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 병법서 - 마음을 공략해 천하를 얻는 최고의 전술서 마니아를 위한 삼국지 시리즈
제갈공명 지음, 조영렬 외 옮김, 모리야 히로시 해설 / 서책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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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고 사로잡는 것이 병법의 요체라는 게 이 책의 포인트라 하겠습니다. 제갈량은 <연의>에서 신출귀몰의 반신반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충직한 공무원, 섬세한 관료형에 가까웠다는 게 정사에 나온 그의 진면목이라는 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대단히 치밀한 사고의 소유자요, 그리고 정석적인 매뉴얼(요즘 표현을 굳이 쓰자면)에 충실한 하이 레벨 뷰로크라시의 미덕을 신봉하는 인물이었지만, "임기응변"에 약하다는 게 치명적 단점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진수 개인의 평가이며, 야사에 따르면 제갈량 가문과 진수가 개인적으로 알력이 적지 않았다는 설도 있고, 이에 맞게 <연의>의 일부가 윤색, 곡해되었다는 설도 있으므로 다 믿을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건, 실제로 촉으로부터 잦은 동병으로 중원을 노렸음에도 불구, 그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촉의 국력이 위보다 현격히 떨어졌고, 가용 자원도 크게 빈약했다는 점도 고려는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이 책은 그러나 제갈량의 바로 그 장점, 즉 임기응변에 능하지는 못하더라도 결정적 시기에 큰 패착을 저지르는 과오를 면할 수 있는, 확고한 매뉴얼을 (평소의 시행착오를 통해) 완성한 후, 그에 충실히 따르며 파국을 면하는 바로 그 장점을 확연히 엿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에 나온 그 모습 그대로, 마치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제갈량의 컬러 가득한 명제와 가르침을, 이 책은 한자 원문의 소개와 더불어 우리에게 일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모든 병법의 기초임을 역설하는 그의 논지입니다. 맹자는 그의 저서 중 공손추 편에서,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는 유명한 논변을 펼친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들은 반대로 이치를 새기기 일쑤입니다. 나의 주변을 바로하지 못하고, 환경과 조건을 탓하며, 환경과 조건이 유리하게 조성되면 이번에는 천운이 좋지 못해 일을 그르쳤다는 등의 핑계를 댑니다. 거꾸로라고 봐야 합니다. 제아무리 시운이 승(勝)하고 물적 조건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측근 인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업도 전쟁이고, 수주 하나를 확보하는 것도 중원의 요충지를 누가 먼저 점령하느냐만큼 중요한 쟁탈전입니다. 이런 점에서, 亮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은 이 책은 일의 진퇴를 결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잘 일러 준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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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화 - 원형사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김용운 지음 / 맥스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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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비슷한 생김새, 피붓빛, 신장(身長)을 가지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서로 부딪히고 갈등하는 일이 잦을까요? 한, 중, 일 3국의 서로 차별되는, 그리고 많은 경우 상충하는 정서가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이 아닐까 짐작은 합니다.

 

우리 동아시아 3국은 유교 문화권이라는 점도 비슷하고, 감성이 풍부하며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그렇고, 현재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국외자(局外者)인 서양인들이 보면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도 동남아시아에 자리한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말레이시아인들이 서로 얼마나 감정이 좋지 못하며 민족 간에 분쟁이 잦은지를 접할 때마다 놀라곤 하죠.

 

