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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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관점에 따라 정말 기념비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어요. "정의"란 개념이 이렇게나 대중의 화제에 오르고, 한 교수님의 저서와 강의가 베스트셀링 트렌드를 형성한다는 게 말이죠. 전 좀 시니컬해서인지, 어려서부터 "이런 논쟁나 연구에는 답이 있을 수 없으니, 참여하거나 관심을 둘 필요도 없어!"라고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아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To Each His Own)이구나."라든가, 지난 시대 롤스의 definition 대로 "평등한 자유, 그리고 보충적으로 차등의 원칙" 같은 게 시험(중고등학교)에 나오니 딸딸 외우는 게 고작 그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의 그 열풍 때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번의 이 책은 번역 개정판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해설서가 별개의 책으로 딸려서 온다는 거죠.

 

 

 

 

 

 

 

 

 

 

보시다시피 래핑이 아주 튼튼하게 두 권을 묶어 주고 있습니다. 처음 받았을 때 뜯기가 아까웠어요.
(안 뜯고 안 읽으려면 뭐하러 산 건지?)

 

이 책은 첫째, 음..... 제목을 배신하는 책입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건 우리 모두가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사항이니, 붕어가 없다고 해서 소비자가 분노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정의가 무엇인가?"하고 제목을 달아 놓았으면서, 결국은 롤스나 아리스토텔레스만큼도, 정의(定義)의 결론적 제시에는 노력을 보이지 않으니(뭐라도 명제 형식으로 내놓았어야죠), 정말로 "정의가 뭔지 교수님한테 배워서 알고 싶었다"고 마음 먹고 있었던 이들에게는. 다소의 허탈감을 안겨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었어요...

 

두번째 그러나, 이 책은 절대, 읽고 난 독자가 배신감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했더라면, 본전 생각을 언제나 간절히 잊지 않는 한국 독자들이 이 책에 대해 센세이션을 불어 넣었을 리가 없습니다. 답도 없는 문제를 갖고 왜 이렇게 난리들인가 하며 반신반의하는 느낌으로 책을 열어 보고, 완독하고 나서, "아 사람들이 그럴 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정의에 대해 어떤 명제화한 답을 내놓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저자 샌델 교수님은, 오히려 책 곳곳에서 일부러 그런 시도의 무의미함, 무익함, 나아가 해로움에 데해 경고까지 하는 모습이었네요. 그러니 제가 처음에 품은 회의감은, 오히려 책을 읽고 나서 원군을 얻은 형국이었다고 할까요? ("그래, 니 말이 맞아!"라고)

 

정의가 부르는 가장 큰 문제점은, 왜 그것이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이들에 의해 무시되고, 또 준수되지 않고 있는가에 있다고 우리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물론 이 역시 심각한 문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관측되는 현상은, 사회적 약자일수록 정의라고 합의된 바에 대해 존중(respect)하는 태도를 띠고, 강자일수록 어떻게 하면 교묘히 정의의 제약을 넘어서느냐, 나아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능멸하기까지 하느냐 정도이겠습니다.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그토록 민감해하는 이유는 "나는 이렇게 열심히 정의를 지키는데, 왜 너희들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분노에 기인한다고 봐도 됩니다. 어떤 의무를 나만 (내키지 않게) 이행하는 것만도 불만스러운데, 어떤 이들은 아예 정면으로 그 가치를 부정하는 모습까지 보이니 말입니다.

 

샌델 교수님은 그런데, 의외의 처방을 이런 우리들의 불편함 해소를 위해 제시합니다. 책은 결론뿐 아니라, 그 논의 과정에 있어서도,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바와는 달리 "정의가 무엇인지"애 대해서는 우리들 사이에 아무 합의된 바 없다"는 전제 위에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합의된 바가 없다면, 어떤 방법론을 통해 무슨 합의에 이르러야 할지 같이 찾아 내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책의 장점은 여기에 있더군요. 저자는 각종의 사고 실험과 재치 있는 논변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기존의 도그마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그토록 집착하던 상식이 실제로 그리 단단한 기반을 갖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소모적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샌델 교수님의 대단한 점은, 우리들 반응의 귀착점을 그리 몰아 가지 않고, 생산적인 각성 쪽으로 능수능란하게 유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은 따분한 도덕 강의가 아닙니다. 읽어가다 보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끝까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안 나옵니다. 그러나 같이 정의의 정의에 대한 모색을 하는 와중에 얻는 묘한 윤리적 쾌감이 있습니다. 어떤 난제라도 그 초석을 어찌 놓느냐에 따라, 결국에는 해답이 얻어지고 말리라는 낙관적 비전이 도출될 수도 있습니다. 답은 아직 없지만, 그 답은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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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 박정희 vs 마오쩌둥 - 한국 중국 독재 정치의 역사
박형기 지음 / 알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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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얼핏 들어 참 섬뜩한 말입니다. 제아무리 도덕과 윤리, 사상과 철학적 배경을 강조해도, 정치 투쟁은 결국 어느 쪽이 더 강한 무력과 배짱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뜻이죠. 이 말을 한 마오는 다음과 같은 "명언"도 남겼다고 합니다.

