니 역시 (의식을 했건 못했건) "아기 키우기"를 잘하는 기업이었고, 캣멀은 아직 신출내기라 경영에 눈에 뜨이지 못했을 시점이었겠죠. 결국 그를 알아 본 것도, 기이한 독불장군이자 나르시스면서도 인재를 감별하는 안목만큼은 탁월했던(안 그럴 것 같아도) 잡스였습니다.

캣멀은 드디어 디즈니의 CEO로 부임합니다. 첫날 회사를 둘러 보니, 직원들의 책상 위가 깨끗합니다. 다른 회사도 아니고, 직원의 개성이 최대한 살아 있어야 할 사무실 개인 책상의 모습이 이러니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세 번을 묻고서야 "오늘 사장님 부임을 맞아 좋은 인상을 드리기 위해 일제 점검 지시가 내려졌습니다."라는 실토를 들었습니다. 캣멀은 이미 밖에서부터, "왜 디즈니가 점점 하향세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답을, 무려 취임 첫날에 들은 셈입니다.

저는 이 책이, 특히 이런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떤 책은 정당한 질문, 필요한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못하고 시시한 주제만 거론하다가 끝납니다. 어떤 책은, 강렬한 힘을 발산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러고 뒷감당을 할 듯 말 듯하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끝납니다. 하긴, 이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그건 대단히 드문 이른바 "명저"의 반열에 속하는 책이겠습니다만. 캣멀의 이 책은, 올바른 질문을 제시하고(독자의 구미를 미리 예상한 계산적인 주의 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직하게 품어 왔던 질문), 그에 대한 자기 자신의 성실한 답을 내어 놓고 마무리짓습니다. 정답 강박증 때문에 애써 정형화한 답을 내어 놓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살아 온 치열한 과정이 빚은 딱 그 수준 만큼의 정직한 답을 성실히 이야기합니다. 이런 문제에 정답이 사실 어디 있겠습니까. 정직하고 성실한 소통 자체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정도지요.

경영학 개론 교과서에서 앙상하게 그 이름만 접해 왔던 저스트 인 타임이니 하는 개념들이, 이 책에서는 캣멀의 버전(혹은 에이미 월러스의?)으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창의력 있는 인재를 기용하는 섹터에선, 아기 키우기 식으로 조직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요즘, 존중받는 직원이 일도 잘한다는 식의 주장도 여러 군데서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캣멀은 철저히, "그들의 창의성을 북돋워주라"는 강력한, 그러나 부드러운 톤의 촉구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뽑을 때, 똑똑하다 싶어 뽑은 인재들 아니었는가. 그런데 왜 뽑고 나서는 부품 취급을 하는가"가 그의 말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입니다.

한때 창의력은 CEO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죠. 영화 <토털 리콜>에서 회장님은 그렇게 말합니다. "생각을 하지 마, 누가 생각하라고 했나?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바로 이런 독선적이고 디미니셔스러운 스탠스가, 죽은 조직을 만듭니다. 지휘는 지시가 아니죠. 불협화음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일 뿐입니다. 아무리 지휘자가 빼어나도, 박자 못 맞추고 음 틀리는 단원을 연주 도중에 교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휘자라는 위치가 어차피 한계가 있다면, 단원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 기를 살리는 게, 요즘 시대의 오케스트라를 가장 잘 이끄는 방책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CEO는 지시가 아닌 지휘를 하는 시대이며, 기계적 능률 부양이 아닌 창의력의 고취야말로 기업이 살아 남을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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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혜나 작가의 삼부작 중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 작품을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지만, "짧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전작 두 권이 하드커버로 나왔을 때도, "이렇게 짧은 분량을 양장본으로 낼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죠(양장/페이퍼백 선택이 책의 분량과 직접 관계는 없습니다만).

 

출판사에서 그녀의 작품을 평가(하고 홍보)할 때, "한국문학의 탈출구, 새 지평을 제시"했다는 문구가 보통 따라붙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읽어나갈 때, 어려운 말도 없고, 심오한 사상을 표면적으로 표출하지도 않는 그녀의 스타일(오히려 정반대라면 모를까) 때문에, 그런 미덕과 가치를 발견하게 되지는 보통 않았습니다. 다만 출판사에서 그런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기에, "아 우리 무지한 독자들도 그래야 하나 보다"며 머리를 싸매고 읽어 나가기는 했죠.