냉정히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나 닮았지, 내부 당사자끼리는 엄청 이질감이 느껴지고, 닮은 듯하면서 속이 엄청 다른 것이 오히려 곁에서 더 못 견딜 일일지도 모릅니다. 환경과 섭생의 산물인 외모와는 달리, 내면의 원형적 정서는 외관을 배신하며 서로 상극의 차이를 보이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를 두고, "원형(原型)적" 정서의 차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싸움을 하고 갈등을 빚고 서로 증오하는 일이 너무 잦으면, 당사자의 생존이나 세계 평화에 큰 지장을 줍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각 민족의 마음과 생각, 지향을 구성하는 문화 원형적 요소에 눈을 크게 뜨고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 김용운 박사님은 "한국의 버트란드 러셀"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입니다. 러셀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20세기 전반에 활약한, 수학자(수학자로서의 경력이 가장 먼저입니다), 철학자, 그리고 사상가이자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한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박학다식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투옥도 겪으면서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감화하고 설득한 분이었죠, 러셀 경과 생각을 같이하는 이들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세계는 이미 지난 세기에 3차 대전을 겪고 핵전쟁의 여파로 멸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김용운 박사님 역시 수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펴시고, 기초과학의 대중화에 공헌한 대원로이십니다. 그는 일본에서 수학하고 미국에서 청장년기 연구 활동을 행한 국제적 석학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이분이 쓰신 <재미있는 수학(數學) 여행>을 읽고 기본 마인드를 다진 경험이 있어서, 박사님의 존함이 나온 모든 책들을 읽을 때 각별히 호기심과 신뢰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이 책을 읽으면서, 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신세계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아놀드 토인비의 <세계사 대계> 같은 책을 읽으면, 그 보는 시야의 웅대함과 비전의 깊이에 압도되곤 합니다. 책을 읽을 때는 각론을 세밀하게 판 전문서를 읽어 줘야 할 때가 많고, 그런 책을 읽어 내어야 뭔가 뿌듯하니 공부한 느낌이라도 들곤 하죠. 그러나 때로는 아주 높은 하늘 위에서 아래를 조감하기도 해야, 정신이 맑아지고 방향 감각을 잘 조율할 수가 있습니다. 애를 써서 한 분야를 천착하긴 하지만, 너무 좁은 범위에만 집중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게 보통이죠.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탁월합니다. 토인비도 우리 한국인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석학이었지만, 이 책은 마치 그 토인비가 잠시 한국인의 몸과 영혼과 언어와 스탠스를 빌려, 자신의 저서에 대한 동북아시아판 각론을 차분히 설명해 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박사님은 지금 치열한 대립, 소모적인 감정 싸움을 벌이는 한 중 일 3국의 갈등, 그 근원이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를 세밀하고도 거대한 스케일로 해명 해 주고 계십니다.

 

제목에 대해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풍수화는 독립 키워드 세 글자를 하나씩 따서 연결한 형태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바람 즉 風으로 대변되고, 중국인의 마음 그 원형은 물, 水이며, 일본인의 그것은 불, 즉 火란 뜻입니다. 음양오행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그 사상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본 프레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박사님은 그 중 한 글자씩만을 골라 내어, 복잡다기하고 그 깊이를 모르게 꼬이고 꼬인 동아시아인 무의식 심층 구조를, 정말 재미있게 해부해 주고 계십니다.

 

박사님은 과연 전공이 어느쪽이신가 궁금할 만큼, 역사와 언어학에 대해 탁월한 식견과 통찰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계십니다. 일단 박사님은, 백제 멸망을 확정지었던 백강 전투에서, 왜군이 패퇴하고 열도로 물러나 앉은 사건이, 이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십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본디 백제계와 신라계가 그 남부를 반분하고 있었으며, 백제계와 신라계 모두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던 것이, 당나라 세력을 등에 업은 신라가 수륙 양면에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왕실이 무너지고, 그 잔존 세력이 일본 천황가를 세워 반도에 대한 극단적 적대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긴 것도 이때 이후이며,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긴 한반도 패주사에 대해 철저히 망각하고자 정반대의 기술로 새로운 정체성을 앙양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일본서기를 두고 저자는 신화적 접근 방식으로, 저술 당시의 일본인들이 지난 역사와 앞으로 열도인들이 취해야 할 방향성이 어떠했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진구 황후가산욕을 참으며 돌로 자궁을 막고 반도에 진출하여 정벌을 마치고 귀국하였다는 대목은,  낯선 중국인들의 힘을 빌려 백제계의 토대를 말살한 신라계에 대한 적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합니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에는 두 천황가가 양립하며 남북조를 형성하고 대립한 분열기가 있었는데요, 저자는 이 역시 다이라씨(平氏)와 미나모토씨(原氏) 사이의 항쟁도, 백제계와 신라계의 싸움으로 봅니다.