 

"혁명은 디너 파티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가부장적이고 대단히 억압적으로 아이들을 다뤘던 부친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마오는, 그래서 "무산 대중의 정의로운 복리"라는 극한의 이상을 추구하는 혁명 수행 과정에서도 이런 리얼리즘 스탠스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일본제국주의와 장개석 정권(그 배후에는 미국의 지원, 그리고 때때로 소련의 응원까지 있었던)이라는 가공할 만한 두 적수를 상대로 싸워, 최종의 승리를 쟁취한 사실이었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했고, 현재까지도 진행 중에 있는 세계사 거대 형성 흐름 중 으뜸 변수를 새로이 만들어 낸 엄청난 사건이었죠.

 

한편, 우리는 잘 실감을 못하지만, 이민족의 지배에서 간신히 벗어났다가 내전(이후 국제전화하기까지 한)으로 초토화된 형편에서, 세계 10권 안에 드는 무역 규모와 GDP 수준을 이뤄 낸 한국의 성취 역시, 세계적으로는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나 봅니다. 얼마 전 베링 해에서 침몰한 원양 어선에 타고 있다 큰 인명 피해를 본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가족 측에서, "한국 같은 선진국이 어떻게 해서 그런 노후한 배를 운항할 수 있는가."를 놓고 크게 분개했다는 뉴스를 접했는데요. 여기서 저는 해당 사건의 비극성보다 오히혀 "인도네시아인들도 의심 없이 인정해 주는 선진국"이 바로 한국이구나 하는 느낌이 더 빨리 와 닿았습니다.

 

도대체 가망이 없어 보이던 작은 나라가, 이 정도 어엿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가장 큰 기여를 한 건 과연 어떤 팩터였을까요? 주로 한국의 기성 세대들은, "지도자 박정희"를 그 첫손에 꼽곤 합니다. 물론 이는 논란이 아주 많은 이슈입니다만, 저자분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11월 14일(이날의 그의 생일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김일성의 생일이 4월 15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요), 모든 언론에서 반신반인으로서의 박정희를 언급한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반신반인이라.. 영어로는 DEMIGOD라고 하는 그 말이지요. 한국에 (일부 기성 세대가) 반신반인이라 칭송해 마지 않는 박정희가 있다면, 중국에는 거의 전 인민이 반신반인으로 숭모하는 마오가 있다. 이들은 공통점도 있지만, 서로 다른 점도 너무나 많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며, 마오를 섬기는 민족과 박 장군을 섬기는 민족은 어떻게 그 장래가 달라지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떤 지향을 가져야 하는지 모색해 보자는 게,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로서, 저자의 의도가 이것 아니었을까 하고 파악한 테마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교차 편집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 장(챕터)에서 마오를 다루다가, 몇 장 건너 박을 다루다가, 다시 중국의 사례로 돌아오는 식입니다. 이 둘은 인생의 청년기, 장년기, 커리어의 절정기, 깔끔하지 못했던 말년 등등 여러 국면에서 서로 비슷하거나, 반대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 이이화 선생의 <한국 현대사의 라이벌>을 읽으며, 이런 서술 방식을 통해 두 feature의 실루엣을 비교, 대조하는 작업이 이처럼이나 인식상의 큰 도움을 주는구나 하고 놀라곤 했었는데요. 이 책은 책 전체가 "두 문제적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어, 종전의 평면적 인식 한계 몇이 크게 극복된 느낌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이 책은 두 인물만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제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를 다룬 한국 현대사 일부보다는, 중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파트가 (굳이 따지자면) 상대적으로 더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만큼, 마오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련 부분이 알차게 쓰여졌다는 뜻입니다. 비록 반신반인으로서 그토록 중국 전인민으로부터 치켜 세워지는 마오지만, 마오 혼자서는 오늘날의 이 과분한(?) 영광을 절대 누릴 수도, 그리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분의 생각은 제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책에서 마오 외에도 덩샤오핑에 대한 논의가 이처럼 자세히 이뤄진 것도 아마 그런 배경과 이유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대약진 운동 실패, 문혁의 파국적 결과, 사인방의 횡포 방관, 조장 등 말년의 행적이 크게 어지러워진 채 타계한 마오가, 후계 문제까지 어정쩡하게 마무리한 상황에서, 화궈펑(화국봉)이 그대로 대권을 이어받았다면, 오늘날의 G2 중국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브레즈네프 치하에서 활력과 포텐셜을 모두 상실한 소련처럼, 몇 개의 민족 단위로 사분오열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죠. 이 책의 저자가 뚜렷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덩샤오핑이라는 걸출한 후배(저자의 표현입니다)가 아니었으면 이 모든 번영도, 그리고 반신반인으로서 숭배 받는 마오도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명 제국을 망하게 한 농민반란군 이자성 정도의 인물로 기억되는 게 고작이었겠죠.