 

전 2작을 읽으셨을 분들은 어떤 느낌이시던가요? 솔직히 말해, 어떤 이지적인 작용을 그 독해 과정에서 내 뇌에 기대하고 명령하기보다는, 말초적인 흥미에 먼저 민감해지던 모습이 보다 정직한 기억 아닌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충격이다. 어른으로서 부끄럽다" 같은 반성과 소감을 누구나 이야기하시더군요. 하지만 그분들도 서평에 "짜릿짜릿 재미있었다" 같은 말을 쉽게 적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부조리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듯 암울하게 막을 내리는 결말에서 뭔가 살짝 숙연함이 들기는 했습니다만, 그 역시 은밀한 죄책감을 적당히 덮으라는 작가의 독자에 대한 영리한 배려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우리의 금붕어 기억력은, 결말의 인상에만 지배되고, 이는 우리의 자발적 선택이기도 합니다, 골치 아픈 것 싫지 않습니까.

 

전작 <제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답이 없는 인생이고, 혐오스럽고 타락한 삶입니다. 겉으로는 일단 태깔이 나나, 속은 다 썩어 있고, 과연 늙어서 뭘 할지 혀를 끌끌 차게 되는, urban tragedy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여튼 주인공은, 얼마 있지 않아 도래할 처참한 시듦을 겪게 될지언정 아직은 빛나는 청춘입니다. 우리 독자는 그래서 불편할지언정, 그 성적(性的) 행태에 대해 혐오스러워할망정, 전적인 불쾌감과 분노만큼은 독후(獨後)에 면(免)하는 결과였습니다. 여튼 청춘을, 실수도 하고 비위도 저지를망정 아름다운 존재 아닙니까. 무슨 성(性)을 어떻게 향유하건, 젊은 시절에 벌이는 모습은 그리 추하지만은 않습니다. 아직 젊으니 나중에 무슨 돌파구가 생길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이 <그랑 주떼>는 그렇지도 않더군요.

 

주인공은 이중의 불행을 겪는데, 그것이 일생을 두고 치르는 고통입니다. 하나는 어린 시절의 성폭행이 가져다 준 트라우마요, (이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힘든) 다른 하나는 또래들로부터의 왕따입니다.

 

작품에서의 서사 순서를 따르자면, 일단 주인공은 학창 시절 내내 극심한 왕따를 겪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키도 또래에 비해 큰 편입니다. 학습 능력이 아주 떨어진다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왕따입니다.

 

본인이 알고 다른 또래들이 느끼는, 왕따의 분명한 이유는 바로,


"저년은 그저 재수 없음, 드럽게 재수없는 년임."

 

입니다.


공부도 못하고, 센스도 없고, 평균치만 했으면 될 키까지 딱 재수없을 만큼만 크니, 저런 애는 왠지 싫다는 게 또래들의 "판결"입니다. 아이들은 반드시 어떤 상대가 열등해서만 왕따를 시키는 게 아닙니다. 우월한 존재도, "부러움"과 범벅이 된 묘한 "적대감"은 보통 아이들에게 왕따에의 충동을 유발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그녀의 친구(유일한 친구인데, 같이 왕따를 당하다 보니 당연하죠) 역시, 귀여운 외모에, 부유한 가정 환경에, 아무한테나 반말(미국에서 살다 왔으니 어쩔 수 없죠)을 하는 행동 따위가 처음엔 선망의 대상이다가, 나중에는 왕따의 좋은 표적이 됩니다.

 

왕따를 당하는 애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에 뭔가 근원적 우울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애들과 잘 못 어울립니다. 못 어울릴 만한 심성을 떨치지 못하니 정말로 못 어울리게 되고, 원인과 결과는 서로 위치를 바꿔 가며 악순환을 낳습니다. 이 주인공 역시 마찬가집니다. 못난 구석이 많다고는 하나, 하나하나만 따지면 남들한테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게 모이고 모이니까, "천하에 재수 없는 년"이 되는 겁니다. 한 성깔 하는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반대로 구석(전면에서는 아니고)에서 나름 애들에게 겁깨나 주는 깡패가 되었을 수도 있을텐데(키가 크다고 하니), 그것도 아닙니다. 천상 왕따로 살아야 할 처집니다.