 

이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게, 실제로 다이라씨의 후손을 자처한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한반도를 쳐들어 왔고, 신라계라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역사적으로는 확실치 않습니다)인 덕천가강은 조선 왕국과 화친을 꾀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하나하나 맞아 떨어지죠. 그뿐이 아닙니다. 메이지 유신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조슈 - 사쓰마 번 연합체가 일으킨 패권 전환 모멘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쪽에 웅거한 번 세력도, 알고 보면 일본 열도 서쪽에 기반을 둔 백제계의 후손이라는 거죠. 결국 백제계는 끊임 없이 반도를 적대하고, 외세와 연대하여 자신들을 반도에서 쫓아 낸 신라계에 응징을 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증적 근거를 떠나 참 재밌는 논의이며, 아귀가 척척 맞기도 합니다. 중일전쟁 등 일제의 대륙 침략도 백강 전투 괴멸의 분풀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하겠네요.

 

박사님은 이처럼 고대사에 대한 개관을 마친 후, 언어적 탐구를 통해 2라운드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반도인들이 쓰던 언어는 "가라어"라는 게 있었는데, 이를 반영한 게 향찰 문자이며, 가라어의 원형을 계승하고 향찰을 개량한 게 가나라는 주장입니다. 재미있는 건 가나가 고안되기 전 쓰이던 만요 문자(만엽집에서 쓰던 문자)를 보면, 이 가라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는 건데요. 가나가 쓰이고 나서는 역으로 문자 언어가 음성언어를 규제하는 일이 벌어져, 현대 일본어는 가라어 원형에서 거리를 두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말은, 한자어의 대대적인 침투로. 가라 어 원형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게 바뀌고 말았구요.

 

일본 학자들이 <만엽집>을 해석할 때 애로를 겪거나 "알 수 없음"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대목은, 바로 이 가라어라는 유용한 도구를 적용할 때 바로 해결이 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자가 대단히 안타까워하는 대목은, 일본인들의 한반도 컴플렉스, 즉 "우리는 저 반도인들과 아무 관계 없어!' 같은 열등 강박 때문에, 분명히 보이는 해답도 애써 외면하며 먼 길을 우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천 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난제를 내(저자 김용운 박사님 자신)가 풀 수 있었던 건, 바로 한국어와의 연관성에 처음부터 주목했기 때문"이라고도 적고 있습니다. <만엽집>의 해석은 예전에 이영희라는 수필가가 조선일보에 성적 담론으로 일관한 해독을 장기간에 걸쳐 연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요. 저자는 그 일에 대해서도 실명 거론 없이 잠시 언급을 합니다. 참고로 이것 관련해서 저자분은 좀 특이한 이력을 갖고 계시기도 한데요. 혐한 중상 모략이 요즘에만 있는 게 아니라서, 1970년대에 한국인을 가장한 익명의 저자가,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헐뜯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자신의 명의로 그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는 주장을 정리해서 대응한 분이 바로 이 김용운 박사님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도 그에 대한 회고가 있습니다.

 

박사님은 한국어에 대해서도 신선한 분석과 시각을 내어 놓습니다. 저는 예전에 재미 음악인들이 "한국어는 받침이 많아서 음에 가사 달기가 어렵다"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요즘은 랩 때문에 오히려 유용하다는 평가를 듣죠). 과연 일어나 중국어(관화 보통어 기준)에는 받침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본디 가라어는 받침이 거의 없고, 이런 종성의 보편적 확산은 한자어를 수용하며 이뤄진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럼 현대 북경어에 받침이 거의 없는 이유는 뭔가(광둥어는 그렇지 않거든요). 이는 언어의 간이화라는 대세를 겪기도 했고, 저자도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는 아니라도) 은근 암시하는 대로, 몽골 족의 침략을 대거 겪고 나서 남은 흔적이라는 겁니다. 몽골 역시 우리와 형제뻘인 알타이 어족이므로(논란이 있는 이슈지만 일단 저자의견해를 따릅니다), 받침이 없는 원형을 그대로 간직했기에 가능하죠.