 

사실 마오와 박은 같은 논의의 선상에 서기가 좀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박은 건국의 리더 혹은 국부 비슷한 존재가 아니며, 파산 직전에 몰린 국가의 거시 경제를 잘 핸들링하여 회생시킨 유능한 관료형 인물에 가깝습니다. 단지 그 권력을 장악한 과정이 군사쿠데타였고, 역시 무력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마오와 겉모습상 유사점이 있다는 것 뿐입니다. 굳이 박을 중국의 어느 지도자와 매칭시키자면, 마오가 아닌 덩이 되어야 그나마 균형이 맞죠. 물론 인구나 영토의 규모로 보나, 현재 점유하고 있는 글로벌 위상으로 보나, 한국과 중국이 비교선상에 오르는 것도 어찌 보면 무리입니다. 여튼 "그 가진 권력이 총구로부터 나왔던 두 사람"을 주제로, 이 책은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펴 나가고 있습니다.

 

마오의 생애 전반기 이력은 마치 수호전이나, 잘 쓰여진 일류 무협지의 주인공의 그것처럼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입니다. 이 책에는 저우(나중에 "영원한 총리"가 되는 바로 그이)와, 마오가, 대장정 도중 망중한의 모습으로 한 컷에 찍힌 사진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며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저우는 촌스러운 상관, 주군 마오와는 극히 대비되는 세련된 매너와 외모로 잘 알려진 국제 신사이지만, 이 사진에서의 젊은 모습은 그의 노년기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그만큼 곱게 늙었다는 의미도 됩니다만). 반면, 사진 속의 젊은 마오는 얼굴선이 갸름하고, 다소 수줍게 보이는 미소까지 머금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가 알던 마오가 아니라서, 몇 번을 두고 거듭 들여다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런 미청년이, 어쩌다 관리를 잘못해서 그런 투박한 모습으로 바뀌었을까요? 흔히, 마오안잉(한국전에서 전사한 그의 맏아들)을 두고, "어떻게 저런 아버지한테서 저런 아들이 나왔나"며 의아해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 사진에 나온 마오의 미모(!)를 한번 봐야 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불러 줘도 지나칠 것 없습니다.

 

저 사진이 잘 상징하는 것처럼, 마오의 대장정은 그저 정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추악한 투쟁이나 살벌한 아귀다툼이 아니었습니다. 마오가 이끄는 홍군은 가는 곳마다 토지 개혁, 엄격한 군율이 바탕이 된 치안 유지 등의 시책으로, 기층 민중의 환영과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전쟁이 아니라 도덕과 정의의 실현이었고, 그렇다고 전투 능력이 취약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맹장 밑에 약졸 없다고, 마오의 휘하에는 주더(주덕), 펑떠화이(팽덕회), 임표(린뺘오) 등 쟁쟁한 영웅, 지략의 천재들이 즐비했습니다. 장군 한 사람이 원맨쇼를 한 게 아니라, 이처럼 신화의 전형적 패러다임에 속속 아귀가 맞는 아름다운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었던 게 바로 마오, 아니 홍군, 아니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고아한 십자군(물론 진짜 중세의 십자군은 말할 수 없이 타락한 강도떼들이었습니다만)의 캠페인은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 그런데, 그 이후는 어땠습니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어도,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던 육가의 말도 있습니다만, 마오는 일단 천하를 얻고 난 후에도, 동란과 내전시에 통하던 방식으로 대륙을 다스리려 했습니다. 대약진운동은 목적과 수단이 완전히 뒤바뀐, 권력자의 치적과 자기 만족을 위한 광기 어린 정치 쇼였습니다. 쟁기를 녹여 저품질의 철강을 생산하려 든 탓에, 농기구가 없는 농민들은 일제가 남경에서 학살한 수에 맞먹는 규모로 아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찌해서 권력을 잡기 전과 후가 이렇게도 달라질 수가 있는 건지요. 이런 참사는 지도자가 무능해서 빚어진 일이 아닙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대장정 당시의 제스처가 거짓이 아니었을진대!)이 조금만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인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터입니다.