 

현재 주인공은 발레 강사(비슷한 것)입니다. 발레라고 하니 모르는 이들에게는 뭔가 있어 보이고, 사람들을 가르치기라도 한다니 허울이야 좋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은 관련 학과를 졸업하기까지 헸습니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내면에 깊은 문제가 곪아 있는 모습이 여기서도 반복 재생산되는데요, 그녀는 발레를 전혀 할 줄 모릅니다. 절망적인 몸치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들에게도 엄청 타박만 받다 교육과정을 겨우겨우 마쳤습니다. 그럼 뭘 가르치느냐? 고용주인 원장이 다른 스케줄로 레슨을 못할 때, 기초 몸동작을 원생들에게 반복시키는 일입니다. 어차피 동네 영세 학원이라, 발레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이들이 적습니다. 말이 좋아 발레지, 관리를 안 해서 뒤룩뒤룩 찐 살을 빼러 오는 "다이어트반"의 관리입니다. 아무나 다 하는 비숙련 노동 비정규직에 가깝습니다.

 

왜 이렇게 암울한 인생이 되었을까요? 약간 스포일러성이지만, 리뷰에서 이 이야기를 안 하면 그건 직무유기에 가까울 만큼 중요요소라 어쩔 수 없네요. 모르긴 해도, 주인공이 아주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행의 끔찍한 기억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이 내러티브의 의도 아닌가 합니다. 자기 책임으로(그 나이에 무슨 "자기 책임"이란 게 있겠습니까!) 조금도 돌릴 수 없는, 악한, 범죄자로 인한 트라우마가, 아직도 젊은 한 인생을 망쳐 놓은 거죠. 아마도 아이들이 그녀에게서 보았을 "재수없음"은, 그녀의 "주저함"이었겠고, 그 "주저함"이란 그 악몽에서 기인했을 텝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사람, 타인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겠습니까.

 

유아 시절의 그녀를 아파트 옥상에서 성폭행한 자는, 참으로 놀라울 만큼 비열한 품성을 지닌 인간이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자라면, 자기 인생이 자기 뜻대로 통제될 부분이 없는 정신 장애자이니, 차라리 동정을 느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는, 범행 한참 후 우리의 주인공과 다시 만납니다. 자전거를 타다 만난 그녀에게, 그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폭행을 가합니다. "너 이 나쁜 X, 다시 내 눈에 뜨이면 죽을 줄 알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놀라운 광경입니다.

 

사실 요즘 논란이 되는 화학적 거세니, 전자 발찌니 하는 것도 다 호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이런 것만큼은, 저기 북한이나 중화인민공화국 표준을 따라 법시행을 했으면 합니다. 얼굴 공개하고 대중들 사이에 시끄럽게 떠들어 봐야 소용 없습니다. 지금 누가 "고종석"에서 나주 여야 성폭행 사건을 떠올리는 이가 있습니까(다들 글쓰기 선생님만 생각할 텐데)? 대중은 그저 냄비일 뿐입니다. 입으로 떠들 게 아니라, 법으로 그냥 해결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주인공은 "왕따 유발성의" 우울함을 내면 특성으로 가지게 되었다....라면 그건 우리의 상식? 통념? 이런 것에 과히 어긋나는 바 없으므로, 차라리 편한 이해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번 더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덧입힙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격 자체가, 무언가 가해를 유발할 요인을, 그 성폭행 이전부터 안고 있었다는 은근한 암시입니다. 오해는 마시구요.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일부 있다"는 황당하고 사악한 논리가 아닙니다. 범죄자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취약함"에 끌립니다. 그 취약함이 이 범죄자의 공격에 의해 더 큰 상처로 자라면, 이번에는 "범죄자까지는 아니나 사악한 일반인들"이, 그 틈을 겨냥하여 공격하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그토록 지탄해 마지 않는 범죄자들은, 알고 보니 똑같은 공격성과 가해적 성향을 지닌 일반인들의 선발대, 특수요원이었던 셈입니다.