 

이 다음부터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한중일 삼국의 민족성 분석입니다. 일본인은 원수를 곁에 두지 않고, 자기가 죽든가 철저히 복종하든가 둘 중 하나이며, 한국인은 "두고 보자"는 태도이고, 중국인은 대륙 문화에의 장기적 흡수로 이를 해결한다는 거죠. 대담한 도식화를 열 두어 가지 토픽에 대해 시도하고 있는데, 하나 하나 읽어 보면 공감이 가면서도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유교에 대해서도, 일본인은 열도의 체질에 맞게 변형하고, 중국인은 실용적으로 융통성 있게 활용하며, 우리 한국인만 별나게 원리주의적 집착을 보인다는 겁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이 책에는 왜 유독 한국인만 평등주의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도 이른바 "문화적 원형"에 의한 재미있는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근래 우리 주위(특히 수도권이라면)에서 자주 마주치는 게 중국인이고, 그런 중국인들의 특이한 습성을 본 이들이라면 정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간결체 문장(석학 중에서는 드문 개성이죠)을 구사하셔서, 독자가 읽기 편하다는 것도 마음에 들더군요.

 

저자는 결론적으로, 중국인은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문화적 원형(저자의 시각에 따른)을 동원한 체계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날마다 긴장이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볼 때, 저자의 이런 진단은 의미심장합니다. 저자는 우리 민족의 특성에 대해, 종족적 개성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으나, 한 중 일 삼국 중 단연 높은 수치로 "보편 문화를 지향"하는, 매우 바람직한 성향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써, 한국이 동아시아 중심, 벨런서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해야, 항구적인 평화가 자리핳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일본인에 대해서는, 애써 왜곡된 정체성으로 반도인을 경원, 적대할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응시할 것을 권합니다. 이는 "일선동조론"이나 "만선사관" 따위와는 달리,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에 매우 중요한 인자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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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기계 시대 - 인간과 기계의 공생이 시작된다
에릭 브린욜프슨 & 앤드루 맥아피 지음, 이한음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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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참신하고 획기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접근 방식이냐면, 책이 주제로 삼고 있는 대단히 심각한 이슈에 대해서입니다. 그 이슈가 무엇이냐면, 바로 최근에 심화되어 모두의 이마에 깊은 주름을 남기고 있는 "불평등"입니다.


"불평등"이란 체제의 근본 모순에 대해 우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이의 심각성과 원인, 나름의 처방에 대해 저명한 학자, 전문가들은 한마디씩 하려 듭니다. 그런 저자들 중에서서는 최근 전지구적으로 단연 큰 화제가 된 토마 피케티가 있었지요. 그가 기존 경제학이 발전시켜 온 tool만을 활용하여, 다른 누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던 기발한 논증으로 이 분야 담론의 신기원을 이뤘다면, 브린욜프슨, 맥아피(기업용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창업주와는 무관합니다) 등의 공저자들은, 문명사관, 혹은 과학사가(史家)의 입장에서 해답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

경제사 공부할 때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들어 보셨을 겁니다. 산업 혁명 당시 기계와 공장제 시스템이 급속히 확산되자, 길드에 소속된 장인이나 독립 숙련공들은 자신 또는 자신의 가문이 배타적으로 보유하던 일자리가 축소되거나, 이를 상실했습니다. "루드 장군이 배후에서 이를 지휘하신다"는 가공의 믿음 하에, 이들은 공장주가 보유하던 기계와 설비를 파괴하는 대규모의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근현대 들어서 제도적으로 보장 받고 있는 노동자 파업과는 다른, 생존권의 보장과 경제인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양상이었는데요.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생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극복이라는 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 저자들은 오늘날의 불평등 심화 현상과 긴밀한 역사적 연계를 찾습니다. 저 시기에도 시스템은, 일찍이 존재한 적 없던 이노베이션을 통해 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을 겪습니다. 생산성이 혁명적으로 개선되었다 함은, 분배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사회 전체의 복리 향상으로 이어지는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여기서 분배의 문제라면, 세습적 특권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결국은 공동체 보편의 잉여 증가로 필연적 귀결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생산성 증가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최초 혁신자 - 극소수이겠지요-의 손에 쥐어진 엄청난 규모의 부(富)가, 언제쯤에나 보편적 풍요를 달성할, 아니 체감할 만큼, 빠른 순환이 이뤄지느냐에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최초 혁신자-다시 강조하지만 극소수입니다- 가 결과적으로 빼앗아 간 숱한 일자리, 이 때문에 당장 생계를 위협받기까지 하며 한계 상황에 내몰리거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될 평범한 노동자들은, 뚜렷이 감소한 share가 가져다 주는 궁핍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급작스러운 불평등의 심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특이점적 혁신(레이 커즈와일의 규정입니다)을 맞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박에서 기인한 희비극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산업 혁명 당시, 경이적인 생산성의 증가는 보편 대중의 편익과 풍요에 분명 유의미하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광공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나, (앞서 언급한) 숙련공들의 몰락은, 당사자들이 어디서도 보상 받을 수 없는 시대적 비극이었습니다. 최근 물꼬 터지듯 각 산업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신의 대열을, 두 손 들고 환영할 수만은 없는 게 이런 딜레마에 기인합니다.