 

문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아까운 인재, 그리고 공산당의 영걸과 국부들이 죽어갔는지를 살펴 보십시오. 이 책에도 잘 나와 있지만, 펑 원수는 손자뻘도 안 되는 홍위병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모욕을 당하며 조리돌림을 당했습니다(저자분은 이 대목에서 팽 원수가 팽 당했다는 재담을 하시던데, 저는 그게 그리 좋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류사오치와 그 영부인 왕광메이의 사진을 보십시오.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동양인이 보여 줄 수 있는 모습 중에서 가장 안온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건국 이후 마오의 모습은, 대머리가 벗겨진 채 탐욕과 야심이 기름기로 가득 배어 나온, 누가 봐도 그리 좋은 인상이라고 할 수 없는 분위기랄까요. 인상이 그렇다는 것뿐 아니라, 그가 실제로 남긴 행적만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유능한 지도자 덩을 후계에 점찍고 물러나기만 했었어도, 마지막에 자신의 과오를 일점이나마 회오하는 바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이어나갔고, 그가 죽는 즉시 끈 떨어진 인형 신세가 될 4인방을 미리 척결하지도 않고 어정쩡한 무마형 지도자인 화 원수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습니다. 덩이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자신의 능력과 의지, 책략에 의함이었지 마오가 도와 준 바 하나 없습니다. 4인방이 그대로 폭주하다 망했을 법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천행으로 덩 같은 지도자를 만나 오늘날의 G2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역사 인식의 면에서 "중국분, 한국인, 일본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간악한 일본놈 이야기는 할 것도 없고, 문제는 과연 저런 폭력적인 지도자를 내내 "반신반인"으로 섬기는 중국인의 역사 인식이 동아시아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돈은 나중에 벌면 되는 거고, 그는 체면을 살려 주었다." 그렇다면, 대약진운동과 문혁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들은 어디 가서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마오가 한 일은 마오가 한 일이고, 덩이 한 일은 덩이 한 일입니다. 덩이 사후 땜질을 잘하고 제 2의 건국을 이뤘다고 해도, 그 때문에 마오의 과오가 덮이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저자는 부친과의 대화를 책 중에 적어 두고 있습니다. "민주화가 밥 먹여 주냐?" 이제는 대답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예, 민주화는 밥 먹여 줍니다." 민주화가 밥을 먹여 주든 말든, 민주화는 그 자체로서 추구할 가치가 있으므로 이런 논의는 어차피 무의미합니다. 문제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을 중국에 대해선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마오는 근 백년 간 서양 제국주의에 유린되고, 최근세사에는 왜놈들에게 능욕을 당한 민족의 자존을 지킨 공적이 있습니다. 경제 발전은 마오가 아닌 덩의 치적입니다만, 여튼 이 둘을 백보 양보해서 세트로 볼 수도 있다고 합시다. 민주화는 어디로 갔습니까? 중국 국민들은 대학생, 아니 대학 교수라고 해도 인터넷도 제 맘대로 쓰지 못하는, 철저히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국가입니다. 영화배우 주윤발(그는 관화로 "저우룬파"라 하지 않고, 광둥어 "초우 윤 팟"이란 발음을 고집하죠)은 최근 홍콩 정세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 몇 마디를 했다고 바로 대륙 활동 금지를 당했습니다. G2면 뭘합니까. 몇몇 슈퍼리치가 호사를 누릴 뿐, 절대 다수 국민들은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어 남의 나라 바다에까지 와서 해적질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나라가, 과연 세계의 표준을 정할 자격이 있을까요. 과거 중국은 공맹의 가르침으로 세계를 교화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명나라, 심지어 병자 호란 이후의 청나라도, 적당한 예의만 갖추면 속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우의를 도모하는 쪽으로 정책을 잡았습니다. 지금의 중국은, 마오의 광기어린 책동으로 유교 도그마를 모조리 파괴한 적도 있는, 과거와의 전통이 단절된 국가입니다. 중국과 마찰을 빚는 건 일본뿐이 아닙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과 그리도 끈질기게, 대국답지 못한 좀스러운 영토 분쟁을 이어나가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이런 폭력적인 노선을 이어가는 것도, (저자분 자신이 이야기했듯) 폭력의 화신이었던 마오를 반신반인으로 떠받드는 중국인들의 인식이 미개해서가 아닐지요. 마오가 민족 자존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것과, 통일 후 국민들의 진정한 존엄과 복리를 위해 과연 뭘 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박정희 따위가 무슨 반신반인입니까. 반신반인이라는 개념도 기준도 필요 없습니다. 박정희가 자격이 없다 해서, 반대로 마오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자는, 그 원죄와 업보를 영원히 안고 가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면, 마오는 스스로 수립한 헌정 가치 체계를 파괴한 자라고 해도 됩니다. 사람이 대체 얼마나 죽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박정희가 딸 뻘되는 연예인, 여대생을 술자리에 불러 희롱했다면, 마오는 손녀뻘 되는 미성년자를 떼로 불러 환락의 난장판에서 노리개로 써먹었습니다. 도찐개찐이지 둘 사이에 무슨 우열을 가른단 말입니까.