 

주인공은 왜 발레를 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여자치고 남달리 큰 발, 그리고 그 발등에 돋아난 두툼한 뼈를 갖고 태어난 모습입니다. 이게 발레에는 천혜의 조건입니다. 발레 선생은 그녀의 그 발, 일반인들부터는 혐오의 대상이었을 그 발을 보고 반한 것입니다. 저런 발을 나도 가질 수만 있다면 영혼의 일부라도 팔겠어! 그러나 그런 발만 가지면 뭐하겠습니까. 몸 돌아가는 게, 균형 잡는 감각이 일반인보다도 못한데 말이죠. 그녀는 다시, 선망의 대상(거의 로또와도 같은 확률로 하나 걸렸던)에서, 다시 공인 왕따로 추락합니다.

 

인간은 본디 그렇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발이 발레에 최적화한 모습을 지닌 것이, 그녀가 전생에 남다른 공덕이라도 쌓아서였겠습니까? 뭔가 우물쭈물하고, 또래에 어울리지 못하고, 근거 없는 자만감으로 허황한 짓거리를 하다 표적이 되는 인생이 있다 해도,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과의 화해도 도모하기 힘듭니다. 이 소설은 "그렇게 태어난 그녀들과 우리들"에 대한, 정직한 시선을 촉구, 각성하려는 작가의 마음이 짙게 배어나 있습니다.

 

극심한 경기 불황에 시달리는 요즘 세태가 배경으로, 사실적 설명을 통해 제시된 것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주변부만 떠도는 주인공의 처지와 인생에 대한 적절한 환기 혹은 메타포어 같기도 했습니다. 다만, 성폭행(두 건이 나오는데, 하나는 친척 오빠로부터의 성폭행이었습니다)과 왕따, 비정규직의 문제가 좀 작위적으로 결합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고, 전작과는 달리 도무지 밝은 면, 긍정적 분위기가 전무한 것도 갑갑함을 더하더군요. 희망적 색채를 띤 요소는 오로지 제목 "그랑 주떼" 하나뿐이었다고나 할까요. 내가 좀 조증이다 싶을 때 진정제로 처방하면 그냥 왓다일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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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백 년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박상설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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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사악함이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악함이 그런 분에게도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디 사악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00세 시대를 쉽게 운위하는 요즘이라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 그 정도 연세를 드신 분은 쉽게 보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기력이 정정하시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정신도 또렷또렷 맑으신 분이라면 말입니다. 저자 박상설 선생은, 평생 동안 글로벌 무대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며 타의 귀감이 될 인생을 살아 온 분입니다.

 

연치 높으신 분들 중에 자신의 영역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룬, 존경할 만한 인사들을 우리 사회는 많이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 중에는 지난 시대 한국 고유의 정서, 가치관, 신념에 충실하시다 보니, 지금의 젊은이들과 많은 국면에서 충돌, 갈등을 빚는 분들도 많습니다. 한국이 지금 치르고 있는 내홍 중 상당수는 세대 갈등이거나, 아니면 세대 갈등에서 파생된 것들입니다. 젊은이들도 반성과 수련을 행해야 하겠으나, 세대 갈등의 첫 고리를 푸는 이니셔티브는 (제 생각에) 노년층에서 먼저 취해 주셔야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세대 갈등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는 여러 가지 현상과 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인자를 꼽자면 제 생각에 아마, 지난 시대의 소중한 가치관과, 현재에 있어 표준이 되는 여러 트렌드가, 서로 모순, 상충을 빚는다는 사실도 한몫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 현재의 트렌드는 글로벌 표준과 호흡이 잘 맞는 수가 많죠. 결국, 전통적 미덕과 지향, 그리고 글로벌 가치가, 문화 안에서 서로 유리한 자리를 잡으려 다툼을 빚는 와중에 그 모든 대립과 다툼이 세대갈등이란 이름으로 빚어지는 것 아닐까 합니다.

 

박상설 선생은,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경험이 있는 젊은이보다 더 현대적인 마인드를 지니신 분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제 생각에, 그 비결은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정신의 좌표를, 글로벌 표준에 맞추고 청년기와 경제활동기를 보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거푸집이 먼저 마련되어 있어야, 그로부터 생성되는 컨텐츠("내용"이라는 원칙적 의미에서의)가 올바른, 혹은 보편적인 성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자, 이런 박상설 선생이, 젊은 시절에도, 그리고 뜻하지 않은 병마로 쓰러지시고 그로부터 기적적인 회복을 한 후에도, 그의 생에서 줄곧 손에서 놓지 않았던 쾌락, 혹은 성찰의 장(상반되어 보이는 이 둘을 겸한다는 게 놀라웠습니다)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토 캠핑이었습니다.