이 책 전반부는 우리 조상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규모와 파장의 기술적 혁신에 대해, 전문가들의 눈썰미를 발휘하여 예리하게도 하나하나 짚어 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무어의 법칙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모바일 혁명까지, 발전과 발견 그리고 그 모두를 뛰어넘는 혁신은, 과거 쿠즈네츠가 지적했듯 최장주기를 지닌 간헐적 이벤트가 아니라, 이제 대세와 추세가 되어 버린 일상 환경, 상수적 팩터의 위상입니다. 이제 눈만 뜨고 일어나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새로운 진보가 어엿한 현실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진보가 왜 모두에게 희소식이 되지 못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입니다. 어느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나면, 전통적 방식으로 그 분야 생산에 참여하던 이들은(노동자이든 화이트컬러이든 무관하게) 종래의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평생 직장의 신화가 무너지고 40대의 나이에 직장에서 몰려 목 좋은 치킨집 개업을 알아 봐야 하는 건, 그나마 요식배달업에서는 최초 부가가치 창출 단계에서 혁신이 더디므로, 낮은 진입 장벽으로 인한 무한 경쟁이라는 요소(이게 더 무서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외에는 아직은 기술적 위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운(?) 기술 진보와 혁신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저자들의 인상적인 인용을 다시 적어 보자면, "인류의 최대 약점은 지수함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수함수는


이런 모양인데요. 생략한 더 오른쪽의 형태는 거의 수직 상승이라 할 만큼 경사가 가파릅니다. 저 역시 인류의 약점을 그대로 공유한지라, 무의식 중에 저렇게 상대적으로 평탄한 부분만 그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증가하다가 어느 순간 지금까지의 추세를 모두 무시하겠다는 듯 급격히 상승하는 이런 패턴을, 선형적 사고에만 길든 우리들은 이해 못한다는 뜻입니다. 100을 2로, 10000를 4로 치환하는 로그의 도입이 수학자 네이피어에 의해 이뤄지고 나서야, 우리는 지수적으로(exponentially) 증가하는 추세의 공포와 위력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이 누구보다 앞서 지적했지만, 우리는 지금 이 같은 혁신의 폭포, 위험하기끼지 한 이노베이션의 홍수 속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커즈와일이 문명사관적 혁신의 기술적 측면에 주목했다면, 이 저자들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필연적인 불평등 추세에 대해 날카롭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두 가지 효용을 가집니다. 1)우리가 직면하게 될 기술 진보가 어떤 추세적 패턴을 지니고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예견 2)이 불평등의 암울한 물결은 과연 언제 진정되기나 할지의 추측. 저자들은 다양한 논의와 논거들을 분명하고 유용한 프레임에 맞춰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현명한 독자는 그로부터 자신에 필요한 통찰을 알뜰하게 챙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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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4-12-2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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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람 인수대비 - 상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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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깨닫게 된 바는, 수양대군 세조로부터 시작된 비정통 차자(次子)의 왕계가 이뤄 낸 역사에, 이처럼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도 꿰어져 등장하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걸출"하다는 말은 반드시 긍정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한명회 같은 이도 나쁘게 보면 간신이자 정상배였지만, 아직 그 건국의 기반이 내내 튼튼하지만 않았던 조선 초기에, 각종 행정 수완을 발휘해서, 시스템상으로 흔들리지 않는 펀더멘털을 형성한 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는 어떻습니까? 아무도 왜구의 발호를 국제정세적 주요 변수로 간주하지 않을 무렵 "거리가 가깝고 인구 수가 많으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니 화친하며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그의 저서 <해동제국기>에서 선구자적 안목으로 적어 둔 바 있는 경세가였습니다.