 

우리 민족이 위대한 이유는, 그런 박정희에 대해 우상화의 더께를 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줄도 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마오를 그렇게 보는 이가 누가 있습니까? 저자가 말씀하신 대로,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국민은 애초에 논의의 장에 나서질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닌 남의 노예로 사는 자가 무슨 기준을 정하고 세계 정세를 논할 발언권이 있단 말입니까.

 

枪杆子里面出政權

枪杆子는 총자루라는 뜻입니다. 里面은 우리식 한자로 쓰면 裏面, 즉 "속" 정도의 뜻입니다. 政權은 말 그대로 정치 권력이죠. 그래서 "총구 안에서 권력은 나온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중국어에는 과거, 현재, 미래 하는 시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오의 이 유명한 말은,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불변이 진리라는 오만한 선포로 들립니다. 마치 아돌프 히틀러가 "거짓말은 크게 떠들어야 대중이 속는다"고 공갈을 친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누가 들어도 이게 좋은 뉘앙스를 안 풍깁니다.

 

저는 "박정희의 경제 치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저자의 평가도, 그 전후의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괜한 구색맞추기로 들립니다. 저자의 논리대라로면, "경제 발전 역시 그 시대에 땀흘려 열심히 산 민중의 공이다"가 되어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요? 반신반인이라는 건 없습니다. 역사는 객관적, 과학적으로 판단해야지 신적인 지도자라는 게 어디 있단 말입니까? 박 장군이든 마오든 반신반인은 결코 아니고, 그 이전에 반신반인이라는 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권력이 과거에 총구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는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헌법 제 1조 2항을 보십시오.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외에 어떤 정답이 필요합니까?

책 제목은 묘하게도 과거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저자분의 의도가, 총구에서 구권력이 나오는 비극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 있다고 새기고 싶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중국에 있어 가장 필요한 건 반신반인 같은 게 아니라 민주화입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민주화는, 밥보다 중요한 인간 존엄 본체에 해당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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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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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같은 조직 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 온 팀원 사이라고 해도, 회의나 의견 조율을 할 때마다 항상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하고 잘 마무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마무리가 잘 되는 때보다, 그렇지 않고 분위기가 험악해진 채 간신히 봉합되거나, 심지어 회식 자리에서까지 감정의 앙금이 남아 폭발하는 수도 있죠. 원활한 소통은 조직의 작둉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 이치는 비단 조직(2차 집단)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가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랑과 애정만으로 모든 다툼과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고, 합리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의사의 교환이 이뤄져야 합니다. 

 

토킹 스틱 하나로 기적이 이뤄질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겠죠. 그렇다고 하면 그건 과장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한 마디 하려고 할 때 괜히 끼어들어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한다든가, 다른 사람의 말을 곡해하여 차라리 아무 반응도 안 보이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 온다든가,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보다 바람직한 소통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눈에 확 두드러지지는 않으나 작은 기적이라 불러 줘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이 남기신 서평을 찬찬히 훑어 보았습니다. 대체로 토킹 스틱의 효용, 그리고 이 토킹 스틱이 활옹되는 자리에서, 그 분위기 형성의 전제가 되는 "주술적 상징"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p48에 보면 "방위의 노래"라고 해서, 우리의 상상이나 선입견을 훨씬 뛰어넘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관념과 상징 체계가 아주 자세히 도식화되어 있습니다. 대화와 소통을 위한 실용적 메커니즘 문제를 넘어, 인문학적 시야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아메리카 토착민이 이 체계를 활용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백인 못지 않게 호전적이고, 싸움에 일단 임했다 하면 물러설 줄을 모르는 용감한 종족이었죠. 그런데, 이런 그들이 모여 살다 보니, 아무리 넓은 대륙이라고 해도, 또 아무리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 상황이었다고 해도, 자칫하다간 전쟁으로 절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인식을 과연 당사자들이 실제로 가질 만큼 분별이 있느냐인데, 그들은 이런 소통 체계를 실제로 고안해 내었으니 충분히 현명했다고 하겠습니다.