 

오토 캠핑은, 본디 자연의 아들인 인간이, 자연 속에서 생명을 영위해 나가는 방법의 현대적 재현입니다. 자연이란 엄한 부모님입니다. 자식 귀하다고 오냐오냐 하며, 된 욕구 안된 투정 일일이 다 들어 주다가는, 인간 하나 망쳐 놓기 십상이죠. 자연은 인간을 빚을 때에, 죽지 않고 훌륭히 생존해 남을 만한 자질과 도구를 다 베풀어 주었습니다. 적응에 유리한 신체 구조, 자연의 도전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한 적당히 강인한 신체, 앞으로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빼어난 두뇌 등입니다. 그러나 모든 위험을 한번의 노력으로 다 배제할 수 있는, 만능의 도구는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열심히 노력하면 만물의 영장이 될 수도 있으나, 태만한 마음으로 노력을 않는다면 바로 생존을 위협 받습니다. 자연의 정의롭고 오묘한 이치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박 선생은 그래서, 자연에 마냥 순종하지 않고(그러다가는 목숨을 잃기나 딱 좋죠) 적정 선에서 나의 편의를 추구하고 자연에 도전도 하되, 자연을 마냥 정복하려 들며 나의 기본 생존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간이 어머니 대지를 섬기는 초심을 회복하는 훈련, 도락, 그리고 제의(祭儀)가 바로 오토캠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업화되고 불순한 목적이 끼어 있으며, 그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는 편의 위주의 캠핑 프로그램은 경멸 받아 마땅합니다. 오토캠핑이야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자아와 타인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마당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글로벌 표준을 논하면서 웬 오토캠핑인가? 미국인, 독일인 할 것 없이, 자신의 분야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루고, 생각하는 삶, 존재 이유를 반추하는 인생을 추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 오토캠핑에 기쁨과 정성을 들이고 있더라는 게 저자의 경험입니다. 오토캠핑은 준비가 번거롭고, 가벼운 신체 부상의 위험도 언제나 따르며, 순간순간 머리도 써야 하고, 신체적으로도 주의를 항시 기울여야 합니다. 적다 할 수 없는 노동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완수 후에 찾아오는 기쁨은 무엇에 비길 게 아닙니다. 완수 후에 기쁨만 체험하는 게 아닙니다. 깨달음이 있습니다. 자연이 낳아 준 원초적 모습의 "내"가 누구였는지, 오토캠핑은 총체적으로 깨닫게 도와 줍니다.

자연에서의 삶이라고 해서 마냥 낭만적으로 볼 건 아닙니다. 낭만은커녕, 산이란 사회에서 도태되고 천대 받던 이들이, 흘러흘러 갈 데가 없어 주저앉은 곳이기도 합니다. 미국 애팔래치아 산악 지대는 아직도 그런 이들이 주거를 이루고 있고, 이런 계층 출신들은 사회로 다시 나와도, 피부색에 무관하게 차별을 받습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굳이 할 것도 없습니다. 나이 든 분들에게 여쭤 보면(이 책을 읽고 실제로 제가, 곁에 계신 분께 물어 봤습니다), 산에서 사는 삶에 대해 손사래를 휘휘 치는 분들이 태반일 겁니다. 그분들은 대뜸 "화전민"을 떠올리기 때문이죠. 박 선생도 이 책에서 "화전민" 이야기를 하십니다.

 

화전민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선 농사가 제대로 안 되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지극히 열악한 작물만을 섭취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서워 산으로 숨어 들었건만, 생활에서 느끼고 겪어야 하는 불편이란 지옥을 방불케 했나 봅니다. 그 와중에, 구성원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심각함도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박 선생은 이 주제를 이야기하며, 박정희 정부 당시 일어났던 이승복 사건과, 이것이 계기가 되었던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디 어느 외계에서 떨어진 게 아닌, 오랜 진화 과정에서 발달시킨 천성 면에서나, 지금 당장 보유한 체질, 성향 면에서나, 자연 속에서만 최상의 건강과 활력을 발휘하게 설계된 존재입니다. 그런 숙명을 거부하고, 지금 우리는 도시라는 허울 안에 포장된 허위와 기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단한 발상의 전환, 그리고 그리 큰 무리가 따르지 않을 실천만 해 준다면, 다른 차원의 체험과 각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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