세조의 아들이자 소혜왕후의 부군이었던 의경세자가 낳은 아들이 성종이었는데, 묘호가 성종인데에서도 알 수 있듯, 할아버지가 시작한 국체(國體)의 공사를 튼튼히 마무리한 이가 바로 9대 임금인 그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감상적으로 봐 주자면 비운의 군주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이었습니다.

고려 때에야 신하에 의한 폐립이 잦았지만, 확고한 유교 통치 이념이 정착한 후로는 극히 드물게 보는 일이 소위 "반정"이었는데요. 단 두 명의 폐출 군주 중 하나가 이 연산군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큰 정변을 겪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위화도 회군에 이어진 우왕 폐위는 얼마 가지 않아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졌죠), 오히려 중앙 집권을 더 강화하며 확고한 농민 장악과 수취 체제의 완결에 성공했던 게 바로 이 시기의 모습입니다.


 


이 책은 바로, 조선 시대의 척추에 해당하는 세조 말년~ 연산군 시기의 모습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하고 있는 책입니다. 보통 소설의 포맷이라면 작가의 과도한 상상력이 끼어들어 정사(正史)의 이해에는 방해를 끼칠 수도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대중서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왕실 세계도와 각종 자료를 풍부히 집어 넣어, 본문 이해가 어려울 때마다(이 왕족이 누구의 몇째 아들이던가?) 수시로 참조할 수 있게, 독자의 편의를 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용한 사료가 많이 삽입되면 딱딱한 학술서가 아닐까 선입견을 갖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설처럼 술술 읽힙니다. 정사의 정연한 체제와 팩트 사항은 그것대로 담고, 다만 문제가 격의 없이 물 흐르듯 읽히는 게 소설의 맛은 그것대로 살렸습니다.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우수한 매력입니다.

최근의 소설은 지나치게 현대어를 자주 삽입하여, 지난 시대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독자의 머리 속에 피어오르게 하는 일에 실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저 생경함이 적어서 좋을지 몰라도, 월탄 박종화 같은 정통파 역사소설 작가의 고풍스러운 필치에 맛을 들인 독자에게는 그런 시도가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죠.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스러운 어휘가 적재적소에 쓰이고 있어, 시대물의 참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줍니다. 또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은, 이야기가 시대순으로 기계적인 서술을 따르지 않고, 저자분께서 상상의 방향이 옮겨가는 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을 취하고 있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이 책은 컬러 사진이 유독 많습니다. 종이 질도 최상급입니다. 이런 책 중에 이처럼 편집과 외관에 큰 공을 들인 경우는 좀처럼 보지 못했을 정도였어요. 책값이 좀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제값을 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표지에 나온 것처럼 수능에 과연 도움이 될까요? 최근 출제 경향은 단편적 사항 암기를 테스트하지 않고, 문헌이나 사적을 원형 그대로 제시하여 시대 속성의 정확한 이해에 성공했는지를 묻는 문항이 많다고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사진과, 풍성한 배경 설명은 역사의 입체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오타가 (이렇게 미려하게 편집된 책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 등장하고, 예컨대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데려가겠다."며 문종비가 세조의 꿈에 등장한 후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단종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야사에 가깝습니다. 아쉬운 점도 적잖게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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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4-12-2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미치광이 예술가의 부활절 살인 - 20세기를 뒤흔든 모델 살인사건과 언론의 히스테리
해럴드 셰터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예술가란 그 정신의 일면에 반드시 광기를 잠복시키는, 서글픈 운명의 소유자여야만 할까요? 그저그런 성취와 재능의, 대중영합적 예술가 부류를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분은 예술보다는 비즈니스나 정치를 했어야 옳았다." 싶은, 누구의 원한도 사지 않고 누구에게나 환심을 얻어낼 수 있는 처세의 달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류의 예술혼과 불멸의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라면, "아니 굳이 저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만큼, 자신의 주변과 잦은 충돌을 빚습니다. 피카소만 해도 싸움질하다 무의미하게 흘려 보낸 청춘의 시간이 많았고, 빈센트 반 고흐는 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체 자해까지 서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성질 좀 죽이고, 그렇게 생긴 여유로 작품 창작에나 더 열의를 쏟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절로 일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또 그렇게 되기가 힌힘든 모양입니다. "난 네가 너무 싫어! 이건 보기 흉해! 저건 미적으로 무가치하다고!" 그때그때 정직한 영혼의 표백을 직설적으로 해 주지 않으면 영혼에 곰팡이가 슬어서, 신이 자기에게 부여한 그 모든 영감과 재능이 손상되기라도 하듯 여기나 봅니다. 안 그렇고서야 그리 과격한 모습을 보일 리 없죠.