 

제게 큰 인상을 남긴 건 그 중에서도 세 가지 사항이었습니다. 하나는, 대화에 참여하는 성원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반드시 그 자리가 상징하는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규칙입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성향이며, 어떤 처지이냐에 무관하게, 그 사람이 현재 맡은 자리에서 해야만 하는 의무로서 이 과업은 그에게 부과됩니다. 공(公)과 사(私)를 준별하는, 대단히 엄중한 룰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차지하는 자리는 다음 순번에는 반드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문자 그대로 역지사지의 원칙 구현이며, 이번에는 타인의 입장에서 열심히 그 입장을 대변해야 하니, 그 사고와 태도가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스틱을 넘겨 받은 사람은, 바로 앞 사람의 발언에서 나온 표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반복한 다음, 자기의 말을 해야 한다는 조항입니다. 이때 괜히 다른 말로 대체한다거나(paraphrasing), 더 강한 의미로 강조, 과장하면 그건 규칙 위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대가 거의 천 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 통용되는 토론, 토의 규칙을 오히려 앞서 나가는 면마저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다 동조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절차와 체제를 갖추고 있던 그들은, 왜 백인의 손에 망하고 말았을까요? 단지 백인이 악하고 비도덕적이었다는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뭔가 그들의 문화에 자체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패배를 겪은 것입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그들의 문화와 상징, 신념, 가치 체계가 완벽했다고는 생각이 안 됩니다. 미국 헌법 제정과 독립 당시, 건국 선조(파운딩 파더)들이, 이 토착민들에게서 강한 영감과 영향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 유럽 문화권에 대한, 일종의 과시적 선언 의도로서 이를 끼워 넣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토착인들이 완전히 축출된 건 미국 독립 후 거의 반 세기가 지나서의 일입니다. 조지 워싱턴 시절의 미국 백인 문명은, 원주민을 완전히 몰아낼 만큼 위력과 성숙함을 갖추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아무튼 제가 그간 읽었던 미국 건국 초기(혹은 그 이전의) 문헌에서. 왜 그토록 "이로쿼이" 등 특정 토착 부족에 관한 언급이 잦으며, 또 좀 별다르다 싶은 외경심이 살짝 입혀진 말투로 언급되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고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고, "토킹스틱 회의, 소통"을 자기 일상이나 업무에서 실천해 보고 싶은 분이 있을까요? 전 좀 쑥스러울 것 같군요. 그러나 그들의 대화 정신만은, 앞으로도 회의할 때나 각종 모임의 절차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고 인상 깊은 지침으로 계속 남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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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장腸 여행 - 제2의 뇌, 장에 관한 놀라운 지식 프로젝트 매력적인 여행
기울리아 엔더스 지음, 배명자 옮김, 질 엔더스 삽화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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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우리의 소화를 담당하며 모든 양분의 소화와 이를 통한 공급의 중추적 기능을 맡아 하는 기관은,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제 2의 뇌라고까지 평가된다고 합니다. 제 2의 뇌라는 평가는, 비유적인 의미에서도, 그리고 기술적인 차원에서도 공히 타당합니다. 이미 여러 분야의 전문가, 또 저술가들이 입을 모아 내어 놓는 평가이므로, 심지어 자계서 최신간 여럿만 읽은 독자라고 해도 그 대략의 내용에는 익숙할 정도 아닐까 짐작합니다.

 

1980년대부터 유독 한국인은 국민 소득 수준이나 식생활 패턴과도 무관하게, 장 관련 질환을 자주, 그리고 일찍이도 앓아 왔음이 통계에서 드러납니다. 대단히 흔한 과민성 장 증상부터 해서, 보유자의 물리적 생존을 위협하는 대장암까지의 다양한 고통과 질병들이, 촘촘한 스펙트럼을 그리며 우리의 일상에 (불쾌하고 불길한 의미로) 가까이도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리며 성취해 온 물질적 자산의 축적 경과는 누가 봐도 놀랍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 활동 인구 개개인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특히) 양면에 쌓아 온 스트레스가 엄청났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왜 머리가 고생하는데 장이 아픈 것일까?" 같은 소박한 의문을  의학 전문가 아닌 문외한 수준에서 이미 제기해 왔다고 봐도 됩니다. 이에 대한 어느 정도 정리된 답이 최근에서야 쉬운 포맷으로 대중에게 전달되는 셈이겠구요. 그런데, 아무리 의료인의 수준에서 명료해 보이는 답도, 일반인이 쉬이 이해한다는 건 좀 무리한 기대에 가깝습니다. 이 일을, 놀랍게도 아직 20대 중반의 나이인 어느 전문가(라고는 하나 통념으로는 그저 의대생 취급이나 받으면 충분한 이)가 시도하여 세상에 내어 놓았네요. 그게 바로 이 책입니다.

 

"매력적인 장 여행"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그토록 많게, 정체와 기능상의 비밀을 간직하며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우리의 의식을 조종해 온 "장"이라는 녀석이 꽤 매력적이라는 뜻입니다. 뇌 못지 않게 장도 매력적이란 말이야!라고 외치는 저자의 모습이, 책을 읽다 보면 눈 앞에 선히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장 속을 여행한다는 그 자체"가 즐겁다는 뜻이겠습니다. 어렵고 낯선 분야를 이해하는 데에, 불친절한 저자가 가이드로 동행한다면 그 여행은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고, 여행이라기보다는 고역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책은, 본래의 목적이자 과제인 여행이 너무도 즐거울 뿐 아니라, 안내를 맡은 가이드가 너무도 매혹적이라, 그 매력이 두 배가 되는 여행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장의 기능과 구조에 대해 그간 여러 준(準) 의학 서적(대중서), 그리고 (위에 적었듯) 심지어 자계서에서조차, 문외한들도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설명을 시도하고는 있었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책들은, 그런 시도가 성공하기 위한 첫째 조건인 "눈높이 맞추기"에서 미흡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책이 최적인 이유는 사실 달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저자의 자격과 능력, 그리고 "태도"가 최상의 조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대단히 총명하고, 허세 없이 우리 독자들의 눈높이에 최대한 그 시선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그녀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사실이 크게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입니다. 제아무리 우수한 두뇌를 지녔다 해도, 이 분야가 순수 기억력이나 퍼즐 해결 능력, 혹은 자연과학으로서의 화학에 대한 흥미만으로 쉽게 초심자에게 다가올 수 있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공부하면서 아마 힘들었다 보니, 그 "초심"을 잃지 않고 독자들에게 가식 없이 접근한다는 생각으로 의도를 잡았고, 그 결과물이 이처럼 쉽게 재미있으며, "매력적인" 결과물로 빚어진 것 아니었을지요.

 

책을 다 읽고 실천적으로 정리하고 받아들인 교훈이 많습니다. 나의 체질에 비추어 어떤 음식을 더 가려 먹고 더 챙겨 먹어야 할지, 일상의 자세는 어떻게 잡아야 할지, 막연히 "이게 좋다"는 식이 팁이 아닌, 원리를 알고 이해해야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고마운 지식들이 많았습니다. 또 하나 배운 점이 있다면, 자신이 다루는 모든 분야에서 이처럼 모종의 "매력"을 찾으려는 마음가짐, 태도가 있어야, 자신의 영역에서 대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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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자전거 세계일주 1 : 중국편 - 너와 나, 우린 펑요 찰리의 자전거 세계일주 1
찰리(이찬양) 글.사진 / 이음스토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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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많이 했던 작품입니다. 처음의 제목은 <찰리의 자전거 여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받아 본 책(공을 많이 들인 책이라서 그런지, 겉도 속도 참 예쁩니다)의 제목은 <찰리의 자전거 세계 일주>네요. 물론 저자 이찬양씨의 이름이 "찰리"이며, 이 책 제목 그대로 자전거 하나로 세계 일주를 하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냉정히 말해 환경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어난 환경 그대로에 머무르면, 갖고 자란 기질, 천성의 한계, 그리고 낳아 주신 부모님에게 받을 수 있는 미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지금보다 나은 인생으로 거듭나려면, 배우고 익혀서 정신의 눈을 키워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육체의 성숙,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의 차원까지 높인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간접 체험의 폭을 넓히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직접 체험의 수단으로 여행을 시도합니다.

 

책은 사람에 따라 그렇게 잘 맞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만약 아니라면, 출판계가 이처럼 불황에 시달려 할 이유가 없을 테죠). 하지만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어 유람을 자신의 취향에 맞춰 다녀오는 분들도 있을 테고, 저처럼 막 모종의 여정을 일 관련으로 마치고 온 처지도 있을 것입니다. 매번 보고 스치는 것만 접하다, 타지에서 확 다른 풍광을 몸에 끼얹고 돌아 오면 기분전환이 되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 각성의 느낌을 받습니다. 여행은 그래서 일개 도락이 아닌, 교육의 일환이자 거듭남의 방편입니다.