이 논픽션의 주인공은 로버트 어윈이라는 젊은이입니다. 대공황 시기에 살았고, 직접 저지른 사건 때문에 당대에 큰 화제가 되었던 실존 인물입니다. 그를 당시에 보았고 부대꼈으며 직접 사귀기도 했고(유난히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 증언합니다. 그만큼 일단 개인적 매력이 넘쳤다는 증거입니다). 심지어 그에게 큰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상처를 입은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재능이 분명 넘쳐났는데, 그 재능을 하나도 꽃피우지 못하고, 역사에 남을 범죄자로만 이름을 높인, 진정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조우한 누구라도, 일단 그 불 같은 정열과 조각처럼 빚어진 단아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리 보기 드문 예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진짜 천분은 조각하는 재능에 있었습니다. 이는 당대 일류 조각가들이나 평론가들이, 그의 손놀림과 작품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인정한 바라, 그가 예술사에 이름을 올려 놓지 못했다고 해서 쉽게 무시할 일은 아니겠습니다.

이 책 서두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는 장소적 배경은 "빅맨플레이스"입니다. (철자는 Beekman place입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하신 독자를 위해 적어 놓습니다) 서두에도 자세히 나와 있고, 역자 후기에도 그런 취지로 되풀이되는 서술이 있습니다만, 한때 빈민가로 위상이 굳었다가 이후 몰아닥친 호황의 붐에 힘입어 고급 주택가로 거듭난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상계동이나 용산 일부가 이에 해당하겠구요. 저자는 당대에 큰 화제가 되었던 이 범죄 사건을 두고 그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하려는 듯한 의도를 책 곳곳에서 노출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단순화, 혹은 일반화가 쉽사리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너무도 충실히, 연대기적으로 수집하고 복원한 이 책의 전 체계로부터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사건은 단지 한 지역의 시대적, 경제사적 특징이 빚어낸 비극은 아닙니다. 일차로는 한 개인의 유전적 질환이 큰 동인으로 작용한 비극이요, 다음으로는 인간의 얼굴을 오래 전에 도랑 밑으로 떨구어 버린 비정한 미국 자본주의가 주조한 괴물, 바로 젊은 로버트 어윈이 주연을 맡은 참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아메리카의 비극"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 그 넓은 미국 땅 중 안 나오는 데가 없을 만큼 대서양에서 태평양, 중서부에서 딥 사우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지명이 구석구석 언급됩니다. 배경으로 단지 그치는 게 아니라, 로버트 어윈이 그 배경을 자기 행동과 생각의 자양으로, 장애물로, 화려한 무대로, 그리고 범죄의 기반으로 충실히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숨길 수 없는 끼와 재능, 그리고 격정으로 뭉친 사내아이로, 주위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얼굴도 잘생겼는지 가는 곳마다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고, 동성애자와 질 나쁜 남성 불량배로부터도 달갑지 않은 접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의외로 겁이 많았는지 성 경험은 미국 표준으로 대단히 늦은 21세때가 처음이었고, 그것도 매춘부하고의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자기애가 강한 타입은 보통 (아무리 급해도) 매춘부를 상종하지 않는데, 이런 걸 보면 자기 존중감이 약한 구석도 있었나 봅니다. 처신 반듯한 여성을 꼬시려면 품고 있는 화제가 많아야 하고, 그 세계관이 보편 지향이라야 하는데, 아마 어윈은 그런 점에서도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어윈은 아주 골빈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층민 출신으로 고르게 지성이 발달하지 못한 유형이 흔히 그렇듯(다른 예로는 히틀러가 있죠), 편향된 지식을 머리에 집중적으로 몰아 넣고, 제 3의 가능성 없이 선과 악, 흑괴 백으로 세상을 이원화하여, 충분한 근거 없이 폭주하는 성향이 뚜렷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세계관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악으로 쉽게 단정합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재능까지 부족하거나 외적인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상황에 따라 유력자에게 떳떳지 못한 방법으로 영합하는 모습(매춘이라든가)을 보이기도 합니다(참으로 표리부동한 성격이죠). 로버트 어윈은 정반대로, 도무지 타협이라는 걸 모르는 외골수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는 진정,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싸우고 다투었습니다. 타고난 완력도 센 편이었는지, 그는 싸울 때마다 상대를 다 때려 눕혔고, 그래서 피해자로 둔갑하여 시스템의 비호를 받는 일도 전무했습니다. 그는 검사나 의학 전문가들로부터 "충동 조절 장애"라는 거의 일치된 진단을 받고, 정신 병원이나 교화학교에 수용되는 일로 청춘을 다 보내다시피했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근 80년 전의 미국이 이처럼 사회 방위 시스템(이런 시설은 우선 환자-죄인을 배려함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를 그 비정상 행위자로부터 지키기 위함이기도 합니다)이 잘 갖춰져 있구나 하는 감탄이 들기도 했어요. 여기에 나오는 갖가지 시설, 학교, 정신병원(진짜 이 책은 정신병원 교도소 교화시설 백과사전 같습니다. 안 나오는 이름이 없어요^^) 중에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위디어 학교(책에는 "위티어"라고 적혀 있습니다)가 있는데요. 그 근방에 같은 이름의 위디어라는 로스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곳에 출장차 가봤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로스쿨은 사실 미국에 있는 동종학교 중 삼류에 속하는 곳인데, 여기가 왜 유명하냐면, 바로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이 이곳을 졸업하고 변호사, 상원의원, 부통령, 그리고 대통령까지 당선된 신회를 이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닉슨은 탄핵의 흑역사가 있고, 여긴 여전히 삼류 로스쿨의 멍에를 못 벗고 있죠.