 

저자 이찬양씨가 바로 그런 분이 아닐까 합니다. 약력만 보아도(책을 읽기 전부터 약력을 읽을 수 있었고, 참 대단한 분이다 싶었습니다) 그는 소위 글로벌 마인드를 지닐 수 있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더군요. 아마도 그 끼를 주체 하지 못하고, 혹은 배움에의 강렬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싣고(사진을 보니 확실히, 패셔너블보다는 내구성에 주안을 두는 분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세계를 그저 몸뚱아리 하나로 일주하겠다는 포부로 무작정 나섭니다. 대단합니다. 자신의 말대로,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도 말입니다. 여행의 기쁨이 있으면, 그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얻을 수 있었던, 혹은 가시적으로 희생한 그 무엇이, 그로서는 작지 않은 것이었을 텐데도, 그는 감연히 여행길에 나섭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왜 "빛과 소금"이라는 말이 나오듯, 소금이란 인간의 삶에 있어 그 부존재를 감당할 수 없는 중요한 물질입니다. 일개 소금장수에 불과했던 황소가, 그를 통해 축적한 부(富)를 기반으로 난을 일으켰고, 그 부 축적 활동 와중에 쌓았던 인간 관계와 나름 터득한 지혜에 기대어 감히 천하를 갈무리하려 했던 그 행적에 비추어서도, 이 소금이라는 물질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찬양씨는 중국 여행(말이 중국이지, 얼마나 광대한 곳인가요! 이 책이 전 중국을 다 커버한 것도 아닌데, 책 두께가 이처럼 두꺼운 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더군다나 사진도 많지만, 다른 여행 서적에 비해 텍스트 양이 적지 않은 편인데도요)의 시발점을, 장쑤 성(강소 성)으로 잡고 있습니다. 옌청의 "옌"은 소금 염(鹽) 자입니다. 장쑤 성 밑의 저장 성(절강 성)에, 5대 10국 시절 오월(오와 월의 합칭이 아니라, 그냥 나라 이름이 오월입니다)이라는 나라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를 세운 시조 전류가 바로, 소금 장사로 큰 부를 모은 경우죠.

 

보통 여행 서적을 보면 인문적 통찰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은 채, 간단한 느낌이나 흔한 통념만 적고 예쁜 사진만 가득 채우는 일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어딜 여행 갔다 하면 "남는 게 사진이다"며 이런 태도에서 거의 벗어나질 못합니다. 이 책은 사진도 많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텍스트가 참 많은 편입니다. 지명을 한자(漢字)로 일일이 같이 적어 주는 태도도 친절하고, 저렇게 "소금 염"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깊이 있게 언급하는 것(그러나 이 서평에서 5대 10국 운운은 제 생각이고 작가분의 언급은 아닙니다)도 돋보였습니다.

 

책에는 무엇보다 "사람"이 넘쳐납니다.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 그 중 며칠을 같이 머무르며 친분을 쌓은 이들, 재래 시장에서 물건을 사며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그새 깊은 공감을 주고받은 이들... 사진에 잘 담겨진 풍광도 보기 좋지만, 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 못나든 잘났든 구질구질하든 산뜻하든 저마다의 정과 깊이와 색깔을 간직한 사람, 사람,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사진상의 모습으로는 그런 인상을 안 받았는데(죄송합니다 ㅎ) 작가분은 신신실한 기독교 신도이신가 봅니다. 성함이 물론 이찬양이시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속단할 수 없는 문제인데, 작가는 여행 곳곳에서 큐티를 통해 마음을 다잡고 힘을 얻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작가분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어느 곳에서나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예: 재래 시장의 음식은 싸고 맛있다)." "겉으로 모든 걸 판단할 게 아니다. 누가 중국 땅에서 영어로 능숙하게 말을 걸어 오는 노인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겠는가?"

 

반면 자신의 지식, 그리고 인식상의 한계를 쉬이 인정하고 반성에 잠기는 모습도 엿보입니다. 지금 이곳은 중국 남부라서, 장쑤 성, 저쟝 성, 그리고 광둥 성까지 죽 내려가다 보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이 나오죠. 현지의 지도를 보니 대만은 중국의 성 중 하나로 표시된 걸 보고 놀라는 모습이 나옵니다. 현지인들의 인식 역시 "당연히 중국의 성(省)인 것을 무슨 소리인가?" 같은 반응입니다. 여기서 하는 말이 걸작이죠. "나도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당연히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로, 대만은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지도 못하고, 진입하려면 출입국 절차를 밟아야 하는 별개의 주권 영역입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여행은 분명 나의 한계를 깨치고, 더 나은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자전거 하나에 몸을 싣고, 나 아닌 다른 사람, 내 겨레가 아닌 이족의 생활과 풍습을 보고 더 나은 미래와 비전을 도모함은, 우리 누구라도 작은 가슴에 품어 온 하나의 소망입니다. 신중하게 쓰여진 이 책(앞부분은 2007년에 쓰여진, 즉 2007년에 답사한 기록이더군요. 그는 장장 7년 동안 자전거 하나에 의지해서 세계 일주를 마치고 이 책을 이제 펴내기 시작한 겁니다.....)을 통해, 우리는 그 대리만족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여행을 대신 떠나 주는 이찬양씨의 후속작, 정말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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