로버트 어윈은 조각 실력도 뛰어났고, 잘생긴 외모로 가는 데마다 인기를 끈 대단한 매력이 있기는 했나 봅니다. 그가 한때 사귈 뻔했던 여성 중에는, 나중에 큰 인기를 끈 연예인이 되거나, 될 뻔한(왜 되지 못했냐면, 바로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도 있고, 알고 지냈던 동생뻘 후배 중에는, 이수르 다니엘로비치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유태계 러시아 이민의 후손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당대 최고의 남우로 인기를 모았고, 할리웃에서 인맥, 돈줄로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던, 커크 더글라스(이 사람은 빈센트 반 고호 역을 영화-1956년작 러스트 포 라이프. 한국어 제목으로는 "열성의 랩소디"입니다-에서 맡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원초적 본능'에 나온 마이클 더글라스의 아버지이기도 하죠. 아무튼 이 책은, 마치 솜씨 없는 작가가 이야기만 잔뜩 부풀리게 위해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처럼, 믿을 수 없이 다양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점철된 인생을 산 어느 불쌍한 젊은 범죄자의 사연입니다.

누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이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활화산과도 같았던 열정을 품고 산 가능성의 총체를 곁에서 잘 보살펴 주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전혀 터무니없는 예상은 아닌 것이, 서양 역사를 보면 "이런 사람도 위인의 범주에 드나" 싶게, 충동과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빚은 이가 많았습니다(동양에는 이런 예가 잘 없죠). 그런 이들과 이 로버트 어윈은 종이 한 장 차이의 궤도를 걷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환경이 불우하여 어떤 이는 희대의 범죄자, 광인으로 남았을 뿐이었겠죠. 책 읽는 분들이 조심하셔야 하는 게, 잔인한 묘사가 많습니다. 역자는 재미를 위해 "셀프 거세"라는 표현을 자주 적고 있는데, 남자들에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효과를 내는 게 바로 "거세"일 것입니다. 해당 대목을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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